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헤로데 왕국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헤로데 왕국은 로마의 개입으로 시작하여 헤로데 대왕의 통치, 사후 분할과 유대 속주 성립으로 이어진 시기를 다룬다.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 하스모네아 왕조의 내분과 로마의 지원을 받은 헤로데의 등장을 거쳐 헤로데 왕조가 수립되었다. 헤로데 대왕은 대규모 건설 사업을 펼쳤으나, 그의 사후 왕국은 분할되었고, 아르켈라오스의 폭정으로 인해 유대 속주가 로마의 직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30년대 설립 - 마사다
    마사다는 사해 연안의 바위산에 있는 고대 요새로, 하스모네아 왕조 시대에 요새화되었으나 헤롯 대왕이 확장했고, 유대-로마 전쟁 중 시카리 반군이 점령하여 로마에 저항하다 함락되었으며, 현대 이스라엘에서 민족적 성지로 여겨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 기원전 1세기 폐지 - 리케이온
    리케이온은 고대 아테네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립한 철학 학교이자 토론 장소로, 다양한 교육과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원을 받아 도서관을 운영했으나, 서기 267년 침략으로 파괴되었다.
  • 기원전 1세기 폐지 - 비티니아
    비티니아는 현재 튀르키예 북서부에 위치한 소아시아 북서부의 고대 지역으로, 산악 지형, 숲, 비옥한 해안으로 이루어져 니코메디아와 니케아 같은 도시가 번성했으며 독립 왕국을 거쳐 로마와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 고대 로마의 종속국 - 쿠시 왕국
    쿠시 왕국은 고대 누비아에 존재했던 왕국으로, 이집트를 정복하여 제25왕조를 세우고 메로에로 수도를 옮겨 철기 기술, 관개 시설, 독자적인 문자 체계를 갖추었으며, 4세기경 악숨 왕국에 의해 멸망하였다.
  • 고대 로마의 종속국 - 에그리시
    에그리시는 3세기 중반 로마 제국 내에서 자치를 누리다 비잔틴 제국의 종속국을 거쳐 7세기 아랍 지배로 멸망하고 압하지아 왕국, 통일 조지아 왕국으로 이어진 흑해 연안 무역의 중심지이자 기독교 국가였다.
헤로데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개요
공식 명칭유대인의 왕국
현지 명칭 (라틴어)Regnum Iudaeorum
현지 명칭 (히브리어)ממלכת היהודים
일반 명칭헤로데 왕국
지위로마 공화국/로마 제국의 종속국
시대아우구스투스 시대
존속 기간기원전 37년 – 기원전 4년
이전 국가하스모니안 왕국
이후 국가헤로데 사두정치
현재 국가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수도예루살렘
공용어코이네 그리스어
아람어
라틴어
히브리어
종교제2성전 유대교
사마리아교
로마 황제 숭배
정치 체제군주제
지도자 칭호유대인의 왕
지도자헤로데 1세
지도자 재임 기간기원전 37년 – 기원전 4년
통화헤로데 주화
성립 사건하스모니안 왕국 정복
멸망 사건사두정치 형성
지도
헤로데 왕국의 지형도
최대 강역의 헤로데 왕국 유대아
헤로데 왕국의 지도
헤로데 1세 시대의 강역

2. 하스모네아 왕조와 로마의 개입

폼페이우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패배한 후, 히르카누스 2세는 자신의 궁정인 이두매아의 안티파테르(안티파스로도 알려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안티파테르는 최초의 로마 총독이 되었다. 기원전 57~55년 시리아 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는 이전의 하스모네아 왕국을 5개의 산헤드린/시네드리온(법정) 지역으로 분할하였다.[6]

2. 1. 로마의 레반트 지역 개입

로마가 이 지역에 처음 개입한 것은 기원전 63년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끝난 후 로마가 시리아 속주를 설립하면서부터이다.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의 패배 후 폼페이우스(폼페이우스 대제)는 기원전 63년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하스모네아 여왕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최근 사망하고 그녀의 아들들인 히르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가 서로 맞서 내전을 벌였다. 기원전 63년 아리스토불루스는 형의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포위되었다. 그는 폼페이우스의 지역 대표인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스카우루스에게 사절을 보냈다. 아리스토불루스는 구출될 수 있도록 거액의 뇌물을 제공했고, 폼페이우스는 즉시 이를 받아들였다. 그 후 아리스토불루스는 스카우루스를 강탈죄로 고발했다. 스카우루스는 폼페이우스의 처남이자 보호자였기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누스 2세를 왕자이자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여 왕국을 통치하게 하였다.[6]

2. 2. 파르티아의 침공과 로마의 개입

기원전 63년, 로마는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끝난 후 시리아 속주를 설립하면서 이 지역에 처음 개입했다.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가 패배한 후,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살로메 알렉산드라 여왕이 사망한 후, 그녀의 아들들인 히르카누스 2세와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내전을 벌였다. 아리스토불루스 2세는 폼페이우스에게 뇌물을 제공하여 구출을 요청했고, 폼페이우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폼페이우스는 히르카누스 2세를 왕자이자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여 왕국을 통치하게 하였다.

