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함태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함태영은 일제강점기 법관, 독립운동가, 목사, 교육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872년 함경북도 무산에서 태어나 법관 양성소를 수석 졸업하고 한성재판소 검사로 법관 생활을 시작했다. 독립협회 사건에서 이상재 등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3·1 운동에 참여하여 징역형을 받았다. 출옥 후 목사 안수를 받고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해방 후에는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심계원장을 거쳐 1952년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민국의 심계원장 - 최하영
    최하영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 후 관료로 활동하며 친일 행위로 훈장을 받았고, 해방 후에는 미 군정청과 대한민국 정부에서 활동하다 국회의원이 되었다.
  • 법관양성소 출신 - 이준 (1859년)
    이준은 대한제국의 법조인, 외교관, 독립운동가로서, 독립협회 활동, 민족 계몽 운동, 헤이그 특사 활동을 펼쳤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하여 일제의 침략을 알리고 독립 의지를 고취했으며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법관양성소 출신 - 홍진
    홍진은 대한제국 시기 법관, 변호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법무총장, 내무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광복 후 비상국민회의 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이다.
함태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함태영 (1949년)
이름함태영
한자 표기咸台永
로마자 표기Ham Taeyeong
별칭송암(松岩)
로마자 표기 (별칭)Songam
출생일1873년 10월 22일
출생지조선 함경도 무산군
사망일1964년 10월 24일
사망지서울특별시
국적대한민국
본관강릉 함씨
직책
한성재판소 검사시보1896년 3월 5일 ~ 1897년 10월 6일
한성재판소 판사 겸 검사1898년 3월 2일 ~ 1899년 3월 5일
제2대 심계원장1949년 11월 24일 ~ 1952년 7월 22일
제3대 부통령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정치
대통령이승만
역대 국무총리장택상 국무총리
이윤영 국무총리 서리
백두진 국무총리 서리
이갑성 국무총리 임시서리
백두진 국무총리
이갑성 국무총리 임시서리
변영태 국무총리
백한성 국무총리 임시서리
변영태 국무총리
백한성 국무총리 임시서리
역대 부통령이시영 부통령
허정 부통령 권한대행
김성수 부통령
장택상 부통령 권한대행
이전 부통령김성수
다음 부통령장면
정당자유당
소속 정당무소속
독립촉성중앙회최고위원
자유당상임고문
학력
학력한성법관양성소 졸업
주오 대학 정치학과 1년 중퇴
평양신학교 졸업
가족
아버지함우택
어머니원주 변씨 부인
배우자밀양 손씨 부인 (사별)
전주 최씨 부인 (재혼)
고숙원 (삼혼)
자녀아들 함병철
함병승
함병창
함병서
함병욱
함병소
함병춘
딸 이름 미상
손자함인섭
함재봉
기타
종교유교(성리학) → 개신교(한국기독교장로회)
경력한국신학대학교 재단 이사장
사망 원인고혈압과 노환의 합병증
참고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함태영(咸台永)
서적김정회, 《송암 함태영》, 연세대학교대학출판문화원, 2022년 4월 8일, 23쪽

2. 생애

대한제국 멸망 이후 기독교를 신봉하고 세례를 받았다. 3·1 운동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이로 인해 종육위에서 파직되었다.[2] 출옥 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해방 후 제2대 감사원장(1949년-1952년), 1951년 한국신학대학교 총장을 지냈고, 1952년 제3대 대한민국 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으며, 1964년 사망하여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3]

2. 1. 생애 초기

함태영은 전라북도 김제군(현재 김제시)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함우택은 통정대부를 지냈다. 청년기에 검사를 지망하였다. 자유주의자로서 명망이 높았으며, 서울지방법원 검사 시절 독립협회 사건을 담당하여 피고인 이상재의 무죄를 주장하였다.

대한제국 멸망 이후 기독교를 신봉하고 세례를 받았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활동하였으나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으며, 이로 인해 종육위에서 파직되었다.[2]

2. 1. 1. 출생과 유년기

함태영은 1872년(고종 9년) 10월 22일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 읍내에서 무관을 지낸 함우택(咸遇澤)과 원주 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함우택은 서당의 훈장이었고 작명, 관상, 풍수지리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함우택은 본부인 밀양 손씨를 잃고, 연이어 두번째 부인 동래 정씨도 잃은 후, 원주 변씨에게서 함태영을 보았다. 함태영의 친형제 자매, 이복 형제자매가 몇 명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어려서 그는 외가가 있는 함북 무산에서 성장하였다.

2. 1. 2. 소년 시절

함태영은 1872년 10월 22일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 읍내에서 무관을 지낸 함우택과 원주 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함우택은 서당 훈장이었고 작명, 관상, 풍수지리에도 능하였다고 한다. 함태영은 어려서 외가가 있는 함북 무산에서 성장하였다.[7]

1884년 잠시 한성에 거주하기도 했으나, 관료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한성에 거주하게 되었다. 아버지 함우택은 도시 무과에 급제하여 한양으로 떠났으며, 기독교인이 되었다. 아버지를 따라 함태영도 기독교 신앙에 투신하였고, 장로가 되었다. 한편 어린 나이에 생모 변씨를 여의었다. 함태영은 11세까지 고향에 머물면서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배웠다.[7]

과거를 준비하던 그는 1894년 6월 갑오경장으로 과거 제도가 폐지되는 바람에 실의에 빠졌다.[8] 그러나 이듬해 법관 양성소가 설치되자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법관 양성소의 교육 기간은 6개월이었고, 졸업하면 성법학사(成法學士) 자격을 주었다.[8]

그는 일찍이 손백선의 딸 밀양 손씨와 결혼하였으나 사별하고, 다시 최영철의 딸 전주 최씨와 재혼하였으나 역시 일찍 사별하였다.

2. 2. 법관 양성소 수학

1895년 '재판소 구성법' 공포에 따라 설치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법조인 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에 입교, 그해 11월 법관양성소 속성과(速成科)로 전과하였다. 1896년 3월 5일 한성재판소검사시보(漢城裁判所檢事試補)겸 주임관 6등 2급(奏任六等二級)에 보직되었다. 1896년 11월 법관양성소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897년 11월 1일 경기도재판소 판사시보(畿裁判所判事試補) 주임관 5등 1급(奏任五等一級)으로 발령되었다.

