박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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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서보는 대한민국의 화가로, '한국 단색화의 대부'이자 '한국 아방가르드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1931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 현대미술을 이끌었다. 1950년대 후반 앵포르멜 미술을 시작으로, '원형질', '유전질' 시기를 거쳐 1967년부터 반복적인 선 긋기를 통해 '묘법' 연작을 전개했다. 그의 작품은 국내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23년 92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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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서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본명 | 박재홍(朴在弘) |
| 출생일 | 1931년 11월 15일 |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천 (일제강점기) |
| 사망일 | 2023년 10월 14일 |
| 국적 | 대한민국 |
| 배우자 | 윤명숙 (1958년 결혼) |
| 웹사이트 | GIZI 재단 |
| 활동 정보 | |
| 분야 | 시각 예술 |
| 사조 | 단색화 Dansaekhwa (영문) |
| 대표작 | 묘법(描法, Ecriture) |
| 교육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
| 수상 | 금관문화훈장 수훈 |
2. 생애
1954년 학교 동기들과 광주 육군보병학교에 입대해 장교 훈련을 받았으나, 모집 당시 약속과 달리 육군이 졸업식장에서 수료생들을 현역으로 바로 끌고 가자 동기 이원용과 함께 졸업식에 불참했다. 친구 맹인재가 지어준 호 수헌(樹軒)과 서보(栖甫)를 나눠 가진 뒤 1955년부터 본명을 버리고 새 이름으로 생활했다.[35] 1961년 박서보와 같은 처지의 보병학교 수료생들이 정부를 상대로 집단 소송을 걸어 전원 제대 통지를 받았다.[35]
1956년 이봉상 선생의 이름을 빌려 이봉상회화연구소를 운영했고, 1957년부터 1960년까지 현대미술가협회(현대전) 동료들의 아지트로 활용되었다.[36] 1958년 12월, 이곳에서 만난 아내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1962년부터 1997년 정년 퇴직까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재직했다. 1970년대에는 한국미술가협회 부이사장 및 이사장을 역임하며 현대미술 운동을 이끌었다. 1980년대 안성군 공도면에 작업실을 마련했으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장 재직 중 학생운동과 교내 시위로 인해 학교 일에 매여 안성 작업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서울에서만 작업하는 동안 안성 작업실은 여러 차례 도둑이 들었고, 1996년 침입한 청년들의 방화로 많은 작품이 소실되었다. 특히 초기 묘법 작품들이 이때 상당수 사라졌다. 1997년 마포구 성산동에 새 작업실을 짓고 1994년 설립한 재단법인 서보미술문화재단 사무실을 이전하여 현재까지 운영 중이다.
1994년 심근경색, 2009년 뇌경색으로 쓰러졌으나, 꾸준히 작업하여 2015년 '단색화 열풍'과 함께 해외에 알려졌다.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회고전을 열었고, 같은 해 후진 양성을 위해 [https://www.gizifoundation.org 기지재단](2023년 [http://parkseobofoundation.org 박서보재단]으로 명칭 변경)을 설립했다.
