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유신은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신라의 삼국 통일을 이끈 장군이다. 595년 만노군(현 진천군)에서 태어나 화랑으로 활동하며 무예를 연마했고, 34세에 신라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신라의 위상을 높였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고, 고구려 정벌에도 참여했다. 신라가 당나라를 몰아내고 한반도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사후에는 흥무왕으로 추존되었다. 김유신은 긍정적,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다양한 유적과 전설, 대중문화 콘텐츠를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673년 사망 - 다토파 티사 2세
다토파 티사 2세는 664년부터 673년까지 스리랑카를 통치한 왕으로, 이복 형 다풀라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아가보디 공을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간염으로 사망하여 그가 왕위를 계승했다. - 673년 사망 - 염입본
염립본은 수나라 귀족 가문 출신으로 당나라 초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화가이자 정치가로서, 《역대제왕도》 등의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형부상서, 건축가, 재상을 역임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당나라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군웅신 - 최영
최영은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하고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 등 국방을 굳건히 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공민왕을 보필했으나, 우왕의 요동정벌에 참여했다가 위화도 회군으로 이성계에 의해 처형당한 후 무민이라는 시호를 받은 고려 말기의 대표적인 무신이다. - 군웅신 - 임경업
이괄의 난 진압과 병자호란 때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에 저항한 임경업은 명나라와 내통 의혹으로 김자점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후 영웅적인 면모로 전설과 설화의 주인공이 되었고 숙종 때 복권된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김유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다른 이름 | 흥무왕 |
출생일 | 595년 |
출생지 | 만노, 신라 (현재의 진천군, 대한민국) |
사망일 | 673년 8월 21일 |
사망지 | 신라 금성 |
묘소 | 경주, 대한민국 |
배우자 | 지소 부인 |
자녀 | 10명 ( 김원술 포함) |
시호 | 개국공(開國公),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 |
가문 | 신김씨 |
부친 | 김서현 |
모친 | 만명부인 |
형제 | 김흠순(아우) |
관직 및 직책 | |
관등 | 태대각간 |
직책 | 대장군, 양하도총관, 봉상정경(당) |
상대등 재임 | 660년 1월 ~ 673년 8월 21일 |
군주 | 문무왕 |
전임 | 금강 |
후임 | 김군관 |
군사 경력 | |
소속 국가 | 신라 |
계급 | 대장군 |
참전 | 삼국통일전쟁 |
사원 | |
사원 | 서악서원(西嶽書院) 울산 은월사(隱月祠) 군위 효령사 양산 취서사(鷲棲祠) 진주 남악사(南岳祠) 광주(光州) 장렬사(壯烈祠) 전주 완산사 부안 보령원(保寧院) 부여 부풍사(扶風祠) 정읍 태흥사(泰興祠) 진천 길상사(吉祥祠) 강릉 화부산사(花浮山祠) 화성(華城) 금산사(金山祠) |
기타 | |
능묘 | 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 |
매장지 |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
2. 생애
김유신은 595년 만노군(현재의 진천군)에서 김무력 장군의 차남 김서현 장군과 진흥왕의 동생 김숙흘종의 딸인 만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15세에 화랑이 되었고, 18세에는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갖춘 국선(國仙, 화랑의 지도자)이 되었다. 34세(629년)에 신라군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3년 후 사촌인 덕만공주가 선덕여왕이 되면서 왕실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유임되었다. 신라 선덕여왕 재위 기간(632~647) 동안 김유신은 1만 명의 사병을 거느렸고, 백제와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신라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6]
647년, 비담의 반란이 일어나는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자, 김춘추와 함께 진덕여왕을 왕위에 올리고 보좌했다. 진덕여왕 사후에는 김춘추를 무열왕으로 즉위시켰다. 660년,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로 진군,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 장군을 격파하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663년 백강 전투에서 왜와 백제 부흥 운동 세력을 제거한 후,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6]
668년 12월, 문무왕으로부터 태대각간(太大角干) 벼슬을 받았다. 이는 신라 최고 관직인 대각간보다 상위의 관직으로 새로 설치된 것이다. 673년 7월 1일,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문무왕은 비단 천 필과 조 이천 석을 제물로 하사했다. 후에 흥덕왕(재위: 826년 ~ 836년) 때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6]
김유신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여겨지며, 삼국 통일 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장군 중 한 명이다. 668년 문무왕은 그에게 ‘태대각간’()이라는 명예 칭호를 내렸다. 그는 500호가 넘는 마을을 하사받았다고 전해지며, 669년에는 전국에 걸쳐 약 142개의 별도의 목장을 하사받았다.
