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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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료는 병주 안문군 마읍현 출신으로, 후한 말부터 조위 시대까지 활약한 무장이다. 여포 휘하에서 기도를 역임하다가 조조에게 귀순하여 관도대전, 백마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다. 특히 합비 전투에서 800명의 군사로 손권의 10만 대군을 격파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워 정동장군에 임명되었다. 조비 시대에는 전장군을 거쳐 진양후에 봉해졌으며, 오나라와의 전투 중 병사하여 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뛰어난 용맹과 지략으로 '장료지제'라는 고사까지 남겼으며, 《삼국지연의》에서도 중요한 인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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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9년 출생 - 전주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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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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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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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장료 |
로마자 표기 | Jang Ryo |
자(字) | 문원(文遠) |
시호 | 강후(剛侯) |
출생 및 사망 | |
출생 | 169년 |
출생지 | 산시 성 숴저우 시 수오청 구 |
사망 | 222년 |
사망지 | 장쑤 성 양저우 시 장두 구 |
관직 및 작위 | |
초기 관직 (여포 휘하) | 기병도위(騎都尉) |
주요 관직 (조조/조비 휘하) | 노국상(魯國相) 탕구장군(盪寇將軍) 정동장군(征東將軍) 전장군(前將軍) |
봉작 | 진양후(晉陽侯) |
가족 관계 | |
자녀 | 장호(張虎) 최소 1명 이상의 아들 |
소속 세력 | |
주요 섬긴 군주 | 정원 동탁 여포 조조 조비 |
주요 전투 참여 | |
주요 전투 | 하비 전투 관도 대전 하북 쟁탈전 백랑산 전투 첨산 전투 합비 전투 조비의 남정 |
2. 생애
후한 말, 병주 자사 정원은 장료의 능력을 높이 사 그를 부관으로 임명하고, 병력을 이끌고 수도 낙양으로 가서 대장군 하진을 도우라고 명했다. 하진은 장료를 하북으로 보내 1,000명 이상의 병력을 모집하게 했다.[5]
장료가 낙양으로 돌아왔을 때, 동탁이 하진 암살 후 낙양을 장악하고 한나라 중앙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장료와 그의 군대는 동탁의 군대에 합류했다.[6] 192년, 여포가 동탁을 살해한 후, 장료는 여포의 부하가 되어 기병 교위가 되었다.[7]
여포는 이각과 곽사에게 패하고 장안에서 쫓겨났다. 장료는 여포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했고, 195년 중반까지 중국 중북부 지역을 떠돌아다녔다. 이후 유비가 여포에게 서주에서 피난처를 제공했다. 196년, 여포는 유비를 배신하고 서주를 장악한 후 27세의 장료를 노국(산둥성취푸) 재상으로 임명했다.[8] 장료는 당시 북지 태수를 겸했기에 여포와 형식적으로 독립적인 관계였다.[9][10]
198년, 여포의 부하들이 군마를 구입하러 가던 중 유비 군대에 의해 모든 금을 약탈당했다.[11] 장료는 고순과 함께 유비와 싸웠고, 유비는 조조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조조는 하후돈을 파견했으나, 고순과 장료는 하후돈을 격파하고 패성에서 유비를 격파했다.[12][13]
같은 해, 조조는 하비 전투에서 여포를 격파하고 처형했다. 장료는 조조에게 항복하여 부하가 되었고, 중랑장과 관내후 작위를 받았다. 이후 전투 공헌으로 비장군으로 승진했다.[14]
2. 1. 초기 생애와 여포 휘하
병주 안문군 마읍현(馬邑縣, 현재의 산시성숴저우시숴청구) 사람으로, 선조는 전한 무제 때의 섭일(聶壹)이다. 섭일이 흉노를 유인하여 섬멸하려 했던 일[67] 때문에 원한을 피하여 성씨를 장(張)씨로 고쳤다.[2][3]젊어서 군의 관리가 되었으며, 병주자사 정원은 장료를 종사(從事)로 삼아 군을 이끌고 수도 낙양으로 가게 했다. 대장군 하진은 장료를 하북으로 보내 1,000여 명의 병사를 모으게 했다.[5] 그 사이 하진은 십상시에게 암살당하고 동탁이 조정과 중앙군을 장악했으므로, 장료도 동탁의 지휘를 받았다.[6]
192년(초평 3년) 여포가 동탁을 죽이고 집권하면서 장료는 기도위로 승진하였다.[7] 다시 1달 만에 정권은 이각에게 돌아갔고, 패망한 여포를 쫓아 서주까지 갔다. 28세의 나이에 노국상(魯國相)과 북지태수(北地―)를 겸하였다.[8][9][10]
198년(건안 3년) 음력 9월 고순과 함께 하후돈을 깨트리고 유비의 패성(沛城)을 점령하였다.[68][12][13] 여포가 토벌당하자 조조에게 부하들을 이끌고 항복하여 중랑장과 관내후(關內侯)를 받았다.
