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되어 켈트족, 로마 제국의 지배를 거쳐 중세 시대에 독립적인 봉건 공국들로 분열되었다. 15세기 부르고뉴 공국의 지배 아래 번영을 누렸으며, 1549년 네덜란드 17개 주로 통합되었다. 이후 스페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았으며, 브라반트 혁명을 거쳐 1830년 독립했다. 독립 후 레오폴 2세 치하에서 콩고를 식민지로 삼아 고무 생산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지만, 콩고 자유국에서 자행된 만행으로 비판을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침략을 받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독일의 점령을 겪었다. 전후에는 유럽 연합의 창립 멤버로 경제적 부흥을 이루었지만, 콩고의 독립, 왕실 문제, 언어 분쟁,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1970년 이후 연방 국가로 개편되었으며, 2011년에는 여섯 번째 국가 개혁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모색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벨기에의 역사 -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는 1482년부터 1795년까지 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포함하는 지역으로, 부르고뉴 공작령 상속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았으나 스페인의 가톨릭 박해와 전제정치로 80년 전쟁을 겪으며 북부 7개 주는 독립하고 남부 지역은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벨기에의 역사 - 워싱턴 회담 워싱턴 회담은 제1차 세계 대전 후 미국 주도로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9개국 국제 회의로, 해군 군비 제한, 태평양 지역 질서 재편, 중국 문제 등을 논의하여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등 일련의 조약을 체결하고 만주사변 이전까지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규정하는 워싱턴 체제를 성립시켰다.
벨기에의 역사
개요
레오 벨기쿠스
국가
벨기에
별칭
유럽의 조종석
역사
선사 시대
스피엔느의 신석기 시대 플린트 광산: 기원전 4300–2200년
고대
벨가이족, 에부로네스족 & 트레베리족: ~ 기원전 51년 갈리아 전쟁: 기원전 58–50년 암비오릭스의 반란: 기원전 54–53년 로마 통치: 기원전 51년 – 서기 500년경
프랑코-플랑드르 전쟁: 1297–1305년 부르고뉴 통치: 1384–1482년 리에주 전쟁: 1465–68년 합스부르크 통치: 1482–1556년
근세 시대
북방 르네상스: 15세기–16세기 스페인 통치: 1556–1714년 네덜란드 17주: 1549–81년 네덜란드 반란: 1568–1648년 오스트리아 통치: 1714–93년 브라반트 혁명: 1789–90년 리에주 혁명: 1789–91년 프랑스 통치: 1793–1815년
19세기
네덜란드 통치: 1815–30년 벨기에 혁명: 1830–31년 레오폴 1세 통치: 1831–65년 런던 조약: 1839년 레오폴 2세 통치: 1865–1909년 학교 전쟁: 1879–84년 콩고 자유국: 1885–1908년
20세기와 21세기
벨기에령 콩고: 1908–60년 알베르 1세 통치: 1909–34년 제1차 세계 대전: 1914–18년 독일 침공: 1914년 만행: 1914년 독일 점령: 1914–18년 루안다-우룬디: 1922–62년 레오폴 3세 통치: 1934–51년 제2차 세계 대전: 1940–45년 벨기에 전투: 1940년 독일 점령: 1940–44년 홀로코스트: 1941–44년 왕실 문제: 1944–50년 보두앵 통치: 1951–93년 알베르 2세 통치: 1993–2013년 필리프 통치: 2013년~
현재의 벨기에 지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원시 부싯돌 연장은 대략 25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7] 남부 벨기에와 림뷔르흐의 아르덴 동굴에서는 무스티에 문화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페서에서는 8,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가장 오래된 소나무 배가 발견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부싯돌 광산이었던 스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석기 시대 후반(기원전 3300년 ~ 2000년)의 비커 문화는 거석, 개인 매장 기념물, 목걸이, 바구니, 그릇, 전투 도끼, 단검 등을 남겼다.
벨기에에서 청동기 시대 활동의 첫 징후는 농장과 마굿간들의 흔적과 함께 기원전 175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가 주요 가축이었다. 기원전 500년부터 켈트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여 지중해 세계와 교역을 하였고, 에노주와 아이헨빌전에 있는 전사 족장의 무덤에는 마차, 마구, 청동 무기 등이 있었다. 기원전 150년부터는 최초의 동전이 사용되었다.
벨기에 최초의 주민들은 벨가이족 (오늘날 벨기에의 기원)이었다. 이들은 갈리아족 혹은 켈트족이 유럽의 상당한 지역을 덮었으며 로마 제국 점령 당시 북부 갈리아에 살았다. 벨기에 영토에서는 1829-30년 엥기스 등지에서 네안데르탈인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일부는 기원전 1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7]
2. 1. 구석기 시대
현재 벨기에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원시 부싯돌 연장들은 대략 250,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7]무스티에 문화의 흔적은 남부 벨기에와 림뷔르흐의 아르덴 동굴에서 찾아볼 수 있다. 8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가장 오래된 선박인 파낸 소나무 배가 페서에서 발견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부싯돌 광산이었던 스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벨기에 영토에서는 1829-30년 엥기스와 다른 지역에서 네안데르탈인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일부는 기원전 1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7]
북유럽에서 가장 초기의 신석기 시대 농업 기술인 LBK 문화는 동남유럽에서 시작되어 벨기에 동부 지역까지 북서쪽으로 확장되었다.[8] 이 문화는 기원전 5000년경 벨기에 동부의 에스베 지역에서 확장을 멈추었다. 벨기에의 LBK는 마을 주변에 방어벽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9][10]
"림부르크 도기"와 "라 호게트 도기"는 프랑스 북서부와 네덜란드까지 퍼져나간 양식인데, 때때로 이러한 기술은 원래 LBK 농업 인구 외에 도기 기술이 확산되어 수렵 채집인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11] 벨기에 중부 왈로니아에서 발견된 약간 늦게 시작된 신석기 문화는 "Groupe de Blicquy"로, LBK 정착민의 분파를 나타낼 수 있다. 이 지역의 주목할 만한 고고학 유적지로는 스피엔느의 신석기 시대 부싯돌 광산이 있다.[9]
벨기에의 농업은 처음에는 영구적으로 정착하지 못했다. LBK와 Blicquy 문화가 사라지고, 새로운 농업 문화인 미헬스베르크 문화가 나타나 널리 퍼지기까지 오랜 공백기가 있었다. 스위프터반트 문화의 수렵 채집인들은 벨기에 북부의 모래땅에 남아 있었지만, 농업과 도기 기술의 영향을 점점 더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9]
기원전 3천년과 4천년 후반에 플란데런 전체 지역에서는 인간 거주의 증거가 상대적으로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12] 센-우아즈-마른 문화는 아르덴 지방으로 퍼져나가 그곳의 거석 유적(예: 웨리스)과 관련이 있지만, 벨기에 전역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북쪽과 동쪽의 네덜란드에서는 반정주 문화 집단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른바 Vlaardingen-Wartburg-Stein 복합체로, 위에서 언급한 Swifterbant와 Michelsburg 문화에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다.[13]
2. 2. 신석기 시대
현재 벨기에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원시 부싯돌 연장들은 대략 250,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7] 남부 벨기에와 림뷔르흐의 아르덴 동굴에서 무스티에 문화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페서에서는 8,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가장 오래된 소나무 배가 발견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부싯돌 광산이었던 스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석기 시대 후반(기원전 3300년 ~ 2000년)의 비커 문화는 거석과 개인 매장 기념물, 목걸이, 바구니, 그릇, 전투 도끼, 단검 등을 남겼다.
북유럽 최초의 신석기 시대 농업 기술인 선형 도기 문화(LBK 문화)는 동남유럽에서 시작되어 벨기에 동부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이 문화는 기원전 5000년경 벨기에 동부 에스베 지역에서 확장을 멈추었다. 벨기에의 LBK는 마을 주변에 방어벽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8][9][10]
"림부르크 도기"와 "라 호게트 도기"는 프랑스 북서부와 네덜란드까지 퍼져나간 양식인데, 이 기술들은 LBK 농업 인구 외에 도기 기술이 확산되어 수렵 채집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있다.[11] 벨기에 중부 왈로니아에서 발견된 "Groupe de Blicquy"는 LBK 정착민의 분파를 나타낼 수 있다. 이 지역의 주목할 만한 고고학 유적지로는 스피엔느의 신석기 시대 부싯돌 광산이 있다.[9]
벨기에의 농업은 처음에는 영구적으로 정착하지 못했다. LBK와 Blicquy 문화가 사라지고, 새로운 농업 문화인 미헬스베르크 문화가 나타나 널리 퍼지기까지 오랜 공백기가 있었다. 스위프터반트 문화의 수렵 채집인들은 벨기에 북부의 모래땅에 남아 있었지만, 농업과 도기 기술의 영향을 점점 더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9]
기원전 3천년과 4천년 후반에 플란데런 전체 지역에서는 인간 거주의 증거가 상대적으로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12] 센-우아즈-마른 문화는 아르덴 지방으로 퍼져나가 그곳의 거석 유적(예: 웨리스)과 관련이 있지만, 벨기에 전역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북쪽과 동쪽의 네덜란드에서는 반정주 문화 집단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른바 Vlaardingen-Wartburg-Stein 복합체로, 위에서 언급한 Swifterbant와 Michelsburg 문화에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다.[13] 이러한 패턴은 후기 신석기 시대와 초기 청동기 시대까지 이어진다. 신석기 시대 후반에는 네덜란드 남부에서 끈무늬 토기와 종배 문화의 증거가 발견된다.
2. 3. 청동기 및 철기 시대
현재 벨기에 지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원시 부싯돌 연장은 약 250,000년 전의 것이다.[7] 남부 벨기에와 림뷔르흐의 아르덴 동굴에서는 무스티에 문화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엥기스 등 여러 지역에서는 기원전 10만 년 전의 네안데르탈인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다.[7]
페서에서는 8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가장 오래된 선박인 파낸 소나무 배가 발견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부싯돌 광산이었던 스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석기 시대 후반(기원전 3300년 ~ 2000년)의 비커 문화는 거석과 개인 매장 기념물, 목걸이, 바구니, 그릇, 전투 도끼, 단검 등을 남겼다.
북유럽 최초의 신석기 시대 농업 기술인 선형 도기 문화(LBK 문화)는 동남유럽에서 시작되어 벨기에 동부 지역까지 확장되었다. 기원전 5000년경 벨기에 동부의 에스베 지역에서 확장이 멈춘 이 문화는 마을 주변에 방어벽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8][9][10]
프랑스 북서부와 네덜란드까지 퍼져나간 "림부르크 도기"와 "라 호게트 도기" 양식은 LBK 농업 인구 외에 수렵 채집인에게 도기 기술이 확산된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11] 벨기에 중부 왈로니아의 "Groupe de Blicquy"는 LBK 정착민의 분파로 추정되며, 스피엔느의 신석기 시대 부싯돌 광산이 이 지역의 주목할 만한 유적지이다.[9]
벨기에의 농업은 초기에 영구 정착하지 못하고, LBK와 Blicquy 문화가 사라진 후 미헬스베르크 문화가 나타나기까지 오랜 공백기가 있었다. 스위프터반트 문화의 수렵 채집인들은 벨기에 북부 모래땅에 남아 농업과 도기 기술의 영향을 점차 받았다.[9]
기원전 3천년과 4천년 후반, 플란데런 지역에서는 인간 거주 증거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12] 센-우아즈-마른 문화는 아르덴 지방의 거석 유적(웨리스 등)과 관련이 있지만, 벨기에 전역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다. 북쪽과 동쪽 네덜란드의 Vlaardingen-Wartburg-Stein 복합체는 Swifterbant와 Michelsburg 문화에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는 반정주 문화 집단으로 추정된다.[13] 이러한 패턴은 후기 신석기 시대와 초기 청동기 시대까지 이어진다. 신석기 시대 후반에는 네덜란드 남부에서 끈무늬 토기와 종배 문화의 증거가 발견된다.
벨기에에서 청동기 시대 활동의 첫 징후는 농장, 마굿간 흔적과 함께 기원전 175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가 주요 가축이었다. 유럽의 세 가지 문화(Urnfield 문화, 할슈타트 문화, 라텐 문화)가 순차적으로 도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모두 인도유럽어족과 관련이 있다. 기원전 500년부터 켈트족 부족들이 정착하여 지중해 세계와 교역했고, 에노주와 아이헨빌전의 전사 족장 무덤에는 마차, 마구, 청동 무기 등이 있었다. 기원전 150년경부터 최초의 동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3. 켈트 및 로마 시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 따르면, 기원전 54년 벨가이족은 카이사르 군대의 침략을 받았다. 카이사르는 벨가이족을 "갈리아 전체 부족 중 가장 용감한" 종족으로 묘사했으며, 북부와 동부에서 온 게르만족의 유입을 언급했다. 오늘날 벨기에는 갈리아 벨기카라는 로마 제국의 속주로 번성했으며, 네메타쿰 (아라스), 디보두룸 (메츠), 아두아투카 (통에런), 두로코르투룸 (랭스) 등의 도시가 있었다. 북동쪽에는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라는 이웃 속주가 있었다.
3세기 중반, 되살아나는 게르만족과 바다의 침식으로 로마군은 이 지역 요새를 포기했다. 율리아누스는 355년과 360년 사이에 저지대 국가에서 전쟁을 벌여 라인강 국경을 강화했다. 406년 ~ 407년 게르만족의 대규모 침입으로 로마의 점령은 끝나고, 프랑크족에게 국경 수비 임무가 주어졌다.
"벨기에"는 원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사용한 라틴어 용어로,[4] 현재는 대부분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지역을 지칭하며, 벨가이 군사 동맹을 통치하는 부족들이 살았다.[5][6] 로마 통치하에서 이 지역은 현대 벨기에의 해안 플랑드르 지역까지 뻗어 있는 ''벨기카 세군다'' 지방에 해당했다. 후기 로마 시대와 중세 시대에는 벨기에라는 용어가 로마의 ''벨기카 프리마''와 그 후계인 상부 로타링기아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이는 독일, 룩셈부르크, 프랑스의 모젤 지역에 해당한다.
3. 1. 갈리아 벨기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 지역에 도착했을 때, 그의 저서인 ''갈리아 전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벨기에, 프랑스 북서부, 독일 라인란트의 주민들은 벨가이로 알려졌으며, 이들은 갈리아의 북부로 여겨졌다. 룩셈부르크 지역, 아를론 주변의 벨기에 룩셈부르크주 일부를 포함하여, 트레베리족이 거주했다.
북쪽의 벨가이와 남쪽의 켈트족, 그리고 라인강 건너편의 게르만족 사이의 정확한 구별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14] 카이사르는 벨가이가 언어, 법, 관습으로 나머지 갈리아와 구분되며, 게르만 조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에 언어학자들은 벨기에 인구의 북부에서 이전에는 인도유럽어족과 관련이 있지만, 켈트어군 및 게르만어군과는 다른 인도유럽어를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제안했다. (벨기에어 및 노르트베스트블록 참조).[14]
카이사르가 대항한 벨가이 동맹의 지도자들은 현대 프랑스에 있었으며, 수에시오네스, 비로만두이, 암비아니, 그리고 아마도 그들의 이웃들이 있었으며, 그는 이들을 고전 시대의 진정한 "벨기에"로 구별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 벨기에의 영토와 관련하여 그는 벨가이의 북부 동맹인 메나피이, 네르비이, 그리고 ''게르마니 키스르헤나니''가 경제적으로 덜 발달하고 더 호전적이며, 라인강 동쪽의 ''게르마니''와 유사하다고 보고했다. 메나피이와 북부 게르마니는 낮고 가시가 많은 숲, 섬, 늪지대에서 살았고, 벨기에 중부의 네르비이 영토는 기병의 침투를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두꺼운 산울타리로 심어졌다. 이 지역에서는 대규모 정착지와 교역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도 적다.