2023년 10월 14일, 92세로 타계하기 전까지 "작업실에 캔버스를 배접 해놔라"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작품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30][31][32]
2. 1. 초기 생애 (1931-1950)
1931년 11월 15일 경상북도 예천에서 4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했으며, 부친이 대서소 일을 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성장했다.[33]
1950년 홍익대학 문학부 미술과에 동양화 전공 2기로 입학했다. 당시 동양화 전공 교수로는 청전 이상범과 고암 이응노가 있었다. 하지만 바로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전쟁 중 부친이 갑작스레 병사했으며, 박서보는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되어 피난민 행렬을 따라 홀로 남으로 내려가야 했다.[34]
2. 2. 홍익대학교 수학과 한국전쟁 (1950-1955)
1950년 홍익대학 문학부 미술과에 동양화 전공 2기로 입학했다. 1949년 용산구 원효로의 흥국사라는 절 부근에서 문을 열었다. 당시 동양화 전공 교수로는 청전 이상범(1897~1972)과 고암 이응노가 있었다.[34] 하지만 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전쟁 중에 부친이 갑작스레 병사했으며, 박서보는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되어 피난민 행렬을 따라 홀로 남으로 내려가야 했다.[34] 부산으로 내려간 홍익대학 전시학교에 찾아갔을 때는 동양화 교수들이 전쟁 중에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서울대를 나와 홍익대학으로 온 김환기(1913-1974) 교수와 이종우(1899~1981) 교수가 서양화 교수로 있어 박서보는 전공을 바꿔 1952년 다시 2학년으로 등록했다.[34] 1953년 휴전이 되고 환도 후 홍익대학 미술과는 서울 종로의 화신백화점과 YMCA 사이에 있던 장안빌딩 뒤 창고 건물로 옮겨왔다.[34]2. 3. 이봉상회화연구소와 현대미술가협회 활동 (1956-1960)
박서보는 1956년 홍익대학교에서 만난 이봉상 선생의 이름을 빌려 이봉상회화연구소란 이름의 화실을 운영했다. 이곳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그가 그룹전을 함께 한 현대미술가협회(현대전) 동료들의 아지트로 활용되기도 했다.[36] 그는 이 연구소에서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 1958년 12월에 결혼했고,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박서보는 서울 안국동에 있는 이 연구소에 합류했다. 방근택, 김창열, 하인두와 같은 예술가들이 이 연구소를 자주 찾았으며, 이들은 함께 "안국동 화파"로 알려졌다.
1957년, 박서보는 김창열, 장성순, 하인두, 김서봉 등의 작가들이 속해 있던 현대미술협회(Contemporary Artists Association)에 참여했다. 미술사학자 김영나는 이 그룹을 한국 아방가르드의 2세대라고 규정하며, 그 이전 세대인 김환기와 문학수 등의 작품이 주로 일본의 예술 경향에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한다. 반면, 젊은 세대의 작가들은 유럽과 미국의 미술 세계를 지향했다.[3] 이들 중 다수는 광복 이후 설립된 미술 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세대에 속하기도 했다.[3]
한국 앵포르멜에 대한 유럽에서의 정보와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미국에서의 정보가 한국에 제한적으로 유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가협회 소속 작가들은 한국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했다. 박서보는 한국 앵포르멜 운동과 해외의 그것 간의 연관성을 거부했지만,[4] 김영나는 형식적인 유사성이 미술사학자들과 비평가들이 둘 사이에 맺은 관계를 정당화한다고 주장한다.[3]
1958년 제3회 현대미술전에서 선보인 박서보의 《회화 No. 1》(1957)은 현재 한국 앵포르멜 미술의 첫 작품으로 여겨진다.[5]

박서보는 현대미술협회에 합류하면서, 협회의 전시회인 현대미술전(''현대전'')에 참여함으로써 국전에서 벗어났다. 1958년 5월 15일부터 23일까지 화신갤러리에서 열린 제3회 현대미술전에 '회화 1호' 등으로 연작 제목을 붙인 7점의 그림을 출품했다. 이 중 첫 번째 작품이 현재 전시회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작품이다.[3] 김영나는 1957년에 그려진 이 연작을 박서보의 화풍이 구상에서 벗어나는 주요한 변화의 지표로 본다.[3]
1958년 11월 28일부터 12월 8일까지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제4회 전시회에서 박서보가 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사진이 ''한국일보''와 ''The Korean Republic''과 같은 신문에 실렸다. 그러나 이후, 협회 일부 회원들은 박서보를 비판하고 그를 그룹에서 제명하기로 투표했다.[3]
제6회 전시에서 박서보는 협회가 정부에 해외 전시를 희망하는 한국 작가들을 지원하고,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관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도록 요구할 것을 제안했다.[1] 그는 자신이 해외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자, 한국 미술계의 국경 확장을 지속적으로 옹호했다.
