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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쇼시 (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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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노 쇼시(藤原彰子, 988년 ~ 1074년)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딸로, 이치조 천황의 중궁이자 고이치조 천황과 고스자쿠 천황의 어머니이다. 12세에 이치조 천황의 후궁으로 입궁하여 황후로 책봉되었으며, 두 아들을 낳아 후지와라 씨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녀는 헤이안 시대 문학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며, 무라사키 시키부, 이즈미 시키부 등 당대 최고의 문인들을 후원했다. 쇼시는 국모로서 섭관 정치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총명하고 자애로운 성품으로 칭송받았다. 1026년 출가하여 조토몬인(上東門院)이라는 원호를 받았으며, 1074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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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쇼시 (98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후지와라노 쇼시와 아들
후지와라노 쇼시와 그녀의 갓난 아들 아쓰히라가 13세기 그림에 묘사되어 있으며, 그녀의 아버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와 시녀 무라사키 시키부가 아기의 생후 50일 의식을 주관하고 있다.
이름후지와라노 쇼시
일본어 표기藤原彰子
추가 정보988년 – 1074년 10월 25일
법명조토몬인
로마자 표기Jōtōmon-in
별칭대녀원
동북원
신분
출생 가문후지와라 씨 (출생)
결혼 후 가문일본 황실 (결혼)
직위여어
황후 (중궁)
황태후
태황태후
생애
출생988년
사망1074년 10월 25일
사망 장소야마시로 국 경 호조지 아미타당
혼인 및 자녀
배우자이치조 천황 (1000년경 결혼, 1011년 사망)
자녀고이치조 천황
고스자쿠 천황
양자아쓰야스 친왕
가족 관계
아버지후지와라노 미치나가
어머니미나모토노 린시
황후 정보
즉위 근거제66대 천황후
중궁 책봉1000년 4월 2일
황태후 책봉1012년 3월 9일
태황태후 책봉1018년 1월 26일
여원 칭호상동문원
여원 칭호 수여1026년 12월 20일
기타 정보
능묘우지 능묘 오타니구치 (교토부 우지시)
입궁999년 12월 11일
입후 전 계위종3위
궁정 여방미나모토노 타카코 (선지)
무라사키 시키부
이즈미 시키부
아카조메 에몬
이세노 다이스케
다이니노산미
고시키부노나이시
데와노벤
후지와라노 토요코
미나모토노 렌시
코쇼쇼노키미
우마츄죠
사에몬노나이시
코우마노묘부

2. 계보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장녀이다. 어머니는 좌대신 미나모토노 마사노부의 딸 린시(964-1053)이다. 같은 어머니를 둔 동생으로는 관백 태정대신 요리미치(992-1074), 노리미치(996-1075), 산조 천황 중궁 겐시(994-1027), 고이치조 천황 중궁 이시(999-1036), 고스자쿠 천황 비 키시(1007-1025)가 있다. 이복 동생으로는 우대신 요리무네, 권대납언 요시노부, 나가이에 등이 있다.[1]

3. 생애

9세기 중반 후지와라노 요시후사는 어린 세이와 천황의 섭정이 되었고, 후지와라 씨는 딸들을 황실에 전략적으로 결혼시키고 섭정을 이용해 11세기 말까지 조정 정치를 장악했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네 명의 딸을 천황과 결혼시켰는데,[1] 이 시기 천황은 의례적인 지위만 가졌고, 실제 권력은 섭정이 차지했다.[2]

995년 미치나가의 형제들이 사망하면서 섭정 자리가 비었고, 미치나가는 후지와라노 고레치카와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다. 이 과정에서 이치조 천황의 황후였던 테이시는 고레치카를 지지하다 실각하여 권력 기반이 무너졌다.[1]

4년 후, 미치나가는 장녀 쇼시를 12세에 이치조 천황의 후궁으로 보냈고,[3][4] 쇼시는 황후가 되었다. 1년 후, 미치나가는 테이시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쇼시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테이시가 이미 황후 칭호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쇼시를 황후로 책봉했다. 이는 전례 없는 일로, 테이시는 '고고'(kōgō) 칭호를, 쇼시는 '내전'(chūgū) 칭호를 받았다.[1]

쇼시는 황태후(Kōtaigō)와 태황태후(Taikōtaigō) 칭호를 받았다.