현대 언어학자들은 "게르만"이라는 단어를 언어를 지칭하는 데 사용하지만, 벨기에의 ''게르마니''조차도 게르만어를 사용했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그들의 부족 및 개인 이름은 분명히 켈트어이다. 고고학자들은 또한 카이사르가 보고한 라인강 동쪽으로부터의 정확한 이주에 대한 증거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더 일반적으로 그의 주석의 정치적 동기 때문에 그를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회의론이 있었다. 그러나 고고학적 기록은 고전 벨기에의 ''게르마니''가 우른필드 문화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비교적 안정적인 인구였으며, 더 최근에 이주한 엘리트 계급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통게렌에 남아있는 로마 시대 성벽, 옛 아투아투카 통그룸
메나피이와 네르비이는 로마 속주인 갈리아 벨기카 내에서 남부 벨가이와 트레베리와 함께 번성했다. 이러한 로마 속주는 ''키비타테스''로 나뉘었으며, 각 키비타테스는 수도를 가지고 있었고, 카이사르가 언급한 주요 부족 집단 중 하나를 나타냈다. 처음에는 통게렌, 즉 퉁그리의 수도만이 현대 벨기에에 있었다. 나중에는 메나피이의 수도가 현대 프랑스의 카셀에서 벨기에의 투르네로 옮겨졌다. 네르비이의 수도는 현대 프랑스의 영토 남부에 있는 바베이에 있었고, 나중에 캉브레로 옮겨졌다. 트레베리의 수도인 트리어는 오늘날 독일에 있다.
통게렌과 이전의 ''게르마니'' 지역을 포함한 이 속주의 북동쪽 모퉁이는 군사화된 라인 국경과 통합되어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15]로 알려진 새로운 속주를 형성했으며, 수도는 콜로니아 아그리피나(독일 쾰른)[15]이었다. 황제 디아클레티아누스는 서기 300년경에 속주를 재구성하여 나머지 벨기카를 ''벨기카 프리마''와 ''벨기카 세쿤다''의 두 속주로 나누었다. 벨기카 프리마는 동부에 위치했으며 트리에를 주요 도시로 가지고 있었고, 벨기에 룩셈부르크주의 일부를 포함했다. 이 지역은 3세기에 서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로마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기독교는 후기 로마 시대에 벨기에에 도입되었으며, 이 지역의 최초의 알려진 주교인 성 세르바티우스는 4세기 중반에 통게렌에서 가르쳤다.
3. 2. 로마 제국의 통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기에서 묘사했듯이, 기원전 54년 벨가이족들은 카이사르의 군대에 의해 침략당했다. 카이사르는 벨가이족들을 "전체 갈리아족들 중에 가장 용감한" 종족들이라고 불렀으며, 북부와 동부에서 온 게르만족들의 도착을 언급했다. 갈리아 벨기카로 알려진, 근대의 벨기에보다 더욱 컸던 오늘날 벨기에는 로마 제국의 지방으로 번성했다. 여기에는 네메타쿰 (아라스), 디보두룸 (메츠), 아두아투카 (통에런)와 두로코르투룸 (랭스) 등 5개의 도시들이 있었다. 북동부에 있는 곳은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의 이웃하는 지방이었다.
서기 120년경의 갈리아 벨기카 로마 속주
카이사르가 이 지역에 도착했을 때, 그의 저서인 ''갈리아 전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벨기에, 프랑스 북서부, 독일 라인란트의 주민들은 벨가이로 알려졌으며, 이들은 갈리아의 북부로 여겨졌다. 룩셈부르크 지역, 아를론 주변의 벨기에 룩셈부르크주 일부를 포함하여, 트레베리족이 거주했다.
북쪽의 벨가이와 남쪽의 켈트족, 그리고 라인강 건너편의 게르만족 사이의 정확한 구별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14] 카이사르는 벨가이가 언어, 법, 관습으로 나머지 갈리아와 구분되며, 게르만 조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에 언어학자들은 벨기에 인구의 북부에서 이전에는 인도유럽어족과 관련이 있지만, 켈트어군 및 게르만어군과는 다른 인도유럽어를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제안했다. (벨기에어 및 노르트베스트블록 참조).[14]
카이사르가 대항한 벨가이 동맹의 지도자들은 현대 프랑스에 있었으며, 수에시오네스, 비로만두이, 암비아니, 그리고 아마도 그들의 이웃들이 있었으며, 그는 이들을 고전 시대의 진정한 "벨기에"로 구별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 벨기에의 영토와 관련하여 그는 벨가이의 북부 동맹인 메나피이, 네르비이, 그리고 ''게르마니 키스르헤나니''가 경제적으로 덜 발달하고 더 호전적이며, 라인강 동쪽의 ''게르마니''와 유사하다고 보고했다. 메나피이와 북부 게르마니는 낮고 가시가 많은 숲, 섬, 늪지대에서 살았고, 벨기에 중부의 네르비이 영토는 기병의 침투를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두꺼운 산울타리로 심어졌다. 이 지역에서는 대규모 정착지와 교역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도 적다.
현대 언어학자들은 "게르만"이라는 단어를 언어를 지칭하는 데 사용하지만, 벨기에의 ''게르마니''조차도 게르만어를 사용했는지 확실하지 않으며, 그들의 부족 및 개인 이름은 분명히 켈트어이다. 고고학자들은 또한 카이사르가 보고한 라인강 동쪽으로부터의 정확한 이주에 대한 증거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더 일반적으로 그의 주석의 정치적 동기 때문에 그를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회의론이 있었다. 그러나 고고학적 기록은 고전 벨기에의 ''게르마니''가 우른필드 문화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비교적 안정적인 인구였으며, 더 최근에 이주한 엘리트 계급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메나피이와 네르비이는 로마 속주인 갈리아 벨기카 내에서 남부 벨가이와 트레베리와 함께 번성했다. 이러한 로마 속주는 ''키비타테스''로 나뉘었으며, 각 키비타테스는 수도를 가지고 있었고, 카이사르가 언급한 주요 부족 집단 중 하나를 나타냈다. 처음에는 통게렌, 즉 퉁그리의 수도만이 현대 벨기에에 있었다. 나중에는 메나피이의 수도가 현대 프랑스의 카셀에서 벨기에의 투르네로 옮겨졌다. 네르비이의 수도는 현대 프랑스의 영토 남부에 있는 바베이에 있었고, 나중에 캉브레로 옮겨졌다. 트레베리의 수도인 트리어는 오늘날 독일에 있다.
통게렌과 이전의 ''게르마니'' 지역을 포함한 이 속주의 북동쪽 모퉁이는 군사화된 라인 국경과 통합되어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15]로 알려진 새로운 속주를 형성했으며, 수도는 콜로니아 아그리피나(독일 쾰른)[15]이었다. 황제 디아클레티아누스는 서기 300년경에 속주를 재구성하여 나머지 벨기카를 ''벨기카 프리마''와 ''벨기카 세쿤다''의 두 속주로 나누었다. 벨기카 프리마는 동부에 위치했으며 트리에를 주요 도시로 가지고 있었고, 벨기에 룩셈부르크주의 일부를 포함했다. 이 지역은 3세기에 서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로마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기독교는 후기 로마 시대에 벨기에에 도입되었으며, 이 지역의 최초의 알려진 주교인 성 세르바티우스는 4세기 중반에 통게렌에서 가르쳤다.
4. 중세 초기
서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게르만족이 군사력을 장악하고 왕국을 세웠다. 옛 메나피족의 땅이었던 해안 플랑드르는 "색슨 해안"의 일부가 되었다. 벨기에 북부 내륙에서는 라인강 삼각주에서 온 프랑크족이 4세기에 톡산드리아에 다시 정착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왈로니아는 더 로마화된 상태로 남아 있었지만, 결국 5세기에 프랑크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프랑크족은 로마 군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로마화된 프랑크족 메로빙거 왕조는 결국 프랑스 북부를 장악했다.
중세 시대에, 오래된 로마의 ''자치 도시''는 기독교 교구의 기반이 되었고, 현대 벨기에의 핵심을 이루는 교구들(투르네, 캉브레, 리에주)은 로마화된 문화를 유지한 가장 북쪽의 대륙 지역이었다. 현대 벨기에 언어 경계는 프랑크족과 로마화된 인구의 접촉 지점이었던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초기 중세 시대 동안, 현재의 벨기에 북부(플랑드르)는 게르만어군 사용 지역이었으며, 남부에서는 사람들이 로마화된 상태로 남아 속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를 사용했다.
13세기와 14세기에 많은 도시들이 독립을 얻어 한자 동맹과 교역을 하였고, 고딕 건축 양식의 성당과 시청들이 건설되었다.
891년 아르눌푸스 카린티아이는 루뱅 근처에서 바이킹을 물리쳤다. 프랑크족의 영토는 신성 로마 제국과 프랑스로 나뉘었다. 스헬더강 서쪽의 플란데런 백국 일부는 중세 시대에 프랑스에 속했지만, 플란데런 백국과 저지대 국가의 나머지 지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다.
11세기와 12세기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효과적인 통제력을 잃으면서, 현재 벨기에에 해당하는 지역은 독립적인 봉건 국가들로 나뉘었다. 여기에는 플란데런 백국, 림뷔르흐 공국, 룩셈부르크와 리에주 교구가 포함된다. 이들은 독일 왕 (신성 로마 제국 황제)과 봉건 관계를 맺었다. 플란데런 백작은 독일 왕에게 복종하는 동부 지역과 함께, 프랑스 왕의 가신으로서 대부분의 영토를 소유했다.
성 세르바티우스, 통게렌의 주교이자 이 지역에서 알려진 최초의 기독교 인물 중 한 명. 16세기 유물함.
중세 시대에 옛 로마의 ''자치 도시''는 기독교 교구의 기반이 되었고, 현대 벨기에의 핵심을 이루는 교구들(투르네, 캉브레, 리에주)은 로마화된 문화를 유지한 가장 북쪽의 대륙 지역이었다. 현대 벨기에 언어 경계는 프랑크족과 로마화된 인구의 접촉 지점이었던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서로마 제국 멸망 후, 게르만족이 군사력을 장악하고 왕국을 형성했다. 옛 메나피족 영토인 해안 플랑드르는 "색슨 해안"의 일부가 되었다. 벨기에 북부 내륙에서는 라인강 삼각주의 로마 국경에서 온 프랑크족이 4세기에 톡산드리아에 정착했다. 왈로니아는 로마화된 상태를 유지했지만, 5세기에 프랑크족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 군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로마화된 프랑크족 메로빙거 왕조는 북부 프랑스를 장악했다. 이 왕조의 클로비스 1세는 네우스트리아를 정복하고, 벨기에를 포함한 프랑크족 영토 아우스트라시아로 진출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종교 개종을 이끌었다.
7세기경 저지대 국가의 남부, 주교령 도시와 수도원. 수도원은 더 큰 마을과 심지어 일부 도시가 풍경을 바꾸는 시작점이었다.
카롤링거 왕조는 메로빙거 왕조를 계승했으며, 그 권력 기반은 현대 벨기에 동부 지역에 있었다. 샤를 마르텔이 무어인의 스페인 침공(732년 - 푸아티에)을 격퇴한 후, 샤를마뉴 대왕은 유럽의 거대한 부분을 통치하며 800년에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받았다.
바이킹은 이 시기에 광범위하게 침략했지만, 891년 루벤 전투에서 카린티아의 아르눌프에 의해 격퇴되었다.
프랑크족 영토는 메로빙거와 카롤링거 왕조 하에서 여러 번 분할 및 재통합되었지만, 결국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으로 분할되었다. 스헬데 강 서쪽의 플랑드르 백작령은 중세 시대에 프랑스의 일부가 되었지만, 플랑드르 백작령의 나머지 부분과 저지대 국가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고, 특히 독립 왕국으로 존재했던 하부 로타링기아의 간선 공국에 속했다.
초기 중세 시대 동안, 현재의 벨기에 북부(플랑드르)는 게르만어군 사용 지역이었으며, 남부에서는 사람들이 로마화된 상태로 남아 속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를 사용했다.
11세기와 12세기에 신성 로마 황제와 프랑스 왕이 영토에 대한 통제력을 잃으면서, 현재의 벨기에와 거의 일치하는 영토는 비교적 독립적인 봉건 국가로 분할되었다. 여기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해안 플랑드르 백작령은 중세 후기에 잉글랜드, 프랑스, 독일과의 무역으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였으며, 문화적으로 중요해졌다. 11세기와 12세기 동안, 라인-마스 또는 마스 예술 운동이 이 지역에서 번성하여 중심지를 쾰른과 트리어에서 리에주, 마스트리흐트, 아헨으로 옮겼다.
중세 시대에, 오래된 로마의 ''자치 도시''는 기독교 교구의 기반이 되었고, 현대 벨기에의 핵심을 이루는 교구들(투르네, 캉브레, 리에주)은 로마화된 문화를 유지한 가장 북쪽의 대륙 지역이었다. 현대 벨기에 언어 경계는 이 시기에서 유래하는데, 이 지역은 프랑크족과 로마화된 인구의 접촉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서로마 제국이 권력을 잃으면서, 게르만족이 군사력을 장악했고, 이후 왕국을 형성했다. 옛 메나피족의 영토인 해안 플랑드르는 "색슨 해안"의 일부가 되었다. 벨기에 북부 내륙에서는, 라인강 삼각주의 로마 국경에서 온 프랑크족이 4세기에 톡산드리아에 재정착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왈롱 지역은 더 로마화된 상태로 남아 있었지만, 결국 5세기에 프랑크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프랑크족은 로마 군대에서 중요했으며, 로마화된 프랑크족 메로빙거 왕조는 결국 북부 프랑스를 장악했다. 이 왕조의 가장 유명한 왕인 클로비스 1세는 먼저 로마화된 북부 프랑스를 정복했는데, 이후 네우스트리아라고 불렸고, 그 다음에는 프랑크족 영토인 아우스트라시아로 향했는데, 이는 벨기에의 전부 또는 대부분을 포함했다. 기독교 선교사들은 대중에게 설교를 하고 종교 개종의 물결을 시작했다.
메로빙거 왕조는 카롤링거 왕조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이 왕조의 가족 권력 기반은 현대 벨기에 동부 지역과 그 주변에 있었다. 샤를 마르텔이 무어인의 스페인 침공(732년 - 푸아티에 전투)을 격퇴한 후, 샤를마뉴 대왕은 유럽의 거대한 부분을 그의 통치하에 두었고, 800년에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새로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식을 받았다.
바이킹은 이 기간 동안 광범위하게 습격했지만, 벨기에 지역에서 문제를 일으킨 주요 정착지는 891년 루벤 전투에서 카린티아의 아르눌프에 의해 격퇴되었다.
프랑크족 영토는 메로빙거와 카롤링거 왕조 하에서 여러 번 분할 및 재통합되었지만, 결국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으로 굳게 분할되었다. 스헬데 강 서쪽의 플랑드르 백작령은 중세 시대에 프랑스의 일부가 되었지만, 플랑드르 백작령의 나머지 부분과 저지대 국가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고, 특히 독립 왕국으로 존재했던 하부 로타링기아의 간선 공국에 속했다.
초기 중세 시대 동안, 현재의 벨기에 북부(플랑드르)는 게르만어군 사용 지역이었으며, 남부에서는 사람들이 로마화된 상태로 남아 속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를 사용했다.
11세기와 12세기에 신성 로마 황제와 프랑스 왕이 그들의 영토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력을 잃으면서, 현재의 벨기에와 거의 일치하는 영토는 비교적 독립적인 봉건 국가로 분할되었다.
1302년 금마자 전투의 14세기 삽화. 플랑드르 백작령의 군대가 프랑스 왕국에 대한 명목상의 지배자를 격파했다.
이 시기에 이프르, 브뤼헤, 헨트를 포함한 많은 도시들이 도시 헌장을 획득했다. 한자동맹은 이 지역의 무역을 촉진했고, 이 시기에는 많은 고딕 건축 대성당과 시청이 세워졌다.[16] 13세기부터 신성 로마 황제의 권력이 쇠퇴하면서 저지대 국가는 대체로 자율성을 유지했다. 제국의 보호가 부족하다는 것은 프랑스와 영국이 영향력을 놓고 경쟁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1214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는 부빈 전투에서 플랑드르 백작을 격파하고 프랑스 왕관에 복종하게 했다. 13세기 동안 프랑스의 플랑드르에 대한 지배는 꾸준히 증가했고, 1302년 필리프 4세가 완전한 합병을 시도했을 때 금마자 전투에서 기 백작이 프랑스 기사들을 굴욕시키면서 엄청난 패배를 겪었다. 필리프는 1304년 결정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은 몽생페벨 전투로 끝난 새로운 캠페인을 시작했다. 국왕은 플랑드르에 가혹한 평화 조약을 강요했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섬유 생산 중심지인 릴과 두에의 할양이 포함되었다.
