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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타 마사아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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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홋타 마사아쓰는 센다이 번 출신으로, 1786년 호리타 마사토미의 사위 양자가 되어 가타타 번 번주가 되었다. 1789년 막부에 출사하여 와카도시요리를 거쳐 42년간 재임하며 간세이 개혁을 도왔다.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조류 도감인 《금보》와 《관문금보》를 편찬하고, 이노 다다타카의 측량 사업을 지원하는 등, 18세기 에도 시대의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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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타 마사아쓰
기본 정보
홋타 마사아쓰
씨명홋타 씨
이름홋타 마사아쓰
시대에도 시대 중기 - 후기
출생호레키 5년 7월 20일(1755년8월 27일
사망덴포 3년 6월 16일(1832년7월 13일)
개명이다테 도하치로(유명)→나카무라 무라요시→홋타 마사아쓰
임경
수월
시호해당 없음
계명해당 없음
묘소도쿄도시부야구히로오의 瑞泉山祥雲寺탑두 향림원
관위종5위하셋쓰노카미
막부에도 막부오반가시라와카도시요리
주군도쿠가와 이에나리
무쓰센다이 번 번사→오미가타타 번 번주→시모쓰케사노 번 번주
씨족이다테 씨→홋타 씨
부모아버지:이다테 무네무라, 어머니:세이젠인(사카 노부유키의 딸)
양아버지홋타 마사토미
형제자매이다테 시게무라、도이 도시노리、이다테 무라토모、도이 도시오키、마사아쓰、미나히메(나베시마 시게모리실)、카이히메(사카이 다다테루실)、닌히메(나카무라 가게사다실)、세이히메(마쓰다이라 하루사토실)
배우자정실:홋타 마사토미 딸
측실:기무라 씨
자녀다무라 무네아키라、마사히라、모리 모토요、
오제키 마스나리 정실、에이、마키노 모치나리 정실、
구가이 마사미쓰 정실、이타쿠라 가쓰노리 정실
번주로서의 정보
전임자홋타 마사토미
후임자폐번
직책가타타 번 번주 (홋타가)
임기1787년 ~ 1787년
대수6
번주로서의 정보 (재봉)
전임자막부령(홋타 마사타카)
후임자홋타 마사히라
직책사노 번 번주 (홋타가, 재봉)
임기1787년 ~ 1832년
대수1

2. 생애

호레키 5년 (1755년) 센다이 번 제6대 번주 다테 무라무라의 여덟째 아들로 태어났다.[1] 텐메이 6년 (1786년) 홋타 마사토미의 사위 양자가 되어 이듬해 가타타 번 번주가 되었고,[3] 칸세이 원년 (1789년) 오오반가시라를 거쳐 이듬해 와카도시요리에 취임하여 42년간 재임하며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칸세이 개혁을 도왔다.[5]

이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와 전봉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6] 센다이 번과 사쿠라 번 등 여러 번의 후견을 맡으며 막부 정치에 기여했다. 칸세이 11년 (1799년)에는 『칸세이 중수 제씨보』 편찬 총재를 맡았고,[9][10] 이후 『간세이로쿠』 편찬을 시작하여 쇼헤이자카 학문소에서 막부 사업으로 이어받아 덴포 6년 (1835년)에 완성되었다.

분카 4년 (1807년) 에조치 (현재의 홋카이도)를 시찰하고, 그 여정을 『마쓰마에 기행 (에조 기행)』으로 기록했다. 이 책에는 조류에 대한 기록 외에도 표류민을 통해 얻은 현지 정보 등이 담겨 있다. 또한 오쓰키 겐타쿠를 통해 외국 사정을 듣고 그의 번역 활동을 지원하며 『환해이문』, 『후생신편』 제작에 관여했다.[12]

분세이 9년 (1826년) 시모노 아소군 우에노무라(현재의 도치기현 사노시)로 진야 교체를 명받았고, 분세이 12년 (1829년)에는 3,000석이 가증되어 사노 번 1만 6,000석의 번주가 되었다.

덴포 3년 (1832년) 1월 29일 치사 (퇴관)하고, 다섯째 아들 호리타 마사히라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 같은 해 6월 7일 향년 78세로 사망하여 쇼운지에 묻혔다.

2. 1. 출생과 가계

호레키 5년 7월 20일 (1755년 8월 27일) 무쓰센다이 번 제6대 번주 다테 무라무라의 여덟째 아들(제17자)로 센다이에서 태어났다. 유아명은 '''토우하치로우'''였다. 어머니는 측실 세이젠인이었다. 안에이 4년 (1775년) 나카무라 성을 하사받아 '''나카무라 무라요시'''(なかむら むらよし)라고 칭했다[1]. 베야즈미 시절부터 막신이 되는 것을 꿈꿨으며, 하타모토로서 출사하기를 희망했다고 전해진다[2].

