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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마사시게 (15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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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혼다 마사시게는 1580년에 태어난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으로, 여러 번의 주군을 섬기며 복잡한 생애를 보냈다. 그는 가신 살해 사건으로 가문을 떠나 오타니 요시쓰구, 우키타 히데이에 등을 섬겼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다. 이후 마에다 가문에서 3만 석의 녹봉을 받았으나, 나오에 가네쓰구의 사위가 되어 우에스기 가문에 관여하기도 했다. 마에다 가문으로 돌아가 가로로 활약하며 가가 번의 중신으로 활동했으며, 오사카 전투에 참전했다. 말년에는 은거하여 68세로 사망했다. 여러 소설의 등장인물로도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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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마사시게 (1580년)
인물 정보
씨명혼다 마사시게
혼다 마사시게 이미지 (가가 혼다 박물관 소장). 상부의 찬은 마사시게 본인의 필적 (문면은 사세구와 같음).
혼다 마사시게 이미지 (가가 혼다 박물관 소장)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출생덴쇼 8년 (1580년)
사망쇼호 4년 6월 3일 (1647년7월 5일)
개명구라하시 초고로 → 마사키 사효에 → 나오에 가쓰요시 → 혼다 마사시게 → 다이무 (호)
묘소다이조지 (이시카와현가나자와시)
관위야마시로노카미, 야마토노카미, 종5위하아와노카미
주군도쿠가와 이에야스오타니 요시쓰구우키타 히데이에후쿠시마 마사노리마에다 도시나가우에스기 가게카쓰 → 마에다 도시나가 → 도시쓰네미쓰타카쓰나노리
가문가가번가로
씨족혼다 씨 → 구라하시 씨 → 마사키 씨 → 나오에 씨 → 혼다 씨
부모아버지: 마사노부
양아버지: 구라하시 초우에몬, 나오에 가네쓰구
형제마사즈미, 마사시게, 다다즈미
배우자정실: 나오에 가네쓰구 딸・오마쓰
계실: 오쿠니 사네요리 딸 (나오에 가네쓰구 양녀)・아토라니시노토인 도키타다 딸
자녀마사쓰구, 마사스에, 마사토모, 도다 마사카쓰, 마사나가, 딸 (마에다 다다사다 실)
가가 혼다 가
당주제1대
전임(혼다 마사노부)
후임혼다 마사나가

2. 생애

덴쇼 8년 (1580년), 도쿠가와 가의 가신 혼다 마사노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덴쇼 19년 (1591년), 도쿠가와 가의 가신 구라하시 조에몬의 양자가 되었으나, 게이초 2년 (1597년)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유모 오토바노쓰보네의 아들 가와무라 소하치(오카베 소하치)를 다툰 끝에 베어 죽이고 출분했다.[1] 이 사건에는 친구 토다 타메하루가 가담했다는 설도 있다.[1] 출분 후에는 오타니 요시쓰구의 가신이 되었고, 그 후 우키타 히데이에의 가신이 되어 2만 석을 받았으며, '''마사키 사에몬'''이라고 칭했다.[1]

게이초 5년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우키타 군의 일익을 담당하여 서군 측으로서 분전했지만, 서군이 패배했기 때문에 도주하여 오미가타타로 은거했다. 서군이었지만 죄는 묻지 않았다.[1] 그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섬겼지만 바로 사임하고, 다음에 마에다 토시나가에게 3만 석이나 되는 고액의 녹봉으로 등용되었다. 그러나 게이초 8년 (1603년) 마에다 가를 떠났다.[1]