그 후 플랑드르는 1337년 백년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프랑스의 조공국으로 남았다. 저지대 국가에서 파리의 영향력은 해안 항구와 중요한 관계를 유지하고 양모 운송 사업을 지배하게 된 영국에 의해 균형을 이루었다. 플랑드르 천은 여전히 매우 가치 있는 제품으로 남아 있었고, 영국의 양모에 크게 의존했다. 양모 공급의 중단은 항상 직공 길드의 폭동과 폭력으로 이어졌다. 플랑드르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수입을 받았지만,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포도주를 제외하고는 거의 해외에서 구매하지 않았다. 브뤼헤는 한자동맹이 그곳에 사업을 시작한 후 훌륭한 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초창기부터 저지대 국가는 상업 및 제조업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도시에서 지배적인 계급이 되었고, 귀족은 주로 시골 영지에 한정되었다.
특히 부르고뉴 시대(15세기와 16세기) 동안 투르네, 브뤼헤, 이프르, 헨트, 브뤼셀, 안트베르펜은 상업, 산업(특히 섬유), 예술의 주요 유럽 중심지 역할을 번갈아 수행했다. 브뤼헤는 북부 한자동맹 무역과 남부 무역로의 교차로에 전략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브뤼헤는 이미 13세기 초부터 플랑드르와 프랑스 직물 박람회에 포함되었지만, 오래된 박람회 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브뤼헤의 기업가들은 혁신을 이루었다.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형태의 상인 자본주의를 개발하거나 빌려왔다. 그들은 환어음(즉, 약속 어음)과 신용장과 같은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교환을 사용했다.[17] 안트베르펜은 외국 상인, 특히 포르투갈의 후추 및 향신료 상인들을 기꺼이 환영했다.[18][19]
예술에서 르네상스는 15세기와 16세기 초에 주로 남부 네덜란드에서 활동한 화가 그룹인 플랑드르의 원시주의자와 프랑코-플랑드르 악파 작곡가들에 의해 대표되었다. 플랑드르 태피스트리와 16세기와 17세기의 브뤼셀 태피스트리는 유럽 전역의 성벽에 걸려 있었다. 부르고뉴 공작들은 경제 성장과 예술적 화려함으로 정치적 위상을 높였다. 이 "서부의 대공"은 쥘데르해에서 솜강에 이르는 영토를 가진 사실상의 주권자였다. 12세기부터 벨기에 영토에서 발전해 온 도시 및 기타 섬유 산업은 북서부 유럽의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1549년 국사 조칙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 의해 발효되었으며, 제국 및 프랑스와 별개의 실체인 이른바 17개 주를 설립했다. 여기에는 모든 벨기에, 현재의 북동부 프랑스, 현재의 룩셈부르크, 현재의 네덜란드가 포함되었으며, 리에주 주교의 영토는 제외되었다. 1555년 10월 25일 브뤼셀에서 카를 5세는 벨기카 레지아를 아들, 즉 1556년 1월 스페인 왕위를 계승한 필리프 2세에게 양위했다.
5. 2. 부르고뉴 시대의 번영
1433년까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포함한 저지대 국가 대부분은 필리프 3세 드 부르고뉴 공작 아래 부르고뉴의 일부가 되었다. 필리프 3세의 손녀 마리 드 부르고뉴 여공작이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면서 저지대 국가는 합스부르크 영토가 되었다. 이들의 아들 펠리페 1세는 카를 5세의 부친이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카를 5세가 여러 영지를 상속받은 후 합스부르크 왕가 아래 스페인과 통일되었다.
특히 부르고뉴 시대(15세기와 16세기) 동안 이프르, 헨트, 브뤼헤, 브뤼셀, 안트베르펀은 상업, 산업(특히 섬유)과 예술 분야에서 유럽의 주요 중심지로 번갈아 가며 성장했다. 플랑드르파는 15세기와 16세기 초에 주로 남부 네덜란드에서 활동한 화가 그룹이었다. 플랑드르 태피스트리는 유럽 전역의 성벽에 걸렸다.[16]
6. 네덜란드 17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발포한 국사조칙은 제국과 프랑스로부터 독립체로서 네덜란드 17주(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설립하였다. 이 지역은 리에주 교구를 제외한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전부를 포함하였다. 그러나 남부가 주로 로마 가톨릭으로 남아있던 동안 북부 지방은 네덜란드가 증가적으로 개신교(칼뱅교)가 되었다. 분리는 1579년 아라스 동맹과 위트레흐트 동맹의 결과를 가져왔다.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가 스페인 왕위에 오를 때 그는 개신교를 폐지하려고 하였다.
벨기에의 성립은 베네룩스 전체와 마찬가지로, 부르고뉴령 네덜란드의 네덜란드 17개 주를 기원으로 한다. 이들은 발루아 부르고뉴 왕가 아래 통일되었고,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1549년 국사 조서에 의해 하나의 실체로 통합되었다.
7. 네덜란드 독립 전쟁
네덜란드 독립 전쟁은 네덜란드의 여러 지역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과 네덜란드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정복된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경우, 이 전쟁은 1585년 안트베르펀 함락과 함께 끝났으며, 이는 벨기에가 하나의 지방으로 시작된 시점으로 볼 수 있다. 같은 해, 북부 저지대는 독립을 쟁취하여 네덜란드 공화국과 네덜란드 황금 시대를 열었다. 스페인이 네덜란드 전체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까지 계속되었지만, 오늘날 벨기에에 해당하는 충성스러운 가톨릭 지방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남았다.[20]
1581년 투르네 공방전
익명의 화가가 그린 마스트리흐트 공방전(1579)
뉘포르트 전투(1600)
벨기카 레기아(Belgica Regia) 북부는 7개 주로 구성되어 네덜란드 공화국을 형성했고, 개신교(특히 칼뱅주의)가 점차 우세해졌다. 반면, 남부 10개 주는 주로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다. 이러한 종교적 분열과 기존의 다른 문화적 차이로 인해 벨기에 지역에서는 아르트레히트 동맹이, 북부 지역에서는 위트레흐트 동맹이 결성되었다. 스페인 왕위를 계승한 펠리페 2세는 모든 개신교를 폐지하려 했고, 벨기카 레기아 일부 지역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합스부르크 스페인과 네덜란드 공화국 사이에 80년 전쟁(1568–1648)이 발발했다.[21] 이 전쟁의 참상(학살, 종교적 폭력, 반란 등)은 30년 전쟁(1618–1648)의 전조가 되었고, 결국 80년 전쟁과 30년 전쟁은 통합되었다.
1566년성상 파괴 운동 이후, 스페인 당국은 네덜란드 저지대의 통제력을 대부분 회복했다. 이 시기 주목할 만한 사건은 오스터베엘 전투로, 스페인군이 네덜란드 칼뱅주의자 군대를 격파했다.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즈 데 톨레도를 1567년부터 1573년까지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파견했다. 알바는 고난 위원회(일명 "피의 위원회")라는 특별 법정을 설치하여 공포 통치를 펼쳤다. 피의 위원회는 적법한 절차 없이 수천 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귀족들을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알바는 네덜란드에서 18,600명을 화형시키거나 처형했다고 자랑했는데, 여기에는 많은 여성과 어린이가 포함되었고, 1년 동안 8,000명이 화형당하거나 교수형에 처해졌다. 알바의 플랑드르 희생자는 총 50,000명 이상이었다.[22]
네덜란드 반란은 1570년대 중반, 플랑드르 군대가 급여 부족으로 반란을 일으켜 여러 도시에서 난동을 부린 후 남부로 확산되었다. 1578년 1월 31일 젬블루 전투에서 네덜란드군은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에게 패배했는데, 돈 후안은 정예 부대로 후위 부대를 공격하여 궤멸시킨 다음, 본대에 들이닥쳐 최소 10,000명의 반란군을 죽였다.[23]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은 1578년 10월 1일에 사망했고, 파르마 공작 알렉산데르 파르네세가 그 뒤를 이었다.
스페인에서 많은 군대가 도착하자 파르네세는 남부 지역 재정복 작전을 시작했다.[24] 그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플랑드르인과 왈론어를 사용하는 남부 지역 간의 분열을 이용하여 불화를 조장했다.[25] 이를 통해 그는 왈론 지방을 국왕에게 다시 충성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1579년아라스 조약을 통해 그는 남부 가톨릭 귀족들("불만 세력")의 지지를 확보했다. 칼뱅주의자들이 통제하는 북부 7개 주는 위트레흐트 동맹으로 대응하여 스페인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결의했다. 파르네세는 에노 백국과 아르투아에서 기반을 확보한 후 브라반트 공국과 플랑드르로 진격하여 남부의 많은 반군 도시를 점령했다:[26] 마스트리흐트(1579), 투르네(1581), 오데나르데(1582), 됭케르크(1583), 브뤼헤(1584), 헨트(1584).[25]
1585년 8월 17일, 파르네세는 앤트워프를 포위했다. 앤트워프는 북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으며, 1576년 스페인군과 왈론 군대의 앤트워프 약탈 이후 반란군의 거점이 되었다. 이 도시는 바다로 열려 있었고, 강력한 요새를 갖추었으며, 마르닉스 반 세인트 알데고네의 지휘하에 잘 방어되었다. 기술자 세바스티안 바로치오는 셸데 강에 부교를 건설하여 바다로 가는 모든 접근을 차단했다. 네덜란드군은 지옥불(헬버너, 특별한 종류의 화공선)을 다리 쪽으로 보내 약 60m 길이의 다리를 폭파시켜 가장 큰 인공 비핵 폭발로 스페인인 80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포위군은 피해를 복구하고 공세를 펼쳤다. 앤트워프 함락은 1585년에 일어났고 앤트워프 시민 60,000명(포위 전 인구의 60%)이 북쪽으로 도망쳤다.[25]브뤼셀, 메헬렌, 헤르트뤼이덴베르흐도 같은 해에 함락되었다. 파르네세의 전략은 항복에 대한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즉, 학살이나 약탈은 없을 것이며, 역사적인 도시 특권을 유지하고, 완전한 사면과 사면을 실시하며, 가톨릭 교회로의 복귀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25] 북부에서 온 가톨릭 난민들은 쾰른과 두에에서 재결집하여 더욱 호전적인 트리엔트 공의회 정체성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남부에서 대중적인 반종교 개혁의 동원 세력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벨기에 국가의 출현을 용이하게 했다.[27]
8. 스페인 통치
1567년 스페인에 대항하는 반란과 후속 군사 작전은 남부에서 산업 활동에 피해를 입혔고 상인과 숙련된 장인들이 떠나는 원인을 일으켰다.[20]암스테르담이 유럽의 주요 교역 중심지로서 안트베르펀을 대체하였다. 안트베르펀은 경제적 기반을 재건하기 위해 비단 직조, 다이아몬드 가공과 고급 아마포, 가구와 섬유 생산을 촉진하였다. 브뤼헐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 안토니 반 다이크의 바로크 미술이 이 시기 동안 창조되었다.
벨기카 레기아(Belgica Regia)의 북부 지역은 7개 주로 구성되어 네덜란드 공화국을 형성했으며, 점차 개신교(특히 칼뱅주의)가 우세해졌고, 남부 10개 주는 주로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다. 이러한 분열과 고대부터 존재했던 다른 문화적 차이는 벨기에 지역에서 아르트레히트 동맹을 출범시켰고, 이후 북부 지역에서는 위트레흐트 동맹이 결성되었다. 스페인 왕위를 계승한 펠리페 2세는 모든 개신교를 폐지하려 했다. 벨기카 레기아의 일부 지역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80년 전쟁(1568–1648)으로 이어져 합스부르크 스페인과 네덜란드 공화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21]
1566년의 성상 파괴 운동 이후 스페인 당국은 네덜란드 저지대의 통제력을 대부분 회복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오스터베엘 전투로, 스페인군은 네덜란드 칼뱅주의자 군대를 격파했다.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즈 데 톨레도를 1567년부터 1573년까지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으로 파견했다. 알바는 고난 위원회(일명 "피의 위원회")라는 특별 법정을 설치했다. 피의 위원회는 적법한 절차 없이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귀족들을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공포 통치를 펼쳤다. 알바는 전쟁 중에 학살한 훨씬 더 많은 사람들(많은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을 포함하여, 네덜란드에서 18,600명을 화형시키거나 처형했다고 자랑했다. 1년 동안 8,000명이 화형당하거나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알바의 플랑드르 희생자는 총 50,000명 이상이었다.[22]
네덜란드 반란은 1570년대 중반에 플랑드르 군대가 급여 부족으로 반란을 일으켜 여러 도시에서 난동을 부린 후 남부로 확산되었다. 1578년 1월 31일 젬블루 전투에서 네덜란드군은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에게 패배했다. 돈 후안은 정예 부대를 보내 후위 부대를 공격하여 궤멸시킨 다음, 본대에 갑자기 들이닥쳐 완전히 격파하여 최소 10,000명의 반란군을 죽였다.[23]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은 1578년 10월 1일에 사망했고, 파르마 공작 알렉산데르 파르네세가 그 뒤를 이었다.
스페인에서 많은 수의 군대가 도착하자 파르네세는 남부 지역에서 재정복 작전을 시작했다.[24] 그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플랑드르인과 왈론어를 사용하는 남부 지역 간의 분열을 이용하여 불화를 조장했다.[25]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왈론 지방을 국왕에게 다시 충성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1579년 아라스 조약을 통해 그는 남부의 가톨릭 귀족들("불만 세력")의 지지를 확보했다. 칼뱅주의자들이 통제하는 북부 7개 주는 위트레흐트 동맹으로 대응하여 스페인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결의했다. 파르네세는 에노 백국과 아르투아에서 기반을 확보한 후 브라반트 공국과 플랑드르로 진격했다. 그는 마스트리흐트(1579), 투르네(1581), 오데나르데(1582), 됭케르크(1583), 브뤼헤(1584), 헨트(1584) 등 남부의 많은 반군 도시를 점령했다.[25]
1585년 8월 17일, 파르네세는 앤트워프를 포위했다. 앤트워프는 북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으며, 1576년 스페인군과 왈론 군대가 앤트워프 약탈을 한 이후 반란군의 거점이 되었다. 이 도시는 바다로 열려 있었고, 강력한 요새를 갖추었으며, 마르닉스 반 세인트 알데고네의 지휘하에 잘 방어되었다. 기술자 세바스티안 바로치오는 셸데 강에 부교를 건설하여 바다로 가는 모든 접근을 차단했다. 네덜란드군은 지옥불(헬버너)이라고 불리는 화공선을 다리 쪽으로 보내 약 60m 길이의 다리를 폭파시켜 가장 큰 인공 비핵 폭발로 스페인인 80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포위군은 피해를 복구하고 공세를 펼쳤다. 앤트워프 함락은 1585년에 일어났고 앤트워프 시민 60,000명(포위 전 인구의 60%)이 북쪽으로 도망쳤다.[25]브뤼셀, 메헬렌, 헤르트뤼이덴베르흐도 같은 해에 함락되었다. 파르네세의 전략은 항복에 대한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즉, 학살이나 약탈은 없을 것이며, 역사적인 도시 특권을 유지하고, 완전한 사면과 사면을 실시하며, 가톨릭 교회로의 복귀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25] 북부에서 온 가톨릭 난민들은 쾰른과 두에에서 재결집하여 더욱 호전적인 트리엔트 공의회 정체성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남부에서 대중적인 반종교 개혁의 동원 세력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벨기에 국가의 출현을 용이하게 했다.[27]
1601년, 스페인은 오스텐데 공방전을 벌여 1604년에 결국 함락될 때까지 100,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이전 벨기카 레기아의 북부 지역인 네덜란드 공화국(7개 연합주)은 독립을 쟁취했지만, 남부 네덜란드는 스페인(1556–1713)의 통치하에 남았다. 남부 지역에서는 다양한 로망스어가 사용되었고 북부 지역에서는 네덜란드어가 사용되었지만, 궁정 기록은 스페인어로 작성되었다.
