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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다 기요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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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로다 기요타카는 사쓰마 번 출신으로, 삿초 동맹 체결과 보신 전쟁, 하코다테 전쟁에서 활약했다. 개척사 장관으로 홋카이도 개척을 주도하고 강화도 조약을 체결했으며,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일본 제국 헌법 발포를 주도했다.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 조약 개정 실패, 주벽 등의 문제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추밀고문관, 체신 대신, 추밀원 의장 등을 역임했으며, 1900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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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다 기요타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구로다 기요타카 공식 사진
구로다 기요타카 공식 사진
존칭종1위
백작
일본어 이름黒田 清隆 (くろだ きよたか)
한자 표기黑田 淸隆
출생일1840년 11월 9일 (덴포 11년 10월 16일)
출생지사쓰마국 가고시마군 신야시키도리마치 (현재 가고시마현 가고시마시 신야시키정)
사망일1900년 8월 23일
사망지도쿄부
사망 원인뇌출혈
소속 정당무소속
구로다 기요타카 서명
구로다 기요타카 서명
직책
내각총리대신제2대
재임 기간1888년 4월 30일 ~ 1889년 10월 25일
천황메이지 천황
재임 기간21896년 8월 31일 ~ 1896년 9월 18일
천황2메이지 천황
추밀원 의장제6대
재임 기간31895년 3월 17일 ~ 1900년 8월 25일
천황3메이지 천황
내각4제2차 이토 내각
제2차 마쓰카타 내각
제3차 이토 내각
재임 기간41895년 3월 17일 ~ 1898년 6월 27일
체신대신제3대
내각5제2차 이토 내각
재임 기간51892년 8월 8일 ~ 1895년 3월 17일
농상무대신제3대
내각6제1차 이토 내각
재임 기간61887년 9월 17일 ~ 1888년 4월 30일
개척장관제3대
재임 기간71874년 8월 ~ 1882년 2월
개척차관제2대
재임 기간81870년 5월 9일 ~ 1874년 8월
전임 직업무사(사쓰마번사)
육군군인
개인 정보
배우자구로다 기요
구로다 다키코
자녀에노모토 우메코
이지치 다케코
구로다 기요나카
친족 (정치가)아버지: 구로다 기요유키
사위: 에노모토 다케노리
양손자: 구로다 기요
손자: 에노모토 다케히데
증손자: 구로다 기요아게
경력
재임 기간1894년 3월 17일 ~ 1900년 8월 23일
전임자야마가타 아리토모
후임자사이온지 긴모치
훈장
훈장종1위
[[File:JPN Daikun'i kikkasho BAR.svg|38px]] 대훈위 국화대수장
[[File:JPN Toka-sho BAR.svg|38px]]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File:JPN Kyokujitsu-sho 1Class BAR.svg|38px]] 훈1등 욱일대수장
[[파일:제국육군의 계급―견장―중장.svg|38px]] 육군중장
백작

2. 사적 요약

구로다 기요타카(Kuroda Kiyotaka)를 그린 니시키에 그림


사쓰마 번 출신의 번사로서, 막부 말기에는 삿초 동맹(薩長同盟) 체결을 위해 활동했다. 1868년부터 1869년까지 이어진 보신 전쟁에서는 신정부군 참모로서 호쿠에쓰(北越)에서 쇼나이(庄内)에 이르는 호쿠리쿠 전선과 하코다테 전쟁에서 군사 지휘를 맡았다.

1870년부터 1882년까지 개척사 차관 및 장관을 역임하며 홋카이도 개척을 주도했다. 개척사 최고 책임자이면서 동시에 도쿄에 머물며 정부의 주요 인사로 활동했다. 1876년에는 강화도로 파견되어 조선과 조일수호조규 체결을 이끌었다. 이듬해인 1877년 세이난 전쟁에서는 구마모토성 포위를 푸는 데 기여했다.

