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푸이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국 황제를 지낸 인물이다. 1906년 순친왕 재풍의 아들로 태어나 1908년 서태후의 지명으로 2세 10개월의 나이에 선통제로 즉위했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 자금성에서 퇴위 후 우대 조항에 따라 생활하다가, 1917년 잠시 복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일본의 지원을 받아 만주국 황제로 즉위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과 함께 만주국이 붕괴되면서 소련군에 체포되었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증언한 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이송되어 전범으로 수감되었고, 1959년 사면되었다. 이후 중국과학원 정원사, 전국정치협상회의 위원 등을 지내며 자서전 《나의 전반생》을 저술했다. 1967년 문화대혁명 시기에 사망했으며, 2004년 묘호 '공종', 시호 '민황제'가 추증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중국의 파시스트 - 왕징웨이
왕징웨이는 청나라 말기 혁명 운동에 참여했던 중국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였으나, 중일 전쟁 시기 일본과 협력하여 친일 정부를 수립,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으며 논쟁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 20세기 중국의 군주 - 광서제
광서제는 도광제의 손자이자 순친왕 혁현의 아들로, 1875년 청나라의 황제가 되었으며, 서태후의 섭정 아래 무술변법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유폐된 채 사망했다. - 20세기 중국의 군주 - 위안스카이
위안스카이는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에 걸쳐 군인,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청나라 멸망을 주도하고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이 되었으나, 황제 즉위 시도 실패 후 사망하여 독재적 통치와 군벌 시대 개막이라는 비판을 받는 인물이다. - 푸이 - 장훈복벽
장훈복벽은 1917년 장훈이 폐지된 청나라 황제 푸이를 다시 옹립하려다 돤치루이의 토역군에 의해 진압되어 실패한 사건으로, 중국 군벌 시대를 심화시키고 쑨원의 호법운동을 촉발했다. - 푸이 - 바오딩 육군군관학교
바오딩 육군군관학교는 1902년 청나라 말기에 바오딩에 설립되어 위안스카이의 신군을 훈련시키고 신해혁명에 기여했으며, 장제스, 바이충시 등 주요 인물을 배출하고 1923년 폐교되었다.
푸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아이신 교로 푸이 |
출생일 | 1906년 2월 7일 |
출생지 | 순친왕부, 베이징, 중국 |
사망일 | 1967년 10월 17일 |
사망지 | 베이징 협화의과대학 병원, 베이징, 중국 |
매장지 | 바바오산 혁명 공원, 이후 허베이성, 이현의 화룽 황제 묘지에 재매장 |
배우자 | 고불로 완룽 (1922년 결혼, 1946년 사망) 에르데트 원슈 (1922년 결혼, 1931년 이혼) 탄위링 (1937년 결혼, 1942년 사망) 리위친 (1943년 결혼, 1957년 이혼) 리수셴 (1962년 결혼) |
배우자 유형 | 정실 |
가문 | 아이신 교로 가문 |
왕조 | 청나라 (1908–1912년, 1917년) 만주국 (1932–1945년) |
아버지 | 재풍, 1등 순친왕 |
어머니 | 구왈기야 유란 |
종교 | (정보 없음) |
직업 | (정보 없음) |
서명 유형 | 인장 |
![]() | |
중국어 정보 | |
간체 | 溥仪 |
번체 | 溥儀 |
병음 | Pǔyí |
웨이드-자일스 | P'u³-i² |
주음 부호 | ㄆㄨˇ ㄧˊ |
대체 이름 | 선통제 |
간체 (선통제) | 宣统帝 |
번체 (선통제) | 宣統帝 |
병음 (선통제) | Xuāntǒng Dì |
웨이드-자일스 (선통제) | Hsüan¹-t'ung³ Ti⁴ |
주음 부호 (선통제) | ㄒㄩㄢ ㄊㄨㄥˇ ㄉㄧˋ |
광둥어 발음 (선통제) | syun¹ tung² dai³ |
만주어 | |
청나라 황제 (첫 번째 재위) | |
재위 기간 | 1908년 12월 2일 – 1912년 2월 12일 |
이전 군주 | 광서제 |
다음 군주 | 군주제 폐지 |
섭정 | 재풍 (1908–1911년) 융유황후 (1911–1912년) |
총리 | 이쾅 위안스카이 |
연호 | 청나라: 선통 (1909–1912년, 1917년) |
청나라 황제 (두 번째 재위) | |
재위 기간 | 1917년 7월 1일 – 1917년 7월 12일 |
섭정 | 장쉰 |
만주국 황제 | |
재위 기간 | 1934년 3월 1일 – 1945년 8월 17일 |
이전 군주 | 본인 (행정장관) |
다음 군주 | 지위 폐지 |
총리 | 정샤오쉬 장징후이 |
연호 | 만주국: 대동 (1932–1934년), 강덕 (1934–1945년) |
만주국 행정장관 | |
임기 시작 | 1932년 2월 18일 |
임기 종료 | 1934년 2월 28일 |
총리 | 정샤오쉬 |
이전 직위 | 직위 신설 |
다음 직위 | 본인 (황제) |
기타 | |
시호 | 민황제 |
묘호 | 공종 |
만주국 황제 스타일 | |
호칭 | 폐하 His Majesty the Emperor His Imperial Majesty (H.I.M.) |
![]() | |
칭호 (중국어) | |
번체 | 清末帝 |
칭호 (일본어) | |
일본어 표기 | 康徳帝 愛新覚羅溥儀 |
다른 이름 | 호란 (号), 헨리 (영명) |
장례일 | 1995년 |
칭호 (만주어) | |
칭호 (몽골어) | |
몽골어 표기 | | Gehungge Yoso Han}} |
추가 정보 | |
자 | 요지 |
참고 | url=https://www.joongang.co.kr/article/1138224 |
2. 생애
중화권의 마지막 황제이자, 그의 일생을 소재로 한 영화 마지막 황제로 널리 알려져 있다. 2세의 어린 나이에 청나라 제12대 황제(선통제)로 즉위하였으나, 신해혁명으로 인해 퇴위하였다. 이후 장훈복벽으로 잠시 복위하기도 했지만 12일 만에 다시 실패로 끝났다.
청실우대조건에 따라 잠시 자금성에 머물렀으나, 1924년 북경정변으로 인해 자금성에서 쫓겨나 톈진의 일본 조계에서 일본 공관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했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 관동군의 계획에 따라 1932년 만주국의 집정으로 추대되었고, 1934년에는 만주국 황제(강덕제)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만주국 황제로서의 지위는 명목상이었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관동군에게 있었다. 그는 만주국군 대원수 및 만주국협화회 명예총재 등을 겸임했지만, 일본의 꼭두각시 통치자 역할에 머물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하면서 만주국은 해체되었고, 푸이는 퇴위하였다. 이후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었으며, 1950년부터 1959년까지 랴오닝성 푸순 전범관리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며 사상 개조 과정을 거쳤다.
1959년 특사로 석방된 후, 저우언라이의 지시에 따라 베이징 식물원에서 정원사로 잠시 근무하며 일반 시민으로서의 생활에 적응하는 기간을 가졌다. 이후 정협 문사연구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64년에는 만주족 대표로 정협 전국위원에 선출되어 베이징에서 생을 마감했다.
2. 1. 출생과 즉위
1906년 청나라 제11대 황제인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 짜이펑(載灃)과 서태후의 측근인 대학사 겸 군기대신 영록(榮祿)의 딸 유란(幼蘭) 사이에서 장남으로 순친왕부(醇親王府)에서 태어났다.



1908년 11월 14일 광서제가 아들 없이 붕어하자, 당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서태후는 푸이를 동치제와 광서제의 공동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로써 푸이는 2세 10개월의 나이에 청나라 제12대 황제인 선통제(宣統帝)로 즉위하게 되었다. 원래 청 왕조의 가법(家法)에 따르면 동치제가 죽었을 때, 항렬이 부(溥)자인 후손이 황위를 계승해야 했으나, 서태후가 권력을 놓지 않으려 동치제와 같은 항렬인 광서제를 황제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푸이는 선대 황제인 동치제와 광서제의 대를 동시에 잇게 되었다.
황제 지명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1908년 11월 13일 저녁, 예고 없이 내시와 경비병들이 푸이의 사저인 북쪽 저택(순친왕부)으로 와서 아버지 순친왕에게 푸이를 새로운 황제로 데려간다고 통보했다. 어린 푸이는 관리들이 자신을 데려가려 하자 울부짖으며 저항했지만, 부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국 푸이는 부모를 떠나기 싫다고 울부짖다 가마에 실려 자금성으로 향했다. 이때 푸이의 유모였던 왕련수(王連壽, 왕초씨)만이 그와 함께 자금성으로 갈 수 있었다.[117]
자금성에 도착한 푸이는 서태후를 만났다. 푸이는 훗날 이 만남에 대해 "희미한 기억만 가지고 있는데, 그 충격은 내 기억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는 갑자기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내 앞에는 초췌하고 무서운 끔찍한 얼굴이 보이는 칙칙한 커튼이 걸려 있었다. 바로 서태후였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걷잡을 수 없이 떨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태후는 누군가에게 사탕을 주라고 했지만, 나는 그것을 바닥에 던지고 '젖먹이 보모가 필요해요, 젖먹이 보모가 필요해요'라고 소리 질렀고, 그녀는 매우 불쾌해했다. '얼마나 버릇없는 아이인가,' 그녀는 말했다. '그를 데려다 놀게 하라.'"라고 회상했다.
서태후는 푸이를 만난 지 이틀도 채 되지 않은 11월 15일에 훙서(薨逝)했다.[1] 푸이의 생부인 순친왕은 감국섭정왕(監國攝政王)으로 임명되어 정치 실권을 위임받았다.