2. 2. 조조 휘하
192년 여포가 동탁 사후 장안을 장악했던 이각과 곽사에게 패하면서, 장료는 여포를 따라 장안을 탈출했다. 여포가 서주를 지배하게 되자 장료는 노국상(魯国相)으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28세였다.198년 봄, 고순과 함께 패현의 유비를 공격하여 구원하러 온 조조 군의 하후돈을 격파하고, 9월 패성을 함락시켰다. 이 무렵 북지군 태수가 되었다(『영웅기』). 같은 해 12월, 여포가 하비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배하여 처형되자, 장료는 휘하의 장병과 함께 조조에게 항복하여 중랑장·관내후가 되었다. 이후 전투에서의 공헌으로 비장군(裨將軍)으로 승진했다.[14]
2. 2. 1. 관도 대전과 하북 평정
200년 원소가 남진하면서 안량으로 하여금 백마(白馬, 지금의 허난성 화현)를 공격하게 했다. 조조는 연진(延津)에서 도하하는 척해서 원소군의 본대를 분리하고 백마를 기습하였다. 장료와 관우가 선봉이 되어 안량을 베었다. 이외에도 여러 전공을 세워 비장군(裨将軍)에 올랐다. 관도 대전에서 승리한 후 노국의 여러 현을 접수하였다. 201년[69] 하후연과 함께 동해군에서 창희를 몇 달간 포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량이 다 떨어졌다. 회군하기 전에 장료가 창희와 단둘이 만나 설득하니 그가 투항하였다.202년 조조가 원상, 원담과 여양(黎陽, 지금의 허난성 쉰 현)에서 공방전을 벌일 때 종군하였다. 203년 3월(음력) 여양이 함락되고 중견장군(中堅将軍)이 되었다. 4월 조조를 따라 업으로 진격했지만 원상의 수비에 막혔고 대신 악진과 같이 음안(陰安)을 쳐서 그 주민을 황하 이남으로 이주시켰다. 204년 조조가 다시 업을 공격할 때 참전하였다. 8월 업이 무너진 후 조국(趙國), 상산군 방면으로 나아가 흑산적 손경 등 여러 산적들을 규합하였다. 205년 조조의 지휘 하에 원담을 격멸한 후 요동의 도적 유의(柳毅)를 무찌르는 등 바닷가 일대까지 정리하고 돌아오니 조조가 친히 맞으며 탕구장군(盪寇将軍)에 임명했다. 형주 강하군의 여러 현들도 평정하여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
207년 조조가 원상과 오환을 마저 정벌하려 하기에 장료는 다른 장수들과 함께 ‘유표가 유비를 시켜 허도를 기습할 수도 있다’며 말렸다.[70] 그럼에도 조조는 ‘유표는 유비를 신임하지 않는다’는 곽가의 진언에 따라 출병하였고 장료는 이를 수행하였다. 원상과 오환 연합군은 유성(柳城, 지금의 랴오닝성 차오양시)에 주둔했는데 조조는 그 앞에서 퇴각하는 척하면서 전주가 알려준 200년 간 끊어졌어도 이용할 수 있었던 샛길을 몰래 돌파하였다.[71] 원상군은 200리가 남았을 때에야 알아차리고 황급히 진형을 짰다. 8월 백랑산(白狼山)에서 양군이 우연히 만났고 장료와 장합이[72] 선발대의 적은 병사로도 바로 몰아쳐서 대승을 거두었다. 답돈은 조순의 호표기에게 붙잡혀[73] 참수당했고 원상과 원희는 공손강에게 달아났다가 죽었다.