쇼시는 은퇴 후 비와호 지역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헤이안 시대 귀족 여성들은 종교 서약을 하고 승려가 되기도 했지만, 세속적인 삶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쇼시는 1026년 39세에 승려가 되기 위한 수계 의식을 치렀다. 이 의식은 호화롭게 거행되었으며, 쇼시는 '조토몬인(上東門院)'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황실 여인으로서 정치적 권력이 강화되었고, 단계적인 수계 의식을 통해 완전한 서약을 받았다.[1]

쇼시는 황실 여인으로서 에이가 모노가타리에 기록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후 황실 여인들의 모범이 되었다. 1074년 86세로 사망했다.

미치나가의 장녀로, 어머니는 미나모토노 마사노부의 딸 린시이다. 동복 동생으로는 요리미치, 노리미치, 산조 천황 중궁 겐시, 고이치조 천황 중궁 이시, 고스자쿠 천황 비 키시 등이 있다.

3. 1. 탄생과 초기 생애

988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장녀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좌대신 미나모토노 마사노부의 딸 린시(964-1053)이다. 같은 어머니를 둔 동생으로는 관백 태정대신 요리미치(992-1074), 노리미치(996-1075), 산조 천황 중궁 겐시(994-1027), 고이치조 천황 중궁 이시(999-1036), 고스자쿠 천황 비 키시(1007-1025)가 있다.[1]

에이엔 2년(988년) 토미카도 저택에서 태어났다. 탄생일은 불분명하지만,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와 미나모토노 린시의 결혼은 전년 12월 16일이므로, 9월부터 12월 사이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모는 물론이고 린시를 천황의 후비로 삼으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던 외조부 미나모토노 마사노부, 마사노부 등 겐지 세력을 회유하고 싶어 했던 내조부 후지와라노 가네이에, 양가 모두에게 경사스러운 일이었으며, 성대한 산양(탄생 축하 연회)이 열렸다는 내용이 『에이가 이야기』에 나타난다.

쇼랴쿠 원년(990년) 12월, 3세에 하카마기가 거행되었다. 이 의식에 결석한 후지와라노 사네스케는 마사노부와 미치나가가 그 일로 불쾌감을 느꼈다는 말을 다음 날 전해 듣고 놀랐다.

조토쿠 원년(995년), 쇼시 8세 때 아버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내람의 선지를 받았다.[1]

3. 2. 입궁과 황후 책봉

999년 2월 9일, 모착을 마친 후, 2월 11일에 이치조 천황으로부터 종삼위에 서위되었다. 11월 1일, 이치조 천황의 후궁에 들어가 11월 7일에 뇨고가 되었다. 이 때 쇼시는 불과 12세(만 나이로 11세)였다.

입궁 당시, 이치조 천황의 후궁에는 이미 990년에 중궁으로 책립되었던 후지와라노 테이시가 있었다. 그러나 996년 5월, 이치조 천황의 명을 받은 검비위사에 의해 형제인 후지와라노 고레치카와 후지와라노 다카이에가 소추되고(조토쿠의 변), 형제를 숨기고 있던 테이시는 스스로 가위를 들고 머리카락을 잘라 출가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 후에도 이치조 천황은 테이시와 밀회를 계속했고, 같은 해 테이시는 천황의 첫째 아이인 슈시 내친왕을 출산했으며, 쇼시가 뇨고가 된 999년 11월 7일에는 첫째 황자 아츠야스 친왕을 출산했다.

후지와라노 사네스케에 따르면, 테이시는 승형이었는데 "그 궁의 사람들"은 출가하지 않았다고 말했고, 공가 사회의 반발과 지지 하락을 초래했다. 사네스케의 『소우키』 999년 11월 7일 조에는, 머리를 깎고 아이를 가진 중궁이 "요카와의 피선"이라고 세간에서 뒷말이 오갔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20] 쇼시의 입궁에 공경의 다수가 행렬로 따랐다는 것은, 쇼시의 입궁이 궁정에 안정을 가져오는 요인으로 공경 사회에서 환영받은 결과로 여겨진다.[20]

