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쓰타 기요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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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쓰타 기요타카는 1972년부터 1983년까지 연쇄 살인 및 강도 행각을 벌인 일본의 범죄자이다. 그는 소방관으로 일하면서 여러 건의 살인을 저질렀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쇄 살인, 총기를 이용한 강도 살인, 경찰관 습격 및 권총 강탈 등의 범죄를 저질렀다. 1983년 1월 체포되어 강도 살인 등 33개 죄목으로 기소되었으며, 1986년 3월 사형이 선고되었다. 항소심과 상고심을 거쳐 1994년 사형이 확정되었고, 2000년 11월 30일 나고야 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범죄는 여러 미디어를 통해 다루어졌으며,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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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타 기요타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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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명칭 | 가쓰타 기요타카 사건 |
정식 명칭 | 경찰청 광역 중요 지정 113호 사건 (1982년 10월 - 1983년 1월) |
장소 | 교토부교토시야마시나구 고료벳쇼초 (강도 살인 1건) 오사카부스이타시 하라마치 (강도 살인 2건) 아이치현나고야시 나고야시 나카구지요다 (강도 살인 3건) 나고야시 미나미구가사데라초 (강도 살인 4건) 나고야시 쇼와구고자쿠라초 (강도 살인 5건) 효고현고베시주오구와키하마초 (강도 살인 6건) 나고야시 메이토구다카야시로 (강도 살인 7건) 113호 사건 나고야시 지쿠사구호오초 (강도 살인 미수 1건) 시가현구사쓰시 오지 (강도 살인 8건) 기후현요로군요로초・메이신 고속도로요로 서비스 에리어 나고야시 쇼와구 아유치도리 4초메 6 "제일권업은행 고키소 지점" (체포 현장) |
날짜 | 1972년 (쇼와 47년) - 1983년 (쇼와 58년) |
개요 | 나고야시 지쿠사구 내에서 경찰관을 습격하여 권총을 강탈한 사건(1982년 10월) 등에 의한 "경찰청 광역 중요 지정 사건 113호 사건"을 포함, 10년간 8명이 살해된 연속 살인 사건 |
사망자 | 총 8명 (남성 3명, 여성 5명) |
부상자 | 남성 2명 |
범인 | 가쓰타 기요타카 |
죄목 | 강도살인죄 살인죄 강도강간죄 강도치상죄 강도죄 등 |
형벌 | 사형 (집행 완료) |
관할 | 아이치현 경찰 교토부 경찰 오사카부 경찰 나고야 지방 검찰청 나고야 고등 검찰청 |
인물 정보 | |
이름 | 가쓰타 기요타카 (勝田 清孝) |
별명 | 기요타카 후지와라 |
출생일 | 1948년 8월 29일 |
출생지 | 기즈가와시, 교토부, 점령 하 일본 (구 기즈초 가세야마) |
사망일 | 2000년 11월 30일 (52세) |
사망 장소 | 나고야 구치소, 히가시구, 일본 |
사인 | 교수형 |
희생자 수 | 확정: 8명 자백: 22명 |
범행 기간 | 1972년 9월 13일 - 1982년 10월 31일 |
체포일 | 1983년 1월 31일 |
국적 | 일본 |
범죄 상태 | 사형 집행 |
2. 범죄 행각
가쓰타 기요타카는 1972년부터 1983년까지 약 10년 동안 살인, 강도 등 여러 건의 흉악 범죄를 저질렀다.[2] 그의 범행 수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대담하고 잔혹해졌으며, 초기에는 주로 교살을 사용하다가 나중에는 총기를 이용한 범죄까지 저질렀다.
그가 저지른 정확한 살인 횟수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체포 후 조사 과정에서 최소 8건의 살인을 자백했다. 경찰은 그가 최대 22명을 살해했을 가능성을 의심했지만, 증거 부족으로 8건의 살인 혐의만을 적용했다.[1] 또한 일부 피해자에 대한 강간 혐의도 있었으나 입증되지는 못했다.
특히 1982년 10월 27일, 가쓰타는 경찰관을 차량으로 습격하여 중상을 입히고 실탄 5발이 장전된 권총을 빼앗았다. 이후 10월 31일과 11월 1일에 걸쳐 이 권총을 사용하여 강도살인과 살인미수를 저질렀다. 이 일련의 사건은 일본 경찰청에 의해 경찰청 광역 중요 지정 113호 사건으로 지정되었다.
가쓰타는 1983년 1월 31일, 다른 남성을 권총으로 위협하다가 체포되었다. 처음에는 강도 및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조사 과정에서 113호 사건 이전에 저질렀던 7건의 살인을 추가로 자백했다.[1]
범행 당시 가쓰타는 소방관 신분이었으며, 심지어 연쇄 살인 행각을 벌이는 동안 텔레비전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상을 받기도 하는 등[2] 대담한 모습을 보여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2. 1. 113호 사건 이전의 연쇄 살인
경찰청 광역 중요 지정 113호 사건으로 체포된 후, 가쓰타 기요타카는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전에 저질렀던 7건의 살인 사건을 추가로 자백했다. 경찰은 가쓰타가 최대 22명을 살해했을 가능성을 의심했지만, 증거 부족 등으로 인해 113호 사건 이전의 7건과 113호 사건의 1건을 합쳐 총 8건의 살인 혐의만 적용하여 기소했다.[1] 이 시기 범행의 주요 수법은 교살이었으며, 일부 피해자에 대한 강간 혐의도 제기되었으나 입증되지는 못했다.범행 당시 소방관이었던 가쓰타의 연쇄 살인 행각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특히 그는 범행 기간 중 텔레비전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해 상을 받기도 하는 등[2][8] 대담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1994년 1월 17일, 일본 최고 재판소는 가쓰타에게 1972년부터 1980년 사이 저지른 7건의 살인에 대한 사형 판결과 113호 사건 관련 살인에 대한 사형 판결을 동시에 확정했다. 이는 일본 최고 재판소 역사상 처음으로 한 사람에게 두 개의 사형 판결이 확정된 사례였다.
