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무라 사토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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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네무라 사토루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였다. 1994년 닛폰햄 파이터스에 1순위로 입단하여 1998년 최고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고, 1999년과 2000년에는 월간 MVP를 수상했다. 2006년에는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으나, 2007년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 후 부진하며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야구 평론가와 해설가, 코치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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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무라 사토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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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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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가네무라 사토루 |
본명 | 가네무라 히데오 |
출생일 | 1976년 4월 19일 |
출생지 | 미야기현 게센누마시 |
신장 | 187cm |
체중 | 83kg |
포지션 | 투수 / 코치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선수 경력 | |
데뷔 | NPB / 1995년 |
마지막 출장 | NPB / 2010년 6월 20일 |
드래프트 | 1994년 1순위 |
선수 | 닛폰햄 파이터스/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1995년–2007년) 한신 타이거스 (2008년–2010년) 시나노 그랜드세로우스 (2011년) |
코치 경력 | |
코치 | 한신 타이거스 (2016년–2022년) 이시카리 레드 피닉스 (2024년) 한신 타이거스 (2025년–) |
NPB 통계 | |
승-패 | 89-81 |
탈삼진 | 662 |
평균자책점 | 3.89 |
첫 출장 | 1995년 10월 4일 |
마지막 경기 | 2010년 6월 20일 |
수상 | |
수상 내역 | 1x 퍼시픽 리그 평균 자책점 챔피언 (1998년) 1x 일본 시리즈 챔피언 (2006년) 3x NPB 올스타 선정 (1998년, 2004년, 2005년) |
2. 선수 경력
1994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닛폰햄 파이터스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2] 1995년 루키 시즌에 1군에 승격되었지만, 단 1경기 등판에 그쳤다.[2] 1996년에는 1군 등판 없이 시즌을 마쳤고, 5월에 등록명을 "秀雄"에서 "暁"로 변경했다. 1997년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98년에는 구원 투수로 1군에 정착하여 올스타전에 처음으로 출전했다. 6월 말에 선발로 전환하여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 5완투를 기록하며 규정 이닝을 채우고 평균자책점 2.73으로 최우수 방어율을 획득했다.
1999년에는 개막 로테이션에 합류하여 2경기 연속 완봉승과 3경기 연속 완투승을 거두었다. 개막부터 27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고, 첫 월간 MVP를 획득했지만, 오른쪽 어깨 통증으로 이탈했다. 2000년에도 4월에 월간 MVP를 획득했지만, 다시 오른쪽 어깨 통증으로 이탈했다.
2001년에는 처음으로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았다. 부상 없이 1년 로테이션을 지켰지만 7승 13패, 평균자책점 4.89로 부진했다. 이후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어깨를 단련하여 부상 빈도가 줄었다.
2002년에는 개막부터 잠시 구원 투수였지만, 곧 로테이션으로 복귀하여 시즌 내내 활약했다. 처음으로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었고, 개인 최다인 143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2003년에는 전반기에 부진했지만, 후반기에 반등하여 2년 연속 10승을 달성했다.
2004년에는 니혼햄의 홈구장 이전 첫 해 삿포로 돔의 첫 경기에서 선발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다. 히어로 인터뷰에서 홋카이도 방언을 사용하여 "나마라 최고입니다!"라고 외쳐 팬들을 열광시켰다.[9] 이 말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관련 상품도 발매되었다. 개인 최다인 13승을 기록, 6년 만에 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
2005년에는 개인 최다인 174이닝을 던졌으며, 2년 연속 13승을 거두어 4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다. 올스타전에도 출전했지만, 등판은 없었다.[9]
2006년에는 사구 사건으로 신경통을 입어 4월 후반을 허비했지만, 5월 7일 복귀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다. 일본 시리즈 4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고, 2006년 아시아 시리즈에서도 승리에 기여했다. 오프 시즌에는 유바리시를 응원하기 위해 "가네무라·유바리 시트"를 설치했다.
2007년에는 팔꿈치 불안으로 커브 습득에 매진했지만, 5월에 부상으로 이탈했다. 7월에 복귀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전반기 최종전과 후반기에 부진하여 2군으로 강등되었다. 13경기에서 5승에 그쳤고, 투구 이닝도 8년 만에 100회를 넘지 못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벤치에 들어갔지만, 등판은 없었다.
