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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락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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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희락관은 일제강점기 경성부 충무로 1가에 있었던 영화 상설 극장이다. 1915년 유락관으로 시작하여 1918년 희락관으로 개명되었으며, 일본 영화를 주로 상영했다. 초창기에는 일본의 쇼치쿠, 니카츠 등의 작품을 상영했으며, 1930년대에는 니카츠 직영관으로 운영되었다. 1917년에는 서양 영화 전문관으로 리뉴얼하여 이탈리아 영화 카비리아를 상영하기도 했다. 1945년 화재로 소실되어 폐관되었으며, 현재는 명동 밀리오레가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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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락관
기본 정보
1922년 (다이쇼 11년)의 동관
1922년 (다이쇼 11년)의 동관
회사명희락관
로마자 표기Kirakukwan
한국어 표기희락관
영어 회사명Kirakukwan
종류사업장
시장 정보소멸
본사 위치조선 경성부 본정1정목 38번지 (현재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1가 24번지)
설립1915년 3월
업종서비스업
사업 내용영화의 흥행
대표자관주 간지마 우메키치
관련 인물신타 코이치
하야카와 마스타로
마쓰다 마사오
약력

2. 역사

유락관 시절 영화 카비리아 광고 (매일신보, 1917년)


희락관의 전신은 1915년 9월 닛타 상회(新田商會)가 설립한 유락관(遊樂館)이다. 닛타 상회는 이미 대정관(大正館) 등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유락관 설립과 함께 기존에 운영하던 경성고등연예관(세계관)은 폐쇄되었다.[14] 유락관은 1918년 '''희락관'''(喜樂館)으로 이름을 바꾸어 폐쇄될 때까지 이 명칭을 사용했다.

희락관은 현대의 충무로 1가 부근인 당시 경성부 본정(本町) 1정목에 위치한 영화 상설 극장이었다. 청계천 남쪽, 이른바 남촌(南村)이라 불리던 지역에 자리하여 주로 일본인들이 이용하였으며, 일본인 주택가와 상권 중심지에 위치한 좋은 입지 덕분에 번성하였다. 대정관과 함께 남촌의 대표적인 일본 영화 상영관으로 꼽혔다.

개관 초기에는 쇼치쿠(松竹), 대도영화(大都映畵), 닛카츠(日活) 등 일본 영화사들의 작품을 상영했다. 특히 명치좌가 건립되기 전까지는 쇼치쿠 영화를, 1930년대에는 닛카츠 영화를 주로 상영하였다. 1930년대에는 닛카츠가 직접 희락관을 경영하며 자사 영화를 상영하여 '닛카츠 직영관'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940년대 전후에는 마지마 우메키치(間島梅吉)라는 개인의 소유로 넘어갔다. 당시 관객 정원은 1,000명 내외였다.

1945년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어 폐관하였으며, 현재 희락관이 있던 자리에는 명동 밀리오레 건물이 들어서 있다.

2. 1. 설립 배경



희락관의 전신인 유락관(遊樂館)은 1915년(다이쇼 4년) 3월, 일제강점기 경성부 본정(本町) 1정목(一丁目) 38번지(현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1가 24번지)에 처음 문을 열었다.[1] 이곳은 청계천 남쪽, 소위 남촌(南村)이라 불리던 상권 지역이었으며, 주로 일본인들이 이용하던 곳이었다. 유락관은 당시 일본인 주택가와 상권 중심지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좋아 번성했으며, 을지로 및 충무로 일대에 있던 일본인 극장 중에서도 입지가 가장 좋다고 평가받았다.[1] 개관 당시 건물 정면에는 이듬해 미쓰코시 오복점 경성출장소가 들어섰고, 이 점포는 나중에 조선은행 본관 앞으로 이전(현재 신세계백화점 위치)하기 전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1]

