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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요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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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토 요시아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공로로 이요 마쓰야마번의 영주가 된 무장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는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임진왜란에도 참전하여 조선 수군과 싸웠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는 마쓰야마성 축성 및 영지 경영에 힘썼으나 아이즈번으로 옮겨갔다. 오사카 전투에도 참전했으며, 아이즈번주로 40만 석을 다스리다 69세에 사망했다. 그는 뛰어난 치수 능력과 성곽 건설 능력을 갖춘 인물로 평가받으며, 가신에 대한 관대한 태도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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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요시아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가토 요시아키
가토 요시아키
이름가토 요시아키
일본어 이름加藤 嘉明
출생1563년
사망1631년 10월 7일
사망 장소교토
묘소교토부교토시히가시야마구의 오타니조묘
다른 이름시게카쓰 (茂勝, 초명)
마고로쿠 (孫六)
사마노스케 (左馬助, 통칭)
계명마쓰엔인덴슈이샤쿠도요다이젠테이몬(松苑院殿拾遺釈道誉大禅定門) → 산메이인도요센코(三明院道誉宣興)
가문
씨족가토 씨(기시 씨)
가문 문장Japanese crest Sagari Fuji of Katou Yosiaki.svg
가문 문장 설명늘어뜨린 등나무
관직
관위종5위하 사마노스케
종4위하 시종
종3위(증위)
정치 경력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주군하시바 히데카쓰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이에미쓰
봉직이요 국이요 마쓰야마 번 번주
무쓰 국아이즈 번 번주
가족 관계
아버지가토 노리아키
어머니가와무라 씨
배우자호리베 이치에몬의 딸
자녀호시가쿠인(星覚院, 마쓰시타 시게쓰나의 아내)
이케다 나가마사의 아내 (후에 히노 미쓰요시의 아내)
가토 아키나리
가토 아키노부
가토 아키토시
난부 시게나오의 아내
형제자매장녀 (이시카와 류지의 아내)
차녀 (가와구치 헤이몬의 아내)
가토 요시아키
가토 다다아키
가토 요시마사
여동생 (이나다 시메세쇼쿠의 아내)
군사 경력
소속도요토미 씨
세키가하라 전투 동군
도쿠가와 막부
부대가토 씨
주요 전투시즈가타케 전투(1583)
시모다 공격(1590)
임진왜란(1592-1598)
세키가하라 전투(1600)
기타

2. 생애

에이로쿠 6년(1563년) 미카와국 하타즈군(현 아이치현 니시오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가토 노리아키가 미카와 잇코 잇키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반하고 몰락하면서 어린 시절 유랑 생활을 겪었다. 이후 오미국에 정착하여 하시바 히데요시(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발탁되어 그의 가신이 되었다.

히데요시 밑에서 미키 전투, 야마자키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가하며 무공을 쌓았다. 특히 덴쇼 11년(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큰 공을 세워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등과 함께 '''시즈가타케의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 중 한 명으로 꼽히며 명성을 얻었다. 이 공으로 3,000석의 영지를 하사받았고, 이후 기슈 정벌, 시코쿠 정벌,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등 히데요시의 주요 통일 전쟁에 꾸준히 참전하며 영지를 늘려 덴쇼 14년(1586년)에는 아와지국 1만 5,000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분로쿠 원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와지 수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구키 요시타카 다음가는 수군 부장으로서 안골포 해전 등 여러 해전에 참전하여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교전했다. 게이초 2년(1597년) 정유재란에도 참전하여 칠천량 해전 등에서 싸웠다. 조선 침략에서의 공으로 이요국 마사키(현 에히메현 마쓰마에정) 6만 석으로 영지가 증가했으며, 이후 10만 석까지 늘어났다. 이 시기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문치파(文治派)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게이초 3년(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여 무단파(武斷派)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東軍)에 가담하여 기후성 공격, 오가키성 공격 및 본 전투에서 활약하며 동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전투 후 공적을 인정받아 이요 마쓰야마번 20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고, 마쓰야마성 축성을 시작했다.

오사카 전투에도 참전하여 도요토미씨 멸망에 기여했다. 도쿠가와 막부 하에서도 중용되어 겐나 8년(1622년)에는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첫 갑옷 착용 의식에서 시중드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간에이 4년(1627년), 아이즈번 43만 5,500석으로 영지가 크게 늘어나 와카마쓰성으로 옮겨갔다. 이는 도도 다카토라의 추천에 의한 것으로, 이를 계기로 오랜 불화를 해소했다고 전해진다.

간에이 8년(1631년) 9월 12일, 에도의 사쿠라다(桜田) 저택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69세였다.

