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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섭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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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완섭은 1963년 광주광역시 출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으나 언론인으로 전향하여 컴퓨터 분야에서 활동했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여 국가유공자로 추대되었으며, 소설가, 작가, 인터넷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하며 《창녀론》, 《친일파를 위한 변명》 등의 저서를 출간했다. 그는 친일, 반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논란을 일으켰으며, 역사적 인물 비판으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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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섭 (1963년)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김완섭
본명김완섭
한자 표기金完燮
로마자 표기Gim Wanseop
기본 정보
출생일1963년
출생지대한민국 광주광역시
직업작가, 소설가, 언론인, 평론가, 교육자
학력서울대학교 중퇴
배우자없음 (1993년 이혼)
활동 정보
활동 기간1989년 ~
장르언론, 소설, 문학평론, 시사평론
언어한국어, 영어, 일본어

2. 생애

김완섭은 1963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1]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시민군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1982년 살레시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나[2] 1989년 중퇴하고[2] 언론 및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1995년 출간한 《창녀론》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큰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호주에 거주했으며, 귀국 후에는 《코스타크 신문》 창간에 참여했다.

이후 친일적인 내용을 담은 저작과 발언으로 지속적인 논란의 중심에 섰다. 2002년 일본에서 출간된 《친일파를 위한 변명》이 대표적이며, 이와 관련하여 명예훼손 혐의로 여러 차례 기소되고 유죄 판결(벌금 700만 등)을 받거나[9] 민사 소송에서 패소(배상금 9600만 명령 등)했다.[11] 김구[9], 위안부 피해자[11] 등에 대한 그의 평가는 사회적으로 큰 비판을 받았으며, 공청회나 재판 과정에서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2. 1. 초기 생애 (1963년 ~ 1987년)

김완섭의 초기 생애는 1963년 출생부터 1987년까지의 기간을 다룬다. 이 시기에는 광주광역시에서의 출생과 성장,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참여, 서울대학교 입학 및 중퇴 등의 사건이 포함된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문단에서 설명한다.

2. 1. 1. 출생과 성장

김완섭은 1963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1] 어린 누이 동생 두 명이 있다.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하여 전라남도청 항쟁에 가담했으며, 이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1982년 졸업하고[2] 같은 해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1][2] 원본 자료에 따르면 전공은 천문학[1] 또는 물리학[2]으로 언급되며, 역사정치경제학도 공부했다고 한다.[2] 1987년 9월[1] 또는 1989년[2]서울대학교를 중퇴했는데, 한 자료에 따르면 이는 언론인으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2] 중퇴 후 1989년부터 잡지 편집 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2]

2. 1. 2.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참가

1980년 5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하여 전라남도청을 중심으로 한 항쟁에 가담했다. 이 활동으로 이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당시 계엄군은 김완섭이 나이가 어리고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았다는 판단 하에 총격을 가하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13]

2. 1. 3. 서울대 재학 및 중퇴

1982년 살레시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3월 서울대학교 이학계열(82학번)에 입학했다.[13] 이학계열은 이후 물리학과와 천문학과로 나뉘었으며, 김완섭은 천문학을 전공했다. 다만, 일부 자료에서는 물리학을 전공했다고도 한다.[2] 전공 외에도 서울대에서 역사학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14]

대학 재학 중 PC통신 서울대 동호회에서 활동하며 당시 좌파 민족 해방 계열 대학생들의 시각에 반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특히 우루과이라운드에 대해 반대하기보다 오히려 조속히 도입하여 국내 산업의 국제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개방론을 주장했다.[13] 이러한 글로 인해 일부 이용자들로부터 위협적인 비난을 받거나 자택으로 협박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고 한다.[13]

1985년 방위병으로 에 입대하여 14개월간 복무하고 1987년 만기 전역했다. 같은 해인 1987년 9월, 서울대학교를 중퇴했다. 중퇴 직후인 1987년 서울 구로구청 농성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14] 이후 컴퓨터 관련 잡지사 세 곳에서 기자로 활동했다.[13] 한편, 다른 자료에서는 1989년에 언론인 활동을 위해 중퇴했다고 언급하기도 한다.[2]

2. 2. 언론 및 문학 활동 (1989년 ~ 현재)

1989년 컴퓨터 분야의 전문 기자로 활동을 시작하여 《하이테크 정보》, 《소프트 월드》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이후 소설가, 작가, 문학 평론가, 인터넷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80년대 후반 PC통신을 시작으로 1995년 인터넷 보급 이후에는 온라인 공간에서 활발한 논객 활동을 펼쳤다.