함태영은 법관양성소 졸업생 명단에서 맨 위에 있는데, 이는 그가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기 때문이다. 훗날 서울법대 동창회 명부에는 제1호 회원으로 함태영이 등재되어 있다.[8]

2. 3. 법관 활동

함태영은 1895년 4월 16일 '재판소 구성법' 공포에 따라 설치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법조인 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에 입교하여, 그해 11월 속성과로 전과하였다. 1896년 3월 5일 한성재판소 검사시보 겸 주임관 6등 2급에 보직되었으며, 11월에는 법관양성소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897년 11월 1일 경기재판소 판사시보 주임관 5등 1급으로 발령되었다.[8]

법관양성소 졸업생 명단에서 함태영의 이름이 맨 위에 있었는데, 이는 그가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기 때문이다. 훗날 서울법대 동창회 명부에서 제1호 회원이 바로 함태영으로 기록되었다.[8] 1897년 한성재판소 검사시보에 임명되고 6월 11일 수원군으로 파견되었다가, 9월 29일 한성재판소 검사로 임명되면서 법관 생활을 시작하였다. 11월 1일에는 경기도재판소 판사에 임명되었다.

1898년 1월 25일 한성부재판소 검사가 되었고, 이후 고등재판소 검사, 평리원 검사, 법부 법률기초위원, 대심원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같은 해 2월 경기도재판소가 폐지되면서 2월 25일 한성부재판소 검사 주임관 5등 1급이 되었다.

1898년 7월 26일, 김홍륙이 황태자의 커피에 독을 타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고종은 냄새가 이상하여 마시지 않았으나, 황태자는 마시다가 토하고 기절하였다. 이 사건의 재판을 평리원 판사 함태영이 맡게 되었다. 함태영은 김홍륙에게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죄 또는 가벼운 처벌을 내리려 하였으나, 민씨 가문에서는 극형을 요구하며 압력을 가했다. 함태영은 민씨 정권의 요구를 거절하였다.[9]

훗날 김홍륙의 먼 일가 후손인 김재준 목사가 만년의 함태영에게 이 사건의 진상을 묻자, 함태영은 이 사건이 민씨네가 조작한 음모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고종으로부터 어떠한 밀지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함구하였다.[9] 결국 재판은 다른 판사에게 넘겨지고 김홍륙 등은 사형당했다.

자유주의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함태영은 서울지방법원 검사 시절 독립협회 사건을 담당하여 피고인 이상재의 무죄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2. 3. 1. 법관 생활 초기

1898년 8월 20일 법부검사 주임관 5등 1급(任法部檢事 奏任五等一級)이 되었다가 8월 22일 고등재판소검사(高等裁判所檢事)로 전임되었다. 독립협회 사건으로 기소된 이상재, 윤치호 등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이상재를 비롯한 중심인물 17명에게 가벼운 벌을 내렸다.[10]

1898년 11월 공화정을 만들려 한다는 무고를 받고 체포된 독립협회 간부들을 직접 담당하면서,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들이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다"는 점에 놀랐다고 한다. 함태영은 이승만, 이상재, 윤치호, 서재필 등이 공화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물증이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독립협회에 대한 우호적 태도로 그의 신변에도 여러번 위협이 있었다.[11] 윤치호 대통령 추대설 또는 박영효 대통령 추대설, 이준용 대통령 추대설이나 공화정 수립 기도에 대한 증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하기 어려우므로 관대한 처분을 상주하였다가 오히려 곤란을 겪게 되었다.

1898년 11월 2일 주임관 4등(奏任官四等)으로 특별 서임되었다. 11월 16일 한규설과 함께 상주를 올려 독립협회를 방해하던 조병식, 민종묵, 이기동, 김정근 등을 증거 없이 무고했다며 탄핵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의중임에도 소신껏 이상재 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고, 11월 22일 고등재판소에서 알아서 조사할 일을 관인이 규정을 준수하지 않고 수시로 드나들면서 봤다는 이유로 파면당하였다. 그러나 5일만에 복관되어 11월 27일 법부검사가 되었다. 이후 법부 대심원(大審院)·복심법원(覆審法院)의 판사를 역임하였다.

황국협회보부상독립협회박영효를 대통령으로,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세우려 한다거나, 윤치호를 대통령으로 옹립하려 한다거나, 이준용을 대통령으로 세우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했다. 이후 이상재, 이승만, 윤치호, 양기탁, 남궁억, 안창호, 신채호, 신규식, 이갑, 박은식, 이동휘, 허위독립협회만민공동회 회원 400여명이 체포, 투옥 되었고, 황국협회와 보부상단의 조병식, 이기동 등은 석방 되었다. 고종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해산령을 내렸다.

1899년 3월 13일 독립협회 등의 편의를 봐주었다는 이유로 법부 검사에서 한성부재판소 검사 주임관 4등 1급(轉任漢城府裁判所檢事 奏任四等一級)으로 전출되고 일반 죄수와 민사를 담당하다가 4월 3일 면직되었다. 여러 가지로 상황을 판단하고 장래를 생각하다가 보름만에 사표를 던졌다.[12]

2. 3. 2. 독립협회 사건 이후

1898년 8월 20일 법부검사 주임관 5등 1급이 되었다가 8월 22일 고등재판소검사로 전임되었다. 독립협회 사건으로 기소된 이상재, 윤치호 등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이상재를 비롯한 중심인물 17명에게 가벼운 벌을 내렸다.[10]

1898년 11월 공화정을 만들려 한다는 무고를 받고 체포된 독립협회 간부들을 그가 직접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들을 취조하면서 그들이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다"는 점에 놀랐다고 한다.[10] 함태영은 독립협회 간부들인 이승만, 이상재, 윤치호, 서재필 등이 공화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물증이 없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함태영의 독립협회에 대한 우호적 태도로 그의 신변에도 여러번 위협이 있었다.[11] 함태영은 윤치호 대통령 추대설 또는 박영효 대통령 추대설, 이준용 대통령 추대설이나 공화정 수립 기도에 대한 증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함태영은 이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하기 어려우므로 관대한 처분을 상주하였다가 오히려 곤란을 겪게 되었다.