1878년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된 후 사쓰마 파벌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그러나 개척사 폐지를 앞두고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을 일으켜 여론의 큰 비판을 받았다.

1888년 4월에는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고, 재임 중 일본 제국 헌법이 반포되었다. 하지만 조약 교섭에 실패하면서 이듬해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도 원로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으며, 추밀고문관, 체신 대신, 추밀원 의장을 역임했다. 1900년에 사망하여, 19세기에 사망한 유일한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기록되었다.

3. 생애

사쓰마 번사 출신으로, 막말 삿초 동맹 결성을 위해 노력했으며, 1868년부터 1869년까지 이어진 보신 전쟁에서는 신정부군 참모로서 호쿠에쓰(北越)에서 쇼나이(庄内)에 이르는 호쿠리쿠 전선과 하코다테 전쟁에서 지휘를 맡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개척차관, 개척장관으로서 1870년부터 1882년까지 홋카이도 개척을 주도했다. 중앙 정부에서는 1876년 강화도에서 조선과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으며, 1877년 세이난 전쟁에서는 구마모토성 구원에 공을 세웠다. 1878년 오쿠보 도시미치 암살 이후 사쓰마 파벌의 중심 인물이 되었으나, 1881년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으로 큰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1888년 4월, 이토 히로부미의 뒤를 이어 제2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재임 중 1889년 일본 제국 헌법이 공포되었으나, 불평등 조약 개정 협상 실패의 책임을 지고 같은 해 사임했다. 이후 원로로서 추밀고문관, 체신대신, 추밀원 의장 등을 역임했다.

덴포 11년(1840년) 사쓰마 번 가고시마 성 아래에서 번사 구로다 나카자에몬 기요유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구로다 가문은 녹봉이 4석에 불과한 하급 무사 가문이었고, 어머니는 그가 어릴 때 사망했다.[14]

1869년 하타모토 나카야마 가쓰시게(中山勝重)의 딸 세이(清, 1854-1878)와 결혼했으나, 세이는 1878년 폐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구로다가 아내를 살해했다는 추문이 돌아 조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15][16] 이후 재목 상인의 딸 -- 구로다 타키코(黒田滝子, 1863년생)와 재혼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후계자였던 아들 기요나카(清仲)가 자녀 없이 일찍 사망하여, 양자를 통해 가계가 이어졌다.[14]

1900년 8월 23일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향년 59세였다. 19세기에 사망한 유일한 일본 내각총리대신이다. 묘소는 도쿄 아오야마 묘원에 있다.

3. 1. 막말기의 활약상

덴포 11년(1840년), 사쓰마 번 번사 구로다 나카자에몬 기요유키의 장남으로 가고시마 성 아래 신야시키초에서 태어났다.[4] 구로다 가문은 녹봉이 4석에 불과한 하급 무사 가문이었다.[1]

성장하여 포수가 되었으며, 시켄류 검술에도 능숙하여 후일 종가인 도고 시게타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았다. 분큐 2년(1862년) 6월, 시마즈 히사미쓰의 행렬을 따르던 중 나마무기 사건이 발생했을 때 현장에 있었으나, 직접 칼을 휘두르지는 않고 오히려 칼을 뽑으려던 다른 무사를 말렸다고 전해진다.

이듬해인 분큐 3년(1863년)에는 사쓰마 번과 영국 간의 사쓰에이 전쟁에 참전했다. 전쟁 후 에도로 가서 포술을 배우고 실력을 인정받았다.

