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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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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동 평정은 손책이 아버지 손견의 죽음 이후 원술에게 의탁했다가 독립하여 양주 일대를 평정한 일련의 전투를 의미한다. 손책은 원술과의 갈등을 겪고 독립을 결심한 후, 유요, 왕랑, 엄백호, 산월족 등과 전투를 벌여 강동 지역을 장악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손책은 세력을 확장하고, 이후 손권이 동오를 건국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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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평정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후한 말의 혼란
시기194년 ~ 199년
장소양주 일대, 강남 지역
원인불명
결과손책의 승리, 동오 건국 기반 마련
교전 세력
교전 주체 1손책
교전 주체 2다양한 군벌, 산월
지휘관 및 지도자
손책 군손책
주유
오경
손분
손보
정포
한당
황개
주태
능조
장흠
동습
진무
여몽
장소
장굉
반손책 세력유요
엄백호
허공
왕랑
육강
유훈
엄우†
황룡라오†
제융†
태사자
병력 규모
손책 군약 25,000명
반손책 세력불명
피해 규모
손책 군불명
반손책 세력불명

2. 배경

191년 양양 전투에서 아버지 손견형주 자사 유표에게 전사하자, 그의 장남 손책은 아버지의 옛 주군이었던 원술에게 의탁하게 되었다. 손책은 원술 휘하에서 활동하며 여강태수 육강 등을 격파하는 공을 세웠으나, 원술은 손책에게 약속했던 태수 자리를 주지 않고 자신의 측근인 진기나 유훈을 임명하는 등 거듭 신의를 저버렸다.[1]

이러한 원술의 행태에 실망한 손책은 점차 독립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손견 시절의 장수들인 황개, 한당, 정보를 비롯해 주유, 장소, 장굉 등 뛰어난 인재들을 규합하며 세력을 키웠다. 또한 주치여범 등의 도움을 받아 군사를 정비하고, 아버지 손견이 얻었던 전국옥새를 담보로 원술에게서 병력과 군마를 빌려 독립의 기반을 마련했다.

당시 손책이 목표로 삼은 양주 지역은 후한 조정에서 임명한 자사 유요와 수춘을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원술이 대립하는 혼란한 상황이었다. 유요는 명목상 양주 자사였으나 실제로는 장강 이남의 일부 군만을 통제하고 있었고, 손책의 외삼촌이자 원술 휘하에 있던 오경 등을 축출하며 원술과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손책에게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기회를 제공했다.

2. 1. 손견의 죽음과 손책의 원술 의탁

191년, 양양 전투에서 아버지 손견형주 자사 유표와의 전투 중 사망하자, 당시 16세였던 장남 손책은 일시적으로 양주 강도로 이주했다가 아버지의 옛 주군이었던 군벌 원술에게 의탁하게 되었다.[1] 손견의 군대는 대부분 원술에게 흡수된 상태였고, 손책의 곁에는 여범, 일족인 손하 등 소수만이 남아 있었다.

192년, 손책은 원술에게 아버지의 군대를 돌려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원술의 권유로 외삼촌이자 원술 휘하의 단양태수였던 오경에게 의지하여 군사를 일으키려 했지만, 단양의 산적 두목 조랑에게 크게 패배하여 군사가 거의 전멸하는 위기를 겪었다. 이후 오경, 손하, 여범 등과 힘을 합쳐 조랑을 격파했다.

194년, 손책은 다시 원술에게 가서 부친의 군대를 요청했고, 이번에는 원술이 이를 받아들여 주치, 황개, 한당, 정보 등 손견 군의 핵심 장수들을 포함한 1,000여 명의 병력을 얻게 되었다. 원술은 처음 손책에게 구강태수 자리를 약속했지만, 곧 말을 바꾸어 진기를 임명했다.

