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시미노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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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시미노미야는 남북조 시대에 시작되어 1947년 신적강하로 종결된 일본의 황족 가문이다. 고곤 상황의 황위 계승 노력에서 시작되었으며, 고하나조노 천황을 배출하며 천황가와 깊은 관련을 맺었다. 에도 시대에는 천황의 양자(유자)로서 친왕 신분을 받았고, 막말에는 황위 계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여러 궁가를 파생시키며 영세 황족으로 존속했으나, 26대 당주 히로아키 왕의 신적강하로 가문은 해체되었다. 후시미노미야 가문은 여러 저택과 소유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현재는 호텔, 대학 부지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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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은 무로마치 시대의 황족이자 후시미노미야 제3대 당주로, 고코마쓰 천황의 유자였으나 출가하여 도흠이라 불렸으며 고하나조노 천황의 친아버지로서 그의 혈통은 현재 일본 황실과 구 황족 궁가에 이어져 황위 계승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 후시미노미야 - 후시미노미야 요시히토 친왕
후시미노미야 요시히토 친왕은 일본 난보쿠초 시대의 황족이자 북조 제3대 스코 천황의 맏아들로, 후시미노미야의 시조이며, 예술에 능통했고 그의 영지는 후손들에게 계승되었으며, 그의 아들은 현재 황실과 구 황족 간의 최근 공통 조상이다.
후시미노미야 | |
---|---|
가문 정보 | |
가문명 | 후시미노미야 가 |
가문 문양 | 쥬로쿠요 우라기쿠 반전 |
가문 문양 명칭 | 후시미노미야 쥬욘우라기쿠 |
본성 | (정보 없음) |
가조 | 요시히토 친왕(북조 제3대 스코 천황의 제1황자) |
종별 | 황족(세습친왕가・직궁가) |
출신지 | 교토(야마시로국) |
근거지 | 야마시로국 후시미도노어령 도쿄부 도쿄시 코지마치구 키오이쵸(현 도쿄도 지요다구 키오이쵸) |
주요 인물 | 사다후사 친왕 사다요시 친왕 쿠니이에 친왕 사다나루 친왕 히로야스 왕 |
지류 | 나시모토노미야 야마시나노미야 쿠니노미야 카쵸노미야 코마츠노미야 키타시라카와노미야 히가시후시미노미야 카야노미야 아사카노미야 타케다노미야 히가시쿠니노미야 칸인노미야 기요스 가 화정 가 후시미 가 |
역대 당주 | |
초대 당주 | 요시히토 |
2대 당주 | 하루히토 |
3대 당주 | 사다후사 |
4대 당주 | 사다츠네 |
5대 당주 | 쿠니타카 |
6대 당주 | 사다아츠 |
7대 당주 | 쿠니스케 |
8대 당주 | 사다야스 |
9대 당주 | 쿠니후사 |
10대 당주 | 사다키요 |
11대 당주 | 쿠니나리 |
12대 당주 | 쿠니미치 |
13대 당주 | 사다유키 |
14대 당주 | 쿠니나가 |
15대 당주 | 사다타케 |
16대 당주 | 쿠니타다 |
17대 당주 | 사다모치 |
18대 당주 | 쿠니요리 |
19대 당주 | 사다요시 |
20대 당주 | 쿠니이에 |
21대 당주 | 사다노리 |
22대 당주 | 사다나루 |
23대 당주 | 히로야스 |
24대 당주 | 히로아키 |
2. 역사
호쿠초(北朝)의 스코 천황(崇光天皇)의 첫째 황자 요시히토 친왕(栄仁親王)은 지묘인통(持明院統)의 적류(嫡流)였으나, 쇼군(将軍)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에 의해 황위 계승에서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황실 영지 후시미(伏見)를 받아 '''후시미노도노'''('''伏見殿''')로 불렸다.
요시히토 친왕의 아들 사다요시 친왕(貞成親王)은 '''후시미노미야'''('''伏見宮''')를 칭했다. 그의 첫째 아들은 고하나조노 천황(後花園天皇)으로 즉위했고, 둘째 아들 사다쓰네 친왕(貞常親王)은 후시미노미야를 이었다. 사다쓰네 친왕은 형에게서 '후시미노도노' 칭호를 영구히 사용하도록 허락받아, 이후 '후시미노미야' 궁호를 대대로 전했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전후 19대 사다유키 친왕(貞敬親王)과 20대, 23대 구니이에 친왕(邦家親王)은 많은 자녀를 두었다. 24대 사다나루 친왕(貞愛親王)은 원수(元帥)·육군대장(陸軍大将)을 지냈고, 메이지 천황(明治天皇)과 다이쇼 천황(大正天皇)의 신임을 받았다.