게이오 2년(1866년)에는 삿초 동맹 체결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동맹 체결 전 사쓰마 번의 사자 자격으로 조슈 번을 방문하여 동맹 체결을 설득했으며, 오사카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쓰라 고고로의 회담을 성사시킨 후 다시 조슈 번에 사자로 파견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막부 타도 운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후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보신 전쟁(1868년-1869년)에서는 신정부군의 참모로서 호쿠에쓰(北越)에서 쇼나이(庄内)에 이르는 호쿠리쿠 전선과 하코다테 전쟁 등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특히 하코다테 전쟁에서는 적장이었던 에노모토 다케아키의 목숨을 구명해주기도 했다.[1]

3. 2. 보신 전쟁과 하코다테 전쟁

사쓰마 번사로서 막말 삿초 동맹 결성을 위해 노력했으며, 메이지 유신 전후의 격동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1868년부터 1869년까지 이어진 보신 전쟁하코다테 전쟁에서의 활약은 그가 메이지 정부의 핵심 인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1862년 나마무기 사건에 연루되었고, 이 사건은 1863년 영국-사쓰마 전쟁으로 이어졌다. 구로다는 이 전쟁에서 활약한 후 에도에서 포병술을 배웠다. 사쓰마로 돌아온 뒤에는 막부 타도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868년(게이오 4년) 도바·후시미 전투에서는 사쓰마 번의 소총 제1대장으로 참전했다. 같은 해 3월,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함께 호쿠리쿠도 진무총독 다카쿠라 나가후의 참모로 임명되어 호쿠에쓰 전쟁에 참전했다. 구로다는 나가오카 번을 항복시키고 유능한 인물이었던 가와이 쓰구노스케를 등용하려 했으나, 그에게 보낸 서신이 전달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가오카 성 점령 후에는 해로를 통해 니가타로 이동하여 적의 배후를 위협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세웠다. 야마가타에게 신정부군 주력을 맡기고 자신은 마쓰가사키에 상륙하여 신발타 번을 항복시키고 니가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나가오카 성이 야습을 받아 주력이 잠시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구로다는 작전 목표를 달성했다.

에치고 지역 전투가 마무리된 후, 구로다는 아키타에 상륙하여 쇼나이 번을 배후에서 공략하는 작전을 계획했다. 그러나 사이고 다카모리와 합류한 뒤, 아키타 번 병사들의 피로도를 고려하여 요네자와 번을 먼저 공격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사이고와 구로다는 관대한 정책을 통해 요네자와 번과 쇼나이 번의 항복을 유도했고, 9월 27일 쇼나이의 쓰루오카 성을 접수하며 이 지역의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일단 가고시마로 돌아갔다가 1869년(메이지 2년) 1월 군무관에 임명되었다. 하코다테 전쟁이 발발하자 2월에 시미즈야니 공고 중장의 참모로 임명되어 3월 도쿄를 출발했다. 도중에 미야코 항에 정박하던 중 미야코만 해전을 겪기도 했다. 4월 9일 먼저 상륙한 야마다 아키요시에 이어 19일 에사시에 상륙하여 구 막부군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총지휘를 맡았다.

5월, 구 막부군이 하코다테로 몰리자 구로다는 그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노력했다. 11일 하코다테 총공격에서는 직접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배후의 하코다테 산을 점령하여 적들을 고료가쿠로 몰아넣었다. 이후 에노모토 다케아키에게 항복을 권유하여 17일 항복을 받아냈다.

전쟁 후 구로다는 에노모토 다케아키의 사형을 면하게 해달라고 강력히 주장하며, 엄벌을 요구하는 이들과 오랫동안 대립했다. 심지어 에노모토의 구명을 위해 자신의 머리를 삭발하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에노모토 문제는 1872년 1월 6일, 에노모토 등 일부 인물은 근신 처분을 받고 나머지는 석방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3. 3. 개척사 시대와 홋카이도 개척

메이지 2년(1869년) 11월 22일, 구로다는 나카야마 세이(中山清)와 결혼했다. 이듬해인 메이지 3년(1870년) 5월, 사할린(당시 일본명 가라후토)에서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이 커지자, 그는 사할린 담당 개척차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일본 정부 내에서는 사할린 출병론이 강했지만 구로다는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그는 7월부터 사할린 현지를 시찰하고 러시아 관리들과 관계를 조정한 뒤 홋카이도를 거쳐 돌아왔다. 이 경험을 통해 사할린 영유 포기 의사를 굳혔고, 러시아 측에도 이러한 의견을 전달했다. 10월 20일에는 사할린 방어의 어려움을 지적하며, 개척사의 본청을 삿포로로 옮기고 홋카이도 개척에 집중해야 한다는 건의서를 제출했다.