푸이의 즉위식은 1908년 12월 2일 베이징 자금성의 태화전에서 거행되었다. 어린 황제는 아버지 순친왕에게 안겨 용좌에 앉았다. 푸이는 눈앞에 펼쳐진 장엄한 광경과 귀청이 터질 듯한 의식용 북소리, 음악 소리에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섭정왕인 순친왕은 그를 달래며 "울지 마세요, 곧 끝납니다, 곧 끝나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들은 이를 대청제국의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고 한다.[117] 푸이는 자서전에서 "궁궐에 들어간 지 이틀 후, 서태후가 돌아가셨고, 12월 2일에 '대즉위식'이 거행되었는데, 나는 내 눈물로 그 의식을 망쳐 놓았다"고 회고했다.[2]
유모 왕련수는 푸이와 함께 자금성에 머물렀다. 푸이는 7년 동안 생모인 순친왕비 유란을 보지 못했고, 유모의 각별한 보살핌 속에서 성장했다. 푸이는 유모와 특별한 유대감을 형성했으며, 유모는 그를 통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유모는 푸이가 8살이 되자 궁에서 나가게 되었지만, 푸이는 결혼 후에도 때때로 그녀를 자금성으로 불렀고, 훗날 만주국 황제가 된 후에도 만남을 가졌다. 만주국 시절 들인 두 후궁, 탄옥령(명현귀비)과 이옥금(복귀인)은 유모가 소개해 준 인물들이었다. 1959년 푸이가 특별 사면된 후, 그는 유모의 양자를 방문하기도 했다.[3]
2. 2. 청나라 멸망과 퇴위
1911년 10월 10일, 우창 봉기로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1909년 순친왕에 의해 실각했던 위안스카이는 혁명 진압을 명분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청 조정은 위안스카이를 내각 총리대신에 임명했고, 이로 인해 푸이의 아버지인 섭정왕 순친왕은 실권했다.위안스카이는 쑨원이 이끄는 난징 임시정부로부터 임시 대총통 자리를 약속받고 청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1912년 1월 16일, 위안스카이는 융유 황태후(隆裕皇太后)에게 공화정 수용을 압박했고, 황족 회의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선기와 푸웨이(溥偉) 등은 퇴위에 반대했지만, 결국 융유 황태후는 퇴위를 결정했다. 2월 3일, 청 황실은 위안스카이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난징 임시정부와 퇴위 조건 협상을 진행하도록 했다. 2월 9일에는 황제 퇴위 후 우대 조항 8개, 청 황족 우대 조항 4개, 만주족·몽고족·회족·장족 우대 조항 7개가 확정되었다. 2월 11일, 황태후가 이 조건들을 수락했고, 2월 12일 자금성 양심전(養心殿)에서 마지막 조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황태후는 공화정 수립을 위해 황실의 통치권을 포기하고, 만주족·한족·몽골족·회족·티베트족의 5족으로 구성된 중화민국을 수립한다는 내용의 퇴위조서를 공표했다. 이로써 푸이는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고 286년간 중국을 통치한 청나라는 공식적으로 멸망했다.[118]
퇴위 후, 푸이는 "대청황제퇴위우대조건(關於大淸皇帝辭位後優待之條件)"에 따라 황제 존호를 유지하고 외국 군주에 준하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119] 이 조건에 따라 푸이와 황실은 자금성 북쪽 구역(내정)과 이화원에 거주할 수 있었으며,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매년 400만 냥(이후 400만 위안)의 세비를 받기로 했으나, 이 금액은 제대로 지급되지 않다가 몇 년 후 폐지되었다. 푸이는 한동안 자신이 퇴위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으며, 여전히 황제로 행세했다. 1913년 융유 황태후가 사망하자 위안스카이 대통령이 조문을 위해 자금성에 도착했는데, 푸이의 스승들은 이를 중대한 변화의 조짐으로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푸이는 위안스카이가 자신을 새로운 왕조의 황제로 옹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그 준비가 될 때까지 자신을 자금성에 머물게 하려는 속셈임을 알게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군악대를 동원하는 등 황제처럼 행동하기 시작했고, 푸이는 그를 "반역자"로 여기며 혐오했다. 푸이는 황실 옥새를 숨겨 위안스카이의 계획을 방해하려 했으나, 새로운 옥새를 만들면 그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915년 위안스카이는 스스로 황제를 선포했지만, 거센 반대에 부딪혀 곧 퇴위해야 했다.
1917년 7월 1일부터 12일까지 군벌 장쉰이 푸이를 다시 황제로 추대하는 복벽 사건(장훈복벽)을 일으켰다.[11] 장쉰은 자신의 군대에 변발을 유지하게 하며 청 황실에 대한 충성을 드러냈다. 하지만 당시 중화민국 국무총리였던 돤치루이는 코드롱 G.3 비행기를 동원해 판세충(潘世忠)이 조종하고 두유원(杜裕源)이 폭격수로 탑승하여 베이징 난위안 공항에서 이륙, 자금성에 폭탄 3개를 투하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환관 1명이 사망했고 그 외에는 경미한 피해만 발생했다.[12][13] 이는 중화민국 공군에 의해 기록된 최초의 공중 폭격이며, 전국적인 반대에 부딪혀 복벽 시도는 결국 12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14]
이후 푸이는 청실우대조건에 따라 자금성에 계속 거주했지만, 1924년 북경정변으로 인해 자금성에서 쫓겨났다. 처음에는 영국과 네덜란드 공사관에 보호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결국 톈진의 일본 조계로 피신하여 일본 공사관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2. 3. 정사복벽과 실패
1917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문제를 둘러싸고 중화민국 대총통 리위안훙과 국무총리 돤치루이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리위안훙이 돤치루이를 해임하자, 돤치루이는 자신을 따르는 군벌들을 부추겨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게 했다. 궁지에 몰린 리위안훙은 군벌 장쉰에게 병력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와서 중재해 줄 것을 요청했다.그러나 장쉰은 이를 청나라 황제 푸이를 복위시킬 기회로 삼았다. 그는 상투를 자르지 않은 군대, 이른바 '변자군' 3천 명을 이끌고 베이징에 입성하여 6월 30일 자금성에 들어가 복벽 계획을 논의했다. 심야에 장쉰의 군대는 기차역과 전신국 등 주요 시설을 점령했다.
7월 1일 새벽, 장쉰은 청나라 조복을 입고 캉유웨이 등과 함께 자금성에 들어가 푸이를 다시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이를 '정사복벽'(丁巳復辟) 또는 '장훈복벽'(張勳復辟)이라 부른다.[11] 장쉰은 공화제를 폐지하고 전제 왕정으로 되돌리는 정책들을 발표하며 스스로 의정대신과 북양대신 겸 직례총독에 올라 군권과 정권을 장악했다.
복벽 소식이 알려지자 쑨원은 상하이에서 이를 반역으로 규정하고 토벌령을 내리는 등 전국적으로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리위안훙 역시 복벽 협조를 거부하고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한편, 해임되었던 돤치루이는 일본의 재정 지원을 받아 7월 3일 톈진에서 군사를 일으켜 토벌에 나섰다. 돤치루이 군대는 베이징 난위안 공항에서 이륙한 고드롱 타입 D 비행기로 자금성에 폭탄 3개를 투하하는 등 공세를 펼쳤다.[12][13] 이 폭격으로 내시 1명이 사망했으며, 이는 중화민국 공군 최초의 공중 폭격으로 기록된다.[14]
돤치루이 군대의 공격에 장쉰의 군대는 쉽게 격파되었고, 장쉰은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도피했다. 결국 7월 12일, 복위한 지 불과 12일 만에 푸이는 다시 퇴위를 발표해야 했다. 7월 14일 돤치루이는 베이징에 입성하여 다시 정부를 장악했다.
2. 4. 자금성 생활과 서구화





1919년 3월 3일, 리홍장의 아들 리징마이(李經邁)의 권유로 영국인 레지널드 존스턴(Reginald Johnston, 중국명: 莊士敦, 1874년 ~ 1938년)이 푸이의 제사(帝師), 즉 황제의 스승으로 자금성에 들어왔다.[120]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출신으로 영국 식민성 관료였던 존스턴은 베이징어에 능통했으며, 처음에는 9품계 중 둘째 품계를 받았으나 1922년 푸이의 대혼은전(大婚恩典) 때 첫째 품계로 승급하여 중국 최고위 관리가 되었다.[121]
존스턴은 푸이에게 영어뿐 아니라 정치학, 헌법사, 세계사 등을 가르쳤고,[15] 특히 영국 역사와 군주제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그의 영향 아래 푸이는 서구 문물과 사상에 깊이 빠져들었다. 양복을 입고, 자전거를 타고, 안경을 쓰는 등 서양식 생활 양식을 받아들였고, 전화나 영어 잡지 등 유럽의 최신 수입품을 접했다. 존스턴은 푸이에게 '헨리(Henryeng)'라는 영어 이름을 지어주었지만, 푸이는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122] 존스턴은 푸이가 근시임을 처음으로 지적하고 논쟁 끝에 안경을 쓰도록 설득했으며, 전화 사용법을 알려주자 푸이는 베이징 시민들에게 무작위로 전화를 거는 데 빠지기도 했다. 푸이는 스스로 변발을 자르고 머리를 길렀으며, 존스턴의 모교인 옥스퍼드 대학교 유학을 꿈꾸기도 했다.[25] 존스턴은 푸이에게 5·4 운동과 같은 자금성 밖의 세상 소식을 알려주며 시야를 넓혀주었고, 자금성의 낭비적인 환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며 낭비를 줄이고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격려했다.[17] 푸이는 존스턴을 "내 영혼의 주요 부분"이라고 회상할 정도로 깊은 신뢰와 영향을 받았다. 존스턴은 푸이에 대해 "활기차고 지능적이며 유머 감각이 있는 매우 '인간적인' 소년"이라면서도, "그를 둘러싼 무의미하고 헛된 것들로 인해 [...] 내시와 다른 무능한 관리들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도덕적 위험에서 무사할 가능성이 없다"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17]
1922년 12월 1일, 푸이는 만주족 다우르족 출신의 완룽(郭布羅婉容, 1906년 ~ 1946년)을 황후로, 몽골족 출신의 원슈(鄂爾徳特文繍, 1909년 ~ 1953년)를 숙비(淑妃)로 맞이하여 자금성에서 대혼전례(大婚典禮)를 올렸다. 푸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관습이라며 숙비를 들이는 것에 반대했지만, 측근들의 권유로 한 명만 맞이하는 것에 동의했다. 황후 완룽은 저수궁(儲秀宮)에, 숙비 원슈는 장춘궁(長春宮)에 거처했다. 결혼 후 푸이는 청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인을 위한 비공식 합동 환영회를 열었다.[123] 완룽의 영어 교육을 위해 미국인 선교사의 딸이자 웰즐리 대학교 졸업생인 이사벨 잉그램(Isabel Ingram, 1902년 ~ 1988년)을 교사로 초빙했다. 잉그램은 완룽에게 '엘리자베스(Elizabetheng)'라는 영어 이름을 지어주었다. 푸이 자신도 영국이나 미국 유학을 준비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결혼 후 푸이는 자금성 내 개혁을 시도했다. 그는 황실 재산의 만연한 도둑질과 부패를 문제 삼았고,[6] 1923년 내무부에 재산 목록 작성을 요구하며 횡령 행위를 근절하려 했다.[124] 그러나 그해 6월 27일 새벽, 황실 창고 중 하나인 건복궁(建福宮)에 큰 화재가 발생했다. 이는 재산 조사를 앞두고 부정 행위를 은폐하려던 환관들의 방화로 여겨진다.[125][7] 신변의 위협을 느낀 푸이는 7월 15일, 중화민국 정부와 북양군의 지원을 받아 천여 명에 달하는 환관 대부분을 해고했다.[126][7] 이후 내무부 총관으로 정샤오쉬(鄭孝胥)를 임명하고[127] 봉계서(佟繼煦)를 참모총장으로 삼는 등 외부 인사를 영입하여[7] 자금성의 경비 삭감과 근대화를 추진했다.[127] 그러나 이러한 개혁 노력은 1924년 북경정변으로 푸이가 자금성에서 쫓겨나면서 오래가지 못했다.[8]
푸이는 자선을 베푸는 것을 좋아하여 베이징의 빈민 구호 기금이나 중국 각지의 자연재해 이재민을 위해 많은 액수를 익명으로 기부하였다.[128] 1923년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자 20만달러 이상의 지진 구호 기금을 요시자와 겐키치(芳沢謙吉) 일본 공사에게 전달했는데, 존스턴은 푸이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떠한 정치적 동기도 없었다고 단언하였다.[128]
2. 5. 자금성 추방과 톈진 체류
1924년 11월 5일 오전 9시경, 펑위샹의 부하인 루종린은 군대를 이끌고 자금성 신무문으로 진입하여 경비 부대를 무장 해제시키고 해산시켰다. 루종린은 내무부를 찾아 푸이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세 시간 안에 자금성에서 나갈 것을 명령했다. 동시에 기존의 청실우대조건을 수정한 새로운 안을 즉시 승인하라고 압박했다.[129] 결국 오후 3시, 푸이와 청 황실은 자금성을 떠나 부친인 순친왕(醇親王)의 저택인 순친왕부로 거처를 옮겼다.당시 푸이의 스승이었던 존스턴은 수정된 우대 조건에 중화민국 정부가 약속을 지키겠다는 보장이 전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실제로 기존 우대 조건에 명시된 연금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고 있었기에, 존스턴은 이 수정안이 단지 국내외 여론을 속여 황제가 공정하고 관대한 대우를 받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기만책이라고 비판했다.[130]
자금성에서 쫓겨난 푸이는 처음에는 영국과 네덜란드 공관에 보호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일본 공관의 도움을 받아 톈진의 일본 조계로 피신했다. 1925년 2월, 푸이는 톈진의 장원으로 이주했고, 1929년에는 정원으로 거처를 옮겼다.[33] 톈진은 당시 상하이 다음으로 국제적인 도시였으며, 푸이는 여러 외국인 사교 클럽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영국 기자 헨리 우드헤드는 푸이 부부가 개를 매우 좋아하여 여러 마리를 길렀으며, 푸이의 측근들은 끊임없이 서로 다투었다고 기록했다.