25대 히로야스 왕(博恭王)은 원수·해군대장(海軍大將)·군령부총장(軍令部総長)으로 일본 제국 해군의 실력자였다. 1946년 히로야스 왕 사후, 히로요시 왕(博義王)의 아들 히로아키 왕(博明王)이 26대 당주가 되었다.
1947년 GHQ 지령으로 황적에서 이탈, 후시미(伏見)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51]
2. 1. 중세 (설립 배경)
남북조 시대 초기, 지묘인통(북조)의 고곤 상황은 하나조노 법황의 황자로 여겨지는 나오히토 친왕에게 황위 계승을 바라며, 지묘인통의 미래 정통(적통)으로 정한 뒤, 제1황자인 북조 3대 스고 천황의 황태제로 삼았다. 그러나 정평일통 후에 나오히토 친왕은 폐태자가 되었고, 3명의 상황 (고곤・고묘・스고)과 함께 남조 측에 의해 납치되면서, 나오히토 친왕의 황위 계승은 어려워졌다. 이 때문에 고곤 상황은 제1황자인 스코 천황을 다시 지묘인통(북조)의 정통으로 정했다. 이때 고곤 상황은 스코 상황에게 지묘인통의 정통이 습득하는 비파 비곡을 전수하고, 지묘인통 전래의 방대한 기록류를 계승시켰다. 또한 장강당령이나 법금강원령 등 지묘인통의 소령을 상속시켰지만, 후시미어령은 그 소령과는 별개로 스코 상황의 자손이 관리하도록 명했다.[32][33]고곤 상황과 스코 상황이 남조 측에 납치되었을 때 황위를 계승했고, 그 후에도 장기간 재위했던 고고곤 천황은 황자인 오히토 친왕에게 양위하길 원했다. 고곤 상황 붕어 후, 스코 상황은 자신의 황자인 에이히토 친왕이 황위를 계승하길 원했지만, 최종적으로 고고곤 천황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황위는 오히토 친왕(고엔유 천황)이 계승했다. 그리고 스코 상황은 후시미어령에 있는 이궁인 후시미전에서 비색했고, '''후시미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34]
고엔유 천황은 황자인 간히토 친왕(고코마츠 천황)에게 양위했고, 실의에 빠진 채 스코 상황은 붕어했다. 에이히토 친왕은 지묘인통의 적통으로서 지묘인통 전래의 소령을 스코 상황으로부터 상속받았지만, 장강당령, 법금강원령, 아쓰타사령, 하리마국아[35]를 고코마츠 천황에게 몰수당했다. 황위도 계승하지 못하고 소령도 몰수당해 실의에 빠진 에이히토 친왕은 출가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의해 에이히토 친왕은 후시미어령도 몰수당했지만, 돌아가신 고곤 상황의 명령을 바탕으로 반환되어 후시미노미야가는 존속, 에이히토 친왕은 만년을 후시미에서 보냈다. 후시미어령은 에이히토 친왕의 왕자인 하루히토 왕과 사다나리 친왕에 의해 상속되었다.
쇼초 원년 (1428년), 고코마츠 상황의 황자인 쇼코 천황이 붕어하고, 고고곤 천황의 황통은 단절되었다. 이로 인해 후시미노미야에서 사다나리 친왕의 제1왕자인 히코히토 왕(고하나조노 천황)이 고코마츠 상황의 유자로서 황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에이쿄 5년 (1433년)에는 고코마츠 상황도 붕어했지만, "고코마츠 상황의 붕어 시에는 정통인 스코 천황의 황통으로서 황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사다나리 친왕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고, 고하나조노 천황은 고고곤 천황 황통의 후계자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고코마츠 상황의 "유조"에 "구원 선동은 후시미노미야의 어소여야 한다" "사다나리에 존호(태상천황)가 있다면 고고곤 원의 어류는 곧 단절될 것이다. 존호의 어사례는 있을 수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39], 사다나리 친왕은 장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제안으로 교토의 구 고코마츠 상황 어소 옆 저택으로 이주했고, 분안 4년 (1447년)에 고하나조노 천황으로부터 천황의 "형"으로서 존호 선하가 이루어져 황위에 오르지 않고 태상천황이 될 수 있었다.