이후 원술은 서주 공격을 계획하며 여강태수 육강에게 군량 3만 ''곡''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원술은 손책에게 육강 공격을 명하며 "진기를 임명한 것은 내 실수였다. 네가 육강을 물리치면 여강은 진실로 너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다시 약속했다.[1] 그러나 손책이 육강을 격파하고 돌아오자, 원술은 또다시 약속을 어기고 자신의 부하 유훈을 여강태수로 임명했다.

거듭되는 원술의 약속 불이행에 크게 실망한 손책은 점차 독립을 모색하게 되었다. 한편 손책은 주유, 장소, 장굉 등 뛰어난 인재들을 얻었으며, 릉조, 주태 등 오 지역 명망가들의 지지도 확보하며 세력 기반을 다졌다. 결국 손책은 주치여범의 도움을 받아 군사를 정비하고, 원술에게 전국옥새를 담보로 주어 군사 4,000명과 말 500필을 빌려 강동 공략 준비에 나섰다.

당시 양주는 한나라 조정이 임명한 자사 유요가 명목상 관리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단양, , 회계군, 예장군 등 4개 군만을 장악하고 있었다. 장강 북쪽의 구강군여강군은 수춘을 본거지로 삼은 원술의 세력권이었다. 유요는 원술과 적대 관계가 되면서, 원래 자신의 편이었으나 원술에게 관직을 받은 오경과 손분(손책의 사촌)을 곡아현에서 축출했다. 오경과 손분은 역양(歷陽)으로 물러나 원술의 지원을 받아 반격을 준비했고, 유요는 번능우미를 횡강진(橫江津), 장영을 당리구(當利口)에 배치하여 방어를 강화했다. 원술은 혜구를 양주 자사로 삼고 오경, 손분과 함께 유요를 공격하게 했으나 1년 넘게 교착 상태에 있었다. 손책이 강동으로 진출하려던 시점은 바로 이러한 상황이었다.

2. 2. 원술과의 갈등과 독립 시도

191년 양양 전투에서 아버지 손견이 유표에게 전사하자, 손책원술에게 의탁하게 되었다. 당시 손견의 군대는 해체되어 원술에게 흡수되었고, 손책은 어머니의 외삼촌인 단양태수 오경에게 의지해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조랑에게 패배하기도 했다.[1]

194년경, 손책은 원술 휘하에서 활동하며 경현의 조랑, 여강태수 육강 등을 격파하는 공을 세웠다. 원술은 손견의 옛 부하 1,000여 명을 손책에게 돌려주었으나, 처음 약속했던 구강태수 자리에 진기를 임명하며 약속을 어겼다.[1] 이후 원술은 서주 공격을 위해 여강태수 육강에게 군량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손책에게 육강 공격을 명했다. 이때 원술은 "진기를 임명한 것은 내 실수였다. 만약 네가 노강을 물리치면, 노강은 진실로 너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여강태수 자리를 다시 약속했다.[1] 그러나 손책이 육강을 정복하자 원술은 또다시 약속을 어기고 유훈을 태수로 임명했다.[1]

거듭되는 원술의 약속 파기에 실망한 손책은 강동에서 자립할 기회를 모색했다. 그는 주치여범 등의 도움으로, 아버지 손견이 낙양에서 얻었던 전국옥새를 원술에게 담보로 맡기고 군사 4,000명과 말 500필을 빌려 독립 기반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 손견 시절의 장수들인 황개, 한당, 정보를 비롯해 주유, 장소, 장굉과 같은 뛰어난 인재들이 합류하면서 그의 세력은 더욱 탄탄해졌다. 손책은 이들을 기반으로 양주 평정을 목표로 삼게 된다.

2. 3. 양주 공략의 시작

아버지 손견191년 양양 전투에서 전사한 후, 손책원술에게 몸을 의탁했다. 손책은 원술 밑에서 조랑, 육강 등을 격파하며 공을 세웠으나, 원술은 약속을 어기고 구강군 태수 자리에 진기를, 여강 태수 자리에는 유훈을 임명하였다.[1]

이에 실망한 손책은 원술에게서 독립할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 손견의 옛 부하인 황개, 한당, 정보를 비롯하여 주유, 장소, 장굉, 릉조, 주태 등 여러 인재를 규합하며 세력을 키웠다.