2. 1. 1.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쇄 살인
1972년 9월 13일 오전 5시경, 가쓰타는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야마시나 미료 벳쇼초(현 야마시나구)의 아파트[7]에 침입하여 거주자인 클럽 호스티스 여성(당시 24세)을 강간한 후 교살하고 현금 1000JPY을 빼앗았다(첫 번째 강도살인 및 강도강간)[35]. 그는 빈집털이를 하던 중 잠자고 있던 피해자에게 발각되어 "도둑!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살해했다[35].1975년 7월 6일 오전 1시경, 오사카부 스이타시 하라마치의 맨션 통로에서 클럽 마담 여성(당시 33세)을 교살하고 현금 약 10만엔 등을 빼앗았다(두 번째 강도살인)[35]. 날치기를 시도하다 피해자의 저항에 부딪히자 살해로 이어졌다[35].
1976년 3월 5일 오전 2시 35분경, 아이치현 나고야시 나카구 지요다의 길 위에서 시보레 카마로에서 내린 클럽 호스티스 여성(당시 32세)을 습격하여 교살하고 현금 약 12만엔 등을 빼앗았다(세 번째 강도살인)[35]. 소란이 일자 격분하여 범행을 저질렀다[35].
1977년 6월 30일 오전 2시경, 나고야시 미나미구 가사데라초 니시노몬에 있는 마작 아르바이트 점원 여성(당시 28세)의 집에 침입하여 현금 약 4만엔을 훔치려다 귀가한 여성과 마주치자 교살했다(네 번째 강도살인)[35]. 이 사건 6일 후인 1977년 7월 6일, 가쓰타는 아사히 방송(ABC TV)의 퀴즈 프로그램 '부부로 돈피샤!'에 아내와 함께 출연하여 우승했고, 상금 8만엔과 10만엔 상당의 상품권을 받았다[8]. 그는 1977년 2월에 이 프로그램에 응모하여 6월 15일 예선을 통과했다[8].
1977년 8월 12일 오후 11시경, 나고야시 쇼와구 코자쿠라초의 맨션에 침입하여 미용사 지도원 여성(당시 33세)을 교살하고 약 45만엔 상당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빼앗았다(다섯 번째 강도살인)[35]. 이 사건 8일 후인 1977년 8월 20일에 가쓰타가 출연한 '부부로 돈피샤!'가 방송되었으며[8][9], 시청률은 20% 안팎을 기록했다[10].
2. 1. 2. 총기를 이용한 연쇄 강도 살인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일련의 사건을 일으킨 가쓰타는 소방공무원으로 사가라 주부 소방 조합 본부에 근무하고 있었다[18]. 하지만 1980년 11월 8일 새벽, 오사카부 오사카시 기타구 소네자키신치의 번화가에서 클럽 호스티스의 승용차와 차 안에 있던 핸드백(현금 78000JPY이 든 지갑 포함) 및 화장품 가방을 훔치는 차량털이 절도 사건을 일으켜 오사카부 덴마 경찰서에 긴급 체포되었다[12]. 그의 체포 사실은 다음 날인 1980년 11월 9일 지역 신문 조간에 "소방관, 절도"라는 제목과 함께 얼굴 사진이 실린 3단 기사로 보도되었다. 가쓰타는 체포 3일 후인 1980년 11월 11일자로 사가라 주부 소방서에서 징계 면직되었고, 이후 소방서 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그의 소지품은 사과하러 온 부모가 가져갔다[13].1981년 1월 29일, 오사카 구 검찰청에 의해 기소된 가쓰타는 앞서 언급된 절도 사건으로 오사카 간이 재판소에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3년(구형 징역 1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12]. 이후 공판에서는 병합죄(일본 형법 제45조) 규정에 따라, 이 절도 사건의 확정 판결 전에 저지른 강도 살인 7건 등의 사건은 판결 후의 "113호 사건"과 분리되어, 주문이 두 개로 나뉘어 선고되었다[35][17]. 이 시점까지 가쓰타가 저지른 7건의 강도 살인 사건은 밝혀지지 않았고, 이로 인해 경찰은 더 흉악한 사건 발생을 막을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12].
가쓰타는 위 판결로부터 약 1년 반 후인 1982년 8월 18일 오후 1시경[14], 시가현 오쓰시 시마노세키의 주차장에서 승용차를 훔쳤다(절도죄)[15]. 같은 날 오후 10시 30분경에는 이 훔친 승용차를 이용하여[14], 교토시 야마시나구 다케하나도노마에초의 슈퍼마켓 "에포크 야마시나키타점" 부근 도로에서 해당 가게의 남성 점원(당시 45세)을 차로 치어 갈비뼈 골절 등 전치 40일의 부상을 입히고 가게 매출금을 빼앗으려 했으나, 인근 주민이 달려드는 바람에 포기하고 도주했다(강도치상죄)[15].
