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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1955년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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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주당 (1955년 대한민국)은 1955년 9월 18일,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결집하여 창당되었다. 신익희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시작하여 조병옥, 장면으로 이어지는 지도부 아래, 1956년 부통령 선거에서 장면이 당선되며 이승만 정권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 성장했다. 1958년 총선에서 제1야당으로 부상했으나, 1960년 4·19 혁명 이후, 제2공화국에서 집권당이 되었지만, 구파와 신파 간의 갈등으로 분열을 겪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해산되었으며, 이후 재건과 통합 과정을 거쳐 민중당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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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1955년 대한민국) - [정당]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민주당 로고
민주당 로고
정당 명칭민주당 (民主黨)
로마자 표기Minjudang
약칭DP
창당일1955년 9월 18일
해산일1963년
본부서울
전신민주국민당
후신민중당
이념
정치 성향중도우파
주요 인물
당수윤보선
역사
1961년 해산5.16 군사정변으로 성립된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해산 명령을 받음
1965년 해산신당 결당으로 해산
의석수
민의원 (1960년)175/233
참의원 (1960년)31/58

2. 역사

1955년 9월 19일 민주당 발당대회는 곽상훈 민의원 부의장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고 정강·정책을 채택한 뒤 지도부 선출을 중앙위원회에 일임했다.[5] 9월 20일, 민주당 제1차 중앙위원회는 신익희 전 민의원의장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5]

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신익희23476.7%대표최고위원
장면4916.1%
곽상훈113.6%
조병옥62%
정일형10.3%
총 투표수305



1956년 3월 28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대통령 후보에 신익희 대표, 부통령 후보에 장면 최고위원을 선출하였다.[5] 그러나 5월 5일 신익희 후보가 선거 유세 중 열차 안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5]

1956년 7월 18일 민주당 중앙위는 신익희 대표최고위원 서거로 조병옥 최고위원을 대표로 선출하였다.[5]

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조병옥20367.9%대표최고위원
곽상훈9230.8%
장면31%
김도연10.3%
총 투표수299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대표를 전당대회에서 선출하도록 당헌을 개정한 뒤 조병옥 대표를 대표로 재선출하였다.[5]

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조병옥53159.3%대표최고위원
곽상훈35539.6%
총 투표수896



1957년 10월 18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정책요강을 채택하고 조병옥 대표를 대표로 재선출하였다.

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조병옥87297.9%대표최고위원
곽상훈111.3%
장면40.5%
민영남10.1%
김상돈10.1%
총 투표수891



1958년 10월 30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통합선거법 제정과 참의원 구성을 위해 노력하고, 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법 개악 저지에 총력을 다할 것을 결의한 뒤, 조병옥 대표를 대표로 재선출하였다.[5]

} || 1 || 0.8% ||

|-

| 총 투표수 || 994 || ||

|}

1959년11월 26일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는 대통령 후보에 조병옥 대표, 부통령 후보에 장면 부통령을 선출하였다.[5]

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조병옥96096.6%대표최고위원
장면151.5%
곽상훈70.7%
{{lang|ko|백남훈|}
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조병옥48450.1%대통령 후보
장면48149.7%부통령 후보
총 투표수966



이튿날인 11월 27일 전당대회에서는 장면 부통령이 대표로 선출되었다.[5]

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장면51853.5%대표최고위원
조병옥44746.2%
총 투표수968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된 직후 치러진 1960년 7월 29일 총선에서 압승하여,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무총리에 의한 제2공화국의 여당이 되었다. 그러나 구파와 신파 간의 분당이나 당내 분열 등으로 혼란을 겪었으며, 1960년 11월에 민주당을 탈당한 구파가 신민당[5]을 결성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듬해 1961년에 발생한 5·16 군사 정변 직후 군사 정권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명령에 의해 해산되었다.

1963년 1월 1일을 기해 정치 활동이 해금된 후, 7월 18일박순천이 총재(당수)로 취임하여 민주당이 재건되었다.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후보자를 내지 못했고,[6] 구파 계열의 윤보선(민정당)을 간접 지원했다. 그해 11월 총선에서는 13석을 획득하여 야당 제2당이 되었다. 1964년 9월에 "국민의 당"을 흡수했고, 1965년 6월에 야당 제1당인 민정당과 통합하여 "민중당"을 발족시켰다.

2. 1. 창당 배경 (1955년 이전)

1950년대 초,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민주주의와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특히 1954년 자유당이 강압적으로 헌법의 중임 제한 규정을 철폐한 사사오입 개헌 사건은 반(反) 이승만 세력 결집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2] 이에 민주국민당의 보수파와 자유당 탈당파, 흥사단 등 다양한 세력이 모여 민주당 창당을 추진하였다.