2. 2. 2. 형주에서의 활약과 반란 진압
202년 조조가 원상, 원담과 여양(黎陽, 지금의 허난성 쉰 현)에서 공방전을 벌일 때 종군하였다. 203년 여양이 함락되고 중견장군(中堅将軍)이 되었다. 악진과 같이 음안(陰安)을 쳐서 그 주민을 황하 이남으로 이주시켰다. 204년 조조가 다시 업을 공격할 때 참전하여 함락 후 조국(趙國), 상산군 방면으로 나아가 흑산적 손경 등 여러 산적들을 규합하였다. 205년 조조의 지휘 하에 원담을 격멸한 후 요동의 도적 유의(柳毅)를 무찌르는 등 바닷가 일대까지 정리하고 돌아와 탕구장군(盪寇将軍)에 임명되었다. 형주 강하군의 여러 현들도 평정하여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74]208년 조조가 형주로 남하하기 직전, 장료는 영천군 장사현(長社縣, 지금의 허난성 창거 시)에 주둔하고 있었다. 밤중에 누군가가 난을 일으키고 불을 지르니 모두 동요했다. 장료는 주동자가 소수임을 간파하고 난에 가담하지 않은 자는 침착하게 앉아 있으라 명하였다. 이후 측근 수십 명을 데리고 주동자만을 처단하였다.[25]
209년 진란과 매성(梅成)이 육안(六安)에서 반기를 들었다. 장료가 장합과 우개(牛蓋)를 거느려 진란을 맡고, 우금과 장패가 매성을 맡았다. 매성은 우금에게 거짓 항복하여 전력을 보전했다가 진란에게 합류하였다. 진란은 첨산(灊山)으로 들어가 버텼다. 그중에서도 천주산(天柱山)은 험하고 깊어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우금은 장료에게 계속 군량을 보급하고,[75] 장패는 환현(皖縣, 지금의 안후이성 첸산 현), 서현(舒縣, 지금의 안후이성 루장 현) 일대에서 한당과 손권을 격파하여 오나라의 지원을 차단함으로써 장료가 마음 놓고 작전할 수 있도록 도왔다.[76] 결국 장료가 험난한 산세를 무릅쓰고 깊이 돌입하여 진란과 매성을 베고 그 무리를 모두 포획하였다. 이 공으로 식읍이 늘고 가절(假節) 권한까지 생겼다.[30]
2. 2. 3. 합비 전투
214년 5월, 손권이 여몽, 감녕 등을 이끌고 환성을 공격했으나, 장료가 도착하기 전에 성이 함락되었다.[78] 이후 장료는 악진, 이전과 함께 7,000명의 병력으로 합비를 지켰다. 215년, 조조가 장로 토벌을 위해 떠나면서 호군(護軍) 설제에게 교서를 보냈는데, 8월에 손권이 10만 대군으로 합비를 포위하자 교서를 열어보았다. 교서에는 장료와 이전은 나가 싸우고 악진은 수비하며 설제는 참전하지 말라고 적혀 있었으나, 병력 차이가 커서 많은 장수들이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장료는 농성해봤자 무너질 것이 뻔하고, 손권군이 태세를 갖추기 전에 급습하여 예봉을 꺾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전 역시 장료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79] 함께 싸우기로 결정했다.