유락관은 350평(약 1157m2) 면적의 목조 4층 양관 건물로, 건축에는 당시 금액으로 10만이라는 거액이 투입되었다.[2] 설립 및 초기 경영은 닛타 코이치(新田耕市) 등 형제가 운영하던 닛타 상회(新田商會)가 맡았다.[1] 닛타 상회는 이미 경성부 내에서 다이쇼관(1912년 개관)과 제2다이쇼관(구 경성고등연예관, 1910년 개관)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유락관 개관 직전 제2다이쇼관은 폐관했다.[1][14] 닛타 상회는 닛카츠와 계약을 맺고 조선 내 대리점 역할을 하며 닛카츠가 배급하는 자사 제작 영화나 수입한 파라마운트 영화 등을 유락관에서 상영하고, 다른 조선 내 영화관에도 배급하는 업무를 수행했다.[1]

1917년(다이쇼 6년), 경성부 내에서 황금관(후의 국도극장)을 경영하던 하야카와 코슈(하야카와 마스 타로)가 고바야시 상회의 고바야시 키사부로와 손잡고 유락관을 매수했다.[1] 하야카와는 내부와 외부를 개수하여 기존의 일본·서양 영화 혼합 상영관에서 서양 영화 전문관으로 극장의 성격을 바꾸었다.[1] 같은 해 4월 6일부터 8일까지는 "유락관 명예 흥행"이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 영화 대작인 《카비리아》(감독 Giovanni Pastrone|조반니 파스트로네ita, 1914년)를 상영했다.[13][11] 이 상영을 위해 천연색활동사진(천활)의 변사 미야하라 타모츠를 초빙하고, 하야카와 연예부 소속의 우스다 한쿄, 난고 코리키 등이 영화 해설(활변)을 맡았다.[13] 당시 유락관과 황금관은 극장 내 반주 악단에 본격적인 오케스트라를 도입하고, 도쿄 긴자의 금춘관에서 인기 있던 블루버드 영화를 상영하며 여러 변사가 연속으로 활변을 하는 등, 다른 경성부 내 영화관들을 압도하는 인기를 누렸다.[1]

그러나 1919년(다이쇼 8년), 하야카와는 경영 실패로 유락관을 매각하게 되었다.[1] 극장을 인수한 것은 나가사키현의 만국활동사진 주식회사(만활)였으며, 만활과 닛카츠의 공동 경영 체제가 되면서 극장 이름은 희락관(喜樂館)으로 바뀌었다.[1] 이 시기 닛카츠는 오노에 마츠노스케 주연 영화 등으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희락관이 원래 일본인 거리의 일본인을 위한 영화관이었던 만큼 일본 영화 수요가 커지면서 다시 높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1] 서양 영화 전문관 시절의 주임 변사였던 난고 코리키 등은 황금관으로 완전히 옮겨갔다.[1]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닛카츠는 희락관 외에도 목포부의 희락관 등 조선 내 9개 극장과 계약을 맺고 배급망을 확장했다.[1]

이후 희락관의 소유 및 경영 구조는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1925년 기록에 따르면 요코타 상회와 닛타 상회가 공동 경영했으며, 닛카츠, 유니버설 영화, 파테, 폭스 영화(현 20세기 스튜디오)의 작품을 상영했다. 당시 관객 정원은 1,300명, 종업원은 25명(변사 8명, 악사 8명 포함)이었다.[2] 1927년에는 마츠다 마사오의 개인 경영으로 바뀌었고, 상영 계통은 닛카츠와 유니버설 영화로 축소되었으나 정원은 1,300명을 유지했다.[3] 1930년에는 닛카츠 직영 하에 마츠다 마사오가 경영을 맡고 쿠라타 토쿠지로가 지배인이 되었으며, 정원은 950명으로 감소했다.[4][5] 이 시기 닛카츠가 극장을 직접 경영하며 자사 작품을 주로 상영하게 되면서 희락관은 '닛카츠 상영관' 또는 '닛카츠 직영관'으로 널리 알려졌다.