그는 한국 사회 내부의 전체주의적 요소와 쇼비니즘 등을 비판하는 글과 책을 발표하며 주목받았으나, 동시에 많은 논란과 비판, 소송에 직면했다. 특히 1995년 PC통신에 발표한 《창녀론》은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으며, 여성주의민족해방파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시각 역시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13]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협박과 투서에 시달리기도 했다.[13]

1996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했다가 1998년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코스닥신문사 창간에 참여하여 편집주간을 맡기도 했다.[14] 2001년에는 일본식민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내용의 인터넷 카페를 개설하여 논란을 빚기도 했다.[15] 그의 저술과 발언은 꾸준히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서 왔다.

2. 2. 1. 언론 활동

1989년부터 컴퓨터 분야의 전문 기자로 활동을 시작하여 《하이테크 정보》, 《소프트 월드》 등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했다. 이후 소설가, 작가, 문학 평론가, 인터넷 칼럼니스트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그는 한국 사회 내부의 전체주의적, 파시즘적 요소를 비판하는 책을 출간하면서 소송과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 시기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1980년대 후반부터 PC통신에서 논객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1995년 대한민국인터넷이 보급된 이후에는 인터넷 논객으로 자리 잡았다.

PC통신 시절부터 여성주의자, 민족해방파 논객들과 자주 논쟁을 벌였다. 학생운동가 출신임에도 반(反)여성주의적인 시각과 주체사상파, 민족해방파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하였다.

케텔, 엠팔, 하이텔PC통신에서는 주로 컴퓨터 관련 정보를 공유하며 네티즌들과 교류했다. 1980년대 후반, 특정 PC통신 동호회가 하이테크 상품 리뷰나 공동구매 등을 통해 업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김완섭은 이 동호회 집행부 선거의 부정을 폭로했다가 동호회원들로부터 협박과 사이버 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했다.[13] 그는 당시 경험에 대해 "온라인 권력과 싸움을 벌이면서 오프라인에서는 한 사람이 수십 명과 싸울 수 없지만 온라인에서는 수만 명과 대적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회고했다.[13]

1995년 PC통신에 발표한 《창녀론》이 큰 화제를 모으며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창녀론》은 보수주의 언론과 사회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남성우월주의적 시각이라는 지적과 함께 일부 페미니스트들로부터도 비판을 받으며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

지속적인 비판에 대해 김완섭은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 남녀 성기를 우리말로 쓰는게 부끄러운 게 아니다. 난 여성들이 섹스를 무기로 남자를 잡아 자신과 새끼들의 목숨을 부지한다고 믿는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내 이 생각을 담은 창녀론은 인류를 이해하는 굉장한 업적이라고 생각한다. 여성 해방의 근본 원인을 명쾌하게 해석했지만 아직 학문적으로 평가는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우리 사회는 숫놈의 폭력성과 공격성이 억제되고 암년의 성질이 드러나야만 발전할 수 있다. 내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과 이야기 하고 싶다. 다들 피상적(간접적)으로 접하고 나를 공격하는데 제발 책 좀 제대로 읽은 뒤 공격해달라.[13]

이후 김완섭은 수시로 협박 전화와 투서에 시달렸으며, 그의 가족들에게도 협박 전화가 걸려오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 『코스타크 신문』