2. 2. 경찰청 광역 중요 지정 113호 사건
1982년 10월 27일, 가쓰타는 아이치현 나고야시에서 경찰관을 차량으로 습격하여 부상을 입히고 실탄 5발이 장전된 권총을 빼앗아 달아났다.[16] 이 사건은 이후 벌어질 연쇄 범죄의 시작이었다.가쓰타는 훔친 권총을 이용하여 1982년10월 31일 심야에 시가현 오쓰시의 메이신 고속도로 오쓰 서비스 에어리어에서 히치하이킹으로 탑승한 차량의 운전자를 살해했다.[35] 다음 날인 11월 1일 새벽에는 기후현 요로군 요로초의 메이신 고속도로 요로 서비스 에어리어 내 주유소에서 점원에게 총격을 가해 중상을 입혔다.[35][18]
일본 경찰청은 경찰관 습격 및 권총 강탈, 그리고 이후 벌어진 연쇄 강도 살상 사건을 경찰청 광역 중요 지정 113호 사건으로 지정하고 수사를 진행했다. 가쓰타는 1983년 1월 31일 체포되었으며, 조사 과정에서 이 113호 사건 외에도 7건의 살인을 추가로 자백했다.[1] 최종적으로 경찰은 가쓰타에게 113호 사건의 살인 1건과 이전의 살인 7건을 더해 총 8건의 살인 혐의를 적용했다.[1]
2. 2. 1. 경찰관 습격 및 권총 강탈
1982년 10월 25일경, 가쓰타는 나고야시 나카구 신사카에의 주차장에서 나고야 대학 3학년 학생(당시 21세) 소유의 토요타 셀리카(시가 70만엔 상당)를 훔쳤다.[23]이틀 뒤인 10월 27일 오후 9시 30분경, 가쓰타는 '기노시타'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아이치현치쿠사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다시로 기타 파출소를 부탁한다"고 요청했다. 전화는 파출소로 연결되었고, 순찰을 마치고 막 돌아온 순사(당시 38세)가 전화를 받자, 가쓰타는 "파출소 앞을 동쪽으로 쭉 가면 파란 크라운이 정차해 있으니 와달라"고 말하며 유인했다.[16]
가쓰타는 훔친 셀리카를 몰고[23] 아이치현 나고야시 치쿠사구 호오초 1-1의 '가쿠오잔 닛타이지 동쪽 제6번찰소 앞'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으로 걸어오던 아이치현 경찰 치쿠사 경찰서 다시로 기타 파출소 소속의 순사를[16] 차로 들이받고, 차에서 내려 쇠막대기로 머리를 때리는 등 폭행을 가했다.[23] 이 공격으로 순사는 왼쪽 안면 함몰, 왼쪽 이마와 오른쪽 뒤통수 열상, 양쪽 무릎 앞부분 타박상 등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16] 가쓰타는 쓰러진 순사에게서 실탄 5발이 장전된 뉴난부 M60 .38구경 회전식 권총을 빼앗아 달아났다(강도치상).[16]
피해 순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전화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해당 장소로 걸어갔으나 파란 크라운만 있을 뿐 아무도 없어 파출소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차에 치인 듯한 강한 충격을 받고 의식을 잃었다. 오후 9시 35분경, 지나가던 행인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전봇대에 기대어 있는 순사를 발견할 때까지 그는 의식이 없었다. 순사는 행인에게 "눈이 보이지 않으니 파출소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고, 구급차로 치쿠사구 스에모리도리의 가토 외과로 이송되었다.[16] 순사는 양쪽 눈을 다쳐 실명 위기에 처했으나, 다행히 완치되어 1심 판결(1986년 3월) 전까지 직무에 복귀할 수 있었다.[18]
이 사건이 발생하자 아이치현 경찰 수사1과와 치쿠사서는 이를 '권총 강탈 목적의 강도치상 사건'으로 규정하고 치쿠사서에 특별 수사 본부를 설치했다. 이어 현 경찰 본부 내에도 요모 슈 본부장을 책임자로 하는 대책 본부를 꾸렸다.[16] 경찰은 빼앗긴 권총이 또 다른 흉악 범죄에 사용될 것을 우려하여 아이치현 전역에 긴급 경계 태세를 발령하고 범인 검거에 총력을 기울였으나[16], 가쓰타의 추가 범행을 막지는 못했다.