1940년(쇼와 15년) 전후에는 마지마 우메키치라는 인물의 개인 소유로 넘어갔다.[7][8]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전시 통제가 강화되면서 1942년 설립된 영화 배급사가 모든 영화 배급을 독점하게 되었지만, 당시 희락관의 구체적인 흥행 계통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7] 이 시기 지배인은 타카다 사키오였고, 관객 정원은 1,050명으로 다시 늘어났다.[7][8]

희락관은 설립 이후 오랫동안 다이쇼관과 함께 남촌 지역의 대표적인 일본 영화 상영관으로 자리 잡았으며, 관객 정원은 시기에 따라 변동했지만 대략 1,000명 내외를 유지했다.

2. 2. 연혁



희락관(당시 유락관)에서 상영된 영화 카비리아의 한 장면.


희락관의 전신은 1915년 3월[1][2] 일제강점기 경성부 본정 1정목 38번지 (현재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1가 24번지)에 '''유락관'''(遊樂館)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한 영화 상설 극장이다.[1] 유락관은 닛타 코이치(新田耕市) 등 형제가 운영한 닛타 상회(新田商會)에 의해 경영되었다.[14] 닛타 상회는 당시 이미 대정관(大正館)과 경성고등연예관(세계관)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유락관 개관 직전 후자(경성고등연예관)는 폐관했다.[1] 유락관은 350평 (약 1157m2) 면적의 목조 4층 건물로, 당시 금액으로 10만의 거액을 들여 건축했다.[2] 개관 당시 닛타 상회는 닛카츠와 계약을 맺고 조선 내 대리점 역할을 하며 닛카츠 배급 영화를 상영하거나 다른 영화관에 배급하는 업무를 수행했다.[1] 초창기에는 일본의 쇼치쿠(松竹映畵), 대도영화(大都映畵), 닛카츠(日活映畵)의 작품을 상영하였으며, 특히 명치좌(明治座)가 건립되기 전까지는 쇼치쿠 작품을, 1930년대에는 닛카츠 작품을 주로 상영하였다.

유락관은 청계천 남쪽, 이른바 남촌(南村)이라 불리던 상권 지역에 위치하여 주로 일본인들이 이용하였다. 당시 을지로(乙支路) 및 충무로 등지에 위치하던 일인극장(日人劇場)들 중에서 가장 입지가 좋다고 여겨졌던 곳인데, 이는 일본인 주택가와 상권 중심지에 위치하여 접근성이 좋았던 덕분이다. 설립 이후 오랫동안 대정관과 함께 일본 영화를 상영한 남촌의 대표적인 극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당시 관객 정원수는 1,000명 내외에 달했었다.

1917년, 당시 경성부 내 황금관(후의 국도극장)을 경영하고 있던 하야카와 코슈(早川孤舟, 하야카와 마스 타로)가 고바야시 상회의 고바야시 키사부로(小林喜三郎)와 손을 잡고 본관(유락관)을 매수했다.[1] 하야카와는 내장과 외장을 개수하고 본관을 일본·서양 혼합 상영관에서 서양 영화 전문관으로 리뉴얼했다.[1] 같은 해 4월 6일부터 8일까지 이탈리아 영화 대작 『카비리아』 (감독 조반니 파스트로네, 이탈리아 공개 1914년[11], 일본 공개 1916년[12])를 공개했다.[13] 본관(유락관)과 황금관은 관내 반주 악단에 본격적인 오케스트라를 도입하고, 당시 도쿄 긴자의 금춘관에서 인기였던 블루버드 영화를 도입했으며, 여러 변사에 의한 연속 활변을 실시하여 당시 경성부의 다른 영화관을 압도하는 기세를 보였다.[1]