밤중에 정예병 800명을 모아 소를 잡아 배불리 먹이고, 날이 밝자 장료와 이전이 돌격했다. 장료는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병사 수십 명과 장수 2명을 베고 손권의 지휘 막사까지 유린했다. 손권과 좌우는 근처 언덕으로 도주했고, 장료의 군세가 적은 것을 보고 포위했으나 장료는 이를 뚫어냈다. 남은 병사들이 장료에게 자신들을 버리냐고 부르짖자, 다시 포위망에 뛰어들어 모두 구출했다. 손권군은 사기가 완전히 떨어졌고, 합비로 복귀한 장료는 방비를 굳건히 하여 성 안 사람들을 안정시켰다.
손권은 10여 일 정도 공격하다가 역병까지 겹쳐 회군했다. 손권은 소요진(逍遙津) 북쪽에 가장 늦게까지 남았는데, 여몽, 장흠, 능통, 감녕, 그리고 1,000명의 근위병만이 손권을 호위했다.[80] 장료는 즉시 출격하여 난전을 벌였고, 손권은 가까스로 몸을 피했다. 전투 후 장료는 항복한 오나라 사람에게 자줏빛 수염을 가진 장군이 누구냐고 물었고, 손권이라는 대답을 듣자 잡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81] 조조는 장료를 매우 장하게 여겨 정동장군(征東将軍)을 주었다.
215년 8월, 장료는 악진, 이전과 함께 합비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손권은 스스로 10만 대군이라고 칭하며 침공해 왔다(합비 전투).[58] 조조는 장로를 공격하기 위해 한중으로 원정하고 있었지만, 호군인 설제를 보내 세 장수에게 서면으로 "장료와 이전은 성을 나가 싸우고, 악진은 성에서 호군을 지켜라"라는 지령을 내렸다.
217년 유수구 전투에서 장패와 선봉이었고[75] 전후 하후돈 등과 함께 거소(居巢, 지금의 안후이성 차오후시)를 지켰다. 219년 관우가 번성(樊城)의 조인을 포위하고 손권은 스스로 칭번하기에 조조는 장료로 하여금 조인을 구하게 했다. 장료가 도착하기 전에 서황이 먼저 관우를 물리치고 포위를 풀었다. 조조의 지휘소가 있던 마피(摩陂)에서 조조를 배알하고 진군에 주둔했다.
2. 3. 조비 시대와 죽음
張遼|장료중국어는 220년 조비가 위왕을 이으면서 전장군으로 강등되었으나, 형 장범(張汎)과 아들은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이후 손권과의 불화로 조비는 장료를 도향후(都鄉侯)에 봉하고 다시 합비에 주둔시켰다. 조비는 장료의 어머니에게 수레를 하사하고 병마(兵馬)를 보내 가족을 전송했으며, 합비의 모든 장수와 관리들은 길가에 정렬하여 절하며 맞이하도록 했다. 보는 이들이 이를 명예롭게 여겼다.[45] 조비가 황제에 오르면서 장료는 진양후(晉陽侯)로 올랐고, 식읍도 1,000호를 더하여 모두 2,600호가 되었다.[46]221년(황초 2년), 조비는 장료에게 저택을 지어주고, 장료의 어머니를 위해 특별히 전각을 지어 주었으며, 장료의 모집에 응해 오나라를 쳐부순 병사들을 호분(虎賁)으로 삼았다.[47] 손권이 이릉 대전으로 인해 칭번하자 옹구(雍丘, 지금의 허난성 치현)로 돌아왔으나 병에 걸렸다.[48] 조비는 시중 유엽에게 태의를 딸려 보내 장료를 살피게 했으며, 장료의 상태를 묻는 호분이 끊이지 않았다. 병이 낫지 않자 장료를 행재소(行在所)로 들이고 친히 문병을 가 손을 잡으며 위로하고, 임금의 옷을 하사하고 태관(太官)으로 하여금 매일 임금의 음식을 보냈다. 어느 정도 차도가 있어 옹구로 돌아갔다.