김유신은 673년 8월 21일(음력 7월 1일)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사후 흥무왕이라는 명예 칭호를 받았다. 경주 근처 송화산 기슭에 왕의 묘 못지않게 화려한 묘에 안장되었다.[6]
2. 1. 가계와 출생
김유신은 금관국을 세운 수로왕의 12대 손이다. 금관국의 마지막 왕 구형왕은 532년(법흥왕 19년) 세 아들을 거느리고 신라에 항복하였다.[4]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은 성명왕을 체포해 죽이는 공을 세웠다. 아버지 김서현은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을 지냈고, 어머니 만명부인은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의 딸이다.김서현과 만명은 야합을 하였는데, 김서현이 만노군 태수로 가게 되면서 만명과 함께 가려 하였다. 그러나 숙흘종이 분노하여 딸을 별채에 가두었다. 그날 밤 벼락이 쳐서 사람들이 놀란 틈을 타 만명은 창문으로 도망쳐 김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떠났다.
595년(진평왕 건복 12년)에 아버지 김서현의 부임지인 만노군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그를 갖고 스무 달이 지나서 태어났다고 한다. 김서현은 경진일 밤에 별이 내려오는 꿈을, 만명은 신축일 밤에 한 어린아이가 황금 갑옷을 입고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김유신을 가졌다고 한다.
신라 만노군은 현재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 해당하며, 이곳에는 김유신과 관련된 전승을 전하는 지명이 있다. 태령산(胎靈山)이라는 지명도 김유신이 태어난 뒤에 그의 탯줄을 묻었다는 전승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김유신의 탄생지와 그의 태실로 전하는 곳은 '진천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김유신은 수로왕의 후예이며, 그 조상은 중국 황제의 아들인 소호금천씨이므로, 김씨 성을 사용했다고 한다.[5]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구형왕 | 가락국 10대 왕 |
증조모 | 계화부인(桂花夫人) | |
조부 | 김무력 | |
조모 | 아양공주(阿陽公主) | 진흥왕과 사도왕후의 딸 지소태후의 친손녀 |
부 | 김서현[29] | |
외증조부 | 입종갈문왕 | |
외증조모 | 지소태후 | 법흥왕과 보도부인의 딸 |
외조부 | 숙흘종 | |
외조모 | 만호태후 | 입종 갈문왕과 지소태후의 딸 |
모 | 만명부인 | 지소태후의 외손녀 |
2. 2. 화랑과 무장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었고, 18세에는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갖춘 국선(國仙, 화랑의 지도자)이 되었다.[6] 34세(629년)에는 신라군의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3년 후 그의 사촌인 덕만공주가 선덕여왕으로 즉위하면서 왕실군의 최고 사령관으로 계속 유임되었다.[6] 신라 선덕여왕 재위 기간(632~647) 동안 김유신은 1만 명의 사병을 거느렸고, 백제와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신라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6]2. 3. 삼국 통일 전쟁
김유신은 백제,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신라의 삼국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647년 비담과 염종의 난을 진압한 후, 압량주 군주로 부임하여 백제군을 격퇴하고 대량주를 수복하는 등 군사적 능력을 발휘했다. 648년에는 백제의 12성을 함락시킨 공으로 이찬으로 승진하고 상주행군대총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백제와의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며 대야성 전투에서 전사한 김품석 부부의 유골을 되찾아오는 성과를 올렸다.