텐메이 6년 (1786년) 3월 26일 홋타 마사토미의 사위 양자가 되었고, 이듬해인 1787년 마사토미가 은거하자 가타타 번 1만 고쿠의 번주가 되었다[3]. 홋타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기 전부터 자식이 있었는데, 차남으로 무쓰 이치노세키 번의 번주가 된 다무라 무네아키는 홋타 가문 양자 입적 2년 전인 1784년에 태어났다. 하지만 츠네노죠라는 유아명을 가진 무네아키는 아버지가 홋타 가문에 간 후에도 어머니와 함께 센다이 번 하야시키에 남겨졌다는 기록이 있다[4].

아버지다테 무네무라 (1718년 - 1756년)
어머니쇼젠인 (1719년 - 1763년) - 사카 노부유키의 딸
양아버지홋타 마사토미 (1750년 - 1791년)
정실홋타 마사토미의 딸
측실기무라 씨
차남다무라 무네아키 (1784년 - 1827년) - 다무라 무라모치의 양자
오남홋타 마사히라 (1795년 - 1854년)
육남모리 모토요 (1796년 - 1845년) - 모리 마사아키의 양자
차녀오제키 마스나리 정실
기타에이 - 도이 도시모치 정실, 마키노 모리나리 정실, 구가이 마사미쓰 정실, 이타쿠라 가쓰노리 정실


2. 2. 가독 상속과 막부 출사

호레키 5년 7월 20일(1755년 8월 27일) 무쓰 센다이 번 제6대 번주 다테 무라무라의 여덟째 아들(제17자)로 센다이에서 태어났다. 유아명은 '''토우하치로우'''이며, 어머니는 측실 세이젠인이다. 안에이 4년(1775년) 나카무라 성을 하사받아 '''나카무라 무라요시'''(なかむら むらよし)라고 칭했다[1]. 베야즈미 시절부터 막신이 되는 것을 꿈꿨다고 하며, 하타모토로서 출사를 희망했다고 전해진다[2].

텐메이 6년(1786년) 3월 26일 호리타 마사토미의 사위 양자가 되었고, 이듬해 텐메이 7년(1787년) 마사토미가 은거하자 카타타 번 1만 고쿠의 번주가 되었다[3]. 호리타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기 전 이미 자식이 있었는데, 차남이자 훗날 무쓰 이치노세키 번의 번주가 된 다무라 무네아키는 텐메이 4년(1784년)에 태어났다. 츠네노죠라는 유아명을 가진 무네아키는 아버지가 호리타 가문에 간 후에도 어머니와 함께 센다이 번 하야시키에 남겨졌다는 기록이 있다[4].

칸세이 원년(1789년) 4월 8일 오오반가시라에 취임하여 막부에 출사했고, 이듬해 칸세이 2년(1790년) 6월 10일 당시 로쥬였던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에게 발탁되어 와카도시요리가 된 후 42년이라는 장기간 재임하게 되었다[5].

2. 3. 간세이 개혁 참여와 사다노부와의 갈등

1786년 3월 26일에 호리타 마사토미의 사위 양자가 되어, 이듬해 1787년 마사토미가 은거하자 가타타 번 1만 고쿠의 번주가 되었다.[3] 1789년 4월 8일에 오오반가시라에 취임하여 막부에 출사했고, 이듬해 1790년 6월 10일에 당시 로쥬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에게 발탁되어 와카도시요리가 되어 42년이라는 장기간 재임하게 되었다.[5] 이후 사다노부의 간세이 개혁을 도왔지만, 후에 사다노부와 그의 아들 사다나가가 무쓰 시라카와 번에서 호리타 종가가 다스리는 시모사 사쿠라 번으로의 전봉을 획책했을 때, 사쿠라 번주 호리타 마사요시를 도와 사다노부 부자와 다투어 그 계획을 저지했다.[6]

1796년에 조카인 센다이 번주 다테 나리무라가 후계자를 정식으로 정하지 않고 사망했을 때, 친형 다테 시게무라의 정실 간신인과 조카 미카와 가리야 번주 도이 도시카타와 함께 그 처리에 관여하여, 뒤를 이은 종손 다테 지카무네 (당시 유아)의 후견인이 되었다. 다만, 센다이 번의 번정에 특별히 관여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막부와 센다이 번 양측의 센다이 번의 치세 불안 해소가 목적이었으며, 분카 4년 (1807년)의 에조 순검 때 사다노부에게 지카무네의 후견을 맡겼다.[7]

2. 4. 센다이 번과의 관계

텐메이 6년(1786년) 3월 26일에 호리타 마사토미의 사위 양자가 되어, 이듬해 1787년 마사토미가 은거하자 가타타 번 1만 고쿠의 번주가 되었다.[3] 호리타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기 전부터 자식이 있었는데, 차남으로 무쓰 이치노세키 번의 번주가 된 다무라 무네아키는 호리타 가문 양자 입적 2년 전인 1784년에 태어났다. 츠네노죠라는 유아명을 가진 무네아키는 아버지가 호리타 가문에 간 후에도 어머니와 함께 센다이 번 하야시키에 남겨졌다는 기록이 있다.[4]