이 무렵, 아버지 마사노부에게 접근을 시도하고 있던 우에스기 가게카츠의 중신 나오에 가네쓰구는 게이초 9년 (1604년) 윤8월, 마사시게를 사위로 맞이하여, 가네쓰구의 딸 오마츠를 아내로 맞이하고, 가게카츠의 편휘를 받아 '''나오에 야마토노카미 가쓰요시'''라고 칭했다[1]。가네쓰구는 가쓰요시에게 막부 권력과 결탁하여 우에스기 가문을 거느리는 역할을, 친아들 헤이하치 가게아키에게는 에도에서의 대 막부 교섭의 역할을 기대하며 "나오에 체제"의 유지·강화를 꾀했다[2]。게이초 10년 (1605년) 8월 17일에 오마츠가 병사했지만[3], 양자 연은 계속되었고, 게이초 14년 (1609년)에 가네쓰구는 동생 오쿠니 사네요리의 딸 아토라를 다시 양녀로 삼아 시집보냈다(사네요리는 가네쓰구가 마사시게를 양자로 맞이하는 것에 반대하여, 아토라를 데리러 온 가네쓰구의 가신을 베어 죽이고 출분했었다). 그러나, 게이초 14년 5월 말부터 7월 초순까지 '''혼다 아와노카미 마사시게'''로 개명[4], 게이초 16년 (1611년)에 우에스기 가문을 출분하고 무사시 국 이와쓰키에 잠복했다[5]。게이초 17년 (1612년)에 도도 다카토라의 중재로 마에다 가문에 "귀참"하여 3만 석을 받았으며, 가로로서 아직 젊은 마에다 도시토시 (토시나가의 동생)를 보좌했다. 아내 아토라는 가가에 있는 마사시게에게 불려 왔지만, 이 때 혼조 나가후사 (마사시게 이전의 가네쓰구의 양자, 후 우에스기 가문으로 귀참), 시노이 시게노리 등 20~30명이 이를 따라 마사시게를 섬겼다[6]。가가 혼다가문 내에 에치고, 데와 출신자가 존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7]

그 후, 게이초 18년 (1613년), 마에다 가문이 엣추 국의 반환을 요구받자 이를 철회시키고, 그 공적으로 인해 다시 2만 석을 가증받아 5만 석이 되었다. 가가 번이 막부에 반역의 혐의를 받게 되었을 때에는 에도로 가서 필사적으로 변명함으로써 징벌을 회피했고, 이 공적을 치하받아 더욱 2만 석이 가증되었다. 게이초 19년 (1614년) 겨울부터의 오사카 전투에도 종군했지만, 사나다 노부시게에게 사나다마루로 유인당한 끝에 패배하여 노부시게에게 이름을 떨치게 했다. 이 패전 후에 형 혼다 마사즈미의 명을 받아 사나다 노부유키 (도쿠가와 이에야스 기하타, 노부시게의 숙부)와 연계하여 노부시게 조략에 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게이초 20년 (1615년) 윤달 6월 3일, 종5위하·아와노카미에 서임되었다.

간에이 4년 (1627년) 4월 20일, 적남 마사쓰구가 18세로 사망하고, 6월 10일에는 정실 아토라도 사망했다. 같은 해, 사이토인 도키나오의 딸과 재혼한다. 그 후, 마에다 미쓰타카, 마에다 쓰나노리에 이르기까지 가로로서 보좌했다. 쇼호 4년 (1647년) 3월, 병을 이유로 은거하여 '''다이무'''라고 호칭하고, 오남 마사나가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같은 해 6월 3일에 사망했다. 향년 68세.

혼다 마사시게, 나오에 씨 관련 계도

2. 1. 출생과 초기 방랑

덴쇼 8년 (1580년), 도쿠가와 가의 가신 혼다 마사노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2][3][4][5][6][7][8][9][10] 덴쇼 19년 (1591년)에는 도쿠가와 가의 가신 구라하시 조에몬의 양자가 되었으나, 게이초 2년 (1597년)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유모 오토바노쓰보네의 아들 가와무라 소하치(오카베 소하치)를 다툰 끝에 베어 죽이고 출분했다.[1][2][3][4][5][6][7][8][9][10] 이 사건에는 친구 토다 타메하루가 가담했다는 설도 있다.[1]

