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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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파비 제국은 1501년 이스마일 1세가 건국한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 왕조이다. 페르시아 문화, 전제군주제, 시아파 이슬람을 국가 정체성의 핵심 요소로 삼았으며, 수도를 이스파한으로 옮겨 페르시아 문화를 부흥시켰다. 아바스 1세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지만, 17세기 후반부터 쇠퇴하여 1736년 아프샤르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군사 개혁과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를 통해 세력을 확장하려 했으며, 중앙집권적인 행정 시스템과 농업, 무역을 기반으로 한 경제 체제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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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비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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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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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호 | 보호받는 이란국 |
현지 이름 | (Mamālik-i Mahrūsa-yi Irān) |
일반 명칭 | 사파비 제국 |
시대 | 근세 |
지위 |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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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수도 | 타브리즈 (1501–1555) 카즈빈 (1555–1598) 이스파한 (1598–1736) |
지도자 칭호 | 샤한샤 |
초대 샤한샤 | 이스마일 1세 |
마지막 샤한샤 | 아바스 3세 |
초대 대재상 | 아미르 자카리야 |
마지막 대재상 | 나디르 쿨리 베그 |
입법부 | 국가평의회 |
역사 | |
사파비 교단의 설립 | 사피 앗딘 아르다빌리 |
시작 | 1501년 |
종료 | 1736년 |
주요 사건 | 호타크 왕조의 침략 (1722년) |
재정복 | 나디르 샤의 지휘 아래 (1726–1729) |
나디르 샤 즉위 | 1736년 3월 8일 |
군사 | |
주요 사건 | 샤루르 전투 (1501년) |
인구 | |
1650년 추정 인구 | 800만 ~ 1,000만 명 |
언어 | |
공용어 | 페르시아어 아랍어 아제르바이잔어 조지아어 체르케스어 아르메니아어 |
종교 | |
국교 | 시아 이슬람 열두 이맘파 |
기타 종교 | 수니 이슬람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유대교 |
통화 | |
통화 | 투만 아바시 샤히 |
이전 국가 | |
이전 국가 | 아크 코윤루 아프라시압 왕조 티무르 제국 미흐라반 왕조 시르반샤 카르키야 왕조 마라시스 바두스파니드 |
이후 국가 | |
이후 국가 | 아프샤르 왕조 호타크 왕조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
2. 국호
'''보호받는 이란국''' 또는 '''이란 보호령'''(ممالک محروسهٔ ایران|마말리키 마흐루사이 이란fa)은 사파비 제국의 공식 명칭이었다.[1][2] 페르시아 문화, 전제군주제, 시아파 이슬람이 국가 정체성의 핵심 요소였으며, '보호받는 영역' 내지 '보호령'이라는 개념은 영토적, 정치적 통일성에 대한 당대 인식을 보여준다.[3] 이는 13세기 후반 몽골 지배기와 일 칸국 시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파비 시대에는 토착 지역 문화, 타국과의 무역, 페르시아어, 시아파 이슬람 등의 요소가 추가되어 페르시아 세계 확립에 기여했다.[4] 당대 페르시아인들은 이를 축약하여 '''이란 왕국'''(ممالک ایران|마말리키 이란fa), '''왕실 보호령'''(Mamalik-i mahrusa-yi khusravani), '''황실 보호령'''(Mamalik-i mahrusa-yi humayun)[5], '''이란'''(ایران|이란fa)[6] 등으로 불렀다.
사파비 제국의 기원은 13세기 사피 알딘 아르다빌리가 창시한 수피즘 교단 사파비야에서 비롯된다. 사피 알딘은 자헤드 길라니의 제자가 되어 그의 딸과 결혼하며 후계자가 되었고, 스승이 사망하자 자헤디예를 흡수하고 교단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사파비야'로 변경했다.
'''광대한 이란의 영토'''(ملک وسیعالفضای ایران|물라키 바시 알 파자이 이란fa)라는 명칭은 17세기 페르시아어 연대기 「콜드 에 바린」과 1680년대 시암 주재 사파비 사절단의 여행기 「사파이녜 솔레이마니」에 등장한다. 이는 작가들의 고국 페르시아에 대한 자부심, 존경, 칭찬을 강조하며, 당대 '제국'을 묘사한 페르시아식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7]
3. 역사
사파비야는 수니파 수피즘 교단으로서 페르시아, 시리아, 소아시아, 스리랑카 등지에 포교 활동을 했다. 1447년, 셰이크 주나이드가 수장이 되면서 세속적 권력도 추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카라 코윤루의 자한 샤는 사파비야를 경계하여 주나이드를 추방했고, 주나이드는 아크 코윤루의 우준 하산에게 망명하여 그의 여동생과 결혼하며 동맹을 맺었다. 주나이드는 시르반샤 침공 중 사망했고, 그의 아들 셰이크 하이다르가 뒤를 이었다. 하이다르는 우준 하산의 딸과 결혼하여 아르다빌을 회복하고 세력을 확장했다.
우준 하산 사후, 아크 코윤루의 새 통치자 야쿱은 사파비야를 위협으로 여겨 1488년 시르반샤와 동맹을 맺고 하이다르를 살해했다. 당시 사파비야 추종자들은 대부분 오구즈 튀르크인들로 구성된 키질바시("붉은 머리")였으며, 이들은 사파비야 군사력의 원천이었다.
하이다르 사후, 그의 아들 알리 미르자 사파비가 임시 지도자가 되었으나, 야쿱에게 쫓기다 살해당했다. 알리 미르자는 죽기 전 어린 동생 이스마일에게 수장 자리를 넘겼다.
이스마일 1세는 1501년 타브리즈를 점령하고 샤한샤(왕 중 왕)를 칭하며 사파비 제국을 건국하고, 열두이맘파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선포했다.
티무르 제국 쇠퇴 이후 혼란한 틈을 타 이스마일 1세는 티무르 제국의 잔존 세력, 아크 코윤루 등 경쟁 세력들을 격파하고 페르시아 전역을 통일했다.
사파비 제국은 1501년 아제르바이잔, 시르반, 다게스탄 남부 (데르벤트 포함), 아르메니아 고원을 장악하면서 건국되었으며, 이후 정복 활동을 통해 1510년까지 호라산을 포함한 광대한 지역을 정복했다.
다음은 이스마일 1세의 정복 활동을 정리한 표이다.연도 정복 지역 1501년 아제르바이잔, 시르반, 다게스탄 남부 (데르벤트 포함), 아르메니아 고원 1502년 하마단, 에르주룸, 에르진잔 1503년 시라즈, 케르만 1504년 디야르바크르, 나자프, 카르발라 1508년 반 1509년 바그다드, 헤라트 1510년 호라산 및 기타 지역
1511년에는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이 이끄는 우즈베크인들을 물리치고 중앙아시아로 몰아냈다. 이스마일 1세의 성공적인 정복 활동으로 사파비 제국은 사산 제국 멸망 이후 가장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으로 성장했다.