2011년, 시나노 그란세로즈에서 뛰며 17경기에 등판해 2승 7패, 평균자책점 2.61을 기록했다.[4]
연도 | 구단 | 등판 | 승 | 패 | 세이브 | 완투 | 승률 | 투구 이닝 | 타자 | 피안타 | 피홈런 | 탈삼진 | 사사구 | 사구 | 실점 | 자책점 | 폭투 | 보크 | 실책 | 방어율 |
---|---|---|---|---|---|---|---|---|---|---|---|---|---|---|---|---|---|---|---|---|
2011 | 시나노 | 17 | 2 | 7 | 0 | 3 | .222 | 76.0 | 312 | 69 | 6 | 45 | 16 | 4 | 37 | 22 | 1 | 1 | 5 | 2.61 |
통산: 1년 | 17 | 2 | 7 | 0 | 3 | .222 | 76.0 | 312 | 69 | 6 | 45 | 16 | 4 | 37 | 22 | 1 | 1 | 5 | 2.61 |
2. 1. 프로 입단 전
초등학생 시절부터 닛폰햄 파이터스의 팬이었으며, 당시 에이스였던 니시자키 유키히로를 동경했다. 센다이 이쿠에이가쿠엔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1994년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미야기 대회 결승전에서 사쿠라이 유키히로가 소속된 센다이 공업고등학교를 누르고 우승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제76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8강에 진출하기도 했다.[2]같은 해 1994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닛폰햄 파이터스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고 입단했는데, 이 때 닛폰햄은 고후 공업고등학교의 야마무라 히로키를 1순위로 지명할 예정이었지만 드래프트 직전에 가네무라로 변경했다.[2] 입단 기자회견에서는 햄을 입안에 가득 넣어 먹는 행동을 보였다.
2. 2. 닛폰햄 시절
1995년 루키 시즌에 1군에 승격되었지만, 단 1경기 등판에 그쳤다.[2]이듬해인 1996년에는 1군 등판 없이 시즌을 마쳤다. 같은 해 5월에 등록명을 "秀雄"에서 "暁"로 변경했다.
3년차인 1997년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98년에는 개막부터 구원 투수로서 1군에 정착하여,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6월 말에 선발 등판하여 그대로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 5완투도 기록했다. 135이닝으로 간신히 규정 이닝에 도달, 평균자책점 2.73으로 4년차, 22세의 나이로 최우수 방어율을 획득했다.
1999년에는 개막 로테이션에 합류. 개막부터 2경기 연속 완봉승과 3경기 연속 완투승을 거두었다. 등판 3번째 경기 9회에 이치로에게 역대 최속 1,000안타가 되는 홈런을 맞기 전까지 개막부터 27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다. 이 3경기 등판만으로 첫 월간 MVP를 획득했지만, 3번째 경기 직후 오른쪽 어깨 통증을 호소하며 이탈, 9월까지 복귀하지 못했다.
2000년에는 2년 연속으로 4월에 월간 MVP를 획득하여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지만, 직후 다시 오른쪽 어깨 통증으로 이탈했다.
2001년에는 처음으로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았다. 부상이 잦았던 탓에 감독 오시마 야스노리가 완투시키지 않고 기용한 결과, 부상 없이 처음으로 1년 로테이션을 지켜내며 규정 이닝에도 도달하는 최소한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7승 13패, 평균자책점 4.89로 부진했다. 이후, 부상 재활을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 등으로 어깨를 단련했고, 이 해부터 부상으로 이탈하는 일이 없어졌다.
2002년에는 개막부터 잠시 팀 방침에 따라 구원 투수였지만, 곧 로테이션으로 복귀했다. 안정감도 되찾아 시즌 내내 활약했고, 처음으로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었으며, 포크볼이 위력을 발휘하여 개인 최다인 143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2003년에는 전반기에 3승에 그치며 부진했지만, 후반기 7승을 거두며 반등하여 2년 연속 10승을 달성했다.
