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로
1. 개요
강로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진주 강씨 출신이다. 헌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으며, 북인 계열에 속했다.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측근으로 병조판서와 좌의정을 역임했으나, 대원군 실각 후 파직과 유배를 겪었다. 임오군란에 연루되어 유배되기도 했지만, 고종의 신임으로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1887년 사면되었으며, 최종 관직은 판중추부사였다.
| 제목 | 강로 |
|---|---|
| 한글 | 강로 |
| 한자 | 姜㳣 |
| 가타카나 | 칸・노 |
-
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9세기 한국 사람 -
손병희
손병희는 조선 말 동학의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종교인, 독립운동가로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인내천 사상을 강조했다. -
19세기 한국 사람 -
허영호 (정치인)
허영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신간회 활동을 했으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로 전향하여 해방 후 혜화전문학교 교장과 동국대학교 학장을 역임했으며, 제헌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사후 친일 행적이 드러나 건국훈장이 취소되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다. -
조선의 좌의정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좌의정 -
김홍집
김홍집은 조선 말기 온건 개화파 정치가로서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후 개화사상을 수용하고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을 주도했으나, 친일 정책과 단발령으로 민심을 잃고 아관파천 때 살해당하며 조선 근대화에 기여했으나 일본 간섭을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2. 생애
진주 강씨 가문 출신으로, 예조판서를 지낸 표암 강세황의 증손자이다. 헌종 14년(1848년) 경기도 진위현령으로 재임 중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정자, 홍문관 응교 등을 거쳐 철종 때 사간원대사간을 지냈다. 붕당으로는 북인 계열에 속했기 때문에, 노론이 득세하던 세도정치 시기에는 상대적으로 관직 승진이 더뎠다.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여 남인과 북인 계열 인사를 중용하면서 강로도 중용되기 시작했다. 1863년 동래부사에 임명되었고, 강화도위유사를 거치며 대원군의 측근이 되었다. 이후 병조·이조 참판, 공조·병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872년에는 좌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1873년 흥선대원군을 탄핵한 최익현의 처벌을 강하게 주장하다가, 고종의 친정 선포와 대원군의 실각으로 인해 당시 우의정이던 한계원과 함께 파직되었다. 1879년 3월 판중추부사로 복직했으나, 효휘전 참례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고종의 신임으로 다시 판중추부사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하지만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난병들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1883년 5월 경상도 안의현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인 1884년 석방되었고, 1886년 12월에는 봉조하에 임명되었으며, 1887년 사면된 후 같은 해 사망했다.
2.1. 가계와 초기 관직 생활
진주 강씨이며, 아버지는 강이구, 할아버지는 강빈(姜儐), 증조할아버지는 예조판서를 지낸 표암 강세황이다. 붕당은 북인 계열에 속했다. 이 때문에 노론 중심의 세도정치 하에서는 관직 승진이 상대적으로 더뎠다.
헌종 14년(1848년) 경기도 진위현령으로 재임하던 중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정자, 홍문관 응교를 거쳤으며, 1851년(철종 2년)에는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도승지 등을 역임하였고, 철종 때 사간원대사간을 지냈다.
2.2. 흥선대원군 집권기
북인 계열이었던 강로는 노론 중심의 세도정치 하에서는 상대적으로 관직 승진이 더뎠다. 그러나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여 소외되었던 남인과 북인 계열 인사를 중용하는 정책을 펴면서 강로도 중용되기 시작했다.
1863년(고종 즉위년) 동래부사에 임명되었고, 이후 강화도위유사를 거치며 대원군의 신임을 얻어 그의 측근으로 자리 잡았다. 1865년에는 종2품으로 승진했으며, 1866년 이후에는 병조와 이조의 참판을 역임했다. 1870년에는 정2품으로 승진하여 공조와 병조의 판서를 지냈고, 마침내 1872년에는 좌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873년, 면암 최익현이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며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자, 강로는 대원군을 옹호하며 최익현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고종이 최익현의 상소를 받아들여 친정을 선포하고 대원군이 실각하면서, 강로 역시 정권의 핵심에서 밀려나 당시 우의정이던 한계원과 함께 파직되었다.
2.3. 대원군 실각과 이후
좌의정까지 올랐으나, 1873년 흥선대원군을 탄핵한 최익현의 처벌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며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당시 우의정이던 한계원과 함께 파직되었다.
1879년 3월에 다시 판중추부사로 복직하였으나, 효휘전 참례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고종의 신임을 받아 곧 풀려나 판중추부사로서 기로소에 들어갔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흥선대원군과 연계되었다는 의심을 받아 난병들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1883년 5월 경상도 안의현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인 1884년 석방되었고, 1886년 12월에는 봉조하에 임명되었으며, 1887년에 완전히 사면된 후 같은 해 사망하였다.
2.4. 평가
진주 강씨 가문 출신으로, 예조판서를 지낸 강세황의 증손자이다. 헌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북인 계열에 속했기 때문에 노론 중심의 세도정치 하에서는 사간원 대사간 등 비교적 낮은 관직에 머물렀다.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여 남인 및 북인 계열 인사를 중용하는 정책을 펴면서 그의 정치적 위상도 높아졌다. 강화도위유사를 거쳐 대원군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는 당시 정치 환경의 변화 속에서 소외되었던 인물들이 새롭게 등용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을 탄핵한 최익현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다가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우의정 한계원과 함께 파직되는 등 정치적 부침을 겪었다. 이후 다시 기용되어 판중추부사를 지냈으나, 효휘전 참례 불참을 이유로 유배되기도 했다.
고종의 신임을 받아 판중추부사로서 기로소에 들어가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지만, 임오군란 당시 난병들과 내통했다는 의혹을 받아 다시 유배되는 시련을 겪었다. 곧 풀려나 1887년에 사면되었다. 그의 관직 생활은 세도정치 시기 소외되었던 북인 계열 인사가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중용되었다가 정치적 격변 속에서 부침을 거듭한 과정을 보여준다.
3. 붕당
붕당에서는 북인에 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