2. 1. 히데요시 시대

가미나가라초 신메이사(神明社)에 있는 가토 요시아키 탄생지비(아이치현 니시오시)


에이로쿠 6년(1563년), 미카와국 하타즈군 에라(永良) 향(현 아이치현 니시오시)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었던 가토 노리아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0][11] 같은 해 발발한 미카와 잇코 잇키에서 아버지 노리아키가 잇키 측에 가담하여 이에야스를 배반하고 패배하면서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고, 어린 요시아키도 아버지를 따라 방랑했다.

이후 오미국에 정착한 아버지는 나가하마성 성주 하시바 히데요시(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겨 300석의 녹봉을 받았다. 요시아키는 말 장사를 도우며 지내다 어린 나이에도 자질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가토 가게야스(가토 미쓰야스의 아버지)에게 발탁되어 히데요시에게 천거되었다. 일설에는 히데요시가 요시아키를 가게야스의 양자로 삼았고, 이 때문에 가토(加藤)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고도 한다.[11]

히데요시는 요시아키를 자신의 양자인 하시바 히데카쓰를 모시는 小姓|고쇼일본어(시동)로 삼았다. 그러나 덴쇼 4년(1576년), 하리마 공략 때 요시아키는 히데카쓰의 허락 없이 몰래 종군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히데카쓰의 양모이자 히데요시의 정실 부인인 네네(寧々)는 주군을 제쳐두고 시동이 먼저 출진하려 한 것에 크게 분노하며 요시아키를 "무뢰한 자"라 칭하고 즉시 추방할 것을 히데요시에게 주장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오히려 요시아키의 의욕을 높이 평가하여 진중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300석의 녹봉을 주고 자신의 직속 가신으로 삼았다.

덴쇼 6년(1578년) 3월, 히데요시 군을 따라 미키성 포위 공격(미키 전투)에 참가하여 첫 전투를 치렀고, 4월 빗추 스쿠모야마(須久毛山) 전투에서는 15세의 나이로 처음 적의 수급 두 개를 베는 공을 세웠다.

덴쇼 10년(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주고쿠 지방에서 급히 회군한(中国大返) 히데요시 군에 합류하여 6월 13일 야마자키 전투에 참전했다. 이 공으로 야마시로국 히시다(菱田) 마을에 300석의 영지를 추가로 받았다. 덴쇼 11년(1583년)에는 히데요시와 시바타 가쓰이에 사이의 시즈가타케 전투에 참전하여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과 함께 활약하여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단번에 3,000석의 영지를 하사받고 '''시즈가타케의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 중 한 명으로 꼽혔다.

덴쇼 12년(1584년)에는 고마키·나가쿠테 전투기슈 정벌에 참전했다. 덴쇼 13년(1585년) 3월, 히데요시가 간파쿠(関白)에 임명될 때 요시아키도 종5위하 左馬助|사마노스케일본어 관직을 받아 이후 사마노스케로 불렸다. 같은 해 6월 시코쿠 정벌에서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군에 배속되어 이요국 평정에 참가했다. 덴쇼 14년(1586년) 11월 2일, 그 공으로 아와지국 쓰나(津名) 및 미하라(三原) 군에 1만 5,000석의 영지를 받아 다이묘가 되었고, 시치(志知) 성주가 되었다.

이후 덴쇼 15년(1587년) 규슈 정벌덴쇼 18년(1590년) 오다와라 정벌 등에서는 아와지 수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규슈 정벌 때는 해로를 통해 사쓰마국으로 들어가 가와우치 강(川内川) 도하 작전을 지원했고, 오다와라 정벌 때는 해로로 시모다 성(下田城)을 공격하여 포위 함락시키는 공을 세웠다.

분로쿠 원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1,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요시아키는 수군 총대장 구키 요시타카 다음가는 부장으로서 아와지 수군을 지휘하며 여러 해전에 참전했고,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도 여러 차례 교전했다. 7월 안골포 해전에서는 거북선과 처음 조우했으며, 같은 시기 한산도 대첩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대패한 것과 달리 요시아키는 조선 수군을 격퇴했다고 주장하며 히데요시로부터 칭찬과 함께 感状|칸조일본어(감사장)을 받았다.[19]

분로쿠 3년(1594년) 1월, 고니시 유키나가명나라심유경 사이에 강화 교섭이 시작되자 요시아키 등 일부 장수들은 잠시 일본으로 귀국했다. 2월에는 조선 침략에서의 군공을 인정받아 아와지 국내에 1,700석의 영지를 추가로 받았다. 이듬해(1595년) 7월에는 이요국 마사키(현 에히메현 마쓰마에정)로 영지를 옮겨 총 6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으며, 별도로 蔵入地|구라이리치일본어(장입지, 도요토미 정권 직할령) 4만 석의 관리도 맡았다. 이에 따라 시치 성을 떠나 이요 마사키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요시아키는 가신 아다치 시게노부에게 명하여 이요 강(이후 시게노부 강(重信川)으로 불림)의 물길을 정비하고 城下町|조카마치일본어(성 아랫마을)를 확장시켰다.