젊은 시절의 구로다 기요타카


메이지 4년(1871년) 1월부터 5월까지 미국유럽을 시찰했다. 이 여행에서 그는 미국의 농무장관 호레스 케프론(Horace Capron)을 만나 홋카이도 개발을 위한 고문 파견 약속을 받았으며, 이는 이후 많은 외국인 전문가(고용 외국인)를 초빙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유능한 통역관이었던 야마우치 데이운(山内堤雲)을 발탁하여 케프론과의 소통 및 행정 업무를 맡겼다.[5] 같은 해 10월 15일, 개척장관 히가시쿠제 미치토미가 사임하자 구로다는 차관 신분으로 개척사의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후쿠오카번의 구로다 나가히로 후작. 구로다 기요타카는 후쿠오카 번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구로다는 케프론의 제안에 따라 홋카이도에서 기반 시설 정비 사업을 시작했으나, 예상보다 많은 예산이 소요되자 메이지 6년(1873년)에는 사업 규모를 축소하고 단기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농업 및 산업 진흥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했다. 메이지 7년(1874년)에는 홋카이도 개척 사무소 소장으로 임명되어, 직업이 없는 옛 사무라이나 퇴역 군인들을 농업과 지역 방위를 겸하는 둔전병으로 활용하는 제도를 조직했다. 또한 기후가 비슷한 외국의 농업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홋카이도에 적합한 작물과 농업 기술 도입을 추진했다. 같은 해 6월 23일 일본 제국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고 홋카이도 둔전헌병사무총리에 임명되었으며, 8월 2일에는 참의 겸 개척장관이 되어 오쿠보 도시미치 정권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하코다테 전쟁에서 항복했던 에노모토 다케아키 등 구 막부 측 인사들을 개척사에 등용하기도 했다.

사할린 문제에 있어서 구로다는 일관되게 영유권 포기를 주장했다. 이와쿠라 사절단 파견 후 유수정부 내에서 사할린 매수를 주장한 외무경 소에지마 다네오미와 대립했으며, 정한론 정변 이후에는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사할린 포기 방침을 추진했다. 그는 러시아와의 협상 사절로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추천했고, 결국 에노모토는 1875년 사할린-쿠릴 교환 조약 체결을 이끌어냈다. 조약 체결 후, 개척사 장관이었던 구로다는 사할린 아이누를 홋카이도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당초 이주지로 약속했던 소야 대신 이시카리의 도이시카리(対雁)로 강제 이주가 진행되었고, 이에 반대한 개척사 간부 마쓰모토 주로가 사임하는 등 내부 갈등과 비판이 있었다. 강제 이주된 사할린 아이누는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남사할린을 차지하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이 발생하자, 구로다는 이듬해인 1876년 2월 조선과의 협상을 위한 전권변리대신으로 파견되어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 체결을 주도했다. 이 조약은 조선의 개항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876년 1월 16일 부산항에서 강화도로 향하는 구로다 기요타카 사절단 함대. 일본 군함 닛신(日進), 모슌(孟春) 등 총 6척으로 구성되었다.


구로다는 유학생 파견 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일본 최초의 여성 유학생 파견을 실현시키기도 했다. 개척사가 파견한 유학생 중에는 야마카와 겐지로, 오야마 스테마쓰 남매와 쓰다 우메코, 니지마 조 등이 있다.[6]

1877년 세이난 전쟁이 발발하자, 구로다는 정토참군(征討参軍)에 임명되어 규슈로 파견되었다. 그는 사쓰마번 군대에 포위된 구마모토성을 구원하기 위해 야쓰시로 부근에 상륙하여 적의 배후를 공격했고, 4월 15일 구마모토성에 입성하여 포위를 푸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이 전투에서는 그가 육성한 둔전병 부대도 활약했다.

