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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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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화흡은 후한 말, 삼국 시대 위나라의 인물로, 자는 차오(次昭)이다. 허소, 번자소와 함께 명성을 떨쳤으며, 효렴으로 천거되었으나 벼슬을 거절했다. 원소의 초빙을 피해 유표를 섬겼고, 조조가 형주를 점령한 후 등용되어 시중을 지냈다. 조조가 최염을 죽인 일에 모개를 변호하다가 파면되었고, 한중을 버리고 백성을 이주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조비가 위나라 황제가 된 후 광록훈이 되었으며, 조예 시대에는 태상을 지냈다. 검소한 생활로 명성을 얻었고, 사후 간후(簡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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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흡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화흡 (和洽)
양사 (陽士)
출생지허난성 시핑현 (西平縣)
사망228년 ~ 233년 사이
직업정치인
작위서릉향후 (西陵鄉侯)
시호간후 (簡侯)
가족자녀: 화리, 화유
관직 경력
낭중령 (郎中令)219년 ~ 220년 (헌제) 시기
광록훈 (光祿勳)220년 ~ 226년 (조비) 시기
태상 (太常)조예 시기

2. 행적

화흡은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로, 젊어서부터 명성이 높았고, 여러 관직을 거치며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을 보여주었다. 허자장, 번자소(樊子昭)와 함께 명성이 있었으며,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대장군에게 벽소를 받았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고향 군 사람 원소가 여남군의 사대부를 불러모으자 이를 피하고, 형주자사 유표에게 의탁했다가 무릉으로 피했다.

건안 13년(208년), 조조가 형주를 쳐 유종의 항복을 받고 화흡을 승상연속으로 삼았다. 모개최염이 절검을 제일로 삼는 인사를 비판했고, 건안 18년(213년) 11월 왕찬, 위기, 두습과 함께 시중이 되었다. 모개가 최염 주살에 불만을 품자 환계와 함께 모개를 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건안 20년(215년), 조조장로를 무찌르고 한중을 얻자, 주민들을 이주시켜 수비 비용을 절약하자고 주장했다. 낭중령을 거쳐 조비가 위나라 황제가 되자 광록훈이 되었고 안성정후에 봉해졌다. 명제 즉위 후 서릉향후로 봉작이 올랐으며 태상으로 전임했으나, 청빈하여 명제가 곡식과 비단을 하사했다. 사후 시호는 '''간후'''(簡侯)이며, 아들 화리가 뒤를 이었다.

하협()은 허난성 시핑현()인 여남군(여남군) 예주 출신이다.

2. 1. 후한 말의 혼란과 유표 의탁

젊어서 허자장, 번자소(樊子昭)와 함께 명성이 있었다.[12] 후한 말,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대장군에게 벽소를 받았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고향 군 사람 원소가 여남군의 사대부를 불러모으자 이를 피하고, 형주자사 유표가 야심은 없고 선비를 아낀다고 여겨 집안 식구들과 함께 유표에게 의탁했다. 유표에게서는 상객으로 예우받았으나, 화흡은 유표가 참언을 들으면 자신을 지켜줄 수 없으리라고 여기고 무릉으로 피했다.[13]

2. 2. 조조 휘하에서의 활약

허자장, 번자소(樊子昭)와 함께 명성이 있었다.[12] 후한 말,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대장군에게 벽소를 받았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고향 군 사람 원소가 여남군의 사대부를 불러모으자 이를 피하고, 형주자사 유표가 야심은 없고 선비를 아낀다고 여겨 집안 식구들과 함께 유표에게 의탁했다. 유표에게서는 상객으로 예우받았으나, 화흡은 유표는 참언을 들으면 자신을 지켜줄 수 없으리라고 여기고 무릉으로 피했다.[13]

건안 13년(208년), 조조가 형주를 쳐 형주자사 유종의 항복을 받아내고, 화흡을 불러 승상연속으로 삼았다. 당시 모개최염이 인사를 주관하면서 절검을 제일로 삼는 것을 비판하여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폐단을 지적했다.[13] 190년대 후반, 조조는 형주의 일부 지역을 장악했고, 화흡은 그의 행정부에 고용되었다.[3] 그의 경력 초기에 그는 금욕적이고 의도적으로 빈곤한 생활 방식을 따르는 것에 근거하여 관료를 승진시키는 것에 반대했고, 이러한 사람들을 봉급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관료보다 더 순수하게 보는 것에 반대했다.[4]

건안 18년(213년) 11월, 상서와 시중, 6경이 설치되면서[14] 왕찬, 위기, 두습과 함께 시중이 되었다.[15][13] 헌제가 조조를 위공(魏公중국어)으로 봉한 후, 화흡은 조조의 조정에서 시중(侍中중국어)[5]으로 재직했다. 그는 조조를 비방했다는 소문으로 모개를 변호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화흡과 조조 사이의 이 문제에 대한 서신이 남아 삼국지에 보존되어 있다.[6] 그 소문으로 인해 모개는 216년에 자결해야 했다.