간세이 8년(1796년)에 조카인 센다이 번주 다테 나리무라가 후계자를 정식으로 정하지 않고 사망했을 때, 친형 다테 시게무라의 정실 간신인과 조카 미카와 가리야 번주 도이 도시카타와 함께 그 처리에 관여하여, 뒤를 이은 종손 다테 지카무네(당시 유아)의 후견인이 되었다. 다만, 센다이 번의 번정에 특별히 관여한 것은 아니었고, 막부와 센다이 번 양측의 센다이 번 치세 불안 해소가 목적이었다. 분카 4년(1807년) 에조 순검 때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에게 지카무네의 후견을 맡겼다.[7]

그 자신도 센다이 번에 대한 원조와 상담을 아끼지 않았다. 가신을 통해 에도 상인 이시바시 야헤에에게 센다이 번에 자금을 융자하게 하거나, 1810년 센다이 번 번교 요켄도의 학두 오쓰키 헤이센이 에도로 올라가 학제 개혁을 하야시 릿사이에게 상담했을 때, 릿사이와 함께 찬성하여 헤이센의 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분세이 11년(1828년)에는 센다이 번을 상속한 다테 나리쿠니의 후견도 맡았다.[8]

2. 5. 학문적 관심과 문화 사업

호레키 5년 (1755년)에 센다이 번 제6대 번주 다테 무라무라의 여덟째 아들로 태어난 홋타 마사아쓰는 어릴 적부터 학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1] 텐메이 6년 (1786년) 호리타 마사토미의 사위 양자가 되어 카타타 번의 번주가 되었고,[3] 칸세이 원년 (1789년)에는 오오반가시라를 거쳐 이듬해 와카도시요리에 취임하여 42년간 재임하며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의 칸세이 개혁을 도왔다.[5]

마사아쓰는 학문적 소양이 깊고 본초학와카에 능했으며, 란가쿠를 장려하고 학자들을 후원했다.[11] 스스로 조류 도감인 『금보』와 해설서 『관문금보』를 편찬하고, 『관문수보』, 『관문개보』를 집필하는 등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11]

특히 『금보』와 『관문금보』는 단순한 조류 도감을 넘어, 각 조류에 대한 생물학적 정보뿐만 아니라 관련된 와카나 한시 등의 고증을 담은 종합 학술 사전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15] 이는 당시 서양의 조류학과도 구별되는 독자적인 학문적 성과를 보여주는 것으로, 에도 시대 학문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15]

마사아쓰는 분카 4년 (1807년) 에조치 (현재의 홋카이도)를 시찰하고, 그 여정을 『마츠마에 기행 (에조 기행)』으로 기록했다. 이 책에는 조류에 대한 기록 외에도 표류민을 통해 얻은 현지 정보 등이 담겨 있다. 또한 오오츠키 겐타쿠를 통해 외국 사정을 듣고 그의 번역 활동을 지원하며 『환해이문』, 『후생신편』 제작에 관여했다.[12]

칸세이 11년 (1799년)에는 『칸세이 중수 제씨보』 편찬 총재를 맡았고,[9][10] 이후 『간세이로쿠』 편찬을 시작하여 쇼헤이자카 학문소에서 막부 사업으로 이어받아 덴포 6년 (1835년)에 완성되었다.

마사아쓰의 저작 및 수집 자료는 "호리타 문고" 장서인이 찍혀 있으며, 메이지 초기에 일부가 도쿄 국립 박물관 등에 소장되었다.[11]

마사아쓰의 주요 저작 및 문화 사업 연보는 다음과 같다.

연도사건
1794년 (간세이 6년)『관문금보』에 오토 니슈가 서문을 씀
1799년 (간세이 11년)『간세이 중수 제씨보』 편찬 착수[9][10]
1804년 (분카 원년)『관심원 육십 하 와카』 (실형 도이 도시노리, 차남 소켄의 양부 타무라 무라모치 등과 공저) 완성
1805년 (분카 2년)『하기카 하나스리』 완성
1808년 (분카 5년)에조치 시찰 기록 『마츠마에 기행 (에조 기행)』 완성
1812년 (분카 9년)『간세이 중수 제씨보』·『간세이 중수 제집보 목록』 완성
1831년 (덴포 2년)센다이 번의 유학자 사쿠라다 킨사이·코노 안안에 의해 『관문금보』가 정보되어 완성[17]


2. 6. 에조치 시찰과 러시아 대응

분카 4년(1807년), 러시아에조치(현재의 홋카이도)를 침입하는 사건(분카 루코)이 발생하자, 홋타 마사아쓰는 마쓰마에 번으로 시찰을 떠났다. 그는 6월부터 10월까지 4개월간의 여정을 『마쓰마에 기행 (에조 기행)』에 기록했는데, 여기에는 조류 도감 관련 생물 기록뿐 아니라, 표류민과 함께 에조치 현지 조사를 시도한 내용도 담겨 있다.