프랑스-스페인 전쟁 (1635-1659) 이후, 스페인은 벨기에에서 이베리아로 대부분의 병력을 이동시켰다. 1659년부터 마드리드는 프랑스의 스페인령 네덜란드 합병 야심을 억제하기 위해 동맹군에 대한 지원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28]루이 14세 (1643–1715) 치하의 프랑스는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했다. 프랑스는 종종 남부 네덜란드의 영토를 장악했으며,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다양한 적들과 대립했다. 왕위계승전쟁 (1667-1668),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1672–1678), 재결합 전쟁 (1683–1684), 구년 전쟁 (1688–1697)이 벌어졌다. 이어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1714)이 벌어졌으며, 그 대부분은 벨기에 영토에서 치러졌다.
9.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통치
1713년위트레흐트 조약에 따라, 리에주를 제외한 오늘날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포함한 영토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 카를 6세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정치적 자율성을 허용하고, 효율적인 행정을 도입했으며, 재정을 합리화하고 국가 기반 시설을 개선했다.[29]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한 후 남부 네덜란드는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상속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1744년 프랑스에 점령되기도 했으나, 엑스라샤펠 조약으로 오스트리아의 지배가 회복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통치 기간 동안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었고, 특히 감자 재배가 보급되어 인구 증가와 다양한 산업 발전이 동시에 일어났다.[29]
계몽시대에 영향을 받은 합스부르크 황제 요제프 2세는 1780년대에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서 정치, 사법, 행정 제도를 현대화하고 중앙 집중화하는 대규모 개혁을 추진했다. 낡은 탈중앙화 제도는 제국 전체에 통일된 사법 제도로 대체되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독립 주들은 9개의 지방과 35개의 구역으로 대체될 예정이었다. 요제프 2세는 교육 제도를 세속화하고 다수의 종교 질서를 재편하거나 폐지하기도 했다.[30]
1789년 황제의 중앙화 정책에 반발하여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서 대중 반란이 일어났다. 개혁에 반대한 국가주의자와, 초기에는 개혁을 지지했으나 이후 반대에 가담한 장프랑수아 본크를 따르는 본크주의자, 두 파벌이 나타났다. 그해 1월 브라반트에서 시작된 반란은 황제의 지배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브라반트 혁명으로 불렸다. 국가주의자 파벌의 지도자 헨드리크 판 데어 노트는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국경을 넘어 브라반트 북부 브레다에서 소규모 군대를 조직했다.[30]
혁명은 도시에서 지지를 얻었지만, 농민들은 대체로 오스트리아를 지지했다. 황제 레오폴트 2세는 황제군이 12월 2일 브뤼셀을 재점령했을 때 대중의 반대에 직면하지 않았다. 이후 국가주의자들은 잠시 혁명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30]
1789년부터 1790년까지의 제1차 브라반트 혁명은 프랑스 혁명과 겹쳐졌으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했다. 장-앙드레 반 데르 메르쉬가 이끈 브라반트 반군은 턴하우트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벨기에 연합 주를 리에주 주교령과 함께 출범시켰다. 이 신생 국가는 얀 프란스 폰크가 이끄는 급진적인 "폰크파"와 앙리 반 데르 노트의 더 보수적인 "스타트파" 사이의 파벌 싸움에 시달렸다. 대규모 사업가들은 일반적으로 스타트파를 지지했고, 폰크파는 소규모 사업과 무역 길드의 구성원을 끌어들였다. 그들은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했지만 사회적, 종교적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이었다.[30] 1790년 11월까지 반란은 진압되었고 합스부르크 왕가는 권력을 되찾았다.[31]
11. 프랑스 통치
프랑스 제1공화국은 1795년 남부 네덜란드를 침입하여 병합하고, 이 지역을 9개의 연합 부서로 나누어 프랑스의 일부로 만들었다. 리에주 주교령은 해산되었고 그 영토는 뫼즈앵페리외르와 우르트, 두 개의 부서로 나뉘었다. 1797년 오스트리아는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통해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상실을 인정하였다.[29] 프랑스 통치하에 행정은 중앙집권화되었고, 귀족의 특권은 폐지되었으며, 프랑스의 민법이 도입되었다. 군사 징병 제도는 농민들의 반란을 야기했다. 교황권과의 정교협약을 통해 성직자의 지위가 조정되었다. 산업 혁명은 18세기 말 벨기에에 도달하였다. 석탄 및 금속 산업이 확장되는 가운데, 기계화는 헨트(면직 공장)와 베르비에(모직 공장)를 벨기에의 주요 모직 산업 중심지로 만들었다.
1814년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동맹국들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하고 엘바섬으로 망명되어 프랑스의 벨기에 지배는 끝났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하여 백일천하 동안 빠르게 권력을 되찾았다. 나폴레옹은 권력을 유지하는 동안, 동맹국들이 강화되기 전에 벨기에에 있는 동맹군을 공격하는 것이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두 개의 군대를 이끌고 벨기에 국경을 넘어 1815년6월 16일 게프하르트 폰 블뤼허 장군 휘하의 프로이센군을 공격했다. 한편, 미셸 네이는 같은 날 콰트르브라 전투에서 웰링턴 공작 1세 아서 웰즐리와 오라녜 공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6월 18일 오늘날 벨기에의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은 결국 웰링턴 공작과 블뤼허 장군에게 패배했다. 나폴레옹의 전략은 실패했고, 그의 군대는 동맹군 장군들의 합동 진격에 쫓겨났다. 다음날 아침 와브르 전투는 프랑스의 허무한 승리로 끝났다. 나폴레옹은 강제로 항복하고 세인트헬레나섬으로 망명하였다.
네덜란드의 빌럼 1세는 자신의 아들 빌럼 2세가 어깨에 총탄을 맞고 말에서 떨어진 위치를 기념하고 그의 용기를 기리기 위해 워털루 전쟁터에 사자상을 세웠다. 이 상은 1826년에 완성되었다. 빌럼 2세는 콰트르브라 전투와 워털루 전투에서 네덜란드-벨기에 연합군의 사령관으로 참전했다.[28]
13. 네덜란드 연합 왕국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영국,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등 주요 승전국들은 빈 회의에서 이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을 통합하여 네덜란드 연합 왕국을 수립했다. 이는 프랑스의 침략에 대비한 완충 국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함이었으며, 빌럼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신성 로마 제국 내 리에주 주교령을 포함한 소규모 교회 국가들은 네덜란드 연합 왕국에 편입되었다.[37]
계몽 전제 군주였던 빌럼 1세는 1815년부터 1840년까지 헌법상 거의 무제한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법 앞의 평등과 같은 일부 사회 변화는 수용했으나, 신분 제도를 부활시키고 귀족 수를 늘리는 등 제한적인 투표권을 유지했다.[37]
빌럼 1세는 칼뱅주의자로서, 남부 지역의 다수 가톨릭 신자들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는 "홀란드의 기본법"을 수정하여 성직자를 억압하고 가톨릭 교회의 특권을 폐지하는 한편, 모든 종교적 신념에 대한 동등한 보호와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보장했다. 이는 남부 주교들의 반발을 초래했다.[37]
빌럼 1세는 경제 현대화를 적극 추진했다. 정부는 중앙집권화되었고, 남부에서는 산업 혁명이 일어나 섬유 산업이 발달했다. 북부 지방은 산업이 거의 없었지만, 네덜란드 해외 식민지 복원으로 무역이 활성화되었다. 경제 자유주의와 온건한 군주주의의 결합은 네덜란드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개신교도는 인구의 4분의 1에 불과했지만, 신생 국가를 통제했다. 가톨릭 신자들은 이론적으로는 법적 평등을 누렸으나, 고위직 진출은 드물었다. 국왕은 남부 학교에서 가톨릭 교리 교육 중단을 요구했지만, 주민 대다수는 가톨릭 신자였다. 프랑스어 사용 왈론족은 네덜란드어 공용화 정책에 반발했고, 사회적 차별에 대한 불만도 고조되었다. 샤마에 따르면, 네덜란드 정부에 대한 적대감이 커져갔다.
남부 자유주의자들은 국왕의 권위주의에 불만을 품었다. 그는 지역 문제에 무관심했고, 리에주에 프랑스어 교사 양성 대학 설립을 거부했다. 남부 각계각층은 불공정한 의회 대표성에 불만을 제기했다. 남부는 북부보다 산업화와 번영 수준이 높았고, 북부의 지배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1830년 프랑스 혁명은 반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초기에는 자치 요구 수준이었으나, 결국 완전한 독립 요구로 이어졌다.[38]
14. 벨기에 혁명
1830년8월벨기에 혁명은 브뤼셀에서 폭동과 함께 시작된 네덜란드 연합왕국에서의 충돌이었고, 결국 독립된 로마 가톨릭 중립국 벨기에를 설립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빌럼 1세는 런던 조약에 의해 압력을 받아 1839년까지 벨기에를 승인하지 않았다.[39]
벨기에 혁명은 여러 원인이 있었는데, 주로 네덜란드 연합왕국 내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가톨릭 왈롱인들에 대한 네덜란드의 지배와 벨기에인들과 네덜란드 국왕 사이의 종교적 차이였다. 벨기에 혁명의 주요 원인은 네덜란드 공화국의 경제, 정치, 사회적 수단에 대한 네덜란드의 지배였다. 벨기에의 저개발된 지방 산업들은 관세를 통한 보호를 요구한 반면, 네덜란드인들은 자유 무역을 지지했다. 자유 무역은 안트베르펀의 되살아나는 항구를 통해 수입된 밀로 만든 빵 가격을 낮추었으며, 동시에 발트해로부터의 수입품은 벨기에 곡식 재배 지역에 농업 불황을 야기했다.
가톨릭 농민들은 신문을 통해 프랑스에서 일어난 7월 혁명 소식을 접하며 큰 관심을 보였다. 다니엘 오베르의 감상적이고 애국적인 오페라 〈La Mutte de Prtici〉(17세기에 나폴리의 스페인 지배자들에 대항한 마사니엘로의 반란을 다룬 민족주의적 낭만주의를 불러일으키기에 적합한 이야기) 공연 이후, 8월 25일 밤에 폭동이 일어났다.
혁명가들은 네덜란드의 북부와 남부에 별도의 행정을 요구했으나, 급진적 애국자들의 행동과 국왕의 완고한 태도로 인해 9월 25일 지방 벨기에 정부가 설립되었고, 10월 4일 이 정부는 국가의 독립을 선언했다. 빌럼 1세는 전쟁을 준비했으나 12월 20일 강대국들이 휴전을 요구했다. 1831년1월 20일런던에서 열린 국제 회의는 지방 정부와 국회 아래 독립된 가톨릭 중립국 벨기에를 인정했다.
정치적으로 벨기에인들은 네덜란드 선출 하원에서 대표성이 부족하다고 느꼈고, 브뤼셀에서 빌럼 1세의 대리인이었던 인기 없는 오렌지 공(미래의 빌럼 2세)을 싫어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왈롱인들은 다수의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국가에서 소외감을 느꼈다. 또한 다수의 가톨릭 신자인 벨기에인들은 종교적 불만을 품고 있었다.
국왕은 시위가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외국인과 지도자를 제외한 모든 혁명가에게 사면을 발표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자 군대를 투입했다. 네덜란드군은 샤르베이크 문을 통해 브뤼셀로 진입할 수 있었지만, 저격수의 사격으로 브뤼셀 공원에서 진격이 멈췄다. 다른 지역의 왕립군은 임시 바리케이드를 친 혁명가들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했다. 당시 브뤼셀에는 1,700명 이하의 혁명가(프랑스 대사는 "훈련되지 않은 폭도"라고 묘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6,000명 이상의 네덜란드군에 맞섰다. 그러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한 네덜란드군은 9월 26일 밤 수도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혁명가들이 네덜란드군과 충돌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혁명군이 점령한 후 8척의 네덜란드 군함이 안트베르펜을 폭격했다.
1815년 빈 회의에서는 벨기에의 독립이 허용되지 않았지만, 혁명가들은 유럽 주요 열강들의 동정을 받았다. 1830년 11월, 1830년 런던 회담 ("벨기에 의회", 영국, 프랑스,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대표로 구성)는 11월 4일에 휴전을 명령했다. 11월 말 영국과 프랑스는 군사적 개입과 벨기에 독립 왕국 수립을 제안했으며, 군사적 개입을 선호했던 다른 3개 보수 국가가 이를 수용했다.[39] 1831년 1월 20일에 서명된 의정서는 벨기에가 1790년에 북부에 속하지 않았던 지역으로 구성될 것이라고 명시했다. 새로운 왕국은 외교 문제에서 중립을 유지해야 했다. 영국의 외무 장관 러드 팔머스턴은 새로운 국왕으로 오렌지 공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오렌지 공은 그의 아버지인 빌럼 1세와 프랑스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인물임이 드러났다. 마침내 팔머스턴은 그의 두 번째 선택인 작센코부르크의 레오폴드를 내세웠고, 그는 모두에게 받아들여졌다.[40] 1831년 7월 21일, 첫 번째 "벨기에 국왕"이 즉위했다. 그가 헌법을 수락한 날짜인 1831년 7월 21일은 국경일로 지정되었다.[41]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는 샤를 로지에를 수반으로 임시 정부를 급히 구성하여 네덜란드와 협상하고, 1830년 10월 4일에 공식적으로 벨기에의 독립을 선언했다. 벨기에 국민 회의는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구성되었다. 새로운 헌법에 따라 벨기에는 입헌 군주제를 갖춘 주권 독립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헌법은 프랑스어가 다수 언어가 아닌 국가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부르주아지와 성직자에게 투표권을 심각하게 제한했다. 가톨릭 교회는 국가 개입으로부터 상당한 자유를 누렸다.
15. 독립 벨기에
1831년7월 21일작센코브루크가의 레오폴 왕자가 왕위에 올랐다. 며칠 후 네덜란드군이 침입하였으나, 런던 회의는 프랑스군에 의한 간섭으로 동의하여 네덜란드군을 철수시켰다. 회의는 벨기에와 네덜란드 사이에 림브뤼흐주와 뤽상부르주를 분할했다. 서부 뤽상부르는 벨기에의 주가 되었고, 동부는 룩셈부르크 공국이 되었다. 1839년런던 조약은 1838년 국경을 기준으로 독립 중립국 벨기에를 인정하였다. 1831년 레오폴 1세 취임 이래 벨기에는 가톨릭당과 자유주의자들이 주로 지배하는 과두제였지만, 헌법적 군주국이자 의회적 민주주의 국가였다.
독립 후 벨기에는 네덜란드 시장을 잃었다. 1835년 벨기에 정부는 브뤼셀과 메헬렌 사이의 철도선을 개통하고, 1843년 안트베르펀-쾰른 철도선, 1844년관세 동맹과 유리한 무역 협정을 완료하였다. 벨기에 은행들은 왈롱 지역에 중공업 자금을 조달하여 새로운 산업적 은행 제도를 창조했고, 이는 곧 프랑스, 독일, 영어 사용 국가들에 의해 모방되었다. 그러나 헨트의 면직 산업은 영국의 치열한 경쟁에 직면했고, 플란데런의 모직 생산자들은 베르비에와 프랑스 북부의 경쟁, 그리고 1844년과 1846년 사이의 부족한 곡물 수확과 감자 마름병으로 인한 기근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846년 중산층의 교권 반대자들은 혁명을 이끈 노동 조합 운동의 국가 자유당을 결성하였다. 1847년 첫 자유당 정부가 집권했고, 1848년 유럽을 뒤흔든 혁명적 압력을 견뎌냈다. 자유당 정부는 자선과 교육에서 교회의 영향력을 줄였고, 종교 교육이 공립 학교에서 제거되면서 이른바 학교 전쟁을 촉발시켰다. 학교 전쟁은 1884년 선거에서 양원 모두 가톨릭교도들에게 다수 의석을 안겨준 보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콩스탕탱 뫼니에의 우그리 철강 생산 그림 (1885)
1835년에 제작된 벨기에 최초의 증기 기관차 "Le Belge" ("Le Belge")
벨기에는 영국에 이어 두 번째로 산업 혁명을 겪은 국가였다. 벨기에는 금융 부문과 산업 간의 강력한 유대 관계를 통해 산업 수출에 주력하는 개방 경제로 발전했다.[45] 산업화는 1820년대 중반부터, 특히 1830년 이후 왈롱에서 일어났다. 값싼 석탄의 이용 가능성은 기업가들을 유치하는 주요 요인이었다. 리에주와 샤를루아 주변 탄광 지역에는 코크스 용광로, 퍼들링 및 압연 공장이 건설되었다. 존 코커릴은 이식된 영국인으로, 그의 세랭 공장은 1825년 초부터 엔지니어링에서 원자재 공급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산 단계를 통합했다.[46]
산업은 실롱 인더스트리엘("산업 지구"), 엔, 삼브르 및 뫼즈 계곡으로 확산되었다.[47] 1830년 철이 중요해질 무렵 벨기에 석탄 산업은 오랫동안 확립되었고 증기 기관을 펌핑에 사용했다. 석탄은 프랑스와 프로이센뿐만 아니라 현지 제분소와 철도에도 판매되었다. 면화와 아마를 기반으로 하는 섬유 산업은 산업 시대 대부분 동안 산업 노동력의 약 절반을 고용했다. 겐트는 1880년대까지 벨기에 최고의 산업 도시였으며, 성장 중심지는 철강 산업이 있는 리에주로 옮겨졌다.[48]
왈롱은 넓은 지역에 걸쳐 풍부한 탄전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깊은 광산이 필요하지 않아 소규모 사업장이 많았다. 19세기 후반에는 이음새가 고갈되기 시작했고 철강 산업은 루르에서 일부 석탄을 수입했다.[49] 저렴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석탄은 금속 및 유리 생산 기업을 유치했으며, 이 두 가지 모두 상당한 양의 석탄이 필요했으므로 탄전 주변 지역은 고도로 산업화되었다. 실롱 인더스트리엘, 특히 샤를루아 주변의 ''페이 누아르''는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철강 산업의 중심지였다.