그러나 개척사 폐지를 앞둔 1881년, 구로다는 개척사 소유의 자산을 자신과 가까운 사쓰마번 출신 동료들이 설립한 상업 컨소시엄에 헐값으로 매각하려 한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이 계획은 언론 보도로 여론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결국 무산되었다. 같은 해 부인이 폐병으로 사망했는데, 구로다가 술에 취해 부인을 살해했다는 악의적인 소문이 퍼져 시신 부검까지 이루어졌으나 무혐의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주 문제에 대한 부정적인 평판은 계속되었다. 개척사는 1882년 폐지되었다.

3. 4. 정한론과 세이난 전쟁

메이지 6년(1873년) 정한론이 제기되었을 때, 구로다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이 주장한 조선 침략에 반대하며 국내 정치 안정을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듬해인 메이지 7년(1874년) 타이완 침공 당시에도 러시아 제국의 위협을 이유로 반대했으며, 침공 이후에는 청나라와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신속한 외교 교섭을 주장했다.

사할린 문제와 관련해서는 초기 입장이 다소 복잡했다. 처음에는 사할린 매수를 주장하던 외무경 부지마 다네오미와 대립했으나, 이후 정한론을 견제할 목적으로 사할린 출병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메이지 6년 정변으로 사이고와 부지마가 실각하자,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사할린 포기 정책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구로다는 에노모토 다케아키를 러시아와의 교섭 사절로 추천했고, 이는 훗날 가라후토·지시마 교환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한편, 1875년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이듬해인 1876년 2월 조선과의 교섭을 위한 전권변리대신으로 파견되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메이지 10년(1877년) 사쓰마 번을 중심으로 세이난 전쟁이 발발하자, 구로다는 전쟁 진압에 참여했다. 2월에 해로를 통해 가고시마를 확보한 뒤 나가사키로 돌아왔으며, 3월 14일 정토참군(征討参軍)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반란군에게 포위된 구마모토성을 구원하기 위해 북쪽에서 진군하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주력 부대가 해포전(解圍戰)에 고전하고 있었다. 구로다는 적의 배후를 공격하기 위해 야쓰시로 부근에 상륙하여 3월 30일부터 교전을 시작했고, 계속 전진하여 4월 15일 마침내 구마모토성에 입성하여 포위를 푸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다음 날인 16일 야마가타와 합류한 직후 사의를 표명했고, 23일 사령(辞令)을 받았다. 구로다가 홋카이도 개척 과정에서 육성한 둔전병들은 이후 전투에 투입되어 활약했다.

3. 5. 사쓰마 번 중신

메이지 9년(1876년), 구로다는 조선에 전권변리대신으로 파견되어 강화도에서 조일수호조규 체결을 주도했다.

이듬해인 메이지 10년(1877년) 세이난 전쟁이 발발하자 정토참군(征討参軍)으로 임명되어 참전했으며, 사쓰마군에 포위된 구마모토성을 구원하는 데 공을 세웠다.

메이지 11년(1878년) 3월 28일, 폐병을 앓던 아내 나카야마 세이(기요)가 사망했다. 당시 구로다가 술에 취해 귀가했을 때 마중이 늦었다는 이유로 격분하여 아내를 살해했다는 추문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구로다는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오쿠보 도시미치의 만류로 철회했다. 이토 히로부미오쿠마 시게노부는 법에 따른 처벌을 주장했지만, 오쿠보는 구로다를 변호하며 자신의 심복인 대경시 가와지 도시요시에게 조사를 지시했다. 가와지는 의사를 대동하고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확인한 후 단순 병사로 결론 내렸다. 그러나 가와지 역시 사쓰마 번 출신이었기에, 구로다를 비호하기 위한 형식적인 조사였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었다.[7] 이 사건 이후 구로다는 과음으로 인한 문제에 자주 휘말렸다.