그러나 1919년 하야카와는 본관(유락관) 경영에 실패하여 이를 매각하게 된다.[1] 본관을 매수한 것은 나가사키현의 만국활동사진 주식회사(만활)로, 본관은 만활과 닛카츠의 공동 경영이 되어 '''희락관'''(喜樂館)으로 개칭했다.[1] 당시 닛카츠 작품은 오노에 마츠노스케의 전성 시대였으며, 원래 일본인 거리에 세워진 일본인을 위한 영화관이었기 때문에 일본 영화 수요가 컸고, 본관은 다시 경성부 내 다른 관을 압도하는 기세를 되찾았다.[1]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닛카츠는 본관 외에 목포부(현재의 목포시)의 희락관을 포함하여, 조선에 9개 관과 계약을 맺고 배급망에 수용했다.[1] 1925년 발행된 『일본 영화 연감 다이쇼 13·4년』에 따르면, 당시 본관의 경영은 요코타 상회·닛타 상회의 공동 경영으로 되어 있으며, 흥행 계통은 닛카츠·유니버설 픽처스·파테·폭스 필름의 4사였으며, 관객 정원은 1,300명, 종업원 수는 25명, 그중 영화 설명자(변사)가 8명, 악사가 8명이었다.[2] 1927년 발행된 『일본 영화 사업 총람 쇼와 2년판』에서는 관객 정원은 변함없고, 흥행 계통이 닛카츠·유니버설 픽처스만으로 되어 있으며, 소유자·경영자가 마츠다 마사오(松田正雄)의 개인 경영으로 바뀌었다.[3] 『일본 영화 사업 총람 쇼와 3·4년판』(1929년 발행 추정)에서는 마츠다 마사오의 개인 경영 그대로 관객 정원이 950명으로 감소했으며,[4] 1930년 발행된 『일본 영화 사업 총람 쇼와 5년판』에서는, 닛카츠의 직영, 마츠다 마사오의 경영, 지배인이 쿠라타 토쿠지로(倉田徳次郎)로 되어 있다.[5] 이 시기 닛카츠가 직접 경영하며 자사 작품을 주로 상영하게 되면서 '닛카츠 직영관'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40년 전후에는 마지마 우메키치(間島梅吉)의 개인 경영으로 바뀌었다.[7][8]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고 전시 통제가 실시되어 1942년, 일본 내 모든 영화가 같은 해 2월 1일 설립된 사단법인 영화 배급사의 배급이 되면서 영화관 경영 주체와 관계없이 홍계·백계의 2계통으로 편입되었지만, 『영화 연감 쇼와 17년판』에는 본관의 흥행 계통에 대해서는 기술되어 있지 않다.[7] 경영이 마지마로 바뀐 외에 당시 지배인은 타카다 사키오(高田咲雄), 관객 정원은 1,050명으로 증가했다.[7][8]

1945년, 희락관은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어 폐관하였다.[9] 현재 해당 부지에는 명동 밀리오레 건물이 들어서 있다.[10]

주요 연혁
연도내용비고
1915년 3월유락관(遊樂館)으로 개관[1][2]경성부 본정 1정목 38번지. 닛타 상회 경영. 닛카쓰 영화 중심 상영. 정원 약 1,000명.
1917년하야카와 코슈(早川孤舟)가 매수, 서양 영화 전문관으로 리뉴얼.[1]
1919년만국활동사진 주식회사(만활)와 닛카츠 공동 경영, 희락관(喜樂館)으로 개칭.[1] 닛카츠 영화 중심 상영.
1925년요코타 상회·닛타 상회 공동 경영. 정원 1,300명.[2]
1927년마츠다 마사오(松田正雄) 개인 경영.[3] 정원 1,300명.
1929년경마츠다 마사오 개인 경영. 정원 950명.[4]
1930년닛카츠 직영 (마츠다 마사오 경영).[5] 정원 950명.
1940년 전후마지마 우메키치(間島梅吉) 개인 경영.[7][8]
1942년전시 통제 하 영화 배급사 체제 편입. 정원 1,050명.[7][8]
1945년화재로 전소되어 폐관.[9]