벨기에는 산업 혁명을 가속화하는 철도의 가치를 보여주는 이상적인 모델을 제공했다. 1830년 이후, 새로운 국가는 산업을 진흥시키기로 결정했다. 주요 도시, 항구 및 광산 지역을 연결하고 인접 국가와 연결되는 단순한 십자형 시스템에 자금을 지원하여 벨기에는 이 지역의 철도 중심지가 되었다. 레오폴 1세는 1835년 브뤼셀과 메헬렌 사이에 유럽 대륙 최초의 철도를 건설했다.[50]
1900년대까지 벨기에는 트램 및 기타 철도 부품의 주요 수출국이 되어 막대한 양의 철도 자재를 수출했다. 코커릴-삼브르(강철), 에르네스트 솔베의 화학 공장, 파브리크 나시오날 드 에르스탈 등의 기업이 중요했다.
15. 1. 콩고 식민지 건설
1885년베를린 회담에서 레오폴 2세는 개인 소유로 콩고 자유국을 할당받았다. 1908년 벨기에는 콩고를 식민지로 양도받았고, 이후 벨기에령 콩고로 불렸다. 벨기에는 콩고의 전통 경제를 근대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통합시켰고, 밀림 지역을 통과하는 철도를 건설했다. 콩고산 고무는 이전에는 대량 생산된 적이 없었지만, 레오폴 2세는 고무 판매 수익으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특히 식민지가 레오폴 2세의 개인 소유였던 시절, 콩고에서는 수많은 만행이 저질러졌다. 콩고에서 벨기에 식민주의자들의 행동은 벨기에에서 논쟁적인 주제로 남아있다.[70]
1906년 영국의 펀치 만평으로, 레오폴드 2세가 콩고 남성을 얽어매는 고무 덩굴로 묘사되었다
레오폴드 2세는 1879년부터 1884년 사이에 콩고 하류에 교역소를 설립한 벨기에 무역 회사의 주요 주주였다. 1884년부터 1885년까지 열린 베를린 회의에서 콩고는 레오폴드에게 개인적으로 할당되었고, 그는 이 영토를 콩고 자유국으로 명명했다. 이 영토는 벨기에 면적의 거의 80배에 달했다.[72][73][74] 콩고 자유국 시대에는 레오폴드빌에서 해안까지 이어지는 철도와 같은 기반 시설 건설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지만, 완공에는 수년이 걸렸다.
콩고 자유국 시대는 이 시기에 저질러진 대규모 만행으로 악명이 높다. 레오폴드는 콩고 고무를 타이어 시장에 판매하여 막대한 개인 재산을 축적했다. 1885년부터 1908년까지 콩고인 최대 800만 명이 착취와 질병으로 사망했고 출생률이 감소했다.[75]
고무 할당량을 강제하기 위해 공공군(Force Publique)(FP)이 창설되었다. 공공군은 콩고 자유국 시대에 투옥, 강간, 납치, 강제 노동 또는 즉결 처형을 통해 고무 할당량을 강제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때로는 사지 절단도 사용되었다.[77] 벨기에의 한 대위 레옹 롬은 21명의 원주민 머리로 화단을 장식하기도 했다.[78]
에드먼드 딘 모렐이 이끄는 콩고 개혁 협회는 영국과 미국에서 도덕적 분노를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레오폴드 국왕은 이러한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위원회를 임명했지만, 위원회 역시 만행을 확인했다.[79]
레오폴드 2세 기마상, 브뤼셀
벨기에 의회는 1908년 국제적 압력에 대응하여 콩고 자유국을 합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벨기에는 정치 분야에서 아무런 진전도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제 연합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벨기에 내에서의 선전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식민지에 큰 관심을 보이는 벨기에인은 거의 없었다. 또한 정부는 콩고인들이 벨기에에 정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한했다.[80]
1956년 에볼뤼(Évolué)라고 불리는 성장하는 중산층에게 참정권이 부여될 때까지 아프리카인에게는 정치적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독립에 관한 원탁 회담에서 벨기에는 4년에 걸쳐 점진적인 독립 과정을 요청했지만,[81] 1959년에 발생한 일련의 폭동 이후 불과 몇 달 만에 독립을 앞당기기로 결정했다. 벨기에가 콩고에서 철수하면서 혼란이 발생하여[81] 서방이 지원하는 카탕가가 분리되었고, 콩고 위기로 알려진 장기간의 내전이 발생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은 파리를 신속하게 점령하기 위해 슐리펜 계획의 일환으로 중립국인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침공했다. 프랑스에 대한 위협은 영국이 1839년 협정을 명분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만들었다. 벨기에군은 전쟁 초기에 완강하게 저항한 것으로 기억되며, 독일군의 10분의 1 정도 규모의 벨기에군은 독일군의 공세를 거의 한 달 동안 저지하여 프랑스와 영국군이 마른 반격전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독일 침략자들은 철로 파괴와 같은 모든 저항 행위를 불법적이고 파괴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위반자들을 총살하고 보복으로 건물을 불태웠다.
벨기에는 전쟁 초기에 번영하는 경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4년간의 점령 이후 경제가 피폐해졌고, 벨기에 자체의 사망자는 적었다. 독일군은 "잔혹하고 효율적으로 국가를 샅샅이 약탈했다. 기계, 예비 부품, 지붕을 포함한 모든 공장이 동쪽으로 사라졌다. 1919년에는 노동력의 80%가 실업 상태였다."[82]
1914년 초기 침공 당시 벨기에 군인들은 지연전을 벌였다. 그들은 정교한 독일 침공 계획을 예정보다 늦추는 데 성공했고, 베를린이 프랑스를 상대로 한 신속한 승리를 기대했던 슐리펜 계획을 방해하는 데 기여했다. 리에주 전투에서 도시의 요새는 1주일 이상 침략자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 독일의 "바다로의 경주"는 이제르 전투에서 벨기에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알베르 1세 국왕은 군 사령관으로서 이제르강에 남아 군대를 지휘했고, 샤를 드 브로크빌 정부는 프랑스의 인근 르아브르로 철수했다.
벨기에 부대는 1918년까지 전선에서 계속 복무했다. 콩고 자유국의 공공군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벨기에 군인들로 구성된 소규모 부대가 동부 전선에서 복무했다.
"벨기에 강간"을 묘사한 만화로, 프로이센 독수리가 흐르는 로브를 입은 처녀를 움켜쥐는 거대한 털복숭이 주먹을 보여준다.
독일군은 점령지 벨기에를 벨기에 총독부를 통해 통치했으며, 벨기에의 작은 지역은 점령되지 않은 채로 남았다. 전 국가는 계엄령 하에 통치되었다.[217] 정부의 권고에 따라 공무원들은 임기 동안 그들의 직책에 머물렀다.[217]
독일군은 1914년 8월부터 11월 사이에 5,500[217]에서 6,500명[83] 사이의 프랑스 및 벨기에 민간인을 처형했는데, 이는 대개 독일의 하급 장교가 명령한 무작위 대규모 총격이었다. 게릴라 활동이 의심되는 개인은 즉결 처형되었다.[219] 정치인 아돌프 막스와 역사가 앙리 피렌을 포함한 몇몇 중요한 벨기에 인물들이 독일로 추방되었다.
독일 점령 당국은 플랑드르인을 억압받는 사람들로 간주하고, ''플라멘폴리틱''으로 알려진 몇 가지 플랑드르 친화적 조치를 취했다. 여기에는 1918년 플랑드르의 모든 국가 지원 학교의 교육 언어로 네덜란드어를 도입하는 것이 포함되었다.[220] 이로 인해 전쟁 이후 플랑드르 운동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플랑드르 ''전선 운동''(''병사 운동'')은 교육과 정부에서 네덜란드어 사용 확대를 위해 벨기에 군대의 플랑드르 병사들로 구성되었지만, 분리주의자는 아니었다.[221]
독일군은 벨기에를 황폐하게 만들고 떠났다. 140만 명 이상의 난민이 프랑스나 중립국 네덜란드로 피난했다.[222] 전쟁 초 몇 주 동안 독일군의 체계적인 잔혹 행위 이후, 독일 공무원들이 통제권을 잡았고, 엄격하고 가혹했지만 일반적으로 올바르게 행동했다. 폭력적인 저항 운동은 결코 없었지만, 독일의 승리를 위해 일하는 것을 거부하는 대규모 자발적 소극적 저항이 있었다. 벨기에는 고도로 산업화되었으며, 농장은 운영되고 소규모 상점은 문을 열었지만 대부분의 대규모 시설은 문을 닫거나 생산량을 대폭 줄였다. 교직원들은 대학을 폐쇄했고, 많은 출판사들이 신문을 폐쇄했다. 1916년 독일은 120,000명의 남자와 소년을 독일로 보내 노동을 시켰는데, 이는 중립 국가들의 항의를 불러일으켰고, 그들은 돌려보내졌다. 그 후 독일은 공장에서 모든 유용한 기계를 떼어내고, 나머지는 철강 공장의 고철로 사용했다.[224]
벨기에가 식량 위기에 직면했을 때, 미국의 기술자 허버트 후버가 국제적인 지원을 조직했다.[225] 이는 세계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후버의 벨기에 구호 위원회(CRB)는 독일과 연합국의 허가를 받았다.[226] CRB 의장으로서 후버는 벨기에 구호 및 식량 공급 전국 위원회(CNSA)의 지도자인 에밀 프랑키와 협력하여 전쟁 기간 동안 벨기에 국민 전체에게 식량을 공급했다. CRB는 CNSA가 배급할 수 있도록 수백만 톤의 식량을 수입했고, 독일군이 식량을 전용하지 못하도록 CNSA를 감시했다. CRB는 자체 깃발, 해군, 공장, 제분소, 철도를 갖춘 진정한 독립적인 구호 공화국이 되었다. 민간 기부금과 정부 보조금(78%)은 월 1,100만 달러의 예산을 충당했다.[227]
최고조에 달했을 때, 미국 부문인 미국 구호 기구(ARA)는 매일 1,050만 명에게 식량을 공급했다. 영국은 CRB 지원에 주저하게 되었고, 대신 독일의 구호 제공 의무를 강조하는 것을 선호했다. 윈스턴 처칠은 벨기에 구호 노력을 "긍정적인 군사적 재앙"으로 여겼던 군사 파벌을 이끌었다.[228]
17. 전간기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을 공식적으로 끝낸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1925년 벨기에는 국민투표를 통해 오이펜과 말메디를 포함한 몇몇 독일 국경 지역을 병합하였다. 독일의 패전 후, 르완다와 부룬디는 국제연맹에 의해 벨기에에 위임되었다. 1920년 벨기에는 프랑스와 군사 지원 조약을 맺고 안트베르펀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1921년에는 룩셈부르크와 경제 동맹을 체결하였다. 참정권은 21세 이상의 모든 남성에게로 확대되었다.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사회당이 두각을 나타낸 반면, 가톨릭-자유당 연정은 전간기에 우세하였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장교들이 이끌었던 전선에서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군인들의 경험은 플란데런 해방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전쟁 이후 플라망어 요구에 대한 공식적인 응답 부족과 이제르 강 전투에서 플라망어를 쓰는 군인들에 대한 차별은, 1930년 벨기에 정부가 브뤼셀과 그 주변 지역만 2개 국어를 사용하고 플라망어와 왈롱어를 단일 언어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전쟁은 벨기에의 여러 지역을 파괴했고, 독일군은 왈롱 지역의 중공업 시설을 해체하였다. 벨기에는 심각한 자본 이탈, 지불 불균형, 인플레이션을 겪으며 환율이 급등했고, 독일로부터 전쟁 배상금을 받지 못했다.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은 벨기에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알베르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레오폴 3세는 프랑스와의 동맹 기간 이후 중립 정책을 주장하였고, 정부는 나뮈르에서 안트베르펀까지 방어선을 건설하였다.
알베르 1세 국왕은 전쟁 영웅으로 귀환했다. 반면 정부와 망명자들은 조용히 돌아왔다. 벨기에는 전투로 인한 피해보다는 독일군이 귀중한 기계를 압수했기 때문에 파괴되었다. 1914년에 3,470대의 기관차가 있었지만, 가동 가능한 기관차는 81대밖에 남지 않았다. 51개의 제철소 중 46개가 손상되었고, 26개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10만 채 이상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300000acre 이상의 농지가 황폐화되었다.
1918년 11월과 12월 해방과 함께 민중 폭력의 물결이 일어났고, 정부는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적과의 협력에 대한 사법 처벌로 대응했다. 상점 창문이 깨지고 가옥이 약탈당했으며, 남자들은 괴롭힘을 당했고, 여자들의 머리카락은 깎였다. 보이콧하고 집필을 중단했던 언론인들은 독일 검열에 굴복한 신문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요구했다. 많은 사람들이 폭리자들을 비난하고 정의를 요구했다. 이처럼 1918년 벨기에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제2차 세계 대전 말에 가서야 발견한 점령과 관련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기에는 놀랍도록 빠르게 회복했다. 전후 첫 올림픽인 1920년 하계 올림픽이 1920년 안트베르펜에서 개최되었다. 1921년에는 룩셈부르크가 벨기에와 관세 동맹을 맺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발생한 피해에 대한 독일의 벨기에 배상금은 125억 파운드 스털링으로 책정되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오이펜-말메디, 모레스네 지역이 벨기에로 이관되었다. "중립 모레스네"는 물론 펜반 철도도 벨기에로 이관되었다. 지역 주민들에게 청원서 서명을 통해 이관에 "반대"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지역 당국의 협박 덕분에 서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늘날 모든 지역은 벨기에의 일부로 남아 있다.
역사적으로 네덜란드에 속했던 영토를 병합해달라는 벨기에의 요청은 거부되었고, 네덜란드는 협력자로 여겨졌다.
1923년 1월부터 1925년 8월까지 벨기에와 프랑스 군인들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루르로 파견되어 독일 정부가 배상금 지불을 계속하도록 강요했다. 루르 점령은 독일 정부가 배상금 지불에 더 관대해지도록 허용한 도스 계획으로 이어졌다.
국제 연맹은 1925년에 벨기에를 벨기에령 콩고의 동쪽에 인접한 옛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신탁 통치국으로 지정했다. 이곳은 르완다-우룬디 (오늘날의 르완다와 부룬디)가 되었다.[87] 벨기에는 국제 연맹에 교육을 진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 과업을 보조금을 받는 가톨릭 선교 단체와 보조금을 받지 않는 개신교 선교 단체에 맡겼다. 1962년까지 100명이 채 안 되는 원주민이 중등 교육을 넘어서는 교육을 받았다. 이 정책은 벨기에의 신탁 통치 위원회 특별 대표가 설명한 것처럼 저비용의 온정주의 정책이었다. "진정한 작업은 아프리카인의 본질을 변화시키고, 그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를 사랑하고 그와 매일 접촉하는 것을 즐겨야 한다. 그는 무분별함에서 벗어나 사회에서 사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며, 무기력을 극복해야 한다."[88]
18.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은 연합국과 추축국 간의 세계적인 군사 충돌로, 전 세계 7천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며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갈등이었다.