당시 양주후한 조정에서 임명한 자사 유요가 관할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요의 통치권은 단양, 오, 회계, 예장의 4군에 한정되었고, 양자강 북쪽의 구강군과 여강군은 원술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양주의 원래 치소인 수춘 역시 원술의 본거지였기에, 유요는 곡아현으로 거점을 옮겨야 했다.

유요는 원술이 임명한 단양 태수이자 손책의 외숙인 오경과 손책의 사촌 손분을 축출했다. 오경과 손분은 구강군 역양으로 물러나 원술에게 의탁했다. 유요는 방어를 위해 번능과 우미를 횡강진(현재의 안휘성 화현 동남쪽)에, 장영을 당리구(현재의 안휘성 화현 동쪽)에 주둔시켰다. 이에 원술은 자신의 부하 혜구를 새로운 양주 자사로 임명하고, 오경, 손분과 함께 유요를 공격하게 했으나 1년 넘게 교착 상태가 이어졌다.

3. 전투 과정

손책원술 휘하에서 독립하여 강동 지역 평정에 나섰다. 이 과정은 여러 군벌 및 세력과의 연속된 전투를 통해 이루어졌다.

첫 목표는 양주자사 유요였다. 195년, 손책은 부족한 병력으로 시작했으나 주유 등 유능한 인재들의 합류와 뛰어난 용병술로 장강을 건너 유요의 거점들을 차례로 격파하고 곡아를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손책은 '소패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태사자와 같은 인물들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기도 했다. 유요 세력을 몰아낸 손책은 강동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다음으로 손책은 196년 회계군 태수 왕랑을 공격했다. 손책은 숙부 손정의 계책을 받아들여 왕랑의 주력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배후를 기습하여 승리했다. 왕랑의 항복을 받아낸 손책은 회계군까지 장악하며 세력을 더욱 넓혔다.

이후 손책은 오군엄백호 세력을 정리하고, 단양군 일대의 산월족과 조랑, 태사자 등 잔존 세력을 차례로 격파하거나 흡수하며 강동 지역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특히 태사자를 설득하여 휘하 장수로 삼은 것은 손책의 인재 등용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옛 주군이었던 원술197년 황제를 참칭하자 손책은 그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헌제를 받드는 조조와 연계하여 토역장군에 임명됨으로써 독립 세력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199년에는 원술 사후 그 잔당을 흡수한 여강군 태수 유훈을 계략으로 격파하고 여강군을 차지했다. 이 전투에서 손책과 주유는 대교, 소교 자매를 얻었다. 마지막으로 예장군 태수 화흠의 항복을 받아내고 예장 지역까지 평정함으로써, 손책은 마침내 강동 대부분 지역을 아우르는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3. 1. 유요와의 전투

195년, 손책원술의 허락을 얻어 양주자사 유요 토벌에 나섰다. 처음 천여 명에 불과했던 병력은 역양을 지날 때 5천 명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이때 주유, 장흠, 주태, 진무, 능조 등 훗날 손오의 주축이 되는 인물들이 합류했다.

손책군은 장강을 건너 유요의 부장 장영이 지키던 당리구와 번능, 우미가 지키던 횡강진을 연달아 격파하고, 유요가 있던 우저(牛渚)의 요새마저 함락시켰다. 유요는 곡아로 달아났고, 손책은 대량의 군수 물자를 확보했다. 유요는 부하 장영을 보내 손책에 맞서게 했으나, 평소 손책을 따르고 싶어 했던 주태장흠이 장영의 진영에 불을 지르면서 손책이 승리했다. 손책은 이들을 부하로 받아들였다.