2. 2. 2. 작가 및 논객 활동

서울대학교 중퇴 후 김완섭은 컴퓨터 관련 잡지사 3곳에서 기자생활을 했다.[13] 1989년부터 컴퓨터 분야의 전문 기자로 입문하여 《하이테크 정보》 기자, 《소프트 월드》 기자 등 잡지, 언론사 기자 등을 역임했다. 그는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1980년대 후반부터 PC통신에서 논객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PC통신 서울대 동호회에서는 좌파 민족 해방계열 대학생들의 편향된 시각에 반하는 글을 주로 썼으며, 우루과이라운드를 막을 것이 아니라 빨리 도입하여 국내 산업을 글로벌화해야 한다는 개방론을 주장했다.[13] 이로 인해 일부 네티즌들로부터 협박을 받기도 했다.[13]

1990년에 결혼하였으나 3년만인 1993년에 별거를 시작했고, 1996년에 공식 이혼했다.[13] 전처와의 사이에 자녀는 없다.[13] 1992년 이후 프리랜서로 번역 및 저술 활동을 하였으나[14], 지속적인 협박 전화와 투서에 시달리기도 했다. PC통신에서 본격적으로 논객 활동을 하며 페미니즘과 쇼비니즘을 비판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1995년 대한민국인터넷이 보급된 이후 활동 무대를 인터넷으로 옮겨 인터넷 논객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한국 사회 내부의 전체주의적, 파시즘적 요소를 비판하는 책을 출간하여 송사와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국 사회의 애국주의, 쇼비니즘을 꾸준히 비판해왔고, 인터넷상에서는 그의 주장에 대한 찬반 논란이 일었다. 화제가 되면서 일본, 미국 등 외국 언론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1996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했다가 1998년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코스닥신문사의 창간에 참여하여 편집주간을 맡았다.[14] 2001년에는 ‘일본을 존경하는 마음’이라는 이름의 인터넷 카페를 개설하여 일본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칼럼을 기고했으나[15], 해당 카페는 곧 폐쇄되었다.

3. 주요 주장 및 논란

김완섭은 그의 정치적 입장과 일제강점기에 대한 미화 혐의로 인해 언론으로부터 친일 인사로 분류된다. 그는 여러 한국민족주의자들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를 받고 있다. 2004년, 서울 검찰은 그가 김구에 대해 한 발언을 이유로 그를 기소했으며,[3] 2006년에는 김좌진의 손녀인 김을동으로부터 포털 사이트 다음에 게시한 글에서 김좌진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4]

3. 1. 일제강점기 관련 인식

김완섭은 일제강점기에 대한 대한민국의 일반적인 역사 인식과 다른 주장을 펼쳐 큰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2002년친일파를 위한 변명》을 출간하고 일본 언론 활동 등을 통해 일제강점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적어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는 시각을 드러냈다.[13][16]

그는 대한민국 사회의 맹목적인 애국심을 비판하며, 한일합방에 반대해 자결하거나 일제에 저항하다 죽은 이들을 "지킬 가치가 없는 것들을 지키려다 개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21] 또한 독립운동가의병 활동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독립의병은 양반들이 돈으로 모집한 깡패와 도둑'이라고 주장하며[31] 구한 말 의병이나 일제강점기 독립군이 자금 조달 과정에서 민간인에게 피해를 준 사례를 비판의 근거로 들었다.

2003년 1월 일본 잡지 《쇼쿤》과의 인터뷰에서는 "한일합병기에는 이미 (한일 간의 역사 인식이) 공유되어 있었다"고 주장하며, 태평양 전쟁 당시 한국인들이 '일본인'으로서 함께 싸웠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37] 같은 인터뷰에서 김완섭은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한국 정부의 의도적인 역사 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며,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라고 주장했다.[38]

이러한 그의 주장과 활동은 친일 행위로 간주되어 사회적으로 큰 비판을 받았으며, 독립운동가 및 그 후손들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여러 차례 법적 처벌을 받았다.[3][4][19][20]

3. 1. 1. 친일파 옹호

2002년, 일제강점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내용의 《친일파를 위한 변명》과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을 출간하였다. 이 책들은 대한민국에서 역사적 사실 왜곡 등을 이유로 2002년 4월 8일 청소년 유해 매체물(간행물)로 지정되었으나,[16] 일본에서는 《친일파를 위한 변명》이 출간 4개월 만에 35만 부가 팔리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일본의 소우샤에서 출간된 일본어 번역판은 역사서로는 이례적으로 40만 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2004년 11월에는 후소샤에서 문고본도 판매되었다. 같은 시기 《친일파를 위한 변명 2》의 일본어 번역본도 판매되었다.

