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수요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검은 수요일"은 1992년 9월 16일, 영국이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에서 파운드화를 탈퇴한 사건을 지칭한다. 1990년 ERM 가입 이후, 독일 통일로 인한 독일 마르크화 강세와 영국의 높은 인플레이션, 고금리 정책 등으로 파운드화 가치가 하락 압력을 받았다.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투기 세력의 파운드화 공매도 공격과 독일 연방은행 총재의 통화 재조정 필요 언급이 더해지면서, 영국 정부는 금리 인상으로 방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ERM 탈퇴를 결정했다. 이로 인해 파운드화 가치가 폭락하고, 보수당 정부의 경제적 우수성에 대한 신뢰가 손상되었으며, 영국 경제는 단기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ERM 탈퇴를 경제 회복의 계기로 평가하기도 하며, 이 사건은 영국의 경제 정책과 정치 지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지 소로스 - 짐 로저스
짐 로저스는 조지 소로스와 함께 퀀텀 펀드를 설립하고 로저스 국제 상품 지수를 설립한 미국의 투자자이자 작가이며, 오토바이 세계 여행을 통해 모험 투자가로 불리며 아시아 시장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한다. - 1992년 영국 - 장검의 밤 (1992년)
1992년 장검의 밤은 아일랜드 공화국군이 아일랜드 인민해방기구를 해산시킨 사건으로, 이는 아일랜드 인민해방기구가 아일랜드 민족해방군과의 유혈 충돌, 불법 약물 거래, 조직 내부 분열 등으로 1992년 11월 해산되기에 이른다. - 영국의 경제사 - 곡물법
곡물법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영국에서 시행된 곡물 수출입 관련 법률로, 초기에는 곡물 가격을 조정하려 했으나 1815년 이후 외국산 밀 수입 제한으로 강화되어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고, 자유무역론자들의 반대와 아일랜드 대기근 등의 영향으로 1846년 폐지되어 영국 농업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영국의 경제사 - 베어링스 은행
1762년 설립된 베어링스 은행은 대영제국 확장과 함께 성장하여 런던의 유력한 투자 은행으로 자리 잡았으나, 1995년 닉 리슨의 파생 상품 거래 실패로 파산 후 ING 그룹에 인수되었으며, 현재는 베어링 자산 관리에서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검은 수요일 | |
---|---|
지도 정보 | |
사건 개요 | |
사건명 | 검은 수요일 (Black Wednesday) |
발생일 | 1992년 9월 16일 |
위치 | 영국 |
원인 | 파운드화의 급격한 가치 하락 및 ERM 탈퇴 |
결과 | 영국 정부의 ERM 탈퇴 파운드화 가치 하락 대규모 경제적 손실 |
관련 인물 및 기관 | |
영국 총리 | 존 메이저 |
영국 재무장관 | 노먼 라몬트 |
영국 중앙은행 | 영국은행 |
주요 투기 세력 | 조지 소로스 |
경제적 영향 | |
파운드화 하락 | 급격한 파운드화 가치 하락 |
금리 인상 | 영국은행의 금리 인상 시도 |
외환보유고 손실 | 영국 정부의 외환보유고 상당량 손실 |
경제 불황 심화 | 영국의 경기 침체 가속화 |
정치적 영향 | |
정부 신뢰도 하락 | 존 메이저 정부의 신뢰도 추락 |
정계 비판 | ERM 가입 정책에 대한 비판 증가 |
정권 교체 | 1997년 총선에서 노동당 승리에 영향 |
추가 정보 | |
사건의 명칭 유래 | 언론에서 '검은 수요일'로 명명 |
관련 문서 | 영국과 유럽 연합 관계 |
기타 정보 | |
관련 용어 |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 파운드화 |
2. 배경
1990년 10월 3일 독일 재통일 이후, 독일 정부는 통일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마르크화를 대량으로 발행했다. 이에 따라 독일 연방은행은 물가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초고금리 정책을 시행했다. 이로 인해 독일 마르크화의 가치가 상승했고,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에 가입한 국가들은 협약에 따른 환율 변동폭을 유지하기 위해 자국 금리를 인상해야 했다. 이는 결국 실업률 증가와 경기 침체로 이어졌다.[5]
1992년 9월 8일, 핀란드는 독일 마르크화와의 연동제를 폐기했고, 스웨덴은 자국 화폐 가치 유지를 위해 단기금리를 500%나 인상했다. 이탈리아 리라와 스페인 페세타 역시 가치가 크게 하락했다.[6]
1990년대 초, 독일 통일 관련 지출로 인한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분데스방크가 설정한 높은 금리는 ERM에 압력을 가했다. 영국과 이탈리아는 이중 적자로 어려움을 겪었고, 영국은 미국 달러 평가절하로 타격을 입었다. 1992년 봄, 덴마크의 마스트리흐트 조약 거부와 프랑스 국민투표 발표 후, ERM 밴드 하한선에 가까운 통화들은 외환 거래자들의 압력을 받았다.[6]
이러한 상황에서 조지 소로스는 영국 파운드화가 ERM의 하한선 아래로 떨어질 경우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공매도 포지션을 구축했다. 그는 영국의 ERM 가입 당시 환율이 지나치게 높게 설정되었고, 인플레이션율이 독일의 세 배에 달하며, 높은 금리가 자산 가격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판단했다.[7]
영국은 스톱고 정책으로 인해 영국병이라 불릴 정도의 경제 불황을 겪고 있었다. 북해 유전 채굴로 1980년대에는 원유 순수출국이 되었지만, 기본적으로 경상수지는 적자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EC는 역내 통화 통합을 위해 EMS와 ERM을 추진했다.