655년 백제가 고구려,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백제 땅에 들어가 도비천성을 함락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660년에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을 격파하고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결국 백제 멸망에 큰 공을 세웠다.
661년 고구려 원정군의 대장군으로 임명된 김유신은 백제 부흥군이 점령하고 있던 옹산성을 함락시키고 웅진성으로 가는 군량 수송로를 확보했다. 이후 평양을 포위한 당군에 군량을 지원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로 향했으며, 662년에는 평양 인근에서 당군에게 군량을 전달하고 퇴각하는 과정에서 추격해오는 고구려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663년 당군과 함께 백제 부흥군의 거점인 주류성을 함락시켰으며, 667년에는 고구려 원정에 참여했다. 668년 고구려 원정군의 최고 사령관인 대당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풍병으로 인해 참전하지 못하고 서라벌에 머물렀다. 같은 해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시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72년 석문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군에게 패하자, 당군에 맞서 방어전을 펼칠 것을 주장하며, 전투에 참전했던 아들 원술의 처형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김유신이 단순한 군사 지도자를 넘어, 국가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충신이었음을 보여준다.
김유신은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가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자, 이에 맞서 신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개도 꼬리를 밟으면 자기 주인이라도 가리지 않고 그 다리를 물어버리는 법"이라며 자주적인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7][18]
김유신의 활약과 삼국 통일 과정은 다음 표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연도 | 주요 사건 | 김유신의 역할 |
---|---|---|
647년 | 비담과 염종의 난 진압 | 난 진압, 압량주 군주 부임 |
648년 | 대량주 수복, 백제 12성 함락 | 이찬 승진, 상주행군대총관 임명 |
655년 | 백제, 고구려, 말갈의 신라 공격 | 도비천성 함락 |
660년 | 황산벌 전투, 백제 멸망 | 백제군 격파, 사비성 함락 |
661년 | 고구려 원정 | 대장군 임명, 옹산성 함락, 군량 수송로 확보 |
662년 | 평양성 군량 지원 | 고구려군 격파 |
663년 | 백제 부흥군 진압 | 주류성 함락 |
668년 | 고구려 멸망 | 대당대총관 임명 (풍병으로 불참) |
672년 | 석문 전투 패배 | 당군 방어전 주장, 아들 원술 처형 요청 |
2. 3. 1. 백제와의 전쟁
647년 비담과 염종의 난을 진압한 후, 김유신은 압량주 군주로 부임하였다. 10월에는 무산성(지금의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감물성(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잠성(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에 들어온 백제군을 격퇴했다.[10] 648년 백제에게 빼앗겼던 대량주를 다시 공격하여 수복하고, 백제의 12성을 함락시킨 공으로 이찬으로 승진한 뒤 상주행군대총관에 임명되었다.김유신은 이전에 백제에게 빼앗긴 대야성을 되찾기 위해 출전하였다. 근처 계곡에 군사를 매복시킨 뒤 대야성 밖에 이르자 백제군이 공격해 왔다. 백제군과 한동안 맞서 싸우던 김유신은 갑자기 군사를 돌려 후퇴하였다. 이를 본 백제군은 성 밖으로 나와 신라군을 뒤쫓았다. 이때 계곡에 숨어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백제군의 후방을 공격하자, 후퇴하던 김유신도 즉시 군사를 돌려 협공을 가해 백제군 1천여 명이 죽었다. 그리고 백제 진영과의 교섭을 통해, 전투에서 사로잡은 백제 장군 여덟 명을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앞서 대야성에서 죽은 김품석 내외의 유골을 송환받는 데 성공했다.[10]
승세를 몰아 김유신은 거듭 백제를 쳐서 악성 등 12성을 함락시켰으며, 2만여 명을 죽이고 9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그 공으로 상주행군 대총관에 올랐다. 이어 백제의 진례성 등 9개의 성을 쳐서 9천여 명을 죽이고 6백여 명을 사로잡았다.[10]
8월, 백제의 장군인 좌평 은상이 대군을 이끌고 석토 등 7성을 기습하여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고, 석토성 등 7개의 성을 백제에 빼앗기자, 김유신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싸움터로 나아가 은상과 자견을 비롯한 백제 장수 10명과 8,980명에 달하는 백제군을 죽이고, 달솔 정중 등 장수 100명을 사로잡았으며 말 1만 필과 갑주 1,800필을 노획했다. 서라벌로 돌아온 김유신은 진덕여왕으로부터 직접 환대를 받는 등 극진한 예우를 입었다.[10]
