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 (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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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 (전함)은 19세기 말 일본 제국 해군이 영국에 발주하여 건조한 전함이다. 필립 와츠가 설계했으며, 로열 소버린급 전함을 기반으로 속도와 장갑을 개선했다. 1897년 준공 후 러일 전쟁,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따라 무장 해제 후 운송함으로 개조되었으며, 1945년 요코스카 공습으로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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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 (전함) - [배(Ship)]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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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함명 | 후지 (富士) |
함명 유래 | 후지산 |
별칭 | 신호 부호 |
함력 | |
국가 | 일본 제국 |
함종 | 전함 |
급 | 후지급 전함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
계획 | 메이지 26년도 (1893년) |
발주 | 1894년 |
건조 | 템즈 철공소, 블랙월, 런던 |
기공 | 1894년 8월 1일 |
진수 | 1896년 3월 31일 |
준공 | 1897년 8월 8일 (1897년 8월 17일) |
취역 | 1897년 8월 8일 |
퇴역 | 1923년 |
재분류 | 1922년 9월 1일 훈련용 선박 및 막사로 재분류 |
퇴적 | 1922년 9월 1일 |
운명 | 1948년 해체 |
제원 | |
상비 배수량 | 12,533톤 |
기준 배수량 | 12,230 롱톤 (정상) |
전체 길이 | 125.6 m |
수선간장 | 114.0 미터 (374 피트) |
폭 | 22.3 미터 (73 피트 6 인치) |
흘수 | 8.1 미터 (26 피트 3 인치) |
동력 | 13,500 지시 마력 |
보일러 | 원통형 보일러 10기 |
추진 | 2축, 2 3단 확장 증기 엔진 |
속도 | 18 노트 |
항속 거리 | 10 노트에서 4,000 해리 |
승무원 | 650명 (726명) |
무장 | |
주포 | 30.5cm 40구경 연장포 2기 (2 × 연장 포) |
부포 | 15.2cm 40구경 단장포 10기 (10 × 단장 포) |
기타 | 47mm 단장포 24기 3파운더 포 20문 (3-pdr 포) 2.5파운더 포 4문 (2.5-pdr 포) 45cm 수상 어뢰 발사관 1문 45cm 수중 어뢰 발사관 4문 18인치 어뢰 튜브 5문 |
장갑 | |
종류 | 하비 갑옷 |
현측 | 14~18인치 (356~457mm) (벨트) |
갑판 | 2.5인치 (갑판) |
포탑 | 6인치 (총 포탑) |
사령탑 | 14인치 (355.6mm) |
포곽 | 6인치 (152.4mm)-2인치 (50.8mm) |
자매함 | |
자매함 | 야시마 |
2. 건조 배경 및 설계
''후지''급 전함은 일본 제국 해군이 독일에서 건조된 중국 철갑선 2척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에 발주한 최초의 전함이다.[1] 당시 일본은 자체적으로 전함을 건조할 기술과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해외에서 건조해야 했다.[2]
''후지''의 건조 과정 및 설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2. 1. 건조 배경
19세기 말, 일본은 청나라 해군이 독일로부터 정원과 진원이라는 철갑함을 도입하는 등 동아시아에서 해군력 경쟁에 직면하게 되었다.[33] 일본은 이러한 청나라의 해군력 증강에 대응하기 위해 전함 건조를 추진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자체적으로 전함을 건조할 기술과 능력이 부족했다.1891년(메이지 24년), 일본 의회는 후지급 전함 2척을 포함한 군함 건조 예산을 부결시켰다.[33] 이듬해 열린 제3회 의회와 제4회 의회에서도 예산안은 계속 부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메이지 천황은 자신의 궁중 비용을 절약하여 건함 예산을 마련하겠다는 건함 조칙을 발표했고, 마침내 의회는 예산안을 통과시켰다.[33]
이에 따라 후지는 영국 런던의 템즈사에서 건조되었으며, 1894년(메이지 27년) 8월 1일에 기공되었다.[33]
2. 2. 설계 및 특징
후지급 전함은 영국의 로열 소버린급 전함을 기반으로 설계되었으며, 필립 와츠가 설계를 담당했다.[3] 로열 소버린급보다 약간 더 빠르고 더 나은 종류의 장갑을 갖추도록 개선되었다.[1]
후지는 전장 약 125.58m, 선폭 약 22.25m, 최대 흘수선 약 7.92m이었다. 통상 배수량은 약 12734117.05kg이었으며, 승무원은 장교와 사병을 합하여 637명이었다. 10기의 스코틀랜드식 보일러에서 발생한 증기를 사용하는 2기의 험프리스, 테넌트 앤 다이크 수직 3단 팽창 증기 기관으로 구동되었다. 이 엔진은 강제 통풍을 사용하여 13500ihp으로 평가되었으며, 최대 18kn으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후지''는 해상 시험에서 최대 18.5kn을 기록했다. 최대 1200ton의 석탄을 적재할 수 있었으며, 10kn의 속도로 4000nmi를 항해할 수 있었다.[4]