마거릿 대처 전 총리는 ERM 가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녀는 자본 이동이 자유로운 상황에서 독자적인 금융 정책과 환율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국제 금융의 트릴레마를 인지하고 있었다. 또한, 영국의 주요 금융 정책이 독일 연방은행에 의해 결정되는 상황을 우려했다.[32] 그녀의 경제 고문이었던 앨런 월터스 역시 ERM 가입이 파운드화에 대한 투기 공격 압력을 높일 것이라고 경고하며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처 정부는 결국 1990년에 ERM 가입을 결정했다.[32]
ERM 가입 이후, 확장적 금융 정책으로 개선되던 영국의 실업률은 다시 악화되어 1992년에는 10%에 육박했다. 기업 도산 건수는 1931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31]
2. 1.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 가입
영국은 1990년 10월 8일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에 가입하였다. 당시 영국 파운드화는 협약에 따라 독일 마르크화의 ±6% 수준의 변동폭에서만 움직일 수 있었으며, 이 수준을 벗어날 경우 중앙은행들이 개입해 변동폭을 맞춰줘야 했다.[5]1979년 ERM이 설립될 당시, 영국은 가입을 거부했다. 이는 당시 재무장관(재무장관)인 제프리 호우(Geoffrey Howe)가 유럽 친화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논란이 많은 결정이었다. 그의 후임인 나이절 로슨(Nigel Lawson)은 고정 환율제를 전혀 지지하지 않았지만, 서독(West Germany)의 낮은 인플레이션 기록에 깊은 감명을 받아 1980년대 중반에는 자칭 "환율 통화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파운드-마르크 환율을 국내 인플레이션 및 금리 설정에 대한 믿을 만한 지표로 여겼다. 그는 독일 마르크(Deutsche Mark)의 안정적인 강세와 분데스방크의 안정적인 반(反)인플레이션 관리를 지적하며 이를 정당화했는데,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Republic)의 재앙적인 초인플레이션의 지속적인 영향으로 설명했다. 따라서 영국이 ERM에 가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로슨의 지휘하에 1987년 초부터 1988년 3월까지 재무부는 독일 마르크를 "추종"하는 반(半)공식 정책을 따랐다.[3]
앨런 월터스(Alan Walters)는 환율 메커니즘이 "반쪽짜리"라고 주장했고,[4] 이로 인해 로슨은 재무장관직에서 사임했다. 전 재무부 차관 존 메이저(John Major)가 그를 대신했다. 그는 당시 외무장관(외무장관)이었던 더글러스 허드(Douglas Hurd)와 함께 1990년 10월 영국을 ERM에 가입시키는 데 내각을 설득하여, 영국 정부가 파운드화와 다른 회원국 통화 간의 환율이 6% 이상 변동하지 않도록 하는 경제 및 통화 정책을 따를 것을 사실상 보장했다. 1990년 10월 8일, 마거릿 대처는 파운드화를 DM2.95/£1의 환율로 ERM에 편입시켰다. 따라서 환율이 허용 범위의 하한선인 DM2.773(DM/유로 환산율 기준 €1.4178)에 근접하면 정부는 개입해야 했다. 1989년 영국의 인플레이션은 독일의 세 배였고, 금리는 15%로 높았으며, 프랑스와 독일보다 노동 생산성이 훨씬 낮았다. 이는 다른 ERM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영국의 다른 경제 상황을 보여준다.[5]
마거릿 대처는 ERM 가입에 반대했다. 대처 자신은 (자본 이동이 자유로운 경우) 독자적인 금융 정책과 환율 목표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국제 금융의 트릴레마). 또한, 대처는 영국의 주요 금융 정책이 영국 재무부 등이 아니라 독일 연방은행에 의해 결정되는 제도를 채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32] 앨런 월터스는 영국이 ERM에 참가하면 파운드화에 대한 투기 공격의 압력이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ERM 가입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결국 대처 정권은 1990년에 ERM 가입을 결정했다.[32]
서덜랜드 정부 후기 영국에서는 확장적 금융 정책 덕분에 영국의 실업률이 개선되는 추세였다. 그러나 영국이 유럽 통화 제도(ERM)에 참여하면서 영국 경제는 다시 악화되었고, 1992년에는 실업률이 10% 가까이 상승했다. 이후 영국 경기는 더욱 악화되어 기업 도산 건수가 (1931년 이후)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31]
2. 2. 독일 통일과 고금리 정책
1990년 10월 8일 영국은 유럽 환율 메커니즘에 가입하였다. 당시 영국 파운드화는 협약에 따라 독일 마르크화의 ±6% 수준의 변동폭에서만 움직일 수 있었으며, 이 수준을 벗어날 경우 중앙은행들이 개입해 변동폭을 맞춰줘야 했다. 하지만, 1990년 10월 3일 독일 재통일로 독일 정부는 통일 비용으로 마르크화를 대량으로 풀었고, 독일 연방은행은 물가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초고금리 정책을 취해 경제를 안정화시켰다.독일 마르크화가 고평가됨에 따라 유럽 환율 메커니즘 가입국들은 협약에 따른 변동폭 유지를 위해 금리를 올렸고, 이는 실업률 증가와 불황으로 이어졌다. 1992년 9월 8일 핀란드는 독일 마르크화와의 연동제를 폐기하였고, 스웨덴은 화폐 가치 유지를 위해 단기금리를 500% 인상하였다. 이탈리아 리라, 스페인 페세타 또한 대폭락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내부 사정이 좋지 않았음에도 환율 하락을 방어하겠다고 선언하였다.
2. 3. 영국의 경제 상황 악화
1990년 10월 8일, 영국은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에 가입했다. 당시 파운드화는 협약에 따라 마르크화의 ±6% 변동폭 내에서만 움직일 수 있었다. 이 수준을 벗어나면 중앙은행들이 개입해야 했다. 그러나 1990년 10월 3일 독일 재통일 이후, 독일 정부는 통일 비용으로 마르크화를 대량 발행했고, 독일 연방은행은 물가 상승 억제를 위해 초고금리 정책을 시행했다.[5]독일 마르크화가 고평가되면서 ERM 가입국들은 변동폭 유지를 위해 금리를 인상해야 했다. 이는 실업률 증가와 불황으로 이어졌다. 1992년 9월 8일, 핀란드는 마르크화 연동제를 폐기했고, 스웨덴은 단기금리를 500% 인상했다. 리라, 페세타도 대폭락했다.[6]
1979년 ERM 설립 당시 영국은 가입을 거부했다. 당시 재무장관 제프리 호우는 유럽 친화적이었지만, 후임 나이절 로슨은 고정 환율제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서독의 낮은 인플레이션에 감명받아 1980년대 중반 "환율 통화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파운드-마르크 환율을 국내 인플레이션 및 금리 설정의 지표로 여겼다. 그는 독일 연방은행의 안정적인 반(反)인플레이션 관리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3]
마거릿 대처 총리의 경제 고문 앨런 월터스는 환율 메커니즘을 비판했다.[4] 이로 인해 로슨은 사임하고 존 메이저가 재무장관이 되었다. 메이저는 더글러스 허드 외무장관과 함께 1990년 10월 영국을 ERM에 가입시켰다. 영국 정부는 파운드화와 다른 회원국 통화 간 환율이 6% 이상 변동하지 않도록 경제 및 통화 정책을 따를 것을 보장했다. 대처는 파운드화를 DM 2.95/£1 환율로 ERM에 편입시켰다.[5]
1990년대 초, 독일 통일 관련 지출로 인한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분데스방크가 설정한 높은 독일 금리는 ERM에 압력을 가했다. 영국과 이탈리아는 이중 적자로 어려움을 겪었고, 영국은 미국 달러 평가절하로 타격을 입었다. 1992년 봄, 덴마크의 마스트리흐트 조약 거부와 프랑스 국민투표 발표 후, ERM 밴드 하한선에 가까운 통화들은 외환 거래자들의 압력을 받았다.[6]
조지 소로스는 파운드화가 ERM 하한선을 밑돌 경우 큰 이익을 얻을 공매도 포지션을 구축했다. 그는 영국이 ERM에 편입된 환율이 너무 높고, 인플레이션이 높으며(독일의 세 배), 고금리가 자산 가격을 해친다고 믿었다.[7]
영국은 스톱고 정책으로 영국병이라 불릴 정도의 경제 불황을 겪었다. 북해 유전 채굴로 1980년대에는 원유 순수출국이었지만, 기본적으로 경상수지는 적자였다. EC는 역내 통화 통합을 위해 EMS와 ERM을 추진했다.