1960년 8월부터 박서보는 《동아일보》에 글을 기고하며, 잭슨 폴록, 장 뒤뷔페, 로베르토 크리파, 한스 하퉁, 조르주 마티외 등 유럽과 미국의 주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2. 4. 홍익대학교 교수 재직과 미술행정 활동 (1962-1997)
1962년부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강사로 시작해 1997년 정년 퇴직할 때까지 회화과 교수로 재직했다.[34] 1970년대에는 한국미술가협회의 부이사장 및 이사장을 역임하며 현대미술 운동도 적극적으로 펼쳤다.[34] 1980년대에는 안성군 공도면에 작업실을 짓고 작업에만 매진했으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장으로 있을 때 학생운동과 교내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나자 학교 일에 붙들려 더 이상 안성 작업실에는 내려가지 못했다.[34]서울로 돌아온 박서보는 1962년 모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964년에 조교수로 승진했지만, 1967년에 사임했다.[1] 이후 다시 홍익대학교로 돌아와 1985년부터 1986년까지 산업미술대학원 원장을, 1986년부터 1990년까지 미술대학 학장을 역임했다.[1] 그는 2000년 홍익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서보는 한국미술협회 국제분과 부회장(1970–77)과 회장(1977–1980)을 역임하면서, 신진 실험 미술가들의 경력을 시작하고 전위 예술가들이 국제 미술계에 진출하는 데 필요한 가시성을 제공하는 대규모 실험 미술 전시회를 조직할 수 있었다.[11]
2. 5. 후기 생애와 타계 (1994-2023)
1994년 12월, 박서보는 64세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졌고, 2009년 11월에는 79세에 뇌경색을 겪었다.[30][31][3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작업을 이어갔으며, 2015년에는 소위 '단색화 열풍'을 통해 해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2019년 5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89세에 생애 두 번째 회고전을 개최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후진 양성을 위해 [https://www.gizifoundation.org 기지재단]을 설립하였고, 이 재단은 2023년 3월에 [http://parkseobofoundation.org 박서보재단]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1980년대, 박서보는 경기도 안성시 공도면에 작업실을 짓고 작업에 매진했으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장 재직 시절 학생운동과 교내 시위로 인해 학교 일에 묶여 안성 작업실에 자주 내려가지 못했다. 서울에서만 작업하던 중, 관리가 소홀했던 안성 작업실에는 여러 차례 도둑이 들었고, 1996년에는 동네 청년들의 침입으로 인한 화재로 많은 작품이 소실되었다. 특히 초기 묘법 작품들이 이때 상당수 사라졌다. 1997년, 박서보는 마포구 성산동에 새로 지은 작업실로 1994년에 설립한 재단법인 서보미술문화재단 사무실을 옮겨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2023년 10월 14일, 박서보는 91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으며, "내가 해야 할 것이 있으니 작업실에 캔버스를 배접 해놔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30][31][32]
3. 작품 활동
박서보는 1950년대 중후반부터 화단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미술계의 주요 등용문이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의 문제점에 반발하여 1956년 반(反)국전을 선언하고 동방문화회관에서 독립전을 열었다. 1957년에는 김창열, 하인두 등과 함께 현대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현대전에 참여했다.
1958년 제3회 현대전에서 박서보의 <회화 No.1>이 출품되면서 한국에 앵포르멜 미술이 시작되었다. 박서보와 현대전 동료들은 추상표현주의를 혼합한 추상회화를 통해 전위적 활동을 이어갔다. 한국 앵포르멜은 제한적인 정보 유입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가협회 작가들이 주도했다.
1961년 유네스코 산하 국제조형예술협회의 파리 세계청년화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한 박서보는 파리 체류 기간 동안 작업에 변화를 겪었다. 귀국 후 원형질 연작에서는 오브제를 태워 화면 위에 형태를 쌓고 깎아내거나 마대를 붙여 마티에르를 주는 방식을 사용했다.
1963년 제3회 파리 비엔날레, 1965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여했다. 1961년 파리에서 돌아온 후에는 어두운 색채의 "원형질" 연작을 제작했다.
1960년대 후반 유전질 작업은 기하학적 추상과 오방색을 활용하며 전통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이후 팝아트적인 색채와 에어 스프레이 기법을 사용하며 서구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 한국관에 설치된 허상 작품은 조지 시걸의 영향을 받은 일상성을 반영했지만, 반정부적으로 해석되어 철거되었다.
유전질 시기 중 아들의 낙서에서 착안한 반복적인 연필 긋기 작업을 시작했다. 1967년 첫 작품은 캔버스에 흰 유화물감을 바르고 국어 공책의 방안지를 모방한 네모 칸을 연필 긋기로 채웠다. 이후 올오버 페인팅이 탄생했고, 1969년 이우환의 제안으로 도쿄의 무라마츠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 시리즈에 묘법이라는 제명을 붙였고, 롤랑 바르트의 <0도의 글쓰기>에서 영감 받은 Écriture프랑스어를 외국어 제목으로 채택했다.