2. 3. 운영 및 경영



1915년 3월, 일제강점기 조선경성부 본정 1정목 38번지(현재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1가 24번지)에 '''遊樂館|유락관일본어'''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개관했다.[1] 개관 당시 소유 및 경영은 新田耕市|니타 코이치일본어 등 형제가 운영하던 新田商會|닛타 상회일본어가 맡았다.[1] 닛타 상회는 이미 경성부 내에서 다이쇼관과 제2다이쇼관(구 경성고등연예관)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유락관 개관 직전 제2다이쇼관은 폐관했다.[1] 닛타 상회는 닛카쓰와 계약하여 조선 내 대리점 역할을 하며 닛카쓰 배급 작품을 유락관에서 상영하고 다른 영화관에 배급하는 업무도 수행했다.[1] 유락관은 350평(약 1157m2) 면적의 목조 4층 양관 건물로, 당시 금액으로 10만이라는 거액을 들여 건축되었다.[2] 초기에는 닛카쓰가 배급한 자사 제작 영화나 수입한 파라마운트 영화 등을 주로 상영했다.[1]

1917년, 당시 황금관을 경영하던 하야카와 코슈( 早川孤舟일본어 )가 小林商会|고바야시 상회일본어의 小林喜三郎|고바야시 키사부로일본어와 손잡고 유락관을 매수했다.[1] 하야카와는 내부와 외부를 개수하여 서양 영화 전문 상영관으로 바꾸었다.[1] 같은 해 4월 6일부터 8일까지 이탈리아의 대작 영화 카비리아(감독 조반니 파스트로네)를 특별 상영하기도 했다.[13] 이 상영에는 천연색활동사진(천활) 소속 변사 미야하라 타모츠, 하야카와 연예부 소속 우스다 한쿄, 난고 코리키 등이 참여하여 영화 해설(활변)을 맡았다.[13] 유락관과 황금관은 극장 내 반주 악단에 오케스트라를 도입하고, 당시 도쿄 긴자의 金春館|금춘관일본어에서 인기 있던 블루버드 영화를 상영하는 등 다른 영화관들을 압도하는 인기를 누렸다.[1]

1918년 극장 이름이 '''喜樂館|희락관일본어'''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1919년 하야카와는 경영난으로 희락관을 매각하게 된다.[1] 나가사키현의 萬國活動写真株式會社|만국활동사진 주식회사일본어(만활)가 이를 인수하여 닛카쓰와 공동으로 경영하게 되었고, 극장 이름은 희락관으로 유지되었다.[1] 당시 닛카쓰오노에 마츠노스케 주연 영화 등으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일본인 거주지에 위치한 희락관은 일본 영화에 대한 수요가 높아 다시 인기를 얻었다.[1] 서양 영화 전문 변사였던 난고 코리키 등은 이때 황금관으로 완전히 이적했다.[1]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닛카쓰는 희락관 외에도 목포부의 희락관을 포함하여 조선 내 9개 극장과 계약을 맺고 배급망을 확장했다.[1] 1925년 기록에 따르면 당시 희락관은 横田商会|요코타 상회일본어와 닛타 상회가 공동 경영했으며, 닛카쓰, 유니버설 영화, 파테, 폭스 영화 등 4개사의 영화를 상영했다. 관객 정원은 1,300명, 종업원은 25명(변사 8명, 악사 8명 포함)이었다.[2] 1927년에는 마츠다 마사오의 개인 경영으로 바뀌었고, 상영 영화는 닛카쓰유니버설 영화로 축소되었으나 관객 정원은 1,300명을 유지했다.[3] 이후 1929년경에는 관객 정원이 950명으로 감소했다.[4]

1930년대에 들어서 희락관은 닛카쓰가 직접 경영하게 되었고, 마츠다 마사오가 경영을, 쿠라타 토쿠지로가 지배인을 맡았다.[5] 이 시기 희락관은 닛카쓰 영화를 주로 상영하면서 '닛카쓰 직영관'으로 널리 알려졌다.