222년,[82] 조비가 오나라에 대한 남정을 시작하여 장료와 조휴는 해릉(海陵, 지금의 장쑤성 타이저우시)으로 갔다.[49] 손권은 이를 심히 꺼려서 장수들에게 장료가 아무리 병들었어도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50] 여범을 상대로 선전했으나 결국 강도(江都)에서 병사했다.[51] 조비는 눈물을 흘리며 시호를 강후(剛侯)라 했다.[52] 아들 장호가 후사를 이었다.
225년, 조비는 소요진 전투에서 장료와 이전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칙령을 내렸다. "합비 전투에서 장료와 이전은 단 800명의 보병으로 10만 명의 적을 격파했다. 이는 전쟁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들은 적의 사기를 꺾는 데 성공했으니 우리 국가의 '손톱과 이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장료와 이전의 식읍에 세금을 낼 수 있는 가구 수를 각각 100호씩 늘리고, 그들의 아들 한 명에게 부후의 작위를 수여한다."[53]
3. 성품과 평가
장료는 담력이 남달랐다. 몇 달 동안 전투를 벌였던 창희가 장료의 설득에 투항하자, 장료는 혼자 창희의 본거지인 삼공산(三公山)에 올라 가족에게 예를 갖추었다. 창희는 감격하여 장료를 따라 허창에서 조조를 만났다. 조조는 장료에게 ‘적의 소굴에 단독으로 들어가는 것은 대장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고 주의를 주었다. 백랑산 전투에서는 적은 병사로 원상과 오환 연합군을 만났음에도 조조에게 바로 공격할 것을 권했다. 합비 전투에서는 손권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216년 조조는 격전지를 둘러보며 감탄하였다. 오나라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 ‘울던 아이도 장료가 온다는 말에 울음을 그친다’는 말까지 생겨났다.[83]
장료는 공과 사를 구별하였다. 관우가 잠시 조조에게 의탁하고 있을 때, 장료는 조조의 명으로 관우의 의중을 물었다. 관우는 유비와 함께 죽기로 맹세했다며 조조에게서 받은 은혜를 갚는 대로 떠날 것이라고 하였다. 장료는 관우를 조조가 죽일까 두려웠고, 전하지 않자니 주군을 섬기는 도리가 아니었다.[84] 고민 끝에 사실대로 말했고 조조는 관우를 의롭게 여겨 그렇게 해주었다.[85] 이 일은 이후 신하의 바른 자세로 회자되었다.[86]
장료는 의로웠고 잘못이 있으면 고쳤다. 장료가 장사현에 주둔할 무렵 우금은 영음(潁陰)에, 악진은 양책(陽翟, 지금의 허난성 위저우 시)에 주둔했는데 셋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엄이 세 군영의 일에 간여하며 타이르니 모두 깨우쳐 화목해졌다.[87] 합비에서는 호군 무주(武周)와 틈이 벌어져 양주 자사 온회에게 호질로 변경해줄 것을 청한 적이 있다. 호질이 병을 핑계로 사양하자 장료는 직접 그 이유를 물었다. 호질은 관포지교의 우정을 먼저 얘기한 후 “무주는 장군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고아한 선비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사이가 벌어졌으니 하물며 저 같이 모자른 자가 어찌 끝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고 이에 깨달은 장료는 무주와의 관계를 회복하였다.[88]
206년 조조는 헌제에게 올리는 표(表)에서 우금, 악진, 장료를 ‘무력이 걸출하고 계략에 능하며 충성심이 한결같아 절의를 지킨다. 싸울 때마다 병사를 지휘하여 강한 적을 물리치고 스스로 북을 쳐 지치지도 않는다. 원정을 가면 군대를 화합하게 하고 법을 받들며 적을 만나면 과감하게 결단하면서도 실수가 없다.’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우금은 호위장군(虎威―), 악진은 절충장군(折衝―), 장료는 탕구장군에 임명됐다.[89] 조비는 장료에게서 합비의 무용을 듣고는 소호(召虎, 주 선왕 때의 명장)라 하였고, 225년 장료와 이전을 추념하며 “800명으로 10만 명을 깨뜨리는 미증유의 용병술은 지금까지도 오나라 사람들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고 있으니 실로 우리나라의 발톱과 어금니이다.”라 말하고 각각의 아들 1명에게 관내후를 수여하였다. 부현(傅玄)은 조인 다음으로 가장 용맹하다고 평하였고,[90]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조조 휘하의 훌륭한 장수로는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 5명이 으뜸으로[91] 가히 명장이라고 하였다.[75] 이외에도 동아시아의 문인 및 사가들이 무략을 논할 때 자주 언급하였다.
