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주 황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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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항주 황씨는 명나라 출신 황공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황공은 명나라에서 기산 지휘사, 중도유수를 지냈으며, 1645년 명나라가 멸망하자 소현세자와 함께 조선에 귀화했다. 후손들은 경기도 가평군 하면 마일리에 정착하여 항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조선 정조는 명나라 자손을 우대하여 황공의 후손들을 등용하고 녹봉을 지급했다. 항주 황씨는 경기도 가평군 하면 마일리에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2000년에는 122가구, 402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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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 황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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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유형 | 씨족 |
국가 | 한국 |
지역 | 항저우 |
가명 | |
한자 표기 | 杭州黃氏 |
한국어 표기 | 항주 황씨 |
역사 | |
통계 | |
2000년 인구 | 402명 |
기타 정보 | |
본관 | 절강성 항주시 |
집성촌 | 경기도 가평군 하면 마일리 |
2. 역사
항주 황씨는 명나라 항주(杭州) 출신의 황공(黃功)을 시조로 한다. 황공은 1645년 명나라가 망하자 심양에서 소현세자와 함께 조선으로 귀화하였으며, 그의 후손들은 경기도 가평군에 정착하여 항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6] 이후 조선 정조 대에는 명나라 유민의 후손을 우대하는 정책에 따라 조정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7]
2. 1. 시조 황공
항주 황씨의 시조 '''황공'''(黃功)은 명나라 항주(杭州) 출신이다. 그는 기산 지휘사, 중도유수 등의 관직을 지냈다.[6] 1645년(인조 23년) 명나라가 망하자 심양에서 소현세자와 함께 조선으로 귀화하였다. 이후 황공의 후손들은 경기도 가평군 하면 마일리에 정착 세거하면서 선조의 출신지인 항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1788년(정조 12년), 정조는 명나라 유민의 자손을 서용하기 위해 전당태수(錢塘太守)를 지낸 황공의 증손자인 황세중(黃世中)을 오위장(五衛將)으로 삼았다.[6]
1798년(정조 22년)에는 정조가 중국의 난리를 피해 조선으로 온 황공의 후손들에게 녹봉을 주도록 하였다. 토포사(討捕使) 황세중과 황공의 제사를 받드는 현손(玄孫)인 회양(淮陽)의 유학(幼學) 황성재(黃聖才)는 해당 군영의 권무 군관(勸武軍官)에 부치게 하고, 황세중의 아들인 황윤(黃胤)은 금려(禁旅)에 부쳐 녹봉을 주도록 하였다.[7]
2. 2. 조선 정착
항주 황씨의 시조 황공(黃功)은 명나라 항주 출신으로, 기산 지휘사와 중도유수 등을 지냈다.[6] 1645년(인조 23년) 명나라가 멸망하자 심양에서 소현세자와 함께 조선으로 귀화하였다. 이후 후손들은 경기도 가평군 하면 마일리에 정착하여 살면서 선조의 출신지인 항주를 본관으로 삼아 가계를 이어왔다.정조는 명나라 출신 인물들의 후손을 등용하는 정책을 폈다. 1788년(정조 12년)에는 황공의 증손자인 황세중(黃世中)을 오위장(五衛將)으로 삼았다.[6] 또한 1798년(정조 22년)에는 황공의 후손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토포사(討捕使)였던 황세중과 황공의 제사를 받들던 현손(玄孫) 황성재(黃聖才, 회양 유학)는 해당 군영의 권무 군관(勸武軍官)에 임명되었고, 황세중의 아들 황윤(黃胤)은 금려에 소속시켜 녹봉을 주도록 하였다.[7]
2. 3. 조선 조정의 우대
정조는 명나라 출신인 황공의 후손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1788년(정조 12년)에는 명나라 자손을 등용하기 위해 황공의 증손인 황세중(黃世中)을 오위장으로 임명하였다.[6]또한 1798년(정조 22년)에는 명나라의 혼란을 피해 조선으로 온 황공의 후손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토포사였던 황세중과 황공의 제사를 받드는 현손(玄孫)이자 회양의 유학(幼學)이었던 황성재(聖才)는 해당 군영의 권무군관에 임명되었고, 황세중의 아들 황윤(黃胤)은 금려에 소속되어 녹봉을 받게 되었다.[7]
3. 본관
항주(杭州)는 중국 동부 동중국해 연안에 있는 절강성의 성도이다. 전당강 하구에 위치하며, 서쪽 교외에는 유명한 서호가 있다. 7세기 수나라가 건설한 강남 운하의 종점으로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남송 시대에는 수도가 되었는데, 처음에는 임시 수도라는 뜻에서 행재(行在)라고 불리다가 이후 임안(臨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0세기 이후에는 외국 선박의 출입이 잦은 국제 무역항으로 번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19세기 태평천국 운동 당시 큰 피해를 입었고, 난징 조약으로 상하이가 개항하면서 항구로서의 기능은 상하이에 넘겨주게 되었다. 현재는 절강성의 정치·경제·문화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4. 인물
황공의 셋째 아들 황용(用)은 통정대부로 승정원 좌승지를 지냈으며, 손자 황수명(秀命)은 가선대부로 호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황공의 증손 황세중(黃世中)은 능천 현감을 거쳐 오위장을 지냈고, 황재겸(載謙)은 전주 중군을 역임하였다.[8]
5. 집성촌
6. 인구
대한민국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항주 황씨의 인구는 다음과 같다.
참조
[1]
뉴스
항주 황씨(杭州黃氏)
http://www.jokbo.re.[...]
부천족보전문도서관
[2]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28
[3]
웹사이트
황씨(黃氏) 본관(本貫) 항주(杭州)입니다.
http://www.findroot.[...]
2023-01-09
[4]
웹사이트
황씨종친회
http://www.hwang.or.[...]
2022-09-04
[5]
역사기록
숙종실록 3권,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4월 1일(기축) 5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6]
역사기록
정조실록 25권, 12년(1788 무신 / 청 건륭(乾隆) 53년) 1월 12일(을해)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7]
역사기록
정조실록 49권, 22년(1798 무오 / 청 가경(嘉慶) 3년) 7월 27일(기축)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8]
도서관
항주 황씨 - 부천족보전문도서관
http://www.jokb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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