1940년 전후에는 間島梅吉|마지마 우메키치일본어의 개인 소유로 넘어갔다.[7][8]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전시 통제가 강화되면서 1942년 영화 배급사가 설립되어 모든 영화 배급이 통제되었지만, 희락관의 구체적인 상영 계통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7] 당시 지배인은 타카다 사키오였고, 관객 정원은 1,050명으로 다시 증가했다.[7][8]

희락관은 청계천 남쪽, 이른바 남촌(南村) 상권 지역에 위치하여 주로 일본인들이 이용했다. 당시 을지로충무로 일대의 일본인 극장들 중에서도 일본인 주택가와 상권 중심지에 자리 잡아 접근성이 좋아 가장 입지가 좋은 곳으로 평가받으며 번성했다. 설립 이후 오랫동안 대정관과 함께 남촌을 대표하는 일본 영화 상영관으로 자리매김했다.

1945년,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면서 폐관하였다.[9] 현재 희락관이 있던 자리에는 명동 밀리오레 건물이 들어서 있다.[10]

2. 4. 소실과 현재

1945년 화재 사고로 인해 전소되어 폐관하였다.[9] 희락관이 있던 자리(일제강점기 경성부 본정1정목 38번지, 현재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1가 24번지)에는 명동 밀리오레가 들어서 있다.[10]

3. 위치 및 시설

희락관은 일제강점기 경성부의 중심지였던 본정 1정목 38번지(현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1가 24번지 명동 밀리오레 위치[10])에 자리 잡고 있었다.[1] 이 지역은 청계천 남쪽, 소위 남촌(南村)이라 불리며 일본인 거주지와 상권이 밀집한 곳으로, 희락관은 좋은 입지 덕분에 주로 일본인들이 이용하는 대표적인 극장 중 하나였다.

1915년 3월, '유락관'(遊樂館)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열었으며,[1] 당시로서는 거액인 10만을 들여[2] 350평(약 1157m2) 규모의 목조 4층 양관 건물로 지어졌다.[2] 초기 관객 정원은 1,000명 내외였으며[14], 이후 시기에 따라 변화하였다. 1918년에는 '희락관'(喜樂館)으로 이름을 바꾸었고,[1] 1945년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어 폐관할 때까지[9] 남촌의 주요 문화 시설로 기능했다.

3. 1. 위치

희락관은 일제강점기 경성부 본정 1정목 38번지에 위치했다. 이는 현재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1가 24번지에 해당하며, 현재 이 자리에는 명동 밀리오레가 들어서 있다.[10]

당시 희락관은 청계천 남쪽, 이른바 남촌(南村)이라 불리던 상권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일본인 주택가와 상권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접근성이 뛰어나, 을지로충무로 일대에 있던 다른 일본인 극장들 중에서도 가장 입지가 좋은 곳으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 덕분에 희락관은 주로 일본인들이 이용하며 번성할 수 있었다. 개관 초기에는 극장 정면에 미쓰코시 오복점 경성출장소가 있었으나, 이 점포는 나중에 조선은행 본관 앞(현재의 신세계백화점 위치)으로 이전했다.[1]

3. 2. 시설 규모

희락관은 일제강점기 경성부 본정 1정목 38번지(현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충무로1가 24번지 명동 밀리오레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10][1] 1915년(다이쇼 4년) 3월 '유락관'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열었을 때, 건물은 350평(약 1157m2) 면적에 목조 4층 양관 구조로 지어졌다.[2] 건축에는 당시 금액으로 10만의 거액이 투입되었다.[2]

개관 초기 관객 정원은 1,000명 내외였던 것으로 보이며[14], 이후 시기별 정원은 다음과 같이 변화하였다.