진수는 조조 생전에 가장 공적이 있었던 장군으로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의 5명을 하나의 권에 수록했으며(장악우장서전), 장료는 그 으뜸으로 꼽았다. 『위서』는 장료가 포로 중에서 발탁되어 조조를 보좌하고 공을 세워 명장이 된 것을 조조의 인물 보는 안목이 뛰어났던 예로 들고 있다. 『부자』는 조인의 용맹함 다음이 장료라고 평하고 있다. 당나라 사관이 선정한 중국 역사상 64명의 명장에도 선정되었다(무묘육십사장). 그 외에 위나라에서 선정된 인물은 등애뿐이다[62]。 홍매는 『용재수필』에서 적은 병력으로 대군에게 승리하여 방면을 지킨 예로, 장료가 손권을 합비에서 물리치고, 곽회가 촉군을 양평에서 막아냈으며, 서황이 관우를 번구에서 격퇴한 것을 들고 있다.
4. 《삼국지연의》에서의 장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장료는 장막이 여포를 끌어들여 연주에서 거병할 때부터 팔건장의 일원으로 등장한다. 여포가 죽은 후 조조에게 귀순한다. 서주에서 독립한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여 하비성에 고립된 관우를 세 가지 죄를 들어 설득하여 항복하게 한다.[64] 관우가 유비를 찾아 오관참육장을 벌이고 하후돈과 싸우려 할 때 조조의 명을 알리며 둘의 싸움을 중재한다. 적벽에서 활약하고 합비 전투(작중 209년)에서 손권군 태사자의 계략을 간파하여 역습하고 중상을 입혀 결국 죽인다. 소요진에서 악진, 이전과 함께 손권을 쫓아낸 후 제2차 합비 전투 내지 유수구 전투(작중 215년)로 이어진다. 조비가 오나라에 대한 친정에 실패하고(작중 224년) 퇴각하는 것을 호위하다가 정봉의 화살에 맞아 허창에서 죽는다.
하비성 함락 장면에서 장료는 목숨을 구걸하는 여포에게 호통치며, 조조를 욕하며 스스로 목을 내놓지만, 유비와 관우가 격노한 조조에게 간청하여 장료는 조조의 휘하가 된다.
이후 조조가 관우를 포위했을 때, 장료는 관우의 "죄"를 설득하여 조조에게 귀순시키는 데 성공한다. 적벽 대전에 종군하여, 화계에 의해 패주하는 조조를 따르다 화용도에서 관우와 조우했지만, 관우는 정에 의해 장료를 놓아준다.
제53회에서는 합비에서 악진, 이전과 함께 손권 군을 격파하고, 내통자에 의한 야습을 간파하여 태사자와 함께 복병에게 일제 사격을 가해 격퇴한다. 제67회에서는 악진, 이전을 거느리는 중후한 지휘관으로 묘사된다. 제86회에서 조비의 오나라 정벌에 서황과 함께 종군하여, 서성의 가짜 성 계략에 놀란 조비가 퇴각하는 것을 호위하는 중에, 병사를 매복시킨 정봉의 화살을 허리에 맞고, 그 상처가 원인이 되어 사망한다.
5. 가계
- 아들: 장호
장료에게는 형 장범(張汎)이 있었는데, 220년에 조비가 한나라를 멸망시키기 전에 제후의 작위를 받았다. 장료의 아들 장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진양후(晉陽侯)가 되었으며 위나라에서 편장군(偏將軍)의 직위를 역임했다. 장호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장통(張統)이 작위를 물려받았다.[54][55] 장료는 장호 외에도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아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225년에 조비의 칙령에 따라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받은 그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들은 아마도 장호가 아니었을 것이다.