톈진 체류 기간 동안 푸이와 그의 고문인 천바오천, 정샤오슈, 뤄전위 등은 청나라 복위 계획을 논의했다. 정샤오슈와 뤄전위는 외세의 힘을 빌리는 것을 선호했지만, 천바오천은 반대했다. 1925년 6월, 만주 군벌 장쭤린이 톈진을 방문하여 푸이를 만났다. 장쭤린은 푸이에게 절을 하고 자금 지원을 받는 대가로 청나라 복원을 약속하며, 일본을 믿지 말라고 우회적으로 경고했다. 그러나 푸이는 여러 군벌과 접촉하며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로 인해 장쭤린과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푸이는 "개고기 장군"으로 불리던 군벌 장종창과 러시아 망명 장군 세묘노프 등과도 만났다. 이들은 복위를 미끼로 푸이에게 돈을 요구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고 돈만 가로챘다.
한편, 일본은 푸이에게 꾸준히 접근했다. 특히 일본군 장교 도이하라 켄지는 유창한 중국어와 아첨으로 푸이의 환심을 사며, 만주를 발판 삼아 중국 전체를 정복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푸이가 구호품을 기증한 것을 계기로 일본 외교관들이 자금성을 방문했을 때부터, 일본 측은 푸이가 허영심 많고 유순하여 이용하기 쉽다고 판단하고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928년, 국민당의 북벌 과정에서 청나라 황릉이 도굴당하고 서태후의 시신까지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소식은 푸이를 크게 분노하게 했으며, 그는 장제스를 비롯한 국민당에 대한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 사건은 또한 자신의 무력함을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톈진에서의 생활은 종종 지루함과 사치로 채워졌다. 푸이는 "피아노, 시계, 라디오, 서양 옷, 가죽 신발, 안경" 등을 끊임없이 사들이며 공허함을 달래려 했다. 황후 완룽과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어 식사 시간 외에는 거의 따로 시간을 보냈고, 완룽은 아편에 의존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푸이는 회고록에서 자신이 복위에만 몰두하여 아내에게 무관심했으며, 아내와 후궁을 주인에 대한 노예나 도구처럼 여겼다고 술회했다.[37] 완룽은 황후로서의 제약과 무의미한 의식에 불만을 터뜨렸고, 서구적인 생활방식을 추구했지만 보수적인 측근들과 갈등을 빚었다. 결국 1931년, 후궁 웬슈는 푸이와 궁중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집을 나가 이혼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2. 6. 만주국 집정과 황제 즉위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은 선양 교외 류탸오후에서 남만주철도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 장쉐량 군대의 소행으로 몰아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만주사변).[83] 이는 관동군이 만주 침략을 위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관동군은 5일 만에 랴오둥, 지린 성 대부분을 장악하고, 9월 21일에는 하야시 센주로가 이끄는 조선 주둔군까지 독단적으로 국경을 넘어 만주로 진입했다. 일본 정부는 군사 행동을 추인하면서도 확전 방지 방침을 발표했지만, 관동군은 이를 무시하고 전선을 확대했다. 1932년 2월까지 만주 전역의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당초 만주와 몽골 지역 영유를 계획했던 관동군은 국제 여론을 의식하여 괴뢰국가 수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1931년 10월 <만몽공화국 통치대강안>을 마련하고, 11월에는 톈진에 망명 중이던 푸이를 만주국의 수장으로 추대할 준비를 시작했다. 관동군 특무기관장 도이하라 겐지는 푸이에게 만주국 원수 취임을 제안했다. 오랫동안 청조 복벽을 열망해왔고, 특히 동릉 사건 이후 국민당 정부에 대한 반감이 컸던 푸이는 '청조 복벽'을 조건으로 도이하라의 제안을 수락했다.
1931년 11월, 푸이는 관동군의 보호 아래 톈진을 탈출하여 11월 13일 잉커우를 거쳐 뤼순의 야마토 호텔에 도착했다.[90] 이후 관동군과 협력하던 숙친왕 선기의 딸 가와시마 요시코가 톈진에 남아있던 황후 완룽을 뤼순으로 데려왔다. 쑹쯔원 등 국민정부 유력자들은 푸이의 결정을 번복시키려 했으나, 푸이는 이를 거부했다.
1932년 2월 18일, 장징후이를 위원장으로 하는 동북행정위원회가 중화민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푸이는 만주국 건국 논의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1932년 3월 1일, 만주국 건국이 선포되었다. 수도는 창춘을 신징으로 개명하여 정했고, 연호는 '대동'으로 정했으며, 만주족, 일본인, 한족, 몽골족, 조선인의 '오족협화'를 기치로 내걸었다.
1932년 3월 9일, 푸이는 만주국 집정에 취임했다. 그는 황제보다 격이 낮은 '집정'이라는 지위에 불만을 품고 끝까지 황제 즉위를 주장했지만, 관동군은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푸이는 일본 장교들이 자신을 '폐하'가 아닌 '각하'로 부르는 것에 격분했다고 전해진다.[91] 같은 해 5월, 국제연맹에서 파견한 리튼 조사단이 만주를 방문하여 푸이를 만났지만, 푸이는 관동군의 감시 아래 형식적인 답변만 할 수 있었다. 리튼 조사단은 보고서를 통해 일본군의 철수를 권고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1933년 3월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1934년)

(오른쪽 위, 1936년 2월 24일)



집정 취임 2년 후인 1934년 3월 1일, 푸이는 마침내 만주국 황제에 즉위하여 '''강덕제'''(康德帝)가 되었다. 국호도 만주 제국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아졌고, 연호는 '강덕'으로 바뀌었다. 즉위식에서 푸이는 관동군의 강권으로 만주국군 군복을 착용했지만, 그의 강력한 요구로 즉위식 전 고천례(告天禮)에서는 만주족 전통 용포를 입었다.[93] 그러나 만주국 정부는 이것이 청조 복벽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공식 발표했다.[93] 황궁은 집정 시절의 집희루(緝煕樓)를 사용하다가, 1938년 새 황궁으로 동덕전(同德殿)이 지어졌으나 푸이는 관동군의 도청을 우려하여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만주국 황제라는 칭호는 명목상이었고, 실권은 전적으로 관동군에게 있었다. 1932년 조인된 일만의정서에 따라 관동군은 만주국 관료 임면권과 국정 중요 사항 결정에 대한 승인권을 가졌다. 관동군 장교 요시오카 야스나오(吉岡安直)나 구도 타다시(工藤忠) 등이 항상 푸이를 감시하며 그의 행동과 발언을 통제했다.[54] 만주국 관직의 절반가량을 일본인이 차지했고, 만주국군 역시 사실상 관동군의 지휘 아래 있었다.
1937년 2월, 푸이는 관동군 사령관 우에다 겐키치와 "만주국 황제에게 남자 후계자가 없을 경우 일본 천황이 후사를 정한다"는 각서를 교환해야 했다.[94] 이는 사실상 푸이의 후계자를 일본이 결정하겠다는 의미였고, 이후 푸이는 관동군에 의한 암살이나, 자신을 친일 성향의 다른 황제로 교체하려는 시도를 이전보다 더욱 경계하게 되었다. 푸이는 1937년 만주족 탄위링을 측실(상귀인)로 맞았으나 그녀는 1942년 사망했다. 푸이는 관동군에 의한 독살을 의심했지만[58], 실제로는 병사였다는 증언도 있다. 이후 1943년 한족 리위친을 측실(복귀인)으로 삼았다.
만주국 초대 국무원 총리였던 정샤오쉬는 관동군의 과도한 간섭을 비판하다가 푸이의 황제 즉위 1년 만인 1935년 5월 사임했다. 일본 내에서도 관동군의 방식에 대한 비판이 있었는데, 겐요샤의 총수 도야마 미쓰루는 만주국 건국 초기부터 관동군의 개입을 우려했고, 1935년 푸이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초대를 거절하기도 했다.
일만 우호 증진과 만주국의 위신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푸이는 1935년 4월과 1940년 6월 두 차례 일본을 국빈 방문했다. 1935년 첫 방문 시에는 쇼와 천황이 직접 도쿄역까지 마중 나오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푸이는 일본 황실과 정부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았고, 일본 내에서도 높은 인기를 얻었다. 1940년 두 번째 방문은 황기 2600년 기념 행사 참석을 위해서였으며, 도쿄역에서 쇼와 천황과 다시 만나 악수를 나누었다.[96] 이 방문 이후 푸이의 제안으로 만주국 황궁 내에 건국신묘가 세워져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시고 궁성요배를 강요당하는 등, 만주국에 대한 일본의 종속은 더욱 심화되었다. 두 번의 방일 모두 황후 완룽은 동행하지 않았다.
1937년, 관동군의 주도로 푸이의 동생 푸계와 쇼와 천황의 친척인 사가 히로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푸이는 처음에 사가 히로를 관동군의 스파이로 의심했지만, 두 사람의 원만한 관계와 히로의 존중하는 태도에 점차 경계를 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자식이 없던 푸이는 관동군이 푸계 부부에게서 아들이 태어나면 자신을 폐위시키고 그 아이를 황제로 옹립할까 두려워했다.
2. 7. 만주국 붕괴와 소련군 포로 시기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얄타 회담에서의 연합국 간 비밀 협약에 따라 일소 중립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뒤, 곧바로 만주국 국경을 넘어 침공을 시작했다(소련-일본 전쟁, 만주 전략공세작전). 소련군은 동·북·서 세 방향에서 만주국의 수도 신징을 향해 진격했다. 당시 관동군은 주력 부대가 남방 전선으로 이동한 상태였고, 소련의 침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일본인 거류민들을 방치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는 푸이에게 소련의 침공 사실을 알렸으나, 곧 소련 공군의 폭격이 시작되었다.소련군의 진격이 계속되자 푸이와 만주국 정부는 8월 10일 수도 신징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8월 13일 조선 국경 근처인 통화성(通化省) 임강시(臨江市) 다리쯔로 피난했다.


8월 15일, 푸이는 라디오를 통해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들었다. 이틀 뒤인 8월 17일, 만주국 총리대신 장징후이 주재 하에 열린 국무원 회의에서 만주국의 해체가 결정되었고, 8월 18일 새벽 푸이는 다리쯔에서 퇴위 조칙을 발표하며 만주국은 건국 13년 만에 소멸했다.