2002년 가을부터 2003년 여름까지는 일본의 격주간지 ‘사피오’에 총 20회에 걸쳐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13] 그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 등에서 일제강점기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시각을 여러 차례 드러냈으며, 이로 인해 일부 민족해방 계열 인사들과 네티즌들로부터 강한 비판과 공격을 받았다. 2002년 초에는 《친일파를 위한 변명》 출간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여동생들을 호주로 이주시켰다고 주장했다.[13]

2003년에는 일본의 자유식민사관론자 스기모토 미키오의 일제 식민 통치를 미화한 저작물인 《식민지 조선의 연구》를 자신이 설립한 출판사 춘추사를 통해 발간하였다. 이 책은 인터넷 단체 "우리 황실 사랑회"의 신고로 간행물윤리위원회에 회부되었고, 2006년 청소년 유해 매체물(간행물)로 결정 및 고시되었다. 당시 유해 매체 지정에 대한 비판과 표현의 자유 존중이라는 찬반 양론이 있었으나, 법원은 유해 매체물이라는 판단을 유지했다.

2004년 10월에는 시민운동가 박기서[17]에게 독립운동가 비판을 이유로 구타당하여 부상을 입기도 했다. 같은 해 서울 검찰은 김완섭이 김구에 대해 한 발언과 관련하여 그를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했다.[3]

2006년 한 인터뷰에서는 주체사상파를 비판하며 "지금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령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정권을 쥐고 있다"고 주장하며 노무현 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13] 같은 해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안중근 의사를 '민족의 원수'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개혁하려 했으며 조선 병합을 원치 않은 평화주의자였으나, 안중근이 그를 암살함으로써 일본 내 군부의 입지를 강화시켜 결국 조선에 대한 핍박으로 이어졌다는 논리를 폈다. 또한 자신은 한국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진실을 알리려는 것뿐인데, 한국인들은 수준이 낮아 자신의 책을 읽지도 않고 비난한다고 주장했다.[13] 이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 측은 명예훼손 고소는 직계 후손만 가능하나, 후손이 연로하고 해외에 거주하여 고소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밝혔다.[18]

2006년에는 김좌진 장군의 손녀인 김을동으로부터 포털 사이트 다음에 게시한 글에서 김좌진 장군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4] 같은 해, 사자 명예 훼손 혐의로 기소되어 벌금형과 배상 선고를 받았다.[20]

2008년 3월 28일, 서울고등법원은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에서 "유관순은 여자 깡패", "김구는 조선의 충견" 등의 표현으로 독립운동가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에 대해 벌금 750만을 선고했다.[19]

김완섭 본인은 일본에서의 출판을 계기로 방일을 계획했으나, 한국 정부가 여권 갱신을 해주지 않아 실현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과 발언으로 인해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친일파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여러 독립운동가에 대한 명예 훼손 혐의로 법적 처벌을 받았다.

3. 1. 2. 일본의 전쟁 범죄 옹호

그의 저서 《친일파를 위한 변명》에서 난징 대학살, 종군위안부, 강제 징용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전쟁 범죄를 옹호하였다. 그는 당시 전쟁과 군국주의 시절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한편, 중국군의 티베트 침략 및 학살, 한국군베트남전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민간인 학살 사례를 들며 중국과 한국은 일본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이른바 '피장파장'의 논리를 내세웠다.

