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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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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후현은 조위의 문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명성을 떨쳐 산기시랑과 황문시랑을 역임했다. 조예에게 미움을 받아 좌천되기도 했으나, 조상의 정권 장악 후 산기상시와 중호군으로 승진했다. 사마의에게 구품관인법을 비판하고 지방 제도의 개정을 주장했지만, 사마의의 소극적인 태도에 반발했다. 이후 정서장군으로 촉한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사마의의 쿠데타 이후 대홍려가 되었다. 사마사의 암살을 시도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했으며, 삼족이 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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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후현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하후현
본명하후현 (夏侯玄)
태초 (太初)
출생209년
사망254년 3월 27일 (향년 45세)
사망 장소뤄양, 허난 성
국적조위
가족 관계
아버지하후상
어머니조씨 부인
친척하후휘 (누이)
조상 (사촌)
관직
태상재임 기간 미상 ~ 254년
대홍려249년 ~ 재임 기간 미상
정서장군재임 기간 미상 ~ 249년
작위
작위명창릉향후 (昌陵鄉侯)
기타 정보
직업수필가, 역사가, 군사 장군, 철학자, 정치가

2. 생애

하후현은 젊은 시절부터 명성을 떨쳐 20세에 산기시랑·황문시랑에 임명되었다.[5] 조예(명제)에게 면담을 할 때 모황후의 동생인 모증과 동석하게 된 것에 혐오감을 드러냈기 때문에 조예의 미움을 사 우림(羽林)감으로 좌천되었다.[5] 또한 하후현·등양·제갈탄 등 당시 명사들은 서로 칭호를 붙여 하후현은 '사총'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조예는 이를 경박한 평판을 부추기는 풍조로 싫어했다고 전해진다.[6]

정시 연간 초, 조방(제왕)의 치세 하에서, 종실인 사촌 조상이 정권을 장악하자, 친척인 하후현도 출세하여 산기상시·중호군으로 승진했다. 인물 보는 안목이 있다는 평가대로 등용한 무관은 준걸들뿐이었다. 한편, 호군의 관직에서 상시화된 뇌물 풍습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후에 사마사가 하후현과 교체되면서 법령을 정비하여 이 풍습은 일소되었다.

사마의로부터 정치에 대해 의견을 구하자 구품관인법을 비판하고 중정관의 권한 축소를 주장했으며, 나아가 지방 제도의 근본적인 개정 의견도 밝혔다. 사마의는 하후현에게 답서를 보내 훌륭한 인물이 나오지 않으면 그 정책은 실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후현은 다시 답서를 보내 사마의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난했다.

그 후 가절·정서장군·도독 옹량 이주 제군사에 승진했다. 친구였던 이승을 장사로 발탁하여 중용했고, 정시 5년(244년)에는 이승의 진언을 받아 조상과 함께 촉한으로 침공했지만 수송에 어려움을 겪어 큰 피해를 입었다. 평소 이 군사 행동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던 사마의에게 다시 철수를 진언받아 하후현이 이에 동조하는 의견을 조상에게 전했고, 군은 귀환하게 되었다.(흥세의 역)[7]

정시 10년(249년), 사마의의 쿠데타(고평릉의 변)로 조상이 처형되자, 하후현은 중앙으로 소환되어 대홍려가 되었다. 같은 해, 종부 하후패가 촉한으로 망명했지만 하후현은 그에게 동행을 요청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수년 후 태상으로 전임되었지만, 조상과의 관계를 이유로 억압받아 불우한 나날을 보냈다. 중서령 이풍은 사마의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사마사의 신임을 받았지만, 몰래 하후현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사마사를 주살하고 하후현을 대장군으로 정권을 잡게 하려고 생각하여 장집 등과 계획을 꾸몄다.

그러나 가평 6년(254년) 2월 22일[8], 계획이 발각되어 우선 이풍이 주살되었고, 하후현과 장집 등은 정위 종유에게 보내졌다. 조사를 받아도 진술을 거부했고, 종유가 사실과 일치하도록 작성한 진술서를 보이자 그저 끄덕일 뿐이었다. 또한, 이 기회에 종유의 동생 종회가 뻔뻔한 태도로 접근해 오자 하후현은 의연한 태도로 이를 거절했다.

