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타키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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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타키 제국은 18세기 초 아프가니스탄에서 성립하여 잠시 페르시아를 지배했던 왕조이다. 16세기부터 사파비 왕조의 지배를 받던 칸다하르 지역에서 수니파 파슈툰족이 사파비 왕조에 반기를 들면서 시작되었다. 미르와이스 호타크는 1709년 사파비 왕조 총독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후 호타키 왕조는 이스파한을 점령하며 사파비 왕조를 멸망시켰다. 하지만 호타키 왕조는 페르시아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내분과 나데르 샤의 공격으로 1738년 멸망했다. 호타키 제국은 미르와이스 호타크, 압둘 아지즈 호타크, 마흐무드 호타크, 아슈라프 호타크, 후세인 호타크 등의 통치자를 거쳤으며, 왕조의 명칭은 자료에 따라 다르게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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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타키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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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일반 명칭 | 호타크 왕조 |
완전한 국명 | 호타크 왕조 |
시대 | 근세 |
시작 연도 | 1709년 |
종료 연도 | 1738년 |
이전 국가 | 사파비 제국 무굴 제국 |
이후 국가 | 아프샤르 제국 |
시작 날짜 | 4월 21일 |
종료 날짜 | 3월 24일 |
시작 사건 | 미르와이스 호타크의 반란 |
종료 사건 | 칸다하르 포위전 |
![]() | |
수도 | 칸다하르 (1709년–1722년, 1725년–1738년) 이스파한 (1722년–1729년) |
공용어 | 파슈토어 (시) 페르시아어 (시) |
정부 형태 | 절대 군주제 |
통치자 | |
직함 | 아미르 |
통치자1 | 미르와이스 호타크 |
통치자1 재임 기간 | 1709년–1715년 |
통치자2 | 압둘 아지즈 호타크 |
통치자2 재임 기간 | 1715년–1717년 |
통치자3 | 마흐무드 호타크 |
통치자3 재임 기간 | 1717년–1725년 |
통치자4 | 아슈라프 호타크 |
통치자4 재임 기간 | 1725년–1730년 |
통치자5 | 후세인 호타크 |
통치자5 재임 기간 | 1725년–1738년 |
인구 통계 | |
종교 | 수니파 이슬람교 |
2. 역사
16세기부터 18세기 초까지 로이 칸다하르(아프가니스탄 남부 지역)는 시아파 이슬람 왕조인 사파비 왕조의 최동단 지배 지역이었지만, 원래 로이 칸다하르에 거주하던 파슈툰족은 수니파를 신봉했다. 그들의 바로 동쪽에는 수니파의 무굴 제국이 위치해 있었으며, 종종 이 지역에서 사파비 왕조와 전투를 벌였다.[30] 또한, 같은 시기에는 북부 지역이 부하라 칸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17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사파비 왕조는 잦은 분쟁과 종교 대립에 시달리며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1704년, 사파비 왕조 제9대 샤인 후세인은 속국인 카르트리 왕국의 국왕 기오르기 11세 (구르긴 한)을 제국 최동단 총독으로 임명했다.[31] 후세인은 통치력이 부족했고, 이미 국내는 혼란스러웠다. 로이 칸다하르를 포함한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제국에 대한 반란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었고, 총독 기오르기 11세의 임무는 이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이때 구속된 사람들 중 한 명이 훗날 호타키 왕조 초대 수장이 되는 미르와이스 호타크이다. 그는 죄수 신분으로 이스파한의 법정에 송치되었지만, 그에 대한 혐의는 후세인에 의해 면제되어 자유의 몸으로 칸다하르로 돌아갔다.[37]