1898년 11월 2일 주임관 4등으로 특별 서임되었다. 11월 16일 함태영은 한규설과 함께 상주를 올려 독립협회를 방해하던 조병식, 민종묵, 이기동, 김정근 등을 독립협회를 증거 없이 무고했다며 탄핵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의중임에도 소신껏 이상재 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고 11월 22일 고등재판소에서 알아서 조사할 일을 관인이 규정을 준수하지 않고 수시로 드나들면서 봤다는 이유로 파면당하였다. 그러나 5일만에 복관되어 11월 27일 법부검사가 되었다. 이후 법부 대심원(大審院)·복심법원(覆審法院)의 판사를 역임하였다.

함태영은 독립협회에 호의적인 판결을 내렸으나, 황국협회보부상독립협회박영효를 대통령으로,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세우려 한다거나, 윤치호를 대통령으로 옹립하려 한다거나, 이준용을 대통령으로 세우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했다. 이후 이상재, 이승만, 윤치호, 양기탁, 남궁억, 안창호, 신채호, 신규식, 이갑, 박은식, 이동휘, 허위독립협회만민공동회 회원 400여명이 체포, 투옥되었다. 동시에 황국협회와 보부상단의 조병식, 이기동 등은 석방되었다. 고종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해산령을 내린다.

함태영은 독립협회 등의 편의를 봐주었다는 이유로 1899년 3월 13일 법부 검사에서 한성부재판소 검사 주임관 4등 1급으로 전출되어 일반 죄수와 민사를 담당하다가 4월 3일 면직되었다. 함태영은 여러 가지로 상황을 판단하고 장래를 생각하다가 보름만에 사표를 던졌다.[12]

2. 3. 3. 일본 방문과 복귀

1899년 5월, 고종은 검사직을 사직하고 칩거하던 함태영에게 일본에 다녀오라는 명을 내렸다. 이는 일본에 망명 중인 정객들의 동정을 살피라는 밀명이었다.[12] 함태영은 며칠간 일본에 체류하였으나, 그가 어떤 일을 하였고 어떤 인물들을 감시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당시 대한제국 정부 관비 일본 유학생이었던 박중양1950년대까지도 함태영을 미워하고 조롱하였다.

1899년 말, 함태영은 일본에서 돌아와 고종에게 보고한 뒤 다시 칩거하였다.[12] 고종은 함태영의 강직한 인품을 아껴 그를 고등재판소인 평리원 검사로 임명하였다.[12] 평리원 검사가 된 함태영은 김포 갈밭을 비롯한 황무지 개간권 사건을 다루면서 일본 상인과 송병준, 이용구 등의 책동을 분쇄하고, 이준이 이끄는 대한보안회, 협동회의 주장을 받아들였다.[13]

2. 3. 4. 관료 생활과 법관 복귀

1894년 갑오경장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자 법관 양성소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8] 1895년 8월 20일 법부검사 주임관 5등 1급에 임명되었다가,[8] 8월 22일 고등재판소 검사로 전임되었다. 독립협회 사건으로 기소된 이상재, 윤치호 등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10][11]

1898년 11월 공화정을 만들려 한다는 무고를 받고 체포된 독립협회 간부들을 담당하였다. 함태영은 독립협회 간부들인 이승만, 이상재, 윤치호, 서재필 등이 공화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물증이 없다고 판결했다. 11월 2일 주임관 4등(奏任官四等)으로 특별 서임되었다. 11월 16일 함태영은 한규설과 함께 상주를 올려 독립협회를 방해하던 조병식, 민종묵, 이기동, 김정근 등을 독립협회를 증거 없이 무고했다며 탄핵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미움을 받고 11월 22일 파면당하였다가 5일만인 11월 27일 법부검사로 복직했다. 이후 법부 대심원(大審院)·복심법원(覆審法院)의 판사를 역임하였다.

1899년 3월 13일 한성부재판소 검사 주임관 4등 1급으로 전출되어 일반 죄수와 민사를 담당하다가 4월 3일 면직되었다.[12] 1899년 5월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망명 정객들의 동정을 살피고 돌아왔다.[12] 귀국 후 고등재판소인 평리원 검사로 임명되었다.[12] 평리원 검사로 재직 시 황무지 개간권 사건을 다루게 되어 일본 상인과 송병준, 이용구 등의 책동을 분쇄하였다.[13] 1899년 3월 30일 징계를 받고 해임, 1899년 10월일본으로 건너가 효고현을 방문, 10월 14일 박영효 등을 방문하였다.

1902년 2월 14일 전라남도 관찰소주사 판임관 2등에 임명되고, 5월 28일 정3품으로 승진했으나, 1903년 9월 2일 면직되었다가 9월 3일 6품으로 복직했다. 1904년 4월 30일 철도원주사에 임명되었으나 5월 13일 의원면직하였다. 6월 13일 철도원주사 판임관 3등에 임명되었다가 7월 3일 직무유기로 징계, 7월 6일 면직되었다.

1905년 2월 25일 평리원 검사에 임명되고, 3월 30일 평리원 검사 주임관 4등 1급에 임명된뒤, 5월 2일 징계를 받았다. 5월 21일 평리원 검사직을 사직하였으나 같은 날 법부참서관에 임명되었다. 6월 23일 법부참서관 주임관 4등에 임명된 뒤, 7월 25일 겸임 법부 법률기초위원을 거쳐 10월 9일 정3품이 되었다. 11월 5일 경가전의 개수 시, 감독관으로 공사에 참여한 공로로 정3품 당상관 통정대부로 승진했다. 1906년 6월 29일 주임관 4등 5급이 되고, 12월 특별 상금으로 30KRW을 받았다. 1907년 6월 20일 법부서기관 주임관 3등, 6월 28일 주임관 2등 4급을 거쳐 5월 10일 법부서기관이 되었다.[14]

순종 즉위 후 1907년 8월 27일 법부 형사국 서기관 겸 형법교정관에 임명되었다. 1908년 법부 형사국 서기관을 거쳐, 9월 14일 판사에 임명되고 대심원판사로 발령, 10월 8일 판사 주임관 2등이 되었다. 1910년 경성부 경성공소원 판사로 발령되었으나 10월 2일 경술국치 후 사직하였다.