폼페이우스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패배한 후, 히르카누스 2세는 이두매아의 안티파테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안티파테르는 최초의 로마 총독이 되었다. 기원전 57년에서 기원전 55년 사이, 시리아 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는 이전의 하스모네아 왕국을 5개의 산헤드린/시네드리온(법정) 지역으로 분할하였다.[6]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로마 공화정 장군 퀸투스 라비에누스는 파르티아 제국의 편에 서서 기원전 40년 로마 영토 침략을 지원했다. 파르티아 군대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넜고, 파코루스 1세의 지휘 아래 페니키아 해안에서 이스라엘 땅을 거쳐 레반트를 정복했다.

파사엘과 히르카누스 2세는 파르티아에 사절로 갔다가 사로잡혔다. 안티고누스는 히르카누스 2세의 귀를 잘라 대제사장직에 부적합하게 만들었고, 파사엘은 처형되었다. 히브리어 이름이 맛다디아스였던 안티고누스는 단 3년 동안 왕과 대제사장 칭호를 가졌다. 그는 도망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지원을 구한 헤로데를 제거하지 못했다. 헤로데는 기원전 40년 로마 원로원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지명되었다.[8]

안토니우스는 헤로데를 유대인의 왕으로 만들기로 결정하고, 원로원에게 헤로데가 왕이 되는 것이 파르티아 제국과의 전쟁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찬성했고, 안토니우스는 헤로데의 즉위 첫날 연회를 베풀었다.[8]

그 후 몇 년 동안 투쟁이 계속되었지만, 파르티아의 패배 후 헤로데는 기원전 37년 라이벌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안티고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인도되어 처형되었고, 이로써 이스라엘에 대한 하스모네아의 지배는 끝났다.

3. 헤로데 왕조의 부상과 통치

헤로데 왕은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헤로데 건설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통치 아래 유대는 전례 없는 건설 사업을 경험했고,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그 지역의 풍경에 남아 있다. 그의 사업으로 마사다 요새, 헤로디온, 카이사레아 마리티마의 대규모 항구가 건설되었다.

헤로데는 하스모네아 왕조의 마지막 남성 대표들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기원전 40년 파르티아에 억류되었다가 기원전 36년에 바빌로니아 유대인들 사이에서 4년간 살았던 히르카누스 2세를 예루살렘으로 초청하여 국가 평의회 의장직을 맡겼으나, 기원전 30년 그를 처형하였다. 하스모네아 공주 마리아мне와 결혼했으나, 그녀 또한 궁정 음모와 권력 투쟁으로 인해 기원전 29년에 처형되었다.

3. 1. 헤로데의 왕위 등극

기원전 40년, 히르카누스 2세는 파르티아에 억류되어 4년간 바빌로니아 유대인들 사이에서 살았는데, 그들은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기원전 36년, 헤로데는 히르카누스가 파르티아인들을 설득하여 왕위를 되찾도록 도울까 봐 두려워하여 그를 예루살렘으로 초청했다. 바빌로니아 유대인들은 그에게 경고했지만, 헤로데는 그를 존경하며 맞이하고 식탁에서 첫 번째 자리를 주었으며, 국가 평의회 의장직을 맡기면서 그를 제거할 기회를 기다렸다. 마지막 남은 하스모네아인으로서 히르카누스는 헤로데에게 위험한 경쟁자였기에, 기원전 30년 아라비아 왕과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헤로데 왕의 통치 기간 동안 하스모네아 왕조의 마지막 남성 대표들은 제거되었고, 헤로디아와 그의 딸 살로메만 살아남았다. 헤로디아는 알렉산더의 손녀였기에 살아남은 몇 안 되는 하스모네아 여성 상속자 중 한 명이었다. 헤로디아는 하스모네아 공주 마리아мне의 손녀였다. 마리아мне는 궁정 음모와 내부 권력 투쟁으로 인한 의심스러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기원전 29년에 처형되었지만, 그녀의 손녀 헤로디아와 증손녀 살로메는 살아남았다. 헤로디아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두 번째 남편 헤로데 안티파스와 함께 갈리아로 추방되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조카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새로운 로마 황제 칼리굴라에 대한 음모 혐의를 받았고, 칼리굴라는 그를 갈리아로 추방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하스모네아 여성 상속자인 헤로디아와 함께 있었다.

3. 2. 헤로데의 통치와 건설 사업

헤로데 왕은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헤로데 건설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통치 아래 유대는 전례 없는 건설 사업을 경험했고,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그 지역의 풍경에 남아 있다. 그의 사업으로 마사다 요새, 헤로디온, 카이사레아 마리티마의 대규모 항구가 건설되었다.

3. 3. 하스모네아 왕조의 몰락

아리스토불루스 3세는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장남 알렉산더의 손자이자 하스모네아 공주 마리아мне의 남동생으로, 잠시 대제사장을 맡았으나 헤로데의 첫 번째 부인 도리스의 질투로 인해 기원전 36년에 처형당했다. 그의 누이 마리아мне는 헤로데와 결혼했지만, 암살에 대한 그의 편집증적인 두려움 때문에 희생되었다. 헤로데의 아들인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 4세는 성인이 된 후 아버지에게 처형당했지만, 아리스토불루스 4세는 헤로디아를 낳았다.