특히, 근거 자료 제시 없이 "한국군베트남전 참전 기간 동안 학살한 베트남 주민의 수는 30여만명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 내용은 베트남어 위키백과 등에서 한국군의 양민 학살 근거로 인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일본이 해외 원정 시 위안부를 보냄으로써 군인과 현지 주민을 배려한 행위이며, 일본군이 침략군이 아닌 해방군에 가깝다는 증거이자 인도주의의 상징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으로 인해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6명에게 각각 600만을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3. 1. 3. 강제 징용 부정

김완섭은 일제강점기의 징용과 관련하여 논란이 되는 발언을 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방적인 강제징용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하여 한국 국사학계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특히 2003년 1월 일본의 잡지 《쇼쿤》과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주장을 상세히 펼쳤다.[37]

그는 해당 인터뷰에서 "한일합방 시대에 일본군에서의 조선 출신 지원병의 응모상황에 대한 자료를 봅시다. (...) 실로 30만 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쇄도한 것입니다. '일본 군인' 한 사람을 뽑는 데, '조선인' 50명 이 지원한 것입니다."라고 주장하며, 이러한 높은 경쟁률을 근거로 자발적 지원자가 많았음을 강조했다.[37]

이처럼 일제강점기 당시 일부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징용에 지원했다는 그의 발언은 일본 언론을 통해 대한민국 국내에 알려지면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김완섭은 같은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에게 있는 반일감정은 한국 정부의 의도적인 역사왜곡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는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국제사회의 일반적 견해이기도 하다."라고 주장하며, 한국 측이 의도적으로 한일 갈등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내놓기도 했다.[38]

3. 2. 역사 인물 비판

김완섭은 2002년 일제강점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친일파를 위한 변명》과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을 출간하며 큰 논란을 일으켰다. 이 책들은 대한민국에서는 역사 왜곡 등을 이유로 2002년 4월 8일 청소년 유해 매체물로 지정되었으나,[16] 일본에서는 4개월 만에 35만 부가 팔리는 등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 등에서 일제강점기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시각을 드러내며 비판을 받았다.[13]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고 주장하며 2002년 초 여동생들을 호주로 이민 보내기도 했다.[13]

1992년 논객 활동을 시작한 이래, 김완섭은 안중근, 김구, 유관순, 김좌진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비판하며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그의 발언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반발과 사자명예훼손 등 법적 소송으로 이어졌으며,[4][19][20] 일부 발언에 대해서는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2004년 10월에는 독립운동가 비판을 이유로 시민운동가 박기서에게 폭행당해 부상을 입기도 했다.[17]

그의 저술과 발언은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김완섭 자신과 가족들은 익명의 협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언론에서는 그를 친일 인사로 분류하며, 그의 활동에 대한 처벌 요구도 이어지고 있다.[3][4]

3. 2. 1. 명성황후 비판

1988년 무렵부터 명성황후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일자, 김완섭은 2001년 7월 명성황후를 순교자로 미화하는 학계와 언론의 시각을 비판했다. 그는 "미친 불여우 민비를 한국인들은 무슨 자주독립의 순교자라도 되는 줄 착각하고 있다. 이런 나쁜 ×을 조용히 없애버린 일본의 처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다"[21]라고 주장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또한 김완섭은 명성황후를 조선을 멸망시킨 망국의 원흉이며 청나라서태후와 같은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3]

이러한 발언은 욕설 사용과 내용 자체의 문제로 인해 2002년 8월까지 1년 이상 논란이 되었다. 민씨 종친회는 2002년 초 김완섭을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21] 2002년 8월 14일, 서울지방검찰청은 그를 같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으며,[21] 2003년 2월 법원은 벌금 700만을 선고했다.[22]

이후 김완섭의 저서 《친일파를 위한 변명》과 인터넷 글 등에서 일본의 식민 통치를 왜곡하고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고종황제의 손자 이석, 일본군 종군위안부 피해자, 강제징용 피해자 유족, 의병장 및 명성황후 유족 등이 그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23][24] 김완섭은 이 소송의 재판에 한 번도 출석하지 않았고, 2005년 9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민사소송법 규정에 따라 원고들의 주장을 김완섭이 자백한 것으로 간주하여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23][24] 법원은 김완섭에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6명에게 각 600만, 징용자 유족 5명과 의병대장 민종식의 손자에게 각 500만, 이석, 명성황후 유족 민병호, 충정공 민영환의 손자 민병덕에게 각 1000만씩 총 9600만을 배상하라고 선고했다.[23][24]

3. 2. 2. 김구 비판

김완섭은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비판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2003년 11월 말,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국회 과거사진상규명특위 공청회에 참석하여 문건을 배포했는데, 여기에는 "김구 선생은 ‘민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한 뒤 중국으로 도피한 조선 왕조의 충견(忠犬)"이라는 내용과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34]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22] 이 문건을 본 일부 국회의원과 시민들은 그를 비난하고 검찰에 고소했다.