또한 오오츠키 겐타쿠를 통해 외국 사정을 듣고 그의 번역 활동을 지원하여, 『환해이문』과 『후생신편』 제작에도 관여했다.[12]

2. 7. 진야 이전과 만년

호레키 5년 (1755년 8월 27일) 무쓰국 센다이 번 제6대 번주 다테 무라무라의 여덟째 아들(제17자)로 센다이에서 태어났다. 유아명은 '''도하치로'''이며, 어머니는 측실 세이젠인이다. 안에이 4년 (1775년) 나카무라 성을 하사받아 '''나카무라 무라요시'''(なかむら むらよし)라고 칭했다[1]. 베야즈미 시절부터 막신이 되는 것을 꿈꿨다고 하며, 하타모토로서 출사를 희망했다고 전해진다[2].

텐메이 6년 (1786년) 3월 26일 호리타 마사토미의 사위 양자가 되었고, 이듬해 (1787년) 마사토미의 은거로 가타타 번 1만 고쿠의 번주가 되었다[3]. 양자로 들어가기 전 이미 자식이 있었는데, 차남이자 훗날 무쓰 이치노세키 번의 번주가 된 다무라 무네아키는 텐메이 4년 (1784년)에 태어났다. 쓰네노조라는 유아명을 가진 무네아키는 아버지가 호리타 가문에 간 후에도 어머니와 함께 센다이 번 하야시키에 남겨졌다는 기록이 있다[4].

간세이 원년 (1789년) 4월 8일 오반가시라에 취임하여 막부에 출사했고, 이듬해 (1790년) 6월 10일 당시 로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에게 발탁되어 와카도시요리가 된 후 42년이라는 장기간 재임하게 되었다[5]. 이후 사다노부의 간세이 개혁을 도왔으나, 훗날 사다노부와 그의 아들 마쓰다이라 사다나가가 무쓰 시라카와 번에서 호리타 종가가 다스리는 시모사국 사쿠라 번으로 전봉을 획책했을 때, 사쿠라 번주 호리타 마사요시를 도와 사다노부 부자와 다투어 그 계획을 저지했다[6].

간세이 8년 (1796년) 조카인 센다이 번주 다테 나리무라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사망하자, 친형 다테 시게무라의 정실 간신인과 조카 미카와국 가리야 번주 도이 도시카타와 함께 그 처리에 관여하여 뒤를 이은 종손 다테 지카무네(당시 유아)의 후견인이 되었다. 다만, 센다이 번정에 특별히 관여한 것은 아니고, 막부와 센다이 번 양측의 센다이 번 치세 불안 해소가 목적이었으며, 분카 4년 (1807년) 에조 순검 때 사다노부에게 지카무네의 후견을 맡겼다[7].

그렇지만 센다이 번에 대한 원조와 상담을 아끼지 않아, 가신을 통해 에도 상인 이시바시 야헤에에게 센다이 번에 자금을 융자하게 하거나, 분카 7년 (1810년) 센다이 번 번교 요켄도의 학두 오쓰키 헤이센이 에도로 올라가 학제 개혁을 하야시 릿사이에게 상담했을 때, 릿사이와 함께 찬성하여 헤이센의 운동을 지원했다. 분세이 11년 (1828년)에는 센다이 번을 상속한 다테 나리쿠니의 후견도 맡았다[8]. 그 외 사쿠라 번주 호리타 마사요시가 병으로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자, 그의 후견인도 맡았다.

간세이 11년 (1799년) 『간세이 중수 제씨보』 편찬 총재를 맡았다[9][10]. 다만, 1만 석 이상의 다이묘에 관한 기록만 있어 이에 불만을 가진 마사아쓰는 사적 사업으로 막부 창업기부터 50년 정도의 기간 동안 1만 석 이하 하타모토들의 사적을 모은 『간세이로쿠』 편찬을 시작했다. 『간세이로쿠』는 고령이 된 마사아쓰의 손을 떠나, 하야시 릿사이와 하타모토 도다 우지사카 등의 편찬자에 의해 쇼헤이자카 학문소에서 막부의 사업으로 계속되었으며, 마사아쓰 사망 3년 후인 덴포 6년 (1835년)에 완성되었다.

스스로 화한・본초 학식이 풍부하고, 란가쿠자를 보호하는 등 학자를 후하게 대우했다. 조류 도감 『금보』와 해설서 『관문금보』 (후술)를 편찬하고, 『관문수보』 (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 『관문개보』 (조개 박물서, 사본을 도요 문고가 소장)도 집필했다. 『금보・관문금보』를 비롯한 마사아쓰 구장 자료에는 "호리타 문고" 장서인이 찍혀 있으며, 메이지 초기에 『관문금보』가 도쿄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는 등 일부 자료는 외부로 유출되었다[11].

분카 3년 (1806년) 3,000석 가봉되어, 가타타 번 1만 3,000석이 되었다. 이듬해 분카 4년 에조치(현재의 홋카이도)로의 러시아인 침입 (분카 루코)을 시찰하기 위해 마쓰마에 번으로 출발, 6월부터 10월까지 4개월의 여정을 『마쓰마에 기행 (에조 기행)』으로 기록했다. 내용은 조류 도감에 관한 생물 기록뿐만 아니라, 표류민을 데리고 에조치로 가서 현지 조사를 시도한 것이 적혀 있다. 오쓰키 겐타쿠를 통해 외국 사정을 듣고, 겐타쿠의 번역 활동을 지원하여 『환해이문』, 『후생신편』 제작에 관여하고 있다[12].