종유의 입건에 따라 하후현 등은 대역죄로 기소되어 형법에 따라 요참에 처해졌다. 향년 46세. 참형의 자리에 임해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한 태도로 형에 복했다. 하후현의 삼족은 몰살되었지만, 정원 연간에 들어 하후상의 종손 하후본이 창릉정후에 봉해져 300읍을 영유하여 하후상의 뒤를 이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하후현은 젊은 시절부터 명성을 떨쳐 20세에 산기시랑 및 황문시랑에 임명되었다.[5] 조예(명제)에게 면담을 할 때 모황후의 동생인 모증과 동석하게 된 것에 혐오감을 드러내 조예의 미움을 사 우림(羽林)감으로 좌천되었다.[5] 또한 하후현, 등양, 제갈탄 등 당시 명사들은 서로 칭호를 붙여 하후현은 '사총'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조예는 이를 경박한 평판을 부추기는 풍조로 싫어했다고 전해진다.[6]

정시 연간 초, 조방(제왕)의 치세 하에서, 종실인 사촌 조상이 정권을 장악하자, 친척인 하후현도 출세하여 산기상시 및 중호군으로 승진했다. 인물 보는 안목이 있다는 평가대로 등용한 무관은 준걸들뿐이었다.[5] 한편, 호군의 관직에서 상시화된 뇌물 풍습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후에 사마사가 하후현과 교체되면서 법령을 정비하여 이 풍습은 일소되었다.

사마의로부터 정치에 대해 의견을 구하자 구품관인법을 비판하고 중정관의 권한 축소를 주장했으며, 나아가 지방 제도의 근본적인 개정 의견도 밝혔다. 사마의는 하후현에게 답서를 보내 훌륭한 인물이 나오지 않으면 그 정책은 실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후현은 다시 답서를 보내 사마의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난했다.

그 후 가절, 정서장군, 도독 옹량 이주 제군사에 승진했다. 친구였던 이승을 장사로 발탁하여 중용했고, 244년에는 이승의 진언을 받아 조상과 함께 촉한으로 침공했지만 수송에 어려움을 겪어 큰 피해를 입었다. (흥세의 역)[7] 평소 이 군사 행동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던 사마의에게 다시 철수를 진언받아 하후현이 이에 동조하는 의견을 조상에게 전했고, 군은 귀환하게 되었다.[7]

2. 2. 정치 활동과 구품관인법 비판

하후현은 약관의 나이로 산기황문시랑이 되었으나, 명제를 알현할 때 황제의 아우 모증과 같이 앉은 것을 치욕스럽게 여겨 우림감으로 좌천되었다.[5] 제갈탄 등 당시의 명사들과 서로 별호를 붙여, 하후현은 '사총'이라 일컬어졌는데, 명제는 이러한 행위를 경박한 평가를 내리는 풍조로 여기고 혐오하여 하후현, 제갈탄 등의 무리를 모조리 면직시켰다.[6]

239년 1월, 조예가 죽은 후, 그의 양아들 조방이 위나라의 세 번째 황제로 즉위했다. 조상은 조예가 임종 직전에 섭정으로 임명한 인물로, 공동 섭정인 사마의 외에 위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 조상은 하후현을 산기상시(散騎常侍)와 중호군(中護軍)으로 승진시켰다. 하후현은 학자로서 명성이 높았고, 조상의 파벌의 또 다른 멤버인 하안과 비교되었다. 하후현과 하안은 모두 사마의의 아들 사마사와 친구였다. 사마사와 하후현은 모두 하안으로부터 높은 칭찬을 받았다. 하후현이 강제를 대신하여 중호군이 된 후, 뇌물 수수는 위나라 정부에서 흔한 관행이 되었다. 하후현은 부패를 막을 수는 없었지만, 유능한 인재를 선택하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유능한 사람들을 발탁했다.

정시 연간 초, 조방(제왕)의 치세 하에서, 종실인 사촌 조상이 정권을 장악하자, 친척인 하후현도 출세하여 산기상시·중호군으로 승진했다. 인물 보는 안목이 있다는 평가대로 등용한 무관은 준걸들뿐이었다. 한편, 호군의 관직에서 상시화된 뇌물 풍습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후에 사마사가 하후현과 교체되면서 법령을 정비하여 이 풍습은 일소되었다.