1940년5월 10일나치 독일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를 전격전으로 침공했다. 벨기에는 18일 후 항복했고, 프랑스와 영국군은 됭케르크를 통해 대륙에서 후퇴했다. 벨기에 정부는 프랑스를 거쳐 런던으로 망명했다. 레오폴 3세는 벨기에에 남아 1944년9월 3일 연합군 도착 때까지 독일군에 의해 감금되었다. 벨기에 지하군은 안트베르펀 항구 파괴를 막았다. 12월 16일 독일군의 벌지 전투는 영국과 미국의 연합군 전선을 가르고 안트베르펀을 포위하려는 시도였으나 실패했다. 독일군은 지크프리트선으로 후퇴했고, 벨기에는 전쟁으로 86,100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89]
벨기에는 중립 정책을 추구했으나, 1940년 5월 10일 나치 독일군에 의해 침공당했다. 에방 에마엘 요새 등 국경 요새는 함락되거나 우회되었다. 18일간의 전투 후, 레오폴 3세 국왕을 포함한 벨기에군은 5월 28일에 항복했다. 벨기에 정부는 망명 정부를 조직했다.
1940년 패배 후, 많은 벨기에 군인과 시민들이 영국으로 망명하여 벨기에군에 합류했다. 벨기에 병사들은 룩셈부르크 출신 병사 1개 중대를 포함하여 '피론 여단'을 조직했다. 피론 여단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프랑스, 네덜란드 전투에 참전했다. 벨기에인들은 영국 특수 부대에도 참가하여 이탈리아 전선과 발헤렌 섬 상륙 작전에 참여했다. 제5 특수 공수 부대는 벨기에인으로만 구성되었다.
벨기에의 2개 비행대(총 400명 이상)는 영국 공군에서 제349 비행대대와 제350 비행대대로 50대 이상 격추 기록을 세웠다.[234] 대서양 해전에서 벨기에인(1943년 약 350명)은 코르벳 2척과 소해정 몇 척을 운용했다.[235]
벨기에령 콩고는 공안군 병사들이 동아프리카 전역에서 이탈리아군과 전투에 참여하고, 중동과 버마 전투에도 참여했다. 콩고의 고무와 우라늄은 연합국에 필수적이었으며, 맨해튼 계획에 사용된 우라늄은 유니온 미니에르사가 콩고 카탕가주에서 채굴했다.
벨기에는 1944년 9월 해방 때까지 독일 군정 하에 있었다. 메헬렌 근처 브레엔동크 요새는 나치에 의해 유대인, 정치범, 레지스탕스 구류 및 심문에 사용되었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브레돈크 요새 감금자 3,500명 중 1,733명이 사망했다.[236] 약 300명이 수용소 내에서 살해되었고, 최소 98명은 영양실조나 고문으로 사망했다.[237][238]
1940년 벨기에 거주 유대인 약 7만 명 중 46%가 메헬렌 수용소에서, 5,034명이 드랑시 수용소를 통해 이송되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28회에 걸쳐 유대인 25,257명과 로마인 351명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 등 동유럽으로 이송되었고, 1,205명만이 생존했다.
벨기에에서는 모든 계층에서 독일 점령에 대한 저항이 나타났지만, 단편화되었다. 공산주의 독립전선과 극우 렉시즘 조직, 벨기에 군단 등 다양한 조직이 있었다.
주로 연합군 항공병 탈출을 돕는 형태로 저항이 이루어졌으며, 코멧 라인은 약 14,000명을 지브롤터로 탈출시켰다.[239] G 그룹의 사보타주는 나치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240] 제20호송 열차 습격과 같이 레지스탕스는 유대인과 로마인을 강제 수용소 이송에서 구출했다. 1941년 6월 브뤼셀 시의회는 노란색 배지 배포를 거부했다.[241] 약 2만 명의 벨기에인들이 유대인과 정치적 반체제 인사를 숨겼다.[242]
나치 점령기에 데블라흐, 플랑드르 국민 연합, 렉시즘 등 대독 협력 단체들이 있었다. 이들은 벨기에인에게 독일군 종군을 촉진했다. 무장 친위대에는 제27SS 의용척탄병 사단 (플랑드르인), 제28SS 의용척탄병 사단 (왈롱인)이 있었다. 베르디나소 등 일부는 플랑드르 분리주의를 주장했지만 지지를 얻지 못했다.
전후, 브레엔동크 요새 감시병 등 대독 협력자는 재판 후 투옥되거나 총살되었다.
벨기에는 1944년 말 영국, 캐나다, 미국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1944년 9월 3일 웨일스 근위대가 브뤼셀을, 9월 4일 영국 제2군이 앤트워프를 해방했고, 캐나다 제1군은 앤트워프 주변에서 전투를 시작했다. 1944년 10월 스헬데 전투는 앤트워프로 가는 수로 확보를 위해 네덜란드 영토에서 주로 벌어졌다. 1944-1945년 겨울 벌지 전투에서 앤트워프는 독일군 목표였고, 벨기에 영토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벨기에 해방 후, 국내에 남아있던 많은 벨기에인들이 57개 척탄병 대대에 편입되었다. 종전까지 벨기에인 10만 명이 연합군에 동원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벨기에는 전쟁 피해가 제한적이었고 경제 부흥을 보였다.[98] 나치와의 전시 협력에 대한 조사는 많은 사람들의 숙청 및 구금으로 이어졌다. 저항 운동과 연결된 공산당은 1944년과 1947년 사이에 연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왕실 문제"로 정치적 안정성이 악화되었다. 1944년 9월, 레오폴드 3세 부재 중에 정부는 그의 동생 샤를 왕자에게 섭정을 수여하고, 레오폴드 3세는 왕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망명에 남도록 했다. 플란데런인과 기독교민주당원들은 국왕의 귀국을 지지한 반면, 왈롱인, 사회당, 자유당원들은 반대했다. 1950년 국민 투표에서 58%가 귀국을 지지했지만, 그해 국왕이 귀국하자 왈롱 지방은 내전 위기에 놓였다. 1951년 7월, 레오폴드 3세가 퇴위하고 보두앵이 국왕이 될 때까지, 그해 8월부터 보두앵이 일시적으로 왕위를 대행했다.
1950년대 레오폴드빌에서 벨기에령 콩고의 식민 지배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1960년 벨기에령 콩고는 콩고 위기 속에서 독립했고, 2년 후 르완다-우룬디도 독립했다.
1940년 독일군에 항복했던 레오폴드 3세는 전후 석방되었지만, 정부 각료들이 영국으로 탈출한 상황에서 항복했기에 국가 반역 여부를 두고 헌법적 논란이 발생했다. 많은 벨기에인, 특히 사회주의자들은 그가 나치와 협력했을 수 있다고 우려하여 권력 복귀에 반대했다. 그는 1940년 11월 19일 베르히테스가덴에서 히틀러를 만났고, 전쟁 중 릴리안 바엘스와 재혼했다. 1950년까지 스위스에 유폐되었고, 샤를 왕자가 섭정을 맡았다.
1950년 국민투표에서 플랑드르는 70%가 복귀에 찬성했지만, 왈로니아는 58%가 반대했고, 브뤼셀도 51%가 반대했다. 전체적으로 57.68%가 찬성했지만, 리에주, 에노 등 도시에서 무장 사회주의 운동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총파업을 촉구했다. 결국 1951년 7월 16일, 레오폴드 3세는 아들 보두앵에게 양위했다.
벨기에군은 ''독일 주둔 벨기에군''(FBA-BSD)으로 서독 일부를 점령했다. 마지막 벨기에 군인들은 2002년에 독일을 떠났다.[98]
1950년, 벨기에 육군 자원병 부대가 유엔을 위해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벨기에 유엔군 사령부(BUNC)는 1951년 초 한국에 도착, 임진강 전투, 학탕니, 채털 등 주요 교전에서 싸웠다. 300명 이상이 전사했고, 1955년에 귀환했다.[99][100]
폴-앙리 스파크: 세 차례 총리 역임, 스파크 보고서 저자, ECSC와 EEC 등 국제 기구 지지]1944년 9월 5일, 베네룩스 관세 동맹이 창설되어 1948년 발효되었다. 1958년 2월 3일 헤이그 조약으로 베네룩스 경제 동맹으로 대체되어 1960년 11월 1일 소멸되었다. 베네룩스 의회는 1955년 창설되었다.
1948년 3월 17일,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프랑스, 영국 간 브뤼셀 조약은 NATO 전신으로 여겨지며, 벨기에는 1949년 4월 4일 공식 회원국이 되었다. NATO 본부는 브뤼셀에, SHAPE 본부는 몬스 근처에 있다.
벨기에는 1952년 7월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ECSC), 1957년 3월 25일 로마 조약으로 결성된 유럽 경제 공동체 창립 멤버였다.[101] 1985년부터 솅겐 지역 회원국이다.[102]
1948년부터 1951년까지 미국 마셜 플랜으로 5.59억달러 무상 원조를 받았다. 주요 목표는 미국식 경영 및 노동 관행에 따른 생산성 성장이었다. 벨기에 고용주 일부는 임금 상승에 따른 생산성 증가에 관심이 있었지만, 미국은 조합주의적 협상 구조 강화를 포함한 "생산성 정신"을 불어넣으려 했다. 1952년 벨기에 생산성 증진 사무소 설립 후, 프로그램의 정치적 성격이 분명해졌다. "생산성 정책"은 사회 개혁과 일치하여 성공했지만, 경제적 측면 실패로 무력화되었다. 미국은 벨기에 중공업 지배 금융 그룹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고, 이들은 대규모 혁신 및 투자를 하지 않아 미국 영향력을 제한했다. 미국식 패러다임은 경영자 훈련 등으로 유입되었다.[103]
전후 정부는 부채를 탕감하고 고속도로를 건설했으며, 경제와 생활 수준이 크게 상승했다. 로버트 길데아는 "사회 및 경제 정책은 사회 개혁으로 완화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회복 설계, 노동조합은 인플레이션 억제 위한 가격 및 임금 정책 관여, 연합군이 앤트워프를 전쟁 물자 진입 지점으로 사용, 높은 경제 성장과 임금 결합한 벨기에 기적"이라고 언급했다.[104] 1961년까지 벨기에 노동자 임금은 "공동 시장 지역에서 프랑스 다음으로 높고", 네덜란드보다 40% 더 많았다.[105]
전후 풍요에도 불구하고, 1967년 생계 보장 국민 행동은 90만 명 이상(인구 약 10%)이 빈곤 속에 살고 있다고 주장했고, 1970년대 초 대체 경제 실무 그룹은 인구 약 14.5%가 빈곤하다고 추정했다.[106]
플란데런은 전쟁 중 파괴되었고 농업 지역이었기에 유럽 연합과 전신 기구 가입으로 혜택을 받았다. 왈로니아는 광산과 공장 제품 수요 감소로 쇠퇴했다. 두 지역 간 경제 균형은 1939년 이전보다 왈로니아에 덜 유리하게 유지되었다.
1950년 선거 후, 기독교 사회당(PSC-CVP) 정부가 집권했다. 피에르 아르멜 교육부 장관은 사립(가톨릭) 학교 교사 임금 인상, 학생 수 연계 보조금 도입으로 반성직주의적 자유당과 사회당에게 "선전포고"로 인식되었다.
1954년 선거에서 사회당과 자유당 연립 정부가 집권, 레오 콜라르 교육부 장관은 세속 학교 설립, 학위 교사만 허용으로 사제들을 교직에서 내쫓아 가톨릭 블록의 항의를 받았다. 가스통 에이스켄스 가톨릭 소수 정부에서 타협, 1958년 11월 6일 "학교 협정"으로 "학교 전쟁"이 종결되었다.[107]
1959년 콩고 폭동 후, 독립 전환이 가속화되었다. 1960년 6월, 벨기에령 콩고는 파트리스 루뭄바가 이끄는 콩고 제1공화국으로 대체되었다. 벨기에군 철수 후 공공군이 콩고 통제, 백인 공격으로 질서가 무너졌다. 벨기에군은 국민과 장교 대피를 위해 파견되었다.
1960년 7월, 남부 카탕가 주는 카탕가국으로 독립, 벨기에 광산 회사와 군인 지원을 받았다. 국제 연합 평화 유지군이 배치되었고, 사우스 카사이도 독립했다. 서방은 조셉 모부투 지원, 루뭄바는 살해, 내전 발발, 벨기에 공수 부대는 키상가니 인질 구출(''용 작전'')을 위해 배치되었다. 모부투는 통일 국가 통치, 국명을 자이르로 변경했다.
2014년 벨기에 연방 선거 플라망 민족주의 정당 신플람스 연합(N-VA) 이득, 연립 정부 유지. 2014년 7월 22일, 필리프 국왕 샤를 미셸(MR), 크리스 피터스(CD&V) 새 연립 정부 구성 지명.[127]
2019년 7월, 샤를 미셸 총리 유럽 이사회 의장 선출.[128]소피 윌메스 벨기에 최초 여성 총리.[129] 알렉산더 드 크로 2020년 10월 총리.[130]
20. 연방제의 창조
플라망인과 왈롱인 사이의 언어 및 경제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1962년~1963년에는 언어 경계가 정해지고 브뤼셀 주변은 2개 국어 사용 지역으로 지정되었다.[260] 1969년~1970년에는 루뱅 대학교가 플라망어 캠퍼스와 프랑스어 캠퍼스로 분리되었다.[260]
1970년, 첫 번째 국가 개혁을 통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 사용 지역에 3개의 문화 공동체가 설립되어 플라망의 문화 자율성 요구에 대응했다. 같은 해 헌법 개정으로 왈론과 브뤼셀의 프랑스어 사용 주민의 경제 자율성 요구에 대응하여 3개의 지역 설립의 기초가 마련되었다.[261] 1970년 2월 18일, 가스통 에이스켄스 총리는 "La Belgique de papa"(아버지의 벨기에, 즉 단일 국가 벨기에)의 종말을 선언했다.
1980년, 두 번째 국가 개혁으로 문화 공동체는 공동체가 되었고, 문화 문제와 '사람과 관련된 문제'(건강 및 청소년 정책 등)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로써 플람스 공동체, 프랑스어 공동체, 독일어 사용 공동체가 성립되었다. 같은 해 플람스 지역과 왈롱 지역이 설립되었고, 플란데런에서는 공동체와 지역 기관을 즉시 병합하기로 결정했다. 1970년에 브뤼셀 지역 설립이 규정되었지만, 실제 설립은 세 번째 국가 개혁까지 기다려야 했다.
1988년~1989년, 빌프리트 마르텐스 총리 하의 세 번째 국가 개혁으로 브뤼셀 수도 지역이 설립되어 자체 지역 기관과 공동체 문제를 위한 네덜란드어 및 프랑스어 기관을 갖게 되었다. 브뤼셀 수도 지역은 19개의 지방 자치체로 제한되었다. 공동체와 지역의 권한이 확대되었고, 특히 교육이 공동체로 이관되었다.
1993년, 장 뤽 드하네 총리 하의 네 번째 국가 개혁으로 벨기에는 완전한 연방 국가가 되었다. 벨기에 헌법 제1조는 "벨기에는 공동체와 지역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이다"로 수정되었다. 공동체와 지역의 책임과 자원이 확대되고 재정적 책임이 더 커졌다. 공동체와 지역 의회가 직접 선거로 선출되고, 브라반트주가 플람스 브라반트주와 왈롱 브라반트주로 분할되었으며, 벨기에 연방 의회의 양원제 시스템과 연방 의회와 연방 정부 간의 관계가 개혁되었다.
2001년, 가이 베르호프스타트 총리 하의 다섯 번째 국가 개혁으로 농업, 어업, 대외 무역, 개발 협력, 선거 비용 감사, 정당 재정 지원 등 더 많은 권한이 공동체와 지역으로 이관되었다. 지역은 12개의 지역 세금을 담당하고, 지방 및 주 정부는 지역의 문제가 되었다. 브뤼셀 기관의 기능도 수정되어 브뤼셀 수도 지역 의회에서 플라망 주민의 대표성이 보장되었다.