시기정원출처
1925년 ~ 1927년1,300명[2][3]
1929년 ~ 1930년950명[4][5]
1942년 ~ 1943년1,050명[7][8]



1925년 당시에는 총 25명의 종업원이 근무했으며, 이 중에는 영화의 내용을 설명해주는 변사 8명과 극장 내 연주를 담당하는 악사 8명이 포함되어 있었다.[2]

희락관은 1945년 발생한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면서 폐관하였다.[9]

4. 상영 영화 및 문화



희락관(개관 당시 유락관)은 주로 일본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었으나, 시기별로 상영 영화의 종류와 운영 방식에 변화가 있었다. 초기에는 닛카츠, 쇼치쿠, 대도영화 등 일본 영화사의 작품과 함께 파라마운트와 같은 수입 서양 영화도 상영했다.[1] 1917년 경영권이 하야카와 코슈에게 넘어가면서 잠시 서양 영화 전문 상영관으로 운영되기도 했으며, 이 시기에는 이탈리아 대작 영화 《카비리아》를 특별 상영하고[13], 극장 반주를 위해 본격적인 오케스트라를 도입하는 등[1]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러나 1919년 다시 경영 주체가 바뀌고 극장 이름이 '희락관'으로 변경되면서[1], 일본 영화 중심으로 상영 방침이 되돌아갔다. 특히 당시 인기가 높았던 오노에 마츠노스케 주연 영화를 비롯한 닛카츠 작품이 주로 상영되었고[1], 1930년대에는 닛카츠가 직접 극장을 경영하며[5] '닛카츠 직영관'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당시 영화 상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변사의 활동도 활발했으며, 서양 영화 전문 변사와 일본 영화 전문 변사가 나뉘어 활동하기도 했다.[1][2]

극장은 청계천 이남의 일본인 상권 지역, 소위 남촌(南村)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주로 일본인 관객들이 이용했다. 좋은 입지 덕분에 경성부 내에서도 번성하는 극장 중 하나였으며[1], 관객 정원은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었지만 대략 1,000명 내외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2][4][7]

4. 1. 상영 영화



개관 초기 유락관 시절에는 닛타 상회가 닛카츠와 계약을 맺고 조선 내 대리점 역할을 수행하며 닛카츠가 배급하는 영화를 주로 상영했다.[1] 여기에는 닛카츠가 직접 제작한 영화뿐만 아니라 수입한 파라마운트 영화 등도 포함되었다.[1] 또한 초창기에는 일본의 송죽영화(松竹映畵, 쇼치쿠), 대도영화(大都映畵)의 작품도 상영하였다. 특히 명치좌가 건립되기 전까지는 쇼치쿠의 작품을 주로 상영했다.

1917년 하야카와 코슈가 인수하면서 극장은 일본 영화와 서양 영화를 함께 상영하던 방식에서 서양 영화 전문 상영관으로 개편되었다.[1] 같은 해 4월 6일부터 8일까지는 이탈리아의 대작 영화 『카비리아』 (감독 Giovanni Pastrone|조반니 파스트로네ita)를 특별 상영하기도 했다.[13] 이 상영을 위해 도쿄에서 고바야시 상회가 흥행시킨 작품을 가져왔으며[12], 천연색활동사진(천활) 소속의 변사 미야하라 타모츠와 하야카와 연예부 소속 변사 우스다 한쿄, 난고 코리키 등이 초빙되어 영화 해설(활변)을 맡았다.[13] 또한 당시 도쿄 긴자의 금춘관에서 인기를 끌던 블루버드 영화를 도입하고, 극장 내 반주 악단에 본격적인 오케스트라를 도입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1]

1919년 만국활동사진 주식회사(만활)와 닛카츠의 공동 경영 체제가 되면서 극장 이름이 '''희락관'''으로 바뀌었고, 다시 일본 영화 중심으로 상영 방침이 변경되었다.[1] 당시 오노에 마츠노스케 주연 영화 등 닛카츠 작품의 인기가 높았고, 일본인 거주 지역에 위치한 특성상 일본 영화 수요가 커서 희락관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1] 이 시기에 서양 영화 전문 변사들은 황금관으로 자리를 옮겼다.[1]

1920년대에는 닛카츠의 조선 내 주요 배급망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1] 1925년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는 닛카츠 외에도 유니버설 영화, 파테, 폭스 영화의 작품들도 상영했으며, 8명의 변사와 8명의 악사가 활동했다.[2] 1927년에는 닛카츠와 유니버설 영화 중심으로 상영작이 편성되었다.[3]