분세이 9년 (1826년) 시모노 아소군 우에노무라(현재의 도치기현 사노시, 초대 가타타 번주 호리타 마사타카의 구령)로 진야 교체를 명받았다. 시가군 호리타령은 계속 지배하지만, 도고・가타타 향사가 실질 관할하게 된다. 분세이 12년 (1829년) 3,000석 가봉되어 사노 번 1만 6,000석이 되었다.

덴포 3년 (1832년) 1월 29일 치사(퇴관)하고, 다섯째 아들 호리타 마사히라가 가독을 이었다. 같은 해 6월 7일 사망. 향년 78세(만 76세). 도요시마군 시모시부야무라(현재의 도쿄도 시부야구 히로오) 린자이종 즈이센산 쇼운지 다토 고린인에 묻혔다.

3. 마사아쓰의 문화 사업

홋타 마사아쓰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주도한 간세이 개혁에 참여하여 와카(일본 고유의 시가)를 중심으로 한 문교 부흥책을 추진했다. 그는 학문을 좋아하는 다이묘, 학자, 문인 등과 교류하며 고전을 수집하고 당대 학문을 반영한 사본을 편찬했다. 마사아쓰의 수집 자료에는 "호리타 문고" 장서인이 찍혀 있으며, 『간세이 중수 제집보』를 발안했다. 이노 다다타카와도 연결되어 자주 측량 사업을 지원하거나 민원 처리를 담당했고, 그와 교류가 깊은 다카하시 요시토키·카게야스 부자와도 친교가 있었다.

마사아쓰는 사쿠라 번을 둘러싼 불화가 있었던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와도 뛰어난 문화인이었기 때문에 노중 사임 후에도 그의 저택에 드나들면서 교우 관계를 지속했다. 사다노부가 은퇴 후 쓴 『화월일기』에 서문을 보내고, 그가 축조한 정원 『욕은원』을 빈번히 방문했으며, 사다노부의 호인 '화월'에 대해 '수월'이라는 호를 정하고, 서로 와카에 힘쓰면서 각자의 저작에 서문을 보내는 등 하야시 쥬츠사이와 함께 사다노부의 두터운 신뢰를 받는 친구로 남았다. 한편, 사다노부의 가신 미즈노 타메나가가 기록한 『요시노 책자』에는 마사아쓰의 성격과 평판이 쓰여 있는데, 타인에게 배려할 수 있는 뛰어난 문화인으로서 주변의 평판이 좋은 반면, 양자로 들어갈 때 쓰네노죠를 저택에 남겨둔 건이나 방탕으로 좌석 압박을 받은 이야기도 기록되어 있다.[13]

마사아쓰가 관여한 주요 저작 및 편찬 연도는 다음과 같다.


  • 간세이 6년 (1794년) - 『관문금보』에 오토 니슈가 서문을 씀.
  • 간세이 11년 (1799년) - 『간세이 중수 제집보』 편찬 착수.
  • 분카 원년 (1804년) - 『관심원 육십 하 와카』 (실형 도이 도시노리, 차남 소켄의 양부 타무라 무라모치 등과 공저) 완성.
  • 분카 2년 (1805년) - 『하기카 하나스리』 완성.
  • 분카 5년 (1808년) - 에조치 시찰 기록 『마츠마에 기행 (에조 기행)』 완성.
  • 분카 9년 (1812년) - 『간세이 중수 제집보』·『간세이 중수 제집보 목록』 완성.
  • 템포 2년 (1831년) - 센다이 번의 유학자 사쿠라다 킨사이, 코노 안안에 의해 『관문금보』가 정보되어 완성.[17]


『관문수보』, 『관문개보』의 성립 시기는 불명확하다.

3. 1. 호리타 문고

홋타 마사아쓰는 막부의 와카(일본 고유의 시가) 진흥 정책에 따라 간세이 개혁을 추진하면서 고전과 당대 학문을 반영한 자료를 수집했다. 이 자료들에는 "호리타 문고" 장서인이 찍혀 있으며, 대표적인 자료로는 조류 분류 도감인 『'''금보'''』(킨푸)와 『'''관문금보'''』(칸분킨푸)가 있다.[14]

『금보』와 『관문금보』는 단순한 조류 도감을 넘어, 관련 와카나 한시 등의 고증을 담은 종합 학술 사전의 성격을 지닌다. 특히 『금보』는 다이묘, 학자, 서민 간의 지적 교류 흔적을 보여주는 역사적, 문화적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15] 『관문금보』는 1794년에 서문이 작성되어 일단 완성되었으나, 1831년까지 교정 작업이 계속되었다.[16]

이 책들은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조류를 다음과 같이 분류하여 상세히 설명한다.