1709년 4월, 미르와이스는 가즈니 왕조의 흐름을 잇는 나셰르 칸의 지원을 받아[32], 칸다하르에서 사파비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 반역은, 교외의 농장에서 미르와이스가 주최한 연회에 기오르기 11세와 그의 호위를 유인하여 그 자리에서 그들을 살해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 연회에서 제공된 와인에 독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이 지역에 남아 있던 사파비 왕조의 병사들을 살해하도록 명령했다. 이후 그의 군대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스파한에서 파견된 사파비 군을 격파했다. 참고로, 사파비 측 군대는 미르와이스 측의 2배 규모를 자랑했다.[33]
E・G・브라운은 1924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이 반란을 계기로 호타키 왕조가 성립되었지만, 미르와이스는 왕의 칭호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의 아프가니스탄 동향 사람들로부터 칸다하르의 바키르(섭정)이자 국군의 장군으로 불렸다. 그가 1715년 11월에 자연사하자, 그의 형제인 압둘 아지즈에게 그 지위가 계승되었다. 참고로, 후에 그는 미르와이스의 아들인 마흐무드에 의해 살해되었다. 1720년, 마흐무드는 시스탄 사막을 넘어 케르만을 점령했다.[33] 그의 계획은, 사파비 왕조의 수도인 이스파한을 정복하는 것이었다.[38] 1722년 3월 8일, 굴나바드 전투에서 사파비 군을 격파한 그의 군대는 이스파한으로 진격하여, 6개월 동안 이곳을 포위, 함락시켰다.[34] 10월 23일, 후세인은 퇴위하고, 마흐무드를 새로운 샤로 승인했다.[35]
하지만, 페르시아 주민의 대부분은 처음부터 아프가니스탄 반란군이 정권을 찬탈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1729년까지 7년 동안 호타키 왕조가 사실상의 페르시아 지배자였고, 아프가니스탄의 남부와 동부에 한해서는 1738년까지 지배하에 두었다.
호타키 왕조는 분쟁으로 성립된 왕조이므로, 영구적으로 그 영역을 지배하는 것은 어려웠고, 처음부터 그 통치에는 고통과 폭력이 따랐다. 마흐무드는 이스파한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종교학자와 귀족, 사파비 가문 일족 등 3000명 이상)을 학살하는 등 피로 얼룩진 치세를 펼쳤고, 페르시아에서의 왕조의 영향력은 점차 잃어갔다.[36] 한편 호타키 왕조를 일으킨 파슈툰족도, 1709년에 반기를 들기 전까지는 기오르기 11세를 비롯한 사파비 왕조 세력에게 박해받았다.[37]
2. 1. 사파비 왕조의 쇠퇴와 구르긴 칸의 통치
16세기부터 18세기 초까지 칸다하르 지역은 시아파 사파비 왕조의 지배를 받았으나, 현지 주민들은 수니파 무슬림이었다.[4] 17세기 말, 사파비 왕조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이는 투르크멘족, 발루치족, 아랍인, 쿠르드족, 다게스탄인, 파슈툰족과 같은 주변 부족들의 침략을 야기했다.[5][6] 1629년 아바스 1세가 사망한 이후 사파비 왕조의 통치자들은 무능해졌고, 특히 술탄 후세인 통치 하에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5]1704년, 사파비 왕조의 샤 후세인은 구르긴 칸(기오르기 11세)을 칸다하르 총독으로 임명하여 반란을 진압하고자 했다.[7][6] 구르긴 칸은 칸다하르의 시장(''칼란타르'')이자 길자이족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인 미르와이스 호타크와 마주했다.[8][6] 그러나 구르긴 칸의 가혹한 통치는 오히려 현지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길자이족은 사파비 왕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9] 미르와이스는 이러한 반란에 연루되었고, 구르긴 칸은 미르와이스를 이스파한으로 보냈으나, 미르와이스는 그곳에서 사파비 궁정의 약점을 간파하고 샤와 궁정을 설득하여 구르긴 칸에게 등을 돌리게 하였다.[5][8][6] 이후 메카로 순례를 떠나 종교 당국으로부터 폭압적인 사파비 통치를 전복하려는 계획을 승인하는 ''파트와''를 얻는 데 성공했다.[9][8][6]
2. 2. 미르와이스 호타크의 봉기 (1709년)