푸이는 1945년 8월 19일 선양(당시 봉천)에서 비행기로 일본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비행장에서 소련 공수부대에 의해 체포되어 포로가 되었다. 푸이와 그의 동생 푸제, 그리고 측근들은 즉시 소련 영토 내로 이송되어 하바롭스크의 제45특별지구(장교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수감 생활 중 푸이는 중화민국으로 송환될 것을 두려워하여 스탈린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소련 망명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99][100] 그는 소련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신이 가진 보물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101] 한편, 푸이와 동행하지 못하고 따로 피난길에 올랐던 황후 완룽은 중국 공산당군에 체포되어 지린성 옌지의 감옥에서 아편 금단 증상과 영양실조로 1946년 6월 비참하게 사망했다.
1946년 8월, 푸이는 도쿄에서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에 검사 측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소련의 감시 하에 도쿄로 호송되어 8월 16일부터 증언했다. 푸이는 재판에서 자신이 일본 관동군의 강압에 의해 만주국 황제가 되었으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타가키 세이시로 등이 자신을 협박했으며, 일본이 만주를 식민지화하고 종교적 침략까지 시도했다고 증언하며 일본의 전쟁 책임을 강조했다. 또한 아내 완룽이 일본군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주장하며 일본군을 강하게 비난했다.
이에 대해 일본 피고 측 변호인단은 푸이가 만주국 건국 당시 일본과의 협력을 약속하는 친서를 보냈다는 증거(선통제 친서)를 제시하며 푸이 증언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푸이는 이 친서가 위조되었다고 주장했으나, 필적 감정 결과 푸이의 진필이라는 결론이 나왔다.[102] 또한 푸이의 스승이었던 레지널드 존스턴의 저서 《자금성의 황혼》 역시 푸이가 자발적으로 만주국 황제가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변호인 측 증거로 제출되었지만, 재판부는 명확한 이유 없이 이를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103] 푸이는 훗날 자서전 『나의 반생』에서 당시 처벌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죄와 관련된 역사의 진실을 은폐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푸이의 제수, 즉 푸제의 아내였던 사가 히로는 푸이의 증언이 소련의 영향으로 다소 과장되었을 수는 있으나 대체로 사실에 부합한다고 술회했다.[104]
2. 8. 중화인민공화국 수감과 석방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집권한 후, 소련과의 협상을 거쳐 1950년 푸이는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송환되었다.[77][78] 마오쩌둥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는 마지막 황제 푸이를 '구(舊) 중국 사회의 모순을 상징하는 인물'로 간주하고, 그의 성공적인 사상 개조를 통해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푸이는 공산주의자로 변화시키기 위한 "재교육"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1950년, 푸이는 다른 만주국 및 일본 포로들과 함께 기차에 실려 중국으로 보내졌다. 처형될 것을 예상했던 푸이는 의외로 친절한 중국 경비병들의 태도에 놀랐으며, 그들은 이것이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알렸다. 푸이는 생전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격식을 갖춘 경어 '닌'(您, nín)을 사용하며 상황에 적응하려 했다.


한국 전쟁 중 잠시 하얼빈으로 이송된 시기를 제외하면, 푸이는 랴오닝성의 푸순 전범관리소에서 약 10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이곳에는 과거 만주국과 국민당의 고위 관리 및 장교, 일본군 포로들이 함께 있었다. 황제로서 살아온 푸이는 기본적인 생활 능력조차 부족하여(스스로 옷을 입거나 신발 끈을 묶지 못하는 등) 초기에는 다른 수감자들의 조롱과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교도소장 진위안(金原)의 배려와 보호 속에서 점차 감옥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132] 수감 중이던 1951년에는 황후 완룽이 이미 1946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푸이의 "재교육"은 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학습, 그리고 과거 자신의 삶과 만주국 통치 시기의 과오에 대한 자아비판과 토론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만주국 시절 자행된 일본의 만행, 특히 731 부대의 생체 실험 등에 대한 강의를 듣고 관련 장소를 방문하며 큰 충격과 죄책감을 느꼈다. "모든 잔혹 행위가 내 이름으로 행해졌다"고 기록하며 괴로워했고, 한때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으나 교도소장의 권유로 자신의 감정과 반성을 글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때때로 과거 만주국 지역을 방문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는 기회도 가졌다. 일본 정착민에게 땅을 빼앗기고 공장에서 노예처럼 일했던 농민 등 피해자들의 증언을 듣고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들은 푸이가 자신의 과거를 깊이 반성하고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수감 기간 동안 푸이는 점차 모범적인 수감 생활 태도를 보였다.
1959년 12월 4일,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류샤오치는 특사령을 발표했고, 모범수로 인정된 푸이는 12월 9일 석방되었다.

석방 후인 1960년 1월 26일, 푸이는 수감 시절부터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던 저우언라이 총리와 중난하이에서 면담했다. 저우언라이는 푸이가 평범한 시민의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중국과학원 산하 베이징 식물원에서 정원사로 일할 것을 제안했다. 푸이는 1960년 2월부터 1961년 3월까지 식물원에서 근무하며 노동을 통한 사회 적응 과정을 거쳤다.[105] 이후 정협 문사연구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64년에는 만주족을 대표하는 전국위원으로 선출되어 정치 활동에도 참여했다.
2. 9. 석방 이후의 삶
1959년 12월 4일 당시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류샤오치가 발표한 전범 특사령에 따라 12월 9일 모범수로 석방되었다. 석방 후 1960년 1월 26일, 푸이는 중난하이에서 총리 저우언라이와 회담하여 석방 이후의 장래에 대해 논의했다. 일반 시민 생활에 익숙해지기 위한 목적으로 저우언라이의 추천을 받아 중국과학원이 운영하는 베이징 식물원에서 정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105] 이 근무는 일반 시민으로 융화되기 위한 명목적인 것으로 단기간에 끝났다.이후 정협 제4기 전국위원회 문사연구위원회(文史硏究委員會)의 전문위원이 되어 주로 문사 자료 연구를 수행했다. 푸이와 함께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동생 푸제(溥傑)도 1960년 11월 20일 석방되어 형제는 재회했다.
1962년에는 저우언라이의 배려로 한족 출신의 간호사 리수셴과 재혼하여 다섯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다.[106] 리수셴은 푸이의 말년을 함께 했지만, 고령이었던 탓에 자녀를 갖지는 못했다. 푸이와 푸제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관계가 원만해졌다.
1964년에는 다민족 국가가 된 중화인민공화국 내에서 만주족과 한족 간의 화합을 목표로 저우언라이의 뜻에 따라 만주족 대표로서 정협 전국위원으로 선출되어 사망할 때까지 위원직을 수행했다. 저우언라이는 푸이에게 항상 동정적이었다고 전해진다.
1964년 3월, 푸이의 유일한 자서전인 《나의 전반생》( 我的前半生중국어, From Emperor to Citizen영어)이 정식 출판되었다. 이 책은 푸이가 정치범으로 재교육을 받던 1957년 후반부터 약 1년간 집필한 20만 자 분량의 초고를 바탕으로 한다. 2007년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1964년판 출판 당시 삭제되었던 16만 자 분량(푸이의 이혼 및 사생활, 극동국제군사재판 관련 내용 등)이 새롭게 포함된 완전판이 출간되었다. 푸이의 남겨진 일기 단편은 『푸이 일기』(왕칭샹 편[110])로 출판되기도 했다.
2. 10. 사망
1966년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 푸이는 신장암을 앓게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황제라는 '반혁명적' 출신 때문에 홍위병의 공격을 두려워한 여러 병원에서 그의 입원을 거부했다. 당시 마오쩌둥의 지지를 받던 홍위병들은 푸이를 손쉬운 공격 대상으로 여겼고, 푸이는 현지 중국 공안부의 보호를 받았지만 식량 배급, 급여, 가구 등 여러 물품을 압수당했다. 다행히 공개적인 망신은 당하지 않았다. 홍위병들은 푸이의 자서전 『황제에서 시민으로』가 외국어로 번역된 것을 문제 삼아 거리에서 책을 불태우기도 했다. 푸제를 포함한 다른 청나라 황족들의 집도 습격당했지만, 저우언라이의 개입으로 푸이를 비롯한 황족들은 홍위병의 극심한 박해는 피할 수 있었다.결국 저우언라이의 주선으로 1966년 말 베이징의 반제 병원(현 베이징 협화의원)에 입원할 수 있었으나, 이미 암은 말기로 진행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푸이가 입원한 사실을 안 홍위병들이 병원에 몰려와 소란을 피우자, 의사들은 치료를 중단하고 푸이를 방치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저우언라이가 직접 병원장에게 연락하여 치료를 지시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푸이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고, 결국 1967년 10월 17일 새벽 2시 30분, 베이징에서 신장암과 심장병 합병증으로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84]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것을 묻자 "치킨라면"이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93][108]
당시 법에 따라 푸이의 시신은 화장되었고, 유골은 처음에는 베이징 교외의 바바오산 혁명묘지에 안치되었다. 이곳은 과거 황실 후궁과 환관들의 묘지였다. 1995년, 미망인 리수셴은 상업적 제안을 받아들여 푸이의 유골을 허베이성 이현에 있는 화룡황가릉원(华龙皇家陵园)[85]으로 이장했다. 이 묘지는 청나라 황제 4명과 황후, 왕족들이 묻힌 서청릉 근처에 위치하며, 베이징에서 남서쪽으로 약 120km 떨어져 있다. 이후 이 묘지에는 황후 완용과 귀인 탄옥령의 묘도 조성되었으나, 완용의 유골은 찾지 못해 유품만 묻혔다. 리수셴 자신은 바바오산 혁명묘지에 안장되었다.