2004년 7월 27일, 서울고등검찰청 정현태 검사는 김완섭을 백범 김구 선생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로 불구속 기소했다.[22][34] 검찰은 기소장에서 김구가 1896년 황해남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살해한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가 당시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주장했으나,[22] 김구 본인은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를 일본 군인으로 기술한 바 있다.[35] 그러나 쓰치다가 민간인이라는 의혹은 이전부터 제기되어 왔으며, 1987년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이 발굴한 일본 외무성 자료에 따르면 쓰치다는 계림장업단 소속 상인이었다.[36] 김완섭은 이 자료를 근거로 김구가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김완섭은 또한 안중근에 대해 "수구 반동파의 흉악범"이라 칭하고, 김구에 대해서는 "타고난 살인마"라고 생각하며, 두 사람 모두 "한국의 이상한 반일 교육이 만들어낸 가짜 위인"이라고 주장했다.

2008년 3월 28일, 서울고등법원은 김완섭의 저서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에서 "김구는 조선의 충견"이라고 표현한 부분이 독립운동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벌금 750만을 선고했다.[19] 그는 이전 2003년에도 사자 명예 훼손 혐의로 고소당해 2006년 벌금형과 배상 선고를 받은 바 있다.[20]

3. 2. 3. 안중근 비판

김완섭은 1992년 논객 활동을 시작한 이래 안중근 의사를 지속적으로 비판해왔다. 그는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며 논란을 일으켰다.[13]

2006년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안중근을 '민족의 원수'라고 칭하며 자신의 주장을 구체화했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개혁하려 했으며 평화주의자로서 조선 병합을 바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은 의사가 아닌 '폭도'이며, 이토의 죽음이 결과적으로 일본 내 군부의 득세를 가져와 조선에 대한 핍박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안중근이 '민족의 원수'라는 논리를 펼쳤다.[13] 또한 그는 안중근을 '수구 반동파의 흉악범'으로 묘사하고, 김구와 함께 한국의 반일 교육이 만들어낸 '가짜 위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김완섭은 자신의 주장이 한국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진실을 알려주려는 것일 뿐이며, 한국인들이 수준이 낮아 자신의 책을 읽지도 않고 비난한다고 덧붙였다.[13]

이러한 주장에 대해 안중근 의사 기념관 측은 명예훼손 고소는 직계 후손만 가능하나, 미국에 거주하는 후손 안웅호 씨가 연로하여 한국 방문이 어려운 상황이라 고소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18] 김완섭의 안중근 및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비판적 발언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낳았으며, 일부 발언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기도 하였다.[19][20]

3. 2. 4. 김좌진 비판

1992년 논객 활동을 시작한 이래 김완섭김좌진을 깡패로 비판하였다.[20] 2006년 2월, 김완섭은 독립운동가 김좌진을 '산적 떼 두목'이라고 모욕한 혐의로 김좌진의 손녀인 국회의원 김을동으로부터 사자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다.[4][29][30][31] 김을동은 부친과 조부의 사자 명예훼손 부분에 대해서도 추가 고소할 것을 밝혔다.[29][30][31]

이 고소에 대해 검찰은 "사회 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형법 제20조 정당 행위 규정에 따라 위법성이 조각된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32] 법원은 김완섭의 표현이 개인적 의견 표현의 성격이 강하며, 당시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광복단이 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강제력을 행사한 사실이 국사편찬위원회에 의해 인정되므로 완전한 허위 사실 적시라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33] 또한 '산적 떼 두목'이라는 표현은 모욕죄의 구성 요건에 해당할 수 있지만, 대한민국 형법상 사자 명예훼손죄는 있어도 사자 모욕죄는 없기 때문에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고 해명하였다.[33]