중관백가 전성 시대에는 테이시의 아버지인 관백 후지와라노 미치타카가 테이시 이외의 입궁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미치타카 사망 후 내람이 된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그것을 허락했다. 996년부터 998년에 걸쳐 후지와라노 요시코, 후지와라노 겐시, 후지와라노 손시가 차례로 입궁했다. 하지만 이치조 천황의 총애를 받은 겐시는 전년에 임신 이상이나 상상 임신 소동을 일으킨 후에 사토리에 있었고, 총애가 옅었던 요시코도 손시도 회임하지 못하고, 사토리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출가한 테이시가 궁중 신사를 행할 수 없어 일부를 미치나가가 대행했던 것, 미치타카가 테이시를 중궁으로 세우기 위해 삼후를 억지로 사후로 했지만, 이 무렵에는 삼후로 돌아가고, 태황태후 쇼시 내친왕이 사망하여 이후가 된 것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장인두였던 후지와라노 유키나리는, 황자 회임이 기대되지 않는 쇼시의 후궁에서의 존재감을 굳히고 싶은 미치나가의 의도를 헤아려, 1000년 정월에 이치조 천황에게 쇼시의 입후 의견을 토산조 여원의 친서를 통해 제시한다.[21] 이치조 천황은 쇼시에게 입후와 선지를 내렸고, 2월 25일(1000년 4월 2일)에 사토에서 입후 의식이 거행되어 중궁으로 책립된다. 이 때, 후위였던 테이시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사상 처음인 일제이후로 여겨진다.[22]

유키나리는 과거 미치타카가 엔유 천황에게 준시 중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테이시를 이치조 천황의 중궁으로 세운 것을 전례로 삼았다. 원래, 중궁이라는 것은 황후의 별칭, 혹은 삼후(태황태후·황태후·황후)의 총칭이었지만, 테이시가 중궁이 되어 사후가 된 중관백가 시대부터, 황후와 중궁의 지위가 분리되었다.

쇼시가 중궁으로 책립된 지 1년도 채 안된 1000년 12월, 테이시는 다시 이치조 천황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둘째 황녀 메이시 내친왕을 출산한 직후 난산으로 사망했다. 쇼시는 이치조 천황의 유일한 정실이 되었다. 이치조 천황은 그 후에도 겐시를 총애했지만, 쇼시는 그 동안, 고 테이시의 황자 아츠야스 친왕(슈시 내친왕, 메이시 내친왕과는 각각 별개)을 거두어 양육했다.

3. 3. 중궁 시절과 두 아들의 탄생

쇼시는 13세에 이치조 천황의 첫째 황자인 아쓰야스 친왕의 양모가 되었다. 이는 한나라 명제 시대에 마황후가 장제를 양육했던 고사를 따른 것으로, 후지와라노 유키나리가 이치조 천황에게 쇼시에게 아쓰야스 친왕을 양육하도록 여러 번 진언했다고 한다.[23]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음수병으로 몸이 쇠약해져 있었고, 자신과 형제자매가 있는 가네이에계 후지와라 씨를 지키기 위해서 쇼시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아쓰야스 친왕을 후견해야 했다.[23] 쇼시는 친왕을 자신의 궁인 후지츠보로 데려와 양육했다.[24]

1007년 미치나가의 아내 린시가 44세에 막내딸 후지와라노 키시를 출산했을 때, 쇼시는 7번째 밤의 산양을 주최하고 어머니와 막내 여동생에게 직물 의상과 산의를 선물했다. 미치나가는 "아직 집에서 나오지 않은 황후가 어머니를 위해 이런 일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백 년 동안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기뻐하며 '미도 칸파쿠기'에 기록했다.[25]

1008년 초봄, 쇼시의 회임이 확인되었다.[27] 그해 9월 11일, 30시간 이상의 난산 끝에[10] 츠치미카도도노에서 이치조 천황의 둘째 황자인 아쓰나리 친왕(고이치조 천황)을 출산했다. 쇼시의 뇨보였던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에는 이 회임과 출산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미치나가는 매우 기뻐했고, 이치조 천황도 제대로 된 후견을 받아 황자가 태어난 것에 안도했다.[28]

1009년 정월 말, 쇼시와 아쓰나리 친왕에 대한 저주 사건이 발생했다.[30] 엔노라는 법사가 체포되었고, 타카시나노 아키스케, 타카시나노 미츠코, 겐노 호우리 등이 연루되었다. 이들은 모두 후지와라노 고레치카의 인척이었고,[30] 조정에 복귀했던 고레치카는 큰 타격을 입었다. 같은 해 11월 25일, 쇼시는 셋째 황자인 아쓰나가 친왕(고스자쿠 천황)을 순산했다. 이로 인해 미치나가의 위신은 더욱 강화되었다.