2. 3. 2. 고구려와의 전쟁
642년 백제 의자왕이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김유신의 매제인 김춘추의 딸과 사위 김품석이 모두 사망하였다.[12] 김유신은 백제에 빼앗긴 대야성을 되찾기 위해 진덕여왕에게 허락을 받고 출전하였다. 김유신은 군사를 매복시킨 뒤 백제군과 맞서 싸우다 후퇴하였고, 백제군은 이를 뒤쫓았다. 이때 매복해 있던 군사들이 백제군의 후방을 공격하고, 후퇴하던 김유신도 군사를 돌려 협공하여 백제군 1천여 명을 죽였다. 김유신은 포로로 잡은 백제 장수 여덟 명을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김품석 부부의 유골을 돌려받았다. 이후 백제의 악성 등 12성을 함락시키고 2만여 명을 죽이고 9천여 명을 사로잡아 상주행군 대총관에 올랐다.[12]649년 8월, 백제의 장군 좌평 은상이 석토성 등 7성을 기습하여 함락시키자, 김유신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은상 등 백제 장수 10명과 백제군 8,980명을 죽이고, 장수 100명을 사로잡았으며 말 1만 필과 갑주 1,800필을 노획했다.[12]
655년 백제가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3개 성을 공격하자, 김유신은 백제 땅에 들어가 도비천성을 함락시켰다.[12]
660년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은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이끄는 백제군 5천 명을 격파하고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켰다.[12] 이 과정에서 약속한 기일에 늦었다는 이유로 신라군 독군 김문영을 처형하려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맞서기도 했다.[12]
661년 김유신은 고구려 원정군의 대장군으로 임명되었고, 백제 부흥군이 점령하고 있던 옹산성을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웅진성으로 가는 군량 수송로를 확보했다.[12] 이후 평양을 포위한 당군에 군량을 지원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로 향했다.[12]
662년 평양 인근 장새에서 신라군이 왔음을 알리고, 양오에 진을 치고 당군에게 군량을 전달한 뒤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추격해오는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많은 병장기를 노획했다.[12]
663년 김유신은 당군과 함께 백제 부흥군의 거점인 주류성을 함락시켰다.[12]
667년 고구려 원정에 참여하였고, 668년 고구려 원정군의 최고 사령관인 대당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풍병으로 인해 참전하지 못하고 서라벌에 머물렀다.[12] 같은 해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시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12]
672년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던 신라군이 석문 전투에서 당군에게 패하자, 김유신은 당군에 맞서 방어전을 펼칠 것을 주장하며 참전했던 아들 원술의 처형을 요청하기도 했다.[12]
2. 3. 3. 나당 전쟁
김유신은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남진을 막기 위해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라가 북쪽 영토를, 백제가 한강 이남의 영토를 차지한 이후, 신라가 동맹을 깨고 두 영토를 모두 차지하기 위해 백제를 공격하면서 백제가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상황에서 활약했다. 655년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침입자들과 싸웠다. 김유신이 언제 처음 장군이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때는 분명 신라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결국 신라군 5만 명과 당나라군 13만 명의 지원을 받아 유신은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 장군이 이끄는 백제군을 상대로 백제의 수도 사비를 공격했다.백제군은 약 5,000명에 불과했고, 10배나 되는 유신의 군대에 당해낼 수 없었다. 이미 내부 정치 문제를 겪고 있던 백제는 붕괴되었다. 김유신의 신라군과 당나라 연합군은 이제 두 방향에서 고구려를 공격했다. 661년 그들은 난공불락의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격퇴당했다. 하지만 이 공격은 고구려를 약화시켰다. 667년 또 다른 공격이 시작되어 668년 마침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신라는 아직 여러 곳의 저항 세력을 진압해야 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당나라 연합군이 한반도에 오래 머무르지 않도록 하는 데 집중되었다. 몇 차례의 격렬한 분쟁 끝에 신라는 결국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한반도를 통일했다.