마거릿 대처는 ERM 가입에 반대했다. 그녀는 독자적인 금융 정책과 환율 목표가 양립할 수 없음(국제 금융의 트릴레마)을 이해했다. 또한, 영국의 주요 금융 정책이 독일 연방은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반대했다.[32] 앨런 월터스는 ERM 가입이 파운드화 투기 공격 압력을 높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대처 정권은 1990년 ERM 가입을 결정했다.[32]
서덜랜드 정부 후기 확장적 금융 정책으로 실업률이 개선되었지만, ERM 참여로 영국 경제는 다시 악화되어 1992년 실업률이 10% 가까이 상승했다. 기업 도산 건수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31]
동서독 통일 이후, 구 서독 정부의 구 동독 투자 증가로 유럽 금리는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높은 금리는 유럽 통화 증가를 가져왔다. ERM에 연동된 영국 파운드는 과대평가되어 지속 가능성을 상실했다. 영국이 ERM에 남으려면 중앙은행은 정책 금리를 인상해야 했다.[33]
하지만 고금리는 영국 경제를 해쳤다. 독일 연방은행은 파운드 방어에 나서지 않았다. 조지 소로스는 파운드 환율이 고평가되었다고 생각하고, 파운드를 대량 매도 후 가격 하락 시 재매수하는 거래를 실행했다. 당시 존 메이저 총리는 ERM 가입이 잘못임을 인정하지 않고, ERM 탈퇴는 배신이라고 말했다.[31]
3. 원인
1990년 10월 8일, 영국은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에 가입했다. 영국 파운드화는 독일 마르크화의 ±6% 변동폭 내에서만 움직일 수 있었고, 이 범위를 벗어나면 중앙은행이 개입해야 했다.[5] 1990년 10월 3일 독일 재통일 이후, 독일 정부는 통일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마르크화를 대량으로 풀었고, 독일 연방은행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초고금리 정책을 시행했다.
독일 마르크화의 고평가로 인해 ERM 가입국들은 환율 변동폭 유지를 위해 금리를 인상해야 했고, 이는 실업률 증가와 경기 침체로 이어졌다.[6] 1992년 9월 8일, 핀란드는 마르크화 연동제를 폐지했고, 스웨덴은 단기금리를 500% 인상했다. 이탈리아 리라와 스페인 페세타도 대폭락했다.
조지 소로스는 영국의 ERM 가입 조건이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높은 환율과 인플레이션, 고금리가 자산 가격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보았고, 파운드화가 ERM 하한선 아래로 떨어질 경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공매도 포지션을 구축했다.[7]
마가렛 대처 전 총리는 ERM 가입에 반대했다. 독자적인 금융 정책과 환율 목표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고, 영국의 주요 금융 정책이 독일 연방은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우려했다.[32] 그녀의 경제 고문 앨런 월터스는 ERM 가입이 파운드화 투기 공격 압력을 높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대처 정부는 1990년 ERM 가입을 결정했다.[32]
1990년대 초, 독일 연방은행의 고금리 정책은 ERM 전체에 압력을 가했다.[6] 영국과 이탈리아는 이중 적자로 어려움을 겪었고, 영국은 미국 달러화 평가절하로 추가 타격을 입었다.[6] 독일 연방은행은 규칙과 달리 파운드화 방어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33]
3. 1. 투기 세력의 파운드화 공매도
분데스방크 총재 헬무트 슐레진저의 발언이 파운드화 공격의 촉매가 되었다.[9] 슐레진저가 ''월스트리트 저널''과 한 인터뷰는 독일 금융 신문 Handelsblattde에 보도되었다.[10] 슐레진저는 기자에게 이탈리아 리라의 최근 평가절하에 따라 통화의 "보다 포괄적인 재조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11] 1992년 9월 15일 화요일 저녁 이미 그 헤드라인이 돌고 있었다. 슐레진저는 자신이 비공식적으로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중에 사실을 진술했을 뿐이며 이것이 위기를 촉발했을 리 없다고 썼다.[12] 이 발언은 파운드화에 대한 압력을 크게 증가시켜 대량의 파운드화 매도로 이어졌다.[9][13]1992년 9월 16일 수요일, 환투자자들은 대규모 파운드화 매도를 시작했다.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은 영란은행이 파운드화 매도 제안을 모두 수용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영란은행은 거래 시간 중에만 주문을 수락했다. 다음날 아침 런던 시장이 개장하자 영란은행은 재무장관 노먼 라몬트와 영란은행 총재 로빈 리-펨버턴이 결정한 대로 자국 통화를 지지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오전 8시 30분 전에 두 차례에 걸쳐 3억 파운드의 주문을 수락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14] 영란은행의 개입은 투자자들이 파운드화를 훨씬 더 빠르게 매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 영란은행은 계속해서 매입했고 투자자들은 계속해서 매도했으며, 라몬트가 총리 존 메이저에게 파운드화 매입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때까지 이어졌다.[15]
같은 날 오전 10시 30분, 영국 정부는 이미 높았던 기준금리를 10%에서 12%로 인상한다고 발표하여 투기꾼들이 파운드화를 매입하도록 유도했다. 이와 같은 조치와 같은 날 기준금리를 15%로 다시 인상하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 딜러들은 파운드화 매도를 계속했다. 그날 저녁 7시, 라몬트는 영국이 ERM을 탈퇴하고 금리가 새로운 수준인 12%로 유지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다음 날 금리는 다시 10%로 되돌아갔다.[15]
1992년 9월이 되자 투기 세력과 헤지펀드의 파운드 공매도는 더욱 거세졌다. 9월 15일에는 격렬한 파운드 매도로 파운드 가격이 계속 하락하여 변동폭 제한선(상하 2.25%)을 초과했다. 9월 16일, 영란은행이 파운드 매입을 위한 시장 개입을 실시하고, 공식금리를 10%에서 12%로 인상했으며, 같은 날 다시 한번 금리 인상을 단행하여 15%로 만들었다. 중앙은행이 하루에 공식금리 인상을 두 번이나 실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환시장에서는 파운드 공매도가 멈추지 않았고, 파운드는 더욱 하락했다.