이후 사다나리 친왕의 제2왕자이며 고하나조노 천황의 친동생인 사다쓰네 친왕이 4대째 당주가 되었지만, 사다쓰네 친왕은 고하나조노 천황으로부터 영구히 "후시미전"이라 칭하는 것을 칙허받았다.[41] 후시미노미야에는 천황을 지지하는 입장이 될 것이 기대되었다.[42]
2. 2. 근세 (에도 시대)
에도 시대에 후시미노미야 가문은 역대 당주가 당시 천황의 명목상 유자(양자)로서 친왕 신분을 받는 친왕 선하를 통해 황실과의 관계를 유지했다. 에도 중기부터 막말에 걸쳐 사다타카 친왕과 사다노리 친왕은 실제로 황위 계승 후보가 되기도 했다.[43][44][45][46]또한, 레이겐 천황의 황녀 후쿠코 내친왕과 히가시야마 천황의 황녀 아키코 내친왕 두 명이 후시미노미야 가문에 시집을 가면서, 천황가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47]
다른 궁가와 달리 후시미노미야는 쿠니타다 친왕까지 모두 혈연으로 가문을 계승해 왔다. 그러나 1760년에 당주 쿠니타다 친왕이 왕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 세습 친왕가와의 혈연을 가깝게 하고 싶어하는 천황의 의향으로 고사쿠라 마치 천황의 황자인 사다유키 친왕이 후시미노미야를 이었다.
사다유키 친왕이 요절한 후에도 조정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고모모조노 천황의 황자를 후시미노미야의 후계자로 정했다. 그러나 스고 천황 이래 지묘인 통의 적류이며, 혈연으로 궁가를 계승해 왔다는 자부심을 가진 후시미노미야 측은, 막부와의 혈연을 이용하여 혈연 계승으로 되돌리도록 막부에 공작을 했다. 그 결과, 쿠니타다 친왕의 동생인 칸포 법친왕을 환속시켜 쿠니요리 친왕으로 하여 가독을 계승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후시미노미야는 15년 만에 스고 천황 이래의 혈연 계승으로 돌아갔다.[48]
막말의 궁정에서도 후시미노미야는 '후시미 전'으로 불렸으며, 근세 역대 천황의 조상인 고하나조노 천황의 출신 가문으로서 천황과 동일한 존재로 간주되었다.[49] 막말에는 아사히코 친왕이 고메이 천황에게 신뢰받아 측근으로서 천황을 보좌하고, 천황의 의향을 받아 8·18의 정변을 주도하는 등 활약을 했다.
보신 전쟁 때에는 후시미노미야 출신의 린노지노미야코겐 법친왕이 우에노 전쟁 때 에도 막부 측의 상징으로 간에이 사에 웅거했고, 그 후, 동북으로 도망쳐 오우에츠 열번 동맹의 맹주인 '토부 황제'로서 즉위했다는 설도 있다.[50]
2. 3. 근대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 시기, 19대 당주 사다유키 친왕과 20대, 23대 당주 구니이에 친왕은 많은 자녀를 두었다. 사다유키 친왕으로부터 나시모토노미야가, 구니이에 친왕으로부터는 야마시나노미야, 구니노미야, 가쵸노미야, 고마쓰노미야, 기타시라카와노미야, 히가시후시미노미야가 각각 창설되었다. 또한, 막부 말기에 거의 단절되었던 간인노미야를 이어받아 재흥시켰다. 구니노미야로부터는 다시금 가야노미야, 히가시쿠니노미야, 아사카노미야 등의 궁가가 창설되었다. 이처럼 메이지 유신 이후 창설된 궁가는 대부분 후시미노미야 계통이다.구니이에 친왕의 뒤를 이은 24대 사다나루 친왕은 원수, 육군 대장을 지냈다. 메이지 천황 및 다이쇼 천황의 신임도 두터웠으며, 황족의 중진으로서 대일본농회, 재향군인회의 총재를 역임하였다.
사다나루 친왕의 뒤를 이은 것은 25대 히로야스 왕이었다. 히로야스 왕은 당초 가죠노미야 집안을 이었으나, 후시미노미야 집안의 뒤를 잇기로 내정되어 있었던 동생 구니마사 왕(邦芳王)이 병약했기 때문에 다시 후시미노미야를 잇게 되었다. 히로야스 왕은 원수, 해군 대장, 군령부총장으로써 일본 제국 해군의 실력자가 되었다. 패전 1년 뒤인 1946년 8월 16일 히로야스 왕이 죽고 첫째 아들이었던 히로요시 왕(博義王)도 아버지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히로요시 왕의 첫째 아들인 히로아키 왕이 26대 후시미노미야 당주가 되었다.
