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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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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병춘은 1932년 경성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연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법철학 등을 강의했다. 박정희 정부에서 외교안보담당 특별보좌관, 주미대사를 역임했으며, 1982년 전두환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아웅산 묘역 폭탄 테러 사건으로 순직했다. 그는 법학자이자 외교관으로서, 영어에 능통하여 미국을 상대로 한 외교 활동에 기여했으며, 한국의 법과 사회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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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병춘
기본 정보
한글 이름함병춘
한자 이름咸秉春
로마자 표기Ham Byeong-chun
가나 표기ハム・ビョンチュン
생애
출생1932년 3월 28일
사망1998년 1월 1일 (65세)
사망 장소미국 메릴랜드주
학력
학력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미국 하버드 대학교 법학박사
경력
주요 경력제10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제11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제12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법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청와대 비서실장
주미대사
서강대학교 총장
기타
소속 정당민주정의당

2. 생애

1932년 경성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노스웨스턴 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 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9년 연세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법철학, 영미법, 한국법제사 등을 강의하며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했다. 양승두와 함께 한국인의 법의식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여 한국어 및 영어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외교안보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고, 1974년 주미대사로 부임했다. 박정희 암살 사건 이후 연세대학교 교수로 복귀하여 법철학, 동양법제사, 법인류학을 강의했다.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취임했으나, 1983년 미얀마 아웅산 테러에 휘말려 순직했다.[4]

2. 1. 출생과 초기 활동

1932년 2월 26일 서울 연못골(현 종로구 연지동) 연동교회 목사 사택에서 함태영의 1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함태영은 두 번 상처하고 세 번째 부인 고숙원과 재혼하였으며, 환갑이 넘어 함병춘을 보았다. 함태영은 20세가 되기 전 본처에게서 아들 함병석을 얻었고, 함병석에게서는 함병춘보다 20년 연상인 함인섭, 함의섭을 보았으나, 함병춘이 태어날 당시 생존한 형제는 4살 위인 함병소 뿐이었다.[2]

함병춘은 태어나자마자 연동교회에서 유아 세례를 받았고, 이후로도 계속 교회를 다녀 집사로 활동했다. 1943년 어머니 고숙원이 종로구 명륜동의 셋방에서 사망한 후 아버지 함태영이 그를 양육하며 직접 도시락을 챙겨주었다고 한다.[2]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25 전쟁 직후 대한민국 공군에 장교로 입대, 1952년 공군 중위로 예편하였다. 1953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가 노스웨스턴 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 하버드 로스쿨에서 법률과학 박사(S.J.D.) 학위를 받았다.[2]

2. 2. 교육 활동

1959년 연세대학교 법학 교수가 되었으며, 법철학, 영미법, 한국법제사 강의를 맡으면서 새로운 연구 영역을 개척하였다. 이후 양승두 교수와 한국인의 법 의식에 대한 연구, 한국 사회의 법에 대한 태도 연구를 진행했으며, 한국어 논문 뿐만 아니라 영어 논문도 다수 발표하였다. 법학자였지만 그는 한국 사회의 전통과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교수 재직 중 연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소장을 겸임하였다.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2년간 예일대학교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귀국하였다.

2. 3. 정치 및 외교 활동

1959년 연세대학교 법학 교수가 되었으며, 법철학, 영미법, 한국법제사 강의를 맡으면서 새로운 연구 영역을 개척하였다. 양승두 교수와 함께 한국인의 법 의식, 한국 사회의 법에 대한 태도를 연구했으며, 한국어 및 영어 논문을 다수 발표하였다. 법학자였지만 한국 사회의 전통과 한국인의 의식구조도 연구하였다. 연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소장을 겸임하였다. 1966년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2년간 연구활동을 하고 귀국하였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외교안보 담당 특별 보좌관, 이어서 정치담당 특별 보좌관이 되었다. 1973년 12월 31일, 한국 정부는 함병춘 대통령 정치담당 특별 보좌관을 주미 한국 대사로 임명했다.[3] 1974년 주미 대사로 부임하였다.

1975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주미한국대사를 지낸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ㆍ태평양 담당 차관보 필립 하비브(Philip Habib)로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프랑스 핵무기 관련 계약 체결 시도 중단을 통보받고,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하였다.