3. 2. 영국의 ERM 가입 조건 문제
영국은 1990년 10월 8일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에 가입했다. 당시 영국 파운드화는 협약에 따라 독일 마르크화의 ±6% 수준의 변동폭에서만 움직일 수 있었으며, 이 수준을 벗어날 경우 중앙은행들이 개입해야 했다.[5] 1990년 10월 3일 독일 재통일 이후, 독일 정부는 통일 비용으로 마르크화를 대량으로 풀었고, 독일 연방은행은 물가상승 억제를 위해 초고금리 정책을 취했다.독일 마르크화 고평가로 인해 ERM 가입국들은 협약에 따른 변동폭 유지를 위해 금리를 올렸고, 이는 실업률 증가와 불황으로 이어졌다.[6] 1992년 9월 8일 핀란드는 독일 마르크화와의 연동제를 폐기했고, 스웨덴은 화폐 가치 유지를 위해 단기금리를 500% 인상했다. 이탈리아 리라, 스페인 페세타 또한 대폭락했다.
1979년 ERM 설립 당시, 영국은 가입을 거부했다. 당시 재무장관 제프리 호우(Geoffrey Howe)는 유럽 친화적이었지만, 후임 나이절 로슨(Nigel Lawson)은 고정 환율제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서독(West Germany)의 낮은 인플레이션에 감명받아 1980년대 중반 "환율 통화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파운드-마르크 환율을 국내 인플레이션 및 금리 설정 지표로 여겼다.[3] 독일 마르크(Deutsche Mark)의 안정적 강세와 분데스방크의 반(反)인플레이션 관리가 그 이유였다. 로슨의 지휘하에 1987년부터 1988년 3월까지 재무부는 독일 마르크를 "추종"하는 정책을 따랐다.[3]
이후 로슨은 재무장관직에서 사임했고, 존 메이저(John Major)가 그를 대신했다. 그는 더글러스 허드(Douglas Hurd)와 함께 1990년 10월 영국을 ERM에 가입시켰다. 영국 정부는 파운드화와 다른 회원국 통화 간 환율이 6% 이상 변동하지 않도록 하는 정책을 따르게 되었다. 1990년 10월 8일, 대처는 파운드화를 DM2.95/£1의 환율로 ERM에 편입시켰다.[5]
1990년대 초, 분데스방크의 높은 독일 금리는 ERM 전체에 압력을 가했다. 영국과 이탈리아는 이중 적자로 어려움을 겪었고, 영국은 미국 달러 평가절하로 타격을 입었다.[6] 1992년 봄, 덴마크의 마스트리흐트 조약(Maastricht Treaty) 거부와 프랑스의 국민투표 발표 이후, ERM 밴드 하한선에 가까운 통화들은 외환 거래자들의 압력을 받았다.[6]
조지 소로스(George Soros)는 파운드화가 ERM 하한선을 밑돌 경우 이익을 가져다줄 공매도 포지션을 구축했다. 소로스는 영국의 ERM 편입 환율이 높고, 인플레이션이 높으며, 고금리가 자산 가격을 해친다고 믿었다.[7]
마가렛 대처는 ERM 가입에 반대하며 독자적 금융 정책과 환율 목표가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국제 금융의 트릴레마).[32] 또한, 영국의 주요 금융 정책이 독일 연방은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반대했다.[32] 대처의 경제 고문 앨런 월터스는 영국이 ERM에 참가하면 파운드화 투기 공격 압력이 높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대처 정권은 1990년 ERM 가입을 결정했다.[32]
서덜랜드 정부 후기, 확장적 금융 정책으로 영국 실업률은 개선 추세였다. 그러나 ERM 참여로 경제는 악화되었고, 1992년 실업률은 10% 가까이 상승했다.[31] 월터스의 예상대로 파운드는 투기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높은 금리는 유럽 통화 증가를 가져왔고, ERM에 연동된 파운드는 과대평가되어 지속 가능성을 상실했다. 영국이 ERM에 남으려면 중앙은행은 정책 금리를 인상해야 했다.[33] 하지만 고금리는 영국 경제를 해쳤고, 독일 연방은행은 규칙과 다르게 파운드 방어에 나서지 않았다.[33]
3. 3. 독일 연방은행의 역할
1990년대 초, 분데스방크는 독일 통일과 관련된 과도한 지출로 인한 인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펼쳤다. 이는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 전체에 큰 압력을 가했다.[6] 영국과 이탈리아는 이중 적자로 어려움을 겪었고, 영국은 미국 달러화의 급격한 평가절하로 인해 추가적인 타격을 입었다.[6]규칙과 다르게, 독일 연방은행은 파운드화 방어에 나서지 않았다.[33]
4. 경과
1992년 9월 15일, 독일 연방은행 총재의 독일 마르크화 고평가 발언을 기점으로 조지 소로스는 100억달러 규모의 영국 파운드화 투매를 시작했다.[9][13] 다른 헤지펀드들도 이에 가담하면서 파운드화 환율은 하한선까지 떨어졌다. 잉글랜드 은행은 환율 방어를 위해 외환보유고를 동원해 투매된 파운드화를 사들였으나, 하루에 두 차례나 단기 이자율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환율 하락이 계속되자 1992년 9월 16일 영국은 유럽 환율 메커니즘에서 탈퇴했다.