2. 4. 죽음과 추존
신라 당대에 김유신은 나라를 크게 일으킨 충신이자 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숭앙받았다.[22] 김유신은 사후 동해의 용이 되었다는 전승이 퍼진 문무왕과 함께 불교의 삼십삼천의 화신으로 신라를 진호(鎭護)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신라에서 무열왕에게 당 태종과 같은 '태종'의 묘호를 붙인 것을 당이 항의하며 지우도록 요구했을 때, 신라 조정은 당 태종이 현신(賢臣) 위징을 얻어 대업을 이룬 것과 마찬가지로 무열왕이 성신(聖臣) 김유신을 얻어 삼한일통의 대업을 이루었고 양자가 동격이라는 논리로 거절했다.[15][23]현종은 최치원, 설총과 더불어 김유신을 개국공(開國公)에 봉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열전의 총 분량(10권) 가운데 3권을 모두 김유신에게 할애하고 있을 정도로 김유신을 추켜세웠으며, 조선조에는 무묘(武廟)를 세워 배향해야 할 인물의 한 명으로 거론되기도 했다.
문무왕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던 길에 남천주에 들러 그의 조부 때부터 신라 조정에 봉사해 온 김유신의 공적을 치하하며 관직과 은상을 올리는 것에 대해 신하들의 동의를 얻었다.[19]
윤관은 평소 김유신을 존경했으며, 여진 정벌을 앞두고 사람들에게 김유신의 지성을 본받아 전의를 불태웠다고 한다.[25]
김부식은 《삼국사기》 열전 말미에서 김유신의 재능뿐 아니라 신라 조정에서 그를 중용하여 믿고 일을 맡겨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공업을 이루었다며 신라 조정의 역할을 은근히 강조하였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인용된 사론에서는 김유신을 "뛰어난 재주로 그 훌륭한 임금과 적당한 때를 얻어 그 큰 공을 이룬 자"라 평가하면서도, 흥덕왕이 그를 흥무왕으로 추봉한 것에 대해서는 "군신의 명분을 문란하게 만든" 처사라 비판했다.[11][26]
김유신은 황산벌 전투에서 5만의 신라군을 이끌고 5천 군사의 계백과 맞서 싸웠으나 계백을 쉽게 물리치지 못하고 시간을 지체하였다는 점, 어린 화랑을 희생한 것은 비인간적인 것이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또한, 삼국통일 과정에서 김유신의 역할을 지나치게 칭송하는 것은 미화된 이야기라는 견해도 있다.
신채호는 김유신이 왕가의 외척이 되기 위해 그의 누이들을 이용했다는 점을 들어, 출세의 수단으로 가족을 이용했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김유신은 한반도 통일의 주역으로 여겨지며, 삼국 통일 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장군이다. 668년 문무왕은 그에게 ‘태대각간’()이라는 명예 칭호를 내렸는데, 이는 “최고의 방위 사령관”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그는 500호가 넘는 마을을 하사받았다고 전해지며, 669년에는 전국에 걸쳐 약 142개의 별도의 목장을 하사받았다.