2. 2. 창당과 초기 활동 (1955년 ~ 1960년)

1955년 9월 18일, 민주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반(反) 이승만 세력이 결집하여 민주당이 창당되었다.[5] 사사오입 개헌을 계기로 자유당에서 탈당한 세력과 흥사단 등이 참여했다.[5]

9월 19일, 민주당 발당대회에서는 곽상훈 민의원 부의장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고 정강정책을 채택한 뒤, 지도부 선출을 중앙위원회에 일임했다.[5] 9월 20일, 민주당 제1차 중앙위원회는 신익희 전 국회의장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5]

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신익희23476.7%대표최고위원
장면4916.1%최고위원
곽상훈113.6%최고위원
조병옥62%최고위원
정일형10.3%
총 투표수305



1956년 3월 28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대통령 후보에 신익희 대표, 부통령 후보에 장면 최고위원을 선출하였다.[5] 그러나 5월 5일 신익희 후보가 선거 유세 중 열차 안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5] 5월 15일 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이승만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민주당의 장면 후보는 부통령에 당선되어 이승만 정권에 대한 견제 세력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5]

1956년 7월 18일 민주당 중앙위는 서거한 신익희 전 대표를 대신해 조병옥 최고위원을 대표로 선출하였다.[5]

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조병옥20367.9%대표최고위원
곽상훈9230.8%
장면31%
김도연10.3%
총 투표수299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대표를 전당대회에서 선출하도록 당헌을 개정한 뒤 조병옥 대표를 대표로 재선출하였다.[5]

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조병옥53159.3%대표최고위원
곽상훈35539.6%
총 투표수896



1958년 5월 2일에 치러진 제4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79석을 획득하여 제1야당으로 부상했다.[5] 이는 개헌 저지선을 확보한 쾌거였다. 1958년 10월 30일 민주당 전당대회는 통합선거법 제정과 참의원 구성을 위해 노력하고, 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법 개악 저지에 총력을 다할 것을 결의한 뒤, 조병옥 대표를 대표로 재선출하였다.[5]

} || 1 || 0.8% ||

|-

| 총 투표수 || 994 || ||

|}

1959년11월 26일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지명대회는 대통령 후보에 조병옥 대표, 부통령 후보에 장면 부통령을 선출하였다.[5]

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조병옥96096.6%대표최고위원
장면151.5%
곽상훈70.7%
{{lang|ko|백남훈|}
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조병옥48450.1%대통령 후보
장면48149.7%부통령 후보
총 투표수966



이튿날인 11월 27일 전당대회에서는 장면 부통령이 대표로 선출되었다.[5]

이름득표수득표율(%)비고
장면51853.5%대표최고위원
조병옥44746.2%
총 투표수968



그러나 1960년 2월 15일, 조병옥 후보가 병 치료를 위해 미국 육군 병원에 입원했다가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3·15 대통령 선거는 여당인 자유당이승만, 이기붕 후보가 단독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5]

3·15 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저항으로 4·19 혁명이 발발하였고, 1960년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하야했다.[5]

2. 3. 제2공화국과 당내 갈등 (1960년 ~ 1961년)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된 직후 치러진 1960년 7월 29일 총선에서 민주당은 압승을 거두었다.[5] 이 선거에서 민주당은 하원 233석 중 175석, 상원 58석 중 31석을 차지하여 제2공화국의 여당이 되었다.[2] 1960년 8월 간접 선거에서 구파의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신파의 장면이 국무총리로 선출되었다.[2]

그러나 민주당은 신파(장면, 곽상훈 등)와 구파(윤보선, 조병옥 등) 간의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2] 이는 권력 분점과 정책 노선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결국 1960년 11월, 구파는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면서 분열되었다.[5]

2. 4. 5·16 군사정변과 해산 (1961년)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5] 군사정권 (국가재건최고회의)은 모든 정당 및 의료, 학술, 종교 단체를 제외한 사회 단체의 활동을 금지시켰고,[6] 이에 따라 민주당은 강제 해산되었다.[5]

2. 5. 재건과 민중당으로의 통합 (1963년 ~ 1965년)

1963년 1월 1일 정치 활동이 해금되면서, 민주당은 신파를 중심으로 7월 18일 재건되었다. 박순천이 총재를 맡았다.[6] 그해 10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후보를 내지 못하고, 구파 계열의 윤보선(민정당)을 간접 지원하였다.