강화 교섭이 결렬되자 게이초 2년(1597년) 3월, 요시아키는 다시 조선으로 출정하여 정유재란에 참전했다. 제6대에 속하여 1,600명(주로 수군)을 이끌었다. 같은 해 7월,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격파한 칠천량 해전에 참가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나, 영지가 인접하여 공을 다투던 도도 다카토라와의 경쟁에서는 뒤처졌고 이로 인해 둘 사이는 더욱 나빠졌다. 8월에는 전주로 진격하여 남원성을 함락시키는 데 가담했고, 울산성 전투에서는 조명연합군에게 포위되어 울산왜성에 고립된 가토 기요마사를 구원하는 작전에 참여하여 육상전을 벌이기도 했다. 게이초 3년(1598년) 봄에는 히데요시에게 바칠 호랑이를 사냥하여 보내고 답례 편지를 받았다. 일본군이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사기는 저하되었고, 4월 명나라 대군이 접근한다는 소식에 고니시 유키나가 등 여러 장수들이 순천왜성에서의 철수를 주장했으나, 요시아키는 홀로 강력히 반대하며 히데요시의 재가를 얻어냈다. 히데요시는 요시아키를 크게 칭찬하고 유키나가를 질책했으며, 5월에는 요시아키에게 3만 7,000석을 추가로 주어 10만 석 다이묘로 삼고, 영지 사정이 허락하면 国主大名|고쿠슈 다이묘일본어(국주 다이묘)[12]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이 약속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등 大老|다이로일본어(오대로)들의 협의에 따라 철수가 결정되어 요시아키도 일본으로 귀국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이케다 데루마사, 호소카와 다다오키, 아사노 요시나가, 가토 요시아키, 구로다 나가마사 등 7명의 무장이 이시다 미쓰나리 암살을 모의했다는 설이 퍼졌다.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미쓰나리가 자신들의 공적을 부당하게 평가했다고 불만을 품은 것이 원인으로 알려졌다.[2] 처음에는 기요마사의 오사카 저택에 모였다가 미쓰나리의 저택으로 향했으나, 미쓰나리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시종으로부터 정보를 듣고 시마 사콘 등과 함께 사타케 요시노부의 저택으로 피신했다.[2] 7명의 무장들은 미쓰나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오사카 성 내 여러 다이묘 저택을 수색했고, 사타케 저택까지 접근했다. 미쓰나리 일행은 다시 사타케 저택을 빠져나와 후시미성으로 피신했다.[3] 다음 날, 7명의 무장들은 군사를 이끌고 후시미 성을 포위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미쓰나리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으나 이에야스는 거절했다. 대신 이에야스는 미쓰나리의 은거와 울산성 전투 평가 재검토(사건의 주요 원인)를 약속하고, 차남 유키 히데야스를 시켜 미쓰나리를 사와야마성으로 호송했다.[4] 그러나 역사가 와타나베 다이몬은 당시 사료를 근거로 이 사건이 살해 음모라기보다는 무장들과 미쓰나리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표출된 것이며, 이에야스의 역할은 미쓰나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양측의 불만을 중재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5] 이 사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무단파(武斷派)와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문치파(文治派) 사이의 대립을 격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2][6]

2. 2.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가토 요시아키, 아와지 수군을 이끌고 일본 수군의 부장 주자로서 각지에서 역전했다.(요시이쿠작 『타이헤이키 에에유덴 산주큐』)


게이초 3년(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으로 귀국했다. 당시 도요토미 정권 내부에서는 가토 요시아키를 포함한 무단파(武断派)와 오봉행(五奉行)의 이시다 미쓰나리 등 문치파(文治派) 사이에 갈등이 있었으며, 요시아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파에 속했다.

게이초 4년(1599년), 양 파의 갈등을 조정하던 마에다 도시이에가 사망하자,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구로다 나가마사, 호소카와 다다오키, 아사노 요시나가, 이케다 데루마사, 가토 요시아키 등 7명의 무장은 미쓰나리 습격 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은 미쓰나리가 임진왜란 당시 자신들의 공적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2] 처음 이들은 기요마사의 오사카성 저택에 모였다가 미쓰나리의 저택으로 향했으나, 미쓰나리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시종 구와지마 지에몬의 보고를 받고 사타케 요시노부의 저택으로 시마 사콘 등과 함께 피신했다.[2] 7명의 장수들은 미쓰나리가 없음을 알고 오사카 성 내 여러 다이묘 저택을 수색했고, 사타케 저택까지 접근했다. 미쓰나리 일행은 다시 후시미성으로 도망쳤다.[3] 다음 날, 7명의 장수들은 후시미 성을 포위하고 이에야스에게 미쓰나리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이에야스는 이를 거절하고 중재에 나서, 미쓰나리의 은퇴와 울산성 전투 평가 재검토(사건의 주요 원인)를 약속하고 차남 유키 히데야스를 시켜 미쓰나리를 사와야마성으로 호송했다.[4] 다만 역사가 와타나베 다이몬은 당시 사료를 근거로 이 사건이 살해 음모보다는 법적 갈등 해결 시도에 가까웠으며, 이에야스의 역할은 미쓰나리를 보호하기보다는 장수들의 불만을 중재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5] 이 사건으로 미쓰나리는 권력 중심에서 밀려나게 되었고,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무장들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東軍)을 지지하게 된다.[2][6]