가쓰타는 이 범행 이후 체포될 때까지 아이치현, 시즈오카현, 시가현, 기후현, 교토부 등지에서 빼앗은 권총을 소지하고 다녔다(총포도검류 소지 등 단속법 및 화약류 단속법 위반).[15]
2. 2. 2. 권총을 이용한 연쇄 강도 살상
1982년 10월 31일 심야,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시의 한 슈퍼마켓에 권총을 들고 강도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도주했다.[17]같은 날, 시가현 오쓰시의 메이신 고속도로 오쓰 서비스 에어리어에 주차된 왜건 차량에 히치하이킹을 했다. 가쓰타는 운전자였던 용접공 남성(당시 27세, 지바현 이치하라시 거주)을 권총으로 위협해 나고야 방면으로 운전하게 했다. 오후 9시 30분경, 같은 현 구사쓰시의 국도 1호선 길가에 주차된 차 안에서 권총으로 운전자를 살해했다(이는 가쓰타의 8번째 강도살인이었으며, 피해자는 다음 날인 11월 1일에 사망했다).[35]
1982년 11월 1일 오전 2시 35분경, 기후현 요로군 요로초의 메이신 고속도로 요로 서비스 에어리어 내 주유소에서 점원 남성(당시 46세)에게 권총을 발사하여 중상을 입혔다.[35] 다행히 피해 남성이 가슴 주머니에 넣고 있던 100엔짜리 라이터에 총알이 맞아 목숨을 건졌다.[18] 이 사건 이후 피해 남성은 야간 근무 시 주변을 계속 경계하는 등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18]
1982년 11월 28일에는 교토부 교토시 야마시나구의 한 슈퍼마켓에 권총을 들고 들어가 강도 행각을 벌여 매상금을 빼앗아 달아났다.[17]
1983년 1월 30일 오후 8시경, 가쓰타는 자신의 승용차로 교토 시내의 맨션을 출발하여, 다음 날 오전 8시 30분경 나고야시 니시구 길가에 주차된 도요타 카롤라를 훔쳐 갈아탔다.[20] 이후 체포 현장 부근에서 범행 장소를 물색하다 한 은행 뒤편 주차장으로 들어갔다.[20]
3. 체포 및 기소
1983년 1월 31일, 당시 34세였던 가쓰타는 나고야시 쇼와구 아야치도리 4-6에 위치했던 "다이이치칸교 은행 고키소 지점"(해당 지점은 2018년에 폐점되었으며, 다이이치칸교 은행은 현재 미즈호 은행으로 통합됨) 서쪽 주차장에서 예금 102.3만엔을 인출하고 귀가하려던 남성(당시 31세, 나고야시 아쓰타구 거주 운송 회사 사장)을 습격했다. 그는 남성에게 실탄 3발이 든 권총(뉴난부 .38구경[19])을 들이대며 "이건 경찰관이 가진 진짜 권총이다. 그 사건(113호 사건)을 알고 있겠지. 말하면 쏜다. 뒷좌석에 돈을 놓고 차를 몰아"라고 협박하며 금품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피해 남성은 틈을 노려 가쓰타를 제압하려 했고, 둘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19]
소란을 듣고 달려온 은행원들과 격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가쓰타는 피해 남성과 은행원 3명에게 타박상을 입혔다. 그는 권총 2발을 발사하며 저항했지만, 총알은 누구에게도 명중하지 않았고 결국 은행원들에게 제압당했다.[19][20] 소란을 알아챈 지점 직원이 비상 버튼을 눌러 아이치현 경찰에 110번으로 신고했고, 출동한 쇼와 경찰서 직원에게 가쓰타의 신병이 인도되어 강도 치상 혐의로 체포되었다.[19][20]
가쓰타가 소지하고 있던 권총(실탄 1발 포함)은 이전에 발생한 경찰관 습격 및 요로 휴게소 살상 사건(광역 중요 지정 113호 사건)에 사용된 것과 등록 번호가 일치했다. 또한 가쓰타의 인상착의와 체격도 요로 사건의 범인과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20] 이에 아이치현 경찰과 기후현 경찰의 "113호 사건" 합동 수사 본부는 가쓰타를 113호 사건의 범인으로 단정했다.[19] 가쓰타의 체포에 기여한 남성은 사건 직후 당시 경찰청 장관이었던 미이 슈로부터 경찰 협력상을 받았다.[18]
나고야 지방 검찰청은 다이이치칸교 은행 사건으로 체포된 가쓰타의 1차 구금 기한(1983년 2월 11일)을 앞두고 있었다. 검찰은 사건의 중대성을 고려해 10일간의 추가 구금을 검토했지만, 다이이치칸교 은행 사건은 현행범 체포로 입건이 용이했고, 가쓰타가 다른 중대 사건(마쓰자카야 스토어 사건, 효고 노동금고 사건 등)을 자백함에 따라 수사의 신속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21] 이에 따라 구금 기한 전날인 1983년 2월 10일, 나고야 지검은 가쓰타를 먼저 다이이치칸교 은행 사건에서의 강도 치상 및 절도 혐의로 나고야 지방 법원에 기소했다.[21][22] 이 첫 기소 이후, 아이치현 경찰 특수 수사 본부는 같은 날 가쓰타를 경찰관 습격 및 권총 강탈 사건(강도 치상 및 절도 혐의)으로 재체포했다. 경찰은 세토 신용금고 사건 등 다른 여러 강도 사건 역시 가쓰타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추가 조사를 진행했다.[23] 남은 혐의들도 이후 순차적으로 기소되었다.