17세기 후반, 사파비 왕조는 잦은 분쟁과 종교 대립으로 쇠퇴하고 있었다.[31] 1704년, 후세인은 카르트리 왕국의 왕 기오르기 11세 (구르긴 칸)를 제국 최동단 총독으로 임명하여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31] 이때 구속된 사람 중 하나가 훗날 호타키 왕조의 초대 수장이 되는 미르와이스 호타크였다. 그는 이스파한의 법정에 송치되었지만, 혐의가 면제되어 칸다하르로 돌아갔다.[37]미르와이스 호타크는 칸다하르의 유력자로, 구르긴 칸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봉기를 계획했다. 그는 사파비 궁정의 약점을 간파하고,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파트와(fatwa)를 얻어 봉기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1709년 4월, 미르와이스는 가즈니 왕조의 흐름을 잇는 나셰르 칸의 지원을 받아[32] 칸다하르에서 사파비 왕조에 반기를 들었다.[11] 그는 교외 농장에서 주최한 연회에 구르긴 칸과 그의 호위를 유인하여 살해했다.[12][8][6][5][9] 이어서 그는 이 지역에 남아 있던 사파비 왕조의 병사들을 살해하도록 명령했다. 이후 그의 군대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스파한에서 파견된 사파비 군을 격파했다. 사파비 군대는 미르와이스 군대의 2배 규모였지만, 미르와이스는 승리했다.[33]
사파비 왕실은 카이호스로 칸에게 12,000명의 병력을 주어 칸다하르를 재탈환하게 했다.[8] 그는 압달리 부족의 지원을 받았지만,[6][5][10] 왕실의 지원 부족으로 군대는 더디게 진군했다.[8] 1711년 여름, 카이호스로는 칸다하르를 포위했지만, 겔자이가 평화를 청하자 이를 거부하여 전투가 계속되었다. 발루치족의 공격과 칸다하르 수비대의 추격으로 카이호스로는 사망했다.[8][6][5] 1712년에 또 다른 페르시아 군대가 파견되었지만, 지휘관이 헤라트에서 사망하여 칸다하르에 도착하지 못했다.[8]
이 반란을 계기로 호타키 왕조가 성립되었지만, 미르와이스는 왕의 칭호를 거부하고 칸다하르의 바키르(섭정)이자 국군의 장군으로 불렸다. 그는 1715년 11월에 자연사했고, 그의 동생인 압둘 아지즈가 그 뒤를 이었다.[8]
2. 3. 호타키 왕조의 이란 침공과 사파비 왕조 멸망 (1722년)
1715년 11월, 미르와이스 호타크가 자연사한 후, 그의 형제인 아브둘 아지즈 호타키가 그 뒤를 이었으나, 곧 미르와이스의 아들인 마흐무드 호타키에게 살해되었다.[33] 1720년, 마흐무드의 아프간군은 시스탄 사막을 건너 케르만을 점령했다.[13][33] 그는 페르시아의 수도인 이스파한을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19][38]1722년 3월 8일, 굴나바드 전투에서 사파비 왕조의 군대를 격파한 마흐무드는[14][34] 이스파한을 포위했다.[14] 포위는 약 6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이스파한 사람들은 너무 굶주려서 쥐와 개를 먹어야 했다.[15] 결국 1722년 10월 23일, 술탄 후세인은 퇴위하고 마흐무드를 새로운 페르시아의 샤로 인정했다.[16][35]
이후 1729년까지 7년 동안 호타크는 페르시아 대부분 지역의 사실상 지배자가 되었으며, 아프가니스탄 남부 지역은 1738년까지 그들의 통제 하에 있었다. 하지만, 페르시아 주민의 대부분은 처음부터 아프가니스탄 반란군이 정권을 찬탈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호타키 왕조는 분쟁으로 성립된 왕조이므로, 영구적으로 그 영역을 지배하는 것은 어려웠고, 처음부터 그 통치에는 고통과 폭력이 따랐다. 마흐무드는 이스파한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종교학자와 귀족, 사파비 가문 일족 등 3000명 이상)을 학살하는 등 피로 얼룩진 치세를 펼쳤고, 페르시아에서의 왕조의 영향력은 점차 잃어갔다.[36]
2. 4. 호타키 왕조의 몰락 (1738년)
1725년 샤 마흐무드의 사망 이후 왕위를 계승한 아슈라프 호타크는 사예드 아흐마드가 이끄는 남부 사파비 왕조 지지 운동에 대처해야 했다.[18] 1729년 10월 담간 전투에서 아프샤르 부족 출신 나데르 샤에게 패배하면서, 페르시아에서 길자이 세력은 축출되었다.[19][20]나데르 샤는 압달리 아프간족 일부를 자신의 군대에 징집했고, 아흐마드 샤 압달리와 그의 4,000명의 압달리 병력을 포함한 나데르 샤의 군대는 1738년에 칸다하르를 정복했다.[19][20] 칸다하르를 포위하고 파괴하여 후세인 호타크가 지배하던 호타키 왕조의 마지막 권좌를 무너뜨렸다.[19][20] 이후 나데르 샤는 근처에 자신의 이름을 딴 "나데라바드"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19][20]
16세기부터 18세기 초까지 시아파 사파비 왕조의 최동단 지배 지역이었던 로이 칸다하르(아프가니스탄 남부 지역)의 파슈툰족은 수니파를 신봉했다.[30] 동쪽으로는 수니파 무굴 제국이 위치해 사파비 왕조와 전투를 벌였으며,[30] 북쪽은 부하라 칸국이 지배했다.
