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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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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스탄은 "사카의 땅"을 의미하는 지명으로, 고대부터 다양한 제국과 왕조의 지배를 받으며 역사의 중요한 무대가 되었다. 기원전 2세기 스키타이인의 정복 이후 파르티아, 쿠샨, 사산 왕조 시대를 거쳐 이슬람 정복 시기에 시지스탄으로 불리게 되었다. 중세 시대에는 사파리드 왕조, 사만 왕조 등의 이슬람 왕조가 번갈아 지배했으며, 몽골의 침략과 티무르 제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근세에는 사파비 왕조, 두라니 제국 등을 거쳐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의 국경 분쟁 지역이 되었고, 현재는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 걸쳐 있다. 이 지역은 조로아스터교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하문 호수는 조로아스터교 신성한 장소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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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탄
지도 정보
개요
지역아시아
지리
위치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접경 지역
역사적 명칭
페르시아어سیستان (시스탄)
페르시아어 (과거)سَكاستان (사카스탄)
아랍어سِجِستان (시지스탄)
추가 정보
설명이란의 아스바드 (풍차)
위치 (기원전 100년경)사카스탄 (Sistan) 지도에 표시됨

2. 어원

시스탄(Sistan)은 '사카의 땅'을 의미하는 '사카스탄'(Sakastan)에서 유래되었다. 사카족은 기원전 2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에 이란 고원과 인더스 계곡으로 이주한 스키타이 부족으로, 그곳에서 인도-스키타이 왕국으로 알려진 왕국을 건설했다. 팔레비어로 쓰인 조로아스터교 경전인 분다히신에서는 이 지역을 "세얀시"(Seyansih)라고 부른다. 아랍의 이란 정복 이후, 이 지역은 시지스탄/시스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사카족이 지배하기 전, 이 지역의 이전 고대 페르시아어 이름은 '자란카'(zaranka, "물의 땅")였다. 이 고어는 또한 아프가니스탄 님루즈 주의 수도인 자란지의 이름의 어원이기도 하다.

사카 통치자 탄레스모스(Sakaurakae, 사카스탄, 기원전 80-40년경)의 주화. 오로데스 2세의 파르티아 드라크마에 초상과 'TANLHC'라는 이름이 추가된 반전된 모습이 있다.


샤나메에서 시스탄은 현재 아프가니스탄 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자불리스탄으로도 언급된다. 페르도우시의 서사시에서 자불리스탄은 신화 속 영웅 로스탐의 고향으로 묘사된다.

3. 역사

시스탄 지역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다양한 세력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2세기에는 스키타이인에게 정복되었고, 기원전 100년경에는 파르티아 제국이 스키타이인을 몰아내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원후 1세기 중반에는 쿠샨 제국에 합병되었으며, 다시 3세기 중반에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7세기 중반 이슬람 세력이 케르만을 거점으로 이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하여 기존의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에게 카라즈(인두세)를 부과했다. 861년에는 이 지역에서 사파리드 왕조가 발흥하여 이슬람 왕조를 세웠다. 이후에도 여러 왕조의 흥망성쇠를 겪으며 복잡한 역사를 이어왔다.

3. 1. 고대

시스탄(Sistan)이라는 이름은 "사카의 땅"을 의미하는 ''사카스탄''(Sakastan)에서 유래했다. 사카족은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1세기 사이에 이란 고원과 인더스 계곡으로 이주한 스키타이 부족으로, 이 지역에 인도-스키타이 왕국을 세웠다.[1][2] 팔레비어로 쓰인 조로아스터교 경전인 분다히신에서는 이 지역을 "세얀시"(Seyansih)라고 불렀다.[3] 아랍의 이란 정복 이후에는 시지스탄(Sijistan) 또는 시스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2] 사카족이 지배하기 전, 이 지역의 고대 페르시아어 이름은 ''자란카''(zaranka, "물의 땅")였으며, 이는 현재 아프가니스탄 님루즈 주의 수도인 자란지의 이름의 어원이기도 하다.