2004년 애신각라 가문은 푸이에게 묘호 공종(恭宗), 시호 민황제(愍皇帝)를 추증했다. 황후 완용에게는 효각민황후(孝恪愍皇后), 후처 리수셴에게는 효예민황후(孝睿愍皇后)의 시호를 추증했다. 만주국 황제 시절 귀인이었던 탄옥령에게는 명현황귀비(明賢皇貴妃), 李玉琴|이옥금중국어에게는 돈숙복귀비(敦肅福貴妃)의 시호를 추증했다. 숙비 문수는 이혼으로 서민이 되었기 때문에 시호를 받지 못했다.[86]
3. 가족 관계
- '''증조부''': 선종 도광성황제(宣宗 道光成皇帝) 민녕(1782년 9월 16일 ~ 1850년 2월 25일)
- '''조부''': 순현친왕 혁현(醇賢親王 愛新覺羅奕譞, 1840년 10월 16일 ~ 1891년 1월 1일)
- '''양부''': 덕종 광서경황제(德宗 光緖景皇帝) 재첨(載湉, 1871년 8월 14일 ~ 1908년 11월 14일)
- '''생부''': 순친왕 재풍(醇親王 愛新覺羅載灃, 1883년 2월 12일 ~ 1951년 2월 3일)
- '''생모''': 순친왕대복진 유란(醇親王大福晋 瓜爾佳幼蘭, 1884년 ~ 1921년)
'''형제자매'''
구분 | 이름 | 원명 (개명) | 생몰년 | 비고 |
---|---|---|---|---|
남동생 | 푸계 | 푸제(溥傑) | 1907년 4월 16일 ~ 1994년 2월 28일 | 동복형제 |
푸궁 | 푸궁(溥倛) | 1915년 ~ 1918년 | ||
푸런 | 푸런(溥任) (진유즈 金友之) | 1918년 9월 21일 ~ 2015년 4월 10일 | 이복형제 | |
여동생 | 온영 | 온영(韞媖) | 1909년 ~ 1925년 | 동복남매 |
온화 | 온화(韞和) (김흔여 金欣如) | 1911년 ~ 2001년 | 동복남매 | |
온영 | 온영(韞穎) (김예수 金蕊秀) | 1913년 ~ 1992년 | 동복남매 | |
온한 | 온한(韞嫻) (김온한 金韞嫻) | 1914년 ~ 2003년 | ||
온형 | 온형(韞馨) (김예결 金蕊潔) | 1917년 ~ 1998년 | ||
온오 | 온오(韞娛) (부온오 溥韞娛) | 1919년 ~ 1982년 | ||
온환 | 온환(韞歡) (김지견 金志堅) | 1921년 ~ 2004년 |
'''배우자'''
구분 | 이름 (칭호) | 원명 | 생몰년 | 결혼 시기 | 비고 |
---|---|---|---|---|---|
황후 | 효각민황후 완용 | 궈부뤄 완룽(郭布羅婉容) | 1906년 11월 13일 ~ 1946년 6월 20일 | 1922년 | 아편 중독. 만주국 황후 시절 애인을 만들고 사생아를 출산했으나, 푸이의 명령으로 아이가 살해되었다는 설이 있음.[37] 만주국 붕괴 과정에서 생이별. |
숙비 | 숙비 악이덕특씨 문수 | 어얼더터 원슈(鄂爾徳特文繡) | 1909년 ~ 1953년 | 1922년 | 1931년 이혼. |
상귀인 | 담옥령 | 탄위링(谭玉龄) | 1920년 ~ 1942년 | 1937년 | 광서제의 진비 조카. 사별. |
복귀인 | 이옥금 | 리위친(李玉琴) | 1928년 ~ 2001년 | 1943년 | 1957년 푸이가 수감 중일 때 공식 이혼. 이후 재혼하여 두 아들을 둠. |
황후 (추존) | 효예민황후 이숙현 | 리수셴(李淑賢) | 1924년 9월 4일 ~ 1997년 6월 9일 | 1962년 | 푸이의 마지막 부인. 간호사 출신. 자녀 없음. 푸이가 발기부전으로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맺지 못했다고 주장.[106] |
'''자녀'''
4. 평가와 논란
중화권의 마지막 황제이자 영화 마지막 황제의 실제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진 푸이는 격동의 중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으며 극적인 삶을 살았다. 두 살에 청나라 황제(선통제)로 즉위했지만 신해혁명으로 퇴위했고,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황제(강덕제)가 되었다가 제2차 세계 대전 패전과 함께 다시 퇴위했다. 그의 삶은 개인의 의지를 넘어선 시대적 상황에 휘둘렸다는 동정론부터,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부역자라는 비판론까지 다양한 평가와 논란을 낳고 있다.
북경정변으로 자금성에서 쫓겨난 뒤 영국과 네덜란드 공사관에서 보호를 거절당하고 결국 일본 공사관의 보호를 받게 된 것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후 톈진의 일본 조계지에서 생활하며 일본과의 관계가 깊어졌고, 이는 결국 만주사변 이후 일본 관동군이 세운 만주국의 수장으로 추대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푸이 스스로 청나라 복위를 꿈꿨을지 모르지만, 만주국 황제로서 그는 실질적인 권한 없이 일본 관동군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만주국 통치 기간 동안 푸이는 일본의 침략 정책과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는 각종 법령에 서명하고 공식 행사에 참여하는 등 일본 제국주의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소련군에 체포되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을 때, 푸이는 자신이 일본의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주국 황제가 되었으며 모든 책임은 일본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푸이가 자발적으로 일본에 협력 의사를 밝혔던 정황 증거들이 제시되면서 그의 증언은 신뢰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훗날 푸이는 자서전 『나의 반생』에서 당시 처벌을 두려워하여 사실을 왜곡했음을 일부 인정하기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푸순 전범관리소에서 10년간의 사상 개조를 거쳐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푸이는 베이징 식물원의 정원사로 일하는 등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삶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말년에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위원으로 활동하며 만주족 대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주은래 총리는 몰락한 황제 푸이에게 개인적인 동정심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한편으로는 마오쩌둥 정권이 푸이를 사상 개조의 성공적인 사례로 선전하여 소련에 대한 체제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107]
결론적으로 푸이의 삶은 중국 마지막 황조의 몰락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격랑 속에서 개인의 선택과 시대적 한계가 복잡하게 얽힌 결과였다. 그의 행적과 역사적 책임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관련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4. 1. 일본과의 관계

1924년 펑위샹이 일으킨 북경정변으로 자금성에서 쫓겨난 푸이는 처음에는 영국과 네덜란드 공사관에 보호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관동 대지진 의연금 전달 등으로 안면이 있던 일본 공사 요시자와 켄키치에게 연락하여, 11월 29일 베이징 주재 일본 공사관으로 피신해 일본 정부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31] 당시 푸이의 영국인 가정교사였던 레지널드 존스턴은 푸이가 영국 공사관으로 가기를 원했지만, 일본 공사관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존스턴은 일본의 천황제를 영국의 입헌군주제보다 이상적으로 여겼고, 푸이에게 친일적인 영향을 주었다.
일본 정부는 중화민국에 대한 내정 간섭으로 비칠 것을 우려하여 푸이를 받아들이는 데 신중한 입장이었으나, 결국 1925년 2월, 푸이의 오랜 측근이자 친일 성향의 정샤오쉬와 일본 측의 주선으로 톈진의 일본 조계지로 거처를 옮겼다. 이는 러일 전쟁 이후 만주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노리던 일본 제국 육군(특히 관동군)과 푸이가 긴밀한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푸이는 톈진에서 일본군 장교 도이하라 켄지 등과 교류하며 복위의 꿈을 키웠다. 도이하라는 푸이에게 만주를 기반으로 중국 전체를 정복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1931년 9월 18일, 관동군은 남만주철도 폭파 사건을 조작하여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후 관동군 정보부장 도이하라 켄지는 푸이를 찾아가 새로 세울 만주국의 수장이 되어달라고 제안했다. 푸이의 사촌이자 일본의 스파이였던 카와시마 요시코도 푸이를 설득했다. 결국 푸이는 1931년 11월, 자동차 트렁크에 숨어 톈진을 탈출하여 일본의 보호 아래 뤼순으로 향했다. 도착 후 그는 일본 헌병대 장교이자 악명 높은 아마카스 마사히코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1932년 3월 1일, 푸이는 만주국의 집정으로 추대되었으나, 이는 일본의 완전한 통제하에서 이루어졌다. 관동군 장군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푸이에게 새 국가는 공화국이며 수도는 창춘(신징으로 개칭)이고, 푸이의 칭호는 황제가 아닌 집정이라고 통보했다. 이는 황제 복위를 꿈꾸던 푸이를 실망시켰으나, 이타가키는 만주국이 군주제로 이행될 것이며 일본이 중국 전체를 정복할 때 푸이가 다시 황제가 될 수 있다고 암시하며 그를 회유했다. 만주국의 조직법상 푸이는 총리와 대신을 임명할 수 있었지만, 1932년 조인된 일만의정서에 따라 차관 이하 관료 임명권과 국정 중요 사항 결정권은 사실상 관동군에게 있었다. 관동군 장교 요시오카 야스나오와 구도 다다시 등이 항상 푸이를 감시하며 그의 행동과 발언을 통제했다. 만주국 관직의 절반가량을 일본인이 차지했으며, 독자적인 군대나 국적법도 없는 등 만주국은 일본의 완전한 괴뢰국이었다.
1934년 3월 1일, 푸이는 만주국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정하고 강덕제가 되었다. 즉위식에서 푸이는 만주족의 전통 용포를 입고 싶어 했으나, 관동군의 압력으로 만주국 군복을 입어야 했다. 다만 즉위식 전 조상에게 고하는 의식에서는 용포를 입었다. 황궁으로는 1938년 동덕전(同德殿)이 새로 지어졌지만, 푸이는 관동군의 도청을 의심하여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푸이는 일본의 꼭두각시 황제로서 실권 없는 삶을 살았다. 1935년에는 만주국의 실권을 장악한 관동군을 비판하던 초대 국무총리 정샤오쉬가 강제로 사임당했다. 일본 내에서도 관동군의 과도한 개입과 실권 없는 푸이의 황제 즉위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아시아주의자 도야마 미쓰루는 관동군의 폭주를 우려하며 1935년 푸이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초대를 거절하기도 했다.
1935년 4월과 1940년 6월, 푸이는 일본 쇼와 천황의 초청으로 일본을 국빈 방문했다. 이는 일만 우호 증진과 만주국의 위신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일본의 통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사였다. 두 번째 방문 이후 만주국에는 건국신묘가 세워져 일본의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시게 되었고, 만주국 국민들은 궁성요배와 아마테라스 숭배를 강요당했다.
1937년 2월, 푸이는 관동군 사령관 우에다 겐키치와 남자 후계자가 없을 경우 일본 천황이 후사를 정한다는 각서를 교환해야 했다.[94] 이는 사실상 푸이의 후계자를 일본이 결정하게 된 것으로, 푸이는 이후 관동군에 의한 암살이나 교체 위협을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같은 해, 푸이는 탄위링을 측실로 맞았으나 1942년 그녀가 사망하자 관동군에 의한 독살을 의심했고,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도 그렇게 증언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병사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1937년, 관동군의 주도로 푸이의 동생 푸제와 일본 사가 후작가의 딸이자 천황가의 친척인 사가 히로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이는 만주국 황실과 일본 황실의 혈연관계를 맺으려는 정략결혼이었다. 푸이는 처음 사가 히로를 관동군의 스파이로 의심했지만, 점차 경계를 풀었다. 그러나 자식이 없던 푸이는 푸제 부부에게 아들이 태어나면 자신이 폐위되고 살해될 것을 두려워했다고 자서전에서 술회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푸이는 일본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일본이 요구하는 각종 법령에 서명했는데, 여기에는 중국인 노동자를 강제 징용하여 만주국의 공장과 광산에서 노예처럼 부리도록 하는 법령도 포함되어 있었다.[62][63]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전쟁 수행에 협력한 행위로 비판받는다.
1945년 8월,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를 침공하자 만주국은 급격히 붕괴했다.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을 라디오로 들은 푸이는 다음 날 만주국 황제 자리에서 퇴위하고 만주국이 다시 중국의 일부가 되었음을 선언했다. 일본으로 도피하려던 푸이는 1945년 8월 16일 선양 공항에서 소련군에게 체포되었다.[75]
푸이는 소련 시베리아의 하바롭스크 등지에 억류되었다가 1946년 극동 국제 군사 재판(도쿄 재판)에 소련 측 증인으로 출석했다.[76] 그는 재판에서 자신이 일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며, 이타가키 세이시로 등 관동군에게 협박당해 황제 자리에 올랐다고 증언했다. 또한 일본이 만주를 식민지화하고 종교 침략을 했으며, 아내 탄위링이 일본군에게 독살당했다고 주장하며 일본의 전쟁 범죄를 규탄하고 모든 책임을 일본에 돌렸다.