1930년대에 들어서는 닛카츠가 희락관을 직접 경영하게 되면서[5] 닛카츠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이른바 '닛카츠 직영관'으로 알려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2년 전시 통제 정책에 따라 영화 배급사가 설립되어 모든 영화관이 홍계 또는 백계로 나뉘어 영화를 배급받았으나, 희락관이 어느 계통에 속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7]

4. 2. 문화적 특징



개관 당시 유락관은 닛카츠와 계약을 맺고 닛카츠가 배급하는 자사 제작 영화나 수입한 파라마운트 픽처스 영화를 주로 상영했다.[1]

1917년 하야카와 코슈(하야카와 마스 타로)가 인수한 후에는 내외장을 개수하여 일본 영화와 서양 영화를 함께 상영하던 방식에서 서양 영화 전문 상영관으로 바꾸었다.[1] 같은 해 4월 6일부터 3일간은 "유락관 명예 흥행"이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 영화의 대작 『카비리아』 (1914년 작)를 특별 상영했다.[13] 이 상영을 위해 천연색활동사진(천활) 소속 변사 미야하라 타모츠를 초빙했으며, 하야카와 연예부 소속의 우스다 한쿄, 난고 코리키 등도 변사(활변)로 나섰다.[13] 또한 하야카와는 유락관과 자신이 함께 경영하던 황금관(후의 국도극장)에 본격적인 오케스트라를 도입하고, 당시 도쿄 긴자의 금춘관에서 인기를 끌던 블루버드 영화를 상영했으며, 여러 변사가 이어 설명하는 연속 활변 방식을 도입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다.[1] 이러한 노력 덕분에 당시 유락관과 황금관은 경성부 내 다른 영화관들을 압도하는 인기를 누렸다.[1]

그러나 1919년 하야카와의 경영 실패 후 만국활동사진 주식회사(만활)와 닛카츠의 공동 경영 체제로 바뀌면서 극장 이름도 '''희락관'''으로 변경되었다.[1] 이때부터 희락관은 다시 일본 영화 중심으로 상영 정책을 바꾸었다. 당시 오노에 마츠노스케 주연 영화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었고, 희락관이 원래 일본인 거주 지역에 세워진 일본인 대상 영화관이었기 때문에 일본 영화에 대한 수요가 컸다. 이로 인해 희락관은 다시 높은 인기를 회복했다.[1] 반면, 기존에 활동하던 서양 영화 전문 변사였던 난고 코리키 등은 황금관으로 자리를 옮겼다.[1]

1920년대에 들어서도 닛카츠 영화를 중심으로 상영했으며, 1925년 기록에 따르면 닛카츠 외에도 유니버설 픽처스, 파테, 폭스 필름 (현 20세기 스튜디오) 등 다양한 회사의 작품을 상영했다. 당시 희락관에는 8명의 변사와 8명의 악사를 포함해 총 25명의 직원이 있었다.[2] 1927년에는 상영 영화가 닛카츠와 유니버설 픽처스로 축소되었다.[3]

참조

[1] 간행물 京城における帝国キネマ演芸の興亡 : 朝鮮映画産業と帝国日本の映画興行 https://hdl.handle.n[...] 関西大学大阪都市遺産研究センター
[2] 연감 연감
[3] 총람 총람
[4] 총람 총람
[5] 총람 총람
[6] 웹사이트 昭和7年の映画館 朝鮮 41館 http://homepage1.nif[...] 2013-11-18
[7] 연감 연감
[8] 연감 연감
[9] 간행물 이
[10] 웹사이트 명동밀리오레 http://www.migliore.[...] 2013-11-18
[11] 웹사이트 Cabiria https://www.imdb.com[...] 2013-11-18
[12] 서적 佐藤
[13] 광고 『[[カビリア]]』공개광고 [[毎日新報|毎日申報]] 1917-04-06
[14] 문서 1910년에 세워졌으며 해당 건물은 현재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건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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