분류내용
수금두루미과, 황새목, 오리목, 도요목의 일부 등
원금꿩목, 참새목, 도요목의 각 일부 등
임금참새목의 일부, 비둘기목
산금매목, 올빼미목



이 외에도 "이방금 소조"라는 장을 통해 국외 조류도 소개했다.

마사아쓰는 조류의 외관과 관찰을 통해 얻은 특징뿐만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를 중시하여 와명, 서식지, 외관, 문헌 기록, 와카 인용, 식용 및 약효 등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이는 신체 부위 분석, 분류, 해부학적 관점을 중시한 서양의 조류학과 차이를 보이지만, 근현대에도 통용되는 종 분류와 해설, 생태적 특징을 담고 있어 당시 일본인의 생활과 조류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마사아쓰는 당시 막부의 지배가 미치지 않던 에조치(지금의 홋카이도)에도 관심을 가지고 란가쿠(난학)자들과 교류하며, 바다오리두루미의 생태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현재 연구와 비교하면 부족한 점도 있지만, 400종 이상의 조류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당시 조류 생태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18세기 에도 시대의 높은 학문 수준을 보여준다.

하지만 호리타 문고의 사본 중에는 미완성인 것도 있어, 마사아쓰 만년의 어려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는 근세 학예 문화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사아쓰가 관여한 주요 저작 및 편찬 연도는 다음과 같다.


  • 간세이 6년 (1794년) - 『관문금보』에 오토 니슈가 서를 씀.
  • 간세이 11년 (1799년) - 『간세이 중수 제집보』 편찬 착수.
  • 분카 원년 (1804년) - 『관심원 육십 하 와카』 (실형 도이 도시노리, 차남 소켄의 양부 타무라 무라모치 등과 공저) 완성.
  • 분카 2년 (1805년) - 『하기카 하나스리』 완성.
  • 분카 5년 (1808년) - 에조치 시찰 기록 『마츠마에 기행 (에조 기행)』 완성.
  • 분카 9년 (1812년) - 『간세이 중수 제집보』·『간세이 중수 제집보 목록』 완성.
  • 템포 2년 (1831년) - 센다이 번의 유학자 사쿠라다 킨사이, 코노 안안에 의해 『관문금보』가 정보되어 완성.[17]


『관문수보』, 『관문개보』의 성립 시기는 불명확하다.

3. 2. 《금보》와 《관문금보》

홋타 마사아쓰는 막부의 문교 부흥책에 따라 고전을 수집하고 학문을 반영한 사본을 편찬했다. 그의 수집 자료에는 "호리타 문고" 장서인이 찍혀 있으며, 대표적인 자료가 조류 분류 도감인 《금보》(禽譜)와 《관문금보》(寛文禽譜)이다.[14]

《금보》(긴푸, 堀田禽譜)와 《관문금보》(칸분킨푸, 寛文禽譜)는 단순한 조류 도감을 넘어, 관련 와카(和歌)나 한시(漢詩) 등의 고증도 담은 종합 학술 사전의 성격을 지닌다.[15] 《금보》는 《관문금보》의 도보부(図譜部)로 여겨지기도 한다.[15]

《관문금보》는 1794년에 서문이 붙어 일단 완성되었으나, 1831년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16] 일본 조류를 수금, 원금, 임금, 산금 등으로 분류하고, 각 종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인간과의 관계(와명, 서식지, 식용, 약효 등)를 중시했다. 서양의 해부학적 조류학과는 다르지만, 근현대적 종 분류와 생태적 특징을 자세히 기록하여 일본인의 생활과 관련된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15]

홋타 마사아쓰는 에조치(현 홋카이도)를 탐사하고, 러시아에서 네덜란드를 거쳐 전해진 바다오리의 그림과 생태를 수록하는 등 당시 막부의 지배가 미치지 않던 지역의 조류까지 기록했다. 400종 이상의 조류를 망라한 이 자료는 18세기 에도 시대의 높은 학문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관문금보》 관련 주요 연표는 다음과 같다.

연도사건
1794년《관문금보》에 오토 니슈(大東義中)가 서문을 씀.
1831년센다이 번의 유학자 사쿠라다 긴사이(桜田欽斎)와 고노 안안(高野杏庵)에 의해 《관문금보》 완성.[17]



《관문수보》, 《관문개보》의 성립 시기는 불명이다.

3. 3. 《간세이 중수 제가보》

홋타 마사아쓰는 사다노부가 주도한 간세이 개혁에 참여하여 와카(일본 고유의 시가)를 중심으로 한 문교 부흥책을 추진했다. 그는 학문을 좋아하는 다이묘, 학자, 문인 등 문화 애호가들과 교류하며 고전을 수집하고, 사본을 편찬했다. 이때 수집한 자료에는 "호리타 문고"의 장서인이 찍혀 있으며, 『간세이 중수 제가보』 발안도 했다.

1799년(간세이 11년), 홋타 마사아쓰는 『간세이 중수 제가보』 편찬에 착수했다. 1812년(분카 9년)에는 『간세이 중수 제가보』와 『간세이 중수 제가보 목록』을 완성했다.