출분 후, 오타니 요시쓰구를 거쳐 우키타 히데이에의 가신이 되어 '''마사키 사에몬'''이라 칭하며 2만 석을 받았다.[1] 게이초 5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우키타 군의 일원으로 서군에 가담해 분전했으나 패배 후, 오미가타타에 은거했다.[1][2][3][4][5][6][7][8][9][10] 서군이었지만 죄는 묻지 않았다.[1] 그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섬겼지만 바로 사임하고, 마에다 토시나가에게 3만 석의 고액 녹봉으로 등용되었다가 게이초 8년 (1603년) 마에다 가를 떠났다.[1]

게이초 9년 (1604년) 윤8월, 우에스기 가게카츠의 중신 나오에 가네쓰구는 마사시게를 사위로 맞이하여, 가네쓰구의 딸 오마츠를 아내로 맞이하고, 가게카츠의 편휘를 받아 '''나오에 야마토노카미 가쓰요시'''라 칭했다.[1] 가네쓰구는 마사시게에게 막부 권력과 결탁하여 우에스기 가문을 거느리는 역할을 기대했다.[2] 게이초 14년 (1609년)에 가네쓰구는 동생 오쿠니 사네요리의 딸 아토라를 다시 양녀로 삼아 마사시게에게 시집보냈다.[1][3] 그러나, 같은 해 5월 말부터 7월 초순까지 '''혼다 아와노카미 마사시게'''로 개명하고,[4] 게이초 16년 (1611년)에 우에스기 가문을 출분하고 무사시 국 이와쓰키에 잠복했다.[5]

2. 2. 세키가하라 전투와 유랑

1580년, 도쿠가와 가의 가신 혼다 마사노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591년, 도쿠가와 가의 가신 구라하시 조에몬의 양자가 되었으나, 1597년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유모 오토바노쓰보네의 아들 가와무라 소하치(오카베 소하치)를 다툰 끝에 베어 죽이고 출분했다. 이 사건에는 친구 토다 타메하루가 가담했다는 설도 있다. 출분 후에는 오타니 요시쓰구의 가신이 되었고, 그 후 우키타 히데이에의 가신이 되어 2만 석을 받았으며, '''마사키 사에몬'''이라고 칭했다.

1600년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우키타 군의 일익을 담당하여 서군 측으로서 분전했지만, 서군이 패배했기 때문에 도주하여 오미가타타로 은거했다. 서군이었지만 죄는 묻지 않았다. 그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섬겼지만 바로 사임하고, 다음에 마에다 토시나가에게 3만 석이나 되는 고액의 녹봉으로 등용되었으나,1603년 마에다 가를 떠났다.

2. 3. 나오에 가문과의 인연

덴쇼 9년(1580년), 도쿠가와 가의 가신 혼다 마사노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게이초 9년 (1604년) 윤8월, 우에스기 가게카츠의 중신 나오에 가네쓰구는 마사시게를 사위로 맞이하여, 가네쓰구의 딸 오마츠를 아내로 맞이하고, 가게카츠의 편휘를 받아 '''나오에 야마토노카미 가쓰요시'''라고 칭했다[1]。가네쓰구는 가쓰요시에게 막부 권력과 결탁하여 우에스기 가문을 거느리는 역할을, 친아들 헤이하치 가게아키에게는 에도에서의 대 막부 교섭의 역할을 기대하며 "나오에 체제"의 유지·강화를 꾀했다[2]게이초 10년 (1605년) 8월 17일에 오마츠가 병사했지만[3], 양자 연은 계속되었고, 게이초 14년 (1609년)에 가네쓰구는 동생 오쿠니 사네요리의 딸 아토라를 다시 양녀로 삼아 시집보냈다.

그러나, 게이초 14년 5월 말부터 7월 초순까지 '''혼다 아와노카미 마사시게'''로 개명[4], 게이초 16년 (1611년)에 우에스기 가문을 출분하고 무사시 국 이와쓰키에 잠복했다[5]。 아내 아토라는 가가에 있는 마사시게에게 불려 왔지만, 이 때 혼조 나가후사 (마사시게 이전의 가네쓰구의 양자, 후 우에스기 가문으로 귀참), 시노이 시게노리 등 20~30명이 이를 따라 마사시게를 섬겼다[6]。가가 혼다가문 내에 에치고, 데와 출신자가 존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7]