그러나 피고 측 변호단은 푸이가 만주국 건국 당시 일본 육군대신에게 보낸 협력 의사를 담은 친서를 증거로 제시하며 증언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필적 감정 결과 친서는 푸이의 진필로 확인되었으나, 푸이는 이를 위조라고 주장했다.[102] 또한 푸이의 가정교사였던 레지널드 존스턴의 저서 『자금성의 황혼』도 푸이가 자발적으로 만주국 황제가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재판 자료로 채택되지 않았다.[103]
푸이는 훗날 자서전 『나의 반생』에서 도쿄 재판 당시 처벌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죄와 책임을 은폐하고 역사의 진상을 왜곡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의 동생 푸제와 결혼한 사가 히로는 푸이의 증언이 소련의 감시 하에 다소 과장되었을지라도 대체로 사실에 부합한다고 평가했다.[104] 푸이의 증언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고발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일본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4. 2. 만주국 통치
1931년 9월, 푸이(溥儀)는 일본 육군대신 미나미 지로에게 편지를 보내 퇴위 전 황위를 복직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83] 같은 해 9월 18일 밤, 일본 관동군은 남만주철도 선로 일부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 측의 소행으로 돌리는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를 구실로 관동군은 만주 전역을 점령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다.관동군 정보부장 도이하라 켄지는 푸이를 찾아와 그를 만주국 수장으로 추대할 것을 제안했다. 일본은 푸이가 이동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한 카페 직원에게 뇌물을 주어 푸이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 계획이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게 했다.[39] 황후 완룽은 푸이의 만주행 계획을 반역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잠시 망설이던 푸이는 도이하라의 주선으로 친일 성향의 사촌 여동생인 가와시마 요시코(동진, 東珍)를 만났다. 남성복과 군복 차림을 즐겨 입고 양성애자임을 공공연히 드러냈던 요시코는 푸이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31년 11월, 천진사변을 계기로 푸이와 정샤오슈는 만주국 건설 계획을 마무리하기 위해 만주로 이동했다. 푸이는 자동차 트렁크에 숨어 천진의 집을 빠져나왔다. 중국 정부는 그를 반역죄로 체포하려 했으나 일본의 보호를 뚫지 못했다.[58] 푸이는 일본 배를 타고 보하이 해협을 건너 뤼순으로 이동했다. 뤼순에서 그는 자신의 감시자가 될 아마카스 마사히코의 영접을 받았고, 남만주철도 회사 소유의 휴양지로 안내되었다. 아마카스는 1923년 아마카스 사건에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 그의 연인 이토 노에, 그리고 여섯 살 조카를 살해한 인물로, 푸이에게 만약 "천황의 적"이 된다면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이라고 암시하며 위협했다. 푸이의 옛 스승 천바오천은 베이징으로 돌아가 1935년 사망했다.[40]
만주에 도착한 푸이는 자신이 사실상 야마토 호텔에 감금되어 외부 출입이 제한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명목은 암살 위협으로부터의 보호였다. 천진에 남아 푸이의 결정에 반대하던 완룽은 친구 요시코의 거듭된 설득 끝에 남편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천진사변 6주 후 뤼순으로 건너왔다.
1932년 초, 이타가키 세이시로 장군은 푸이에게 새 국가는 공화국 형태이며, 자신은 수반(Chief Executive)이 되고, 수도는 창춘, 호칭은 "폐하(Your Imperial Majesty)"가 아닌 "각하(Your Excellency)"가 될 것이며, 통치의 정당성은 천명이 아닌 만주 주민의 "요청"에 기반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이는 하늘로부터 권위를 부여받는다고 믿었던 푸이의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되어 그를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다. 이타가키는 푸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협상의 여지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만주국이 군주제로 이행될 수 있으며, 일본이 중국 전체를 점령할 야심을 가지고 있다고 암시하며 푸이를 회유했다. 또한, 푸이의 최고 고문인 정샤오슈에게 만주국 총리직을 제안하며 일본의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다. 일본은 선전을 통해 푸이를 전통적인 유교적 성군이자 근대화를 통해 민중을 해방시킬 혁명가로 미화했다.[41]

결국 푸이는 일본의 제안을 수락했고, 1932년 3월 1일, 연호를 '''대동'''으로 하여 일본 제국의 괴뢰 국가인 만주국의 수반(집정)으로 취임했다. 당시 한 평론가 원원닝은 푸이가 "이유도 모르고 즐기지도 않으면서 세 번이나 황제가 되는 의심스러운 영예를 안았다"고 비꼬았다.[42] 푸이는 만주국이 시작일 뿐이며, 언젠가 베이징에서 황룡포를 가져와 다시 중국 황제로 즉위할 것이라 믿었다. 일본은 만주국 건국을 범아시아주의의 승리로 선전하며,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만주인, 몽골인의 "다섯 민족"이 새로운 문명을 열었다고 주장했다.

1932년 3월 8일, 푸이는 창춘에서 열린 취임식에 참석했다. 그는 당시 "희망과 증오에 너무 사로잡혀" "공포와 증오로 침묵하는 창춘 시민들이 나에게 주는 냉담한 위로"를 깨닫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영국 기자 우드헤드는 "공식적인 측면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정권에 열정을 느끼는 중국인을 만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푸이는 우드헤드와의 인터뷰에서 만주국을 "유교 정신으로" 통치할 계획이며 자신의 새로운 지위에 "매우 만족한다"고 말했다.
1932년 4월, 국제연맹의 리튼 조사단이 만주를 방문하여 일본의 침략 여부를 조사했다. 푸이는 조사단장 빅터 불워-리턴 백작과의 면담에서 영국 망명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바로 옆에 앉아 감시하는 이타가키 장군 때문에 "대중들이 나에게 오라고 간청했고, 내가 여기에 머무는 것은 전적으로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것이다"라고 거짓 증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완룽은 조사단의 중국 측 평가자였던 외교관 구웨이쥔에게 비밀리에 연락하여 일본 시녀들에게 감시당하는 비참한 생활을 토로하며 탈출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구웨이쥔은 이를 도울 수 없었다. 이는 완룽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그녀의 삶은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만주국 초기, 관동군이 "비적"이라 부르던 항일 게릴라들의 저항이 거셌다. 도이하라 장군은 게릴라 지도자 중 한 명인 마잔산 장군을 거액의 뇌물로 회유하여 국방장관으로 임명했지만, 이는 마잔산의 위장 투항이었고 그는 몇 달 후 다시 부대를 이끌고 항일 투쟁을 재개했다.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푸이의 충성심을 확인한 후에야 황제 칭호를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1933년 10월, 도이하라 장군은 푸이에게 황제가 될 것이라고 통보했지만, 옛 칭호인 "대청 황제"가 아닌 "만주국 황제"라는 점에 푸이는 실망했다. 동시에 도이하라는 "일본 천황은 당신의 아버지이며, 만주국에서는 관동군으로 대표되니 아버지처럼 복종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만주국은 건국 초기부터 높은 범죄율로 악명이 높았는데, 일본의 비호 아래 중국, 한국, 러시아계 범죄 조직들이 아편굴, 매춘굴, 도박장 등의 이권을 두고 다투었다.[44] 9개의 서로 다른 일본 정보/경찰 기관이 활동하며 자체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범죄 활동에 관여했다.[45] 1933년 하얼빈에서 프랑스계 유대인 피아니스트 사이먼 카스페가 러시아 파시스트당 조직원들에게 납치, 고문당한 뒤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고, 결국 범인들이 일본 제국 육군의 헌병대인 겐페이타이와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가 드러나면서 일본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다.[46] 이는 푸이가 만주 주민들을 혼란에서 구원했다는 일본의 선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47]
1934년 3월 1일, 푸이는 창춘에서 연호를 '''강덕'''으로 하여 만주국 황제로 즉위했다. 즉위식에는 그의 감시자인 아마카스 마사히코가 영화 촬영 감독을 가장하여 참석해 푸이가 정해진 각본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했다. 아편 중독과 반일 감정, 예측 불가능한 행동으로 인해 완룽은 즉위식에서 배제되었다. 푸이는 즉위식 복장 문제로 일본과 마찰을 빚었다. 일본은 만주국 군복 착용을 원했지만, 푸이는 전통적인 만주족 용포를 고집했다. 결국 타협안으로 즉위식 본 행사에서는 서양식 군복을 입고[48],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에서는 용포를 입었다.[49] 즉위식 초청장은 관동군이 발행했으며, 참석자의 70%가 일본인이었다.
일본은 만주국의 수도로 공업 도시 창춘을 선택하고 신징(新京)으로 개명했다. 푸이는 청나라의 옛 수도였던 선양(당시 봉천)을 원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신징에 궁궐이 없어 러시아 시대의 소금 세무서 건물을 개조한, 이른바 소금세궁(鹽稅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푸이는 이곳에서 사실상 죄수처럼 지냈으며 허락 없이는 외출도 할 수 없었다. 즉위 직후 아버지 순친왕이 방문하여 아들에게 일본에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라며 경고했다. 일본 대사관은 순친왕 환영 행사에 만주국 황실 근위대가 동원된 것에 대해 공식 항의하며 관동군의 통제권을 재확인시켰다.
푸이는 만주국 내 여러 지역을 시찰하고, 공장과 광산 개업식에 참석하며, 히로히토의 생일 축하연에 참석하는 등 일본이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일본의 현충일에는 항일 게릴라와 싸우다 죽은 일본군 병사들의 영혼을 기리는 일본식 추모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만주국 어린이들은 매일 수업 시작 전 도쿄를 향해 절하고 푸이의 초상화에 절하도록 강요받았다. 푸이는 이를 "황홀한" 일이라고 회고했지만, 이는 일본에 의해 강요된 행위였다.
일본이 법률 제정을 원할 때마다 관련 법안은 푸이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예외 없이 서명했다. 여기에는 일본인 이주민에게 광대한 토지를 제공하기 위해 중국 농민들의 땅을 몰수하는 법령이나 특정 사상을 "사상범죄"로 규정하는 악법들이 포함되었다. 푸이는 명목상 최고 통치자였으나 실제로는 일본의 만행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역할을 강요당했다. "오족협화"의 이상향으로 선전된 만주국은 실상 잔혹하게 통치되는 일본의 식민지였으며, 모든 정책은 일본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었다. 미국의 역사학자 카터 에커트는 관동군이 신징 시내 중심에 거대한 사령부를 둔 반면, 푸이는 공장과 도축장, 교도소, 홍등가 근처의 작고 허름한 소금세궁에 거주해야 했다는 점에서 권력의 실체를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52] 푸이 자신도 훗날 만주행을 "호랑이 입에 머리를 들이민 격"이었다고 회고했다.

1935년부터 1945년까지 관동군 고위 참모 장교였던 요시오카 야스노리[53]가 황실 담당 무관으로 파견되어 푸이를 감시하고 통제했다.[54] 이 기간 동안 푸이에 대한 여러 차례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58]
1935년, 푸이는 일본을 방문했다. 이 방문은 일본의 선전 활동에 적극 활용되었으며, 푸이는 히로히토 천황을 만났다. 히로히토는 푸이가 말 애호가라는 잘못된 정보에 따라 말을 선물했지만, 실제로는 말을 싫어했던 푸이를 위해 급히 마차를 준비해야 했다. 귀국 후 푸이는 미국인 홍보 전문가 조지 브론슨 리아를 고용하여 미국 정부의 만주국 승인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936년, 사이먼 카스페 살해 사건의 두 번째 재판에서 중국인 판사들이 범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푸이는 러시아 파시스트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사면을 거부했다. 그러나 결국 상급심의 일본인 판사들이 판결을 뒤집고 범인들을 석방했으며, 푸이는 이에 항의하지 못했다.[55] 이 사건은 만주국의 사법권이 일본에 종속되어 있음을 보여주었고, 국제 사회에서 만주국의 이미지를 더욱 실추시켰다.