1984년 4월 26일, 가쓰타에 대한 모든 수사가 종결되었다. 체포부터 수사 종결까지 총 452일간의 유치 기간은 아이치현 경찰 본부 역사상 최장 기록으로 남았다.[24] 같은 날, 가쓰타는 아이치현 경찰 본부에서 나고야 구치소(나고야시 히가시구 시라카베 소재)로 이송되었으며[24], 이후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이곳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4. 형사 재판
1983년 1월 31일, 가쓰타 기요타카는 한 남자를 권총으로 위협하다 체포되었다. 처음에는 강도 및 살인 혐의였으나, 조사 과정에서 그는 이전에 저지른 7건의 살인 사건을 추가로 자백했다. 경찰은 가쓰타가 최대 22명을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으나, 증거 부족으로 최종적으로는 113호 사건의 1건과 이전의 7건을 합쳐 총 8건의 살인 혐의로만 그를 기소했다.[1]
가쓰타는 강도 살인 등 여러 죄목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은 1심(나고야 지방 법원), 항소심(나고야 고등 법원), 상고심(일본 최고 재판소)으로 이어졌다. 하급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가쓰타 측은 심신미약, 자수 인정 범위, 양형 부당 등을 주장하며 항소와 상고를 이어갔다.
1994년 1월 17일, 일본 최고 재판소 제1소법정(오노 미키오 재판장)은 가쓰타의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 판결을 확정했다. 이는 1972년부터 1980년 사이에 저지른 7건의 살인과 1982년 권총 살인에 대한 두 개의 사형 판결을 동시에 확정한 것으로, 일본 최고 재판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형 확정 후 가쓰타는 나고야 구치소에 수감되었으며, 기독교인 여성 구루스 유코의 도움으로 그녀의 어머니와 양자 결연을 맺고 '후지와라 기요타카'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0년 11월 30일, 가쓰타는 나고야 구치소에서 사형에 처해졌다.[3] 사형 집행 직전, 그는 교도관에게 담당 승려의 얼굴을 보고 싶다며 안대를 벗겨 달라고 요청했다. 승려가 반야심경을 외우는 동안 가쓰타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했고, 이후 안대가 다시 씌워진 채 교수형이 집행되었다.[4]
4. 1. 1심: 나고야 지방 법원
나고야 지방 검찰청은 1983년 2월 10일, 가쓰타를 먼저 다이이치칸교 은행 사건에서의 강도 치상 및 절도 혐의로 나고야 지방 법원에 기소했다[21][22]。이후 경찰관 습격 및 권총 강탈 사건, 세토 신용금고 사건 등 다른 여러 건의 강도 사건에 대해서도 추가 조사를 통해 혐의를 입증하고 잇따라 기소했다[23]。가쓰타는 강도 살인죄 등 총 33개 죄목, 27건의 범죄 사실로 기소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일본 형법 제45조의 병합죄 규정에 따라, 일련의 범행 도중 받은 유죄 판결을 기준으로 사건이 분리되었다. 이에 따라 '강도 살인 7건을 포함한 17개 죄'(전반 사건)와 '집행유예 판결 후의 살인 1건을 포함한 '113호 사건' 관련 16개 죄'(후반 사건)로 나누어 심리가 진행되었고, 판결 주문도 각각 선고되었다[35]。1983년 5월 27일 오후, 나고야 지방 법원 형사 제4부(미즈타니 도모히토 재판장)에서 가쓰타의 첫 공판이 열렸다[28]。가쓰타는 이 시점까지 기소된 여러 사건 중 요로 휴게소(SA) 살상 사건에 대해서만 살의를 부인했을 뿐, 나머지 사건에 대해서는 대체로 기소 사실을 인정했다[28]。국선 변호인으로 선임된 무라세 다케시는 가쓰타가 범행 당시 가정 문제, 애인 문제, 빚 등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심신미약 상태(노이로제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완전한 책임 능력을 부정했다[28]。검찰 측은 가쓰타의 성장 과정, 범행 동기, 경위 등을 상세히 설명하는 모두 진술을 진행했다[28]。
공판이 진행되던 중인 1983년 10월 23일까지 가쓰타는 남성 3명, 여성 5명 등 총 8명을 살해했다고 자백했다[30]。또한 "아직 10명 정도의 여성을 더 살해했다. 첫 살인은 16세 또는 17세 무렵 고향인 교토부 기즈가와시 부근에서 저질렀다"고 진술하기도 했다[30]。이 진술로 인해 그가 총 18명을 살해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제국은행 사건(12명 살해)을 넘어서는 일본 전후 최악의 대량 살인 사건이 될 수도 있다는 보도가 나왔으나[30], 추가 살해 진술은 시간, 장소 등의 기억이 불분명하여 결국 입건되지 않았다[31]。같은 해 10월 26일에 열린 제5회 공판(하시모토 교텐 재판장)에서는 "(이미 인정한 요로 SA 사살 사건 외에) 남녀 7명을 살해했다. 죄송한 마음뿐이다"라고 말하며 처음으로 법정에서 구체적인 살인 건수를 언급했고,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32][17]。
1984년 4월 26일, 모든 수사가 종결되었고, 체포 후 452일간 이어진 유치 기간은 당시 아이치현 경찰 본부 역사상 최장 기록이었다[24]。같은 날 가쓰타는 나고야 구치소로 이감되어[24], 이후 사형 집행까지 그곳에서 생활하게 된다.