3. 3. 기타 논란

2002년 가을부터 2003년 여름까지 일본의 격주간지 ‘사피오’에 총 20회에 걸쳐 연재글을 기고했다.[13] 2002년에는 일제강점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내용의 《친일파를 위한 변명》과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을 출간했다. 이 책들은 대한민국에서 역사적 사실 왜곡 등을 이유로 2002년 4월 8일 청소년유해매체물로 지정됐으나,[16] 일본에서는 출간 4개월 만에 35만 부가 판매되기도 했다.

김완섭은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제강점기를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는 주장을 펼쳐, 일부 민족해방 계열 인사들과 네티즌들로부터 거센 비판과 공격을 받았다. 그는 《친일파를 위한 변명》 출간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2002년 초 여동생들을 호주로 이주시켰다고 밝혔다.[13]

2003년에는 일본의 자유식민사관론자 스기모토 미키오가 일제 식민 통치를 미화한 저서 《식민지 조선의 연구》를 자신이 설립한 출판사 '춘추사'를 통해 한국에 출간했다. 이 책은 인터넷 단체인 우리 황실 사랑회의 신고로 간행물윤리위원회에 회부됐고, 2006년 청소년 유해 매체물로 지정됐다. 당시 유해 매체 지정에 대한 비판과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찬반 논란이 있었으나, 법원은 유해 매체물 지정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2004년 10월에는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한 시민운동가 박기서[17]와 우연히 만나 대화하던 중, 독립운동가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을 이유로 박기서에게 폭행당해 부상을 입기도 했다.

2006년 한 인터뷰에서는 주체사상파를 비판하며 "당시 주사파들이 북한과 직접 연결돼 있었다"거나 "수천 명의 대학생 간첩들이 무기고를 털어 관악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금 대한민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령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정권을 쥐고 있다"며 당시 노무현 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13]

같은 해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안중근 의사를 "민족의 원수"라고 칭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개혁을 이끈 평화주의자였으며 조선 병합을 원치 않았는데, 안중근이 이토를 암살함으로써 일본 내 군부 세력의 입지를 강화시켜 결국 조선에 대한 핍박을 초래했으므로 안중근은 민족의 원수라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한국인들이 잘못된 역사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주장이 담긴 책을 읽지도 않고 비난부터 한다고 주장했다.[13] 이에 대해 안중근 의사 기념관 측은 사자 명예훼손 고소는 직계 후손만 가능하나, 후손이 연로하여 미국에 거주 중이고 한국 방문이 어려운 상황이라 고소가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18]

김완섭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여러 차례 법적 처벌을 받았다. 2003년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해 2006년 벌금형과 배상 선고를 받았으며,[20] 2008년 3월 28일에는 서울고등법원에서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에서 유관순 열사를 "여자 깡패", 김구 선생을 "조선의 충견" 등으로 표현하여 독립운동가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벌금 750만을 선고받았다.[19] 2004년에는 김구 선생에 대한 발언으로 서울 검찰에 의해 기소됐고,[3] 2006년에는 김좌진 장군의 손녀인 김을동 전 의원이 포털 사이트 다음에 게시된 김완섭의 글이 김좌진 장군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비판했다.[4]

이러한 그의 정치적 입장과 일제강점기에 대한 미화 시도, 여러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명예훼손 행위로 인해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친일 인사로 분류되며 지속적인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3. 3. 1. 반영남 지역감정

김완섭은 강한 지역감정을 드러내며, 특히 경상도 지역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창녀론》에서 "한국 사회의 모든 병폐의 근원이 경상도 남성들에게서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신종플루가 유행하던 시기에는 인터넷 게시판 아고라에 '하느님 경상도 놈들을 한 5백만만 죽게 해주세요'라는 내용의 글을 게시하기도 했다. 아고라 글 - 사망자가 전부다 경상도네염 이러한 극단적인 지역 혐오 발언은 그의 친일 논란과 함께 그가 진보 진영 내에서도 지지받지 못하고 외면받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3. 3. 2. 뉴라이트 연관설

