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19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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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태준은 1927년 경상남도 동래군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성장했으며,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5.16 군사 정변 당시 박정희의 신임을 받았으며,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분과위원 등을 역임하며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수립에 참여했다. 이후 기업인으로 변신하여 대한중석 사장과 포항제철 초대 사장을 역임하며 회사를 세계적인 철강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원과 민주정의당 대표를 지냈으며, 1997년 자유민주연합 총재, 2000년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2011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포스코 명예회장과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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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 (1927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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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박태준 |
로마자 표기 | Bak Taejun |
한자 표기 | 朴泰俊 |
호 | 청암 (靑岩) |
출생일 | 1927년 10월 24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
사망일 | 2011년 12월 13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
국적 | 대한민국 |
종교 | 개신교 (예장통합) |
본관 | 밀양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대저택 |
부모 | 박봉관(부), 김소순(모) |
배우자 | 장옥자 |
자녀 | 1남 4녀 |
웹사이트 | 포스코역사관 |
학력 | |
최종 학력 | 단국대학교 |
학력 | 와세다대학교 (중퇴), 육군사관학교 6기 |
경력 | |
주요 경력 | POSCO 창립자 및 회장, 대한민국 육군 장군, 국무총리 |
국회의원 | 제11·13·14대 국회의원 (전국구), 제15대 국회의원 (경북 포항시 북구) |
군 경력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분과위원장 |
군 복무 | 대한민국 육군 1948년 3월 ~ 1963년 9월 22일 |
정당 | 무소속 |
직업 | 기업인, 정치인, 군인 |
정치 경력 | |
직책 | 국무총리 |
대수 | 32 |
임기 시작 | 2000년 1월 13일 |
임기 종료 | 2000년 5월 18일 |
대통령 | 김대중 |
전임 | 김종필 |
후임 | 이한동 |
훈장 및 수상 | |
훈장 | 충무무공훈장 (1950, 1952) 화랑무공훈장 (1951, 1953, 1954) 국민훈장 무궁화장 (1974) 청조근정훈장 (2011. 12. 추서) |
수상 | 영국 금속학회 베서머 금상 (1987) 레종도뇌르 훈장 (1990) 노르웨이 국왕 훈장 (1991) 윌리코프상 (1992) 한국경영자대상 (1992) |
기타 | |
별명 | TJ |
로마자 호 표기 | Cheongam |
2. 생애
박태준은 1927년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임랑리(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부산 등지에서 보냈다. 6세 때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성장했으며, 1945년 와세다 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광복을 맞아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47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6기로 입학하여 1948년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한국 전쟁에 참전했으며, 1963년 단국대학교 정치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군 복무 중 박정희와의 인연을 맺었다.
예편 후 기업인으로 활동하며 1964년 대한중석(현 대구텍) 사장을 거쳐, 1968년 포항제철(현 포스코)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제철보국(製鐵報國)'의 기치 아래 포항제철을 세계적인 철강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포항공과대학교(POSTECH) 설립 등 교육 분야에도 기여했다.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 참여를 계기로 정계에 입문,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국회의원과 당 대표를 지냈고,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그러나 김영삼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1992년 포항제철 회장직과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났다.[43] 김영삼 정부 시절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97년 정계에 복귀하여 자유민주연합 총재를 맡았고, DJP 연합을 통해 정권 교체에 기여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2000년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으나 개인적인 문제로 4개월 만에 사임했다.[44][45]