3. 4. 이노 다다타카, 다카하시 요시토키 부자와의 교류

홋타 마사아쓰는 이노 다다타카와 교류가 깊었던 다카하시 요시토키·가게야스 부자와도 친분이 있었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와카(일본 고유의 시가)를 중심으로 추진한 문교 부흥책에 참여하면서, 야시로 히로카타, 키타무라 키분, 하나와 호키이치 등 학문을 좋아하는 이들과 교류하며 고전을 수집하고 당대 학문을 반영한 사본을 편찬했다. 홋타 마사아쓰의 수집 자료에는 "호리타 문고" 장서인이 찍혀 있으며, 『간세이 중수 제집보』 발간을 제안하기도 했다.

3. 4. 1. 이노 다다타카의 측량 사업 지원

이노 다다타카가 측량대를 이끌고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대일본 연해여지전도를 제작한 것을 홋타 마사아쓰가 후원했다.[18]

이러한 지원의 계기는 8대 정의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역법 개정에 착수한 것이었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조부의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노중 수좌를 사임한 후에는 홋타 마사아쓰가 마쓰다이라 노부아키 등과 함께 이어받았다. 1795년에는 마 간시게토미·다카하시 요시토키를 천문방에 채용하여 개력 사업을 맡겼다.[18] 1798년에 간세이력이 시행되었지만, 이후 오차가 발견되어 개력 사업이 다시 진행되었다.[18]

이노 다다타카는 다카하시 요시토키의 제자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홋타 마사아쓰와 관계가 깊은 구와바라 다카토모의 개입이 있었다고 추측된다.[19] 1800년부터 이노 다다타카는 측량대를 이끌고 일본 측량 및 지도 제작을 시작했는데, 구와바라가 이노 다다타카에게 막부에 다음 측량 신청을 권했다. 구와바라는 홋타 마사아쓰의 의향으로 절차를 전달한 것으로 보이며, 막부의 공식적인 원조는 없었지만 지도 제작을 계속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구와바라를 통해 연락을 취한 것으로 추측된다.[20]

홋타 마사아쓰는 이노 다다타카의 제2회 측량 계획 수정을 지시하고, 1804년에는 동일본 부분 지도를 참관했으며, 이노 다다타카를 막신으로 등용했다.[21] 또한 국방 문제에 관심을 갖고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와 대화하며 지도 제작이 막부 공식 사업으로 격상되는데 영향을 주었다. 1806년 측량대원들의 문제 발생 시 이노 다다타카에게 주의를 주었지만 온건하게 처치했다.[21] 이러한 과정을 거쳐 측량이 완수되었고, 이노 다다타카 사후 1821년에 다카하시 요시토키의 아들 다카하시 가게야스가 완성된 대일본 연해여지전도를 제출했다.[21]

홋타 마사아쓰는 다카하시 가게야스에게 정보 제공을 받고 외교 관련 첩보에 종사하게 했다고 추정된다.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와 정보 교환을 했다는 설도 있지만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지볼트 사건에도 불구하고 『관문금보』에 그의 이름이 남아있고, 외국 책 번역 작업을 했던 정황, 1826년 홋타 마사아쓰가 구리모토 탄슈를 통해 펭귄에 대해 질문한 점 등으로 보아 홋타 마사아쓰가 다카하시 가게야스와 지볼트의 관계에 깊이 관여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22] 모가미 도쿠나이의 에조치 탐험 재개에도 홋타 마사아쓰가 관여했다고 한다.[22]

3. 4. 2. 다카하시 요시토키 부자와의 천문학 교류

이노 다다타카와 교류가 깊었던 다카하시 요시토키·가게야스 부자와도 친분이 있었다. 홋타 마사아쓰는 다카하시 부자가 추진한 간세이력 개력 사업을 지원했다.[18]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역법 개정 사업을 이어받았으나, 노중 수좌에서 물러난 후에는 홋타 마사아쓰가 마쓰다이라 노부아키 등과 함께 이를 이어받았다. 1795년(간세이 7년)에 마 간시게토미・다카하시 요시토키 두 사람을 천문방에 채용하여 개력 사업을 맡겼다. 1797년(간세이 9년) 10월에 이들의 노력으로 개력이 이루어져 다음 해 간세이력이 시행되었으나, 후에 오차가 발견되어 개력 사업이 다시 시작되었다.[18]

이노 다다타카는 다카하시 요시토키의 제자가 되었는데, 여기에는 홋타 마사아쓰와 관계가 깊은 구와바라 다카토모의 개입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구와바라는 센다이 번 의사로 센다이 번 출신인 홋타 마사아쓰와 인연이 있었고, 이노 다다타카의 세 번째 부인 노부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이노 다다타카에게 홋타 마사아쓰와 다카하시 요시토키가 추진하는 개력 사업을 이야기하고, 홋타 마사아쓰에게 부탁한 다음 다카하시 요시토키에게 이노 다다타카를 추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9]