2. 4. 마에다 가문 귀참

덴쇼 19년(1591년), 도쿠가와 가의 가신 구라하시 조에몬의 양자가 되었으나, 게이초 2년(1597년)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유모 오토바노쓰보네의 아들 가와무라 소하치(오카베 소하치)를 다툰 끝에 베어 죽이고 출분했다.[1] 이 사건에는 친구 토다 타메하루가 가담했다는 설도 있다.[1] 출분 후에는 오타니 요시쓰구의 가신이 되었고, 그 후 우키타 히데이에의 가신이 되어 2만 석을 받았으며, '''마사키 사에몬'''이라고 칭했다.[1]

게이초 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우키타 군의 일익을 담당하여 서군 측으로서 분전했지만, 서군이 패배했기 때문에 도주하여 오미가타타로 은거했다.[1] 서군이었지만 죄는 묻지 않았다.[1] 그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섬겼지만 바로 사임하고, 다음에 마에다 도시나가에게 3만 석이나 되는 고액의 녹봉으로 등용되었다.[1] 그러나 게이초 8년(1603년) 마에다 가를 떠났다.[1]

이 무렵, 아버지 마사노부에게 접근을 시도하고 있던 우에스기 가게카츠의 중신 나오에 가네쓰구는 게이초 9년(1604년) 윤8월, 마사시게를 사위로 맞이하여, 가네쓰구의 딸 오마츠를 아내로 맞이하고, 가게카츠의 편휘를 받아 '''나오에 야마토노카미 가쓰요시'''라고 칭했다[1]。 가네쓰구는 가쓰요시에게 막부 권력과 결탁하여 우에스기 가문을 거느리는 역할을, 친아들 헤이하치 가게아키에게는 에도에서의 대 막부 교섭의 역할을 기대하며 "나오에 체제"의 유지·강화를 꾀했다[2]

게이초 14년(1609년)에 가네쓰구는 동생 오쿠니 사네요리의 딸 아토라를 다시 양녀로 삼아 마사시게에게 시집보냈다.[1](사네요리는 가네쓰구가 마사시게를 양자로 맞이하는 것에 반대하여, 아토라를 데리러 온 가네쓰구의 가신을 베어 죽이고 출분했었다).[1] 그러나, 게이초 14년 5월 말부터 7월 초순까지 '''혼다 아와노카미 마사시게'''로 개명[4], 게이초 16년(1611년)에 우에스기 가문을 출분하고 무사시 국 이와쓰키에 잠복했다[5]

게이초 17년(1612년)에 도도 다카토라의 중재로 마에다 가문에 "귀참"하여 3만 석을 받았으며, 가로로서 아직 젊은 마에다 도시토시 (토시나가의 동생)를 보좌했다.[1] 아내 아토라는 가가에 있는 마사시게에게 불려 왔지만, 이 때 혼조 나가후사 (마사시게 이전의 가네쓰구의 양자, 후 우에스기 가문으로 귀참), 시노이 시게노리 등 20~30명이 이를 따라 마사시게를 섬겼다[6]。가가 혼다가문 내에 에치고, 데와 출신자가 존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7]

2. 5. 가가 번 중신 시대

덴쇼 8년 (1580년), 도쿠가와 가의 가신 혼다 마사노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게이초 2년 (1597년)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유모 오토바노쓰보네의 아들 가와무라 소하치(오카베 소하치)를 다툰 끝에 베어 죽이고 출분했다.[1] 출분 후에는 오타니 요시쓰구를 거쳐 우키타 히데이에의 가신이 되어 2만 석을 받았다.[1] 게이초 5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분전했으나 패배 후 오미 가타타에 은거했다.[1]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섬겼지만 바로 사임하고, 마에다 도시나가에게 3만 석의 녹봉으로 등용되었다가 게이초 8년에 마에다 가를 떠났다.[1] 게이초 9년 윤8월, 우에스기 가게카츠의 중신 나오에 가네쓰구의 사위가 되어 가네쓰구의 딸 오마츠와 결혼하고, '''나오에 야마토노카미 가쓰요시'''라 칭했다.[1] 가네쓰구는 가쓰요시에게 막부 권력과 결탁하여 우에스기 가문을 거느리는 역할을 기대했다.[2] 게이초 10년 오마츠가 병사했지만, 게이초 14년에 가네쓰구의 동생 오쿠니 사네요리의 딸 아토라와 재혼했다.[3][1]