11월 26일 실시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13석(지방구 8석/전국구 5석)을 얻어 야당 제2당이 되었다.[2]

1964년 9월 17일 국민의 당을 흡수했고, 1965년 5월 3일 야당 제1당인 민정당과 통합하여 민중당을 결성할 것을 선언하였다. 6월 14일 민중당 결당대회를 개최하여 야권 통합을 이루었다.(박순천 대표최고위원)[7]

3. 이념 및 정책

민주당은 자유민주주의자유 경제를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사회 정의에 입각한 공정한 분배를 통해 건전한 국민 경제 발전을 추구했다.[7] 4·19 혁명 이후 1960년 7월 29일 총선에서 압승하여 제2공화국의 여당이 되었으나, 5·16 군사 정변으로 해산되었다.[5] 1963년 재건되었고, 1965년 민정당과 통합하여 민중당을 창당했다.[6]

더불어민주당은 민주당의 흐름을 계승하고 있는 정당이다.[7]

3. 1. 기본 이념

민주당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삼아 모든 형태의 독재 정치를 배격하고 민주주의 발전을 추구했다.[7] 경제적으로는 자유 경제 원칙을 지지하면서도, 사회 정의에 입각한 공정한 분배를 통해 건전한 국민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자 했다.[7] 특히, 농민, 노동자 등 근로 대중의 복리 향상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7]

3. 2. 주요 정책


  • 헌법 준법 정신 구현[7]
  • 국민의 기본적 인권, 특히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 보장[7]
  • 공정한 자유 선거에 의한 대의 정치와 내각 책임제 구현[7]
  • 선거에 대한 관헌 간섭 배제[7]
  • 정당, 사회, 근로 단체 및 경제 단체의 관제화 배격[7]
  • 행정 쇄신과 인재 등용[7]
  • 공무원의 생활 및 신분 보장과 그 정치화 방지[7]
  • 국민 기본 생활 보장[7]
  • 농촌 협동조합 운동 적극 조장[7]
  • 농촌 부담 경감, 특히 잡부금 폐지[7]
  • 비료 등 농촌 수요 물자와 영농 자금의 원활한 공급과 적절한 농산물 가격 유지[7]
  • 자유 경제 원칙 하에 생산 증강, 사회 정의에 입각한 공정한 분배로 건전한 국민 경제 발전 도모, 특히 농민, 노동자 기타 근로 대중의 복리 향상 도모[7]
  • 민족 문화 육성, 문화 교류 촉진, 세계 문화 발전 기여[7]
  • 국력 신장과 민주 우방과의 제휴를 통한 국토 통일과 국정 정의 확립[7]

4. 당내 역학 구도: 구파와 신파

민주당은 민주국민당계 인사 중심의 구파와 자유당 탈당파 및 무소속 인사 중심의 신파로 나뉘었다. 민주당은 1955년 9월 18일에 창당되었는데, 민주국민당이 당원과 외부 인사를 모두 포함하는 개혁 지향 운동을 만들려는 1952년 움직임에서 시작되었다.[2]

구파는 신익희, 조병옥, 김도연, 김준연, 윤보선, 유진산, 윤제술 등이 주요 인물이었고, 신파는 곽상훈, 장면, 현석호, 오위영, 박순천, 이철승, 정일형 등이 주요 인물이었다.

1956년 3월 28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신익희 대표, 부통령 후보로 장면 최고위원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1956년 선거에서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를 내지 못했고, 장면이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2]

195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79석을 얻어 제2당이 되었다. 1960년 3월 대통령 선거에는 조병옥을 후보로 지명했으나, 선거 직전 사망하여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되었다.

6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압승을 거두었으나, 신파와 구파 간의 내분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타협의 결과 신파의 장면이 총리로, 구파의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지만,[2] 내부 갈등은 결국 구파가 분리되어 별도의 정당을 결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4. 1. 구파 (舊派)

민주국민당 출신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다.[2] 신익희, 조병옥, 김도연, 윤보선, 유진산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온건한 노선을 추구했다.