나중에 모개가 조조가 최염을 주살한 일에 불만을 품자[16] 조조는 이에 대한 고발을 받고 대노하여 신하들로 하여금 모개에 대해 논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화흡은 환계와 함께 모개를 구할 것을 청했고,[16] 또 고발한 자를 밝히고 분명히 일을 처결할 것을 구했으나,[13] 조조는 결국 모개를 파면시켰다.[16]

건안 20년(215년), 조조가 장로를 무찌르고 한중을 손에 넣자, 한중 땅을 버리고 주민들을 이주시켜 수비 비용을 절약하자고 주장했다.[13] 조조는 이때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건안 24년(219년) 한중 백성들을 북방으로 이주시켰다. 낭중령이 되었다.[13]

2. 3. 위나라 건국 이후

조비가 위나라 황제가 되자, 화흡은 광록훈이 되었고 안성정후에 봉해졌다. 명제 즉위 후 서릉향후로 봉작이 올랐으며 2백 호를 받았다.[13] 태상으로 전임했으나, 청빈을 지켜 밭과 집을 팔아 생활을 유지했고, 명제가 이를 듣고 곡식과 비단을 하사했다.[13] 사망 후 시호는 '''간후'''(簡侯)이며, 아들 화리가 뒤를 이었다.[13]

그는 조조와 조비 휘하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조위 조정의 요직인 광록훈(光祿勳)에 올랐다. 조예 치세에는 서릉향후(西陵鄉侯)로 봉해져 200호의 세수를 받는 권한을 얻었다.

만년에는 검소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조예 치세에 태상(太常)에 오른 후, 봉급을 너무 많이 써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부동산을 처분해야 했다. 조예는 그가 파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곡물과 비단을 하사했다. 그의 검소한 삶은 시호인 간후(簡侯; "검소한 후작")에 반영되어 있다.

황초 원년(220년), 문제가 즉위하자 광록훈·안성정후로 발탁되었다. 황초 7년(227년)에 명제가 즉위한 후, 작위는 서릉향후로 승진했다. 태상으로 전임했지만, 청빈한 생활을 굳게 지켰고, 명제로부터 곡물과 견백을 하사받을 정도였다.

3. 사망과 평가

건안 18년(213년) 11월, 왕찬, 두습, 위개와 함께 위나라의 시중이 되었다. 조조는 두습과 화흡을 강하게 신임하였고, 왕찬은 경쟁심이 강하여 그들을 질투하였다. 모개가 참언을 받자, 화흡은 조조에게 사실 관계를 조사하도록 강력하게 의뢰했다. 조조가 참언자를 비호했기 때문에 사실을 밝힐 수 없었고, 모개는 실각했지만 면직되는 것으로 끝났다.

건안 20년, 조조가 한중장로를 격파하자, 화흡은 그 지역 주민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제안했다. 조조는 즉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결국 한중을 포기하고 주민을 이주시켰다. 이후 화흡은 낭중령으로 전임했다.

황초 원년, 문제가 즉위하자 광록훈·안성정후로 발탁되었다. 황초 7년명제가 즉위한 후, 작위는 서릉향후로 승진했다. 더 나아가 태상으로 전임했지만, 청빈한 생활을 굳게 지켰고, 명제로부터 곡물과 견백을 하사받을 정도였다. 사망 후, 간후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4. 가계


  • 허리(和離): 허차오의 장남이자 계승자
  • 허유(和逌): 허차오의 차남, 위나라에서 정위(廷尉)와 이부상서(吏部尚書)를 역임
  • * 허차오(和嶠, 292년 사망): 허유의 아들, 동진사마유를 위해 태자소보(太子少保)를 역임, 하후현의 사위[1]
  • * 허위(和郁): 허유의 아들, 동진에서 상서령(尚書令)을 역임[7]
  • ** 허제(和濟): 허위의 아들, 동진에서 중서랑(中書郎)을 역임[8]

참조

[1]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2] 서적 Sanguozhi
[3]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4]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5]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6]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7] 서적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8] 서적 Book of Jin
[9] 서적 正史 三国志 ちくま学芸文庫
[10] 서적 魏氏春秋
[11] 서적 삼국지
[12] 서적 후한서
[13] 서적 삼국지
[14] 서적 삼국지
[15] 서적 위씨춘추
[16]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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