참조
[1]
문서
(評曰:太祖建茲武功,而時之良將,五子為先。于禁最號毅重,然弗克其終。張郃以巧變為稱,樂進以驍果顯名,而鑒其行事,未副所聞。或注記有遺漏,未如張遼、徐晃之備詳也。) Sanguozhi vol. 17.
[2]
문서
(張遼字文遠,鴈門馬邑人也。) Sanguozhi vol. 17.
[3]
문서
(本聶壹之後,以避怨變姓。) Sanguozhi vol. 1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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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少為郡吏。) Sanguozhi vol.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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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末,并州刺史丁原以遼武力過人,召為從事,使將兵詣京都。何進遣詣河北募兵,得千餘人。) Sanguozhi vol. 1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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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還,進敗,以兵屬董卓。) Sanguozhi vol. 1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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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卓敗,以兵屬呂布,遷騎都尉。) Sanguozhi vol. 1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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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布為李傕所敗,從布東奔徐州,領魯相,時年二十八。) Sanguozhi vol. 17.
[9]
웹사이트
方詩銘《三國人物散論》:從史籍留下的記載,至少可以知道,在擺脱涼州軍控制後逐漸形成的幷州軍事集團,包括了呂布、張遼、張楊等三支武裝力量。
[10]
웹사이트
三國人物散論:上海古籍出版社
[11]
서적
傳世藏書: 三国志, 晋书
https://books.google[...]
Hainan International Press and Publication Center
1995
[12]
서적
Later Han Books , Volume 4
https://books.google[...]
Lotte Press / 樂天出版社
197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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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雄记》:建安三年春,布使人赍金欲诣河内买马,为备兵所钞。布由是遣中郎将高顺、北地太守张辽等攻备。九月,遂破沛城,备单身走,获其妻息。) Records of Heroes
[14]
문서
(太祖破呂布於下邳,遼將其衆降,拜中郎將,賜爵關內侯。數有戰功,遷裨將軍。) Sanguozhi vol. 1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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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袁紹破,別遣遼定魯國諸縣。與夏侯淵圍昌豨於東海,數月糧盡,議引軍還, ...) Sanguozhi vol. 1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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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遼謂淵曰:「數日已來,每行諸圍,豨輒屬目視遼。又其射矢更稀,此必豨計猶豫,故不力戰。遼欲挑與語,儻可誘也?」乃使謂豨曰:「公有命,使遼傳之。」豨果下與遼語,遼為說「太祖神武,方以德懷四方,先附者受大賞」。豨乃許降。遼遂單身上三公山,入豨家,拜妻子。豨歡喜,隨詣太祖。) Sanguozhi vol. 1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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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遣豨還,責遼曰:「此非大將法也。」遼謝曰:「以明公威信著於四海,遼奉聖旨,豨必不敢害故也。」) Sanguozhi vol.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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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討袁譚、袁尚於黎陽,有功,行中堅將軍。從攻尚於鄴,尚堅守不下。) Sanguozhi vol.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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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還許,使遼與樂進拔陰安,徙其民河南。) Sanguozhi vol.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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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從攻鄴,鄴破,遼別徇趙國、常山,招降緣山諸賊及黑山孫輕等。) Sanguozhi vol.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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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攻袁譚,譚破,別將徇海濵,破遼東賊柳毅等。還鄴,太祖自出迎遼,引共載,以遼為盪寇將軍。) Sanguozhi vol.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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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別擊荊州,定江夏諸縣,還屯臨潁,封都亭侯。) Sanguozhi vol.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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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傅子曰:太祖將征柳城,遼諫曰:「夫許,天子之會也。今天子在許,公遠北征,若劉表遣劉備襲許,據之以號令四方,公之勢去矣。」太祖策表必不能任備,遂行也。) Fu Z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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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從征袁尚於柳城,卒與虜遇,遼勸太祖戰,氣甚奮,太祖壯之,自以所持麾授遼。遂擊,大破之,斬單于蹋頓。) Sanguozhi vol. 1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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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荊州未定,復遣遼屯長社。臨發,軍中有謀反者,夜驚亂起火,一軍盡擾。遼謂左右曰:「勿動。是不一營盡反,必有造變者,欲以動亂人耳。」乃令軍中,其不反者安坐。遼將親兵數十人,中陣而立。有頃定,即得首謀者殺之。) Sanguozhi vol. 17.