시아파를 표방했던 사파비 제국의 야심은 서쪽의 수니파 강대국 오스만 제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1514년, 셀림 1세는 찰디란 전투에서 이스마일 1세의 사파비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타브리즈를 함락시켰다. 찰디란 전투의 패배는 이스마일 1세의 무적 신화를 깨뜨렸고, 키질바시 군부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이스마일 1세는 정치에 관심을 잃고 재상에게 국정을 맡기다가 1524년 사망했다.
타흐마스프 1세는 찰디란 전투 이후 분열될 뻔한 사파비 제국을 수습하고 내정에 힘썼다. 또한, 시아파 이슬람 전파에도 노력하였다. 1524년 이스마일 1세가 사망하자, 10살의 어린 아들 타흐마스프 1세가 즉위했으나, 어린 나이와 찰디란 전투의 패배로 인한 권위 실추로 인해 키질바시 부족들 간의 경쟁이 격화되었다.
타흐마스프 1세 시기, 오스만 제국은 시아파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사파비 제국을 위협으로 여겼다. 1514년, 셀림 1세는 찰디란 전투에서 이스마일 1세를 격파하고 사파비 제국의 수도 타브리즈를 점령했다. 타흐마스프 1세는 내분을 수습하고, 키질바시의 영향력을 줄이는 한편 페르시아인 관료를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1555년 아마시아 강화를 통해 양국은 일시적인 평화를 맺었다.
타흐마스프 1세는 조지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군사 원정을 감행했다. 1555년 아마시아 조약을 통해 사파비 제국과 오스만 제국 간의 평화가 이루어졌으며, 이 조약으로 조지아는 동서로 분할되어 동부는 사파비 제국에, 서부는 오스만 제국에 귀속되었다.
무굴 제국의 2대 황제 후마윤이 망명해오자, 타흐마스프 1세는 그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여 칸다하르와 카불을 점령하도록 도왔다.
타흐마스프 1세는 키질바시 부족 엘리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새로운 군사 조직을 만들었다. 1540년, 타흐마스프는 코카서스 지역을 침략하여 체르케스인과 조지아인 포로를 잡아왔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와 유사한 군사 노예 제도의 기초를 형성했다.
타흐마스프 1세 사후, 이스마일 2세와 무함마드 호다반다가 차례로 왕위에 올랐으나, 사파비 제국은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다.
무함마드 호다반다는 무능한 통치로 인해 키질바시 부족 간의 권력 다툼과 외세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은 아마시아 조약을 파기하고 사파비 제국을 공격하여 상당한 영토를 점령했고, 심지어 타브리즈까지 함락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함마드 호다반다의 아들 아바스 1세가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무함마드 호다반다는 아바스 1세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아바스 1세는 1588년에 즉위하여 사파비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아바스 1세는 즉위 당시 내부적으로는 권신이 권력을 휘두르고, 외부적으로는 오스만 제국과 우즈베크인들에게 끊임없이 위협받는 불안정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아바스 1세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먼저 오스만 제국과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영토를 넘겨주었다. 그 후, 1589년 7월에 자신을 섭정으로 칭하며 권력을 휘두르던 무르시드 쿨리 칸을 암살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내부를 안정시켰다.
이후 아바스 1세는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다. 특히, 굴람 상비군을 육성하여 키질바시 전사들에게만 의존하던 군대를 일신했다.
아바스 1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1590년에 잃었던 영토 대부분을 되찾고, 메소포타미아 일부 지역까지 점령했다. 동쪽으로는 우즈베크 세력을 격퇴하고 호라산 지역을 안정시켰다. 조지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고, 쿠르드 반란을 진압했다.
아바스 1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려 했다.
1599년, 아바스 1세는 유럽에 첫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후 유럽과 페르시아 간의 외교 사절단 왕래가 크게 늘었다.
아바스 1세는 합스부르크 스페인과의 동맹에 큰 기대를 걸었으나 호르무즈 영유권 문제로 무산되었다. 이후 아바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 폴란드, 루스 차르국과 관계를 이어나갔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는 소극적이었지만, 페르시아와의 외교 관계에는 적극적이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도 페르시아에 관심을 보였고, 1622년에는 4척의 전함을 파견하여 아바스 1세가 포르투갈로부터 호르무즈를 되찾는 데 도움을 주었다.
1598년 아바스 1세는 수도를 카즈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옮기고, 이스파한을 중심으로 페르시아 문화를 부흥시켰다.
아바스 1세는 아들들이 자신의 제위를 찬탈할 것을 극도로 염려하여, 장남을 처형하고, 차남과 삼남을 실명시킨 뒤 감옥에 가두었다. 이러한 가정사 문제로 인해, 1629년 1월 그가 사망했을 때 사파비 제국에는 적합한 후계자가 없었다.
아바스 1세 사후, 무능한 군주들이 연이어 즉위하면서 사파비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특히,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으로 인해 금속 공급이 고갈되면서 군사력이 약화되었고, 유럽 국가들이 인도양 서부 무역로를 통제하면서 해상 무역로가 단절되어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1722년, 아프간족의 마흐무드 호타크가 굴나바드 전투에서 승리하고 수도 이스파한을 포위하자, 술탄 후사인은 항복하고 폐위되었다. 이후 사파비 제국은 사실상 멸망했다.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체결하여 사파비 제국의 영토를 분할했다.
이후 나디르 샤가 아프샤르 왕조를 건국하면서 사파비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
3. 1. 건국 이전
사파비 제국의 기원은 13세기 사피 알딘 아르다빌리가 창시한 수피즘 교단 사파비야에서 비롯된다. 사피 알딘은 쿠르드계 대가문 출신으로, 자헤드 길라니의 제자가 되어 그의 딸과 결혼하며 후계자가 되었다. 1301년 스승이 사망하자 사피 알딘은 자헤디예를 흡수하고 교단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사파비야'로 변경했다.[287]
사피 알딘 사후, 사파비야는 그의 아들 사드르 앗딘 무사에게 이어졌다. 이때까지 사파비야는 수니파 수피즘 교단으로서 페르시아, 시리아, 소아시아, 스리랑카 등지에 포교 활동을 하는 종교정치세력이었다. 이후 그의 아들 크와자 알리, 이브라힘이 차례로 수장직을 계승했다.
1447년, 셰이크 주나이드가 수장이 되면서 사파비야는 큰 변화를 맞는다. 로저 세보리에 따르면, 주나이드는 영적 권위뿐 아니라 세속적 권력도 추구했다. 당시 카라 코윤루의 자한 샤는 사파비야를 경계하여 주나이드를 추방했고, 주나이드는 아크 코윤루의 우준 하산에게 망명하여 그의 여동생과 결혼하며 동맹을 맺었다. 주나이드는 시르반샤 침공 중 사망했고, 그의 아들 셰이크 하이다르가 뒤를 이었다. 하이다르는 우준 하산의 딸과 결혼하여 아르다빌을 회복하고 세력을 확장했다.