같은 해 5월, 오쿠보 도시미치가 기오이자카의 변으로 암살되면서 구로다는 명실상부한 사쓰마 파벌의 최고 실력자로 부상했다.

메이지 14년(1881년), 개척사 폐지가 결정되자 구로다는 개척사의 관영 사업 설비와 부동산을 동향인 고다이 도모아쓰 등이 참여한 간사이보에키샤(関西貿易社)와 구 개척사 관료들이 만든 홋카이샤(北海社) 등에게 헐값으로 넘기려 했다. 특히 홋카이샤의 경우, 약 1500만 상당의 자산을 사업 적자를 이유로 단돈 38.7만에, 그것도 30년간 무이자로 불하하려 한 사실이 신문에 폭로되면서 정경유착 의혹으로 거센 비난을 받았다(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8] 오쿠마 시게노부가 이에 반대했지만 내각에서는 불하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여론의 격렬한 반발로 불하 계획은 결국 중지되었고,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구로다는 개척 장관직에서 물러나 내각 고문이라는 한직으로 밀려났다. 한편, 이 과정에서 구로다, 이토 히로부미 등 사쓰마-조슈 파벌은 불하 계획 정보를 언론에 유출했다는 명목으로 오쿠마 시게노부메이지 14년 정변을 통해 정부에서 축출했다.

아내 사망을 둘러싼 추문과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은 구로다의 명성에 큰 오점을 남겼지만, 사쓰마 번 내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3. 6. 내각총리대신 시절과 그 이후

메이지 20년(1887년) 제1차 이토 내각에서 농상무대신을 지냈고, 이토 히로부미의 뒤를 이어 메이지 21년(1888년) 4월에 제2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메이지 22년(1889년) 2월 11일 일본 제국 헌법의 공포였으나, 헌법 제정 과정 자체는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했으며 구로다 본인은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9] 헌법 공포 다음 날인 2월 12일, 구로다는 지방 장관 회의에서 연설을 통해 정부는 의회정당의 의사에 구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는 소위 '초연주의'를 표방했다. 이는 당시 태동하던 정당 정치에 대한 견제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평가된다.

외무대신 오쿠마 시게노부불평등 조약 개정 협상을 추진했지만, 치외법권 폐지의 대가로 외국인 판사를 임용하는 안이 국내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1889년 10월 18일 오쿠마가 현양사 단원에 의한 폭탄 테러를 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내각 각료 대부분이 조약 개정을 포기했고 구로다 역시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구로다는 10월 23일 사표를 제출했고, 10월 25일 총리직에서 해임되어 추밀고문관에 임명되었다.[10] 그의 사임 후 약 2개월간은 산조 사네토미 내대신이 총리직을 겸임했으며, 구로다를 제외한 다른 각료들은 유임되었다.

같은 해 12월 15일, 구로다는 조약 개정안에 반대했던 이노우에 가오루에 대한 불만으로 술에 취한 채 이노우에의 저택에 침입하는 사건을 일으켜 정부 내에서 비판을 받고 근신 처분을 받았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구로다는 메이지 천황으로부터 국정 중요 사항에 대해 자문을 받는 원로 중 한 명이 되었다. 메이지 25년(1892년) 8월 8일에는 제2차 이토 내각에서 체신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메이지 26년(1893년)부터 건강이 나빠져 업무에 지장을 겪는 일이 잦아졌다. 메이지 28년(1895년) 3월 17일 체신대신직을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무임소대신으로서 내각의 일원으로 계속 참여했다. 메이지 29년(1896년) 8월에는 이토 히로부미 총리가 사임하자 내각총리대신 임시대리를 맡아 제2차 마쓰가타 내각이 성립될 때까지 약 20일간 총리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사쓰마번 출신의 중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 사망을 둘러싼 추문이나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 이노우에 저택 침입 사건 등으로 인해 말년에는 정치적으로 고립되는 경향을 보였다. 동향인 사쓰마 출신 인사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대신,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같은 옛 막부 신료들과의 교류가 깊어졌다. 메이지 33년(1900년) 8월 23일, 뇌출혈로 향년 59세에 사망했다.[13] 그의 장례식은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장례위원장을 맡았는데, 이는 당시 사쓰마 출신 인사들이 구로다를 멀리했음을 보여주는 일화로 여겨진다. 그의 묘소는 도쿄의 아오야마 묘원에 있다.

