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코세키는 에도 막부 시대에 쇼군과 관련된 인물들이 대기하던 장소를 의미한다. 오오로카세키, 오히로마세키, 타마리즈메, 테이칸노마세키, 야나기노마세키, 카리노마즈메, 키쿠노마히로엔, 키쿠노마, 고산쿄의 오히카에쇼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소는 쇼군과의 관계, 신분, 지위에 따라 배정되었다. 특히, 오오로카세키는 쇼군가의 친족, 오히로마세키는 국주 다이묘, 야나기노마세키는 도자마 다이묘 등이 사용했으며, 이들 장소는 막부의 권력 구조와 위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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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코세키
정의
정의
일본 건축에서, 주로 일본식 주택이나 성에서 사용된 공간. 응접실, 대기실, 휴게실, 가신이 주인을 기다리는 장소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됨.
특징
위치
성: 혼마루의 고텐이나 니노마루에 위치. 저택: 현관 근처에 설치되는 경우가 많음.
넓이
다다미 2~3장 정도의 넓이부터, 넓은 경우에는 다다미 수십 장에 이르는 경우도 있음.
장식
도코노마: 족자, 꽃꽂이, 장식품 등을 놓는 공간. 후스마: 그림이 그려진 미닫이문. 쇼지: 채광을 위해 창문에 바르는 얇은 종이.
용도
응접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로 사용됨.
대기
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대기하는 장소로 사용됨.
휴식
주인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사용됨.
의식
간단한 의식을 거행하는 장소로 사용됨.
역사
헤이안 시대
귀족 저택에서 사용되기 시작함.
무로마치 시대
무가 저택과 사찰 건축에도 도입됨.
에도 시대
서민 주택에도 보급되어 다양한 용도로 사용됨.
현대
현대 건축
현대 건축에서도 일본의 전통적인 미를 살리기 위해 응접실, 서재 등으로 사용됨.
2. 오오로카세키(大廊下席)
오오로카세키(大廊下席)는 쇼군가의 친족이 사용하는 자리로, 카미노헤야(上之部屋)와 시모노헤야(下之部屋)로 나뉘어 있었다. 카미노헤야는 고산케 등이, 시모노헤야는 카가마에다가 등이 사용했다. 자세한 내용은 각 하위 섹션을 참고하라.
오히로마세키(大広間席)는 국주 다이묘나 준국주(准国主) 다이묘, 그리고 사품 이상의 관위를 가진 친번 및 도자마 다이묘가 사용했다.
이 자리에 배정된 다이묘 가문 중에는 조선 통신사와 관련된 가문도 있었다. 예를 들어, 쓰시마 번주 소(宗) 가문은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소 가문은 10만 석 격의 도자마 다이묘였으며, 조선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특별히 오히로마세키에 배정되었다.
타마리즈메(溜詰)는 흑서원 타마리노마(溜之間), 통칭 마쓰타마리(松溜)의 방에 들어간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타마리노마(溜間)는 쇼군의 집무 공간인 "오쿠(奥)"에 가장 가까워, 신하에게 주어진 최고의 자리였다[1]。
대대로 타마리즈메(溜詰)는 정 溜(조타마리), 상 溜(조타마리), 대대 溜(다이다이타마리) 등으로 불렸으며, 아이즈번(会津藩)마쓰다이라 가문, 히코네번(彦根藩)이이 가문, 다카마쓰번(高松藩)마쓰다이라 가문의 3개 가문이 이 자리를 차지했다. 또한 일대에 한정하여 타마리노마(溜間)에 츠메(詰)하는 다이묘 가문을 비 溜(토비타마리)라고 하며, 이요 마쓰야마번(伊予松山藩)마쓰다이라 가문, 히메지번(姫路藩)사카이 가문, 시노부번(忍藩)마쓰다이라 가문, 가와고에번(川越藩)마쓰다이라 가문 등이 이에 해당한다. 노중(老中)을 오랫동안 역임하고 퇴임한 다이묘가 전관 예우 형태로 일대에 한정하여 타마리노마(溜間)의 말석에 츠메(詰)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이를 타마리즈메격이라 불렀다.
마쓰타마리(松溜)는 노중과 여러 관료와의 용담 장소이자 여러 관료의 협의장이었으며, 동석하는 타마리즈메(溜詰)는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막부의 자문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초기 정원은 4~5명 정도였다. 또한 의식 때에는 노중보다 상석에 앉게 되어 있어 그 격식이 매우 높았다. 에도 중기 이후에는 비 溜(토비타마리) 다이묘도 대대로 츠메(詰)하게 되었다. 구와나번(桑名藩)마쓰다이라 가문, 오카자키번(岡崎藩)혼다 가문, 쇼나이번(庄内藩)사카이 가문, 에치고 다카다번(高田藩)사카키바라 가문의 당주도 거의 대대로 츠메(詰)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막말에는 정원이 15명 가까이 되어 희소성이 퇴색되고 본래의 취지가 현저하게 형식화되었다. 그러나 막말에도 3봉행(사사 봉행, 마치 봉행, 간조 봉행) 및 여러 관료의 협의는 반수 가까이가 마쓰타마리(松溜)에서 이루어져 그 중요성은 일정 이상 유지되었다.
