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호 (권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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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준호는 대한민국의 권투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95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대회 페더급에서 우승했다. 6.25 전쟁 이후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여 1951년 전국체육대회 밴텀급에서 우승했으며,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밴텀급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선수 은퇴 후에는 지도자로 활동하며 여러 올림픽과 아시안 게임에서 대한민국 선수들을 지도했고, 김상현, 박찬희 등 프로 권투 선수들을 육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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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 (권투 선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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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강준호 |
국가 | 대한민국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황해도 해주부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체급 | 밴텀급 |
소속팀 | 대한민국 육군 |
전적 | |
메달 | |
메달 내역 | }} |
2. 선수 경력
1963년에 군에서 제대하였고 1967년 5월부터 1년간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가 운영한 복싱 클럽인 골든 올림피아의 코치를 맡았다. 이후 국가대표팀 코치가 되어 1968년 하계 올림픽과 1972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는 지용주와 장규철 등 권투 선수들을 지도했다.[5] 1974년 아시안 게임, 1975년 아시아 선수권 대회, 1977년 태국 국왕컵, 1977년 아시아 선수권 대회 등에서도 대한민국 선수단을 지도했다. 프로 선수 양성에도 관여하여 WBC 라이트웰터급 챔피언 김상현과 WBC 플라이급 챔피언 박찬희를 훈련시켰다.[6]
1990년 서울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2. 1. 아마추어 선수 시절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해주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49년 함경남도 원산의 복싱 체육관에서 박순원의 지도를 받았다. 1950년 5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대회 페더급에서 우승했으며, 같은 해 6.25 전쟁이 발발하자 스승인 박순원과 함께 부산으로 월남했다.[4] 이후 대한민국 육군에 입대하여 수도사단 1연대 수색중대에서 복무했으며, 1951년 10월 광주에서 열린 1951년 전국체육대회 밴텀급에서 이명근을 꺾고 우승했다. 군 복무와 권투 선수 생활을 병행하기 위해 육군 헌병으로 보직을 변경, 1952년 4월 부산에서 열린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박금현을 꺾으며 밴텀급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4]같은 해 7월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1952년 하계 올림픽 밴텀급 종목에 출전, 16강에서 이란의 파즐로아 니하와 훗날 세계 복싱 협회(WBA) 페더급 챔피언이 되는 미국의 데이비 무어를 꺾고 준결승에 진출, 아일랜드의 존 맥널리에게 0-3 판정패하며 3위에 올랐다.[4] 당시 올림픽에서는 동메달이 수여되지 않았지만, 1970년 AIBA와 IOC는 1952년부터 1968년까지의 모든 준결승 패자에게 동메달을 수여했다.[1] 1954년 5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1954년 아시안 게임 밴텀급에 참가, 첫 상대인 필리핀의 알레한드로 오르투오스테에게 패하며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1955년 4월 중화민국 국군과의 군인 권투 친선전에 참가했고 1957년에 현역 생활을 마쳤다.[4]
2. 2. 1952년 헬싱키 올림픽 경기 결과
1952년 하계 올림픽 밴텀급 종목에 출전하여 16강에서 이란의 파즐롤라 니카를 3-0, 8강에서 훗날 세계 복싱 협회(WBA) 페더급 챔피언이 되는 미국의 데비 무어를 2-1로 꺾으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준결승에서 아일랜드의 존 맥널리에게 0-3으로 판정패하면서 동메달을 획득했다.[4] 당시 올림픽에서는 동메달이 수여되지 않았지만, 1970년 국제 복싱 협회(AIBA)와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는 1952년부터 1968년까지의 모든 준결승 패자에게 동메달을 수여했다.[1]1952년 올림픽 경기 결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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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목 | 라운드 | 결과 | 상대 | 점수 |
밴텀급 | 1회전 | 부전승 | ||
2회전 | 승 | فضلالله نیکخواه|파즐롤라 니카fa (이란) | 3-0 | |
8강 | 승 | Davey Moore|데비 무어영어 (미국) | 2-1 | |
준결승 | 패 | John McNally|존 맥널리영어 (아일랜드) | 0-3 |
1963년에 군에서 제대하였고 1967년 5월부터 1년간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가 운영한 복싱 클럽인 골든 올림피아의 코치를 맡았다. 이후 국가대표팀 코치가 되어 1968년 하계 올림픽과 1972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는 지용주와 장규철 등 권투 선수들을 지도했다.[5] 1974년 아시안 게임, 1975년 아시아 선수권 대회, 1977년 태국 국왕컵, 1977년 아시아 선수권 대회 등에서도 대한민국 선수단을 지도했다. 이 밖에 프로 선수 양성에도 관여하여 WBC 라이트웰터급 챔피언 김상현과 WBC 플라이급 챔피언 박찬희를 훈련시켰다.[6][2][3]
1990년 서울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1]
웹사이트
Gang Jun-ho
https://www.sports-r[...]
Sports-reference
2019-09-24
3. 지도자 경력
4. 사망
참조
[2]
뉴스
https://www.joins.co[...]
2019-09-24
[3]
뉴스
https://www.joins.co[...]
2019-09-24
[4]
웹인용
Gang Jun-ho
https://www.sports-r[...]
Sports-reference
2019-09-24
[5]
웹인용
"「빈손 귀국」할 「메달·복스」한국「복싱 김멸」이 준 충격과 문제점"
https://www.joins.co[...]
Jungang Ilbo
2019-09-24
[6]
웹인용
박찬희, 28일 출국 2월3일 대전
https://www.joins.co[...]
Jungang Ilbo
2019-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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