이후 포스코 명예회장 등으로 활동하다 2011년 12월 13일, 흉막섬유종 후유증으로 인한 급성 폐 손상으로 향년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46]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사회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으며, 사후 세계 철강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47] 주요 상훈으로는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프랑스 레종도뇌르훈장 등이 있으며, 사후 청조근정훈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신종이산가족》(1987)이 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927년 경상남도 동래군 장안면 임랑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은 부산 등지에서 보냈다. 6살 때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성장하였다.1945년 와세다 대학 예과(예비과정)에 입학했으나, 광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1947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6기로 입학하여 1년 후인 1948년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사관생도 시절, 당시 탄도학 교관이자 제1중대장이었던 박정희 대위를 만났는데, 박태준은 어려운 탄도학 문제를 잘 풀어 박정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전해진다.[27]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충무무공훈장(1950, 1952)과 화랑무공훈장(1951, 1953, 1954)을 받았다. 1953년 11월에는 육군대학교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였다.[28] 이후 당시 정부의 고위 관료들에 대한 4년제 대학 학위 이수 요구에 따라, 1961년 단국대학교 서울캠퍼스 정법학부 정치학과에 편입하여 1963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 2. 군 복무
1947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 6기로 입학하여 1년 후인 1948년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사관학교 생도 시절, 그의 제1중대장은 당시 탄도학 교관이었던 박정희 대위였다. 박태준은 당시 난제로 알려져 있던 탄도학 문제를 해결하여 박정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전해진다.[27]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충무무공훈장(1950, 1952)과 화랑무공훈장(1951, 1953, 1954)을 받았다. 1953년 11월 육군대학교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였다.[28] 육군사관학교 교무처장을 거쳐 국방부 인사과장을 역임하던 1957년 가을, 당시 군수기지사령관이던 박정희 소장과 재회하였고, 그의 권유로 제25보병사단 참모장에 취임하며 다시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28][17]
1961년 5.16 군사 정변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 이는 그를 신뢰하던 박정희가 쿠데타 실패 시 자신의 가족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42][17] 이는 훗날 박태준이 박지만의 후견인을 자처한 배경이 되기도 했다.[42][18]
정변 성공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상공분과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입안에도 관여하였다. 당시 정부의 고위급 관료들에 대한 4년제 대학 학위 이수 요구에 따라, 1961년 단국대학교 서울캠퍼스 정법학부 정치학과에 편입하여 1963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63년 9월 22일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2. 3. 기업인 활동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후 기업인으로 전향하여, 1964년 대한중석(현 대구텍) 사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부임 1년 만에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키는 경영 능력을 보여주었다.[7] 그가 흑자로 전환시킨 대한중석은 이후 대구텍으로 사명을 변경했으며, 워런 버핏이 투자한 한국 기업 중 하나가 되었다.[7]1968년 4월, 박정희 정부의 종합제철 건설 계획에 따라 포항제철(현 포스코)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제철보국(製鐵報國)'이라는 신념 아래 포항제철 건설을 이끌었으며, 창립 10년 만인 1978년에는 연간 550만 톤의 철강 생산 능력을 갖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8] 포스코는 그의 리더십 아래 성장을 거듭하여 2010년에는 세계 3위의 철강업체로 발돋움했다.[8] 포항제철 건설 과정에서 정계의 압력으로 핵심 시설 구매 허가가 나지 않자, 박태준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했다. 박정희는 박태준이 필요한 사항을 적은 종이에 직접 서명하여 승인해주며 사업 추진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일화가 있다.[29]
박태준은 포항제철을 경영하며 직원 복리후생 증진에도 힘썼다. 당시 한국 최고 수준의 주택단지를 조성하고, 직원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1986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를 모델로 하여 포항공과대학교(POSTECH)를 설립하여 고급 과학기술 인재 양성에도 기여했다.
그의 리더십은 해외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일본 미쓰비시종합연구소는 포스코 성공의 주요 요인으로 박태준의 리더십을 꼽았으며,[14] 미국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연구에서도 한국 발전에 있어 그의 리더십이 중요했다고 평가했다.[12]
박태준은 포항제철 설립 당시부터 정치 외풍을 막는 방패 역할을 해왔으나, 1992년 10월 김영삼 정부 출범을 앞두고 김영삼과의 정치적 불화 끝에 포항제철 회장직에서 사임했다.[43] 이후 김영삼 정부 시절 포항제철 협력사로부터 39억원여 원을 받은 혐의로 조사를 받았는데, 이는 1992년 민자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김영삼의 반대편에 섰던 박태준에 대한 표적 수사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이 혐의는 1995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공소기각되었다.
사후에는 '제철보국의 이념으로 철강 불모지 한국에 일관제철소를 설립해 산업 근대화를 이끈 철강왕'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세계 철강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47] 그는 포스코 명예회장과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을 역임하며 포스코의 발전에 지속적으로 기여했다.