이후 손책은 말릉(현재의 난징)의 설례와 그 남쪽에 진을 친 착융을 공격했다. 먼저 착융을 격파했으나, 착융이 수비를 강화하자 설례를 공격했다. 설례는 도주했지만, 번능과 우미가 다시 군사를 모아 우저를 점령했다. 손책은 즉시 회군하여 이들을 격파하고, 이때 우미와 번능을 단숨에 베어버려 '소패왕(小霸王)'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손책은 다시 말릉성을 공격했다. 성을 지키던 유요의 부하 설례가 쏜 화살에 손책이 부상을 입자, 손책은 자신이 죽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속은 설례, 장영, 진횡 등이 밤에 성을 나왔다가 손책군의 기습을 받았다. 설례는 복병에 걸려 전사했고, 장영은 진무에게, 진횡은 장흠에게 각각 사살되면서 말릉성은 함락되었다. (다른 기록에서는 착융의 부하 유지(于茲)가 손책을 공격했다가 복병에 격파당하고 착융은 도주했다고도 한다.)

한편, 손책이 신정령 근처에서 정찰하던 중, 유요를 돕기 위해 온 태사자와 마주쳤다. 유요는 태사자의 능력을 의심하여 중용하지 않고 정찰 임무만 맡긴 상태였다. 손책과 태사자는 격렬한 일기토를 벌였으나, 양측의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 혼란을 틈타 주유는 유요의 부하 진무를 설득하여 아군으로 만들고, 유요의 본거지인 곡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유요는 거듭된 패배 끝에 예장군으로 달아났고, 손책은 곡아에 입성하여 병사들을 포상하고 안정적인 통치를 펼쳤다. 항복하는 자는 죄를 묻지 않고, 군 입대를 원하는 자는 가족의 부역을 면제해주는 등 관대한 정책을 펴자 10여 일 만에 2만 명이 넘는 병력이 모여들었다.

이후 손책은 단양군 태수를 자칭하며 경현에서 저항하던 태사자를 공격했다. 경현은 쉽게 함락되었고, 태사자는 손책에게 사로잡혔다. 손책은 태사자의 용맹함을 높이 사 직접 포박을 풀어주고 예를 갖춰 대하며 부하로 삼아 절충중랑장에 임명했다. 이로써 손책은 경현 인근 지역까지 평정하며 강동 지역의 기반을 확고히 다졌다. 유요는 예장에서 착융과의 내분 등을 겪다가 결국 병사했다.

3. 2. 왕랑과의 전투 (회계 전투)

196년, 유요를 격파한 손책엄백호회계군 태수 왕랑 토벌을 계획했다. 부하들은 엄백호를 먼저 공격할 것을 권했지만, 손책은 엄백호를 큰 위협으로 보지 않고 왕랑 격파를 우선시했다.[2] 손책은 군대를 이끌고 오군 남쪽을 우회하여 항저우만 남쪽 해안을 따라 회계군으로 진격했다.

손책이 회계로 진군하자, 왕랑 휘하의 공조(功曹) 우번은 손책의 군사력이 강성하니 피해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왕랑은 이를 듣지 않고 항저우만 입구인 전당강 유역으로 군대를 보내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손책은 진군하는 동안 지역 유력가들과의 연줄을 활용하여 지원을 모았는데, 이때 숙부인 손정이 일족을 이끌고 전당에서 손책군에 합류했다.

왕랑군은 전당강 건너편 고릉(固陵)에 주둔하며 견고하게 방어했고, 손책은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돌파하지 못했다. 이에 손정은 왕랑의 주력과 직접 부딪히는 대신, 남쪽으로 수십 리 떨어진 요충지인 사독(查瀆, 현재 샤오산 구 서남쪽)을 먼저 점령하여 왕랑의 배후를 칠 것을 제안했다. 손책은 이 계책을 받아들였다. 그날 밤, 손책은 병력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와 같이 많은 야영지 불을 피워 왕랑군을 속였고, 그 사이 주력 부대는 조용히 강을 건넜다. 손정은 별동대를 이끌고 사독을 점령한 뒤, 고천(高遷, 현재 저장성 사오싱시 서북쪽)에 있는 왕랑의 군영을 기습했다.