사마의와 당시 시사에 대해서 의견을 주고받으며, 구품관인법을 비판하여 중정감의 권한 축소를 주장했다.[15] 그는 사마의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구품관인법은 좋지 않습니다. 지배자들의 권력을 제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방 지역의 규칙과 법률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사마의는 만약 누군가 이 변화를 추진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실현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이 요청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답했다. 이에 하후현은 사마의의 의견이 너무 소극적이라고 말했다. 사마의는 하후현에게 답서를 보내 훌륭한 인물이 나오지 않으면 그 정책은 실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후현은 다시 답서를 보내 사마의의 소극적인 태도를 비난했다.

몇 년 후, 하후현은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승진하여 옹주양주의 군사 업무를 감독하게 되었다. 그는 그의 친구 이성을 장사(長史)로 선택했다. 244년 조상과 함께 낙곡으로 들어가 촉한을 공격했으나 한중을 지키던 왕평과 구원을 온 비의에게 대패한다.(흥세 싸움).[7] 평소 이 군사 행동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던 사마의에게 다시 철수를 진언받아 하후현이 이에 동조하는 의견을 조상에게 전했고, 군은 귀환하게 되었다.

249년 사마의의 반란으로 조상이 처형되고 조정으로 불려와 대홍려가 되었고 나중에 태상이 되었다. 같은 해, 종부 하후패가 촉한으로 망명했지만 하후현은 그에게 동행을 요청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수년 후 태상으로 전임되었지만, 조상과의 관계를 이유로 억압받아 불우한 나날을 보냈다.

가평 6년(254년), 사마의의 아들 대장군 사마사를 토벌하려고 황제 조방, 조방의 장인 장집, 황문감 소삭, 영녕서령 악돈, 중황문 항종복야 유현, 이풍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사마사 대신 하후현을 대장군으로, 장집을 표기장군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계획은 누설되어 이풍은 사마사를 만나다가 살해되었고, 나머지 일당들은 체포되어 정위로 보내졌다.[8] 중서령 이풍은 사마의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사마사의 신임을 받았지만, 몰래 하후현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사마사를 주살하고 하후현을 대장군으로 정권을 잡게 하려고 생각하여 장집 등과 계획을 꾸몄다. 정위 종육의 의견이 중론이 되어, 이풍, 하후현, 장집, 악돈, 유현 등의 삼족이 멸해졌다. 하후현은 동쪽 저자에서 참형을 당하면서도 안색을 바꾸지 않고 행동거지를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했다.[15] 조사를 받아도 진술을 거부했고, 종유가 사실과 일치하도록 작성한 진술서를 보이자 그저 끄덕일 뿐이었다. 또한, 이 기회에 종유의 동생 종회가 뻔뻔한 태도로 접근해 오자 하후현은 의연한 태도로 이를 거절했다. 종유의 입건에 따라 하후현 등은 대역죄로 기소되어 형법에 따라 요참에 처해졌다. 향년 46세. 참형의 자리에 임해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한 태도로 형에 복했다.

2. 3. 조상 실각과 죽음

하후현은 약관의 나이로 산기황문시랑이 되었으나, 명제를 알현할 때 황제의 아우 모증과 같이 앉은 것을 치욕스럽게 여겨 우림감으로 좌천되었다.[5] 제갈탄 등 당시의 명사들과 서로 별호를 붙여, 하후현은 '사총'이라 일컬었는데, 명제는 이러한 행위를 경박한 평가를 내리는 풍조로 여기고 혐오하였으므로 하후현, 제갈탄 등의 무리를 모조리 면직시켰다.[6]

명제가 죽고 나서 제갈탄 등과 함께 복직했으며, 조상이 보정할 때 자주 승진하여 산기상시, 중호군이 되었다. 사마의와 당시 시사에 대해서 의견을 주고받으며, 구품관인법을 비판하여 중정감의 권한 축소를 주장했다. 정서장군 · 가절옹양도독제군사가 되어, 연희 7년(244년) 조상과 함께 낙곡으로 들어가 촉한을 공격했으나 한중을 지키던 왕평과 구원을 온 비의에게 대패한다.(흥세 싸움).[7] 249년 사마의의 반란(고평릉의 변)으로 조상이 처형되고 조정으로 불려와 대홍려가 되었고 나중에 태상이 되었다.