1011년 5월, 이치조 천황이 병에 걸렸다. 이치조 천황은 테이시 소생의 아쓰야스 친왕을 후계자로 생각했고, 쇼시도 아쓰야스 친왕에게 동정적이었다.[32] 그러나 후지와라노 유키나리는 아쓰나리 친왕의 입태자를 주장했다.[31] 결국 이치조 천황은 아쓰나리 친왕을 황태자로 삼고, 코이데 친왕에게 양위했다.

쇼시는 아버지 미치나가와 남편 이치조 천황이 자신과 상의 없이 양위를 결정한 것에 분노했다.[32] 에이가 이야기에는 쇼시가 미치나가에게 아쓰야스 친왕을 무시하고 아쓰나리 친왕을 황태자로 세우려는 것에 대해 간언하고, 미치나가가 반론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33]

3. 4. 국모로서의 영향력

国母일본어로서의 영향력 문단은 1011년 이치조 천황이 퇴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면서 시작된다.[13] 이때 쇼시의 장남은 황태자가 되었고, 훗날 고이치조 천황이 된다.[14] 쇼시는 황궁에서 은퇴하여 비와호 지역의 후지와라 저택에서 살았다.[15]

1016년,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쇼시의 여동생 겐시와 결혼한 산조 천황을 폐위시키고 고이치조 천황을 즉위시켰다. 1017년에는 쇼시의 둘째 아들 고스자쿠 천황이 황태자가 되었다. 아들이 황제와 황태자였기 때문에 쇼시는 안정된 지위를 확보하고 궁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1] 쇼시는 친구와 친척을 선택하여 궁정 직책을 채우고 비를 승인하는 등 황실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내렸다. 그녀가 선택한 비는 아버지의 직계 후손이었기 때문에, 쇼시는 수년 동안 아버지의 혈통을 통제했다.[1]

1012년 2월 14일, 쇼시는 황태후가 되었다. 1013년, 쇼시는 산조 천황의 중궁 겐시가 잦은 연회를 열어 여러 재상들을 귀찮게 하자, 일종의 물품을 바치는 연회를 중단시켰다. 후지와라 사네스케는 이를 듣고 "현후라 칭해야 한다"라며 감동했다.[38]

1016년 1월 29일, 아쓰나리 친왕(고이치조 천황)이 즉위하고, 이듬해 3월 미치나가는 섭정, 후지와라 씨 장자를 모두 적자 후지와라 요리미치에게 넘겨주고 출가하여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 해, 아쓰아키라 친왕이 황태자 폐위를 원했을 때, 쇼시는 아쓰야스 친왕의 입태자를 추진했지만 미치나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아쓰나가 친왕이 황태자가 되었다.[39]

미치나가의 섭정 취임과 퇴임 상표는 어린 천황이 아닌 쇼시 앞으로 제출되었으며, 퇴임 후의 태정대신 보임도 쇼시의 영지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는 천황의 일종의 분신적 존재인 섭정(및 그 퇴임자)의 인사가, 천황이나 섭정 자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일종의 모순(자기 대관의 문제)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미치나가의 출가 후, 쇼시는 일문을 통솔하고, 남동생 요리미치 등과 협력하여 섭관 정치를 지탱했다. 그러나 이후, 섭관가 일족의 공주는 입내하지만, 남자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운이 계속되었다.

1018년 1월 7일, 쇼시는 태상천황태후가 되었다.

3. 5. 만년과 죽음

1018년 태황태후가 되었다. 1026년, 쇼시는 39세의 나이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수계 의식을 치렀다. 이때 조토몬인(上東門院)이라는 원호를 받았다.[41] 이 의식은 금박으로 장식된 병풍이 놓인 곳에서 호화롭게 거행되었으며, 값비싼 선물들이 전시되었고, 화려한 의상을 입은 조정 대신들이 참석했다. 다섯 명의 승려가 의식을 집행했는데, 이 중 셋은 불교 사제의 최고위 계층을 대표했고, 그 중 한 명은 쇼시의 사촌으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어깨 길이로 자르는 의식인 '아마소기'를 집전했다. 그녀의 두 번째 '주카이'는 황후에서 황실 여인으로의 전환을 상징하며, 생활 방식의 변화를 의미했고, 그녀가 수련 승려가 되었음을 나타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황실의 의무를 포기하고 불교 의식에 전념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실 여인이 되면서 정치적 권력이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고 한다.[1]

만년에는 비와호 지역의 후지와라 저택에서 은퇴 생활을 하였고, 호세이지 도호쿠인(東北院)을 거처로 삼았다.