게이초 5년(1600년), 이에야스가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모반 혐의를 제기하며 토벌을 명령하자 요시아키도 선봉으로 참전했다. 이에야스가 오사카를 비운 사이 미쓰나리 등이 거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했다. 요시아키는 동군(東軍)에 속해 미노국기후성 전투에서 오테 나나쿠루구치(大手七曲口)를 공격하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과 함께 성을 함락시켰고, 오가키성 공격에도 참여했다. 세키가하라 본 전투에서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본대와 싸워 전공을 세웠다.

마쓰야마성


한편, 요시아키가 부재중이던 이요국 마사키(松前)에서는 모리 데루모토의 가신 시시도 젠자에몬 및 낭인 무라카미 다케요시, 무라카미 모토요시(카메노스케), 노시마(能島)의 장수, 소네 효고 등이 병력 2,500명을 이끌고 침공했다. 그러나 요시아키의 가신 쓰쿠다 도세이가 병력 200명으로 미쓰에서 야습을 감행하여 이들을 격파하고 무라카미 모토요시 등을 죽였다(미쓰하마 야습). 또한 고노씨의 잔당 히라오카 젠베에가 농성하던 쿠메의 뇨라이지(如來寺)를 공략했다. 봉기한 잇키(一揆) 세력 진압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모리 세력은 철수했고 잇키 세력도 곧 진압되었다.

전투 후, 요시아키는 공적을 인정받아 기존 영지에서 10만 석이 가증되어 이요 마쓰야마번 20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이요에서는 도도 다카토라 역시 20만 석 다이묘가 되어 두 사람의 영지가 인접하게 되었고, 산간 지역의 경계 확정에 어려움이 있었다. 요시아키는 아다치 시게노부(足立重信)에게 이시테강의 흐름을 바꾸도록 명하여 시게노부강(重信川)에 합류시키고 넓은 땅을 확보했다. 게이초 6년(1601년)에는 이에야스로부터 가쓰야마성(후일 마쓰야마성) 건축 허가를 얻어 이듬해부터 축성을 시작했으며[13], 성 아랫마을(조카마치, 城下町) 정비에도 착수했다. 게이초 8년(1603년), 본거지를 마사키에서 가쓰야마로 옮기고 지명을 마쓰야마로 개칭했다.

게이초 11년(1606년)부터 14년(1609년)까지는 에도성 수리, 슨푸성 수리, 사사야마성 축성, 나고야성 축조 등 막부의 여러 공사에 다른 다이묘들과 함께 참여했다.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大坂冬の陣일본어 때는, 히데요시로부터 은혜를 입은 다이묘였기에 에도성 수비를 맡았고, 대신 적자인 가토 아키나리가 출진했다. 같은 해 10월경, 이름을 요시아키(嘉明)에서 가리아키(嘉明, 발음만 변경)로 바꾼 것으로 알려져 있다.[14][15] 게이초 20년(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大坂夏の陣일본어에서는 가리아키가 직접 출진하여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대의 좌익에 구로다 나가마사와 함께 포진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 전투 결과 도요토미씨는 멸망했다.

겐나 5년(1619년),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영지를 몰수당하자(개역, 改易), 가리아키는 마사노리의 신병을 인수하는 동시에 히로시마성 접수 책임자가 되었다. 겐나 8년(1622년)에는 도쿠가와 이에미쓰첫 갑옷 착용 의식(鎧着初め)에서 시중드는 역할을 맡는 영예를 얻었다.[16] 이듬해 이에미쓰가 3대 쇼군이 되자 종사위하(従四位下)에 서임되었고, 간에이 3년(1626년)에는 시종(侍従)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고미즈노오 천황니조성 행차 시 경호 임무도 수행했다.

간에이 4년(1627년), 아이즈번가모 다다사토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가모씨가 감봉되어 이요 마쓰야마번으로 전봉되자, 가리아키가 대신 아이즈번 43만 5,500석으로 증가 이봉되어 본거지를 와카마쓰성으로 옮겼다. 이로 인해 마쓰야마성 건축은 중단되었고, 성은 후임 번주 가모 다다토모 대에 완성되었다. 원래 이에미쓰는 요충지인 아이즈에 도도 다카토라를 봉하려 했으나, 다카토라가 사양하며 가리아키를 추천했다. 평소 불화가 있던 두 사람이었지만, 다카토라는 사적인 감정보다 국사를 우선하여 가리아키가 적임자라고 추천했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화해하여 이후 수어지교(水魚の交わり)와 같은 관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가리아키의 셋째 아들 가토 아키토시는 미하루(三春) 3만 석을 받았고, 사위 마쓰시타 시게쓰나도 니혼마쓰(二本松)에 배치되어 가리아키의 지원 세력이 되었다.