우준 하산 사후, 아크 코윤루의 새 통치자 야쿱은 사파비야를 위협으로 여겨 1488년 시르반샤와 동맹을 맺고 하이다르를 살해했다. 당시 사파비야 추종자들은 대부분 소아시아 및 아제르바이잔 출신의 오구즈 튀르크인들로 구성된 키질바시("붉은 머리")였으며, 이들은 사파비야 군사력의 원천이었다.
하이다르 사후, 그의 아들 알리 미르자 사파비가 임시 지도자가 되었으나, 야쿱에게 쫓기다 살해당했다. 알리 미르자는 죽기 전 어린 동생 이스마일에게 수장 자리를 넘겼다.[288]
3. 2. 이스마일 1세 (1501~1524)
이스마일 1세는 알리 미르자의 동생으로, 1501년 타브리즈를 점령하고 샤한샤(왕 중 왕)를 칭하며 사파비 제국을 건국했다.[296][297][298][299][300][301] 건국 직후, 열두이맘파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선포하고, 수니파 성직자와 학자들을 탄압하는 한편, 시아파 성직자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288]
사파비 왕조는 사피 알딘 아르다빌리(1252-1334)가 세운 사파비야에서 시작되었다. 사피 알딘은 자헤드 길라니로부터 수피 교단인 자헤디예의 지도자 자리를 물려받았고, 그의 영적 카리스마 덕분에 교단은 사파비야로 알려지며 아르다빌에서 큰 영향력을 얻었다. 사피 알딘의 종교 시는 오늘날까지 전해져 언어학적으로 중요하다.[36]
사파비야의 지도력은 사드 알딘 무사, 호아자 알리, 이브라힘으로 이어졌다. 셰이크 주나이드가 1447년 지도자가 되면서 사파비 운동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로저 사보리에 따르면, "셰이크 주나이드는 영적 권위에 만족하지 않고 물질적 권력을 추구했다." 당시 이란의 가장 강력한 왕조였던 카라 코윤루의 자한 샤는 주나이드에게 아르다빌을 떠나라고 명령했다.[27] 주나이드는 아크 코윤루의 우준 하산에게 피신하여 그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주나이드의 아들 하이다르 사파비는 우준 하산의 딸과 결혼하여 이스마일 1세를 낳았다.
우준 하산 사후, 그의 아들 야쿠브는 사파비야의 영향력을 위협으로 여겨 하이다르를 살해했다. 하이다르 사후, 사파비야는 그의 아들 알리 미르자 사파비를 중심으로 모였으나, 알리 미르자 역시 야쿠브에게 살해되었다. 알리는 죽기 전 어린 동생 이스마일을 사파비야의 영적 지도자로 지명했다.[27]
티무르 제국 (1370–1506)의 쇠퇴 이후, 이란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었고, 이로 인해 여러 종교 운동이 일어났다. 이스마일은 이러한 혼란을 틈타 1501년 아크 코윤루를 격파하고 타브리즈에 입성하여 스스로를 '샤한샤'(왕 중의 왕)로 칭하면서 사파비 제국을 건국하였다.
3. 2. 1. 페르시아 통일
이스마일 1세는 혼란스러웠던 이란 정세를 틈타 1501년 아크 코윤루의 알반드 미르자를 격파하고 타브리즈에 입성하여 스스로를 '샤한샤'(왕 중의 왕)로 칭하면서 사파비 제국을 건국했다.[296][297][298][299][300][301] 그는 시아파 이슬람의 한 분파였던 열두이맘파를 제국의 국교로 선포했다.[288] 페르시아 영내의 여러 수피즘 교단들(타리카)이 공개적으로 이를 지지하게 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아파로 개종했다.[302]
티무르 제국이 쇠퇴한 이후, 이란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여러 종교 운동이 일어났다. 이스마일 1세는 이러한 혼란을 틈타 티무르 제국의 잔존 세력, 아크 코윤루 등 경쟁 세력들을 격파하고 페르시아 전역을 통일했다.
사파비 제국은 1501년 아제르바이잔, 시르반, 다게스탄 남부 (데르벤트 포함), 아르메니아 고원[305]을 장악하면서 건국되었다. 이후 정복 활동을 통해 1510년까지 호라산을 포함한 광대한 지역을 정복했다.
다음은 이스마일 1세의 정복 활동을 정리한 표이다.
연도 | 정복 지역 |
---|---|
1501년 | 아제르바이잔, 시르반, 다게스탄 남부 (데르벤트 포함), 아르메니아 고원[305] |
1502년 | 하마단, 에르주룸, 에르진잔[306] |
1503년 | 시라즈, 케르만 |
1504년 | 디야르바크르, 나자프, 카르발라 |
1508년 | 반 |
1509년 | 바그다드, 헤라트 |
1510년 | 호라산 및 기타 지역 |
1503년에는 인접한 조지아의 카르틀리 왕국과 카헤티 왕국이 사파비 제국에 복속하고 봉신이 되기로 약속했다.[307] 1511년에는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이 이끄는 우즈베크인들을 물리치고 중앙아시아로 몰아냈다. 이스마일 1세의 성공적인 정복 활동으로 사파비 제국은 사산 제국 멸망 이후 가장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으로 성장했다.
3. 2. 2. 오스만 제국과의 충돌
시아파를 표방했던 사파비 제국의 야심은 서쪽의 수니파 강대국 오스만 제국의 심기를 건드렸다.[308] 오스만 제국은 사파비 제국이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튀르크멘 유목 부족들을 빼앗아가는 것을 안보 위협으로 여겼다. 1511년 아나톨리아에서 샤쿨루 반란이 일어나는 등, 1510년대 초, 이스마일 1세는 서쪽으로 팽창하여 오스만과의 국경을 아나톨리아 방면으로 밀어붙였다. 맘루크 술탄국과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고, 아나톨리아 동부의 시아파계 튀르크, 쿠르드족 반란을 사주하는 등 오스만 제국을 도발하였다.
1514년, 셀림 1세는 아나톨리아를 가로질러 아제르바이잔 인근 찰디란 평원에서 이스마일 1세의 사파비 군대와 결정적인 전투를 벌였다. 오스만 군대는 사파비 군대의 약 2배였고, 화약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사파비 군대는 대패했고, 오스만 제국은 타브리즈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예니체리들이 보급 문제로 더 이상 싸우기를 거부하여 8일 뒤 철수했다.[293] 이스마일 1세는 타브리즈를 포함한 영토를 빠르게 회복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 동부와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빼앗았다.
찰디란 전투의 패배는 이스마일 1세의 무적 신화를 깨뜨렸고,[288] 키질바시 군부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이스마일 1세는 정치에 관심을 잃고 재상 미르자 샤 후세인에게 국정을 맡기다가 1524년 사망했다.[310] 찰디란 전투는 300년이 넘는 전쟁의 서막을 알렸다.