1982년 한지의 물성을 발견하면서 후기 묘법을 시작했다. 한지의 특성을 통해 한국인의 자연관을 드러내고자 했다. 1982년부터 1993년까지는 '지그재그' 시기, 1994년부터 2004년까지는 '블랙 앤 화이트' 시기로 불린다. 2000년부터 다양한 색상을 사용하며 "그림은 치유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3년 국제 종이 컨퍼런스에서 한지를 사용한 작업에 대해 이야기했고, 1990년대에는 흑백 팔레트를 사용했다. 이후 밝은 색채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과 평온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2015년부터 단색화 열풍과 함께 해외의 주목을 받았다.[49]
3. 1. 초창기 (1950년대 중후반)
박서보는 1950년대 중후반부터 화단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미술계 유일의 등용문이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속칭 국전)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미술계의 반목과 편 가르기, 기득권 챙기기 양상을 보여주었다.[37] 박서보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기 전인 1954년에 이미 제3회 국전에 출품하여 입선했고, 졸업 직후인 1955년에도 제4회 국전에 출품해 입선했다. 하지만 전쟁을 겪은 젊은 박서보는 기성세대에 대한 강한 저항감으로 1956년 반(反)국전을 선언하며 홍대 동문인 문우식, 김충선, 김영환과 함께 동방문화회관에서 독립전을 열었다. 1957년에는 김창열, 하인두, 장성순, 김서봉, 김청관, 라병재, 조동훈, 이철 등이 만든 현대미술가협회에 합류했고, 이후 현대전이라고 불린 그들만의 그룹전을 2회부터 6회(1960년)까지 5회를 제외하고 연달아 참여했다.1958년 화신백화점에서 열린 제3회 현대전은 한국에 앵포르멜 미술이 시작된 기점으로 미술사에서 자주 언급된다. 박서보의 <회화 No.1> 출품 때문이다. 같은 해 열린 제4회 현대전에서는 이른바 비정형이라고 하는 유럽의 앵포르멜과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를 혼합한 추상회화가 전면적으로 부상된다.[38] 박서보와 현대전의 동료들은 "스스로 첨단을 걸으며 전위를 부르짖고 비형상주의를 자처하는 젊은 세대의 전위적 활동"에 매진하게 되고,[39] 이후 몇 년 간 그들의 앵포르멜적 행보가 지속된다. 박서보와 현대전 동료들의 초창기 작품들은 전후 사회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보존되지 못해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데, 박서보의 초창기 작품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 중에는 <양지(陽地, Sunny Spot)>(1955년), <여인좌상>(1955), <닭>(1956), <회화 1-57>(1957),
한국 앵포르멜에 대한 유럽에서의 정보와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미국에서의 정보가 한국에 제한적으로 유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가협회 소속 작가들은 한국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했다. 박서보는 한국 앵포르멜 운동과 해외의 그것 간의 연관성을 거부했지만,[4] 김영나는 형식적인 유사성이 미술사학자들과 비평가들이 둘 사이에 맺은 관계를 정당화한다고 주장한다.[3]
1958년 제3회 현대미술전에서 선보인 박서보의 《회화 No. 1》(1957)은 현재 한국 앵포르멜 미술의 첫 작품으로 여겨진다.[5]
3. 2. 원형질 시기 (1961-1966)
1961년 유네스코 산하 국제조형예술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Art)의 프랑스 위원회에서 파리에서 개최할 파리 세계청년화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만 30세 이하 젊은 작가를 보내달라는 통보가 왔다. 대표 작가로 프랑스에 가게 된 박서보는 회의가 연기되었다는 통지를 받지 못해 원래 한 달이었던 일정을 11개월로 늘려 파리에서 체류했다.[40] 이후 박서보는 작업에 변화를 겪게 된다. 이전 시기의 작업이 뿌리기와 흘러내리기에 주목하였다면, 파리에서 귀국 후 제작한 원형질 연작에서는 일상에서 나온 오브제를 태워 "화면 위에 형태를 쌓아 올린 후, 다시 팔레트 나이프로 깎거나 쓸어내리는 방법, 혹은 표면에 마대를 붙인 후 분출구 같은 구멍을 부분적으로 만들어 마티에르를 주는 방식"을 주로 썼다.[40] 박서보는 이 시기의 작품들에 대해 “대량학살, 집단 폭력으로부터의 희생, 정신적 핍박, 부조리, 불안과 고독 그리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함 속에서 자폭하듯 그렇게 결행한 산물”이라고 말했다.[41] 원형질 연작은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제작되었다.