간에이 8년(1631년) 병을 얻어 9월 12일 에도의 사쿠라다(桜田) 저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69세. 법명은 쇼엔인덴 슈이샤쿠도요 다이젠죠몬(松苑院殿拾遺釈道誉大禅定門). 아자부(麻布)의 젠푸쿠지에서 화장되었고, 유골은 후에 동본원사 오타니 소묘(大谷祖廟)에 안치되었다. 법명은 쇼호 4년(1647년) 동본원사 법주(法主) 타쿠죠(琢如)에 의해 산메이인 도요 센코(三明院道誉宣興)로 개명되었다. 가독은 적자인 가토 아키나리가 이었다.

다이쇼 6년(1917년) 11월 17일, 다이쇼 천황은 특지를 내려 가리아키에게 종삼위(従三位)를 추증했다.

3. 주요 가신


  • 덴 주세이 佃十成jpn
  • 아다치 시게노부 足立重信jpn
  • 이시카와 류지 石川隆次jpn
  • 야부 요자에몬 藪与左衛門jpn
  • 반 나오유키 (塙直之jpn, 통칭 塙団右衛門jpn)[20]
  • 구로다 규베 나오쓰구 黒田九兵衛直次jpn

4. 인물과 일화

가토 사마스케 요시아키는 아와지 수군을 이끌고 일본 수군의 부장급으로서 각지에서 맹렬히 싸웠다. (낙합 요우키 작 『태평기 영웅전 39』)

4. 1. 무략

덴쇼 11년(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는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과 함께 활약하여 전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단번에 녹 3,000석을 받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한 명으로 꼽히게 되었다.

임진왜란(분로쿠 원년, 1592년)이 발발하자 1,000명을 이끌고 출정하였고, 함대장 구키 요시타카 다음가는 부장으로서 아와지 수군을 이끌고 여러 해전에 참전했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과도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같은 해 7월 안골포 해전에서는 거북선과 처음 조우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한산도 대첩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패배한 것과 달리 요시아키는 적을 격퇴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칭찬과 감사장([19])을 받았다.

『토사 이야기』 제17권에는 조선 출병 당시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요시아키가 소수의 배로 공격하려 했으나 다른 장수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자, 조카 가토 곤시치(加藤権七)와 함께 몰래 배 20여 척으로 출격했다. 그러나 조선 순찰선에 발각되어 다수의 적선에 포위당하고 화살 공격으로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요시아키 자신도 화살 두세 발을 맞았다. 갈고리로 적선을 끌어당기려 했으나 실패하자, 가신들에게 "나를 적선에 던져라"라고 명하여 하나와 단우에몬 등과 함께 적선에 뛰어올라 3척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정유재란(게이초 2년, 1597년)에도 다시 참전하여 1,600명의 수군을 이끌었다. 같은 해 7월 칠천량 해전에서는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영지를 두고 공을 다투던 도도 다카토라에게는 미치지 못했고 이후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나빠졌다. 8월에는 남원성 함락에 참여했고, 울산성 전투에서는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에 포위되어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가토 기요마사를 구원하는 군대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육상 전투도 벌였다. 1598년 봄에는 히데요시에게 바칠 호랑이를 사냥해 보내고 답례 편지를 받았다.

1598년 4월, 명나라 대군이 접근한다는 소식에 고니시 유키나가 등 여러 장수들이 순천왜성에서의 철수를 주장했으나, 요시아키는 홀로 강력히 반대하여 히데요시의 재가를 받았다. 히데요시는 요시아키를 크게 칭찬하고 유키나가를 질책하며, 5월에 요시아키에게 3만 7,000석을 더해주어 10만 석 다이묘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영지 사정이 허락하면 국주 다이묘로 삼겠다는 약속까지 했으나, 같은 해 8월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인 기후성 전투에서는 이이 나오마사가 "기후성은 단번에 총공격하여 함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자, 요시아키는 "기후성은 견고한 성이라 단번에 함락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기껏해야 일부를 불태울 정도"라고 반대하며 언쟁을 벌였다. 칼을 뽑는 상황까지 갔으나 다른 장수들의 만류로 진정되었다. 그러나 이후 전장을 살핀 요시아키는 "적이 방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므로 단번에 함락시킬 수 있다"고 판단을 바꾸었다. 실제로 이케다 테루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이끄는 동군이 큰 손실 없이 기후성을 함락시키자, 여러 장수들은 요시아키의 냉철한 분석과 작전 능력을 칭찬했다고 한다(사나다 마스요시의 『명량홍범』[17]).