1985년 11월 26일, 제22회 논고구형 공판에서 검찰 측(나고야 지방 검찰청)은 전반 사건과 후반 사건 모두에 대해 사형을 구형했다[33]。검찰은 논고에서 "가쓰타는 사회의 일원으로 남기를 스스로 거부하듯 범행을 저질렀다. 전반 사건에서 7명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등 냉혹함의 극치를 보였고, 후반 사건에서는 유죄 판결 후에도 또다시 1명을 살해하며 잔인성을 더했다. 범행 간격이 짧아지며 법질서에 도전하고 사회 전체를 적으로 돌렸다. 고속도로나 총기를 이용한 '현대적 범행' 수법은 모방 가능성이 높아 사회에 미치는 해악이 크다. 교정이 불가능하므로 극형에 처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33]。
1985년 12월 16일에 열린 제23회 공판에서 변호인의 최종 변론이 이루어졌고, 첫 공판 이후 2년 7개월 만에 재판이 종결(결심)되었다[34]。변호인은 최종 변론에서 "각 사건에 계획성이 부족했다", "범행 당시 가쓰타는 심신 미약 상태였다", "8건의 살인 중 7건을 자백한 것은 자수에 해당한다" 등을 주장하며, 가쓰타의 반성과 뉘우침, 사형 제도의 위헌성 등을 고려하여 사형을 피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해 달라고 호소했다[34]。가쓰타는 최종 의견 진술에서 나고야 구치소에서 쓴 수기 '속죄의 날들'을 제출하고 피해자와 유족에게 사죄의 뜻을 전했다[34]。
1986년 3월 24일, 나고야 지방 법원(하시모토 교텐 재판장)은 검찰의 구형대로 가쓰타에게 전반 사건과 후반 사건 모두에 대해 사형판결을 선고했다[35]。재판부는 판결 이유에서 "끝없는 허영심과 물욕을 채우기 위해 범죄를 확대, 재생산했으며, 그 수법이 대담하고 악랄하며 잔혹하다"고 지적하고, "체포 후 반성하고 뉘우치는 모습을 보이고는 있으나, 자신의 생명으로 역사상 유례없는 흉악 범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35]。
가쓰타와 변호인은 판결 나흘 뒤인 1986년 3월 28일, "사형은 너무 무겁다"는 양형 부당과 사실 오인 등을 이유로 나고야 고등 법원에 항소했다[36]。가쓰타는 판결 직후 항소를 망설였으나, 변호인이 "올바른 판단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설득하자 항소하기로 결정했다[36]。변호인은 항소 이유서에서 사형 판결의 양형 부당성, 일본국 헌법 제36조 위반(잔혹한 형벌 금지), 자수 인정 범위의 부당함, 심신 미약 주장 불인정, 113호 사건 살의 부인 주장 부정, 판결 선고 절차상의 오류 등을 주장했다[36]。
4. 2. 항소심: 나고야 고등 법원
피고인 가쓰타와 변호인은 1심 사형 판결에 불복하여, 1986년 3월 28일 나고야 고등 법원에 항소했다[36]。 항소 이유는 사실 오인과 양형 부당 등이었다[36]。가쓰타는 판결 후 나고야 구치소에서 변호인과 이틀간 상의했다[36]。 처음에는 항소에 소극적이었으나, 1심 판결이 자신의 주장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과 변호인의 설득("올바른 판단을 받을 권리가 있다")에 따라 항소를 결심하게 되었다[36]。 이에 가쓰타와 변호인은 각각 항소장을 제출하며 절차를 진행했다[36]。
변호인이 제시한 주요 항소 이유는 다음과 같다[36]。
- 사형 판결은 가쓰타의 반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양형 부당이며, 일본국 헌법 제36조가 금지하는 잔혹한 형벌에 해당한다[36]。
- 7건의 살인 자백은 자수에 해당하여 형량 감경 사유가 되어야 하나, 1심 판결은 1건만 인정했다[36]。
- 범행 당시 가쓰타는 심신미약(노이로제) 상태였다는 주장을 배척하고 완전한 책임능력을 인정한 것은 사실 오인이다[36]。
- '113호 사건'에서의 살의 부인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6]。
- 1심 판결 선고 시 법령 적용, 증거 목록 등을 구두로 명시하지 않아 형사소송법상 절차적 오류가 있다[36]。
4. 3. 상고심: 최고 재판소 제1소법정
1988년 3월 2일, 가쓰타는 항소심 판결에 불복하여 최고재판소에 직접 상고장을 제출했다[45]。최고재판소 제1소법정(오노 미키오 재판장)은 1993년 5월 26일, 상고심 구두 변론 공판 기일을 같은 해 11월 4일 오후 1시 30분으로 지정하여 관계자들에게 통지했다.
1993년 11월 4일, 최고재판소 제1소법정에서 상고심 구두 변론 공판이 열렸다. 변호인 측은 일본국 헌법 제36조를 근거로 사형 제도의 위헌성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이유로 사형 판결 파기를 요구했다.
- 1심과 2심에서 정신 감정 없이 형사 책임 능력을 인정한 것은 일본국 헌법 제31조(법정 절차의 보장)에 위배된다.
- 요로 정 사건에서 피고인에게 살의가 없었고 권총 오발 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1심과 2심 판결이 확정적 살의를 인정한 것은 중대한 사실 오인이다.
- 체포 후 자백한 7건의 살인을 자수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1건에 대해서만 형량 감경을 인정한 것은 부당하다.
반면 검찰 측은 "7건의 살인에 대한 자백과 반성의 태도를 고려하더라도 사형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며 상고 기각을 주장했다.
최고재판소 제1소법정은 1993년 11월 26일, 상고심 판결 공판 기일을 같은 해 12월 16일 오후 1시 30분으로 지정했으나, 변호인 측의 사정을 고려하여 1993년 12월 6일, 기일을 1994년 1월 17일 오후 2시 30분으로 변경하여 다시 통지했다.