히르카누스 2세는 기원전 40년부터 파르티아에 억류되었다가 기원전 36년에 바빌로니아 유대인들 사이에서 4년간 살았다.[1] 그 해, 헤로데는 히르카누스가 파르티아인들을 설득하여 왕위를 되찾도록 도울까 봐 두려워하여 그를 예루살렘으로 초청했다.[1] 헤로데는 그를 존경으로 맞이하고 국가 평의회 의장직을 맡겼지만, 히르카누스는 헤로데에게 위협적인 존재였기에 기원전 30년, 아라비아 왕과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1]

헤로데 왕의 통치 기간 동안 하스모네아 왕조의 마지막 남성 대표들은 제거되었고, 헤로디아와 그의 딸 살로메만 살아남았다.[2] 헤로디아는 알렉산더의 손녀였기에 살아남은 몇 안 되는 하스모네아 여성 상속자 중 한 명이었다.[2] 마리아мне는 궁정 음모와 내부 권력 투쟁으로 인해 의심스러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기원전 29년에 처형되었지만, 그녀의 손녀 헤로디아와 증손녀 살로메는 살아남았다.[2] 헤로디아는 헤로데 안티파스와 함께 갈리아로 추방되었다.[2] 헤로데 안티파스는 아그리파 1세에 의해 로마 황제 칼리굴라에 대한 음모 혐의를 받고 갈리아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헤로디아와 함께 있었다.[2]

후대의 헤로디아 통치자 아그리파 1세와 그의 아들 아그리파 2세는 모두 하스모네아의 혈통을 이어받았지만, 남성 후손이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에게 합법적인 통치자로 여겨지지 않았다.[2]

4. 헤로데 사후 분할 통치와 유대 속주 성립

헤로데 사후 그의 왕국은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고, 이들은 왕(basileus) 칭호를 받지 못했다. 헤로데 아르켈라오스유대, 사마리아, 이두메아 지역의 민족장(ethnarch)으로 통치했으나, 폭정으로 인해 기원후 6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해임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백성들의 호소에 따라 퀴리니우스를 파견하여 직접 통치하게 했고, 유대 속주가 성립되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페레아의 테트라르크로 기원후 39년까지 통치하다 칼리굴라에 의해 해임되었고, 필립푸스는 이트리아, 트라코니티스, 바타네아, 가울라니티스, 아우라니티스, 파네아스의 테트라르크로 기원후 34년까지 통치했다.

4. 1. 헤로데 왕국의 분할

헤로데는 기원전 4년에 사망했고, 그의 왕국은 세 아들 사이에 분할되었으며, 그들 중 누구도 왕(basileus) 칭호를 계승하지 못했다. 헤로데 아르켈라오스는 민족장(ethnarch) 칭호를 취하고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아를 통치했으나, 폭정을 저질러 기원후 6년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해임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헤로데 아르켈라오스의 백성들의 호소에 따라 퀴리니우스를 임명하여 직접적인 로마 통치를 실시하게 하였고, 이로써 유대 속주가 형성되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39년까지 갈릴리와 페레아의 테트라르크로 통치하다가 칼리굴라에 의해 해임되었고, 필립푸스는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34년 사망할 때까지 이트리아, 트라코니티스, 바타네아, 가울라니티스, 아우라니티스, 파네아스의 테트라르크로 통치했다.

4. 2. 유대 속주 성립

헤로데가 기원전 4년에 사망하자 그의 왕국은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으며, 세 아들 모두 왕(basileus) 칭호를 받지는 못했다. 헤로데 아르켈라오스는 민족장(ethnarch) 칭호를 받고 유대, 사마리아, 이두메아를 통치했으나, 폭정을 일삼아 기원후 6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해임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헤로데 아르켈라오스의 백성들의 호소에 따라 퀴리니우스를 파견하여 직접 통치하게 하였고, 이로써 유대 속주가 성립되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39년까지 갈릴리와 페레아의 테트라르크로 통치하다 칼리굴라에게 해임되었고, 필립푸스는 기원전 4년부터 기원후 34년 사망할 때까지 이트리아, 트라코니티스, 바타네아, 가울라니티스, 아우라니티스, 파네아스의 테트라르크로 통치했다.

참조

[1] 서적 History of the Christian tradition (Vol. 1) Paulist Press
[2] 서적 Herod's Judaea: A Mediterranean State in the Classic World https://books.google[...] Wipf and Stock Publishers
[3] 웹사이트 Josephus, Wars Book I http://earlyjewishwr[...] 2019-10-26
[4] 서적 The Roman Near East: 31 BC–AD 337 Harvard University Press 1995-03-15
[5] 서적 The Roman Near East, 31 B.C.–A.D. 337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3
[6] 웹사이트 Antiquities of the Jews 14.5.4 & Jewish Encyclopedia: Sanhedrin https://www.perseus.[...] 2008-03-27
[7] 서적 Chapter I
[8] 웹사이트 Josephus, Wars Book I http://earlyjewishwr[...] 2011-09-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