3. 3. 타흐마스프 1세 (1524~1576)
타흐마스프 1세는 찰디란 전투 이후 분열될 뻔한 사파비 제국을 수습하고 내정에 힘썼다. 또한, 시아파 이슬람 전파에도 노력하였다.[309][310]
1524년 이스마일 1세가 사망하자, 10살의 어린 아들 타흐마스프 1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와 찰디란 전투의 패배로 인한 권위 실추로 인해 키질바시 부족들 간의 경쟁이 격화되었다. 이들은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 다투었고, 이로 인해 사파비 제국은 멸망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다.
1526년, 페르시아 북서부에서 시작된 내전은 호라산 전역으로 확대되었다.[311] 우스타줄루 부족은 빠르게 배제되었고, 룸루 부족이 승기를 잡는 듯 보였다. 그러나 우즈베크족의 침입에 대한 책임으로 타흐마스프 1세는 룸루 부족의 지도자 디브 술탄 룸루를 처형했다.
이후 타칼루 부족의 추하 술탄이 1527년부터 1530년까지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타칼루 부족은 샴루 부족을 헤라트에서 쫓아내려 했지만, 오히려 샴루 부족에게 암살당했다. 1533년, 17세가 된 타흐마스프 1세는 직접 통치하기로 결심하고 호세인 칸을 숙청하면서 내전은 막을 내렸다. 타흐마스프 1세는 키질바시의 영향력을 줄이고, 궁정 관료들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섭정 직을 종식시켰다.[312]
사파비 왕조의 초기 권력은 키질바시의 군사력에 기반을 두었다. 그러나 찰디란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타흐마스프 1세는 키질바시 세력을 견제하고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는 한편, 화약 무기를 도입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무굴 제국의 후마윤이 망명해오자, 타흐마스프 1세는 그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여 칸다하르와 카불을 점령하도록 도왔다.
또한 타흐마스프 1세는 조지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군사 원정을 감행했다.
3. 3. 1.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타흐마스프 1세 시기, 오스만 제국은 시아파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사파비 제국을 위협으로 여겼다. 1514년, 셀림 1세는 찰디란 전투에서 이스마일 1세를 격파하고 사파비 제국의 수도 타브리즈를 점령했다.[42] 이스마일 1세는 패배 이후 실의에 빠졌고, 키질바시 부족 간의 내분도 심해졌다.[27]
1524년 이스마일 1세가 사망하고 타흐마스프 1세가 즉위했지만, 어린 나이와 찰디란 전투의 패배로 인해 키질바시 부족 간의 권력 다툼이 격화되었다.[309][310] 10여 년간의 내전으로 사파비 제국은 혼란에 빠졌고, 우즈베크족의 침입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312]
타흐마스프 1세는 내분을 수습하고, 키질바시의 영향력을 줄이는 한편 페르시아인 관료를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1533년 호세인 칸이 숙청되면서 내전이 종식되었다. 그러나 10여 년간의 내전은 사파비 제국을 약화시켰고, 오스만 제국의 재침략에 직면하게 되었다.
쉴레이만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은 사파비 제국을 여러 차례 침공했다. 사파비 제국은 청야전술과 화약 무기를 활용하여 오스만 군에 맞섰다. 1555년 아마시아 강화를 통해 양국은 일시적인 평화를 맺었다.
3. 3. 2. 조지아 정복
타흐마스프 1세는 조지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군사 원정을 감행했다.[64] 그는 초토화 전술을 사용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항했다.[68] 1555년 아마시아 조약을 통해 사파비 제국과 오스만 제국 간의 평화가 이루어졌으며, 이 조약으로 조지아는 동서로 분할되어 동부는 사파비 제국에, 서부는 오스만 제국에 귀속되었다.[70]3. 3. 3. 무굴 제국과의 관계
무굴 제국의 2대 황제 후마윤은 이복형제들에게 쫓겨나 영토 없이 방랑하다가 1543년 카즈빈의 사파비 궁정에 망명을 요청했다. 타흐마스프 1세는 후마윤을 황제의 격에 맞게 대우해주었고,[314][315] 후마윤이 시아파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칸다하르를 사파비 제국에 넘겨주는 대가로 그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1545년 사파비-무굴 연합군은 칸다하르와 카불을 점령했다.[316]3. 3. 4. 중앙집권화와 군사 개혁
타흐마스프 1세는 키질바시 부족 엘리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새로운 군사 조직의 필요성을 느꼈다. 키질바시는 사파비 가문과의 관계로 인해 특권을 누렸는데, 이는 타흐마스프에게 위협이 되었다.[77]1540년, 타흐마스프는 코카서스 지역을 침략하여 체르케스인과 조지아인 포로를 잡아왔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와 유사한 군사 노예 제도의 기초를 형성했다.[78][79] 1553년 트빌리시(티플리스)와 카르틀리 지역 점령 이후, 3만 명 이상을 이란 중부로 이주시켰다.[77] 이들은 '골람안에 카쎄예 샤리파'(왕실 노예) 부대의 시작점이 되었으며, 튀르크계가 아닌 이슬람 개종자로서 씨족 충성심에 얽매이지 않아 키질바시 부족 정치에 영향을 받은 타흐마스프에게 매력적이었다.[77]
이 굴람들은 아바스 1세 시기에 조직되었지만, 타흐마스프 시대에 이미 왕실, 하렘, 행정부의 중요 구성원이 되었다.[80][81]
3. 4. 타흐마스프 1세 사후의 혼란
타흐마스프 1세 사후, 이스마일 2세와 무함마드 호다반다가 차례로 왕위에 올랐으나, 사파비 제국은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었다.이스마일 2세는 즉위 직후 자신의 형제인 무함마드 호다반다를 제외한 모든 왕족들을 살해했다.[85] 그는 시아파 정책을 폐지하고 수니파를 다시 도입하려 했으나,[87] 결국 이복 누이인 파리 칸 하눔에게 독살당했다.[88]
무함마드 호다반다는 시력이 거의 없는 상태였지만, 파리 칸 하눔의 섭정 아래 왕위에 올랐다.[89] 그러나 파리 칸 하눔은 곧 살해되었고,[90] 무함마드 호다반다는 무능한 통치로 인해 키질바시 부족 간의 권력 다툼과 외세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90] 그의 아내 카이르 알-니사 베굼(마흐드-이 울야)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지만, 그녀 역시 암살당했다.[90]
오스만 제국은 아마시아 조약을 파기하고 사파비 제국을 공격하여 조지아, 시르반, 다게스탄, 쿠르디스탄, 로레스탄 등 상당한 영토를 점령했고, 심지어 타브리즈까지 함락시켰다.[96] 이러한 상황에서 무함마드 호다반다의 아들 아바스 1세가 반란을 일으켰고,[97] 결국 무함마드 호다반다는 아바스 1세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100]
3. 5. 아바스 1세 (1588~1629)
아바스 1세는 무함마드 호다반다의 아들로, 1588년에 즉위하여 사파비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아바스 1세는 즉위 당시 내부적으로는 권신이 권력을 휘두르고, 외부적으로는 오스만 제국과 우즈베크인들에게 끊임없이 위협받는 불안정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343]
아바스 1세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먼저 오스만 제국과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메소포타미아와 아제르바이잔 등 북서부 영토를 모두 넘겨주었다.[344][345] 그 후, 1589년 7월에 자신을 섭정으로 칭하며 권력을 휘두르던 무르시드 쿨리 칸을 암살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내부를 안정시켰다.[346]
이후 아바스 1세는 중앙집권화를 추진하였다. 기존의 부족 중심의 분봉 제도 대신 황제가 직접 임명하는 총독과 지방의 키질바시 행정부가 협력하는 제도를 신설하고, 징세권과 수조권을 중앙 정부에 귀속시켰다. 이 조치로 황권은 강화되었고, 길란 및 마잔다란에서의 수입이 폭증하여 중앙정부의 재정이 크게 확충되었다.[347]
아바스 1세는 이러한 재정을 바탕으로 군사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굴람 상비군을 육성하여 키질바시 전사들에게만 의존하던 군대를 일신했다.[347] 굴람 군단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 카프카스 출신 민족들로 구성된 10,000~15,000명 규모의 굴람 머스킷 기병대.[348]
- 페르시아인들로 구성된 '토팡치 군단(tufangchiyān)'. 보병대와 기병대가 혼성되어 있었으며 머스킷으로 무장했다.