1994년 1월 17일, 최고재판소 제1소법정(오노 미키오 재판장)에서 상고심 판결 공판이 열렸다. 재판부는 "죄책이 중대하고, 범행을 깊이 후회하고 있는 것 등을 고려해도 1, 2심의 사형 판결은 어쩔 수 없다"며 가쓰타의 상고를 기각하는 판결을 선고했다. 이로써 가쓰타는 체포된 지 11년 만에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 판결은 사회 견학을 온 아이들이 방청하는 가운데, 개정 후 불과 수십 초 만에 상고 기각 주문이 선고된, 주목받은 사건치고는 다소 맥 빠진 결말이었다. 판결 선고 후, 가쓰타의 변호단은 기자 회견에서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판결이었지만, 일본은 국제 연합 인권 규약 위원회로부터 사형 폐지를 권고받고 있다. 그러한 정세 속에서 국민 감정만을 근거로 사형을 존속하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라고 비판적인 입장을 밝혔다. 같은 날, 가쓰타는 지원자 구루스 유코의 생모(후지와라 성)와 양자 결연을 맺어 '후지와라 기요타카'가 되었고, 구루스는 그의 의붓언니가 되었다.
가쓰타는 1994년 1월 26일, 최고재판소 판결에 불복하여 판결 정정을 신청했지만, 최고재판소 제1소법정(오노 미키오 재판장)은 1994년 2월 3일, 재판관 5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신청을 기각했다. 이 결정서는 1994년 2월 5일 가쓰타에게 송달되어 사형 판결이 최종 확정되었다.
5. 사형 집행
1994년 1월 17일, 일본 최고 재판소는 가쓰타의 사형 판결을 확정했다. 이는 1972년부터 1980년 사이에 저지른 7건의 살인과 1982년에 권총으로 남자를 살해한 것에 대한 판결이었다. 같은 해 10월 3일, 가톨릭 나고야 교구의 "정의와 평화 위원회"를 포함한 전국의 종교인 등 2,516명은 당시 법무대신이었던 마에다 이사오에게 가쓰타의 사면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사형 집행 전 마지막 1년 동안, 가쓰타는 나고야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으며 심한 허리 통증으로 인해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보냈다. 사형 집행 이틀 전인 2000년 11월 28일, 의붓누나와의 마지막 면회에서 그는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0년 11월 30일, 법무성(당시 법무대신 야스오카 고지)의 사형 집행 명령에 따라 나고야 구치소에서 가쓰타의 사형이 집행되었다.[3] 이는 20세기 일본에서 집행된 마지막 사형이었다.[6] 같은 날 후쿠오카 구치소에서도 다른 사형수 1명(도스 일가족 3명 살해 사건의 범인)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가쓰타는 사형 집행 당일 오전 9시 30분경 집행 통보를 받았다. 처음에는 유서 작성을 거부했으나, 승려들의 설득 끝에 두 통의 유서를 남겼다. 한 통은 친부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 통은 의붓누나에게 자신의 유골과 소지품을 남기지 말고 구치소에서 소각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유서를 작성한 후 담배를 피우고 승려의 인도를 받아 형장으로 향했다. 사형장에 들어선 가쓰타는 교도관에게 "존경하는 담당 목사님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싶으니, 안대를 벗겨주시겠습니까?"라고 요청했다.[4] 교도관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여 불교 승려인 담당 목사를 볼 수 있도록 안대를 잠시 벗겨주었다. 승려가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동안, 가쓰타는 자신이 살해한 피해자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며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안대가 다시 씌워지고 교수형이 집행되었다.[4]
사형 집행 후, 가톨릭 신자였던 의붓누나는 가쓰타의 유언과는 달리 그의 시신을 인수했다. 2000년 12월 2일, 나고야 시내의 한 장례식장에서 의붓누나와 교회 관계자 등 약 20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독교식 장례가 치러졌다. 가쓰타의 시신은 이후 화장되었고, 유골은 오카야마현에 있는 의붓누나 친정의 묘지에 안치되었다.
6. 생애
가쓰타는 교토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2]
그는 소방관으로 일하면서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상을 받기도 했으나, 이 기간 동안에도 범죄를 저질러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2] 가쓰타는 1972년부터 1983년 체포되기 전까지 약 10년간 여러 건의 살인과 강도 행각을 벌였다. 범행 수법은 점차 대담해졌으며, 피해자들을 목 졸라 살해하거나 총으로 쏴 살해했다. 특히 1982년 10월 27일에는 경찰관을 차량으로 공격하고 권총을 탈취했으며, 같은 해 10월 31일에는 이 권총으로 남성을 살해했다. 이 일련의 사건은 '경찰청 광역 중요 지정 113호 사건'으로 지정되었다.
1983년 1월 31일, 다른 남성을 권총으로 위협하다가 체포되었다. 초기에는 강도 및 살인 혐의로 간주되었으나, 조사 과정에서 이전에 저지른 7건의 살인을 추가로 자백했다. 비록 가쓰타 본인은 최대 22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했으나, 증거 부족 등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기소된 살인 혐의는 총 8건(광역 중요 지정 113호 사건 1건 포함)이었다.[1] 경찰은 가쓰타가 일부 피해자를 살해하기 전 강간했을 가능성도 의심했으나 입증하지는 못했다.