[26]
Biography & Autobiography / Historical, Biography & Autobiography / Military, China -- Anecdotes -- History -- Three kingdoms, 220-265, Generals -- Anecdotes -- China
三国名将——一个历史学家的排行榜
https://books.google[...]
201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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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蘭、梅成以氐六縣叛,太祖遣于禁、臧霸等討成,遼督張郃、牛蓋等討蘭。) Sanguozhi vol. 1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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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偽降禁,禁還。成遂將其衆就蘭,轉入灊山。灊中有天柱山,高峻二十餘里,道險狹,步徑裁通,蘭等壁其上。) Sanguozhi vol.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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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欲進,諸將曰:「兵少道險,難用深入。」遼曰:「此所謂一與一,勇者得前耳。」遂進到山下安營,攻之,斬蘭、成首,盡虜其衆。) Sanguozhi vol.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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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論諸將功,曰:「登天山,履峻險,以取蘭、成,盪寇功也。」增邑,假節。) Sanguozhi vol. 1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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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旣征孫權還,使遼與樂進、李典等將七千餘人屯合肥。) Sanguozhi vol. 17.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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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征張魯,教與護軍薛悌,署函邊曰「賊至乃發」。) Sanguozhi vol. 17.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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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俄而權率十萬衆圍合肥,乃共發教,教曰:「若孫權至者,張、李將軍出戰;樂將軍守,護軍勿得與戰。」諸將皆疑。) Sanguozhi vol. 17.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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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曰:「公遠征在外,比救至,彼破我必矣。是以教指及其未合逆擊之,折其盛勢,以安衆心,然後可守也。成敗之機,在此一戰,諸君何疑?」李典亦與遼同。於是遼夜募敢從之士,得八百人,椎牛饗將士,明日大戰。) Sanguozhi vol. 17.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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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旦,遼被甲持戟,先登陷陣,殺數十人,斬二將,大呼自名,衝壘入,至權麾下。權大驚,衆不知所為,走登高冢,以長戟自守。遼叱權下戰,權不敢動, ...) Sanguozhi vol. 17.
[36]
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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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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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40]
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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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 Shu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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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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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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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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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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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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傅子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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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江南賦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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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遼伝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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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権伝集解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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献帝春秋
[61]
서적
呂蒙伝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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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
[63]
서적
삼국지_(吉川英治)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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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曹操にではなく漢王朝に降る」「劉備の親類縁者に手出しをしない」「劉備の存命を確認でき次第直ちに帰参する」の三条
[65]
서적
Sanguozhi
[66]
서적
Sanguozhi
[67]
서적
한서
[68]
서적
영웅기
[69]
서적
자치통감
[70]
서적
부자
[71]
서적
《삼국지》11권 위서 제11 전주
[72]
서적
《삼국지》17권 위서 제17 장합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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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9권 위서 제9 조인제순
[74]
서적
《자치통감》66권 한기 제58 헌제 건안 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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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17권 위서 제17 우금
[76]
서적
《삼국지》18권 위서 제18 장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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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47권 오서 제2 오주 손권
[78]
서적
《삼국지》54권 오서 제9 여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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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18권 위서 제18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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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55권 오서 제10 감녕
[81]
서적
《헌제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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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2권 위서 제2 문제 조비 황초 3년
[83]
서적
《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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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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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36권 촉서 제6 관우
[86]
서적
《[[송서]]》42권 열전 제2 유목지(劉穆之), 53권 열전 제13 유등지(庾登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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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23권 위서 제23 조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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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27권 위서 제27 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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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17권 위서 제17 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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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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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국지》17권 위서 제17 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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