주포는 2기의 쌍열 포탑에 장착된 4문의 암스트롱 휘트워스 12인치/40 해군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1기는 전방에, 다른 1기는 후방에 위치했다. 부포는 10문의 QF 6인치/40 해군포 속사포로 구성되었는데, 4문은 선체 측면에 포곽에 장착되고, 6문은 상갑판에 장착되어 포 방패로 보호되었다.[5] 어뢰정 방어를 위해 다수의 소구경 함포가 탑재되었다. 여기에는 14문의 47mm 3파운더포와 10문의 같은 구경의 2.5파운더 핫치키스 포가 포함되었다. 또한 5문의 약 45.72cm 어뢰 어뢰 발사관이 장착되었다.[4]
''후지''의 수선 벨트 장갑은 하비 장갑으로 구성되었으며 두께는 약 35.56cm 에서 약 45.72cm였다. 포탑의 장갑 두께는 약 15.24cm였고, 갑판은 약 6.35cm 두께였다.[4]
3. 운용 역사
1894년 8월 1일 영국 런던의 템즈 철공소에서 기공되어,[9] 1896년 3월 31일에 진수되었고,[10] 1897년 8월 17일에 완성되었다.[10] 건조 과정은 사이토 마코토와 가토 토모사부로 등 240명 이상의 일본 엔지니어와 해군 장교들이 감독했다.[11] 1897년 10월 31일, 요코스카에 도착하여 일본 해군에 정식으로 인도되었고,[33] 1898년 3월 21일에는 1등 전함으로 분류되었다.[49][50]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후지는 제1함대 제1전대의 3번함으로 참전했다.[14] 2월 9일부터 뤼순항 공격과 뤼순항 봉쇄 작전에 투입되었고,[15] 8월 10일에는 황해 해전에 참가했다.[19] 1905년 5월 27일부터 5월 28일까지 벌어진 쓰시마 해전에서는 12번의 피격을 당했지만, 보로디노를 침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20]
1910년, 후지는 주포를 일본제 포로 교체하고 보일러를 교체하는 개장을 받았다.[23] 1912년 8월 28일에는 1등 해방함으로 등급이 변경되었다.[23]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에는 구레에 주둔하며 훈련 임무를 수행했다.[22]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따라 무장과 장갑이 제거되고 운송함으로 분류되었으며, 1922년 12월 1일에는 연습 특무함으로 분류가 변경되었다.[23] 1926년부터 요코스카에 정박하여 계류 연습함으로 사용되었다.[23] 1934년 추진기가 제거되었고,[8] 1939년 가치료큐 곶 부근으로 이동하였다.[8] 1945년 7월 18일 요코스카 공습 당시 미군 함재기의 공격을 받아 대파되어 침몰(착저)되었다.[8][24] 1945년 11월 30일 일본 해군에서 제적되었고,[8] 1948년 우라가 도크에서 해체되었다.[8][10]
3. 1. 취역 및 초기 활동
1894년 8월 1일, 영국 런던의 템즈 철공소에서 기공되었다.[9] 1896년 3월 31일에 진수되었고,[10] 1897년 8월 17일에 완성되었다.[10] 준공 직전, 스핏헤드에서 열리는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 관함식에 참가하기 위해 영국 해군의 군함기를 게양하기도 했다.[33] 사이토 마코토와 가토 토모사부로 등 240명 이상의 일본 엔지니어와 해군 장교들이 건조 작업을 감독했다.[11] 1897년 10월 31일, 요코스카에 도착하여 일본 해군에 정식으로 인도되었다.[33] 1898년 3월 21일, 1등 전함으로 분류되었다.[49][50]3. 2. 러일 전쟁 참전
1904년 제1함대 제1전대의 3번함으로 러일 전쟁에 참전했다.[14] 2월 9일부터 뤼순항 공격과 뤼순항 봉쇄 작전에 투입되었고,[15] 8월 10일에는 황해 해전에 참가했다.[19]1905년 5월 27일부터 5월 28일까지는 쓰시마 해전에 참가했다.[20] 이 해전에서 후지는 12번의 피격을 당했는데,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후방 포탑 덮개를 관통하여 추진제 장약을 점화시킨 것이었다. 이로 인해 8명이 사망하고 9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탄약 화재가 진압된 후, 포탑의 왼쪽 포는 다시 발사되었고, 보로디노를 침몰시키는 결정타를 날린 것으로 보인다.[20]
3. 3. 제1차 세계 대전 및 이후
1910년, 후지는 주포를 일본제 포로 교체하고 보일러를 교체하는 개장을 받았다.[23] 1912년 8월 28일에는 1등 해방함으로 등급이 변경되었다.[23]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에는 구레에 주둔하며 훈련 임무를 수행했다.[22]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 따라 무장과 장갑이 제거되고 운송함으로 분류되었으며, 1922년 12월 1일에는 연습 특무함으로 분류가 변경되었다.[23] 1926년부터 요코스카에 정박하여 계류 연습함으로 사용되었다.[23]
3. 4. 최후
1934년 추진기가 제거되었다.[8] 1939년 가치료큐 곶 부근으로 이동하였다.[8] 1945년 7월 18일 요코스카 공습 당시 미군 함재기의 공격을 받아 대파되어 침몰(착저)되었다.[8][24] 1945년 11월 30일 일본 해군에서 제적되었다.[8] 1948년 우라가 도크에서 해체되었다.[8][10]4. 함장
(특기 사항이 없는 한 해군 대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