수감 중 가쓰타는 동료 수감자들을 불신했지만, 필명 유코 쿠루스라는 기독교 여성과 교류하게 되었다. 이후 그녀의 어머니에게 입양되어 이름을 후지와라 기요타카로 바꾸었다.
1994년 1월 17일, 일본 최고 재판소는 그의 사형 판결을 확정했다. 이는 1972년에서 1980년 사이의 7건 살인과 1982년 권총 살인에 대한 두 개의 사형 판결을 동시에 확정한 것으로, 일본 최고 재판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형 확정 후 나고야 구치소에 수감되었으며, 말년에는 심한 허리 통증으로 거의 누워 지냈다고 전해진다. 2000년 11월 28일, 사형 집행 이틀 전 의붓누나와의 마지막 면회에서도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0년 11월 30일, 나고야 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3][6] 이는 20세기 일본에서의 마지막 사형 집행이었다.[6] 형 집행 직전, 그는 교도관에게 요청하여 잠시 안대를 벗고 담당 교화승의 얼굴을 보았으며, 반야심경이 독경되는 동안 피해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진심으로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했다.[4]
7. 사회적 영향 및 평가
가쓰타 기요타카의 범죄는 당시 소방관이라는 그의 공적인 신분 때문에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2] 그는 범행을 저지르는 와중에도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소방관으로서 여러 상을 받는 등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2] 경찰은 그가 최대 22명을 살해했을 가능성을 제기했으나, 최종적으로 8건의 살인 혐의만이 적용되었다.[1] 또한 경찰은 일부 피해자에 대한 강간 혐의도 의심했지만, 이를 입증하지는 못했다.
1994년 1월 17일, 일본 최고 재판소는 그의 두 건의 사형 판결을 확정했는데, 이는 일본 최고 재판소 역사상 처음으로 두 건의 사형 판결이 동시에 확정된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가쓰타는 2000년 11월 30일 나고야 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3] 이 사건은 흉악 범죄와 공직자의 이중성 문제, 그리고 사형 제도 존폐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다시 한번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7. 1. 미디어에서의 묘사
가쓰타 기요타카의 범죄는 여러 미디어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작가 오시타 에이지는 월간지 『분게이슌주』 1983년 6월호에 게재된 리포트를 바탕으로 1983년 10월 논픽션 『가쓰타 기요타카의 냉혈』을 출판했다.
이 책을 원작으로 하여 1984년 영화 連続殺人鬼 冷血|연속 살인귀 냉혈일본어이 제작되었다. 영화에서는 살인자의 이름이 '다쓰타 기요시'로 바뀌었으며, 배우 나카야마 카즈야가 주연을 맡았다. 같은 해 요미우리 TV의 『목요 골든 드라마』 시간대에서도 『냉혈』이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방영되었고, 배우 시가 죠지가 주연을 맡았다.
오시타 에이지의 원작은 2005년 『냉혈·연속 살인귀 가쓰타 기요타카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문고판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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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가쓰다 피고의 판결 1월 17일에 연기 최고재"
中日新聞
1993-12-07
[50]
뉴스
"연속 살인 사건 가쓰다 피고의 사형 확정 최고재가 상고 기각 '죄책은 중대'"
中日新聞
1994-01-18
[51]
뉴스
"'사형 존속 시대에 뒤떨어져' 변호단 회견 '예상은 했지만…'"
中日新聞
1994-01-18
[52]
서적
1996
[53]
서적
1996
[54]
뉴스
"남녀 8명 살해 가쓰다 피고의 사형 확정"
読売新聞
1994-02-06
[55]
뉴스
"가쓰다 사형수의 조명 탄원"
中日新聞
1994-10-04
[56]
뉴스
"가쓰다 사형수 등 3명 형 집행 기후의 3명 자살 전 점원도"
中日新聞
2000-11-30
[57]
뉴스
"집행 직전 '죄송합니다' 가쓰다 전 사형수 피해자의 이름 들어 중얼거린다"
中日新聞
2000-12-02
[58]
뉴스
"가쓰다 전 사형수 다비니"
中日新聞
2000-12-02
[59]
웹사이트
"캐스트・스탭 - 연속 살인귀 냉혈 ~범죄 사상 공전의 연속 23명 강간 살인 사건 - 작품"
https://movies.yahoo[...]
2021-12-20
[60]
웹사이트
"연속 살인귀 냉혈|MOVIE WALKER PRESS"
https://moviewalker.[...]
2021-12-20
[61]
웹사이트
"냉혈 - 드라마 상세 데이터 - ◇텔레비전 드라마 데이터베이스◇"
http://www.tvdrama-d[...]
2021-12-20
[62]
웹사이트
"목요 골든 드라마 냉혈 {{!}} 텔레팩"
http://telepack.co.j[...]
2021-12-20
[63]
웹사이트
"가쓰다 기요타카에 잘못 알게 된 남자 - 드라마 상세 데이터 - ◇텔레비전 드라마 데이터베이스◇"
http://www.tvdrama-d[...]
2021-12-20
[64]
웹사이트
"【더・서스펜스】가쓰다 기요타카에 잘못 알게 된 남자의 네타발레 감상"
http://blog.livedoor[...]
2021-12-20
[65]
웹인용
Serial killer, two other murderers hanged
http://search.japant[...]
Japan Times
2008-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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