시스탄의 하오즈다르 성문


선사 시대에 지르프트 문명은 시스탄과 케르만 주 일부 지역을 아우르고 있었다(기원전 3천 년경). 이 문명은 기원전 3천 년경의 거대한 도시 유적인 샤르-이 소흐타 발굴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의 고고학자 월터 페어세르비스와 조지 데일스의 조사를 통해 이 지역의 다른 작은 유적들도 확인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시스탄의 나드-이 알리 유적 역시 청동기 시대 유물로 추정된다.

이후 이란 민족이 이 지역을 점유했으며, 기원전 600년경에는 아라코시아 왕국이 형성되었고 일부는 메디아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550년 아케메네스 제국이 메디아를 무너뜨리면서 아라코시아의 나머지 지역도 곧 합병되었다. 다한-에 골라만 유적은 아케메네스 제국의 주요 중심지 중 하나였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제국 정복 과정에서 이 지역을 합병하고 아라코시아의 알렉산드리아라는 식민지를 건설했다. 현재 라슈카르가의 일부인 보스트 시는 헬레니즘 시대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제국이 분열되면서 아라코시아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기원전 305년, 셀레우코스 제국은 이 지역을 인도의 마우리아 제국에 양도했다. 마우리아 제국이 멸망한 후, 기원전 180년경에는 그레코-박트리아에게 넘어갔고, 이후 독립하여 인도-그리스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인도-파르티아 왕국의 왕 곤도파르는 기원전 20년에서 10년경 사카스탄의 지도자였으며, 이 지역은 헬레니즘 시대에 게드로시아라고도 불렸다.

기원전 2세기 중반 이후, 인도-스키타이 또는 사카로 알려진 부족들이 인도-그리스 왕국의 많은 부분을 점령했으며, 시스탄은 이들의 이름을 따서 불리게 되었다. 기원전 100년경, 인도-스키타이는 파르티아 제국의 미트리다테스 2세(재위 기원전 124–91년경)에게 패배하였고, 사카스탄 지역은 파르티아 제국에 편입되었다.[5] 탄리스마이다테스와 같은 파르티아 총독들이 이 지역을 다스렸다.[4]

파르티아 제국은 서기 20년경 그들의 수렌 봉신들에게 잠시 이 지역의 통치권을 잃기도 했다. 이 시기 시스탄과 펀자브 지역은 인도-파르티아에 의해 함께 통치되었다.[6] 서기 1세기 중반 쿠샨 제국이 확장하면서 인도-파르티아는 인도 영토를 잃고 투란과 사카스탄으로 물러났다.

3세기 중반, 쿠샨 제국은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게 패배하여 처음에는 사산 왕조의 봉신인 쿠샨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5세기 중반에는 에프탈에게 점령당하기도 했으나, 사산 왕조 군대는 565년에 사카스탄을 다시 정복했다. 그러나 640년대 중반 이후 라시둔 칼리파조에게 이 지역을 빼앗기게 된다. 643년에서 644년 사이, 이슬람 세력은 케르만에 거점을 마련하고 시스탄 지역의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을 정복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에게 카라즈(인두세)를 부과했다.

샤나메에서는 시스탄이 현재 아프가니스탄 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자불리스탄으로도 언급된다. 페르도우시의 서사시에서 자불리스탄은 신화 속 영웅 로스탐의 고향으로 묘사된다.

3. 2. 중세

나르세 (나르세)의 주화. 서기 293–303년. 사카스탄 주조소.