기습 소식에 크게 놀란 왕랑은 전 단양태수 주흔 등을 보내 반격하게 했으나, 손책은 이들을 격파하고 주흔의 목을 베었다. 기세가 꺾인 왕랑은 결국 회계성을 버리고 배를 타고 동야(東冶)로 도주했지만, 손책의 끈질긴 추격 끝에 다시 대패하고 결국 항복했다. 왕랑은 항복이 늦어진 점을 솔직히 사죄했고, 손책은 왕랑이 유학적 소양을 갖춘 인물임을 감안하여 처형하지 않고 용서했다.

회계군을 평정한 손책은 스스로 회계 태수를 자칭했으며, 왕랑의 부하였던 우번의 능력을 높이 사 그를 등용했다. 이로써 손책은 강동 지역에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3. 3. 엄백호와의 전투 (오군 전투)

손책왕랑을 격파하자, 조조는 해서(현재 장쑤성 관난현 동남쪽) 출신인 진우(陳瑀)를 오군 태수로 임명하였다.[1] 진우는 비밀리에 엄백호와 동맹을 맺고 손책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1]

그러나 손책은 이를 간파하고 선제적으로 대응에 나섰다. 손책은 여범이 이끄는 수군 부대를 보내 엄백호를 공격하게 하는 동시에, 자신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우를 기습 공격했다.[1] 손책군의 기습에 진우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크게 패하여 북쪽의 원소에게로 도망쳤다.[1] 이로써 오군 지역은 손책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3. 4. 산월족 정벌

198년, 원술단양군(丹陽郡)의 산적 두령 조랑(祖郎)에게 사자를 보내 손책에 대항하면 관직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한편, 앞서 유요에게 패배한 태사자는 현재 우후시 인근 산악 지역으로 피신했다. 그는 스스로 단양군 태수를 자처하며 경현(泾县)으로 거점을 옮겨, 그곳에서 다수의 산월(山越) 세력을 규합했다.

단양군 동쪽 지역을 평정한 손책은 군대를 이끌고 영양현(현재 안후이성 태평현 서쪽)에서 조랑을 공격하여 사로잡았다. 손책은 과거 조랑과의 전투에서 생명의 위협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형하는 대신 부하로 삼는 포용력을 보였다. 이후 손책은 옹리현(현재 안후이성 경현 소재)에서 태사자를 격파하고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손책은 태사자의 능력을 높이 사 그를 풀어주고 진심으로 설득하여 자신의 휘하로 두었다. 손책의 군대가 승전하여 돌아올 때, 태사자와 조랑은 군대의 선두에 서는 영예를 누렸다. 이 승리를 통해 손책은 경현 서쪽의 6개 현을 손에 넣었으며, 강동 지역의 주요 3개 군을 완전히 장악했다.

3. 5. 원술과의 동맹 파기

손책이 강동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동안, 그의 옛 주군이었던 원술은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원술은 회하 유역(현재의 안후이성)을 수년간 점거했지만, 이렇다 할 업적을 세우지 못하고 오히려 백성들을 억압하고 농업 생산을 저해하는 등 실정을 거듭했다. 주변 군벌들과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하들의 간언을 무시하고 황제 즉위를 강행하려 했다.

손책원술의 이러한 움직임을 전해 듣고, 황제 참칭이 가져올 위험성을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원술은 손책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196년 말 혹은 197년 초에 수춘을 수도로 삼아 스스로 황제에 올라 중(仲)나라를 선포했다. 이는 당시 황제였던 헌제에 대한 명백한 반역 행위였으며, 이로 인해 원술은 천하의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혔다.