4. 2. 정치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정권 내에서는 가토 요시아키를 포함한 무단파오봉행이시다 미쓰나리문치파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1599년(게이초 4년), 양 세력 간의 조정을 맡았던 마에다 도시이에가 사망하자,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구로다 나가마사, 호소카와 다다오키, 아사노 요시나가, 이케다 데루마사, 가토 요시아키 등 7명의 무장은 이시다 미쓰나리를 습격하는 사건을 일으켰고, 결국 미쓰나리는 사와야마성으로 은거하게 되었다.

무단파는 실권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랐다. 1600년(게이초 5년), 이에야스가 아이즈의 우에스기 가게카쓰 토벌을 명하자 요시아키도 선봉으로 참전했다. 그 사이 미쓰나리 등이 거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했다. 동군(도쿠가와 측)으로 돌아온 요시아키는 미노국기후성 공격에 참여하여 오테 나나쿠루구치(大手七曲口) 방면에서 공격했고,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과 함께 성을 함락시켰다(기후성 전투). 또한 오가키성 공격에도 가담했으며, 세키가하라 본 전투에서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본대와 싸워 공을 세웠다.

한편, 요시아키가 부재중이던 이요국 마사키(현 마쓰야마시 마사키 지구)에는 모리 데루모토의 가신 시시도 젠자에몬(고노 미치노부와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및 낭인 무라카미 다케요시, 무라카미 가메노스케, 노시마 나오시게(能島内匠), 소네 효고 등이 이끄는 2,500명의 병력이 침공했다. 그러나 요시아키의 가신 쓰쿠다 도세이가 200명의 병력으로 미쓰에서 야습을 감행하여 이들을 격파하고, 가메노스케, 나오시게, 효고 등을 죽였다(미쓰하마 야습). 또한 고노씨의 잔당인 히라오카 젠베에가 농성하던 구메군의 뇨라이지(如來寺)를 공략했다. 봉기한 잇키 세력 진압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모리 세력은 철수했고 잇키 세력도 곧 진압되었다.(이요 지방)

전투 후, 요시아키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10만 석이 가증되었다. 이로써 후지토도 다카토라와 함께 이요에서 20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으며, 영지가 인접하여 경계 확정이 어려운 산간 지역도 있었다. 요시아키는 가신 아다치 시게노부에게 이시테강의 치수를 명하여 물길을 바꾸고 시게노부강(重信川)에 합류시켜 넓은 토지를 확보했다. 1601년(게이초 6년), 이에야스로부터 가쓰야마(勝山, 후의 마쓰야마)에 성을 건축하는 허가를 얻었고, 이듬해부터 축성을 시작하며[13] 성 아랫마을(조카마치) 정비에도 착수했다.

1603년(게이초 8년), 요시아키는 본거지를 마사키에서 가쓰야마로 옮기고, 이를 계기로 지명을 마쓰야마로 개칭했다.

1606년(게이초 11년)부터 1609년(게이초 14년)까지 에도성 수리, 슨푸성 수리, 사사야마성 축성, 나고야성 건설 등 막부가 주도한 대규모 공사에 다른 다이묘들과 함께 참여했다.

1614년(게이초 19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는 과거 도요토미 가문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던 다이묘였기에 에도성 수비를 맡았고, 대신 장남 가토 아키나리가 출진했다. 같은 해 10월경, 이름을 요시아키(嘉明)에서 아키요시(明成)로 바꾸었다고 전해진다.[14][15]

1615년(게이초 20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는 직접 출진하여 에도 막부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군대에 속해 구로다 나가마사와 함께 좌익에 포진하여 공을 세웠다. 이 전투의 결과로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했다.

1619년(겐나 5년),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영지를 몰수당하자(개역), 요시아키는 마사노리의 신병을 인수하는 동시에 히로시마성 접수 역할도 담당했다. 1622년(겐나 8년)에는 쇼군 후계자 도쿠가와 이에미쓰겐푸쿠(성인식) 의식 중 하나인 기하지메(着初め)에서 시중드는 역할을 맡는 영예를 누렸다.[16] 이듬해 이에미쓰가 제3대 쇼군으로 취임하자 종사위하에 서임되었고, 1626년(간에이 3년)에는 지주(侍従)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고미즈노오 천황니조성으로 행차했을 때 경호 임무를 맡기도 했다.