이노 다다타카는 1800년(간세이 12년)부터 측량대를 이끌고 일본 측량과 지도 제작을 시작했다. 홋타 마사아쓰는 이노 다다타카의 지도 제작 사업을 지원하고, 1804년(분카 원년)에는 동일본 부분 지도를 직접 보기도 했다. 또한 이노 다다타카를 막부 관리로 등용하기도 했다.[20]

다카하시 가게야스와는 『관문금보』 편찬 시 정보 제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외교 정보 수집에도 협력하게 했다. 홋타 마사아쓰의 명령으로 다카하시 가게야스는 네덜란드 상관 의사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와 정보 교환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볼트 사건으로 다카하시 가게야스가 옥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문금보』에 그의 이름이 남아 있는 것, 1826년(분세이 9년)에 홋타 마사아쓰가 구리모토 탄슈를 통해 지볼트에게 펭귄에 대해 질문한 것 등에서 홋타 마사아쓰와 다카하시 가게야스, 지볼트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22]

3. 4. 3. 난학(蘭学)에 대한 관심

홋타 마사아쓰는 난학, 즉 서양 학문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주도한 간세이 개혁에 참여하면서, 학문을 좋아하는 다이묘, 학자들과 교류하며 고전을 수집하고 당대 학문을 반영한 사본을 편찬했다. 특히 이노 다다타카의 측량 사업을 지원하고, 다카하시 요시토키 부자와도 친교를 맺었다.

마사아쓰는 조류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조류 분류 도감인 『금보』와 『관문금보』를 편찬했다. 이 책들은 단순한 생물학적 기록을 넘어, 관련 와카와 한시 등의 고증을 담은 종합 학술 사전의 성격을 지닌다. 특히 『관문금보』는 1794년에 서문이 작성되었지만, 1831년까지 교정 작업이 계속될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저작이다.

『관문금보』는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조류를 수금, 원금, 임금, 산금 등으로 분류하고, 각 종에 대한 외형, 서식지, 문헌 기록, 식용 및 약효 등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다. 특히 당시 막부의 지배가 미치지 않던 에조치의 조류 정보까지 포함하고 있어, 당시 조류 생태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마사아쓰는 이노 다다타카가 일본 전역을 측량하여 대일본 연해여지전도를 제작하는 일을 후원했다. 그는 도쿠가와 요시무네와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역법 개정 사업을 이어받아 간세이력을 시행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노 다다타카가 천문학을 공부하고 일본 측량을 시작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마사아쓰는 다카하시 가게야스에게 네덜란드 상관 의사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와의 정보 교환을 지시하는 등, 난학을 통해 얻은 지식을 국방과 외교에도 활용하고자 했다.

다음은 홋타 마사아쓰가 난학에 관심을 가지고 편찬 및 관여한 서적과 연도이다.

연도서적
1794년『관문금보』 (오토 니슈 서)
1799년『간세이 중수 제집보』 편찬 착수
1804년『관심원 육십 하 와카』 (공저) 완성
1805년『하기카 하나스리』 완성
1808년『마츠마에 기행 (에조 기행)』 완성
1812년『간세이 중수 제집보』, 『간세이 중수 제집보 목록』 완성
1831년『관문금보』 완성[17]


4. 계보


  • 아버지: 다테 무네무라 (1718년 - 1756년)
  • 어머니: 쇼젠인 (1719년 - 1763년) - 사카 노부유키의 딸, 노부코, 오요세노카타
  • 양아버지: 홋타 마사토미 (1750년 - 1791년)
  • 정실: 홋타 마사토미의 딸
  • 측실: 기무라 씨
  • * 차남: 다무라 무네아키 (1784년 - 1827년) - 다무라 무라모치의 양자
  • 생모 불명의 자녀
  • * 오남: 홋타 마사히라 (1795년 - 1854년)
  • * 육남: 모리 모토요 (1796년 - 1845년) - 모리 마사아키의 양자
  • * 차녀: 오제키 마스나리 정실
  • * 여자: 에이 - 도이 도시모치 정실
  • * 여자: 마키노 모리나리 정실
  • * 여자: 구가이 마사미쓰 정실
  • * 여자: 이타쿠라 가쓰노리 정실

참조

[1] 서적 鈴木
[2] 서적 渡辺
[3] 서적 国史大辞典
[4] 서적 渡辺
[5] 서적 仙台市
[6] 서적 高澤
[7] 서적 仙台市
[8] 서적 仙台市
[9] 서적 鈴木
[10] 서적 高澤
[11] 서적 鈴木
[12] 서적 鈴木
[13] 서적 渡辺
[14] 간행물 堀田正敦編「禽譜」について(1) 東京国立博物館
[15] 간행물 堀田正敦編「禽譜」について(1) 東京国立博物館
[16] 서적 鈴木
[17] 서적 鈴木
[18] 서적 渡辺
[19] 서적 渡辺
[20] 서적 渡辺
[21] 서적 渡辺
[22] 서적 鈴木
[23] 웹사이트 江戸時代の図譜文化―堀田正敦編『禽譜』とその魅力 https://www.tnm.jp/m[...] 2024-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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