사산 왕조 페르시아 시대에 이 지역은 사카스탄이라는 속주였다. 이 주는 제국을 중앙 집권화하려는 샤푸르 1세의 통치 기간인 서기 240년경에 형성되었다. 그 이전에는 파르티아의 수렌 왕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통치자 아르다시르 사칸샤는 샤푸르의 아버지인 아르다시르 1세 (재위 224–242)의 통치 기간 동안 사산 왕조의 봉신이 되었다. 아르다시르 1세는 또한 고대 도시 자랑을 재건하여 이 주의 수도로 삼았다. 샤푸르의 아들인 나르세가 이 주의 첫 번째 총독으로 임명되어 271년까지 통치했다. 이후 사산 왕자 호르미즈드가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서기 281년경, 호르미즈드는 그의 사촌인 바흐람 2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사카스탄 주민들은 그를 지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흐람 2세는 283년에 반란을 진압하고 그의 아들 바흐람 3세를 이 주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샤푸르 2세 (재위 309–379)는 초기 통치 기간 동안 그의 형제 샤푸르 사칸샤를 사카스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페로즈 1세 (재위 459–484)는 초기 통치 기간 동안 카렌 가문 출신을 총독으로 임명하여 이 주의 왕조 통치를 종식시켰다. 이는 주 내에서의 가족 간 갈등을 피하고, 주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통제를 얻기 위한 조치였다.

페르시아의 이슬람 정복 동안, 마지막 사산 왕조의 왕 야즈데게르드 3세는 640년대 중반 사카스탄으로 도망쳤고, 그곳의 총독 아파르비즈 (거의 독립 상태)가 그를 도왔다. 그러나 야즈데게르드 3세는 아파르비즈에게 지불하지 못한 세금을 요구하면서 이러한 지원을 스스로 끝내버렸다.

650년, 케르만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한 압드 알라 이븐 아미르는 무자시 이븐 마수드 휘하의 군대를 사카스탄으로 보냈다. 다슈트-에 루트 사막을 건넌 후 무자시 이븐 마수드는 사카스탄에 도착했지만, 심각한 패배를 겪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년 후, 압드 알라 이븐 아미르는 라비 이븐 지야드 하리티 휘하의 군대를 사카스탄으로 보냈다. 그는 국경 마을인 잘리크에 도착하여 마을의 데흐칸에게 라시둔의 권위를 인정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카르쿠야 요새에서도 똑같이 하여 유명한 불의 사원을 점령했다. 이후 그는 주에서 더 많은 땅을 점령하고 자랑을 포위했다. 도시 밖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아파르비즈와 그의 부하들은 항복했다. 아파르비즈가 조약 조건을 논의하기 위해 라비에게 갔을 때, 그는 라비가 두 명의 죽은 병사의 시체를 의자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그는 사카스탄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많은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는데, 여기에는 1,000개의 황금 그릇을 들고 있는 1,000명의 노예 소년이 포함되었다. 이로써 사카스탄은 라시둔 칼리파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우바이드 알라 이븐 아비 바크라가 발행한 동전으로, 시스탄의 총독으로, 다섯 번째 우마이야 칼리파 압드 알-말리크 이븐 마르완 (647–705 CE) 시대에 발행되었다. 서기 65-86년 / 서기 685-705년에 발행되었다.


하지만 불과 2년 후, 자랑의 사람들은 반란을 일으켜 라비 이븐 지야드 하리티의 부관과 도시의 무슬림 수비대를 격파했다. 이후 압드 알라 이븐 아미르는 시스탄에 '압드 알-라흐만 이븐 사무라를 보냈고, 그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더 나아가 그는 자불리스탄의 준빌을 격파하여 부스트와 자불리스탄의 몇몇 도시를 점령했다.

제1차 피트나(656–661) 동안, 자랑의 사람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켜 도시의 무슬림 수비대를 격파했다. 658년, 야즈데게르드 3세의 아들 페로즈 3세가 시스탄을 되찾아 그곳에 왕국을 세웠고, 이 왕국은 당나라 기록에서는 "페르시아 지역 사령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663년, 그는 라시둔을 계승한 새로 설립된 우마이야 칼리파조에게 패배한 후 이 지역을 떠나야 했다.