4. 1. 9월 15일: 투기 공격 시작
1992년 9월 15일, 독일 연방은행 총재 헬무트 슐레진저가 독일 마르크화가 고평가되었다는 발언을 하자, 조지 소로스는 100억 달러를 동원하여 영국 파운드화를 대량으로 투매하기 시작했다.[9][13] 다른 헤지펀드들도 이에 가담하면서 파운드화 환율은 하한선까지 떨어졌다. 이에 잉글랜드 은행은 환율 방어를 위해 외환보유고를 사용하여 투매된 파운드화를 사들였다.[8]슐레진저 총재가 ''월스트리트 저널''과 한 인터뷰는 독일 금융 신문 Handelsblattde에 보도되었다.[10] 슐레진저는 기자에게 이탈리아 리라의 최근 평가절하에 따라 통화의 "보다 포괄적인 재조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11] 이 발언은 1992년 9월 15일 화요일 저녁 이미 헤드라인으로 보도되었다. 슐레진저는 자신이 비공식적으로 말했다고 생각했으며, 나중에 사실을 진술했을 뿐이므로 이것이 위기를 촉발했을 리 없다고 썼다.[12]
그러나 잉글랜드 은행이 하루에 두 차례나 단기 이자율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환율 하락은 계속되었다. 존 메이저는 외환시장에서 매도되고 있는 파운드화를 사들이기 위해 수십억 파운드에 달하는 외화 보유고를 사용하도록 승인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은 파운드화가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의 최저 수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영국 재무부는 평가절하하면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파운드화의 가치를 방어하기로 결정했다.[8] 결국 영국은 방어를 포기하고 1992년 9월 16일 유럽 환율 메커니즘에서 탈퇴하게 된다.
4. 2. 9월 16일: 검은 수요일
1992년 9월 15일, 독일 연방은행 총재의 독일 마르크화 고평가 발언을 기점으로 조지 소로스가 100억달러를 동원, 영국 파운드화 투매가 시작되었다.[9][13] 다른 헤지펀드들 또한 가담하게 되자 환율은 하한선까지 떨어지게 되었고, 이에 잉글랜드 은행이 환율 방어를 위해 투매한 파운드화를 외환보유고를 동원해 사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하루에 두 차례나 단기 이자율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환율 하락이 지속되자 영국은 방어를 포기하였고, 1992년 9월 16일자로 유럽 환율 메커니즘에서 탈퇴하였다.분데스방크 총재 헬무트 슐레진저가 ''월스트리트 저널''과 한 인터뷰는 독일 금융 신문 Handelsblattde에 보도되었다.[10] 슐레진저는 기자에게 이탈리아 리라의 최근 평가절하에 따라 통화의 "보다 포괄적인 재조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11] 1992년 9월 15일 화요일 저녁 이미 그 헤드라인이 돌고 있었다. 슐레진저는 자신이 비공식적으로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중에 사실을 진술했을 뿐이며 이것이 위기를 촉발했을 리 없다고 썼다.[12] 이 발언은 파운드화에 대한 압력을 크게 증가시켜 대량의 파운드화 매도로 이어졌다.[9][13]
1992년 9월 16일 수요일, 환투자자들은 대규모 파운드화 매도를 시작했다.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은 영란은행이 파운드화 매도 제안을 모두 수용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영란은행은 거래 시간 중에만 주문을 수락했다. 다음날 아침 런던 시장이 개장하자 영란은행은 재무장관 노먼 라몬트와 영란은행 총재 로빈 리-펨버턴이 결정한 대로 자국 통화를 지지하려는 시도를 시작했다. 오전 8시 30분 전에 두 차례에 걸쳐 3억파운드의 주문을 수락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14] 영란은행의 개입은 투자자들이 파운드화를 훨씬 더 빠르게 매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 영란은행은 계속해서 매입했고 투자자들은 계속해서 매도했으며, 라몬트가 총리 존 메이저에게 파운드화 매입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때까지 이어졌다.[15]
9월 16일 오전 10시 30분, 영국 정부는 이미 높았던 기준금리를 10%에서 12%로 인상한다고 발표하여 투기꾼들이 파운드화를 매입하도록 유도했다. 이와 같은 조치와 같은 날 기준금리를 15%로 다시 인상하겠다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 딜러들은 파운드화 매도를 계속했다. 그날 저녁 7시, 라몬트는 영국이 ERM을 탈퇴하고 금리가 새로운 수준인 12%로 유지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다음 날 금리는 다시 10%로 되돌아갔다.[15]
나중에 탈퇴 결정은 라몬트, 메이저, 외무장관 더글러스 허드, 무역위원회 의장 마이클 헤셀타인, 그리고 내무장관 케네스 클라크(후자 세 사람은 모두 강경한 친유럽주의자이자 고위 내각 장관이었다)[16] 간의 긴급 회의에서 당일 합의되었고, 15%의 금리 인상은 그날 오후 파운드화 폭락을 막기 위한 임시 조치에 불과했던 것으로 밝혀졌다.[17]
영란은행이 파운드 매입을 위한 시장 개입을 실시하고, 여기에 더해 공식금리를 10%에서 12%로 인상했으며, 같은 날 다시 한번 금리 인상을 단행하여 15%로 만들었다. 중앙은행이 하루에 공식금리 인상을 두 번이나 실시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환시장에서는 파운드 공매도가 멈추지 않았고, 파운드는 더욱 하락했다. 사실상의 ERM 탈퇴의 계기가 된 이 외환시장의 파운드 대폭락은 “검은 수요일”로 불린다.
5. 결과 및 영향
검은 수요일의 여파로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 가입국들은 통화 변동폭을 확대하거나 중앙 패리티를 조정하여 시스템에 복귀해야 했다.[18] 이는 영국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 영향을 미쳐, 1993년 ERM은 대대적인 재편을 겪었다.
이 사건은 조지 소로스가 파운드화를 공매도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로 인해 영국 파운드화 가치는 1995년까지 계속 하락했다. 1997년에는 헤지펀드의 통화 공매도로 인해 아시아 외환 위기가 발생하기도 했다.