4. 2. 신파 (新派)

곽상훈, 장면, 현석호, 오위영, 박순천, 이철승, 정일형 등이 신파의 주요 인물이다. 이들은 자유당 탈당파 및 무소속 인사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성향을 보였다. 이승만 정권에 대해 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했으며, 사회 개혁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2]

5. 역대 지도부

대수역대 대표직함임기비고
1신익희대표최고위원1955년 9월 20일 ~ 1956년 5월 5일서거
임시곽상훈임시대표1956년 5월 6일 ~ 1956년 7월 18일임시
2조병옥대표최고위원1956년 7월 18일 ~ 1956년 9월 28일
31956년 9월 28일 ~ 1957년 10월 18일
41957년 10월 18일 ~ 1958년 10월 30일
51958년 10월 30일 ~ 1959년 11월 27일
6장면1959년 11월 27일 ~ 1961년 5월 16일5.16 쿠데타로 정당 해산



창당 당시

6. 주요 선거 기록

민주당 주요 선거 기록
선거후보득표득표율결과
1960년 8월 대통령 선거윤보선20882.2%당선



민주당 주요 부통령 선거 기록
선거후보득표수득표율(%)결과
1956년 부통령 선거장면4,012,65446.4%당선
1960년 3월 부통령 선거1,843,75817.5%낙선



민주당 주요 국회의원 선거 기록
선거대표득표수득표율의석
지역구합계증감
1958년 총선장면2,914,04934.0%7979신규
1960년 총선3,786,30441.7%175175+96
1963년 총선박순천한국어1,264,28513.6%813-162



민주당 주요 지방 선거 기록
실시년도도지사시장읍장면장도의원시의원읍의원면의원
1956년0/101/309/54498/43754/41657/990231/16051
1960년6/1012/2623/82297/1359195/485129/420142/10552510/15376



1956년 대선에서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선거 유세 중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지만, 부통령 후보 장면이 46.4%의 득표율로 당선되며 이승만 독재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보여주었다. 1960년 대선에서는 조병옥 후보가 사망하며 다시 한번 어려움을 겪었지만, 3·15 부정선거 이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1960년 총선에서 민의원 175석, 참의원 31석을 확보하며 압승을 거두었다.

1958년 총선에서는 34%의 득표율로 79석을 얻어 제2당이 되었고, 1963년 총선에서는 13.6%의 득표율로 13석을 얻는데 그쳤다.

7. 평가와 유산

민주당은 자유당의 독재에 맞서 4·19 혁명을 통해 이승만 정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 수립의 기반을 마련하여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또한 다양한 정치 세력을 포용하여 한국 정치의 다원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2]

그러나 구파와 신파 간의 극심한 갈등으로 인해 정국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1960년 총선에서 압승하여 제2공화국의 여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윤보선 대통령(구파)과 장면 국무총리(신파) 간의 권력 다툼을 벌였다. 결국 1960년 11월, 구파는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는 등[5] 분열을 겪었으며, 5·16 군사 정변을 막지 못하고 짧은 기간 내에 정권을 상실했다는 비판을 받는다.[2]

7. 1. 긍정적 평가

자유당의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2] 4·19 혁명을 통해 이승만 정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국 수립의 기반을 마련했다. 민주당은 다양한 정치 세력을 포용하여, 한국 정치의 다원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2]

7. 2. 부정적 평가

민주당은 구파와 신파 간의 극심한 갈등으로 인해 정국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2] 이는 1960년 총선에서 압승하여 제2공화국의 여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윤보선 대통령(구파)과 장면 국무총리(신파)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이어졌다. 결국 1960년 11월, 구파는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는 등[5] 분열을 겪었다.

또한, 민주당 정권은 5·16 군사 정변을 막지 못하고 짧은 기간 내에 정권을 상실했다는 비판을 받는다.[2]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민주당 정부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전복되었고, 이는 민주당의 정치적 역량 부족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7. 3. 유산

자유당사사오입 개헌 강행을 계기로 창당된 민주당은, 4·19 혁명 이후 제2공화국의 여당이 되었으나, 5·16 군사 정변으로 해산되었다. 이후 재건되었지만, 1963년 총선에서 13석을 얻는 데 그쳤고, 결국 다른 야당들과 통합하여 민중당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의 역사적 경험은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현재 더불어민주당은 복잡한 이합집산을 거쳤지만, 민주당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정통성을 강조하고 있다.[7]

참조

[1] 서적 Elections in Asia and the Pacific : a data handbook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2] 서적 Political parties of Asia and the Pacific Greenwood Press 1985
[3] 문서 1961年の5・16軍事クーデターによって成立した国家再建最高会議により解散が命じられる。
[4] 문서 新党結党による。
[5] 문서 正式な結成は翌61年2月。
[6] 서적 韓国現代史 大統領たちの栄光と蹉跌 中公新書
[7] 웹사이트 우리의 발자취(私たちの足跡) https://theminjoo.kr[...] 共に民主党ホームページ 2017-02-10
[8] 문서 選挙運動期間中に脳溢血で急死
[9] 문서 選挙戦さなかに病気治療のため渡米したが、入院先の陸軍病院で客死。
[10] 문서 第5代までは完全小選挙区制
[11] 문서 民議院と参議院の2院制で実施さ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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