2. 4. 정치 활동
19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 경제 제1위원장으로 취임하며 정계에 입문하였다. 1981년에는 민주정의당 소속 전국구 후보로 제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 재무위원장을 지냈다.1988년 민주정의당 대표를 맡았고, 1990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출범하자 최고위원 중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김영삼과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박태준은 포항제철 설립 초기부터 정치 외풍을 막는 역할을 자임해왔으나, 1992년 10월 김영삼과의 불화 끝에 포항제철 회장직에서 물러났다.[9][43] 같은 해 10월 5일, 민자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영삼의 선거대책위원장직 제안을 거절하고 당직 사퇴서를 제출하며 백의종군을 선언했다.[43] 이러한 갈등 속에서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회의원직도 사퇴하였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박태준은 포항제철 협력사 등으로부터 39억원 가량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자 한동안 해외에 체류했다. 이는 1992년 민자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박태준이 김영삼의 반대편에 섰던 것에 대한 정치 보복, 즉 표적 수사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1995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공소기각되었다.
1997년, 김영삼 정부의 경제 정책 실패를 비판하며 포항시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 성공적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같은 해 11월 자유민주연합 총재로 추대되었고, 김종필과 함께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는 이른바 DJP 연합을 통해 제15대 대통령 선거 승리에 기여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후인 2000년 1월,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으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불거지면서 취임 4개월 만에 사퇴하였다.[44][45][10][11]
2. 5. 사망
2001년 미국 코넬대학교 병원에서 흉막섬유종 수술을 받았으나, 이후 후유증으로 계속 고통을 받았다.[22][23] 2011년 호흡 곤란으로 치료를 받았고,[22][23] 같은 해 12월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였다. 결국 2011년 12월 13일,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서 흉막섬유종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호흡 곤란 증세를 치료받던 중 급성 폐 손상이 발생하여 향년 85세(만 8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46][22][23][30] 그는 포스코가 국가 산업의 동력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유언을 남겼다.[46][22][23]발인일인 2011년 12월 17일 서울특별시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사회유공자묘역 17묘역에 안장되었다.[46] 배우자 장옥자와 자녀, 손주들이 유족으로 남았다.
사후 박태준은 세계 철강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명예의 전당 추천위원단은 헌정 이유로 '제철보국의 이념으로 철강 불모지 한국에 일관제철소를 설립해 산업 근대화를 이끈 철강왕'이라는 점을 들었다.[47]
3. 학력
4. 정치 활동 및 역대 선거 결과
1980년 국보위 경제 제1위원장에 취임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후보로 당선되어 국회 재무위원장을 지냈다.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후보로 재선되었고, 당 대표를 역임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자 최고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전국구 후보로 3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김영삼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19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포스코 회장직에서도 물러났는데, 이는 김영삼 정부와의 불화 직후 이루어진 일이다.[9] 김영삼 정부 시절, 포스코 하청업체로부터 약 39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어 해외에 머물기도 했다. 당시 정권 차원의 표적 수사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본인이 금품 수수 사실 자체는 인정하여 재판이 진행되던 중 1995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공소 기각되었다.
1997년 7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김영삼 정부의 경제 실정을 비판하며 당선, 4선 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같은 해 11월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여 총재로 추대되었고, 김종필과 함께 김대중 후보의 제15대 대통령 당선을 지지하는 이른바 'DJT 연합'을 이끌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후 2000년 1월 국무총리에 임명되었으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제기되어 취임 4개월 만에 사퇴했다.[10][11] 이후 법원은 해당 의혹이 사실무근임을 판결했다.
=== 역대 선거 결과 ===
연도 | 선거 종류 | 대수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순위 | 결과 | 비고 |
---|---|---|---|---|---|---|---|---|---|
1981 | 총선 | 11대 | 국회의원 | 전국구 | 민주정의당 | 5,776,624표 (35.6%) | 전국구 17번 | 당선 | 초선 |
1988 | 총선 | 13대 | 국회의원 | 전국구 | 민주정의당 | 6,670,494표 (34.0%) | 전국구 6번 | 당선 | 재선 |
1992 | 총선 | 14대 | 국회의원 | 전국구 | 민주자유당 | 7,923,718표 (38.5%) | 전국구 2번 | 당선 | 3선 |
1997 | 7.24 재보선 | 15대 | 국회의원 | 경북 포항시 북구 | 무소속 | 47,884표 (51.2%) | 1위 | 당선 | 4선 |
5. 기업 경영 활동
1963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후 기업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64년 대한중석`(현 대구텍)` 사장으로 임명되어 1년 만에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7] 대한중석은 이후 워런 버핏이 투자한 몇 안 되는 한국 기업 중 하나가 되었다.[7]
1968년 4월에는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여 제철소 건설을 이끌었다. 그의 주도 하에 포항제철은 설립 10년 만인 1978년에는 연간 550만 톤의 철강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성장했으며,[8] 이후 세계적인 철강 회사로 발돋움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4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으며, 1987년에는 영국 금속학회로부터 베서머 금상을 받았다. 또한, 1975년부터 1990년까지 한국철강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철강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교육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여 1986년에는 포항공과대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1992년 10월, 김영삼 정부와의 불화 속에서 포항제철 회장직에서 사임했다.[43] 당시 그는 민주자유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김영삼의 선거대책위원장직을 거절하고 백의종군을 선언했으며, 이는 정권과의 관계 악화로 이어졌다. 김영삼 정부 출범 후, 포항제철 협력사로부터 39억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당시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김영삼의 반대편에 섰던 정치적 배경 때문에 표적 수사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1995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공소 기각되었다.