4. 평가

사쓰마 번사 출신으로 메이지 유신에 기여하고 홋카이도 개척을 이끄는 등 근대 일본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여러 논란과 추문으로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삿초 동맹 성사를 위해 노력하고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 참모로 활약했으며, 개척사의 책임자로서 1870년부터 1882년까지 홋카이도 개척을 지휘했다. 또한 1876년 강화도에서 조일수호조규 체결을 주도하고, 1877년 세이난 전쟁에서는 구마모토성 구원에 공을 세웠다. 오쿠보 도시미치 사후 사쓰마 세력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1888년에는 내각총리대신에 올라 일본 제국 헌법 반포 시기에 재임했다. 이토 히로부미 등 동시대 인물에 비해 정책 입안 능력은 부족했지만, 뛰어난 인심 장악력과 포용력, 설득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다.[19] 정적인 오쿠마 시게노부나 자유민권운동 지도자 고토 쇼지로를 설득하여 협력을 이끌어내는 등 조정 능력에서 탁월함을 보였다.[19]

그러나 그의 경력에는 여러 오점이 있다. 1881년 개척사 관유물 불하 사건은 정경유착 의혹 속에 관영 사업 설비를 헐값으로 넘기려다 큰 사회적 비판을 받고 중지되었으며, 그의 명성에 큰 상처를 남겼다. 또한, 1878년 아내 세이(清)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구로다가 술에 취해 살해했다는 소문이 퍼져 경찰이 조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15][16] 비록 병사로 결론 났지만, 이는 그의 심각한 주벽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인식을 낳았다. 실제로 그는 술에 취하면 난폭해졌고, 1889년에는 불평등 조약 개정안에 반대한 이노우에 가오루의 저택에 무단 침입하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총리 재임 중에는 정부의회정당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는 '초연주의'를 표방하여 비판받았다.

이러한 추문과 사건들로 인해 말년에는 사쓰마 동료들과 멀어졌고, 오히려 구 막부 신하였던 에노모토 다케아키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에노모토가 구로다 사후 장의위원장을 맡은 것은 당시 사쓰마 사람들이 그를 경원했음을 보여준다.

다른 인물들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4. 1.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평가

사쓰마번 출신인 구로다 기요타카는 삿초 동맹 성사를 위해 노력하고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 참모로 활약하며 메이지 유신과 신정부 수립에 기여한 인물이다. 홋카이도 개척을 지휘하며 일본의 영토 확장과 근대화에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는 여러 문제점과 비판 지점이 존재한다. 1881년 개척사 폐지를 앞두고 관영 사업 설비를 특정 기업에 헐값으로 넘기려 한 개척사 관유물 매각 사건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시 이 계획은 사쓰마번 출신 정치 상인인 고다이 도모아쓰와의 유착 의혹을 받으며 격렬한 비난에 직면했고, 결국 여론에 밀려 불하 계획은 중지되었다. 이 사건으로 구로다는 개척 장관직에서 물러났지만, 이는 그의 권력 남용 시도와 정경유착 의혹을 드러낸 중요한 과오로 평가된다.