2004년에는 니혼햄의 홈구장 이전 첫 해 삿포로 돔의 첫 경기에서 선발 등판했다. 승리 투수가 되었고, 히어로 인터뷰에서는 홋카이도 사투리를 사용하여 "나마라 최고입니다!"라고 외쳐 홋카이도의 팬들을 열광시켰다. 이 말은 후에 가네무라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나마라 최고 타월" 등 굿즈도 발매되었다. 이 대사는 자신의 공식 블로그의 첫 화면에도 적혀있다. 시즌 성적으로는 개인 최다인 13승을 기록, 6년 만에 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 세이부 라이온즈와의 플레이오프에서는 1차전에 선발 등판했지만, 안정감을 잃고 6회까지 4실점을 기록했다. 타선의 지원으로 7회에 동점을 만들었지만, 그 이닝에 사토 토모아키에게 결승 솔로 홈런을 맞아 강판되었다. 구원진도 크게 무너지면서 6이닝 3실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다.
2005년에는 개인 최다인 174이닝을 던졌으며, 2년 연속 13승을 거두어 4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다. 올스타 출전도 했지만, 팀 로테이션 관계상 등판은 없었다.
2006년에는 4월 16일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전에서 훌리오 즈레타와의 4번째 타석에서, 투구 직전에 2번 마운드를 벗어나 시간을 끈 후 복부에 사구를 던진 것 때문에, 즈레타는 격분하여 가네무라가 있는 마운드로 돌진했다. 가네무라는 도망가지 않고 즈레타의 거구와 충돌하여 마운드에 쓰러졌고, 더욱 폭행을 당해 신경통을 입어 4월 후반을 허비했다(즈레타는 폭력 행위로 퇴장 처분). 5월 7일의 라쿠텐전에서 복귀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다. 이후, 후술할 소동으로 인해 2군으로 강등되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 복귀했다. 4차전(삿포로 돔)에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다. 또한, 일본 대표로 참가한 아시아 시리즈에서는 11월 12일 대 차이나 스타즈 (중국 야구 리그 선발 팀)전에 선발 등판. 5이닝 6안타 1사사구 84구로 7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는 등 요소를 틀어막아 승리에 기여했다. 오프 시즌에는 재정 재건 단체가 된 유바리시를 응원하기 위해, 시민들을 매 경기 삿포로 돔에 초청하는 "가네무라·유바리 시트"를 설치했다.
2007년에는 팔꿈치 불안으로 포기했던 커브 습득에 매진, 몇 안 되는 선발의 기둥으로서 두 자릿수 승리를 목표로 했지만, 5월에 부상으로 인해 전력에서 이탈. 교류전 종료 후에 복귀하여, 7월 11일에 완투로 5승을 거둔 시점에서 평균자책점도 2점대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전반기 최종전 소프트뱅크전에서 프로 최단 0이닝 3실점으로 강판되었고, 후반기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도 2경기 연속 KO[5]로 2군으로 강등. 그대로 정규 시즌에서 1군에 재승격하지 못한 채 시즌을 종료했다. 13경기에서 5승에 그쳤고, 투구 이닝도 8년 만에 100회를 넘지 못했다. 또한, 일본 시리즈에서는 벤치에 들어갔지만, 등판은 없었다.