테이칸노마(帝鑑間)는 막부 성립 이전부터 도쿠가와 씨를 섬긴 후다이 다이묘가 주로 사용하던 자리이다. 이 자리에 대기하는 다이묘를 막부에서는 '후다이세키(譜代席)'라고 불렀다.[1]
친번(시시도 번(마쓰다이라 씨)・히로세 번(마쓰다이라 씨) 등)이나 도자마 다이묘(사나다 씨 등) 중에서도 특별한 공을 세우거나 가문이 격상된 경우 테이칸노마에 배정되기도 했다. 이들을 '고간 후다이(御懇譜代)'라고 불렀다.[1] 아버지의 직책이 중요한 경우, 적자(헤야즈미)는 안간(雁間)에 배정되었다.[1]
5위 및 무관인 도자마 다이묘, 고타이요리아이, 고케, 일반 요리아이슈가 사용했다. 준국주 다이묘도 5위일 때는 이곳에 앉았으며, 4품으로 승진하면 오히로마로 이동했다. 각 가문의 적자도 함께 이 자리에 앉았다.
7. 카리노마즈메(雁間詰)
카리노마는 막부 성립 이후 새롭게 등용된 다이묘 가운데, 성주의 격식을 갖춘 자가 대기하는 방이다.노중이나 쇼시다이의 세자도 이 자리에 대기했다. 여기에 대기하는 다이묘는 "츠메슈(詰衆)"라고 불렸으며, 다른 자리에 있는 다이묘와는 달리 매일 등성했다. 또한 다이묘 대기실 중 노중이 정오에 행하는 고텐 순회 코스에 유일하게 포함되어, 막부 고관들의 눈에 띄어 관직을 얻을 기회도 많았다. 때문에, 테이칸노마에서 이 자리로 이동하기를 원하는 다이묘도 적지 않았다. 카리노마, 키쿠노마 히로엔을 통틀어 "간기쿠(雁菊)"라고 부른다.
8. 키쿠노마히로엔(菊間広縁詰)
키쿠노마히로엔(菊間広縁)은 키쿠노마엔쿄(菊間縁頬)라고도 하며, 막부 성립 이후 새롭게 등용된 다이묘 중 무성(無城) 다이묘가 사용했다. 하타모토 역직인 오반가시라(大番頭), 쇼인반(書院番)・고쇼구미료반가시라(小姓組両番頭), 하타부교(旗奉行)・야리부교(槍奉行) 등도 이 자리를 사용했다.
9. 키쿠노마(菊間)
키쿠노마(菊間)는 카리노마(雁間) 다이묘의 적자가 사용하는 자리였다. 아버지가 와카도시요리나 소샤번에 근무 중이면 적자는 키쿠노마에 나왔다.
10. 고산쿄의 오히카에쇼(御三卿の御控所)
고산쿄(타야스 가, 히토츠바시 가, 시미즈 가)는 에도 시대 중기에 창설되어 쇼군 가문의 친척(실질적인 "베야즈미")으로 취급되었다. 이들은 등성 경로와 츠메쇼(詰所)의 위치가 여러 다이묘들과는 달랐다. 고산케 이하의 여러 다이묘들은 에도 성으로 등성할 때 오테 문에서 입성하여 표 어전의 각 츠메쇼에서 대기했던 반면, 고산쿄는 히라카와 문에서 등성하여 혼마루 어전 중오쿠의 내현관(오후로야구치)을 거쳐 쇼군의 생활 공간인 중오쿠에 마련된 오히카에쇼(御控所)에 들어갔다. 이는 쇼군의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고산쿄에 대한 특별 대우였다.
11. 시코세키 제도의 변화와 의의
시코세키 제도는 에도 막부의 권력 구조와 다이묘 통제 방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시코세키는 다이묘의 서열을 가격, 관위, 직책 등으로 구분하고, 쇼군과의 친소 관계를 나타내는 지표로 활용되었다.[1]
다이묘가 들어갈 수 있는 좌석은 '''오오로카세키(大廊下席), 오오히로마세키(大広間席), 타마리즈메(溜詰), 테이칸노마세키(帝鑑間席), 야나기노마세키(柳間席), 카리노마즈메(雁間詰), 키쿠노마히로엔즈메(菊間広縁詰)'''등의 7개가 있었다. 각각 들어가는 다이묘는 출신이나 관위를 바탕으로 막부에 의해 정해졌다. 단, 직책에 취임했을 경우에는 그 직책에 대해 정해진 자리 (소쟈번이면 후요노마(芙蓉間), 오오반이면 키쿠노마(菊間) 등)에 앉았다.[1]
쇼군의 집무・생활 공간인 「오쿠(奥)」에서 가장 가까운 것은 「타마리노마(溜間)」였고, 다음으로 「카리노마(雁間)」「키쿠마노히로엔(菊間広縁)」「테이칸노마(帝鑑間)」가 있었다. 주로 후다이 다이묘가 들어가는 자리였으며, 관위나 고쿠다카는 오오로카(大廊下)나 오오히로마(大広間)의 신판・토자마 다이묘 쪽이 위였지만, 쇼군과의 친분에서는 멀리했다.[1]
'''오오히로마세키(大広間席), 테이칸노마세키(帝鑑間席), 야나기노마세키(柳間席)'''의 다이묘는 "효다이묘(表大名)"라 하여 5절구 (인일(人日, 음력 1월 7일) · 상사(上巳, 음력 3월 초사흘) · 단오 · 칠석 · 중양(重陽, 음력 9월 9일))나 매달 등성하였다.[1]
막부 말기에 이르러 시코세키 제도는 형식화되고 그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에도 시대의 신분 질서와 권력 관계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자료이다.
참조
[1]
문서
家中騒動の懲罰により、一旦大広間に陥落
[2]
문서
将軍家からの養子縁組以降。それ以前は極官も従四位下侍従まで。
[3]
문서
将軍家からの養子縁組以降。それ以前の極官は従四位下侍従まで。
[4]
문서
将軍家からの養子縁組以降。
[5]
문서
将軍家からの養子縁組以降。それ以前の極官は従四位下侍従まで。
[6]
문서
将軍家からの養子縁組以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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