박서보는 1961년 파리를 방문하여 1년간 머물면서 당시 미셸 타피에가 주창한 앙포르멜이 파리 미술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한국에 알렸다.[8] 안토니 타피에스와 마놀로 밀라레스와 같은 스페인 예술가들의 작품에 특히 관심을 가졌는데,[3] 그들의 영향은 그가 "파리 세계 젊은 화가들" 합동 전시회를 위해 제작한 작품 ''Péché Originel No. 8'' ''(원죄 8번)''에 나타나 있다.
박서보는 한국 예술가들의 능력을 파리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프랑스 한국 유학생회 회장 신영철, 이일, 그리고 한국 대사관 영사 노영찬을 설득하여 파리 비엔날레 조직자들을 만나 한국 예술가들의 참여를 촉구하도록 했다. 그 결과 박서보는 1963년 제3회 파리 비엔날레에서 한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다시 파리에 갔고, 2년 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한국 대표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1]
1961년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박서보는 어두운 색채를 사용한 "원형질" 연작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팔레트 나이프와 빗을 사용하여 검은색과 갈색 물감 층을 새겨 넣었으며, 때로는 캔버스에 린넨을 첨가하기도 했다.
박서보는 이 연작이 한국 전쟁 동안의 경험과 일본 잡지인 《미술 수첩》을 통해 장 포트리에의 "인질" 연작(1942–45)을 접하게 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언급했다. 포트리에의 그림은 박서보에게 한국 전쟁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3. 3. 유전질 시기 (1966-1970)
1960년대 후반에 제작된 유전질 작업은 원형질 시리즈와는 인식론적으로나 감각적 측면에서 상반되는 기하학적 추상을 보이며, 전통적인 오방색을 활용한다. 이 시기에 작가는 처음으로 한국의 전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곧이어 유전질 시리즈 내에서도 다시 변화를 보이는데, 기하학적 추상을 벗어나 인체라는 구상성을 확연히 드러내기 시작하고 에어 스프레이 기법을 활용하여 매끈한 질감의 팝아트적인 색채를 구사한다. 서구미술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42][43]"유전질" 연작은 우주에 대한 그의 관심과 스프레이 페인트와 밝은 색상을 실험하려는 열망에서 비롯되었으며, 종종 한국의 색상 팔레트인 오방색(흰색, 검은색, 파란색, 노란색, 빨간색)을 활용했다.[14] 이 연작의 일부 작품은 박서보가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한 조지 시걸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얼굴 없는 옷을 입은 인물을 특징으로 한다.[14]
유전질 연작은 1970년 개인전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고, 미술평론가들은 “옵아트적인 밝고 강한 각종 원색과 기술적으로 수련된 선”, “옷만 있고 사람은 없는 허상의 이미지” 혹은 현대적인 시각으로 잡은 현실의 일각” 등의 말로 평론했다.[42][43] 특히 이 시기에 제작한 작품 중 실제 인체에 입힌 옷을 화학약품으로 굳혀 사람 없이 빈 껍데기만 입체로 제시해서 설치 작품인 허상 작품은 조지 시걸에게서 영향 받은 일상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 작업은 1970년 오사카 만국박람회의 한국관을 설계하고 그 내부 인테리어와 전시를 기획한 건축가 김수근의 요청을 받아 '허의 공간/유전인자와 공간'이란 이름으로 수십 개의 작품이 하늘을 향해 뛰는 모습으로 구현되었고, 일부는 모래와 함께 관을 설치해 묻기도 했다. 그것이 반정부적으로 읽혀 전시 중간에 박서보의 입체 작품들은 전부 철수 당한다. 허상을 포함한 유전질 시기는 1966년부터 1970년까지이다.
박서보는 이 연작의 일부를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현대 회화"전에 출품했다. 박서보는 일본 방문 중에 곽인식, 이우환, 이타미 준을 만났다.