2. 3. 한신 시절
가네무라는 2004년 닛폰햄 파이터스의 연고지 이전 첫 해 삿포로 돔 첫 경기에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다. 히어로 인터뷰에서 홋카이도 방언이 있다는 이유로 "사투리 최고입니다!"라고 외쳐 홋카이도 팬들을 열광시켰다. 이 발언은 이후 가네무라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사투리 최고 타올'이라는 상품으로도 출시되었다. 그 해 개인 최고 성적인 13승을 기록하며 6년 만에 올스타전에 출전했다.[9]2005년에는 개인 최다 이닝인 174이닝을 던지며 2년 연속 13승을 기록했고, 올스타전에도 출전했으나 팀의 로테이션 관계로 등판은 없었다.[9]
2. 4. 한국 진출 시도와 무산
가네무라 사토루는 2023년 11월 25일에 홋카이도 프론티어 리그의 이시카리 레드 피닉스 투수 코치로 취임했다.[19] 2024년 10월 21일, 1시즌 만에 한신의 1군 투수 코치로 복귀하는 것이 발표되었다.[20]2. 5. 시나노 시절
2011년, 가네무라는 시나노 그란세로즈에서 뛰며 17경기에 등판해 2승 7패, 평균자책점 2.61을 기록했다. 76이닝 동안 69개의 안타와 6개의 홈런을 허용했고, 45개의 삼진을 잡았다. 사구는 16개, 폭투 1개, 보크 1개, 실책은 5개(리그 최고 기록)였다.[4]연도 | 구단 | 등판 | 승리 투수 | 패전 투수 | 세이브 | 완투 | 승률 | 투구 이닝 | 타자 | 안타 | 홈런 | 삼진 | 사구 | 사구 | 실점 | 자책점 | 폭투 | 보크 | 실책 | 방어율 |
---|---|---|---|---|---|---|---|---|---|---|---|---|---|---|---|---|---|---|---|---|
2011 | 시나노 | 17 | 2 | 7 | 0 | 3 | .222 | 76.0 | 312 | 69 | 6 | 45 | 16 | 4 | 37 | 22 | 1 | 1 | 5 | 2.61 |
통산: 1년 | 17 | 2 | 7 | 0 | 3 | .222 | 76.0 | 312 | 69 | 6 | 45 | 16 | 4 | 37 | 22 | 1 | 1 | 5 | 2.61 |
3. 은퇴 후
은퇴한 이듬해인 2012년부터 야구 평론가와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해 닛칸 스포츠의 전속 평론가가 되었고 홋카이도 문화 방송, TV 홋카이도, GAORA에도 해설위원으로 출연했다. 고향인 미야기현에서 도호쿠 방송이 제작하던 <라쿠텐 대 니혼햄> 경기나 히가시닛폰 방송에도 해설자로 출연하고 있다. 또, 1주일에 1회 삿포로 시내의 피트니스 클럽에서 야구 개별 지도를 실시하고 있다.
4. 논란
2007년, 가네무라는 팔꿈치 부상에도 불구하고 커브 습득에 힘썼으나, 5월에 부상으로 이탈했다. 교류전 종료 후 복귀하여 7월 11일 완투승으로 5승을 기록, 2점대 평균자책점을 유지했다. 그러나 전반기 마지막 경기인 소프트뱅크전에서 0.67이닝 4실점으로 부진했고, 후반기 지바 롯데 마린스전에서도 2경기 연속 KO를 당하며 2군으로 내려갔다. 결국 1군에 복귀하지 못한 채 일본 시리즈에도 등판하지 못했다. 11월 9일, 나카무라 야스히로와의 맞트레이드로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했는데, 당시 가네무라는 프로 통산 80승, 나카무라는 3승만을 기록하고 있어 이 트레이드는 큰 화제가 되었다.[2]
4. 1. 2006년 발언 파문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가네무라 사토루'의 '2006년 발언 파문'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은 빈칸으로 유지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전 출력은 정확하며 수정할 필요가 없습니다.5. 상세 정보
2008년에는 오픈전 전 투구 연습 중 왼쪽 허벅지를 다쳐 개막 1군에 합류하지 못했다. 7월 3일 1군에 승격, 이적 후 첫 등판에서 승리 투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1실점으로 호투했다. 그러나 이 경기 외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1군에 정착하지 못하고 강등되었다. 결국 이 해에는 8경기에 등판했지만 1승도 거두지 못했다.[32]
2009년 7월 17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에서 이와타 미노루를 대신하여 등판, 6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다. 같은 해 9월 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전에서 5회부터 3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한신 이적 후 첫 승을 거두었다. 이후 중간 계투진에 합류하여 릴리프로서 활약했다.
2010년에는 출전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하고 단 1경기 등판에 그쳤고, 시즌 종료 후 구단으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 12월 10일, KBO 리그의 삼성 라이온즈와 연봉 2000만엔에 계약했지만, 메디컬 체크를 통과하지 못해 계약이 무산되었다. 2011년 1월, SK 와이번스의 테스트를 받았지만, SK가 짐 매그레인과 계약하게 되어 입단하지 못했다. 가네무라는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연봉 및 계약금을 지불하라는 민사 소송을 제기했지만, 2012년 1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받았다.[32]
5. 1. 수상 및 타이틀
연도 | 수상 |
---|---|
1998년 | 최우수 방어율 |
1999년 4월 | 월간 MVP |
2000년 4월 | 월간 MVP |
5. 2. 개인 기록
4구
사구
맞는
볼
자책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