17세기 후반, 사파비 왕조는 잦은 분쟁과 종교 대립으로 쇠퇴했다. 1704년 후세인은 카르트리 왕국의 왕 기오르기 11세를 총독으로 임명했으나,[31] 후세인의 통치력 부족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반란이 높아졌다. 미르와이스 호타크는 이스파한에서 혐의를 벗고 칸다하르로 돌아갔다.[37]
1709년 4월, 미르와이스는 가즈니 왕조의 흐름을 잇는 나시르 씨족의 지원을 받아[32] 칸다하르에서 반기를 들었다. 기오르기 11세와 그의 호위를 살해하고, 사파비 군대를 격파했다.[33]
사파비 군대는 반란 진압에 실패했고, 미르와이스는 칸다하르의 섭정으로 불렸다.[33] 1715년 11월 미르와이스가 자연사하자, 아브둘 아지즈 호타키가 계승했으나, 마흐무드에게 살해되었다. 1720년 마흐무드는 시스탄 사막을 넘어 케르만을 점령하고,[33] 1722년 굴나바드 전투에서 승리하여 이스파한을 함락시켰다.[34] 10월 23일 후세인은 퇴위하고 마흐무드를 샤로 승인했다.[35]
페르시아 주민들은 아프가니스탄 반란군을 찬탈자로 인식했다. 호타키 왕조는 피비린내 나는 통치로 페르시아인들의 지지를 잃었다.[36] 1725년 아슈라프 기르자이가 마흐무드를 살해하고 권력을 잡았으나, 1729년 다므간 전투에서 나디르 샤에게 패배했다. 나디르 샤는 길자이 부족 연합 잔당을 추방하고, 두라니 부족 연합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1738년 칸다하르를 점령, 호타키 왕조를 멸망시켰다.
3. 통치자 목록
이름 | 사진 | 통치 시작 | 통치 종료 |
---|---|---|---|
미르와이스 호타크 Woles Mashar | 1709년 | 1715년 | |
압둘 아지즈 호타크 에미르 | ![]() | 1715년 | 1717년 |
마흐무드 호타크 샤 | ![]() | 1717년 | 1725년 |
아슈라프 호타크 샤 | ![]() | 1725년 | 1729년 |
후세인 호타크 에미르 | ![]() | 1729년 | 1738년 |
4. 명칭
일본 자료에서는 미르 와이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일으킨 세력을 "미르 와이스의 칸다하르 왕국[24]"이나 "칸다하르의 아프간계 길자이 부족이 일으킨 반란[25]",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 유목민[26]" 등이라고 칭하며, 특정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란 백과사전에서도 형식적으로 사파비 왕조가 존속했던 것과 함께 호타키 왕조/Hotak dynasty영어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다[27]。
호타키 왕조[28], 또는 호타크[29]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자료는 존재하지만, 본 문서에서 사용하고 있는 호타키 왕조라는 명칭은 이 세력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반드시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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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 부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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