박서보는 또 다른 작품인 "유전질 I"을 "제5회 국제 청년 작가전—아시아-일본"에 출품했다.[1]
3. 4. 초기 묘법 시기 (1967-1986)
박서보는 유전질 시기 중에 둘째 아들의 국어 공책 낙서에서 착안한 반복적인 연필 긋기를 하고 있었다. 1967년의 첫 작품은 캔버스에 흰 유화물감을 바른 후 국어 공책의 방안지를 모방한 네모 칸을 연필 긋기로 채우는 식이었다. 이후 안료가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좀 더 자유롭게 선 긋기를 진행했고, 화면에는 선과 연필의 필압에 의해 밀려나간 안료가 축적되기 시작했고 화면에는 작가의 신체 호흡과 리듬감을 반영한 리드미컬하며 유연한 선이 뒤덮히게 되었다. 올오버 페인팅이 탄생했다. 이후 화면은 그리고 다시 덧바르고 그리기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됨으로써 화면 위의 선은 여러 겹의 층위를 이루며 화면 속으로 수용되었다.[44]
1969년 일본에서 만난 이후 긴밀하게 교류해온 재일 작가 이우환의 제안으로 일본 도쿄의 무라마츠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이 연필 긋기 작품들을 선보였다.[45] 박서보는 이 시리즈에 묘법이라는 제명을 붙였고, 미술평론가 방근택의 제안을 받아 외국어 제목으로는 롤랑 바르트의 <0도의 글쓰기>에서 영감 받은 프랑스 단어 Ecriture를 채택했다. 이 초기 묘법 시리즈는 1967년부터 1986년까지 이어진다.
박서보는 원래 이 연작의 이름을 '묘법'이라고 지었지만, 비평가 방근택이 그 용어를 제안한 후 몇 년 뒤 'Écriture'(프랑스어로 "쓰기"를 의미)로 제목을 변경했다.[16] 그는 연작 초기에 연필과 물감을 사용했지만, 이후 ''한지''를 포함한 다른 도구와 재료를 사용했다.
3. 5. 후기 묘법 시기 (1982-2023)
1982년, 박서보는 매체로서 한지의 물성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후기 묘법을 시작한다. 서양 종이와 달리 안료를 흡수하여 일체화하는 한지, 즉 닥지의 특성은 자연의 일부로 살고자 하는 한국인의 자연관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한지가 빛과 소리를 투과하는 특성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태어나게 하는 어머니로서의 대지이자 자연으로 상징화되었다.[46] 초기 묘법과 동일하게 연필로 선을 긋는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되지만, 한지의 침투성과 흡수성으로 인해 안료는 한지 속으로 스며든다. 작가는 여기에 반복적 행위를 매개로 화면에 개입하여 작가의 행위와 종이의 물성이 일체화된 마티에르를 화면 위에 드러낸다.[47]1982년부터 1993년까지는 '지그재그' 시기, 1994년부터 2004년까지는 '블랙 앤 화이트' 시기로 불린다. '블랙 앤 화이트' 시기와 겹치는 2000년부터 작품에 레드가 등장하고, 이후 2018년까지 다양한 색상이 작업에 사용되었다. 박서보는 한지를 이용한 묘법으로 넘어와 다양한 색상을 찾아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림은 치유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48]
박서보는 1983년 국제 종이 컨퍼런스에서 로버트 라우센버그, 데이비드 호크니 등과 함께 한지를 사용한 자신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흑백 팔레트를 사용하게 되었고, 리토 크레용, 연필, 수정액 펜을 사용하여 종이에 스케치한 다음, 물에 적신 한지, 연필,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하여 이를 재현했다. 이후 밝은 빨강, 노랑, 초록, 파랑, 심지어 파스텔 핑크를 포함한 색채로 작품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박서보는 이러한 색상이 자연의 순수한 아름다움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보는 이에게 평온함을 주기를 바라며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17]
2015년부터 박서보의 묘법 연작은 해외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소위 "단색화 열풍"이라고 불리는 미술시장의 관심사에 포함되었다.[49]
4. 미술 운동
