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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계 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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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추계 추씨는 한국의 성씨로, 시조는 중국 남송 시대의 문과 급제자 추엽이다. 추엽은 고려 인종 때 함흥 연화도에 정착하여 추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 추황, 추적 등이 고려 시대에 문과 급제, 벼슬 등을 역임하며 가문을 번성시켰다. 추적은 《명심보감》을 편찬하여 중국에 전파하기도 했다. 추씨는 추계(秋溪)를 본관으로 하며, 2015년 대한민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60,483명이 추계 추씨로 조사되었다. 추씨는 역사적으로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며, 인흥서원, 추적 신도비, 명심보감 판본 등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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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경호는 경상북도 달성군 출생으로 고려대학교와 미국 오리건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행정고시 합격 후 경제 관료로 활동하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국무조정실장 등을 역임하고 제20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현재 국민의힘 원내대표이다.
추계 추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성씨 정보
성씨추계 추씨
한자 표기秋溪秋氏
관향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추계리
나라한국
시조추엽(秋饁)
중시조추적(秋適)
집성촌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충청남도 공주시 장기면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주요 인물추익한
추수경
추규영
추경석
추광영
추송웅
추준석
추성춘
추욱호
추병직
추규호
추재엽
추미애
추종연
추경호
년도2015
인구49,017명

2. 역사

추계 추씨의 시조 추엽(秋饁)은 남송 고종 소흥 11년(1141년) 문과에 급제하여 적부라(籍符羅)직을 역임하였다. 고려 인종 때 가족을 이끌고 함흥 연화도(蓮花島)에 정착하여 한국 추씨의 시조가 되었다.[1]

추엽의 아들 추황(秋簧 = 추영수(秋永壽))은 고려 희종 5년(1209년) 국자시에 장원급제하고,[2] 강종 3년(121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몽골 침략기에 왕을 보필한 공으로 예문관 대제학,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고, 훌륭한 제자를 많이 배출하여 이학종사(理學宗師)로 추앙받았다.

추황의 아들 추적(秋適)은 고려 원종 원년(1260년)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충렬왕 때 민부상서(民部尙書)와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3] 추적은 《명심보감(明心寶鑑)》을 편찬하여 중국에 전파하였다.[4]

2. 1. 시조 및 고려 시대

추씨 시조 '''추엽'''(秋饁)은 남송 고종 때인 1141년 문과에 급제하여 적부라(籍符羅)직을 역임하였다. 고려 인종 때 가족을 이끌고 함흥 연화도(蓮花島)에 정착하여 한국 추씨 시조가 되었다. 추엽의 묘소는 함경남도 함흥시 연화도에 있으며, 1868년(고종 5년) 통훈대부 연천현감(漣川縣監) 남정하(南廷夏)가 묘갈명(墓碣銘)을 썼다.[1]

추엽의 아들 추황(秋簧, 추영수(秋永壽))은 1209년(희종 5) 국자시에 장원급제하고,[2] 1213년(강종 3)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몽골 침략으로 1232년(고종 19년)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항전하던 시기에 임금을 잘 모신 공으로 예문관 대제학,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으며, 뛰어난 제자를 많이 배출하여 이학종사(理學宗師)로 추앙받았다.

추황의 아들 '''추적'''(秋適)은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한 뒤 안동서기(安東書記)·직사관(直史館), 좌사간(左司諫)을 거쳐 충렬왕 때 민부상서(民部尙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3] 추적은 시랑(侍郞) 겸 국학교수(國學敎授)로 재임할 때 《명심보감(明心寶鑑)》을 편찬하여 중국에 전파하였다.[4]

2. 2. 명나라 시대

추적의 손자 추유는 명나라 개국공신이 되었다. 추유의 5대손 추수경1591년 명나라 무강자사(武康刺史)가 되었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황제에게 간청하여 조선 파병을 결정하게 하였다. 이여송의 부장(副將)으로 아들 5형제(추로, 추적, 추국, 추지, 추란)와 함께 참전하였다. 곽산, 동래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 전사하여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추봉되었다.[6]

3. 본관

추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60,483명으로 조사되었다. 추씨는 추계를 단일 본관으로 한다. 《조선씨족통보》와 《증보문헌비고》 등에 추씨는 개성, 강화, 파평 등 47본까지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추계 추씨의 세거지명이다. 함흥 추씨, 양지 추씨는 본관 이칭으로 동원분파이다.

추계현은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일대를 말한다. 추적고려 왕실로부터 받은 사패지에 추계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지명이 유래했다.