5. 1. 포스코 경영 철학 및 리더십
박태준의 경영 철학은 '제철보국'(製鐵報國, 제철로써 나라에 보답한다)이라는 이념으로 대표된다. 이는 그가 사후 세계 '철강 명예의 전당'에 헌정될 때의 주요 근거로 언급되기도 했다. 추천위원회는 그를 "제철보국의 이념으로 철강 불모지 한국에 일관제철소를 설립해 산업 근대화를 이끈 철강왕"으로 평가했다.[47]그의 리더십은 국내외 연구기관에서도 높이 평가받았다. 일본의 미쓰비시종합연구소는 포스코 성공의 핵심 요인으로 "박태준 회장의 탁월한 리더십"을 지목했으며,[14]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의 연구 보고서 역시 한국 경제 발전에 있어 그의 리더십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12]
박태준은 품질과 원칙을 중요시하는 경영 스타일을 고수했다. 1977년 포항 제3기 설비 공사 당시, 발전송풍 설비에서 부실 공사가 발견되자 공정률이 80%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해당 부분을 폭파하고 재시공하도록 지시한 일화는 그의 엄격한 품질 관리 원칙을 보여준다.[27]
포스코 설립 초기, 선진 제철 기술 확보는 중요한 과제였다. 박태준은 기술 도입을 위해 신일본제철의 이나야마 요시히로 회장과의 관계 구축에 힘썼다. 그는 "물건을 훔치는 것은 나쁜 짓이지만, 마음을 훔치는 것은 좋은 것이며 전략적인 일"이라고 회고하며, 인간적인 관계를 통해 기술 도입의 장벽을 넘으려 노력했음을 시사했다. 실제로 이나야마 회장의 개인적인 지원 약속에도 불구하고, 신일본제철 내부에서는 기술 유출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 그러나 박태준은 결국 제철소 운영의 핵심인 규정집(기술 매뉴얼), 설계도면, 기계 사양 등 방대한 기술 자료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32][33] 그는 "친해져야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전략이 없다면 기술을 도입할 수 없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기술까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하며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했다.[32]
인재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여 하버드 경영대학원과 서울대학교 관련 사업에 기여했으며,[14] 직원들의 복지 향상에도 힘썼다. 포스코 직원들을 위한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했고, 특히 자녀 교육 환경을 고려하여 단지 내에 최고 수준의 유치원을 설립하는 등 주거 환경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12]
6. 사회 공헌 활동
박태준은 포스코 직원들을 위한 아파트 단지를 조성했으며, 특히 어린이를 위한 유치원을 포함한 최고 수준의 주택 단지를 만드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교육 분야에 대한 기여도 두드러진다. 1971년에는 6000만원의 기금으로 포항제철장학재단을 설립했다.[4][15] 이 재단은 이후 여러 차례 명칭이 변경되어 1996년에는 포항철강장학재단, 2002년에는 포스코장학재단으로 바뀌었고, 2005년에는 최종적으로 포스코청암재단으로 개편되었다.[4][15] 포스코청암재단은 포스코 직원들의 교육비 지원, 학생들의 해외 박사 학위 취득 지원,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학교 지원 등 다양한 장학 및 교육 지원 사업을 펼쳤으며, 2007년에는 포스코청암상을 제정하여 사회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을 시상하고 있다.[4][15]
또한, 1986년에는 대한민국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 인재 양성을 목표로 포항공과대학교(POSTECH)를 설립했다.[4][15]
7. 상훈
(Großes Goldenes Ehrenzeichen am Bande für Verdienste um die Republik Österreich|오스트리아 공화국 공로명예장 대훈장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