1888년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여 일본 제국 헌법 반포 시기에 재임했지만, 헌법 제정 자체에 깊이 관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헌법 공포 다음 날 지방장관회의 연설에서 정부의회정당의 의사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는 이른바 '초연주의'를 표방하여, 민주주의 발전에 역행하는 권위주의적 인식을 드러냈다는 비판을 받는다.

개인적인 품행 문제도 지적된다. 1878년 아내 세이가 사망했을 때 구로다가 술에 취해 아내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비록 가와지 도시요시에 의해 병사로 확인되었으나 이러한 의혹이 제기된 것 자체가 그의 평소 행실과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그는 실제로 과도한 음주 문제가 있었고, 1889년에는 불평등 조약 개정안에 반대한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불만을 품고 술에 취해 그의 저택에 잠입하는 사건을 일으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공직자로서 그의 자질과 책임 의식에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구로다 기요타카는 메이지 시대 일본의 주요 정치인이었으나, 권력 남용 시도, 반민주적 태도, 개인적 결함 등 여러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평가될 여지가 많은 인물이다.

참조

[1] 웹사이트 黒田清隆|近代日本人の肖像 https://www.ndl.go.j[...] 2022-03-02
[2] 문서 학술지, 연구서, 문부과학성 검정 교과서에 있어서의 역사 인물로서의 표기는 「黒田清隆」, 어서명 원본에 있어서의 본인의 서명은 「黒田清隆」, 『추밀원 고등관 이력』에 있어서의 추밀원 서기가 쓴 이름 기록도 「黒田清隆」이다. 인쇄물에서는 본자에 통일한다는 관례에 따라, 인쇄국 간 『직원록 메이지 21년(갑)』(1888년 3월 31일 현재)에 있어서의 내각 총리대신 명의 표기는 「黒田淸隆」、동시대의 신문 지상에서의 표기는 「黒田淸隆」 또는 「黑田淸隆」이다.
[3] 웹사이트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黒田清隆」(コトバンク) https://kotobank.jp/[...]
[4] 웹사이트 黒田清隆|近代日本人の肖像 https://www.ndl.go.j[...] 2022-03-02
[5] 서적 開拓の群像 下巻 北海道総務部行政資料室
[6] 논문 開拓使による海外留学生派遣意図の変遷 北海道大学大学文書館
[7] 서적 大久保利通 講談社 2004-11-10
[8] 논문 明治十四年の政変の真相 (1) https://hdl.handle.n[...] 長崎大学教育学部政治学研究室
[9] 논문 明治国家における内閣制度と行政制度 日本行政学会
[10] 아시아역사자료센터 黒田清隆
[11] 아시아역사자료센터 元勲優遇ノ詔
[12] 논문 元老の形成と変遷に関する若干の考察--後継首相推薦機能を中心として https://hdl.handle.n[...] 史学研究会 1977
[13] 뉴스 歴代総理の胆力「黒田清隆」(2)酒乱で妻を殺害したと風評が… https://www.asagei.c[...] エキサイトニュース 2019-05-23
[14] 서적 「家系図」と「お屋敷」で読み解く歴代総理大臣 明治・大正篇 実業之日本社
[15] 문서 신문에 따르면 사망 당시 청의 나이는 33세.
[16] 서적 華族総覧 講談社現代新書
[17] 서적 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上
[18] 웹사이트 http://hoppojournal.[...]
[19] 웹사이트 池上彰「池上彰と学ぶ日本の総理 黒田清隆」 https://pdmagazine.j[...]
[20] 웹사이트 北海道開拓の先覚者達(4)~黒田清隆・榎本武揚~ https://www.zaikaisa[...] 財界さっぽろ 2013-07-15
[21] 문서 桂四郎への書状
[22] 서적 風雲回想録
[23]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87-04-14
[24]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6-10-12
[25]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0-08-27
[26]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84-07-08
[27] 간행물 詔勅 官報 1889-11-01
[28]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89-11-30
[29]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5-08-21
[30]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87-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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