1864년(조선 고종 원년) 대구 인흥서원에 설치된 노당 선생 신도비 금석문에 추계가 추씨의 본관으로 사용하게 된 내력이 설명되어 있다. 1865년 전국의 추씨 종친 대표들은 모든 추씨가 추적 3세조의 자손이므로 관향을 추계로 통일하는 것에 만장일치로 합의했고, 예조에서 이것을 공인함으로써 추씨는 모두 추계 추씨 한 본으로 되돌아갔다.

3. 1. 분관

추적의 손자 추유(秋濡)는 중국으로 귀환하여 명나라 개국공신이 되었다. 추유의 5대손인 추수경(秋水鏡)은 중국 귀주성(貴州省) 오현군(五賢郡) 출신으로 1591년 명(明)나라의 무강자사(武康刺史)가 되었으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황제에게 간청하여 조선 파병을 결정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부장(副將)이 되어 아들 5형제(추로(秋蘆), 추적(秋荻), 추국(秋菊), 추지(秋芝), 추란(秋蘭))를 데리고 원병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곽산, 동래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명으로 돌아가지 않고 함께 참전한 아들들과 전주의 추동(秋洞)에서 살았다. 정유재란 때 전주싸움에서 전사하여 사후에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추봉되었다.[6] 후손들이 추엽을 시조로 하고 추수경을 중시조로 하는 전주 추씨(全州 秋氏)로 분관하였다. 추수경 장군의 묘역은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은하리 추동마을에 있다.