2. 4. 독립운동과 신앙 활동

1899년 10월경 일본으로 건너가 효고현을 방문했는데, 당시 요시찰 인물로 지정되어 효고현 지사에게 보고되었다. 10월 14일 박영효 등을 방문하였다.[12]

1902년 2월 14일 전라남도 관찰소주사 판임관 2등이 되고 5월 28일 정3품으로 승진했으나, 1903년 9월 2일 면직되었다가 9월 3일 6품으로 복직했다. 1904년 4월 30일 철도원주사가 되었으나 5월 13일 사직하고 의원면직하였다. 1904년 6월 13일 철도원주사 판임관 3등에 임명되었다가 7월 3일 직무유기로 징계받고, 7월 6일 면직되었다.

1905년 2월 25일 평리원 검사가 되었다.[12] 평리원 검사 시절 김포 갈밭을 비롯한 황무지 개간권 사건을 다루면서 일본 상인과 송병준, 이용구 등의 책동을 분쇄하고, 이준이 이끄는 대한보안회, 협동회의 주장을 받아들였다.[13] 같은 해 3월 30일 평리원 검사 주임관 4등 1급이 되고, 5월 2일 죄인을 조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 1905년 5월 21일 평리원 검사직을 사직하였으나 같은 날 법부참서관에 임명되었다.

1905년 6월 23일 법부참서관 주임관 4등에 임명된 뒤, 그해 7월 25일 겸임 법부 법률기초위원을 거쳐 10월 9일 정3품이 되었다. 1905년 11월 5일 경가전의 개수 시, 감독관으로 공사에 참여한 공로로 정3품 당상관 통정대부로 승진했다. 1906년 6월 29일 주임관 4등 5급이 되고, 같은 해 12월 특별 상금으로 30KRW을 받았다. 1907년 6월 20일 법부서기관 주임관 3등, 6월 28일 주임관 2등 4급을 거쳐 1907년 5월 10일 법부서기관이 되었다.

순종 즉위 후 1907년 8월 27일 법부 형사국 서기관으로 재직 중 겸임 형법교정관에 임명되었다. 1908년 법부 형사국 서기관이 되었다가, 그해 9월 14일 판사에 임명되고 대심원판사로 발령되고 10월 8일 판사 주임관 2등이 되었다. 1910년 경성부 경성공소원 판사로 발령되었으나 10월 2일 경술국치 후 사직하였다.

1919년 함태영, 송진우 등에게 만세 선동 혐의로 발부된 총독부 체포장


1919년 3·1 운동에는 이승훈의 권고로, 민족대표 48인전필순, 현순 등과 함께 기독교계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19] 1919년 2월 20일 밤 서울 남대문로5가의 함태영 집에서 이갑성, 현순, 안세환, 오상근 등과 만나 3월 1일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는 독립선언서 인쇄와 운반, 포장과 배포를 맡았다. 당시 3·1독립운동 선언서에 민족 대표자 서명을 받을 때 서명했지만 함태영의 서명은 제외했는데, 이는 서명한 민족대표자 중 기독교계 대표자 16명의 가정과 생계문제를 맡아야 될 인물로 지명되어 함태영의 서명은 제외시켰다. 그는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19년 7월 서대문형무소 투옥 상태에서 2심 재판을 받고, 1919년 10월 30일 3심에서 출판물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1921년 12월 23일 투옥된 지 2년 만에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2. 4. 1. 신앙 생활

그는 관료 생활 중 연동교회에 출석했다. 1907년 장로 장립을 앞두고 '양반대표'와 '천민대표'가 경합을 벌였는데, 천민 출신이 계속 승리했다. 그때마다 게일 선교사는 '교회는 신분의 위세를 부리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며 냉철하게 대하였다.[15]

1909년 1월 연동교회의 집사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6월 양반 신자 100여 명은 상놈들과 같이 예배 드릴 수 없다며 묘동교회를 개척하고, 그의 아버지 함우택도 그 곳으로 나갔지만 함태영은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신분의 차이 때문에 교회를 옮기는 것은 옳지 않다'며 연동교회에 남아 있었다.[15]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관직에서 사퇴한 후, 교회 장로로서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6] 1911년 연동교회 집사로 임명되었다. 1915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8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헌법 기초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4월 남대문교회의 조사(助師, 대한민국 건국 후 전도사로 명칭변경)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말, 미국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파리강화회담에 조선인 대표자를 파견할 것을 계획하는데 참여했다. 그는 김규식 등과 함께 윌슨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작성하였다.

1919년 2월 28일 파리강화회담과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탄원서를 전달하는 책임을 맡았다.[18]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는 배를 타고 국내에 잠입하여 애국부인회 결성을 추진하였다. 함태영은 김순애를 만나 국내 독립운동 전개 방법을 논의하였으나, 김순애가 투옥될 경우 해외에서 활동하는 남편 우사 김규식에게 심리적 부담감과 해외 독립운동 활동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설득하여 김순애를 다시 상하이로 귀환하게 하고 배웅해주었다.

2. 4. 2. 독립운동과 사회활동

1899년 5월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망명 정객들의 동정을 살폈다.[12] 1899년일본에서 돌아와 고종에게 복명한 다음 다시 칩거 생활에 들어갔다.[12] 고종은 함태영을 고등재판소인 평리원 검사로 임명하였다.[12]

평리원 검사가 된 함태영은 김포 갈밭을 비롯한 황무지 개간권 사건을 다루게 되어 일본 상인과 송병준, 이용구 등의 책동을 분쇄하고, 이준이 이끄는 대한보안회, 협동회의 주장을 받아들였다.[13]

고종과 왕실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이승만 등과 달리 함태영은 말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까지도 고종과 왕실에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고종은 명군 이었어. 다만 시운을 잘못 만나 불행한 국왕이지[11]"라는 것이 함태영의 훗날까지의 신념이었다.