김유신은 673년 8월 21일(음력 7월 1일)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사후 흥무왕이라는 명예 칭호를 받았다. 경주 근처 성화산 기슭에 왕의 묘 못지않게 화려한 묘에 안장되었다.[6]
3. 김유신의 가계와 가족 관계
김유신은 수로왕의 후예이며, 그 조상은 중국 황제의 아들인 소호이므로 김씨 성을 사용했다고 한다.[5] 532년에 신라에 병합된 금관가야 왕족의 혈통을 이었으며[4], 여동생 문명왕후가 태종무열왕에게 시집가, 그 맏아들이 제30대 문무왕이 되었다. 김유신 자신도 후에 무열왕의 셋째 딸 지소부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신라 왕족은 아니었지만 왕족과의 관계는 친밀하였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김서현 | |
어머니 | 만명부인 | 진흥왕의 동생 숙흘종의 딸, 진평왕의 이복 여동생 |
할아버지 (아버지 쪽) | 김무력 |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아들 |
할머니 (아버지 쪽) | 아양공주 | 진흥왕의 딸 (실존 인물 아닐 가능성 있음) |
할아버지 (어머니 쪽) | 숙흘종 | 진흥왕의 동생 |
할머니 (어머니 쪽) | 만호태후 김씨 | 진평왕의 어머니이자, 선덕여왕의 할머니 |
남동생 | 김흠순 | |
여동생 | 보희 | |
여동생 | 문명왕후 | 태종무열왕의 왕비 |
매제 | 태종무열왕 | 신라 제29대 왕 |
여동생 | 김정희 | |
매제 | 김달복 | |
첫째 부인 | 재매부인 | |
장남 | 김삼광 | 관등은 이찬(伊飡) |
장녀 | 진광부인 | 김흠돌에게 출가 |
차녀 | 신광부인 | 문무왕의 후궁 |
삼녀 | 작광부인 | 보로전군에게 출가 |
사녀 | 영광부인 | 조카 반굴에게 출가[30] |
둘째 부인 | 지소부인 | 무열왕과 문명왕후 소생, 김유신의 조카 |
차남 | 김원술 | |
삼남 | 김원정 | 관등은 해간(海干) |
사남 | 김장이 | 관등은 대아찬(大阿飡) |
오남 | 김원망 | 관등은 대아찬(大阿飡) |
정인 | 천관녀 | |
서자 | 김군승 |
3. 1. 가계
항목 | 내용 |
---|---|
증조부 | 금관가야 제10대 구형왕 |
증조모 | 계화부인(桂花夫人) |
조부 | 김무력 |
조모 | 아양공주(阿陽公主) - 신라 제24대 진흥왕과 사도왕후의 딸 지소태후의 친손녀 (김유신의 부계로는 지소태후의 현손) |
외증조부 | 입종갈문왕 |
외증조모 | 지소태후 - 신라 제23대 법흥왕과 보도부인의 딸 |
외조부 | 숙흘종 |
외조모 | 만호태후 - 입종 갈문왕과 지소태후의 딸 |
아버지 | 김서현[29] |
어머니 | 만명부인 - 지소태후의 외손녀 (김유신 모계로는 지소태후의 증손, 부계로는 지소태후의 현손) |
누이 | 김보희 |
누이 | 김문희 -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결혼 |
부인 | 지소부인 - 신라 태종무열왕과 문명왕후의 셋째 딸 |
아들 | 김삼광, 김원술, 김원정, 김장이, 김원망, 김해 김씨(4명) |
부인 | 천관녀 - 기생 |
아들 | 김군승 (혹은 김시득) |
손자 | 김암 (金巖한국어)[1] |
김유신은 금관가야 왕족의 혈통을 이었으며[4], 여동생 김문희는 무열왕(김춘추)에게 시집갔다. 김유신 자신도 무열왕의 셋째 딸 지소부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신라 왕족은 아니었지만 왕족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김유신이 수로왕의 후예이며, 그 조상이 중국 황제의 아들인 소호금천씨이므로 김씨 성을 사용했다고 한다.[5]
3. 2. 가족 관계
(아버지 쪽)(아버지 쪽)
(어머니 쪽)
(어머니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