원술의 황제 참칭을 계기로 손책은 더 이상 그를 따를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공식적으로 관계를 단절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한편, 원술197년 손책의 세력 성장을 견제하고자 자신의 일족인 원윤을 단양태수로 임명하여 파견했다. 하지만 원술의 단양 지배를 용납하지 않은 손책 휘하의 서곤이 원윤을 공격하여 쫓아내면서 원술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손책의 독립 선언은 주변 인물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과거 원술 밑에 있었던 주유노숙과 함께 손책에게 다시 합류했으며, 오경과 손분 등 손책의 친족들도 원술을 버리고 손책 진영에 가담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조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한나라 조정은 원술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여포손책에게 원술 토벌을 명하는 조서를 내렸다. 손책은 이 조서를 받들어 토역장군에 임명되고 오후라는 작위를 받음으로써, 원술과의 결별을 공식화하고 독자적인 세력 확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3. 6. 유훈과의 전투 (여강 전투)

199년 겨울, 원술조조에게 패배하고 병사하자[1] 그의 부하 양홍과 장훈 등은 원술의 가족과 남은 세력을 이끌고 손책에게 귀순하려 했다.[2] 그러나 당시 여강군 태수였던 유훈은 이들을 공격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그 군세를 흡수했다.[2] 손책은 유훈의 세력 확장을 경계하면서도, 겉으로는 값비싼 선물을 보내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척했다.[2]

이후 손책은 유훈에게 오랫동안 노리고 있던 장시성의 상료현(上繚縣)을 함께 공격하자고 제안하며 도움을 요청했다. 유훈의 책사 유엽은 손책의 의도를 의심하며 상료 공격을 만류했지만, 유훈은 병량 확보 등의 이유로 유엽의 조언을 무시하고 상료로 출병했다.

유훈의 군대가 여강을 비우자 손책은 즉시 군대를 둘로 나누어 여강군을 기습했다. 손분과 손보에게는 팽택현(彭澤縣)으로 가서 유훈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했고, 손책 자신은 주유와 함께 정예병 2만 명을 이끌고 여강군의 중심지인 환성(皖城, 현재의 안후이성 첸산현)을 공격했다. 환성은 손책군의 신속한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손책은 유훈의 가족과 부하들, 그리고 원술의 남은 가족들을 사로잡았다. 이때 주유는 환성의 유력 가문이었던 교공(橋公)의 두 딸, 대교와 소교를 사로잡아 언니 대교는 손책의 측실로, 동생 소교는 자신의 측실로 삼았다. 손책은 이술을 새로운 여강태수로 임명하여 환성을 지키게 한 뒤, 사로잡은 여강 주민들을 양쯔강 남쪽 자신의 영토로 이주시켰다. 이후 손책은 유훈의 퇴로를 막고 있는 손분 등과 합류하기 위해 팽택으로 향했다.

한편, 상료 공략에 실패한 유훈은 환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회군하려 했으나, 팽택에서 손분과 손보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길이 막혔다. 유훈은 해혼현(海昏縣)을 기습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하고, 결국 양쯔강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여 서새산(西塞山) 인근에 진을 치고 유표강하군 태수 황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황조는 아들 황사(黃射)에게 수군 5천 명을 주어 유훈을 돕게 했다. 그러나 손책은 손권, 주유 등과 함께 유훈과 황사의 연합군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손책군은 2천 명 이상의 적군을 사살하고 1천 척 이상의 배를 노획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유표의 장수 둘이 전사했고, 황조의 가족과 부하 다수가 사로잡혔다. 하지만 손책군 역시 피해가 있어, 손책의 사촌 서곤이 이 전투 중에 전사했다.

결국 유훈은 완전히 패배하여 의지할 곳을 잃고 북쪽으로 도망쳐 조조에게 귀순했고, 조조는 그를 열후에 봉했다. 손책은 유훈의 수군을 흡수하여 세력을 더욱 강화하고, 이 기세를 몰아 황조를 토벌하기 위한 준비에 나섰다.