시스탄은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의 한 지방이 되었다. 860년대에 사파르 왕조가 시스탄에서 등장하여 이슬람 동부 대부분을 정복해 나갔으나, 900년에 사만 왕조에 의해 저지되었다. 사만 왕조가 사파르 왕조로부터 이 지역을 빼앗은 후, 잠시 아바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지만, 917년 총독 아부 야지드 할리드가 독립을 선언했다. 그 후 923년까지 짧은 통치 기간을 가진 여러 아미르들이 잇따라 등장했으며, 아흐마드 이븐 무함마드가 시스탄에서 사파르 왕조의 통치를 재건했다. 963년 그가 사망한 후, 시스탄은 그의 아들 할라프 이븐 아흐마드가 통치하다가 1002년 가즈나의 마흐무드가 시스탄을 침공하여 사파르 왕조를 멸망시켰다.

1년 후인 1003년에 시스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에 마흐무드는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했다. 마흐무드의 힌두교 군대는 자랑의 모스크와 교회를 약탈하고 그 안에 있던 무슬림과 기독교인을 학살했다.

1029년, 타즈 알 딘 I 아부 알-파들 나스르가 나스르 왕조를 창건했는데, 이들은 사파르 왕조의 분파였다. 이들은 가즈나 왕조의 봉신이 되었다. 이후 왕조는 1048년 셀주크 제국, 1162년 고르 왕조, 1212년 호라즘 제국의 봉신이 되었다. 몽골은 1222년 시스탄을 약탈했고, 나스르 왕조는 1225년 호라즘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가즈나 왕조 시대에는 라슈카리 바자르와 샤르-이 골골라에 정교한 사파르 왕조의 궁전이 건설되었다.

3. 3. 근세

1236년, 샴스 알딘 알리 이븐 마수드는 미르바니드 왕조를 세웠다. 이 왕조는 일 칸국 아래에서 시스탄의 멜릭(지방 군주)으로 통치했으며, 사파르 왕조의 한 분파였다. 미르바니드 왕조는 몽골 통치 기간 동안 카르트 왕조와 대립했다. 일 칸국이 멸망한 후인 1335년, 시스탄은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1383년 티무르가 시스탄을 정복하면서 미르바니드 왕조는 그의 속국이 되었다.

티무르 제국의 지배는 1507년 우즈베크의 침략으로 끝났다. 우즈베크 세력은 1510년에 물러났고, 미르바니드 왕조는 다시 사파비 왕조의 속국이 되었다. 하지만 1537년, 사파비 왕조는 미르바니드 왕조를 폐위시키고 시스탄을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사파비 왕조의 통치는 1717년까지 이어졌으나, 중간에 1524년부터 1528년, 1578년부터 1598년까지는 우즈베크가, 이후에는 호타키 왕조가 잠시 점령하기도 했다. 1727년 나디르 샤가 시스탄을 다시 정복했다. 나디르 샤가 암살된 후인 1747년부터 시스탄은 두라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747년부터 1872년까지 시스탄은 페르시아아프가니스탄 사이의 분쟁 지역이 되었다. 이 국경 분쟁은 영국 장군 프레데릭 골드스미드가 이끈 시스탄 경계 임무를 통해 해결되었다. 그는 시스탄 대부분을 페르시아 영토로 하는 데 합의했지만, 페르시아는 헬만 강 우안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이 결과에 대해 양국 모두 만족하지 못했다.

이후 국경은 아서 맥마흔이 주도한 제2차 시스탄 경계 위원회(1903-1905)에 의해 더 명확하게 정해졌다. 자연적인 경계가 부족하여 국경 획정은 어려운 작업이었다. 최종적으로 페르시아에 할당된 지역은 발루치스탄 지방(1986년 시스탄-발루치스탄으로 이름 변경)에 포함되었고, 자헤단이 중심지가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 속한 지역은 파라-차칸수르 지방의 일부가 되었으나, 1964년 행정 개편으로 님루즈 지방이 형성되면서 폐지되었고, 자란지가 중심지가 되었다.