- 머스킷병과 포병대로 구성된 '투프치 군단(tūpchiyān)'. 각각 12,000명씩 최대 24,000명이 복무했다.
- 백인계 굴람들로만 구성된 황제 직속 친위대. 처음에는 3,000명이었으나 나중에는 40,000명에 달했다.[349][350][351]
아바스 1세는 대포에도 관심이 많아 한번의 전투에서 최대 500여 개의 대포를 동원하도록 지시했으며,[351] 약탈을 금지하고 군율을 바로잡았다. 또한 군사기술이 발전된 유럽 국가들에서 군사 전문가를 초빙하고 반오스만 동맹을 맺기도 했다.[352]
3. 5. 1. 영토 회복과 확장
아바스 1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1590년에 잃었던 영토 대부분을 되찾고, 메소포타미아 일부 지역까지 점령했다. 1603년부터 시작된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아바스 1세는 나하반드를 탈환하고 오스만 제국의 요새들을 파괴했으며,[356] 타브리즈를 함락시켰다.[358] 예레반을 포위하여 1604년 6월에 함락시켰고,[359] 1605년 11월 6일, 수피얀에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360] 카프카스 남부의 카바르디노발카르까지 진격했다. 1612년, 오스만 제국은 나수흐 파샤 조약을 체결하여 카프카스 대부분 지역에 대한 사파비 제국의 주권을 인정했다.1618년, 오스만 제국의 재상 다마트 할릴 파샤가 이끄는 10만 대군이 쳐들어왔으나, 아바스 1세는 매복 작전으로 오스만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364] 1623년에는 무라트 4세 즉위로 혼란한 틈을 타 카르발라, 나자프, 바그다드를 점령하여 메소포타미아 중남부를 수복했다.[366]
동쪽으로는 우즈베크 세력을 격퇴하고 호라산 지역을 안정시켰다. 1598~1599년 사이에 군대를 이끌고 우즈베크인들을 공격하여 마슈하드 및 헤라트를 탈환하고, 사브제바르, 파라, 니사 등을 점령했다.[353][354]
조지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고, 쿠르드 반란을 진압했다. 1609~1610년, 쿠르드 부족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딤딤을 함락시켰다. 아바스 1세는 베라도스트와 무크리안의 쿠르드인들을 학살하고, 튀르크계 아프샤르족을 정착시켰으며, 살아남은 쿠르드인들은 호라산으로 추방했다.[375][376]
3. 5. 2. 유럽 국가들과의 교류
아바스 1세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려 했다. 그는 기독교도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는데, 이는 유럽 국가들과의 동맹을 맺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379] 이러한 정책은 아크 코윤루(백양 왕조)의 우준 하산이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고, 사파비 제국의 창시자 이스마일 1세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과 동맹을 맺은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378] 그러나 아바스 1세의 조부 타흐마스프 1세는 영국인 여행객 엔서니 젠킨슨을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추방한 적이 있어 대조적이다.[379] 아바스 1세는 "가장 낮은 지위의 기독교인의 신발 밑장에서 나오는 먼지는 오스만 제국의 최고위층의 그것보다 더 좋다"고 언급하며 유럽 국가들과의 동맹에 적극적으로 나섰다.[380]
1599년, 아바스 1세는 유럽에 첫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다. 이들은 카스피해를 건너 모스크바를 거쳐 노르웨이, 독일(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 재위기), 로마를 방문했고, 교황 클레멘스 8세의 환대를 받았다. 이후 1602년에는 스페인의 펠리페 3세를 만났다. 비록 이들은 귀국길에 난파되었지만, 페르시아와 유럽 간 교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열두번째 밤」에는 페르시아의 샤한샤를 의미하는 '소피'가 두 번 언급될 정도로 유럽인들은 페르시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381][382] 이후 유럽과 페르시아 간의 외교 사절단 왕래가 크게 늘었다.[383]
아바스 1세는 합스부르크 스페인과의 동맹에 큰 기대를 걸고, 오스만 제국에 맞서 동맹을 맺으면 무역 독점권과 페르시아에서 기독교를 설교할 권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1580년 스페인이 포르투갈과 동군연합을 형성하면서 호르무즈 영유권 문제가 불거졌다. 스페인은 아바스 1세에게 호르무즈를 넘겨주는 대가로 영국과의 관계 단절을 요구했고, 아바스 1세는 이를 거부하여 스페인과의 동맹은 무산되었다. 이후 아바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 폴란드, 루스 차르국과 관계를 이어나갔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384]
영국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는 소극적이었지만, 페르시아와의 외교 관계에는 적극적이었다. 1598년 셜리 형제가 사파비 제국을 방문하여 아바스 1세의 군대 개혁에 조언했고, 로버트 셜리는 1609년에서 1615년 사이에 두번째 페르시아 유럽 사절단을 이끌었다.[385] 영국 동인도 회사도 페르시아에 관심을 보였고, 1622년에는 4척의 전함을 파견하여 아바스 1세가 포르투갈로부터 호르무즈를 되찾는 데 도움을 주었다.[386]
3. 5. 3. 수도 이전과 문화 발전
1598년 아바스 1세는 수도를 카즈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옮기고, 이스파한을 중심으로 페르시아 문화를 부흥시켰다. 그는 이스파한에 고대 페르시아 도시의 모습을 본떠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이때부터 사파비 제국은 더욱 페르시아적인 특성을 띠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새로운 페르시아 민족 군주국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아바스 1세 시대에 이스파한에는 나크셰 자한 광장, 알리 카푸 궁전, 셰이크 로트폴라 모스크 등 수많은 건축물들이 건설되어 '세계의 절반'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영했다.[101]
3. 5. 4. 가정사
아바스 1세는 아들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그는 아들들이 자신의 제위를 찬탈할 것을 극도로 염려하여, 장남 모하마드 바케르(사피 미르자)를 1615년에 처형하였다.[387] 또한 차남과 삼남을 각각 1621년과 1627년에 실명시킨 뒤 감옥에 가두었다.[387] 이러한 가정사 문제로 인해, 1629년 1월 그가 사망했을 때 사파비 제국에는 적합한 후계자가 없었다.[387]3. 6. 쇠퇴와 멸망
아바스 1세 사후, 사피, 아바스 2세, 쉴레이만 1세, 술탄 후사인 등 무능한 군주들이 연이어 즉위하면서 사파비 제국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388][389] 특히, 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으로 인해 금속 공급이 고갈되면서 군사력이 약화되었고, 유럽 국가들이 인도양 서부 무역로를 통제하면서 해상 무역로가 단절되어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390]사피는 국정에 무관심하고 향락에 빠져 오스만 제국에게 바그다드를 빼앗기고, 무굴 제국에게 칸다하르를 점령당하는 등 외세의 침입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388][389] 아바스 2세는 칸다하르를 탈환하고 러시아 제국과의 갈등을 해결하는 등 잠시 중흥기를 가져왔으나,[393][394][395] 그가 사망한 후 사파비 제국은 다시 쇠퇴하기 시작했다.