장원 9년(1036년) 4월 17일에 고이치조 천황, 간토쿠 2년(1045년) 정월 18일에 고스자쿠 천황이 붕어하여 10년 사이에 두 아들을 잃는 슬픔을 겪었다.[41] 그 후 손자인 고레이제이 천황이 즉위했지만, 『고지단』에는 그 시대에 아들 후지와라노 모로자네에게 간파쿠직을 양보하고 싶다는 후지와라노 요리미치의 말을 들었을 때, 여관에게 머리를 빗게 하던 쇼시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 내리에 "아버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유언에 어긋나므로 용서받을 수 없도록"이라는 뜻을 주상하게 했고, 이 때문에 요리미치는 동생 후지와라노 노리미치에게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는 일화가 있다.

에이쇼 7년(1052년)에는 중병에 걸렸지만, 요리미치·노리미치 등은 국모의 병 치유를 빌며 대사를 주청하여, 이로 인해 전년부터 시작된 전9년의 역이 일시 정전되었다.

증손자 시라카와 천황 시대인 조호 원년(1074년) 10월 3일, 호세이지 아미타당 안에서 87세로 붕어했다.[41] 유해는 우지릉에 안치되었다.

4. 문화적 영향과 평가

쇼시는 황궁에서 살았지만, 1005년 황궁이 화재로 소실된 이후에는 주로 아버지 미치나가의 저택 중 한 곳에서 거주했다.[7]

4. 1. 문학적 후원

미치나가는 쇼시에게 명성을 주고, 교육과 학문을 중시하는 궁정에서 경쟁력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 재능 있고, 교육받았으며, 흥미로운 시녀들을 찾았다. 이는 무라카미 천황의 딸 세이시(娍子)와 테이시(定子)의 살롱에 필적할 만한 것이었다. 미치나가는 겐지모노가타리의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를 쇼시의 궁정으로 초청했고, 그곳에서 그녀는 이즈미 시키부, 아카조메 에몬과 합류했다. 이후 재능 있는 시인이자 음악가인 이세노타이후도 합류했다.[5][6] 테이시의 궁정에는 수필집 枕草子의 작가 세이 쇼나곤이 시녀로 있었다. 두 황후의 궁정 여성들은 가장 잘 알려지고 오래 지속되는 헤이안 시대 문학 작품들을 썼다.[5][6]

무라사키 시키부, 토사 미츠오키가 그린 16세기 후반 삽화에 묘사된 모습.


무라사키가 쇼시의 궁정에 합류했을 때 쇼시는 16세 정도였으며, 아마도 한문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일본 문학 학자 아서 웨일리는 무라사키가 자신의 일기에 쓴 글을 바탕으로 쇼시를 진지한 젊은 여성으로 묘사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폐하는 삶에 대한 경험을 더 많이 쌓아가고 있으며, 더 이상 이전처럼 엄격한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동안 폐하의 궁정은 극도로 지루하다는 평판을 얻었고, 피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외면받고 있습니다."[8] 또한, 무라사키는 쇼시가 시녀들에게 너무 쾌활하게 보이지 않도록 조언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폐하는 여전히 우리에게 너무 지나치게 행동하는 것은 큰 실수라고, '단 한 번의 실수로 매우 불쾌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등, 옛 방식으로 끊임없이 경고하셨지만, 이제는 또한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할 정도로 거절하지 말라고 간청하십니다. 불행하게도, 오랜 습관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으며, 게다가 황후의 매우 세련된 오빠들이 젊은 궁정 친구들을 많이 데려와 그녀의 집에서 즐기게 되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더 정숙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1]

4. 2. 인물 및 평가

쇼시는 총명하고 자애로운 성품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는다. 정적(政敵) 관계였던 나카노 간파쿠 가문에도 예의를 갖추고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43] 이치조 천황의 황후로서 두 차례에 걸쳐 국모의 자리에 오르며 섭관 정치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후세에 모범적인 황후로 추앙받았다.[43]

와카에 능했던 쇼시는 육친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많이 남겼다. 이치조 천황과는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으며, 이치조가 임종 시에 읊은 시는 쇼시가 받아 적었다.