1627년(간에이 4년), 아이즈의 가모 다다사토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가모씨가 감봉되고 이요 마쓰야마번으로 전봉되자, 그 대신 요시아키가 아이즈번으로 이봉되어 43만 5,500석으로 영지가 증가하였고 본거지를 와카마쓰성으로 옮겼다. 원래 이에미쓰는 요충지인 아이즈에 후지토도 다카토라를 봉하려 했으나, 다카토라가 고사하며 요시아키를 추천했다. 평소 불화가 있었던 두 사람이었지만, 다카토라가 사적인 감정을 떠나 국사를 위해 요시아키가 적임자라고 추천했다는 말을 듣고 화해하여 이후 매우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요시아키의 삼남 가토 아키토시는 미하루(三春) 3만 석을 받았고, 사위 마쓰시타 시게쓰나도 니혼마쓰(二本松)에 배치되어 요시아키를 보좌하게 되었다.

1631년(간에이 8년) 병을 얻어 9월 12일 에도의 사쿠라다(桜田) 저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69세. 법명은 쇼엔인덴 슈이샤쿠도요 다이젠죠몬(松苑院殿拾遺釈道誉大禅定門). 아자부(麻布)의 젠푸쿠지에서 화장되었고, 유골은 후에 동본원사 오타니 소묘에 안치되었다. 법명은 1647년(쇼호 4년) 동본원사 법주인 타쿠죠(琢如)에 의해 산메이인 도요 센코(三明院道誉宣興)로 개명되었다.

1917년(다이쇼 6년) 11월 17일, 다이쇼 천황은 특별히 조서를 내려 요시아키에게 종삼위를 추증했다.

요시아키는 하천 개수를 통한 치수 사업, 성곽 및 성곽 도시 건설 등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에히메현에서는 현재도 마쓰야마성 축성에 대한 평가가 높아, 성의 가쓰야마(가메이산)에 그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4. 3. 가신에 대한 태도

가토 요시아키는 가신들을 아끼고 관대하게 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만에서 온 귀한 도자기인 '虫喰南蛮|무시쿠이난반일본어' 작은 접시 10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손님 접대를 준비하던 시종이 실수로 한 개를 깨뜨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요시아키는 시종을 꾸짖기는커녕 남은 9개의 접시마저 모두 깨뜨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9개가 남아 있는 한, 누가 실수했는지 알려져 그 무사의 명예에 누를 끼칠 것이다. 가신들은 나의 사지와 같다. 아무리 명품이라도 가신과는 바꿀 수 없다. 대체로 의복, 초목, 조류 같은 것을 아끼는 자는 그 때문에 오히려 가신을 잃는다. 이는 주군이 마땅히 알아야 할 일이다.” (마나다 마사요시의 『묘료홍범』)[17]

또한, 시종들이 주군이 없는 틈을 타 난로에서 화톳집게를 불에 달구며 놀고 있을 때 요시아키가 나타나자, 당황한 시종들이 화톳집게를 재 속에 떨어뜨렸다. 이를 본 요시아키는 아무 말 없이 맨손으로 뜨거운 화톳집게를 집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조용히 다시 꽂아주었다고 한다(마나다 마사요시의 『묘료홍범』)[17]. 다만, 이 일화는 시마즈 요시히로에게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에 후대에 요시히로를 본떠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반대로 시마즈 측이 요시아키의 일화를 참고했을 가능성도 있다.[17]

5. 계보

가토 요시아키 사후, 가문의 우두머리 자리는 적자인 명성(加藤明成)이 이어받았다. 그러나 명성이 어리석어 가신인 호리 모노스케 등이 가문을 떠나는 사건(출분, 出奔)이 발생했고, 이를 토벌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 소동은 사적인 싸움을 금지한 에도 막부의 개입을 불러왔고, 결국 영지를 줄인 뒤 후계자를 세워 가문을 유지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명성은 정실부인을 배려하여 자신에게 아들이 없다고 끝까지 주장했고, 이로 인해 가문은 영지를 몰수당하는 개역(改易) 처분을 받았다. 다행히 서자인 명우(加藤明友)가 오미의 미즈구치번 2만 석 영주로 임명되면서 가문의 명맥은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명우의 손자인 명경(加藤明経)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명경은 아오키 시게마사의 손자인 명희(加藤明熙)를 양자로 들였고, 이 명희 이후 현대까지 이어지는 가문의 당주들은 가토 요시아키의 직접적인 남자 혈통을 잇고 있지 않다.