ERM은 파운드화 위기 이후 재편되어 1999년 유로로 새롭게 탄생했다. 영국은 유로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조지 소로스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영국을 유로존 밖에 머무르게 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33]
5. 1. 경제적 영향
노먼 테빗을 비롯한 일부 해설가들은 영국이 1990년대 초 경기 침체에 빠진 후 ERM을 "영원한 불황 메커니즘"(Eternal Recession Mechanism)이라고 불렀다.[19] 많은 영국인들은 검은 수요일을 국가적 재앙으로 기억하며, 영국의 국제적 위상에 영구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부 보수당 지지자들은 ERM에서 강제 탈퇴된 것을 "황금 수요일"(Golden Wednesday)[20] 또는 "흰 수요일"(White Wednesday)[21]이라고 부르며, 이 날이 경제 회복의 길을 열었다고 주장한다. 보수당은 1997년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에게 1992년보다 훨씬 강력한 경제를 물려주었다고 주장한다.[21] 검은 수요일 이후 신속하게 마련된 새로운 경제 정책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감소와 함께 경제 성장을 재확립했다.[22] 통화 정책은 인플레이션 목표제로 전환되었다.[23][24]보수당 정부의 경제적 우수성에 대한 명성은 크게 손상되었고, 유권자들은 경제 회복이 보수당 정부 정책이 아닌 외부 요인에 기인한다는 당시 야당의 주장에 더 기울게 되었다. 보수당은 1992년 총선에서 승리했고, 9월 갤럽 여론조사에서 2.5%의 근소한 우위를 보였다. 그러나 검은 수요일 이후 10월 여론조사에서 보수당의 지지율은 43%에서 29%로 급락했다.[25] 이후 보수당 정부는 일련의 보궐선거에서 패배하여 1996년 12월에는 21석의 다수당 지위가 약화되었다. 이 기간 동안 지방 정부 선거에서도 보수당의 성적은 비슷하게 좋지 않았고, 노동당은 큰 폭의 승리를 거두었다.
검은 수요일은 1997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에게 압승을 당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었다. 윌리엄 헤이그가 이끈 2001년 총선에서도 보수당은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고, 노동당은 또다시 압도적인 다수당 지위를 차지했다. 보수당은 13년 후인 2010년 총선에서 데이비드 캐머런이 승리하기 전까지 다시 정부를 장악하지 못했다. 5년 후인 2015년에는 위기 5개월 전인 1992년 이후 처음으로 전체 다수당을 차지했다.
조지 소로스는 파운드화를 공매도하여 10억파운드 이상의 이익을 얻었다.[26] 1997년 영국 재무부(HM Treasury)는 검은 수요일의 비용을 31.4억파운드로 추산했으나,[27] 2005년 정보공개법(Freedom of Information Act 2000)에 따라 공개된 문서를 바탕으로 33억파운드로 수정되었다. (이전 추산치는 130억파운드~270억파운드의 훨씬 더 높은 범위였다.)[28] 8월과 9월의 거래 손실은 전체 손실의 일부(약 8억파운드로 추산)를 차지했으며, 중앙은행의 손실 대부분은 잠재적인 평가절하에 따른 미실현 이익에서 발생했다. 재무부 문서에 따르면, 정부가 240억달러의 외환보유고를 유지하고 파운드화가 같은 폭으로 하락했다면, 영국은 파운드화 평가절하로 24억파운드의 이익을 얻었을 수 있다고 한다.[29][30] 영국 파운드화는 그 후에도 1995년까지 계속해서 가치가 하락했다.
이 파운드화 폭락으로 조지 소로스가 이끄는 헤지펀드는 10억달러~20억달러 상당의 이익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1993년에는 유럽 각국으로 통화 위기가 번지면서, ERM(유럽환율 메커니즘)은 대대적인 재편을 강요받게 되었다. 1992년 9월 ERM 탈퇴로 영국 중앙은행(Bank of England)과 영국 재무부(Her Majesty's Treasury)는 불명예스러운 패배를 당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92년 하반기부터 영국 경제는 다른 서유럽 국가들보다 앞서 경기 회복으로 향했고, 1993년~1994년까지 순조로운 성장을 이어갔다. 그 원동력은 1992년 9월 ERM 탈퇴 이후 영국의 금리 인하로 인한 가계 부문의 내구 소비재 지출 증가였다. ERM 탈퇴 이후 파운드화가 주요국 통화에 대해 크게 평가절하됨에 따라 영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진 것 등으로 영국의 해외 수출은 크게 확대되었다.[35]
1997년에는 헤지펀드에 의한 통화 공매도가 동남아시아에서 발생하여 아시아 외환 위기가 되었다.
ERM은 파운드화 위기에 따른 재편 후, 1999년에는 "단일 통화 유로"로 새롭게 탄생했다. 영국은 2019년 현재까지도 유로에 참여하지 않고 있지만, 대륙 유럽과의 통화 통합 시도와 무관하지 않다. 조지 소로스의 동기는 헤지펀드의 수익을 올리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영국을 유로존 밖에 위치하게 했다.[33]
5. 2. 정치적 영향
영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검은 수요일을 국가적 재앙으로 기억하며 영국의 국제적 위상에 영구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지만, 일부 보수당 지지자들은 ERM에서 강제 탈퇴된 것을 "황금 수요일"(Golden Wednesday)[20] 또는 "흰 수요일"(White Wednesday)[21]이라고 부르며, 이 날이 경제 회복의 길을 열었다고 주장한다. 보수당은 1997년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에게 1992년보다 훨씬 강력한 경제를 물려주었다고 주장한다.[21] 검은 수요일 이후 신속하게 마련된 새로운 경제 정책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감소와 함께 경제 성장을 재확립했다.[22] 통화 정책은 인플레이션 목표제로 전환되었다.[23][24]메이저 제2차 내각의 경제적 우수성에 대한 명성은 크게 손상되어, 유권자들은 당시 야당의 주장 – 경제 회복은 보수당이 시행한 정부 정책이 아닌 외부 요인에 기인한다는 주장 –에 더 기울게 되었다. 보수당은 1992년 총선에서 승리했고, 9월 갤럽 여론조사에서 보수당이 2.5%의 근소한 우위를 보였다. 검은 수요일 이후 10월 여론조사에서 보수당의 지지율은 43%에서 29%로 급락했다.[25] 그 후 보수당 정부는 일련의 보궐선거에서 패배하여 1996년 12월까지 21석의 다수당 지위가 약화되었다. 이 기간 동안 지방 정부 선거에서도 보수당의 성적은 비슷하게 좋지 않았고, 노동당은 큰 폭의 승리를 거두었다.