관료 생활 중 그는 연동교회에 출석했다. 1909년 1월 연동교회의 집사로 임명되었다. 1909년 6월 양반 신자 100여 명은 상놈들과 같이 한 자리에서 예배 드릴 수 없다며 묘동교회를 개척하고, 그의 아버지 함우택도 그 곳으로 나갔지만 함태영은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연동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꾸짖었다.'신분의 차이 때문에 교회를 옮기는 것은 옳지 않다'며 그는 연동교회에 남아 있었다.[15]

1910년 공직에서 물러났다.[16] 경술국치 이후 관직에서 사퇴했다. 교회 장로로 교회일에도 열심히 나서서 활동하였으며, 1906년 조종만 등과 함께 사재를 털어 봉익동 분동교회 헌당에 기부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는 이승훈의 권고로, 민족대표 48인전필순, 현순 등과 함께 기독교계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1954년의 3.1절 기념 회고담에서는 그에게 3·1 만세 운동의 계획을 알려 준 또다른 인물은 이상재였다. 1919년 2월 20일 밤 서울 남대문로5가의 함태영 집에서 이갑성, 현순, 안세환, 오상근 등과 만나, 3월 1일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3.1운동 전날인 2월 28일에는 독립선언서 900장을 인쇄, 목사 김창준에게 넘겨 이 중 600장을 이갑성에게 전달하고, 나머지 300장은 경성화상점 사무원 이계창을 시켜 평안북도 선천으로 가져가 분배하게 했다.[19]

2월 27일 오후 1시 인쇄된 초안을 이승훈, 박희도, 김창준, 박동완, 신석구 등에게 공개하였다. 2월 27일2월 28일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계속 인쇄하였고 그는 900여 장을 챙겼다. 3·1 운동 당시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천도교와 연합하는 기획 과정부터 깊이 개입했으며, 그는 독립선언서 인쇄와 운반, 포장과 배포를 맡았다. 이갑성 등에게도 유인물을 전달하여 조선 각지로 배포하게 했다. 당시 3·1독립운동 선언서에 민족 대표자 서명을 받을 때 서명했지만 함태영의 서명은 제외했는데, 이는 서명한 민족대표자 중 기독교계 대표자 16명의 가정과 생계문제를 맡아야 될 인물로 지명되어 함태영의 서명은 제외시켰다. 그는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2. 4. 3. 3.1 만세 운동과 투옥

1919년 3·1 운동에는 이승훈의 권고로, 민족대표 48인전필순, 현순 등과 함께 기독교계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19] 1954년의 3.1절 기념 회고담에서는 그에게 3·1 만세 운동의 계획을 알려 준 또다른 인물은 이상재였다. 1919년 2월 20일 밤 서울 남대문로5가의 함태영 집에서 이갑성, 현순, 안세환, 오상근(吳尙根) 등과 만나, 3월 1일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3.1운동 전날인 2월 28일에는 독립선언서 900장을 인쇄, 목사 김창준에게 넘겨 이 중 600장을 이갑성에게 전달하고, 나머지 300장은 경성화상점 사무원 이계창(李桂昌)을 시켜 평안북도 선천으로 가져가 분배하게 했다.[19]

2월 27일 오후 1시 인쇄된 초안을 이승훈, 박희도, 김창준, 박동완, 신석구 등에게 공개하였다. 취조 당시 이승훈의 진술서에 의하면, 이들 중 일부는 함태영에게 도장을 맡겼다. 2월 27일2월 28일 인쇄소인 보성사(普成社)에서 계속 인쇄하였고 그는 900여 장을 챙겼다. 3·1 운동 당시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천도교와 연합하는 기획 과정부터 깊이 개입했으며, 그는 독립선언서 인쇄와 운반, 포장과 배포를 맡았다. 그는 이갑성 등에게도 유인물을 전달하여 조선 각지로 배포하게 했다. 당시 3·1독립운동 선언서에 민족 대표자 서명을 받을 때 서명했지만 함태영의 서명은 제외했는데, 이는 서명한 민족대표자 중 기독교계 대표자 16명의 가정과 생계문제를 맡아야 될 인물로 지명되어 함태영의 서명은 제외시켰다. 그는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8년 서대문 형무소 외곽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당시 만세 운동에 서명하지 않았던 이상재도 관련자로 의심받고 체포되어 왔다. 만세 운동의 전개 과정을 접해서 알던 이상재는 고민했고, 함태영은 그에게 끝까지 모른다고 말하라고 부탁했다. 이상재는 함태영이 수감에서 풀려날 때까지 3.1 만세 운동 관련 수감자들 중 기독교계 참여자 가족들의 생계를 지원하였다. 6개월간 조사 받던 이상재는 혐의 없음으로 기소중지되었다.

수감 중에도 그는 간수들을 원망하거나 폭언을 하지 않고 조용히 타일렀으며, 오히려 간수들에게 공격적으로 대하는 다른 만세참여자나 다른 죄수들을 설득시켰다. 함태영이 투옥된 실에는 일본인 간수들이 상주하였다. 함태영은 자신의 담당 간수를 볼때 마다 "너희들 잘못이 아니다. 우리는 조선 사람 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나라를 찾으려는 것 뿐이었다 " 라고 타이르곤 했다.[20] 그 간수는 그 뒤 비번 때 바깥에 다녀와서는 사회 움직임 이라 든지 여러 가지 새소식 을 적어주는 등 편의를 보아 주었다.[20] 또 사식을 차입할 때 밥 속에 쪽지를 넣어도 걸리지 않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한다.[20]

1919년 7월 서대문형무소 투옥 상태에서 2심 재판을 받고, 1919년 10월 30일 3심에서 출판물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2. 4. 4. 복역 생활과 재판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당시 만세 운동에 서명하지 않았던 이상재도 관련자로 의심받고 체포되어 왔다. 만세 운동의 전개 과정을 접해서 알던 이상재는 고민했고, 함태영은 그에게 끝까지 모른다고 말하라고 부탁했다. 이상재는 함태영이 수감에서 풀려날 때까지 3.1 만세 운동 관련 수감자들 중 기독교계 참여자 가족들의 생계를 지원하였다. 6개월간 조사 받던 이상재는 혐의 없음으로 기소중지되었다.