여계를 통해서는 혈통이 이어지고 있다. 명성의 딸이 시집간 세쓰 니시키번의 영주 아오야마 가문(유키나리 계열, 이후 시나노 이이야마번, 탄고 미야즈번, 미노 구죠번으로 영지 이동)과, 에도 시대 중기에 미야즈번에서 타다타카를 양자로 들인 본가인 탄바 시노야마번 영주 아오야마 가문은 현대까지 가토 요시아키의 혈통을 잇고 있다.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가토 노리아키(加藤教明)
어머니가와무라씨(川村氏)
형제가토 타다아키(加藤忠明)
가토 요시마사(加藤嘉政)
정실호리베 시우에몬(堀部市右衛門)의 딸
자녀장녀: 세이가쿠인(星覚院)마쓰시타 시게쓰나(松下重綱)의 부인
차녀이케다 나가마사의 부인, 후에 히노 미쓰요시(日野光慶)의 부인
장남: 가토 아키나리(加藤明成)
차남: 가토 아키노부(加藤明信)
삼남: 가토 아키토시(加藤明利)


6. 관련 작품


  • '''드라마'''
  • * 온나 다이코키 (1981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시마무라 타쿠시)
  • * 세키가하라 (1981년, TBS, 배우: 이시바시 마사후미)
  • * 사나다 태평기 (1985년, NHK 신대형시대극, 배우: 오토모 류사부로)
  •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 (2000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하야사카 나오야)
  • * 리케 토 마츠~가가 백만석 이야기~ (2002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나미하나 유지)
  • * 공명의 갈림길 (2006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사토 타쿠유키)
  • * 네네~여자 다이코키 (2009년, TV 도쿄 신춘 와이드 시대극, 배우: 스기야마 사토시)

  • '''영화'''
  • * 야마우치 가즈토요의 아내 (1939년, 배우: 카츠라기 코이치)
  • * 아바레 다이묘 (1959년, 배우: 야마가타 이사오)
  • * 아라쿠레 다이묘 (1960년, 배우: 세키네 에이지로)
  • * 명량 (2014년, 배우: 김강일)
  • * 배틀 오션 해상결전 (연도 미상, 배우: 김강일)
  • * 세키가하라 (2017년, 배우: 니시하라 세이고)
  • * 한산: 용의 출현 (2022년, 배우: 김성균)

  • '''소설'''
  • * 도쿠나가 신이치로, 「가토 사마노스케 요시아키」(『시즈가타케 칠본창』 수록, PHP문고)
  • * 난죠 노리오, 「구석시야 아우노 우마이 - 가토 사마노스케 요시아키」(『오노레 치쿠젠, 와 야부레타리』 수록, 분슌문고)
  • * 코노에 류슈운, 「가토 요시아키 「시즈가타케 칠본창」 알려지지 않은 용장」(PHP문고)
  • * 이마무라 쇼고, 『증거를 남기는 날들』(「전국무장전 서일본편」 수록, PHP 연구소)

참조

[1]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1998
[2] 학술지 前田利家の死と石田三成襲撃事件 https://cir.nii.ac.j[...] 2013
[3] 학술지 豊臣七将の石田三成襲撃事件―歴史認識形成のメカニズムとその陥穽― 2000
[4] 학술지 徳川家康の人情と決断―三成"隠匿"の顚末とその意義― 2000
[5] 웹사이트 七将に襲撃された石田三成が徳川家康に助けを求めたというのは誤りだった https://news.yahoo.c[...] 渡邊大門 無断転載を禁じます。 © LY Corporation 2024-06-02
[6] 서적 戦国史の俗説を覆す 柏書房 2016
[7] 서적 歴代文化皇國史大觀 https://books.google[...] Oriental Cultural Association 2024-05-23
[8] 간행물 1930
[9] 서적 戦国人名辞典 吉川弘文館
[10] 문서 한가지 설에 따르면 카게키무라 또는 니시오무라 출생이라고 한다.
[11] 문서 가토 요시아키는 다이묘가 된 후 족보를 만들고 본성을 후지와라씨로 하고 가토씨를 칭하게 되었다. 가토 요시아키의 손자라고 하지만, 아버지보다 전의 출신은 불명. 아버지도 기시 성씨였다고도 한다. 출신이 다른 가토 미쓰야스의 조상과 족보상으로 연결되게 된 것은, 유코가 된 경위 때문일 것이다.
[12] 문서 지행 20만석 이상으로, 요시아키의 이요국에서는 후지도 타카토라보다 상위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3] 문서 완성은 가모우 타다토모 시대.
[14] 학술지 加藤嘉明・大友義統発給文書等について―上田藩士河合家伝来加藤文書を中心に―
[15] 학술지 <史料紹介>竹田文庫伝来加藤嘉明宛書状
[16] 서적 日本史の内幕 戦国女性の素顔から幕末・近代の謎まで 中公新書 2017
[17] 간행물 1996
[18] 문서 가토 요시아키는 다이묘가 된 후 족보를 만들고 본성을 후지와라씨로 하고 가토씨를 칭하게 되었다. 가토 요시아키의 손자라고 하지만, 아버지보다 전의 출신은 불명. 아버지도 기시 성씨였다고도 한다. 출신이 다른 가토 미쓰야스의 조상과 족보상으로 연결되게 된 것은, 유코가 된 경위 때문일 것이다.
[19] 문서 칸죠: 다이묘가 무공을 세운 사무라이들에게 내려주는 표창장, 훈장
[20] 문서 하나와 단우에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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