2008년부터 김완섭이 뉴라이트 회원이라는 주장이 인터넷을 통해 퍼지기 시작했다. 2009년 오마이뉴스김구가 무고한 일본 상인을 살해했다는 뉴라이트의 주장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김완섭 역시 비슷한 주장을 한 문건을 배포한 사례를 언급했다.[34] 이를 근거로 "김완섭은 뉴라이트"라는 설이 확산되었고, 일부 촛불 관련 단체에서도 뉴라이트를 친일파로 비판하며 김완섭을 뉴라이트 회원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완섭 본인은 뉴라이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오히려 김완섭은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하여 도청을 사수하다 부상을 입은 5.18 광주민주유공자로 등록된 인물이며,[13] 보수 논객인 조선일보 출신 조갑제 등과는 적대적인 관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4. 사상

학생운동가 출신임에도 반페미니즘, 반주체사상, 국가 혐오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주류에서 벗어나 악플이나 비판에 시달렸으며, 그의 사상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5. 저서 및 번역서

(내용 없음)

5. 1. 저서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3》, 1991년, 기헌재
  • 《한글 윈도우 : 3.01》, 1992년, 하이테크정보출판부
  • 《창녀론》, 1995년, 춘추사 (개정 증보판, ISBN 89-952802-1-2)
  • 《창녀론: 21세기형 인간을 위한 새 여성 이론》, 1996년, 춘추사 (ISBN 978-89-7815-016-3)
  • 일본에서는 2002년 이 코(李コ) 번역으로 《창부론》(娼婦論일본어)이라는 제목으로 일본문예사에서 출간되었다. (ISBN 4-537-25127-1)
  • 《친일파를 위한 변명》, 2002년 2월 20일, 춘추사
  •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한반도 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 출간 이후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어 청소년 유해 도서로 지정되었고, 저자 김완섭은 이 책과 관련하여 체포되기도 했다.
  • 일본에서는 2002년 아라키 카즈히로, 아라키 노부코 번역으로 소우샤에서 출간되어 (ISBN 4-7942-1152-X), 역사서로는 이례적으로 40만 부 이상 판매되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4년 11월에는 후소샤에서 문고판(후소샤 문고)으로도 출간되었다. (ISBN 4-594-04833-1)
  • 《새 친일파를 위한 변명》, 2003년 6월 10일, 춘추사 (ISBN 978-89-952802-2-5)
  • 《친일파를 위한 변명 2 - 영웅의 허상》, 2004년, 후쇼사 (일본 출판)
  • 일본에서는 호시노 토모미 번역으로 《친일파를 위한 변명 2 영웅의 허상, 일제의 실상》(親日派のための弁明2 英雄の虚像、日帝の実像)이라는 제목으로 2004년 11월 27일 후소샤에서 출간되었으며 (ISBN 4-594-04845-5), 2006년에는 문고판(후소샤 문고)으로도 나왔다. (ISBN 4-594-05225-8)
  • 《일한 대토론》(日韓大討論), 2003년, 후소샤 (니시오 간지 공저 추정, ISBN 4-594-03994-4)
  • 《일한 「금단의 역사」》(日韓「禁断の歴史」), 2003년, 쇼가쿠칸 (ISBN 4-09-389651-8)


김완섭 본인은 일본에서의 출판을 계기로 일본 방문을 시도했으나,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여권 갱신을 거부당해 실현되지 못했다고 한다.

5. 2. 번역서


  •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 3'', 기헌재, 1991년
  • ''한글 윈도우: 3.01'', 하이테크정보출판부, 1992년
  • ''창녀론: 21세기형 인간을 위한 새 여성 이론'', 춘추사, 1996년
  • ''물리학의 진화'' (원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물리학의 발전'' (원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5. 3. 공저


  • 《일한대토론》, 김완섭·니시오 칸지 공저[40], 2003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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