1976년 한국 인사가 미국 여야 정치인과 상원, 하원 의원을 상대로 대한민국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고자 만찬과 정치자금을 지원했다가 발각되어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또한 주한미군 철수 여론이 미국 정계와 학계에 등장하자, 미국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을 설득하여 주한미군 철수 여론 확산을 막았다.

1977년 6월 임기를 마치고 귀국, 외무부 본부대사로 전임되었다가 1979년 1월 12일 대통령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다.

2. 4. 대통령 비서실장 및 사망

10·26 사태 이후 연세대학교 법학 교수로 복직하여 법철학, 동양법제사, 법인류학 등을 강의하였으며, 12월 17일 최규하 대통령에 의해 대통령 외교안보특보로 기용되었다. 1980년 8월 2일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에 위촉되었다. 1981년 8월 다시 연세대학교 법학 교수로 출강했다가 1982년 6월 전두환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이 정치 전문가가 아니라 외교 분야에서 활동한 것을 들어 거절했고 이순자가 공식 석상에서 활동하는 것을 전두환의 면전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두환이학봉 비서관을 보내 함병춘을 설득했다.[4]

1983년 1월 28일부터 2월 14일까지 대통령 특사로 아프리카를 순방했고, 5월 20일부터 6월 4일까지 뉴질랜드, 인도네시아, 오스트레일리아를 순방했다.[4]

같은 해 10월 전두환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5개국 순방길에 동행했다가 10월 9일 버마에서 일어난 아웅산묘역 폭탄테러사건으로 순직하였다. 전두환 대통령을 태운 차량이 도착하기 전, 80여 명의 각료, 기자단과 함께 예행연습을 하던 중, 음악 소리를 들은 북한 인민군 공작원들이 버튼을 눌러 80여 명의 수행원, 기자들과 함께 사망했다.[4]

2. 5. 사후

10월 11일 시신은 KAL 특별기편으로 경기도 김포에 도착한 뒤 서울대학교 병원에 안치되었다가 10월 13일 국민장으로 거행되어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치되었다.

1983년 10월 11일 청조근정훈장이 추서되었다.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함우택 (咸遇澤)1837년 12월 2일 출생
조모원주 변씨1850년 12월 10일 출생, 1886년 9월 1일 사망
아버지함태영(咸台永)1872년 10월 22일 출생[5], 1964년 10월 24일 사망,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부통령 역임
이복 형함병철(咸秉哲)1889년 8월 4일 출생
이복 형수진주 강씨1890년 2월 10일 출생, 강성흠(姜星欽)의 딸
조카함인섭(咸仁燮)1907년 5월 3일 출생, 1986년 9월 15일 사망, 춘천농대 학장, 농림부 장관 역임
조카함의섭(咸義燮)1910년 4월 1일 출생, 1995년 사망, 다른 이름은 함재의(咸在義)
어머니고숙원(高淑媛)1887년 출생, 1943년 사망
함병소 (咸秉照)1928년 출생, 2023년 사망, 기업인
형수김순회(金順會)1935년 출생
조카1남 1녀
부인심효식(沈孝植)1927년 출생[6], 화가
아들함재봉(咸在鳳)1958년 9월 5일 출생,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
아들함재학(咸在鶴)1963년 출생,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함태영은 세 번 상처하였고 14남매를 두었으나 대부분 일찍 사망했다. 함병춘은 함태영의 막내 아들이다.[1] 20년 연상인 함인섭, 함의섭은 이복 형 함병철의 아들들로, 함병춘에게는 조카에 해당된다.

4. 저작

4. 1. 저서


  • 한국학술연구원에서 펴낸 《한국의 문화전통과 법》(1993)이 있다.

4. 2. 논문

5. 평가

외교부 안에서도 영어로 미국인, 영국인을 설득할 수 있었던 인물이라는 평가와, 충분하지 못한 행정 경험으로 다소 빛이 덜 났다는 평도 있다.

6. 함병춘을 연기한 배우

참조

[1] 뉴스 한국의 보배 함병춘… 강단 그리워한 진정한 공복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3-05-07
[2] 뉴스 아웅산 테러 30년,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장의 思父曲 http://news.mk.co.kr[...]
[3] 뉴스인용 駐美大使에 咸秉春씨 임명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74-01-04
[4] 뉴스인용 한국의 보배 함병춘… 강단 그리워한 진정한 공복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3-05-07
[5] 백과사전 함태영 http://encykorea.aks[...]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6] 뉴스 한국의 보배 함병춘… 강단 그리워한 진정한 공복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3-05-07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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