쉴레이만 1세는 국정을 신하들에게 맡기고 향락에 빠져 지냈으며, 우즈베크인, 발루치인 등의 침입과 내부 반란에 시달렸다.[396] 술탄 후사인은 시아파 정책을 강요하여 수니파의 반발을 샀고, 1721년에는 샤마키가 함락되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다.
1722년, 아프간족의 마흐무드 호타크가 굴나바드 전투에서 승리하고 수도 이스파한을 포위하자, 술탄 후사인은 항복하고 폐위되었다.[142] 이후 아쉬라프 호타크가 술탄 후사인을 처형하면서 사파비 제국은 사실상 멸망했다.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체결하여 사파비 제국의 영토를 분할했다.[143]
이후 나디르 샤가 아프샤르 왕조를 건국하면서 사파비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397][398] 나디르 샤는 담간 전투에서 호타키 군대를 격파하고, 레흐트 조약과 간자 조약을 통해 러시아와 오스만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했다.[397][398] 1738년에는 칸다하르를 점령하고 무굴 제국을 침공하여 막대한 부를 약탈했다.[399]
4. 역대 군주
이름 | 재위 기간 |
---|---|
이스마일 1세 | 1501년 ~ 1524년 |
타흐마스프 1세 | 1524년 ~ 1576년 |
이스마일 2세 | 1576년 ~ 1578년 |
모하마드 호다반다 | 1578년 ~ 1587년 |
아바스 1세 | 1587년 ~ 1629년 |
사피 | 1629년 ~ 1642년 |
압바스 2세 | 1642년 ~ 1666년 |
쉴레이만 1세 | 1666년 ~ 1694년 |
술탄 후사인 | 1694년 ~ 1722년 |
타흐마스프 2세 | 1722년 ~ 1732년 |
압바스 3세 | 1732년 ~ 1736년 |
5. 사회
사파비 제국의 사회는 샤를 정점으로 하는 계층 사회였다. 권력 구조는 크게 투르크계 군사 귀족과 타지크계 관료 집단으로 나뉘었다. '투르크와 타지크'라는 용어는 12세기에서 20세기 사이 이란을 통치한 여러 왕조의 투르크-페르시아적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들은 비록 튀르크계 출신이었지만, 페르시아 문화와 정체성을 장려했다.
투르크계 군사 귀족은 '칼의 사람들', 타지크계 관료는 '펜의 사람들'로 불렸으며, 고위 관직은 주로 페르시아인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타흐마스프 1세는 튀르크계 장교의 아들들을 왕실에서 페르시아어 교육을 받게 하여 두 집단 간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려 했다.
아바스 1세 시기에는 코카서스 출신 굴람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했다. 타흐마스프 1세는 1540년부터 코카서스 지역에 대한 일련의 침략을 통해 체르케스, 조지아, 아르메니아 출신 노예들을 대규모로 데려와 군사 노예 제도의 기초를 형성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의 예니체리와 유사한 제도였다. 이들은 부족 충성심에 얽매이지 않아 샤에게 매력적인 존재였다. 아바스 1세는 이 정책을 확대하여 굴람 군단을 크게 강화하고, 이들을 고위직에 임명하여 사회의 새로운 계층을 형성했다. 이들은 투르크멘, 페르시아인과 함께 사파비 사회의 "세 번째 세력"이 되었다.
6. 종교
사파비 왕조는 시아파 이슬람, 그중에서도 열두이맘파를 이란 전역과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의 국교로 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63] 8세기 초부터 곰과 사브제바르와 같은 일부 도시에는 이미 상당한 규모의 시아파 공동체가 존재했다. 10세기와 11세기에는 시아파 이슬람의 자이디야 분파인 부와이흐 왕조가 파르스, 이스파한 및 바그다드를 통치하기도 했다. 일 칸국 시기에는 종교적 관용 정책 덕분에 대 호라산의 사르베다란과 같은 시아파 왕조가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일 칸국의 통치자 올제이투는 13세기에 십이 이맘 시아파로 개종하기도 했다.