1936년, 만주국의 한 성(省) 지사였던 령성(凌陞)이 일본의 간섭에 불만을 표했다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푸이가 요시오카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관동군 사령관 우에다 겐키치는 이미 처형이 집행되었다고 통보했을 뿐이다. 푸이는 무력하게 여동생과 령성의 아들 간의 약혼을 파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푸이는 불교와 유교 등 전통 종교에 심취하려 했으나 일본의 제지를 받았다.[56] 그의 주변 인물들은 점차 친일 인사들로 교체되었다.[57] 푸이의 삶은 일본이 준비한 법안에 서명하고, 기도하며, 점을 치고, 관제 행사에 동원되는 것으로 채워졌다.[58]
소금세궁에서의 감금 생활은 푸이를 극도로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는 변덕스러워져 때로는 깊은 무기력에 빠졌다가 갑자기 하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는 하인들에게 가혹한 규율을 적용하여 태형을 일삼았고, 식사량을 줄여 굶주리게 만들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어 고기와 살생을 금지했지만, 자신의 음식에서 벌레가 나오면 요리사를 매질하는 모순적인 행동을 보였다. 그는 만주국 신민 대다수가 자신을 증오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완룽은 남편을 경멸하여 하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흉내 내며 조롱하기도 했다.

1937년, 푸이의 남동생 푸제가 히로히토의 사촌인 사가 히로와 정략결혼을 했다. 푸이는 자신에게 아들이 없을 경우 후계자는 일본이 정한다는 협정에 서명하도록 강요당했다.[60] 푸이는 처음에는 사가 히로를 일본 스파이로 의심했지만, 그녀가 중국 문화에 동화되려는 노력을 보이고 푸제와의 관계가 원만하자 점차 경계를 풀었다. 같은 해, 푸이는 16세의 만주 귀족 탄위링을 후궁으로 맞이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푸이는 일본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938년,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한 총동원 체제를 강화하면서 푸이를 신격화하는 황제 숭배를 강요했다.[66] 이는 일본 본토와 식민지에서 천황 숭배를 통해 국민 동원을 용이하게 하려는 정책의 연장이었다. 같은 해, 왕징웨이를 수장으로 하는 친일 괴뢰 정권이 난징에 수립되면서 푸이가 다시 중국 전체의 황제가 될 것이라는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다. 푸이는 건강 염려증에 시달리며 일본이 자신을 불임으로 만들려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1935년, 완룽은 푸이의 운전기사와 불륜 관계를 맺어 임신했다. 푸이는 이 사실을 알고 분노했지만, 아기가 태어난 후 살해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 사건 이후 완룽은 아편에 더욱 의존하며 폐인처럼 지내게 되었다. 푸이는 자신의 비겁함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해 제대로 언급하지 못했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자 푸이 역시 일본을 따라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그러나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은 두 나라는 이에 대응하지 않았다. 전쟁 중 푸이는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 선전에 이용되어 일부 아시아 지도자들에게 모델로 제시되기도 했다.
1942년, 후궁 탄위링이 사망했다. 푸이는 관동군에 의한 독살을 의심했지만, 증거는 없었다. 이후 한족 출신의 리위친을 새로운 후궁으로 맞이했다. 만주국 총리였던 정샤오슈는 관동군의 간섭을 비판하다가 1935년 실각했다. 일본 내에서도 관동군의 독단적인 만주국 운영과 푸이의 허수아비 황제 즉위에 대한 비판이 있었다. 아시아주의자였던 도야마 미쓰루는 관동군의 폭주를 막지 못한 일본 정부와 군부에 항의하며 푸이의 방일 환영 행사 참석을 거부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국을 침공했다. 만주 전략공세작전으로 관동군은 급격히 무너졌다. 푸이는 소련군과 특히 몽골 인민군의 참전 소식에 공포에 질렸다. 8월 11일, 푸이는 황궁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8월 15일,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을 라디오로 들었다. 다음 날, 푸이는 만주국 황제 자리에서 퇴위하고 만주국이 다시 중국의 일부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마지막 조서를 발표했다.
푸이는 일본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선양의 공항에서 소련군에게 체포되었다.[75] 그는 아내 완룽과 후궁 리위친 등을 남겨둔 채 동생 푸제, 의사 등 소수의 인원만 데리고 비행기에 올랐었다. 중국 공산당 게릴라에게 붙잡힌 완룽은 아편 금단 증상과 정신 착란에 시달리다 1946년 6월 감옥에서 비참하게 사망했다. 푸이는 훗날 자서전에서 완룽이 오래전에 죽었다는 사실만 간략히 언급했다.
푸이는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겨졌다. 푸순 전범관리소에서 사상 개조를 거쳐 1959년 석방되었다. 이후 베이징 식물원 정원사로 잠시 일하다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문사연구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1964년에는 만주족 대표로 정협 전국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다 1967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주은래는 몰락한 황제 푸이에게 동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마오쩌둥은 푸이를 사상 개조의 성공 사례로 선전하여 소련에 대한 체제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107]
4. 3. 개인적 삶
푸이는 1922년 황후 완룽 및 후궁 웬슈와 결혼했다.[26] 결혼식 날 밤, 성 경험이 없고 여자에 대해 잘 몰랐던 푸이는 신방에서 도망쳐 지상의 평화궁에 아내들을 남겨두고 혼자 잠들었다. 푸이는 자서전에서 당시 자신은 복위에만 몰두했으며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아내와 후궁은 주인의 노예이자 도구로 여겼다고 술회했다.[37]초기에는 완룽, 웬슈와 함께 자전거를 타는 등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듯 보였으나, 점차 부부 관계는 악화되었다. 푸이는 석 달에 한 번 정도 완룽의 침실을 찾았으나 다음 날이면 매우 불쾌해했다고 전해진다. 환관들 사이에서는 푸이가 동성애자라는 소문도 돌았다.[27][28]
1931년, 후궁 웬슈는 푸이와 궁중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이혼을 요구하며 떠났다. 푸이는 평생 재혼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이혼에 합의했고, 이로써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이혼 경력이 있는 황제가 되었다. 웬슈는 이혼 후 위자료 소송을 통해 5.5만위안을 받았으나, 푸이의 성격과 궁정 내부 사정을 언론에 폭로하여 모든 칭호를 박탈당하고 평민이 되었다.[38]
황후 완룽과의 관계는 더욱 비극적이었다. 정신장애를 앓고 있던 완룽과 푸이는 사실상 부부 관계가 단절된 상태였다.[134] 완룽은 아편에 중독되었는데, 이는 친정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으며, 일본 군관과의 간통은 친정 오빠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고 푸이는 주장했다. 푸이에 따르면, 오빠는 1932년 완룽이 톈진에서 다롄으로 이동할 때 이익을 얻으려 여동생을 일본 군관에게 넘겼다.[134] 1935년 완룽이 일본 군관의 아이를 임신하자, 푸이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화로에 던져 살해했다. 완룽은 자신의 아이가 오빠 손에 자라는 줄 알고 양육비를 보냈으며, 1946년 지린성에서 사망할 때까지 아이가 살아있다고 믿었다.[133][134] 푸이는 자서전 초판에서 이 끔찍한 사실을 외국 독자들의 혐오감을 우려하여 삭제했다.[134] 푸이는 완룽과 이혼하려 했으나 일본과 관동군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34]
푸이는 1937년 친척의 소개로 17세의 만주족 여학생 탄위링을 후궁(상귀인)으로 맞이했다.[134] 그러나 탄위링은 1942년 원인 불명으로 갑자기 사망했다. 푸이는 관동군에 의한 독살을 의심했고, 도쿄 재판에서도 그렇게 증언했으나, 유족들은 병사였다고 주장했다.[134] 탄위링 사후에는 한족 출신의 리위친을 후궁(복귀인)으로 삼았다. 리위친은 푸이가 1959년 특사로 풀려날 때까지 5번이나 푸순 전범관리소를 찾았지만, 나이 차이와 환경 변화 등을 고려하여 1958년 이혼했다.[134] 푸이의 자서전 초판에서 리위친 관련 내용이 삭제된 것은 당시 당의 배려로 1962년 결혼한 리수셴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134]
1959년 특사로 풀려난 후, 푸이는 1962년 간호사였던 한족 여성 리수셴(李淑賢)과 재혼하여 사망할 때까지 함께했다. 푸이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그의 처남인 사가 히로시는 푸이에게 자녀가 없는 이유를 동성애 때문이라고 추측했으나, 마지막 부인 리수셴은 이를 부정하며 푸이가 발기부전이어서 정상적인 부부 관계가 불가능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유년기 궁중 생활 중 성적 학대를 겪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5. 대중문화 속의 푸이
푸이의 극적인 삶은 여러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소설, 만화, 뮤지컬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특히 이탈리아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연출한 1987년 영화 《마지막 황제》는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아카데미상 9개 부문을 수상했고, 푸이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아래는 푸이의 삶을 다루거나 그가 등장하는 주요 대중문화 작품 목록이다.
구분 | 제목 | 연도 | 제작 국가 | 감독/작가 | 푸이 역 배우 | 비고 |
---|---|---|---|---|---|---|
영화 | 《화룡》(火龍) | 1986년 | 중화인민공화국 / 홍콩 | 리한샹 | 양가휘 | 수용소 출소 후 리수셴과의 삶을 그림. |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 | 1987년 | 이탈리아 / 중화인민공화국 / 영국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 존 론 (성인) | 아카데미상 9개 부문 수상. 푸이의 일생을 다룬 가장 유명한 작품. | |
《유전의 황후》(流転の王妃) | 1960년 | 일본 | 류사쿠메이 | 푸이의 동생 푸제와 그의 아내 사가 히로의 시점에서 그려짐. | ||
《비극의 황후 라스트 엠프레스》(一代妖后) | 1985년 | 중화인민공화국 / 홍콩 | 장원 | 황후 완룽의 시점에서 만주국 시대를 그림. | ||
《아이신기오로 푸이》(愛新覺羅·溥儀) | 2005년 | 중화인민공화국 | CCTV 제작 | (다큐멘터리) | 푸이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 |
《건당위업》(建党伟业) | 2011년 | 중화인민공화국 | 황젠신, 한산핑 | 연뢰한 (아역) | 중국 공산당 창당 과정을 그린 영화. | |
《1911》 | 2011년 | 중화인민공화국 / 홍콩 | 성룡, 장리 | 소한예 (아역) | 신해혁명과 중화민국 건국을 다룬 영화.[87] | |
텔레비전 드라마 | 《조의 모험》(The Misadventure of Zoo) | 1981년 | 홍콩 | TVB 제작 | 정소추 (성인) | |
《산하연유》(山河燃ゆ) | 1984년 | 일본 | NHK 대하드라마 | 야마자키 도요코 원작 소설 기반. | ||
《말대황제》(末代皇帝) | 1988년 | 중화인민공화국 | 천다오밍 (성인), 주욱 (노년) | 푸이의 자서전 《황제에서 시민으로》를 바탕으로 제작. 동생 푸제가 자문. | ||
《비상공민》(非常公民) | 2002년 | 중화인민공화국 | 정호 | 황조장 | ||
《유전의 왕비 - 최후의 황제》(流転の王妃·最後の皇弟) | 2003년 | 일본 | TV 아사히 제작 | 왕보조 | 푸제와 사가 히로 부부의 이야기. | |
《말대황비》(末代皇妃) | 2003년 | 중화인민공화국 | 리야펑 | 황후 완룽의 삶을 그림. | ||
《말대황비〜자금성의 낙일〜》(末代皇妃) | 2004년 | 중화인민공화국 | 리야펑 | 두 번째 부인 문수의 일생을 그림. | ||
《리향란》(李香蘭) | 2007년 | 일본 | TV 도쿄 제작 | 왕위화 | 가수이자 배우 리샹란(야마구치 요시코)의 일생을 그림. | |
《남장의 미인〜카와시마 요시코의 생애〜》(男装の麗人〜川島芳子の生涯〜) | 2008년 | 일본 | TV 아사히 제작 | 고시마 마사노부 | 청나라 왕족이자 간첩이었던 카와시마 요시코의 생애를 그림. | |
《중생》(重生) | 2011년 | 중화인민공화국 | 양립신 | 네 번째 부인 리위친의 일생을 그림. | ||
《말대황제전기》(末代皇帝传奇) | 2015년 | 홍콩 / 중화인민공화국 | 조문탁 (성인) | 푸이의 일생을 다룬 59부작 드라마. | ||
《두 개의 조국》(二つの祖国) | 2019년 | 일본 | TV 도쿄 제작 | 오다 노부나리 | 야마자키 도요코 원작 소설 기반. 《산하연유》 리메이크. | |
소설 | 《중원의 무지개》(中原の虹) | 2006-2007년 | 일본 | 아사다 지로 | ||
《천자 먼지》(天子蒙塵) | 2016년 | 일본 | 아사다 지로 | 《중원의 무지개》의 속편. | ||
뮤지컬 / 연극 | 《자금성의 낙일》(紫禁城の落日) | 1991년 | 일본 | 다카라즈카 가극단 | 히나타 카오루 | |
《뮤지컬 이향란》(ミュージカル李香蘭) | 1991년 | 일본 | 극단 시키 | 앙상블 (야마구치 마사요시 등) | 리샹란의 삶을 다룬 뮤지컬. | |
만화 | 《그때 역사가 움직였다 코믹판》 세계영웅편 | 2005년 | 일본 | 카리나 쇼 (작화) | 동명 TV 프로그램 기반. 「마지막 황제 최후의 날」 에피소드 수록. | |
《지팡구》 | 2000-2009년 | 일본 | 카와구치 카이지 | 제2차 세계 대전 시대로 타임슬립한 해상자위대 이지스함 이야기. 푸이가 등장. |
이 외에도 푸이의 삶과 관련된 서적들이 다수 출간되었다.