1947년 10월 14일 GHQ의 지령에 의해 황적을 이탈, 후시미 씨(伏見氏)를 쓰게 되었다.[51]
2. 4. 현대 (황적 이탈 이후)
1947년 10월 14일 GHQ의 지령에 의해 후시미노미야 가문은 황적에서 이탈하여 후시미(伏見)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51] 이는 연합군 점령 하에서 이루어진 신적강하(臣籍降下) 조치였다.황위 계승 문제와 관련하여, 여계 천황 용인과 함께 후시미노미야 계 황족(소위 구 황족)의 황적 복귀가 검토되고 있다. 26대 당주였던 후시미 히로아키(伏見博明)는 "천황 폐하께서 복귀하라고 말씀하시고, 국가에서 복귀해 달라고 하면, 이것은 이제 따라야 한다는 마음이 있습니다"라고 언급하며, 황적 복귀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였다.[51]
3. 역대 당주
대수 |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1 | 요시히토 친왕(栄仁親王) | 1351년 - 1416년 | 북조(北朝) 스코 천황(崇光天皇)의 첫째 황자 |
2 | 하루히토 왕(治仁王) | 1370년 - 1417년 | |
3 | 사다후사 친왕(貞成親王) | 1372년 - 1447년 | 고스코인(後崇光院), 요시히토 친왕의 아들, 훗날 고하나조노 천황(後花園天皇)의 부친 |
4 | 사다쓰네 친왕(貞常親王) | 1426년 - 1474년 | 고하나조노 천황의 형제 |
5 | 구니타카 친왕(邦高親王) | 1456년 - 1532년 | |
6 | 사다아쓰 친왕(貞敦親王) | 1488년 - 1572년 | |
7 | 구니스케 친왕(邦輔親王) | 1513년 - 1563년 | |
8 | 사다야쓰 친왕(貞康親王) | 1547년 - 1568년 | |
9 | 구니노부 친왕(邦房親王) | 1566년 - 1622년 | 구니스케 친왕의 아들 |
10 | 사다키요 친왕(貞清親王) | 1596년 - 1654년 | |
11 | 구니나리 친왕(邦尚親王) | 1615년 - 1654년 | |
12 | 구니미치 친왕(邦道親王) | 1641년 - 1654년 | 사다키요 친왕의 아들 |
13 | 사다유키 친왕(貞致親王) | 1632년 - 1694년 | 사다키요 친왕의 아들 |
14 | 구니나가 친왕(邦永親王) | 1676년 - 1726년 | |
15 | 사다타케 친왕(貞建親王) | 1701년 - 1754년 | |
16 | 구니타다 친왕(邦忠親王) | 1732년 - 1759년 | |
17 | 사다모치 친왕(貞行親王) | 1760년 - 1772년 | 모모조노 천황(桃園天皇)의 아들 |
18 | 구니요리 친왕(邦頼親王) | 1733년 - 1802년 | 사다타케 친왕의 아들 |
19 | 사다요시 친왕(貞敬親王) | 1776년 - 1841년 | |
20 | 구니이에 친왕(邦家親王) | 1802년 - 1872년 | 이 대(代)부터 각종 미야케가 파생 |
21 | 사다노리 친왕(貞教親王) | 1836년 - 1862년 | |
22 | 사다나루 친왕(貞愛親王) | 1858년 - 1923년 | |
23 | 히로야스 왕(博恭王) | 1875년 - 1946년 | |
24 | 히로아키 왕(博明王) | 1932년 - 1947년 | 이후 황적 이탈[1] |
4. 파생 가문
후시미노미야 가문에서 분가하여 창설된 여러 궁가들은 다음과 같다.
가문명 | 설립 배경 및 주요 인물 |
---|---|
나시모토노미야 | 19대 사다유키 친왕의 아들이 창설 |
야마시나노미야 | 20대, 23대 구니이에 친왕의 아들이 창설 |
구니노미야 | 구니이에 친왕의 아들이 창설 |
가쵸노미야 | 구니이에 친왕의 아들이 창설 |
고마쓰노미야 (히가시후시미노미야) | 구니이에 친왕의 아들이 창설 |
기타시라카와노미야 | 구니이에 친왕의 아들이 창설 |
히가시후시미노미야 | 구니이에 친왕의 아들이 창설 |
간인노미야 | 구니이에 친왕이 이어받아 재흥 |
가야노미야 | 구니노미야에서 분가 |
히가시구니노미야 | 구니노미야에서 분가 |
아사카노미야 | 구니노미야에서 분가 |
다케다노미야 | 기타시라카와노미야에서 분가 |
메이지 유신 이후 창설된 궁가는 대부분 후시미노미야 계통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천황의 의향에 따라 이러한 궁가들이 영세 황족으로 성립되었다고 시사했다.
1947년 10월 14일, GHQ의 지령에 의해 후시미노미야를 포함한 여러 궁가들이 황적에서 이탈하여 평민이 되었다.[51]
5. 가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