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근호
1. 개요
강근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전쟁 참전 군인이다. 1888년 함경남도 정평군에서 출생하여 함흥중학교 재학 중 만주로 망명, 3·1 운동에 참여하고 신흥무관학교에서 근무했다. 북로군정서에서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으며, 자유시 참변 이후 이르쿠츠크에서 공산주의 반대 투쟁으로 복역 후 항일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광복 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전쟁에 참전했으며, 1956년 중령으로 전역 후 부산에서 사망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부산 장산에 기념비와 기념관이 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대 육군 장교 -
이동휘
이동휘는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 신민회 활동, 독립군 양성, 한인사회당 조직,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고려공산당 창당 등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대 육군 장교 -
이육사
일제강점기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는 의열단 활동, 투옥, 루쉰과의 교류, 저항시 창작 등의 활동을 펼치다 순국하여 사후 시집이 출간되었고 한국 문학사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자 -
장준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정치인인 장준하는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 후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활동, 해방 후 김구의 비서를 지냈고, 《사상계》를 창간하여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나 의문사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자 -
나운규
나운규는 일제강점기 영화감독이자 배우, 각본가로, 영화 《아리랑》을 통해 조선인의 저항 의식을 고취하며 한국 영화사에 큰 획을 그었으나, 민족주의적 영화 제작 중 조선총독부의 탄압과 건강 악화로 요절한 독립운동가이다. -
건국포장 수훈자 -
김영랑
김영랑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활동한 시인으로,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같은 서정시와 민족주의적 저항 의식을 담은 시를 동시에 선보였으며, 1935년에 시집 『영랑시집』을 발간했다. -
건국포장 수훈자 -
장기영 (1903년)
장기영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제헌 국회의원, 외무부 차관보, 체신부 장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했으며, 이승만 측근으로 활동하다 결별 후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88년 11월 3일 함경남도 정평군에서 출생하였다. 1916년 함흥중학교 재학 중 학생사건으로 일본 제국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월 옌볜의 룽징촌에서 3·1 운동에 참여하고, 만주군정서 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신흥무관학교에서 근무하였다.
1920년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제1학도대 제3구대장, 제1중대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였다.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이르쿠츠크 고려혁명군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1922년 공산주의 반대 투쟁으로 이르쿠츠크 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였고, 출옥 후 다시 만주로 돌아와 항일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43년 애국동지회 청년군사훈련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하고 광복이 되자 1947년에 귀국하였다. 1949년 2월 육군사관학교 8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제103사단 113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1952년 한국 전쟁 중 학도의용군으로 입대한 군무원이던 독립운동가 이시영의 증손녀 이정희를 만났고 1953년에 연병장에서 결혼하였다. 1956년 5월 중령으로 전역 후 부산 영도구에서 정착하였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강근호는 생전에 입버릇처럼 “청산리 전투에서 산화한 독립군을 위해 작은 돌비석이라도 하나 세워주기 바란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고 한다.
2.1. 독립운동 투신 (1916년 ~ 1945년)
1888년 11월 3일 함경남도 정평군에서 출생하였다. 1916년 함흥중학교 재학 중 학생사건으로 일본 제국 경찰의 수배를 받게 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월 옌볜의 룽징촌에서 3·1 운동에 참여하고, 만주군정서 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신흥무관학교에서 근무하였다.
1920년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제1학도대 제3구대장, 제1중대장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였다. 1921년 자유시 참변 이후 이르쿠츠크 고려혁명군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1922년 공산주의 반대 투쟁으로 이르쿠츠크 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였고, 출옥 후 다시 만주로 돌아와 항일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43년 애국동지회 청년군사훈련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2.2. 광복 이후 ~ 한국전쟁 참전 (1945년 ~ 1953년)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하고 광복이 되자 1947년에 귀국하였다. 1949년 2월 육군사관학교 8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제103사단 113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1952년 한국 전쟁 중 학도의용군으로 입대한 군무원이던 독립운동가 이시영의 증손녀 이정희를 만났고 1953년에 연병장에서 결혼하였다.
2.3. 전역 이후 (1956년 ~ 1960년)
1956년 5월 중령으로 전역한 후 부산 영도구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냈다. 강근호는 “청산리 전투에서 산화한 독립군을 위해 작은 돌비석이라도 하나 세워주기 바란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
3. 사후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유해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이장되었다. 2000년 부산광역시 장산에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2005년 '애국지사 강근호 선생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다. 부산광역시 장산에 강근호 기념관이 있다.
4. 가족
아내 이정희/李貞姬한국어, 아들 강귀철, 딸 강정화가 있다.
5. 학력
* 1919년 만주군정서 무관학교를 졸업했다.
* 1949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8기를 졸업했다.
* 1951년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