게이초 14년 5월 말부터 7월 초순까지 '''혼다 아와노카미 마사시게'''로 개명하고,[4] 게이초 16년 우에스기 가문을 나와 무사시 국 이와쓰키에 잠복했다.[5] 게이초 17년 도도 다카토라의 중재로 마에다 가문에 "귀참"하여 3만 석을 받고 가로로서 마에다 도시토시를 보좌했다.[1] 아내 아토라는 가가에 있는 마사시게에게 불려 왔고, 이때 혼조 나가후사, 시노이 시게노리 등 20~30명이 마사시게를 섬겼다.[6]

게이초 18년 마에다 가문이 에도 막부로부터 엣추 국 반환 요구를 받자 이를 철회시킨 공으로 2만 석을 추가로 받아 5만 석이 되었다.[1] 가가 번이 막부에 반역 혐의를 받았을 때 에도로 가서 변명하여 징벌을 회피했고, 이 공으로 2만 석이 더해졌다.[1] 게이초 19년 겨울부터의 오사카 전투에 종군했지만, 사나다 노부시게에게 패했다.[1]혼다 마사즈미의 명을 받아 사나다 노부유키와 연계하여 노부시게 조략에 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1] 게이초 20년 윤달 6월 3일, 종5위하·아와노카미에 서임되었다.[1]

간에이 4년 (1627년) 4월 20일, 적남 마사쓰구와 정실 아토라가 사망하고, 같은 해 사이토인 도키나오의 딸과 재혼했다.[1] 이후 마에다 미쓰타카, 마에다 쓰나노리를 가로로서 보좌했다.[1] 쇼호 4년 (1647년) 3월, 병으로 은거하여 '''다이무'''라 칭하고, 오남 마사나가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같은 해 6월 3일에 사망했다.[1] 향년 68세.[1]

2. 6. 오사카 전투와 말년

덴쇼 19년 (1591년), 도쿠가와 가의 가신 구라하시 조에몬의 양자가 되었으나, 게이초 2년 (1597년)에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유모 오토바노쓰보네의 아들 가와무라 소하치(오카베 소하치)를 다툰 끝에 베어 죽이고 출분했다.[1] 출분 후 우키타 히데이에의 가신이 되어 2만 석을 받았으며, '''마사키 사에몬'''이라 칭했다.[1]

게이초 5년 (1600년)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우키타 군의 일익을 담당하여 서군 측으로서 분전했지만, 서군이 패배했기 때문에 도주하여 오미가타타로 은거했다.[1] 그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섬겼지만 바로 사임하고, 마에다 토시나가에게 3만 석이나 되는 고액의 녹봉으로 등용되었으나 1603년 마에다 가를 떠났다.[1]

우에스기 가게카츠의 중신 나오에 가네쓰구는 게이초 9년 (1604년) 윤8월, 마사시게를 사위로 맞이하여, 가네쓰구의 딸 오마츠를 아내로 맞이하고, 가게카츠의 편휘를 받아 '''나오에 야마토노카미 가쓰요시'''라 칭했다[1]1605년 8월 17일에 오마츠가 병사했지만[3], 양자 연은 계속되었고, 1609년에 가네쓰구는 동생 오쿠니 사네요리의 딸 아토라를 다시 양녀로 삼아 시집보냈다.[1] 그러나, 1609년 5월 말부터 7월 초순까지 '''혼다 아와노카미 마사시게'''로 개명[4], 1611년에 우에스기 가문을 출분하고 무사시 국 이와쓰키에 잠복했다[5]1612년도도 다카토라의 중재로 마에다 가문에 "귀참"하여 3만 석을 받았으며, 가로로서 아직 젊은 마에다 도시토시 (토시나가의 동생)를 보좌했다.[1]