검은 수요일은 보수당이 1997년 총선에서 토니 블레어의 지휘 아래 압승을 거둔 노동당에게 패배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었다. 보수당은 윌리엄 헤이그의 지휘 아래 2001년 총선에서도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고, 노동당은 또다시 압도적인 다수당 지위를 차지했다. 보수당은 13년 후인 2010년 총선에서 데이비드 캐머런이 승리하기 전까지 다시 정부를 장악하지 못했다. 5년 후인 2015년, 위기 5개월 전인 1992년 이후 처음으로 전체 다수당을 차지했다.
조지 소로스는 파운드화를 공매도하여 10억파운드 이상의 이익을 얻었다.[26]
5. 3. 조지 소로스의 역할
조지 소로스는 파운드화를 공매도하여 10억파운드 이상의 이익을 얻었다.[26]6. 평가 및 논란
검은 수요일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노먼 테빗을 비롯한 일부는 영국이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에서 탈퇴한 것을 두고 "영원한 불황 메커니즘"에서 벗어났다고 평가했다.[19] 반면, 많은 영국인들은 이 사건을 국가적 재앙으로 기억하며, 영국의 국제적 위상에 영구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부 보수당 지지자들은 검은 수요일을 "황금 수요일"(Golden Wednesday)[20] 또는 "흰 수요일"(White Wednesday)[21]이라고 부르며, 이날이 경제 회복의 길을 열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검은 수요일 이후 신속하게 마련된 새로운 경제 정책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감소와 함께 경제 성장을 재확립했으며,[22] 통화 정책은 인플레이션 목표제로 전환되었다.[23][24]
보수당 정부의 경제적 우수성에 대한 명성은 크게 손상되었지만, 보수당은 1997년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에게 1992년보다 훨씬 강력한 경제를 물려주었다고 주장한다.[21] 한편, 조지 소로스는 파운드화를 공매도하여 10억파운드 이상의 이익을 얻었다.[26]
6. 1. 부정적 평가
노먼 테빗을 비롯한 일부 해설가들은 영국이 1990년대 초 경기 침체에 빠진 후 ERM을 "영원한 불황 메커니즘"(Eternal Recession Mechanism)이라고 불렀다.[19] 많은 영국인들은 검은 수요일을 국가적 재앙으로 기억하며, 영국의 국제적 위상에 영구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부 보수당 지지자들은 ERM에서 강제 탈퇴된 것을 "황금 수요일"(Golden Wednesday)[20] 또는 "흰 수요일"(White Wednesday)[21]이라고 부르며, 이날이 경제 회복의 길을 열었다고 주장한다. 보수당은 1997년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에게 1992년보다 훨씬 강력한 경제를 물려주었다고 주장한다.[21] 검은 수요일 이후 신속하게 마련된 새로운 경제 정책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감소와 함께 경제 성장을 재확립했다.[22] 통화 정책은 인플레이션 목표제로 전환되었다.[23][24]보수당 정부의 경제적 우수성에 대한 명성은 크게 손상되어, 유권자들은 당시 야당의 주장, 즉 경제 회복은 보수당이 시행한 정부 정책이 아닌 외부 요인에 기인한다는 주장에 더 기울게 되었다. 보수당은 1992년 총선에서 승리했고, 9월 갤럽 여론조사에서 보수당이 2.5%의 근소한 우위를 보였다. 검은 수요일 이후 10월 여론조사에서 보수당의 지지율은 43%에서 29%로 급락했다.[25] 그 후 보수당 정부는 일련의 보궐선거에서 패배하여 1996년 12월까지 21석의 다수당 지위가 약화되었다. 이 기간 동안 지방 정부 선거에서도 보수당의 성적은 비슷하게 좋지 않았고, 노동당은 큰 폭의 승리를 거두었다.
검은 수요일은 보수당이 1997년 총선에서 토니 블레어의 지휘 아래 압승을 거둔 노동당에게 패배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었다. 보수당은 윌리엄 헤이그의 지휘 아래 2001년 총선에서도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고, 노동당은 또다시 압도적인 다수당 지위를 차지했다. 보수당은 13년 후인 2010년 총선에서 데이비드 캐머런이 승리하기 전까지 다시 정부를 장악하지 못했다. 5년 후인 2015년, 위기 5개월 전인 1992년 이후 처음으로 전체 다수당을 차지했다.
조지 소로스는 파운드화를 공매도하여 10억파운드 이상의 이익을 얻었다.[26]
6. 2. 긍정적 평가
일부 보수당 지지자들은 검은 수요일을 "황금 수요일"(Golden Wednesday)[20] 또는 "흰 수요일"(White Wednesday)[21]이라고 부르며, 이 날이 경제 회복의 길을 열었다고 주장한다. 노먼 테빗을 따른 일부 해설가들은 영국이 1990년대 초 경기 침체에 빠진 후 ERM을 "영원한 불황 메커니즘"(Eternal Recession Mechanism)[19]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검은 수요일 이후 신속하게 마련된 새로운 경제 정책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감소와 함께 경제 성장을 재확립했다.[22] 통화 정책은 인플레이션 목표제로 전환되었다.[23][24]보수당 정부의 경제적 우수성에 대한 명성은 크게 손상되었지만, 보수당은 1997년 토니 블레어의 신노동당에게 1992년보다 훨씬 강력한 경제를 물려주었다고 주장한다.[21] 1992년 하반기부터 영국 경제는 다른 서유럽 국가들보다 앞서 경기 회복으로 향했고, 1993년~1994년까지 순조로운 성장을 이어갔다. ERM 탈퇴 이후 파운드화가 주요국 통화에 대해 크게 평가절하됨에 따라 영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진 것 등으로 영국의 해외 수출은 크게 확대되었다.[35]
6. 3. "황금 수요일" 또는 "흰 수요일"
일부 보수당 지지자들은 유럽 환율 메커니즘(ERM)에서 강제 탈퇴된 것을 "황금 수요일"(Golden Wednesday)[20] 또는 "흰 수요일"(White Wednesday)[21]이라고 부르며, 이 날이 경제 회복의 길을 열었다고 주장한다. 검은 수요일 이후 신속하게 마련된 새로운 경제 정책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 감소와 함께 경제 성장을 재확립했다.[22] 통화 정책은 인플레이션 목표제로 전환되었다.[23][24] 노먼 테빗을 따른 일부 해설가들은 영국이 1990년대 초에 경기 침체에 빠진 후 ERM을 "영원한 불황 메커니즘"(Eternal Recession Mechanism)[19]이라고 부르기도 했다.1992년 하반기부터 영국 경제는 다른 서유럽 국가들보다 앞서 경기 회복으로 향했고, 1993년~1994년까지 순조로운 성장을 이어갔다. 그 원동력은 1992년 9월 ERM 탈퇴 이후 영국의 금리 인하로 인한 가계 부문의 내구 소비재 지출 증가였다. ERM 탈퇴 이후 파운드화가 주요국 통화에 대해 크게 평가절하됨에 따라 영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진 것 등으로 영국의 해외 수출은 크게 확대되었다.[35]
독일 마르크와의 환율 수렴 필요성이 없어지면서 금리가 즉시 하락하고 차입 비용이 감소했다. 영국 국채 단기 금리도 위기 이전에는 약 10%대에서 변동했지만, 약 7% 수준으로 안정되었다. 환율 또한 1992년에는 1달러당 약 0.57파운드였던 것이 다음 해에는 약 0.67파운드로 평가절하되었다.[36]
영국의 실업률은 1993년에 약 10%에 이른 이후 꾸준히 개선되어 5년 후에는 약 6%까지 감소했다. 실질 경제 성장률도 1991년에는 마이너스, 1992년에는 약 0%였지만, 다음 해에는 2%대로 상승했다.[37] 이후에도 최소 2%대의 경제 성장은 지속되었다. 즉, ERM 탈퇴로 영국 경제는 개선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많은 경제학자들이 그 날을 "흰 수요일"이라고 부르고 있다.[34]
참조
[1]
뉴스
How the ERM disaster turned into a triumph
https://www.independ[...]