수감 중에도 그는 간수들을 원망하거나 폭언을 하지 않고 조용히 타일렀으며, 오히려 간수들에게 공격적으로 대하는 다른 만세참여자나 다른 죄수들을 설득시켰다. 함태영이 투옥된 실에는 일본인 간수들이 상주하였다. 함태영은 자신의 담당 간수를 볼때 마다 "너희들 잘못이 아니다. 우리는 조선 사람 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나라를 찾으려는 것 뿐이었다 " 라고 타이르곤 했다.[20] 그 간수는 그 뒤 비번 때 바깥에 다녀와서는 사회 움직임 이라 든지 여러 가지 새소식 을 적어주는 등 편의를 보아 주었다.[20] 또 사식을 차입할 때 밥 속에 쪽지를 넣어도 걸리지 않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한다.[20]

1919년 7월 서대문형무소 투옥 상태에서 2심 재판을 받고, 1919년 10월 30일 3심에서 출판물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1921년 12월 23일 투옥된지 2년 만에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함태영은 수감, 복역중인 민족대표자 중 다른 기독교 대표자들의 가족들의 생계를 해당 당사자의 출옥 전까지 지원하였다.

2. 4. 5. 목사 안수

1921년 12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2] 경술국치 이전에 이미 집사와 장로 직분을 얻었던 그는 출옥 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922년 12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경충노회에서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았다.[2] 이후 장로회 총회장, 조선신학원 이사장 등을 지냈으며,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락, 교신활동을 하였고 독립군 활동 자금을 모금 후 임시정부로 보내기도 하였다.

1922년 12월 경충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충청북도 청주부 청주읍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3년 9월 8일부터 9월 13일까지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열린 조선장로회 총회에서 제12대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1924년 9월 13일에서 9월 18일 함북 신창리교회에서 이자익을 후임자로 선출할 때까지 총회장으로 재직했다.

1925년 한국장로교총회 특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26년 청주교회 담임목사 재직 중 충청노회 노회장에 선출되어 겸직하였다. 1926년 9월 10일부터 9월 19일에는 평양에서 열린 조선장로회총회에 참여하여, 일본 문부성종교법안 반대에 기독교 장로교회 측 진정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왔다.

1927년 12월마산 문창교회의 제6대 목사[21][22]로 부임하여 교회를 안정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28년에는 경남노회 노회장에 선출되었고, 1929년 마산 문창교회 목사직을 사임하였다.

1929년 12월 경성 연동교회의 초빙을 받고 연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가 대한제국 시절 한성에서 처음 평신자로 다녔던 교회였다. 1929년 평양숭실전문학교 이사, 1930년 조선예수교회서회(書會) 이사 등을 거쳐 1932년에는 연동교회 담임목사 재직 중 경성노회(京城老會) 노회장에 선출되었다. 1933년 조선기독교 연합공의회 회장을 지냈다.

2. 4. 6. 목회 활동

1921년 12월 23일 투옥된 지 2년 만에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함태영은 수감, 복역 중인 민족대표자 중 다른 기독교 대표자들의 가족들의 생계를 해당 당사자의 출옥 전까지 지원하였다. 1921년 12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경술국치 이전에 이미 집사와 장로의 직분을 얻었던 그는 출옥 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했으며, 1922년 12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경충노회에서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장로회 총회장, 조선신학원 이사장 등을 지냈으며, 상하이 임시정부와의 연락, 교신 활동을 하였고 독립군 활동 자금을 모금 후 임시정부로 보내기도 하였다. 1922년 12월 경충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충청북도 청주부 청주읍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23년 9월 8일부터 9월 13일까지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열린 조선장로회 총회에서 제12대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1년 뒤 1924년 9월 13일에서 9월 18일 함북 신창리교회에서 이자익을 후임자로 선출할 때까지 총회장으로 재직했다.

1922년 12월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청주교회(淸州敎會)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경남 마산의 마산교회의 목사 임명 문제를 놓고 분쟁이 발생하여 장로회총회가 개입하게 되자, 그는 기독교장로회 총회의 특별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어 마산으로 부임하여 협상에 참여하였다. 1925년 한국장로교총회 특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당시 그는 경남노회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1926년 청주교회 담임목사 재직 중 충청노회 노회장에 선출되어 겸직하였다.

1926년 9월 10일부터 9월 19일에는 평양에서 열린 조선장로회총회에 참여하여, 일본 문부성종교법안 반대에 기독교 장로교회 측 진정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 일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왔다. 함태영은 1927년 12월마산 문창교회의 제6대 목사[21][22]로 부임하여 교회를 안정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28년에는 경남노회 노회장에 선출되었고, 1929년 마산 문창교회 목사직을 사임하였다.

1929년 12월 경성 연동교회의 초빙을 받고 연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가 대한제국 시절 한성에서 처음 평신자로 다녔던 교회였다. 1929년 평양숭실전문학교 이사, 1930년 조선예수교회서회(書會) 이사 등을 거쳐 1932년에는 연동교회 담임목사 재직 중 경성노회(京城老會) 노회장에 선출되었다. 1933년 조선기독교 연합공의회 회장을 지냈다.

1933년 6월 27일 정신여학교 후원발기회의 발기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23]

1930년대 중반 그는 적극신앙단과도 관련되었다. 그는 장로교회 내부에서 기호파와 서북파가 갈등할 때, 장로교내 반서북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2월 10일 윤치호, 양주삼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국을 찾아가 기독교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때 함태영은 기독교인들도 죄수들과 자유롭게 대화하도록 허용해줄 것을 제안하였다. 1935년 9월 19일 중앙 YMCA로 찾아가 윤치호에게 연동교회 재건축 비용 2만 5천 엔을 기부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935년 11월 18일에는 경성에서 열린 장로회 경성노회에서 적극신앙단과 관련되어 함태영과 전필순, 권영식 등 목사 3명의 회원권 정지를 가결하였다.