4. 인물

추계 추씨는 고려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4. 1. 역사 인물


  • 추황(秋篁, 1198년 ~ 1259년) : 고려사에는 추영수(秋永壽)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희종 5년(1209년) 국자시에 장원(壯元) 급제하고,[2] 1213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 상서, 예문관 대제학,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왕세자인 원종의 교육을 맡은 사부(師傅)로서도 활동하였다. 훗날 회암 선생을 기리는 제자들에 의해 이학종사(理學宗師)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
  • '''추적'''(秋適, 1246년 ∼ 1317년) : 자는 관중(慣中), 호는 노당(露堂). 1260년(원종 1) 문과에 급제한 뒤 안동서기(安東書記)·직사관(直史館)을 거쳐 좌사간(左司諫)에 올랐다. 충렬왕 때 민부상서(民部尙書)·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역임하고, 시랑 국학교수(侍郞國學敎授)로 재임할 때 『명심보감』을 엮어 가르쳤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 추진(秋震, 1296년 ∼ 1368년) : 호 경재(敬齋). 추적의 장남. 교서랑(校書郞)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원주 판관(判官)을 지낸 다음, 천장시(天場試)에 급제함으로써 일약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공민왕이 등극한 후에 광록대부(光祿大夫) 병부상서(兵部尙書)가 되었다. 친원파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자 과업을 수행하였다. 공민왕 12년에 벼슬에서 물러나 궤장(免杖)을 하사 받았다. 시호는 충효(忠孝).
  • 추뢰(秋雷, 1298년 ∼ 1341년) : 호 익재(益齋). 추적의 차남. 국학에서 배운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사간원 사간(司諫)에 이르렀다.
  • 추유(秋濡, 1345년 ∼ 1404년) : 자 윤지(潤之), 호 운심제(雲心齊). 추진(秋震)의 큰 아들로 밀양부에서 태어났다. 1362년(공민왕 11년) 18세에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하였으나, 권세와 간신배들로 인하여 기울어져 가는 고려를 떠나 중국으로 귀환하였다. 양쯔강 하류 강변에 있는 금산사에 도착하여 주원장을 만나 혈맹을 맺고, 호주 출신의 지장 서달과 탕화(蕩和)와도 동지로서 뜻을 같이하기로 맹세하였다. 1363년 화주에서 반원군(反元軍)의 지도자 진우량의 대군을 격파하였다. 추유는 이 결전에 행군총관(行軍摠管)으로서 치밀한 작전을 세워 성의백(誠意伯)과 함께 첫 출전하여 승전을 올린 것이다. 명나라 개국공신으로 병부시랑(兵部侍郞)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가 되어 북벌군(北閥軍)에 합류하여 원나라의 수도 연경을 점령하고 몽골 세력을 멀리 카라코룸으로 몰아냈다. 벼슬은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이르렀다. 1393년(홍무 26년)에 명나라의 안위사(安慰使)로서 조선을 방문하였다.
  • 추협(秋浹, 1348년 ∼ 1409년) : 호 사암(思庵). 추진(秋震)의 차남. 1363년 형 추유를 따라 중국으로 떠났다. 저장성에서 농민군을 모아 한때 8,000명의 군세를 거느리고 명나라 창업에 큰 훈공을 세워 추유와 함께 건국 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벼슬은 태복(太僕)에 이르렀다.
  • 추영(秋瀅, 1315년 ∼ 1400년) : 호 낭산(琅山). 추뢰의 아들. 충목왕철성부 판관(鐵城府判官)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일을 잘 한다는 평가를 받아 왕명을 출납(出納)하는 요직인 지신사(知申事)로 승진하였는데, 이를 시기하는 소인배들의 참소로 부당한 탄핵을 받아 한때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얼마 후에 공민왕이 즉위하자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다. 이성계 일당의 역성혁명을 보고 분개한 추영은 관직을 버리고 한때 현령(縣令)으로 있었던 강원도 평창으로 들어가 청빈낙도하며 초야에 묻혀 시서(詩書)를 벗삼아 여생을 보냈다.
  • 추귤(秋橘, 1370년 ∼ 1438년) : 호 쌍곡(雙谷). 추유의 아들. 1392년(명나라 홍무 25년) 문과에 급제한 뒤 산동첨사(山東僉事)가 되자 영락제를 황제의 보위에 올린 공신이 되어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렀다.
  • 추익한(秋益漢, 1383년 ∼ 1457년) : 8세손. 호 우천(愚川), 자 우삼(友三), 초명 추한복(秋漢復).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호조좌랑(戶曹佐郞)을 거쳐 호조정랑(正郞)으로 승진한 뒤, 한성부윤을 끝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인 강원도로 낙향하였다. 단종 유배 중 극진히 모신 충신으로 영월 영모전충절사엄흥도·정사종과 함께 배향되었다.
  • 추섭(秋燮, 1416년 ∼ 1476년) : 호 길천(吉泉). 추귤의 아들. 1438년(정통 3년) 명나라 문과에 급제하여 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한 뒤 안찰사(按察使)가 되었다.
  • 추서(秋墅, 1444년 ∼ 1514년) : 호 해봉(海峯). 추섭의 아들. 명나라 성화 원년(1465년) 문과에 급제한 뒤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되었을 때 왜구가 명나라 해안의 도처에 침범하자 봉수제(烽燧制)를 시행함으로써 왜구를 소탕하였다. 벼슬은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다.
  • 추천일(秋天日, 1488년 ∼ ?) : 호 연월당(煙月堂). 추서의 아들. 명나라 정덕 원년(1506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정덕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좌시랑(吏部左侍郞)에 이르렀다.
  • 추수경(秋水鏡, 1530년 ∼ 1600년) : 자는 청하(淸河), 호는 세심당(洗心堂). 중국 구이저우성 오현군 칠성동(七聖洞)에서 추천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나라 문과에 급제하여 안찰사(按察使) 등 요직을 역임한 후, 벼슬은 무강자사(武康刺史)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제독 이여송의 부장(副將)으로서 명나라 총병아장(摠兵亞將)으로 아들 5형제와 함께 조선에 파병되었다. 곽산, 동래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명으로 돌아가지 않고 함께 참전한 아들들과 전주의 추동(秋洞)에서 살았다. 정유재란 때 전주싸움에서 전사하여 사후에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추봉되었다.
  • 추응현(秋應賢) : 겸사복(兼司僕) 추상익의 아들. 정조 8년 무과 급제하였다.
  • 추치경(秋致鏡) : 한말(韓末) 칠의사(七義士)의 한 사람, 충주 장현(長峴)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 추용만과 추용소 형제는 합천에서 결사대를 조직하고 일본 수비대를 공격하다 순국하였다.
  • 추기엽(秋琪燁) : 항일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 추교철(秋敎哲, 1885년 ~ 1951년) : 독립운동가. 1919년 7월 군자금 모집을 통해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비밀결사 독립애국단을 조직하였다. 동단은 임시정부로부터 군자금 모금지령서를 교부받아 자산가들에게 독립군 명의의 사형선고서를 우송하며 군자금 수합활동을 폈다. 1920년 일경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추규영(秋圭映) : 독립운동가. 동래군청 앞에서 장날에 모인 군중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 추경석(秋敬錫) : 제8·9대 국세청장, 제2대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재임하였다.
  • 추준석(秋俊錫) : 통상산업부 차관보, 중소기업청장, 부산항만공사 사장으로 재임하였다.
  • 추병직(秋秉直) : 제13대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재임하였다.
  • 추규호(秋圭昊) : 주영국 특명전권대사, 한국외교협회 부회장으로 재임하였다.
  • 추재엽(秋在燁) : 제10·12·14대 서울특별시 양천구청장으로 재임하였다.
  • 추미애(秋美愛) : 제15대·20대 국회의원. 제67대 법무부 장관으로 재임하였다.
  • 추종연(秋宗淵) : 주콜롬비아 특명전권대사로 재임하였다.
  • 추경호(秋慶鎬) : 제6대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제20·21대 국회의원으로 재임하였다.