2011년 말, 여섯 번째 국가 개혁으로 상원이 직접 선출되지 않고 지역 의회 회의가 되었으며, 브뤼셀 수도 지역에 헌법 자치가 부여되고, 지역은 경제, 고용, 가족 복지 권한과 더 큰 재정 자율성을 얻었다.[262]
1999년 식품 오염 스캔들인 첫 디옥신 사건 이후, 히 버르호프스타트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균형 예산, 세금 개혁, 노동 시장 개혁, 예정된 탈핵, 전쟁 범죄 기소 완화, 마약 사용 기소 완화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113][114]안락사 제한이 완화되고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었다. 또한 정부는 아프리카에서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다. 그러나 2007년 선거에서 버르호프스타트의 연정은 패배했고, 이후 벨기에는 장기간의 정치적 위기를 겪었다.
1960년대부터 대부분의 정당들은 언어적 분열을 겪었다. 가톨릭당은 1968년에, 벨기에 사회당은 1978년에 프랑스어 사용 정당인 사회당프랑스어과 플랑드르의 사회당으로 분열되었다.[113] 자유당 또한 1992년에 지역별로 분열되었다.
1996년 마르크 뒤트루 사건으로 정치 및 사법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흔들렸다. 국회 조사 결과 경찰의 무능함과 관료주의, 사법 시스템의 문제점 등이 드러났다. 1996년 10월 26일, 약 30만 명의 벨기에인들이 브뤼셀에서 항의 시위인 "백색 행진"에 참여했다.[114]
1999년 총선에서 "다이옥신 파동"으로 인해 전통적인 정부 정당들이 큰 패배를 겪었고, 기 베르호프스타트는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녹색당으로 정부를 구성했다.
1999년 7월, 녹색당과 플람스 자유민주당 연합 정부는 벨기에의 7개 원자로를 40년간 운영한 후 점진적으로 폐쇄할 것을 발표했다.[121] 2003년 총선 이후에도 정책 전환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으며,[122] 특히 2002년 티앙주 원자로 사고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123]
벨기에 정부는 2003년 이라크 위기 당시 이라크 전쟁에 강력히 반대했다. 기 베르호프스타트 정부는 대량 살상 무기에 대한 외교적 해결책을 제안했다.[124]
2003년 1월 30일, 벨기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한 국가가 되었다. 2005년에는 동성 파트너의 입양을 허용하는 제안이 통과되었다.
엘리오 디 루포,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벨기에 총리
2010년 벨기에 연방 선거는 매우 분열된 정치 지형을 만들었다. 11개 정당이 벨기에 하원에 진출했지만, 어느 정당도 20%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분리주의 정당인 신 플람스 동맹(N-VA)은 플랑드르와 벨기에 전체에서 가장 큰 정당으로, 하원 150석 중 27석을 차지했다. 벨기에는 선거 후 새로운 민주 정부를 구성하는 데 353일이 걸려, 세계 기록을 경신했다.[125] 마침내 2011년 12월 6일에 사회당 소속의 엘리오 디 루포가 총리가 되어 정부 연립이 출범했다.[126]
2014년 벨기에 연방 선거에서 플라망 민족주의 정당인 신플람스 연합(N-VA)은 더 많은 선거 이득을 얻었지만, 현 연립 정부는 견고한 과반수를 유지했다. 2014년 7월 22일, 필리프 국왕은 새로운 연립 정부 구성을 이끌 사람으로 샤를 미셸(MR)과 크리스 피터스(CD&V)를 지명했다.[127]
2019년 7월, 샤를 미셸 총리는 유럽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28] 그의 후임인 소피 윌메스는 벨기에 최초의 여성 총리였다.[129] 알렉산더 드 크로는 2020년 10월에 총리가 되었다.[130]
참조
[1]
서적
A Geography of Europe
Macmillan
1921
[2]
백과사전
Oxford dictionary of phrase and fable
Oxford University Press
2021-03-21
[3]
간행물
Notre nom national
http://www.persee.fr[...]
1925
[4]
문서
Gallic War
https://www.perseus.[...] [5]
간행물
Gallia Belgica: An Entity with No National Claim
2011
[6]
간행물
Gallia Belgi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5
[7]
웹사이트
Descriptions of Fossil Neandertals
http://www.boneandst[...]
Bone and Stone
2012-11-07
[8]
간행물
Boerderij uit de jonge steentijd ontdekt in Riemst
http://www.archeonet[...]
2011-09-30
[9]
간행물
Bridging the gap. The Mesolithic-Neolithic transition in a frontier zone
2007
[10]
웹사이트
100,000 Year-old DNA Sequence Allows New Look At Neandertal's Genetic Diversity
https://www.scienced[...]
Sciencedaily.com
2012-11-07
[11]
간행물
Pots, Farmers and Foragers: How Pottery Traditions Shed a Light on Social Interaction in the Earliest Neolithic of the Lower Rhine Area
Amsterdam University Press
2011
[12]
간행물
Inhabitées ou invisibles pour l'archéologie
https://lirias.kuleu[...]
2004
[13]
간행물
Tussen SOM en TRB, enige gedachten over het laat-Neolithicum in Nederland en België
https://www.openacce[...]
1983
[14]
서적
De Taalgrens: Van de oude tot de nieuwe Belgen
Davidsfonds
1996
[15]
웹사이트
Povinzen
http://www.antikefan[...]
Antikefan
2005-08-17
[16]
웹사이트
Architecture in Belgium: Antwerp
http://www.bc.edu/bc[...]
Boston College
1997
[17]
서적
The Political Economy of Nation Building: The World's Unfinished Business
Transaction Publishers
2012
[18]
서적
The Growth of the Antwerp Market and the European Economy: Interpretation
Nijhoff
1963
[19]
서적
The Rise of Merchant Empires: Long-Distance Trade in the Early Modern World, 1350–175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20]
서적
Mummies, Cannibals and Vampires: the History of Corpse Medicine from the Renaissance to the Victorians
Taylor & Francis
2012
[21]
서적
The Dutch Revolt
Penguin Books
1990
[22]
서적
The Spanish People: Their Origin, Growth and Influence
[23]
서적
The Causes of War: Volume III: 1400 CE to 1650 CE
Bloomsbury Publishing
2017
[24]
문서
Alexander Farnese and the Origins of Modern Belgium
1993
[25]
문서
Reconquista and Reconciliation in the Dutch Revolt: The Campaign of Governor-General Alexander Farnese (1578–1592)
2012
[26]
서적
The Cambridge Illustrated Atlas of Warfare: Renaissance to Revolution, 1492–1792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27]
문서
The Counter-Reformation of the Refugee: Exile and the Shaping of Catholic Militancy in the Dutch Revolt
2012
[28]
서적
Wars of the Age of Louis XIV, 1650–1715: An Encyclopedia of Global Warfare and Civilization
Bloomsbury Academic
2008
[29]
뉴스
Belgium
https://www.britanni[...]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2012-11-03
[30]
문서
The Business Classes and the Revolution Outside France
https://www.jstor.or[...]
1958
[31]
문서
The French Revolution: A Belgian Perspective
1986
[32]
웹사이트
Belgium under French Administration, 1795–1799
http://www.zum.de/wh[...]
Korean Minjok Leadership Academy
2008-04-03
[33]
웹사이트
The Flemish Peasants War of 1798
http://www.zum.de/wh[...]
Korean Minjok Leadership Academy
2008-04-02
[34]
문서
Nobility, Bourgeoisie and the Industrial Revolution in Belgium
https://www.jstor.or[...]
1984
[35]
문서
Revolutionary Brussels, 1787–1793
Brussels
1984
[36]
논문
The Business Classes and the Revolution Outside France
https://www.jstor.or[...]
1958
[37]
웹사이트
Belgium
http://www.newadvent[...]
1907
[38]
서적
History of the Low Countries
1999
[39]
간행물
La Construction de la Belgique 1828–1847
[40]
문서
[41]
서적
The Transformation of European Politics 1763–1848
1994
[42]
논문
A Most Useful Tool for Diplomacy and Statecraft: Neutrality and Europe in the 'Long' Nineteenth Century, 1815–1914
https://www.tandfonl[...]
2013
[43]
서적
War and society in Europe, 1870–1970
Fontana Paperbacks
1984
[44]
논문
The Rights of Ignorance: Dutch Educational Policy in Belgium 1815–30
1972
[45]
서적
A History of the Global Economy. From 1500 to the Presen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6
[46]
서적
The Industrial Revolution in Iron; The impact of British Coal Technology in Nineteenth-Century Europe
Ashgate
2005
[47]
논문
Recent work in Belgian Historical Demography / Revue Belge d'Histoire Contemporaine / Belgisch Tijdschrift voor Nieuwste Geschiedenis
2001
[48]
서적
A house divided: Catholics, Socialists, and Flemish nationalists in nineteenth-century Belgium
1997
[49]
서적
Coal and steel in Western Europe
1957
[50]
서적
Railways and the economic development of Western Europe, 1830–1914
1983
[51]
서적
France and the economic development of Europe, 1800–1914
2000
[52]
간행물
Nationalism, Democracy and the Belgian State
Oxford
1966
[53]
서적
The Mexican Adventure 1861–67
https://archive.org/[...]
Bloomsbury USA
1994-07-28
[54]
서적
Marx and Engels on the Trade Unions.
Praeger, New York
1987
[55]
서적
The Development of Welfare States in Europe and America
Transaction
1995
[56]
문서
The Encyclopedia of Social Reform Including Political Economy, Political Science, Sociology and Statistics
1897
[57]
웹사이트
Fundamenten. Sociale zekerheid in onzekere tijden. Matthias Somers (red.)
https://socialsecuri[...] [58]
서적
Social Health Insurance Systems In Western Europe
2004
[59]
웹사이트
Peace Handbooks: The Netherlands, no. 25-29
https://books.google[...]
1920
[60]
서적
Experiencing Wages Social and Cultural Aspects of Wage Forms in Europe Since 1500
2003
[61]
서적
Trade Unions in Western Europe Since 1945
2017
[62]
서적
The Performance of Social Systems Perspectives and Problems
2012
[63]
서적
De Christelijke arbeidersbeweging in België Part 2
1991
[64]
서적
Two Centuries of Solidarity German, Belgian, and Dutch Social Health Care Insurance 1770-2008
2009
[65]
서적
Employment Policies for Disabled People in Eighteen Countries A Review
International Labour Office, University of York. Social Policy Research Unit, Commission of the European Communities
1997
[66]
간행물
Monthly Labor Review, August 1943, Vol. 57, No. 2
1943-08
[67]
웹사이트
Rechtskundig Weekblad, ZJOlNIDAJG, 9 JUNl 1957, 20e JAARGANG.- Nr 38
https://rw.be/archie[...]
1957-06-09
[68]
웹사이트
Report from Belgium
http://www.db-decisi[...]
European Database – Women in Decision-making
2012-11-03
[69]
서적
History and Memory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2
[70]
서적
The Penguin Dictionary of Twentieth Century History
Allen Lane
1979
[71]
서적
The age of empire : 1875–1914
Weidenfeld & Nicolson
1995
[72]
웹사이트
Country comparison Belgium vs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2021
https://countryecono[...]
2021-03-18
[73]
웹사이트
Belgium is about 77 times smaller than Congo, Democratic Republic Of.
https://www.mylifeel[...]
2021-03-18
[74]
웹사이트
Countries Compared by Geography > Area > Land. International Statistics at NationMaster.com
https://www.nationma[...]
2021-03-18
[75]
웹사이트
Belgian Congo
http://www.yale.edu/[...]
2013-01-15
[76]
서적
Genocide : a history
Longman
2004
[77]
뉴스
'King Leopold''s Ghost': Genocide With Spin Control
https://www.nytimes.[...]
2014-12-31
[78]
서적
Die neue Völkerwanderung. Wer Europa bewahren will, muss Afrika retten
Propyläen Verlag
2016
[79]
웹사이트
Edmund Dene Morel · Antislavery Usable Past
https://antislavery.[...]
2023-06-06
[80]
간행물
Review of Matthew G. Stanard, ''Selling the Congo: A History of European Pro-Empire Propaganda and the Making of Belgian Imperialism''
https://www.h-net.or[...]
2013-01
[81]
문서
Vanthemsche
2012
[82]
서적
Paris 1919: Six Months That Changed the World
Random House Digital
2003
[83]
서적
German Atrocities, 1914: A History of Denial
Yale University Press
2001
[84]
문서
The Life of Herbert Hoover: The Humanitarian, 1914–1917
George H. Nash
1988
[85]
서적
Herbert Hoover: A Public Life
1996
[86]
문서
Leaving the War: Popular Violence and Judicial Repression of 'Unpatriotic' Behaviour in Belgium (1918–1921).
Laurence VanYpersele, and Xavier Rousseaux
2005
[87]
문서
Ruanda-Urundi 1884–1919
William Roger Louis
1963
[88]
간행물
Education in Ruanda-Urundi, 1946–61
1995
[89]
문서
Chronicle of the 20th Century
Derrik Mercer
null
[90]
문서
Forgotten Allies
J. Lee Ready, Jefferson: McFarland
1985
[91]
문서
Foreign Volunteers of the Allied Forces: 1939–45
Nigel Thomas
1998
[92]
뉴스
« Breendonk, Le Mémorial ne changera pas de nom »
Le Soir
2007-12-06
[93]
웹사이트
Atelier de réflection
http://www.eu-tagung[...]
2012-11-03
[94]
문서
Le projet pédagogique du Mémorial National du Fort de Breendonk
O. Van der Wilt
[95]
서적
Home Run: Escape from Nazi Europe
Penguin
2007
[96]
서적
The Resistance: WWII
Time Life Education
1979
[97]
웹사이트
Museum van Deportatie en Verzet
http://www.cicb.be
2012-11-03
[98]
웹사이트
Des soldats belges en Allemagne 1945–2002
http://www.klm-mra.b[...]
KLM-MRA
2012-11-13
[99]
웹사이트
Belgian Forces in the Korean War (BUNC)
http://hendrik.atspa[...]
hendrik.atspace.com
2012-11-13
[100]
웹사이트
Belgians and the Korean War
http://www.belgiansa[...]
belgiansandthekoreanwar.co.uk
2012-11-13
[101]
웹사이트
Belgium and the European Union
http://diplomatie.b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2012-11-18
[102]
웹사이트
Belgium
http://europa.eu/abo[...]
European Union
2012-11-18
[103]
문서
Productivite Economique et Paix Sociale au sein du Plan Marshall: Les Limites de l'influence Americaine aupres des Industriels et Syndicats Belges, 1948–1960
Kenneth Bertrams
2001
[104]
문서
Surviving Hitler and Mussolini: daily life in occupied Europe
Robert Gildea
[105]
웹사이트
Tony Cliff: Belgium – strike to revolution? (Spring 1961)
https://www.marxists[...] [106]
서적
Poverty and Inequality in Common Market Countries
(1980)
[107]
서적
La laïcité histoires nationales – perspectives européennes; [regards croisés sur la laïcité: droit, histoire, philosophie; actes du colloque de Valence; 12–13 septembre 2002]
J.André
2005
[108]
서적
In the Belgian Château
Ivan R.Dee, Chicago
1994
[109]
간행물
Ethnic structure, inequality and governance of the public sector in Belgium
http://www.unrisd.or[...]
2013-01-28
[110]
웹사이트
Belgium.be
http://www.belgium.b[...]
2011-11-01
[111]
웹사이트
Sixth State Reform
http://www.belgium.b[...]
2013-06-05
[112]
웹사이트
Belgium and the euro
http://ec.europa.eu/[...]
European Commission
2012-11-18
[113]
서적
The Crisis of Belgian Social Democracy
http://www.marxists.[...]
The Socialist Register 1966
2012-11-26
[114]
서적
Introduction to Belgian Law
Kluwer Law International
2001
[115]
웹사이트
Timeline of Events during the Rwandan Genocide
http://americanradio[...]
American Radio Works
2012-11-03
[116]
뉴스
U.N. force looks more European, less multinational
http://www.asiantrib[...]
2012-11-03
[117]
웹사이트
Belgium to send 400 troops to Lebanon
http://www.expatica.[...]
Expatica Communications
2012-11-03
[118]
웹사이트
Belgium to assume command of UNIFIL's maritime task force
http://www.belgium.b[...]
belgium.be
2012-11-03
[119]
웹사이트
Belgische F-16's in Afghanistan zijn Operationeel
http://www.nieuwsbla[...]