쇼시의 궁정 생활과 관련된 일화는 『에이가모노가타리』,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 『고지단』 등 다양한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자식부 일기』에는 쇼시의 피부가 투명하게 아름답고, 머리카락도 풍성하고 훌륭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쇼시의 거처에 후지쓰보 (飛香舎)가 배정되었기 때문에, 『영화 이야기』에서는 쇼시를 "빛나는 후지쓰보"라고 칭찬하고 있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자신의 일기에서 쇼시를 진지한 젊은 여성으로 묘사하며, "세월이 흐르면서 폐하는 삶에 대한 경험을 더 많이 쌓아가고 있으며, 더 이상 이전처럼 엄격한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동안 폐하의 궁정은 극도로 지루하다는 평판을 얻었고, 피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외면받고 있습니다."라고 기록했다.[8] 또한, 쇼시가 시녀들에게 너무 쾌활하게 보이지 않도록 조언하는 내용도 묘사했다.[1]

5. 유모

쇼시의 유모로는 미나모토노 노부코, 미나모토노 요시코, 후지와라노 친메이의 딸 등이 알려져 있다.


  • 미나모토노 노부코 - 장보 2년(1000년) 4월 7일 종5위하에 서임되었다.
  • 미나모토노 요시코 - 미나모토노 노부코와 같은 날 종5위하에 서임되었다.
  • 후지와라노 친메이의 딸 (미나모토노 타카마사의 부인) - 쇼시가 황후가 될 때 작위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보아, 산후 조리 등으로 일찍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쇼시를 섬겼던 친동생 모토코가 그녀의 사후 남편이었던 미나모토노 타카마사와 재혼했기 때문에 혼동되기 쉽지만, 모토코는 고이치조 천황의 유모였다.

참조

[1] 서적 Henshall (1999), 24–25
[2] 서적 Bowring (2005), xiv
[3] 서적 McCullough (1990), 201
[4] 서적 Bowring (2005), xiv
[5] 서적 Shirane (1987), 58
[6] 서적 Mulhern (1994), 156
[7] 서적 Bowring (2005), xxiv
[8] 서적 Waley (1960), viii
[9] 서적 Mulhern, (1991), 86
[10] 서적 Groner (2002), 281
[11] 서적 qtd in Mulhern, (1991), 87
[12] 웹사이트 Detached segment of the diary of Lady Murasaki emaki http://www.emuseum.j[...] 2011-09-10
[13] 서적 Adolphson (2007), 31
[14] 서적 Shively and McCullough (1999), 67–69
[15] 서적 Shirane (1987), 221
[16] 서적 Meeks, 52–57
[17] 서적 Meeks, 58
[18] 문서 『小右記』長徳二年五月一日条
[19] 문서
[20] 서적 紫式部と藤原道長 講談社現代新書 2023
[21] 문서 『権記』長保二年正月二十八日条。
[22] 문서
[23] 서적 摂関政治と王朝貴族 吉川弘文館
[24] 문서 『栄花物語』
[25] 문서 『御堂関白記』寛弘四年正月十一日条。
[26] 문서 『小右記』寛弘4年8月9日条
[27] 문서 『栄花物語』巻八「はつはな」
[28] 문서 『栄花物語』巻八
[29] 문서 『御堂関白記』寛弘五年九月二十五日条。
[30] 문서
[31] 문서
[32] 문서 『権記』寛弘八年五月二十七日条
[33] 문서 『栄花物語』巻九
[34] 서적 一条天皇〈人物叢書〉 吉川弘文館 2003
[35] 문서
[36] 서적 日本書紀』『御堂関白記』『権記
[37] 인용 「故院に先立たれた私の心も知らないままに撫子を手に取った我が子をみるにつけても、涙が溢れる」と意味が取れる。
[38] 서적 紫式部と藤原道長
[39] 서적 栄花物語』巻十三
[40] 서적 中世摂関家の家と権力 校倉書院
[41] 서적 扶桑略記』『百練抄
[42] 서적 栄花物語』布引の滝
[43] 서적 中右記』『古事談
[44] 서적 権記
[45] 웹사이트 女房一覧 平安時代中期(4) https://tracethehist[...] 2023-09-30
[46] 서적 王朝の明暗 平安時代史の研究 第二冊 東京堂出版
[47] 간행물 摂関期における乳母の系譜と歴史的役割 https://www.ritsumei[...] 立命館大学人文学会
[48] 뉴스 見上愛、大河初出演 『光る君へ』で藤原彰子役「とてもうれしく思いながらも緊張」 https://news.mynavi.[...] マイナビ 202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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