박서보는 1971년부터 한국미술협회의 국제담당 부이사장직을 맡아 자신을 비롯한 모노크롬 작가들의 여러 기획전과 해외교류전, 국제전, 개인전 등을 기획하고 국내ᆞ외에 알리는 예술행정가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했다. 현대미술의 혁신이 몇몇 전위 작가들만의 각성에 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현실적으로 정착시킬 제도적 발판이 필요하다고 본 그는 앙데팡당(1972), 현대미술제(1975), 에콜 드 서울(1975)의 3대 전시체제를 창설했다. 각각 현대미술의 신진작가를 발굴하고, 지역으로 확산하며, 우수한 예술적 성과를 집약하여 전시하는 대단위 연례 전시기구였다.[50] 1970년대 후반 미술운동가이자 대학교수, 화가로서 일인삼역을 동시에 수행하느라 분주한 그의 모습을 보고 한 기자는 “그의 인간적 저력과 정력이 격렬한 삼지창처럼 종횡무진 각 방향으로 그 힘을 발휘한다”고 소개했다.[51]
5. 평가
1960년, 『대한민국』의 기자 천승복은 박서보의 작품이 회화의 전형적인 정의를 거스르는 특이한 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 "문법적인 의미에서 그의 작품을 회화라고 부르기 어렵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는 값비싼 물감 대신 기묘한 금속과 화학 재료를 다루는 의식적인 행위 화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과 같은 행위 회화가 난해해서 회화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미분 적분과 같은 고급 수학이 수학 분야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
> 박서보는 일반적인 캔버스를 사지 않습니다. 대신 동대문 헌 옷 시장의 구석진 곳에 있는 고물상에 가서 낡은 텐트 캔버스 조각을 구합니다. 이 캔버스 재료는 보통 먼지와 구멍으로 가득하지만, 1년에 그림 한 점 팔기도 어려운 이 예술가에게는 가격이 매우 합리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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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어떻게 그림을 그릴까요? 머릿속의 구더기가 그가 직접 만든 캔버스에서 먼지를 긁어낼 때 깨뭅니다. 그런 다음 낡은 삼베 조각을 캔버스에 바늘로 꿰매고, 접착제로 붙이고, 구리나 청동 가루를 바르고, 토치 램프로 표면을 태우고, 화학 물질로 일부를 부식시킵니다. 그 결과 회색빛 검정, 흰색,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는 반짝이는 빨간색의 복잡한 재료가 나타나는데, 이는 무당의 해독할 수 없는 서명과 같은 무언가를 전달하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과 같은 작품이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합니다.
>
> 그림은 침묵하지만, 좋은 그림은 강렬한 침묵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목소리를 통해 행위 화가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려는 욕망과 순수한 조화를 창조하려는 욕망 사이의 지속적인 이분법을 전달해야 합니다. 이는 현대 미술 발전에 내재된 갈등입니다."[24]
평론가 토시아키 미네무라는 박서보 작품의 본질을 "구조화된 반투명성"으로 정의하며, 이는 그의 회화의 형식적인 특징이자 각 작품을 만드는 과정의 근본적인 원리라고 설명한다.[25]
미술사학자 김이순은 박서보의 과정을 불교의 반복과 깨달음의 연관성에 대한 사상과 연결시킨다.[26]
미술사학자 조앤 키는 박서보의 예술 활동이 회화의 작용성에 근본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며, 회화가 "끊임없이 자기 갱신되는 매체...특정한 제약 조건에 따라 그 가능성이 가장 잘 실현된다"는 믿음에 의해 이끌린다고 설명한다.[23] 그녀는 또한 당시 많은 다른 한국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박서보가 비한국 미술과 구별되는 한국 미술을 정의하는 방법에 대한 더 큰 논의에 휩싸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박서보는 한국 국경을 넘어 더 넓은 담론에 참여하는 동시에 자신의 문화적 맥락의 특수성을 전달하는 가능성을 탐구해야 했다.[23]
알렉산드라 문로와 같은 큐레이터들은 박서보가 특정 매체에 국한되지 않는 물질성에 주목하는 점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16]
평론가들은 박서보와 비교할 수 있는 사이 톰블리와 재스퍼 존스를 포함한 다양한 비한국 예술가들을 제시했다.[27]
평론가이자 큐레이터인 신영청은 박서보의 후기 채색 작품이 신선하고 현대적이지만, 그의 새로운 그림은 초기 작품의 의미와 울림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28]
6. 주요 연혁
제1회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예술문화 대상 미술부문 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