이스마일 1세는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을 정복한 후, 대부분의 수니파 백성들에게 시아파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다. 수니파 울라마(성직자)들은 살해되거나 추방되었다. 이스마일 1세는 주류 십이 이맘 시아파 종교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충성의 대가로 토지와 재산을 주었다. 이후 사파비 왕조와 카자르 왕조 시대에 시아파 울라마의 권력은 더욱 강해졌고, 정부와 독립적이거나 협력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사파비 사회에서 울라마와 상인 공동체 간의 동맹은 중요한 특징이었다. 상인 공동체는 바자르에서 거래하는 상인, 무역 및 수공업 길드(아스나프)와 데르비시가 운영하는 준 종교 단체(푸투바) 구성원들을 포함했다. 이란의 재산 소유권이 상대적으로 불안정했기 때문에, 많은 사유 토지 소유자들은 자신의 토지를 '와크프'라는 명목으로 성직자들에게 기증하여 재산을 보호받고자 했다. 그들은 토지 수입의 일정 비율을 울라마에게 주는 조건으로 공식적인 소유권을 유지하고, 왕실 위원이나 지방 총독으로부터 토지가 몰수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특히 무즈타히드와 세예드를 포함한 종교 지도자 계급 구성원들은 이러한 토지의 완전한 소유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동시대 역사가인 이스칸다르 문시에 따르면, 이란은 새롭고 중요한 토지 소유주 집단의 등장을 목격하기 시작했다.[164]
7. 행정
사파비 제국의 행정 시스템은 중앙집권적이었다. 최고위직은 대재상(Etemad-e Dowlat)이었으며, 법학자 중에서 선출되어 샤의 직속 대리인으로서 국정에 대한 막대한 권한을 행사했다. 샤의 어떠한 행위도 재상의 부서 없이는 효력이 없었다.[173] 재상 다음으로는 세입 총감(''mostoufi-ye mamalek'') 또는 재무 장관[173]과 사법부 장관인 ''Divanbegi''가 있었다. 이들은 각각 재정과 사법을 담당했다.[174]
왕실의 최고 직위는 궁정 대신인 ''나지르''였다. 그는 샤의 재산 관리를 포함하여 왕실의 모든 관리를 임명하고 감독했다.[174] 그 다음으로는 대집사(''이치크 아가시 바시''), 왕실 마구간 관리자(''미라코르 바시''), 사냥 관리자(''미르셰카르 바시'') 등이 있었다.[175]
지방은 크게 공공 토지와 왕실 소유지로 나뉘었다. 공공 토지는 지방 총독인 ''칸''이 통치했으며, 이들은 샤처럼 자신의 지방을 다스렸다.[179] 샤 아바스 1세는 키질바시의 권력을 줄이기 위해 일부 지방을 왕실 영지(''하싸'')로 만들었다.[179] 시간이 지나면서 왕실 직속령의 증가는 샤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는 사람들에게 부담이 되었는데, 이는 관리들이 지역 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주로 왕실 수입 증대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179]
16세기와 17세기 이란에는 지역 민주주의 제도도 존재했다. 무역 및 장인 길드, ''푸투바''(futuvva)라고 불리는 준 종교적 단체, 보통법 관리자 역할을 하는 ''카드코다''(kadkhoda) 등이 있었다.[180] 지역 영주(''칼란타르'')는 샤가 직접 임명했으며, 카드코다를 감독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181]
8. 법률
사파비 제국의 법률 시스템은 이슬람 법학 (피크)에 기초한 민법과 관습법 (우르프)으로 구성되었다. 민법은 샤리아에 기반을 두었으며, 이맘과 법관들이 실무에서 적용했다. 반면 우르프는 샤를 대신하여 마을을 검사하는 지방 위원과 법무부 장관(''디반베기'')이 행사했다. 이들은 모두 샤를 대신하여 일하는 세속적인 관리들이었다.[182]
법무부 장관은 법률 시스템에서 최고위직이었으며, 법무관은 치안 판사(''다루가''), 검사(''비시르''), 기록관(''바카네비스'')과 같은 고위직으로 나뉘었다. 하위 관리는 지방 총독 아래에서 지방의 판사 역할을 하는 가지였다.
샤르댕에 따르면, 정의를 집행하는 특별한 장소는 없었고, 각 치안 판사는 자신의 집 안뜰이나 정원을 바라보는 넓은 방에서 재판을 진행했다. 판사는 방 한쪽에 앉고, 옆에는 서기와 법률가가 있었다.[183] 샤르댕은 또한 이란에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서방보다 더 쉬웠다고 언급했다. 판사(가지)는 사건을 처리할지 여부를 결정하고, 하사가 피고를 소환하면 피고는 하사의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다. 양측은 변호사 없이 각자의 사건을 변론했고, 판사는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심리 후에 판결을 내렸다.[183]
형법은 민법과 별개였으며, 법무부 장관, 지방 총독 및 법원 장관(''나지르'')을 통해 시행되는 관습법에 따라 판결되었다. 관습법에 기반했지만, 특정 법적 원칙에 의존했다. 살인은 사형, 신체 부상은 바스티나도로 처벌되었다. 강도는 처음에는 오른쪽 손목 절단, 이후에는 사형에 처해졌다. 국가 범죄자는 목에 삼각형 나무 칼라(''karkan'')를 착용해야 했다. 샤가 직접 재판을 진행할 때는 고대 전통에 따라 붉은 옷을 입었다.[182]
9. 군사
사파비 왕조의 군대는 초기에는 키질바시라고 불리는 투르크멘 부족 연합군이 핵심이었다. 키질바시는 샤 이스마일 1세와 샤 타흐마스프 1세 시대에 제국의 정예 부대로 활약하며, 사파비 제국의 건국과 확장에 큰 공을 세웠다.[42] 그러나 이들은 페르시아의 전통과는 거리가 멀었고, 샤에게 충성하기보다는 부족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했다.[42]
샤 아바스 1세는 키질바시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굴람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군대를 창설했는데, 이들은 주로 코카서스 지역에서 데려온 조지아인, 체르케스인, 아르메니아인 등으로 구성되었다.[184] 이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샤에게만 충성하도록 훈련받은 일종의 노예 병사들이었다.[184] 굴람은 키질바시와 달리 특정 부족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에 샤의 친위 세력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했다.
아바스 1세는 굴람 외에도 샤세반이라 불리는, 키질바시 부족에서 샤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들로 구성된 부대를 창설했다.[185] 또한, 화약 무기의 중요성을 인식한 아바스 1세는 머스킷총으로 무장한 보병 부대인 투판치얀(Tofangchiyan)과 포병 부대인 툽치얀(Tupchiyan)을 창설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184] 이러한 군사 개혁을 통해 사파비 제국은 화약 제국으로 발전하였으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아바스 1세의 군사 개혁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부대 명칭 | 구성 | 특징 |
---|---|---|
키질바시 | 투르크멘 부족 연합군 | 사파비 제국 초기의 주력군 |
굴람 | 코카서스 출신 노예 병사 | 샤에게만 충성, 친위 세력 |
샤세반 | 샤에게 충성하는 키질바시 부족민 | |
투판치얀(Tofangchiyan) | 머스킷총으로 무장한 보병 | 화약 무기 도입 |
툽치얀(Tupchiyan) | 포병 부대 | 화약 무기 도입 |
이러한 군사 개혁에도 불구하고, 키질바시는 여전히 군대 내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187] 그러나 샤 직속의 상비군이 창설되면서 키질바시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사파비 제국은 중앙 집권적인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10. 경제