1613년, 마에다 가문이 에도 막부로부터 엣추 국의 반환을 요구받자 이를 철회시키고, 그 공적으로 인해 다시 2만 석을 가증받아 5만 석이 되었다.[1] 가가 번이 막부에 반역의 혐의를 받게 되었을 때에는 에도로 가서 필사적으로 변명함으로써 징벌을 회피했고, 이 공적을 치하받아 더욱 2만 석이 가증되었다.[1] 1614년 겨울부터의 오사카 전투에도 종군했지만, 사나다 노부시게에게 사나다마루로 유인당한 끝에 패배하여 노부시게에게 이름을 떨치게 했다.[1] 1615년 윤달 6월 3일, 종5위하·아와노카미에 서임되었다.[1]

간에이 4년 (1627년) 4월 20일, 적남 마사쓰구가 18세로 사망하고, 6월 10일에는 정실 아토라도 사망했다.[1] 쇼호 4년 (1647년) 3월, 병을 이유로 은거하여 '''다이무'''라고 호칭하고, 오남 마사나가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같은 해 6월 3일에 사망했다.[1] 향년 68세.[1]

3. 가족 관계 및 후손

4. 평가 및 관련 작품

야마다 후타로의 소설 『반기병』, 하타 유헤이의 소설 『혼다의 여우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비보』, 『용이 본 꿈』, 아베 류타로의 소설 『살아있사옵니다』(2002년), 키노시타 마사키의 소설 『우키타의 낙토』 등의 작품에 등장한다.

4. 1. 평가

4. 2. 관련 작품


  • 야마다 후타로/山田風太郎일본어의 소설 《반기병》
  • 하타 유헤이/秦悠平일본어의 소설 《혼다의 여우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비보》
  • 하타 유헤이의 소설 《용이 본 꿈》
  • 아베 류타로/安部龍太郎일본어의 소설 《살아있사옵니다》(2002년)
  • 키노시타 마사키/木下昌輝일본어의 소설 《우키타의 낙토》

5. 참고 문헌


  • 기무라 토쿠에 『나오에 가네츠구전』 (사저판), 1944년
  • 와타나베 산세이 『나오에와 그 시대』 노지마 출판, 1980년
  • 오노 미츠루 「마에다 도시나가 정권의 성립」, 『카이난 사학』 20호, 1982년
  • 시미즈 사토시 「게이초기 가가번의 정치 체제와 막번 체제 편성에 대하여 ― 『3개조 조서』와 혼다 마사시게 등용을 중심으로 ―」, 『릿쇼 대학 대학원 연보』 20호, 2003년
  • 시미즈 사토시 「게이초기 가가번에서의 막번적 질서 편성에 관한 과정 ― 『취급인』 혼다 마사시게의 창출과 그 정치적 역할 ―」, 『릿쇼 사학』 95호, 2004년
  • 시미즈 사토시 「겐와기 가가번에서의 막번적 질서 편성과 번정의 성립 ― 출두인 정치의 창출과 그 정치적 의의 ―」, 『가노 사료 연구』 17호, 2005년
  • 아베 테츠토 「에도 막부와 나오에 가네츠구 ― 두 아들과 ―」, 야다 토시후미 편 『나오에 가네츠구』 코시 쇼인, 2009년
  • 혼다 토시히코 「혼다 마사시게 가신단의 기초적 고찰 ― 그 가신단 구성에 대하여 ―」, 『다카오카 호카 대학 기요』 20호, 2009년
  • 혼다 토시히코 「『나오에 쇼키치』에 관한 일고찰」, 하나가사키 모리아키 감수 『나오에 가네츠구의 신연구』 미야오비 출판사, 2009년

참조

[1] 서적 直江兼続伝
[2] 논문 江戸幕府と直江兼続―二人の息子と―
[3] 서적 直江兼続伝
[4] 서적 直江兼続伝
[5] 서적 直江兼続伝
[6] 서적 直江兼続とその時代
[7] 논문 本多政重家臣団の基礎的考察 —その家臣団構成について-
[8] 문서
[9] 문서
[10] 문서 20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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