- 구도 다다시(工藤忠) 저, 『황제 푸이(溥儀): 나는 일본을 배신했는가』(세계사(世界社), 1952년), ISBN B000JBBCCK
- 마키 히사시(牧久) 저, 『전생(転生) 만주국 황제 아이신교로 푸이(愛新覚羅溥儀)와 천황가의 쇼와』(쇼가쿠칸(小学館), 2022년)
- 왕칭샹(王慶祥) 저, 『마오쩌둥(毛沢東), 저우언라이(周恩来)와 푸이(溥儀)』(마쓰다 토오루(松田徹) 역, 과학출판사 도쿄(科学出版社東京), 2017년)
참조
[1]
서적
Politics in China: An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The Last Emperors: A Social History of Qing Imperial Institution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0]
서적
Manchus & Han: Ethnic Relations and Political Power in Late Qing and Early Republican China, 1861–1928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1]
서적
Modern China: A Guide to a Century of Change
Harvard University Press
[12]
서적
Stone of Heaven
[13]
웹사이트
段祺瑞轰炸故宫,让溥仪成为中国历史上唯一挨过轰炸的皇帝_张勋
https://www.sohu.com[...]
[14]
학술지
Science and Football III
Taylor & Francis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https://books.google[...]
[19]
서적
https://books.google[...]
[20]
서적
The Last Manchu
https://books.google[...]
Skyhorse
2010
[21]
서적
https://books.google[...]
[22]
서적
https://books.google[...]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26]
서적
The Last Manchu: The Autobiography of Henry Pu Yi (Kindle)
[27]
서적
The Last Eunuch of China
[28]
서적
The Last Eunuch of China
[29]
서적
[30]
서적
Pioneers of Modern China: Understanding the Inscrutable Chinese
World Scientific Publishing Company
[31]
서적
The Last Emperor of China and His Five Wives
[32]
서적
The Last Manchu: The Autobiography of Henry Pu Yi – Kindle
[33]
서적
The Last Emperor and His Five Wives.
[34]
서적
Hygienic Modernity: Meanings of Health and Disease in Treaty-Port China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35]
웹사이트
Illustrated London News – Saturday 25 June 1927 – A New Phase in China: Peking; And the Ex-Emperor
https://www.britishn[...]
[36]
서적
[37]
서적
The Last Manchu: The Autobiography of Henry Pu Yi, Last Emperor of China
[38]
서적
The Last Emperor and His Five Wives
[39]
서적
The Last Emperor
[40]
서적
Political Leaders of Modern China: A Biographical Dictionary
Greenwood
[41]
서적
[42]
서적
Emperor Malgré Lui
Cambria Press
[43]
뉴스
Manchukuo Ruler Movie Enthusiast; Former Emperor of 450,000,000 Chinese Also Is Devotee of Still Photography.
https://www.nytimes.[...]
1933-11-08
[44]
서적
[45]
서적
[46]
서적
[47]
서적
[48]
서적
[49]
서적
[50]
서적
[51]
웹사이트
Time magazine March 1934
https://upload.wikim[...]
[52]
서적
[53]
웹사이트
Yasunori Yoshioka, Lieutenant-General (1890–1947)
http://www.generals.[...]
Steen Ammentorp, Librarian DB., M.L.I.Sc.
2010-08-17
[54]
서적
[55]
서적
[56]
서적
[57]
서적
[58]
학술지
Henry Pu Yi
1945-07-19
[59]
서적
The Last Manchu
[60]
서적
[61]
서적
[62]
서적
[63]
서적
[64]
서적
[65]
서적
[66]
서적
[67]
뉴스
Cover-up over death of adulteress empress' baby detailed
[68]
뉴스
Baby killer secret of the last emperor revealed
https://www.thetimes[...]
[69]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 1: The Qing Period, 1644–1911
[70]
서적
The Last Emperor
[71]
서적
[72]
서적
[73]
서적
[74]
서적
The Last Emperor and His Five Wives
[75]
뉴스
Li Shuxian, 73, Widow of Last China Emperor
1997-06-11
[76]
뉴스
Former Manchurian Puppet
1946-08-16
[77]
뉴스
Russia Giving Puyi to China
1946-03-27
[78]
뉴스
Last Manchu Ruler Grateful to Jailers
1956-12-30
[79]
서적
The Thought of Mao Tse-Tu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80]
웹사이트
Pu Yi's Widow Reveals Last Emperor's Soft Side
https://web.archive.[...]
The Hartford Chronicle
1995-04-08
[81]
서적
My husband Puyi: The last emperor of China (English Version)
[82]
서적
From Emperor to Citizen: The Autobiography of Aisin-Gioro Pu Yi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83]
서적
Two Homelands
University of Hawaii Press
[84]
뉴스
Pu Yi, Last Emperor of China And a Puppet for Japan, Dies. Enthroned at 2, Turned Out at 6, He Was Later a Captive of Russians and Peking Reds.
https://select.nytim[...]
1967-10-19
[85]
웹사이트
Burial Plot of China's Last Emperor Still Holds Allure
https://web.archive.[...]
[86]
서적
Forbidden City: The Great Within
Odyssey
[87]
웹사이트
1911 Movie at IMDB
https://www.imdb.com[...]
[88]
웹사이트
清朝皇帝の末裔は日本で眼科医 「日中のつながり広げたい」
https://www.sankei.c[...]
産経ニュース
2022-02-05
[89]
서적
紫禁城の黄昏
2019-06-12
[90]
웹사이트
旅順黄金山溥儀楼(大連観光名所、2018年)
http://www.dlachikoc[...]
[91]
웹사이트
末代皇帝的墨鏡與認同危機(下)
https://paper.udn.co[...]
聯合電子報
2018-03-14
[92]
서적
葛山鴻爪 (小磯日記)
2019-06-12
[93]
웹사이트
「ラストエンペラー」溥儀の没後50年。波乱の生涯をふり返る
https://www.huffingt[...]
The Huffington Post
2017-10-09
[94]
서적
歴史群像シリーズ 満洲帝国
学研
2019-06-12
[95]
뉴스
満州国皇帝・溥儀もてなしたグラスや皿初公開 奈良ホテル
https://www.sankei.c[...]
2014-12-10
[96]
뉴스
日本ニュース 第3号
https://www2.nhk.or.[...]
1940-06-26
[97]
뉴스
溥儀 幻の救出劇
2003-08-04
[98]
서적
シベリア抑留全史
原書房
[99]
서적
昭和史講座
2019-06-12
[100]
서적
末代皇帝的非常人生
人民文学出版社
2019-06-12
[101]
뉴스
溥儀の財宝150点の写真/宝飾品 ソ連抑留中に差し出す
2018-03-20
[102]
서적
筆蹟及び文書鑑定法
立花書房
[103]
웹사이트
満州は日本の侵略ではない
http://www.web-will.[...]
[104]
서적
「流転の王妃の」の昭和史
主婦と生活社
1984-11-25
[105]
저널
溥傑氏と浩夫人への周総理の配慮
http://www.peoplechi[...]
[106]
서적
わが夫、溥儀
2019-06-12
[107]
서적
The Last Emperor
Futura
1987
[108]
웹사이트
愛新覚羅溥儀のまわりを見れば、日本史と中国史がわかる
https://wondertrip.j[...]
アルゴリズム
2022-09-18
[109]
뉴스
「ラストエンペラー」とその時代を知る 溥儀研究院が中国・長春に設立
https://www.afpbb.co[...]
AFP
2017-09-30
[110]
서적
毛沢東、周恩来と溥儀
科学出版社
2017
[111]
간행물
愛新覚羅溥傑への名誉法学博士号贈呈の経緯
立命館大学千葉校友会サイト「ちば校友の集い」
[112]
간행물
立命館日満高等工科学校 - 理工学部前史の一齣 -
「立命館百年史紀要・第二号(1994年3月)」
1939-03-16
[113]
웹인용
청조 최후의 황제 부의사망
https://www.joongang[...]
1967-10-19
[114]
웹인용
≪경기인터넷신문≫ 중국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의 여인들4
http://www.gginews.c[...]
2015-03-17
[117]
서적
대청제국 12 군주열전
2007
[118]
서적
구룡배의 전설
2001
[119]
서적
구룡배의 전설
[120]
서적
자금성의 황혼
돌베개
2008
[121]
서적
자금성의 황혼
[122]
서적
자금성의 황혼
[123]
서적
자금성의 황혼
[124]
서적
자금성의 황혼
[125]
서적
자금성의 황혼
[126]
서적
자금성의 황혼
[127]
서적
자금성의 황혼
[128]
서적
자금성의 황혼
[129]
서적
자금성의 황혼
[130]
서적
자금성의 황혼
[131]
서적
구룡배의 전설
[132]
서적
자금성의 황혼
[133]
뉴스
中 마지막 황후 日 군관에 능멸 당해 <푸이 자서전>
https://news.naver.c[...]
2006-12-10
[134]
뉴스
파란만장한 황후의 일생 큰 인기
http://news.khan.co.[...]
2006-12-22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현대미술 거장 '장 미셸 바스키아' 특별전 내달 개막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