3. 4. 현대

1236년, 샴스 알딘 알리 이븐 마수드는 미르바니드 왕조를 건국했다. 이 왕조는 일 칸국 치하에서 시스탄의 멜릭(군주)으로서 사파르 왕조의 또 다른 분파였다. 미르바니드 왕조는 몽골 통치 기간 동안 카르트 왕조와 대립했다. 시스탄은 일 칸국이 멸망한 후인 1335년에 독립을 선언했다. 1383년 티무르는 시스탄을 정복하고 미르바니드를 속국으로 삼았다. 티무르 제국의 지배는 1507년 우즈베크의 침략으로 끝났다. 우즈베크는 1510년에 쫓겨났고, 미르바니드는 사파비 왕조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1537년 사파비 왕조는 이 왕조를 폐위시키고 시스탄을 완전히 장악했다.

사파비 왕조의 통치는 1524년에서 1528년, 1578년에서 1598년 사이의 우즈베크 통치 기간과 호타키 왕조가 정복했던 시기를 제외하고 1717년까지 지속되었다. 나디르 샤는 1727년에 이곳을 다시 정복했다. 나디르 샤가 암살된 이후 시스탄은 1747년 두라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747년부터 1872년까지 시스탄은 페르시아(이란)와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분쟁 지역이 되었다.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 간의 국경 분쟁은 영국 장군 프레데릭 골드스미드가 이끈 시스탄 경계 임무에 의해 조정되었다. 그는 시스탄 대부분이 페르시아에 속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지만, 페르시아는 헬만 강 우안에 대한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양국 모두 이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다.

국경은 아서 맥마흔이 이끈 제2차 시스탄 경계 위원회(1903-1905)에 의해 더욱 정확하게 정의되었다. 자연적인 경계가 부족하여 국경 획정은 어려운 과제였다. 페르시아에 할당된 지역은 발루치스탄 지방(1986년에 시스탄-발루치스탄주로 명칭 변경)에 포함되었으며, 주도는 자헤단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파라-차칸수르 지방의 일부였으나, 1964년 행정 개편으로 폐지되고 님루즈주를 형성했으며, 주도는 자란지이다.

4. 조로아스터교와의 연관성

시스탄은 조로아스터교와 매우 강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사산 왕조 시대에는 하문 호수가 조로아스터교 신도들의 두 순례지 중 하나였다. 조로아스터교 전통에서 이 호수는 조로아스터의 씨앗을 보관하는 곳이며, 세상의 최종적인 부활 직전에 세 명의 처녀가 호수에 들어가 각자 사오시안트를 낳게 되는데, 이들은 세상의 최종 부활기에 인류의 구원자가 될 것이다.

5. 고고학

시스탄에서 가장 유명한 고고학 유적지는 샤르-에 소크테와 하문 호 한가운데 섬처럼 솟아 있는 언덕인 코아제 산에 있는 유적이다.

참조

[1] 웹사이트 Asbads (windmill) of Iran https://whc.unesco.o[...]
[2] 서적 Handbook of Medieval Studies: Terms – Methods – Trends https://books.google[...] Walter de Gruyter 2010-11-29
[3] 서적 The Helmand Baluch A Native Ethnography of the People of Southwest Afghanistan https://www.degruyte[...] Berghahn Books 2020-11-01
[4] 웹사이트 Drangiana http://www.iranicaon[...] 1995-12-15
[5] 서적 #추정. harvnb 템플릿의 내용이 부족하여 정확한 type을 판단하기 어려움.
[6] 서적 The Age of the Parthians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10-03-24
[7] 서적 The Ghaznavids 994-1040 Edinburgh University Press 1963
[8] 서적 Evolution of Heroic Tradition in Ancient Panjab https://www.google.n[...] Punjabi University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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