가평 6년(254년), 사마의의 아들 대장군 사마사를 토벌하려고 황제 조방, 조방의 장인 장집, 황문감 소삭, 영녕서령 악돈, 중황문 항종복야 유현, 이풍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사마사 대신 하후현을 대장군으로, 장집을 표기장군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계획은 누설되어 이풍은 사마사를 만나다가 살해되었고, 나머지 일당들은 체포되어 정위로 보내졌다.[8] 정위 종육의 의견이 중론이 되어, 이풍, 하후현, 장집, 악돈, 유현 등의 삼족이 멸해졌다. 하후현은 동쪽 저자에서 참형을 당하면서도 안색을 바꾸지 않고 행동거지를 아무 일도 없는 듯이 했다.[15]

3. 가족 관계

하후덕 (《삼국지연의》에서 형으로 설정)

하후상 (아버지)

하후후 (아들)

하후휘(경회황후 하후씨) (동생)

하후유 (사촌)

하후봉 (사촌)

하후현은 하후상의 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조진의 누이동생인 덕양향주(德陽鄉主)였고, 이 때문에 하후현은 조상의 세력과 가까웠다. 하후현에게는 누이동생 하후휘(사마사의 아내)가 있었는데, 그녀는 사마사의 아내였다. 하후현의 딸 중 한 명은 하교(화교/和嶠중국어)와 결혼했는데, 하교는 하후의 손자이자 하경(화경/和迥중국어)의 아들이었다.

4. 평가

함께 명성을 떨친 하안으로부터는 "없이 깊다. 그렇기에 천하 사람들의 의지에 통달한다"고 평가받았다.[9] 딸의 남편인 화교로부터는 그 인품을 흠모받았다.[4] 또한, 종회는 촉한의 강유가 항복했을 때 그를 평하여 "제갈탄이나 하후현도 그 이상은 아닐 것이다"라고 말했다.[10] 이는 강유의 높은 평가와 동시에 하후현이 명사의 대표 격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인물 보는 눈이 있던 부가에게는 교제를 거절당했다. 두 사람의 공통된 친구인 순찬은 하후현을 "한 시대를 풍미하는 영걸"이라고 평가하며 부가에게 교제를 권했지만, 부가는 "그 그릇보다 큰 야심을 가진, 도덕에 어긋난 인물"이라고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11]

『삼국지』의 편찬자 진수는, "제하후조전"의 평에서, 하후현의 뛰어난 재능과 공적은 인정하면서도 조상의 과오를 바로잡을 수 없었던 점을 비판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것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라고 평했다. 동서의 주석자 배송지는, 입전된 아버지 하후상과 비교하여 "아버지를 능가하는 재능의 소유자"라고 기록했다.[12]

동진의 원굉의 "삼국명신서찬"(『문선』수록)에서는 위의 9명, 촉의 4명, 오의 7명이 명신으로 칭찬받고 있으며, 그 안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13][14]

5. 기타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三国志 魏書 曹真伝注『魏氏春秋』、傅嘏伝注『傅子』
[3] 서적 真誥
[4] 서적 三国志 魏書 和洽伝注『晋諸公賛』
[5] 서적 雜語
[6] 서적 三国志 魏書 諸葛誕伝注『世語』
[7] 서적 魏略, 漢晋春秋 曹真伝注
[8] 서적 三国志 魏書 斉王紀
[9] 서적 三国志 曹真伝注『魏氏春秋』
[10] 서적 三国志 蜀書 姜維伝
[11] 서적 三国志 魏書 傅嘏伝注『傅子』
[12] 서적 三国志 蜀書 董允伝注
[13] 문서 名臣20選
[14] 문서 夏侯玄
[15] 서적 삼국지 https://ko.wikisourc[...] 위서 권9 중 夏侯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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