사파비 제국의 경제 성장은 농업 번영과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무역 활성화에 힘입었다. 특히 북부 이란을 통과하는 실크로드는 16세기에 다시 활기를 띠었다. 아바스 1세는 페르시아 카펫, 비단, 직물 등을 찾던 영국 및 네덜란드와의 직접 무역을 지원했다.[107] 다른 수출품으로는 말, 염소 털, 진주, 그리고 인도에서 향신료로 사용된 쓴 아몬드인 하담-탈카(hadam-talka)가 있었다. 주요 수입품은 향신료, 직물(유럽산 모직물, 구자라트산 면), 금속, 커피, 설탕이었다.[188]
17세기 후반, 장 샤르댕과 같은 여행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사파비 이란은 유럽보다 더 높은 생활 수준을 누렸다. 특히 이란 농부들의 생활 수준은 유럽의 농부들보다 높았다.[188] 역사학자 로저 사보리에 따르면, 사파비 제국 경제는 목축업과 농업에 기반을 두었으며, 하위 계층은 유목 생활을 하는 투르크멘 부족과 정착 농업에 종사하는 페르시아인으로 나뉘었다.[189]
장 샤르댕에 따르면, 이란의 농산물은 유럽에서 보기 드문 다양한 과일과 채소로 구성되었다. 그는 이스파한의 연회에서 50가지가 넘는 과일을 보았고,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는 그런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190] 특히 담배는 전국에서 재배되었고, 호라산에서 온 멜론은 30일 넘게 운송되어도 신선했다.[190]
샤 아바스 1세는 농업 생산량 증대를 위해 노력했다. 농업은 세입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토지 소유주와 농부 간의 "작물 분배 계약"은 토지, 물, 쟁기 가축, 씨앗, 노동의 다섯 가지 요소를 기준으로 생산량을 분배했다.[192][193] 그러나 동시대 역사학자들은 토지 소유주가 농부보다 불리한 입장이었다고 언급했다. 농부들은 대체로 편안한 생활을 했지만, 강제 노동과 과도한 요구에 시달렸다.[194]
17세기 전반, 강력한 샤의 통치 아래 이란은 좋은 도로와 카라반사라이 덕분에 여행하기 쉬웠다. 테베노와 타베르니에는 이란의 카라반사라이가 터키보다 더 잘 지어졌고 깨끗하다고 언급했다.[196] 샤르댕에 따르면, 카라반사라이는 무굴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보다 더 많았고, 가난한 여행자들은 숙박료 없이 머물 수 있었다.[197] 샤 아바스 1세는 실크로드 개선을 위해 노력했고, 부유한 상인들도 무역 증가를 위해 이를 따랐다. 통행료는 여행자의 안전을 제공하는 경비원(''rah-dars'')에 의해 징수되었다.[198]
포르투갈 제국은 1487년 희망봉 주변의 무역로를 발견하여 베네치아의 무역 몰락과 실크로드 무역에 타격을 주었다. 그들은 아덴만, 페르시아만, 말라카 해협을 통제하며 해상 무역에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200] 1602년, 샤 아바스 1세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원을 받아 포르투갈인들을 바레인과 호르무즈 해협에서 몰아내고 무역로를 되찾았다.[201] 그는 영국인들에게 시라즈, 이스파한, 자스크에 공장을 열도록 허용했다.[202][203]
사파비 왕조는 인도의 데칸 고원 지역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아흐마드나가르 술탄국, 아딜 샤히 왕조, 골콘다 요새는 페르시아의 종주권을 구했고, 많은 페르시아인들이 데칸으로 이주했다.[204] 페르시아 상인들은 동남아시아 왕국, 특히 아유타야 왕국으로 진출하여 분나 가문과 같은 영향력 있는 가문이 태국과 이란 간의 우호 관계를 조성했다.[205]
그러나 유럽인들이 해상 무역로를 독점하면서 육로 무역은 이란 국가에 주요 수입을 계속 제공했다. 샤 아바스는 육로 무역 확장을 시도했지만,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카스피 해를 통해 러시아로 가는 새로운 경로가 고안되었고, 모스코비 회사의 도움으로 유럽까지 연결되었다.[210]
17세기 말, 네덜란드는 페르시아만 무역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대부분의 무역 협정을 체결했다. 그들은 향신료 및 도자기 무역을 독점했고,[211] 네덜란드 해군의 보호를 받는 벵골 실크와 중일 도자기와의 경쟁은 17세기 후반 사파비 왕조 경제 쇠퇴에 기여했다.[212][213]
11. 문화
레자 아바시는 페르시아 회화에 반나체 여성, 청년, 연인 등 새로운 주제를 도입했다. 그의 그림과 서예 스타일은 이스파한 학파로 알려졌고, 사파비 시대의 많은 이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214] 17세기에 유럽 등 다른 문화권과 접촉이 늘면서, 이란 예술가들은 모델링, 단축법, 공간적 후퇴, 유화 기법을 채택하며 영감을 받았다.[214]
이스파한은 사파비 건축의 가장 두드러진 표본을 보여주며, 1598년 샤 아바스 1세가 수도를 영구적으로 그곳으로 옮긴 이후에 모두 건설되었다.[217] 1630년에 완공된 황실 모스크인 마스제드-에 샤, 이맘 모스크, 셰이크 로트폴라 모스크와 왕궁이 그것이다. 윌리엄 클리블랜드와 마틴 번턴에 따르면, 이스파한을 이란의 대 수도로 건설하고 도시의 물질적 화려함을 확립한 것은 세계 각지에서 지식인들을 끌어들였으며, 이는 도시의 풍부한 문화 생활에 기여했다.[217]
이란 건축의 새로운 시대는 사파비 왕조의 부상과 함께 시작되었다. 경제적으로 튼튼하고 정치적으로 안정된 이 시기는 신학 과학의 번창을 보았다.[217] 셰이크 로트폴라 (1618), 하슈트 베헤슈트 (8개의 낙원 궁전) (1469), 차하르 바흐 학교 (1714)와 같은 독특한 기념물이 이스파한과 다른 도시에 나타났다. 이러한 광범위한 건축 개발은 페르시아 문화에 뿌리를 두고 학교, 목욕탕, 주택, 대상 숙소 및 바자르와 광장과 같은 기타 도시 공간의 설계로 나타났다. 이는 카자르 통치 말기까지 계속되었다.[221]
이슬람 철학[222]은 사파비 시대에 번성했다. 미르 다마드는 이스파한 학파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이 철학 학파에는 미르 다마드, 미르 펜데르스키, 셰이크 바하이, 모센 파이즈 카샤니와 같은 이란 철학자들이 있었다. 이 학파는 물라 사드라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물라 사드라는 이슬람 동양의 지배적인 철학자가 되었으며, 그의 철학적 본질에 대한 접근 방식은 오늘날까지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223]
사파비 시대 의사들의 위상은 높았다. 고대 그리스인이나 고대 로마인은 의사에게 높은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이란인들은 고대부터 의사들을 존경했으며, 이들은 종종 샤(Shah)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226] 16세기까지, 이슬람 과학은 페르시아 과학을 의미했는데, 그 명성에 안주하고 있었다. 알 라지 (865–892) (서양에는 라제스(Razes)로 알려짐)의 저서는 약리학 및 소아과의 표준 교과서로 유럽 대학교에서 여전히 사용되었다. 아비센나 (c. 980–1037)의 의학 정전은 문명 세계 대부분에서 의학의 주요 교과서 중 하나로 여전히 간주되었다.[227] 따라서 사파비 시대의 의학의 위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며,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저작물에 많이 의존했다. 생리학은 여전히 고대 및 중세 의학의 4체액설에 기초했으며, 출혈과 정화 요법은 외과 의사들의 주요 치료법으로 남아 있었다.[176] 의학 분야에서 약간의 진전이 있었던 유일한 분야는 약리학이었으며, 1556년에 "Tibb-e Shifa’i"가 편찬되었다. 이 책은 1681년에 앙굴루스 드 생에 의해 "Pharmacopoea Persica"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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