3. 7. 화흠과의 전투 (예장 전투)

황조와의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손책은 잠시 군을 물리고 예장군(오늘날 난창, 장시 일대)을 먼저 평정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았다.[1]

손책은 먼저 우번을 예장태수 화흠에게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2] 다른 기록에서는 유반을 보내 화흠을 설득했다고도 한다. 노련한 관료였던 화흠은 결국 손책에게 항복했고, 손책은 그를 존경하는 손님처럼 정중하게 대우했다.

예장을 확보한 손책은 이 지역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조치를 단행했다.

인물조치지역/대상
(새로운 태수)여릉 태수로 임명동지 견제 (스스로 여릉 태수를 자칭함)
주유동지 세력 궤멸여릉 (동지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파견)
한당, 장흠, 주태현령으로 임명예장군 내 현 (반란 진압 목적)
여범반란 세력 진압팽양
주유반란 세력 진압파릉
태사자예장 서부 도위로 임명유표 세력 견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손책은 강동과 강남의 대부분 지역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2]

4. 결과 및 영향

손책강동 지역을 평정하여 강남의 양주 일대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의 뛰어난 능력은 오군 태수였던 허공에게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허공은 손책의 용맹함이 항우에 버금가며, 그대로 두면 세상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라며 조정에 그를 중앙으로 소환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손책은 허공을 책망하고 처형했다.

200년 여름, 손책은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황조를 다시 공격했다. 이때 광릉군진등엄백호의 잔당과 손잡고 오군을 기습하려 했다. 손책황조를 격파한 후 진등을 처리하기 위해 돌아왔으나, 군대의 보급을 기다리며 단도현에 잠시 머물렀다. 그 사이 손책은 부하 몇 명과 사냥을 나갔다가, 말이 빨라 부하들과 떨어져 혼자 있게 되었다. 이때 앞서 처형했던 허공의 옛 부하 세 명에게 매복 공격을 당했다. 부하들이 도착하여 암살자들을 처치하기 전에 손책은 화살에 뺨을 맞는 중상을 입었고, 며칠 후 결국 그 상처로 사망했다.

손책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의 동생 손권이 뒤를 이어 강동에서 형이 정복한 영토를 기반으로 유산을 물려받고 세력을 확장했다. 손권은 이 기반 위에서 훗날 삼국 시대에 동오를 건국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다. 결국 손책의 강동 평정은 손권이 동오를 세우는 결정적인 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5. 평가

손책의 강동 평정은 매우 짧은 기간 동안 광대한 강동 지역을 장악한 군사적 성공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는 손책 개인의 뛰어난 용맹과 군사적 능력, 그리고 과감한 결단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1] 원술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마련했으며, 당시 혼란했던 강동 지역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안정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 과정을 통해 확보된 인적, 물적 자원은 훗날 손권오나라를 건국하고 삼국시대의 한 축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다.[2] 손책의 강동 평정은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다진 중요한 사건으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급격한 세력 확장 과정에서 강동 지역 토착 호족들과의 갈등이 깊어졌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는 손책의 리더십에 대한 도전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그의 이른 죽음과 이후 손권 시대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6. 대중문화 속의 강동 평정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진 삼국무쌍''에서는 '강동 평정' 또는 '강동 전투'라는 이름의 플레이 가능한 스테이지로 등장한다.


  • ''진 삼국무쌍 3''에서는 다른 군벌인 왕랑엄백호보다 먼저 유요를 격파할 경우, 플레이어가 태사자를 항복시킬 수 있다.
  • ''진 삼국무쌍 5''에서는 유요가 후퇴한 뒤 태사자가 적의 지휘관으로 등장한다. 플레이어가 태사자를 격파하면 그는 손책의 편에 합류하게 된다. 이 버전에는 손권이 적의 요새에 갇히고 플레이어가 그를 구출해야 하는 특별 이벤트도 포함되어 있다. 만약 플레이어가 주태로 플레이하여 손권을 구출하면, 주태에게 감사를 표하는 손권의 대화 장면(컷신)이 나온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6
[2] 서적 Sanguozhi vol.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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