1936년 5월 15일 경성부 수송정 116번지에서 기독교계 연합회 신문인 기독신보사(基督申報社) 창립에 참석하고, 기독신보사의 장로교측 이사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후반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장, 평양숭실전문학교(平壤崇實傳門學敎) 재단 이사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37년조선총독부의 신사 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당하기도 하였다. 1938년에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보고서에 동지회, 흥업구락부의 관련 인사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었다. 1938년 10월 16일의 조선신궁 신사 참배 당시 소집에는 응하였으나 신사 참배는 거부하였다. 1940년 일제는 그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하였으나 거절하였다. 학도병 권유문 및 각종 서명, 기고, 참여 요구를 거절하고, 목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1939년 2월부터 조선신학교 설립을 추진, 송창근, 김대현, 김영주 등과 함께 조선신학원 설립기성회를 결성하고 신학교 설립기성준비위원이 되고, 1940년 4월 19일 경성부 종로구 인사정 승동교회 내에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 전신) 설립, 개강과 동시에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설립 당시 조선신학교는 장로교와 감리교회 등 기독교 교파의 연합으로 운영하였으나 1943년 감리교 측과 분리하여 장로교 위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1941년 연동교회 목사직에서 퇴직하고 원로목사에 추대되었으며, 1943년 6월 조선신학원 원장에 추대되었다. 그밖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평양숭실학교의 재단 이사로도 활동했다. 1943년 세 번째 부인 고숙원이 사망했다. 이후 함태영은 재혼하지 않고 살아남은 두 아들을 혼자 양육하였다.

1945년 해방 직전 경성부 송파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였고, 1945년부터 1946년까지 초동교회 초대 목사로 시무했다. 해방 직후, 혼란한 정국에서 기독교 조직을 재건하고 선교 지원 사업을 펼쳤다. 기독교 재건 및 선교 사업 활동 중 기독교 신앙을 비판, 반대하던 공산주의자들과 충돌하였다.

2. 5. 광복 이후

1956년 논개의 사당인 의암사 현판을 썼다. 같은 해 부통령 퇴임 직후 외교관 여권으로 출국,[42] 8월 캐나다 연합교회 초청으로 김정준 등과 함께 캐나다 연합교회 총회에 한국기독교 대표자로 참석했다. 이후 성지순례를 하고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를 방문, 각국의 기독교 연합회 대표자들을 만나고 기독교 유적지를 답사한 뒤 일본을 방문했다가 1957년 1월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그의 12개국 성지순례 및 기독교 유적지 시찰은 김정준에 의해 그해 11월 1일 《함태영옹 세계 일주기》라는 책으로 발간되었다.

1957년 6월 한국에 입국한 서독프랑스가톨릭 추기경 일행을 만났다. 1959년 2월 한국신학대학 학장직을 사퇴하고, 3월 한신대학교 명예학장에 추대되었다.

1960년 1월 20일 자유당 당무회의에서 자유당 제4대 정부통령 선거 선거대책위원회 지도위원(이갑성과 공동)에 선출되었고, 1월 22일 자유당과 구 대한국민당계 등 범여권의 선거대책위원회 고문(이갑성과 공동)에 선출되었다.

1960년 4월 25일 자유당 정권 붕괴 후, 야당 정치인과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1961년 1월 22일 오후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북아현동에서 자동차 고장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전치 1주의 부상을 당하였다. 제2공화국 출범 이후 그는 윤치영, 이범석, 장택상, 허정 등과 함께 이승만 박사 환국운동 본부를 조직하고 이승만 귀국 운동을 추진했다.

2. 5. 1. 광복 직후

1945년 9월 2일 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다.[24] 9월 8일 미군정 주둔 후, 미군정 관재국장 남궁혁 목사를 통해 서울역 근처(용산구 동자동 15번지) 일본 천리교 조선교구 본부 및 경성교구 본부 건물을 인수받았다. 이후 조선신학교에 합류, 이사장에 선출되었다.[24]

1945년 10월, 35년 만에 귀국한 이승만의 부름을 받았다.[24] 1946년 2월 미군정 하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에 선출되었다.[24]

1945년 12월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요인 귀국 환영회에 참석,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12월 23일 김구 주관 순국선열 추념대회 부위원장[26], 12월 30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27]

이후 남조선장로회총회부회장, 1946년 장로교 경기노회 노회장을 역임했다.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28][29], 민주의원 의원직은 거부했다.[30] 1947년 조선신학교 졸업생들과 이단 교수 조사위원회 조사위원[31], 1948년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했다. 한국신학대학 학장, 이사장을 역임했다. 1946년 6월 15일 삼의사 유골을 영접했다.

1946년 6월 11일 경성 승동교회에서 열린 제1회 남부대회에서 부대회장으로 추대, 제33차 장로회총회 및 제1차 남부대회에서 조선장로회총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조선기독교총회 부회장, 기독교언론 기독공보사 사장에 선출되었다.

1946년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창립, 1대 기념사업회장에 선출되었다.

1947년 1월 조선농민복음학교 설립, 4월 7일 개교, 3월 10일 덕수교회 창립, 1947년 4월 남부총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2. 5. 2. 해방정국의 정치 활동

1945년 9월 2일 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24] 같은 해 9월 8일 미군정 주둔 후, 미군정 관재국장 남궁혁 목사를 통해 서울역 근처 천리교 조선교구 본부 건물 등을 인수받아 조선신학교에 합류시켰다.[24]

1945년 10월, 귀국한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조선호텔에서 만났다. 1946년 2월 이승만의 추천으로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이 되었다.[24] 그는 해방 정국에서 주춧돌 역할을 자처하였다.[25]

1945년 12월 임시정부 요인 귀국 환영회와 순국선열 추념대회(부위원장)에 참석했다.[26] 김구의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동참하여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27]

1946년 남조선장로회총회 부회장, 장로교 경기노회 노회장에 선출되었다. 같은 해 2월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28][29], 민주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사양했다.[30] 1947년 조선신학교 이단 교수 조사위원회 조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31]

1948년 민족주의 우파 진영이 단독정부 수립 찬반으로 나뉘자 이승만을 따라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다. 조선신학원 이사장, 한국신학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1946년 6월 삼의사 유골 영접에 참석했다.