Het Nieuwsblad
2012-11-03
[120]
웹사이트
Government deficit/surplus, debt and associated data
https://ec.europa.eu[...]
2001-03-13
[121]
웹사이트
Essential Programme to Underpin Government Policy on Nuclear Power
http://www.scientifi[...]
Scientific Alliance
[122]
웹사이트
Status of nuclear in current member states
http://www10.antenna[...]
World Information Service on Energy
2012-11-25
[123]
웹사이트
Serious incident vindicates Belgian nuclear phaseout
http://www10.antenna[...]
World Information Service on Energy
2012-11-25
[124]
웹사이트
Irak
http://www.gva.be/do[...]
GVA
2006-12-03
[125]
뉴스
The Fries Revolution: Belgium's Political Crisis Foretells EU's Future
http://www.spiegel.d[...]
2012-11-18
[126]
웹사이트
Political crisis nears an end as new PM, cabinet named
https://www.france24[...]
2011-12-05
[127]
웹사이트
Belgium agrees to form coalition government | DW | 07.10.2014
https://www.dw.com/e[...] [128]
웹사이트
Who is Charles Michel, the next President of the European Council?
https://www.thenewfe[...]
2021-08-17
[129]
웹사이트
Belgium gets first female PM as Sophie Wilmès takes office
https://www.theguard[...]
2019-10-28
[130]
웹사이트
Belgium agrees on federal government, de Croo to become PM
https://www.neweurop[...]
2021-03-03
[131]
간행물
The modernization of historiography in 18th-century Belgium
2005
[132]
간행물
Historical representation and the nation-state in romantic Belgium (1830–1850)
https://www.jstor.or[...]
1998
[133]
간행물
At the crossroads of nationalism: Huizinga, Pirenne and the Low Countries in Europe
2010
[134]
간행물
Honderd Jaar Geschiedenis van de Nieuwe Tijd Aan de Universiteit Gent: De Dynamiek van een Selectief En Kritisch Eclectisme
2006
[135]
서적
Glimpses of Europe: A Crucible of Winning Ideas, Great Civilizations and Bloodiest Wars
https://books.google[...]
Gyan Publishing House
[136]
웹사이트
Descriptions of Fossil Neandertals
http://www.boneandst[...]
Bone and Stone
2012-11-07
[137]
Citation
Boerderij uit de jonge steentijd ontdekt in Riemst
http://www.archeonet[...] [138]
Citation
Bridging the gap. The Mesolithic-Neolithic transition in a frontier zone
http://arheologija.f[...] [139]
웹사이트
100,000 Year-old DNA Sequence Allows New Look At Neandertal's Genetic Diversity
https://www.scienced[...]
Sciencedaily.com
2012-11-07
[140]
Citation
Pots, Farmers and Foragers: How Pottery Traditions Shed a Light on Social Interaction in the Earliest Neolithic of the Lower Rhine Area
Amsterdam University Press
[141]
논문
Les Flandres durant la fin du 4° et le debut du 3° millenaire avant notre ere. Inhabitees ou invisibles pour l'archeologie
https://limo.libis.b[...] [142]
논문
Tussen SOM en TRB, enige gedachten over het laat-neolithicum in Nederland en België
https://hdl.handle.n[...] [143]
서적
De Taalgrens: Van de oude tot de nieuwe Belgen
Davidsfonds
[144]
서적
Gallia Belgic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45]
서적
Germania 2
http://www.perseus.t[...] [146]
서적
Gallia Belgic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47]
웹사이트
Povinzen
http://www.antikefan[...]
Antikefan
2018-04-28
[148]
웹사이트
モザン美術
https://kotobank.jp/[...]
2018-04-28
[149]
웹사이트
Architecture in Belgium: Antwerp
http://www.bc.edu/bc[...]
Boston College
2018-04-28
[150]
서적
The Political Economy of Nation Building: The World's Unfinished Business
https://books.google[...]
Transaction Publishers
[151]
서적
The growth of the Antwerp market and the European economy: (fourteenth-sixteenth centuries)
https://books.google[...]
Nijhoff
[152]
서적
The Rise of Merchant Empires: Long-Distance Trade in the Early Modern World, 1350–1750
https://books.google[...]
Cambridge U.P.
[153]
서적
The Dutch Revolt
Penguin Books
1990
[154]
간행물
"Alexander Farnese and the Origins of Modern Belgium"
1993
[155]
간행물
"Reconquista and Reconciliation in the Dutch Revolt: The Campaign of Governor-General Alexander Farnese (1578–1592)"
2012
[156]
간행물
"The Counter-Reformation of the Refugee: Exile and the Shaping of Catholic Militancy in the Dutch Revolt"
2012
[157]
웹사이트
Belgium
http://www.britannic[...]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2012-11-03
[158]
간행물
"The Business Classes and the Revolution Outside France"
https://www.jstor.or[...]
1958
[159]
간행물
"The French Revolution: A Belgian Perspective"
1986
[160]
서적
The General Gazetteer Or Compendious Geographical Dictionary
https://books.google[...] [161]
서적
The Low Countries: 1780–1940
Oxford University Press
1978
[162]
웹사이트
Belgium under French Administration, 1795–1799
http://www.zum.de/wh[...]
Korean Minjok Leadership Academy
2008-04-03
[163]
문서
The Low Countries
[164]
문서
The Low Countries
[165]
웹사이트
The Flemish Peasants War of 1798
http://www.zum.de/wh[...]
Korean Minjok Leadership Academy
2008-04-02
[166]
서적
Belgium: A History
[167]
간행물
"Nobility, Bourgeoisie and the Industrial Revolution in Belgium"
https://www.jstor.or[...]
1984
[168]
서적
Revolutionary Brussels, 1787–1793
Brussels
1984
[169]
간행물
"The Business Classes and the Revolution Outside France"
https://www.jstor.or[...]
1958
[170]
서적
The Congress of Vienna 1814-1815
https://books.google[...]
Routledge
[171]
웹사이트
Belgium
http://www.newadvent[...]
1907
[172]
문서
宗教比例の地図については[http://www.quirksmode.org/politics/kuyper.html map]を参照。
[173]
문서
"The Rights of Ignorance: Dutch Educational Policy in Belgium 1815–30"
[174]
문서
"The Rights of Ignorance: Dutch Educational Policy in Belgium 1815–30"
[175]
서적
History of the Low Countries
1999
[176]
서적
Belgium: a history
Peter Lang
[177]
간행물
"La Construction de la Belgique 1828–1847"
[178]
간행물
[179]
서적
''The Transformation of European Politics 1763–1848''
[180]
서적
War and society in Europe, 1870–1970
Fontana Paperbacks
[181]
논문
"The Rights of Ignorance: Dutch Educational Policy in Belgium 1815–30,"
https://doi.org/10.1[...] [182]
간행물
"The Rights of Ignorance,''
[183]
서적
A History of the Global Economy. From 1500 to the Present.
Cambridge University Press
[184]
논문
"The Industrial Revolution in the Low Countries in the First Half of the Nineteenth Century: A Comparative Case Study,"
https://www.jstor.or[...] [185]
서적
''The Industrial Revolution in Iron; The impact of British Coal Technology in Nineteenth-Century Europe''
Ashgate
[186]
간행물
'Breaking stereotypes'
FLWI.ugent.be [187]
서적
''A house divided: Catholics, Socialists, and Flemish nationalists in nineteenth-century Belgium''
[188]
서적
''Coal and steel in Western Europe''
[189]
서적
''Railways and the economic development of Western Europe, 1830–1914''
[190]
서적
The King incorporated : Leopold the Second and the Congo.
Granta
[191]
서적
The King incorporated : Leopold the Second and the Congo.
Granta
[192]
논문
"Nobility, bourgeoisie and the industrial revolution in Belgium,"
[193]
서적
''The Low Countries,''
[194]
서적
''France and the economic development of Europe, 1800–1914''
[195]
간행물
"Nationalism, Democracy and the Belgian State"
Oxford
[196]
서적
Belgium : a history
Peter Lang
[197]
서적
''Nationalism in Belgium: Shifting Identities, 1780–1995''
[198]
서적
''Nationalism in Belgium: Shifting Identities, 1780–1995''
[199]
서적
The Mexican Adventure 1861–67
[200]
서적
The King incorporated : Leopold the Second and the Congo.
Granta
[201]
서적
The King incorporated : Leopold the Second and the Congo.
Granta
[202]
서적
''The Low Countries''
[203]
서적
''Marx and Engels on the Trade Unions.''
Praeger
[204]
서적
The Development of Welfare States in Europe and America
Transaction
[205]
서적
''Political History of Belgium: From 1830 Onwards''
[206]
웹사이트
Report from Belgium
http://www.db-decisi[...]
European Database – Women in Decision-making
2012-11-03
[207]
서적
History and Memory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8]
서적
Selling the Congo: A History of European Pro-Empire Propaganda and the Making of Belgian Imperialism
https://books.google[...]
U of Nebraska Press
[209]
서적
''The Penguin Dictionary of Twentieth Century History''.
Allen Lane
[210]
서적
The age of empire : 1875–1914
Weidenfeld & Nicolson
[211]
서적
The age of empire : 1875–1914
Weidenfeld & Nicolson
[212]
웹사이트
Belgian Congo
http://www.yale.edu/[...]
2013-01-15
[213]
서적
Genocide : a history
Longman
[214]
뉴스
'King Leopold's Ghost': Genocide With Spin Control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14-12-31
[215]
간행물
"Review\" of Matthew G. Stanard, ''Selling the Congo: A History of European Pro-Empire Propaganda and the Making of Belgian Imperialism"
https://www.h-net.or[...]
H-Empire, H-Net Reviews
2013-01
[216]
서적
Paris 1919: Six Months That Changed the World
https://books.google[...]
Random House Digital, Inc.
[217]
서적
Belgium : a history
Peter Lang
[218]
서적
German Atrocities, 1914: A History of Denial
Yale U.P.
[219]
서적
Belgium : a history
Peter Lang
[220]
서적
Belgium : a history
Peter Lang
[221]
서적
Belgium : a history
Peter Lang
[222]
서적
The Low Countries
[223]
문서
[224]
문서
[225]
서적
The Life of Herbert Hoover: The Humanitarian, 1914–1917
[226]
서적
Herbert Hoover: A Public Life
[227]
문서
[228]
문서
[229]
서적
Belgium : a history
Peter Lang
[230]
간행물
"Leaving the War: Popular Violence and Judicial Repression of 'Unpatriotic' Behaviour in Belgium (1918–1921)."
[231]
서적
Ruanda-Urundi 1884–1919
Oxford U.P.
[232]
간행물
"Education in Ruanda-Urundi, 1946–61, "
[233]
서적
Chronicle of the 20th Century
Dorling Kindersley
[234]
서적
Forgotten Allies
McFarland, Jefferson
[235]
서적
Foreign Volunteers of the Allied Forces: 1939–45
Osprey
[236]
뉴스
« Breendonk, Le Mémorial ne changera pas de nom »
2007-12-06
[237]
웹사이트
Atelier de réflection
http://www.eu-tagung[...]
2012-11-03
[238]
문서
Le projet pédagogique du Mémorial National du Fort de Breendonk
[239]
서적
Home Run: Escape from Nazi Europe
Penguin
[240]
문서
The Resistance: WWII Time Life Education
[241]
웹사이트
Museum van Deportatie en Verzet
http://www.cicb.be
2012-11-03
[242]
웹사이트
Museum van Deportatie en Verzet
http://www.cicb.be
2012-11-03
[243]
웹사이트
Des soldats belges en Allemagne 1945–2002
http://www.klm-mra.b[...]
KLM-MRA
2012-11-13
[244]
웹사이트
Belgian Forces in the Korean War (BUNC)
http://hendrik.atspa[...]
hendrik.atspace.com
2012-11-13
[245]
웹사이트
Belgians and the Korean War
http://www.belgiansa[...]
belgiansandthekoreanwar.co.uk
2012-11-13
[246]
웹사이트
Belgium and the European Union
http://diplomatie.b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2012-11-18
[247]
웹사이트
Belgium
http://europa.eu/abo[...]
European Union
2012-11-18
[248]
논문
"Productivite Economique et Paix Sociale au sein du Plan Marshall: Les Limites de l'influence Americaine aupres des Industriels et Syndicats Belges, 1948-1960,"
2001
[249]
서적
Surviving Hitler and Mussolini: daily life in occupied Europe
[250]
웹사이트
Belgium: Strike to Revolution?
https://www.marxists[...]
2018-05-08
[251]
서적
Poverty and Inequality in Common Market Countries
[252]
서적
La laïcité histoires nationales – perspectives européennes ; [regards croisés sur la laïcité: droit, histoire, philosophie ; actes du colloque de Valence ; 12–13 septembre 2002]
J.André
[253]
서적
In the Belgian Château
Ivan R.Dee, Chicago
[254]
서적
Political History of Belgium: From 1830 Onwards
https://books.google[...]
Asp / Vubpress / Upa
[255]
뉴스
Belgium's Striking Doctors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64-04-07
[256]
뉴스
Doctors in Belgium Strike in a Protest Over Health Plan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1964-04-01
[257]
뉴스
Belgien/Ärztestreik: Am Galgen.
http://www.spiegel.d[...]
Der Spiegel
1964-04-15
[258]
뉴스
Según el ''Bild Zeitung'', tres personas han muerto en Bélgica a consecuencia de la huelga de médicos
http://hemeroteca.ab[...]
ABC
2017-11-19
[259]
뉴스
«Trágicas consecuencias de la huelga de médicos en Bélgica. Han muerto siete enfermos por falta de asistencia».
http://hemeroteca.la[...]
La Vanguardia Española
1964-04-05
[260]
간행물
Ethnic structure, inequality and governance of the public sector in Belgium
http://www.unrisd.or[...]
2013-01-28
[261]
웹사이트
Belgium.be
http://www.belgium.b[...]
2011-11-01
[262]
웹사이트
Sixth State Reform
http://www.belgium.b[...]
2018-05-09
[263]
웹사이트
Belgium and the euro
http://ec.europa.eu/[...]
European Commission
2012-11-18
[264]
서적
The Crisis of Belgian Social Democracy
http://www.marxists.[...]
The Socialist Register 1966
2012-11-26
[265]
서적
Introduction to Belgian Law
https://books.google[...]
Kluwer Law International
[266]
웹사이트
Timeline of Events during the Rwandan Genocide
http://americanradio[...]
American Radio Works
2012-11-03
[267]
웹사이트
U.N. force looks more European, less multinational
http://www.asiantrib[...]
Asian Tribune
2012-11-03
[268]
웹사이트
Belgium to send 400 troops to Lebanon
http://www.expatica.[...]
Expatica Communications
2012-11-03
[269]
웹사이트
Belgium to assume command of UNIFIL's maritime task force
http://www.belgium.b[...]
belgium.be
2012-11-03
[270]
웹사이트
Belgische F-16's in Afghanistan zijn Operationeel
http://www.nieuwsbla[...]
Het Nieuwsblad
2012-11-03
[271]
웹사이트
Essential Programme to Underpin Government Policy on Nuclear Power
http://www.scientifi[...]
Scientific Alliance
2018-05-09
[272]
웹사이트
Status of nuclear in current member states
http://www10.antenna[...]
World Information Service on Energy
2012-11-25
[273]
웹사이트
Serious incident vindicates Belgian nuclear phaseout
http://www10.antenna[...]
World Information Service on Energy
2012-11-25
[274]
웹사이트
Irak
http://www.gva.be/do[...]
GVA
2018-05-09
[275]
웹사이트
The Fries Revolution: Belgium's Political Crisis Foretells EU's Future
http://www.spiegel.d[...]
Spiegel Online
2012-11-18
[276]
논문
The modernization of historiography in 18th-century Belgium
2005
[277]
논문
Historical representation and the nation-state in romantic Belgium (1830–1850)
https://www.jstor.or[...]
1998
[278]
논문
At the crossroads of nationalism: Huizinga, Pirenne and the Low Countries in Europe
2010
[279]
논문
Honderd Jaar Geschiedenis van de Nieuwe Tijd Aan de Universiteit Gent: De Dynamiek van een Selectief En Kritisch Eclectisme
200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