5. 항렬자

추씨는 세대별로 항렬자를 공유한다.

19세20세21세22세23세24세25세26세27세28세29세30세31세32세33세34세35세36세37세38세39세40세41세42세43세44세45세46세47세48세
혁(赫), 현(顯), 종(鍾)口규(圭), 口주(周), 口순(淳)용(鏞), 종(鍾), 상(相)口구(求), 口영(永), 口환(煥)병(秉), 동(東), 규(圭)口엽(燁), 口환(煥), 口현(鉉)교(敎), 성(聲), 영(永)口호(鎬), 口수(銖), 口병(柄)연(淵), 한(漢), 렬(烈)口식(植), 口근(根), 口재(在)현(顯), 연(然), 석(錫)口윤(潤)근(根)희(熙)口기(基)용(鎔)口철(澈)동(東)口훈(勳)효(孝)口영(榮), 口형(炯), 口진(鎭)문(汶)口식(植)헌(憲)口배(培)연(練)口수(洙)병(秉)口휴(烋)증(增)


6. 문화재


  • 인흥서원(仁興書院) :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730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이다. 고려의 문신 추적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825년(순조 35) 10월 팔도 유림(儒林)과 추적의 20대손인 추세문(秋世文)이 뜻을 모아 창건하였으며,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화를 피하여 창건 당시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7]
  • 추적 신도비(秋適 神道裨) : 대구 인흥서원에 있는 고려의 문신 추적의 신도비로 1864년(고종 1) 건립되었다. 높이 210cm, 폭 83cm, 두께 56cm 규모이며, 비문은 홍문관제학을 역임한 조선 후기의 문신 해장 신석우가 지었다. 신도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碑閣)은 정면·측면 각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8]
  • 명심보감판본(明心寶鑑板本) :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7호이다. 고려 원종 2년 문과에 급제하여 민부상서 예문관제학을 지낸 추적 선생이 편저한 것이다. 추적은 『명심보감』을 공자 등 제자백가의 책과 시부 가운데서 쉽고 생활에 기본이 되는 내용을 골라 엮은 책인데, 이것은 국가에서 세운 학교의 학생들에게 심성수양의 기본서로 삼기 위함이었다. 현재 전하는 것은 1869년(고종 6) 추세문이 출판한 인흥재사본이 전수되어 국역 출판됨으로써 가정, 학교에서 교육용으로 널리 쓰여왔다. 이것은 총 31장으로 인흥서원의 목판이 유일하다.[9]

7. 인구

대한민국 통계청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추계 추씨, 양지 추씨, 전주 추씨를 합한 인구는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

연도1985년2000년2015년
인구44,425명43,318명49,017명



1985년에는 추계 추씨 21,421명, 양지 추씨 863명, 전주 추씨 22,141명으로 조사되었다. 2000년에는 추계 추씨 39,994명, 양지 추씨 654명, 전주 추씨 2,670명이었다. 2015년에는 추계 추씨 45,766명, 양지 추씨 1,298명, 전주 추씨 1,953명으로 조사되었다.

참조

[1] 뉴스 [김진우의 성씨 이야기] 추계추씨 고려 인종 때 함흥에 정착한 추엽이 시조 http://www.ggilbo.co[...] 금강일보 2015-10-22
[2] 서적 《고려사》 권74, 지제28, 선거(選擧)2 http://db.history.go[...]
[3] 서적 《고려사》 권106, 열전19 https://terms.naver.[...]
[4] 뉴스 [정복규의 성씨순례] 추계추씨(秋溪秋氏) 16세기 첫 수신교양서 명심보감 편자한 ‘추적’ http://www.sjbnews.c[...] 새전북일보 2013-05-28
[5] 웹인용 추적 - 용인향토문화백과 http://yongin.grandc[...]
[6] 백과사전 추수경 한국민족문화대백과
[7] 백과사전 인흥서원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8] 백과사전 추적 신도비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9] 웹사이트 명심보감판본 http://www.cha.go.kr[...]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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