The Independent
2005-02-10
[2]
뉴스
Bring on the next Black Wednesday
https://www.spectato[...]
The Spectator
2018-11-03
[3]
뉴스
Not while I'm alive, he ain't – Part 4 Thatcher and Lawson
http://news.bbc.co.u[...]
BBC Radio 4
2003-05-15
[4]
obituary
Sir Alan Walters
https://www.telegrap[...]
The Daily Telegraph
2009-01-05
[5]
간행물
1990–1992: Britain and the politics of the European exchange rate mechanism
https://libcom.org/l[...]
Libcom
2006-01-13
[6]
논문
Conflicting Authorities: States, Currency Markets and the ERM Crisis of 1992–93
https://www.jstor.o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04
[7]
서적
More Money Than God: Hedge Funds and the Making of a New Elite
Penguin Press HC
2010-06-10
[8]
뉴스
Pound fall is UK's get-out-of-jail-free card
https://www.telegrap[...]
The Daily Telegraph
2008-04-28
[9]
웹사이트
A small remark with big consequences: what sparked Black Wednesday?
https://ehs.org.uk/a[...]
Economic History Society
2022-09-30
[10]
서적
Making a Modern Central Bank: The Bank of England 1979–2003
https://www.cambrid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11]
논문
Imported or home grown? The 1992–3 EMS crisis
https://www.scienced[...]
2022-09-01
[12]
서적
Six Days in September: Black Wednesday, Brexit and the making of Europe
OMFIF Press
2017-09-15
[13]
서적
An Exchange Rate History of the United Kingdom: 1945–1992
https://www.cambrid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2
[14]
뉴스
Billionaire who broke the Bank of England
https://www.telegrap[...]
The Telegraph
2002-09-13
[15]
뉴스
Black Wednesday 20 years on: how the day unfolded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12-09-13
[16]
뉴스
Major's dither cost UK billions, says Lamont
https://www.independ[...]
The Independent
1999-09-27
[17]
뉴스
Black Wednesday: The day that Britain went over the edge
https://www.telegrap[...]
The Daily Telegraph
2012-09-10
[18]
논문
Explaining the September 1992 ERM Crisis: The Maastricht Bargain and Domestic Politics in Germany, France, and Britain
http://aei.pitt.edu/[...]
Harvard University
[19]
뉴스
An electoral curse yet to be lifted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05-02-10
[20]
뉴스
A strong-arm policy is needed to hold the pound down on the rebound
https://www.telegrap[...]
The Daily Telegraph
2009-05-15
[21]
뉴스
The reason that Europe is having a breakdown...it's the Euro, stupid
http://www.timesonli[...]
The Times
2005-06-09
[22]
웹사이트
John Major
http://www.number10.[...]
2011-10-16
[23]
웹사이트
Inflation Targeting Has Been A Successful Monetary Policy Strategy
https://www.nber.org[...]
NBER
2016-10-31
[24]
웹사이트
Targeting Inflation: The United Kingdom in Retrospect
https://www.imf.org/[...]
IMF
2016-10-31
[25]
웹사이트
Gallup spreadsheet
http://ksghome.harva[...]
2009-10-13
[26]
뉴스
Billionaire who broke the Bank of England
https://www.telegrap[...]
The Daily Telegraph
2002-09-13
[27]
웹사이트
Black_Wednesday
http://is.muni.cz/el[...]
2016-02-24
[28]
뉴스
Treasury papers reveal cost of Black Wednesday
https://www.theguard[...]
The Guardian
2005-02-09
[29]
웹사이트
The Cost of Black Wednesday Reconsidered
http://www.hm-treasu[...]
HM Treasury
2013-04-03
[30]
웹사이트
Guide to the papers and full list of documents
http://www.hm-treasu[...]
HM Treasury
2013-04-03
[31]
뉴스
White Wednesday changed politics utterly: I'll be celebrating the anniversary with a reunion in Oxford
http://blogs.telegra[...]
The Daily Telegraph
2012-08-18
[32]
서적
The Downing Street Years
Harper
[33]
뉴스
Everyone in the UK should be thanking George Soros
http://www.telegraph[...]
The Daily Telegraph
2014-03-14
[34]
뉴스
Greece should remember the lesson of Black Wednesday
http://new.spectator[...]
The Spectator
2015-06-20
[35]
웹사이트
平成7年 年次世界経済報告
http://wp.cao.go.jp/[...]
内閣府
1995-12-15
[36]
간행물
International Financial Statistics
IMF
1994-02
[37]
간행물
International Financial Statistics
IMF
2000-09
[38]
뉴스
Treasury papers reveal cost of Black Wednesday
http://www.guardian.[...]
2005-02-09
[39]
뉴스
(제목 없음)
Financial Times
2005-02-1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