1946년 배은희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기독교총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기독공보사 사장에 피선되었다. 이준열사기념사업회 창립에 참여, 기념사업회장에 선출되었다.

1947년 서울 인현동에 조선농민복음학교를 설립, 개교하였다. 덕수교회 창립 예배를 주관하고, 남부총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48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이승만은 그를 대법원장 또는 법무부 장관으로 고려했으나 무산되었다.[24] 1948년 12월 반민특위 특별재판장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낙선하였다.[32]

1949년 제2대 심계원장에 취임했다.[16][33]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피난, 조선신학대학장 임시서리를 겸임했다. 심계원장 시절, 동명이인 함태영 목사를 내무부 지방국장에 추천했으나 사양했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조선신학교 무기휴학, 송창근 교장 피랍 후 혼란을 수습했다.

1951년 원내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34] 1952년 한국신학대학교 학장에 추대되었다.[35] 코이노니아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되었다.

1952년 제3대 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이승만의 권유와 미국의 지지로 당선되었다. 1952년 7월 심계원장에서 물러나 심계관에 임명되었다.

2. 5. 3. 심계원장과 부통령 출마

1948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이승만은 함태영을 초대 내각에 참여시키려 했지만, 함태영이 고령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24] 1949년 제2대 심계원장에 취임하였고,[16][33]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피신하였다.

한국 전쟁 중이던 1951년 5월 16일 제2대 부통령 선거에서 원내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34] 낙선하였다. 1차 지명전에서 17표, 2차 지명전에서는 10표를 받았다.

1952년 5월, 제2대 부통령김성수가 부통령직에서 사퇴하자, 무소속으로 제3대 부통령으로 출마하였다. 이승만은 그에게 부통령 출마를 권유했고, 이범석의 성장을 두려워한 이승만의 사전 포석과, 이승만의 강경파 측근들의 존재를 우려하던 미국 역시 함태영을 지지하였다. 7월 24일까지 출마 의사를 보이지 않다가 7월 27일에 부통령 출마를 선언하였다.

자유당의 2인자였던 이범석의 성장을 두려워한 이승만의 지원으로 경쟁자인 이범석을 누르고 80세의 나이에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함태영은 이범석을 112만 표 차로 승리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함태영(咸台永) https://encykorea.ak[...] 2022-08-23
[2] 간행물 官報 1920年12月4日 一三七頁 https://dl.ndl.go.jp[...]
[3] 뉴스 正義세 우려 매 를맞았네 咸台永翁 國民葬嚴修 http://gonews.kinds.[...] 東亜日報 1964-10-30
[4] 웹사이트 강릉함씨 - 디지털김제문화대전 http://gimje.grandcu[...] 2023-09-04
[5] 서적 송암 함태영 연세대학교대학출판문화원 2022-04-08
[6] 백과사전
[7] 서적 총회를 섬겨온 일꾼들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8] 서적 한국의 법률가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9] 서적 한국의 법률가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10] 서적 한국사 시민 강좌 일조각 2008
[11] 서적 한국의 법률가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12] 서적 근대사법 100년이 낳은 한국의 법률가像 길안사 1995
[13] 서적 한국의 법률가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14] 뉴스 [법조인 열전 ④] 법관양성소 1회 수석졸업생 함태영의 생애 - 대한변협신문 http://news.koreanba[...] 2016-10-30
[15] 웹사이트 Çѱ¹±âµ¶±³»ç http://www.hyosun.or[...]
[16] 웹사이트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17] 웹사이트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18] 웹사이트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19] 웹사이트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
[20] 서적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서대문형무소 서대문구청 2000
[21] 뉴스 한국의 역사교회―(17) 마산 문창교회 '복음 횃불' 밝혀 애국운동 http://news.kukinews[...] 국민일보 2009-04-24
[22] 뉴스 한국교회 120년 (29) 경남지역의 기독 유적지 http://missionlife.k[...] 국민일보 2003-04-09
[23] 뉴스 http://newslibrary.n[...]
[24] 서적 한국의 법률가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25] 서적 근대사법 100년이 낳은 한국의 법률가像 길안사 1995
[26] 서적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27] 서적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28] 서적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6
[29] 서적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사 국학자료원 2006
[30] 서적 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 역사비평사 2006
[31] 서적 벽도 밀면 문이 된다 생각나눔 2008
[32] 뉴스 http://newslibrary.n[...]
[33] 백과사전
[34] 서적 한국정치론 오름 2006
[35] 기타
[36] 서적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37] 서적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 연세대학교출판부
[38] 웹사이트 함태영 - Daum 백과사전 http://enc.daum.net/[...]
[39] 서적 송건호 전집 09:민주언론 민족언론 2 한길사
[40] 뉴스 [제784호] 서민들 애환 맺힌 ‘정치의 광장’ : 특집 : 뉴스 : 돌아온 산, 남산 : 한겨레21 http://h21.hani.co.k[...] 한겨레21
[41] 뉴스 記念事業會 發足 동아일보 1955-03-05
[42] 기타
[43] 뉴스 혼돈의 해방공간서 자유민주주의 초석을 놓다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8-08-22
[44] 서적 연동교회 100년사 금명문화사
[45] 뉴스 한국의 보배 함병춘… 강단 그리워한 진정한 공복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3-05-07
[46] 뉴스 한국의 보배 함병춘… 강단 그리워한 진정한 공복 http://news.hankooki[...] 한국일보 2003-05-07
[47] 뉴스 大同江流에 慘沒한 遠來의 受驗學生 두 학우와 뽀트타다 충돌되여 學校길이 黃泉길 매일신보 1930-04-0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