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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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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병은 1960~1970년대 영국 경제가 겪었던 고비용, 저효율, 낮은 생산성, 잦은 노사 분쟁으로 인한 경제 침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사회주의적 정책의 확산, 과도한 복지 지출, 강성 노조의 영향력 증대가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1970년대 오일 쇼크와 스태그플레이션을 겪으며 영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받는 등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마거릿 대처 정부의 대처리즘 개혁을 통해 영국병 증상이 완화되었으나, 북해 유전 고갈과 에너지 정책 전환 등 21세기에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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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병
지도 정보
개요
명칭영국병
다른 명칭영어: British disease
英国病
배경
시기1970년대
원인경제 침체
높은 인플레이션
높은 실업률
노사 분규
낮은 생산성
과도한 정부 지출
특징
경제적 특징스태그플레이션
국제 경쟁력 약화
파운드화 가치 하락
사회적 특징사회적 불안정
파업 증가
노사 갈등 심화
정치
주요 정책소득 정책
사회 계약
산업 국유화
주요 사건
겨울 불만1978년-1979년 겨울 파업 사태
광부 파업1984년-1985년 광부 파업
극복 과정
해결책마거릿 대처의 경제 개혁
신자유주의 정책 도입
규제 완화
노동 시장 유연화
민영화
결과 및 영향
경제적 결과인플레이션 억제
생산성 향상
실업률 감소
사회적 결과노동조합의 힘 약화
사회적 불평등 심화
양극화 현상 발생
평가엇갈린 평가 존재 (경제 회복 vs 사회적 불평등 심화)
참고 자료
관련 기사"The British disease revisited" (이코노미스트)
"The British Disease and Its Cure" (배런스)
"Enemies within: Thatcher and the unions" (BBC 뉴스)

2. 역사적 배경

1960년대서독보수 언론이 영국 노동자의 비능률성을 가리켜 '영국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17] 이는 대영제국 시절 영국인의 강점이었던 적극성, 과감성, 냉철함, 끈기, 자기희생, 이타주의와 같은 미덕이 사라지고, 중산층이 쇠퇴한 현상을 지적한 것이다. 그 원인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고복지·고부담 정책과 평등주의의 확산으로 부나 특권에 대한 의식이 옅어진 점이 지목되었다.[17]

2. 1. 국유화 정책

1971년 영국 자동차 산업의 상징인 롤스로이스가 국유화되고 국민의 세금이 투입되었다.[18][19]

애틀리 내각은 1945년부터 1951년 사이에 석탄, 전력, 가스, 철강, 철도, 운수 등의 산업을 국유화했다. 1951년 보수당 처칠 내각은 1953년 철강과 운수 등을 민영화했다. 그러나 1964년 노동당 윌슨 내각은 1967년 철강과 운수 등을 다시 국유화했다. 제2차 윌슨 내각은 1975년 자동차 산업(브리티시 레일랜드)을, 캐러핸 내각은 1977년 항공우주 산업(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을 국유화했다.

3. 전개

1960년대와 1970년대 영국 근로자들의 생산성은 미국보다 50%, 서독보다 25% 낮았다. 영국의 1인당 GDP는 1960년대에 세계 9위였지만, "영국병" 때문에 1971년에 15위, 1976년에 18위까지 급격하게 추락했다. 1971년 영국 자동차 산업의 상징인 롤스로이스를 국유화하고 국민의 세금을 투입해 살리려고 했다.[18][19]

1960년대~1970년대 영국은 노사 분쟁이 빈번하고 경제 성장이 부진하여 다른 유럽 국가들로부터 "유럽의 병자"(Sick man of Europe|유럽의 병자영어)라고 불렸다.[7]

영국 경제 악화
내용1960년~1969년1970년~1979년
GDP 성장률3.2%2.4%
인플레이션율3.5%12.5%
경상수지(GDP 비율)0.2%▲0.2%
재정수지(GDP 비율)▲2.5%▲5.0%
실업률1.5%3.3%



1960년대 국유화 등의 산업보호정책은 영국 자본에 의한 국내 제조업 설비투자를 감소시켰고, 자본은 해외로 유출되어 기술개발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국영기업은 경영개선 노력을 하지 않게 되면서 제품의 품질이 저하되었다. 영국은 국제경쟁력을 잃어가면서 수출은 감소하고 수입은 증가하여 국제수지가 악화되었다.[8]

자동차 산업파업이 만성화되고 일본차 수출이 활발해진 1970년대가 겹치면서 매우 심각한 상황이 되었고, 2000년대에는 외국 회사의 브랜드명으로만 이름이 남아있다.

1973년~1974년의 1차 오일쇼크를 계기로 영국은 경제 침체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졌다.[18][19] 실업률은 증가했고, 원자재 가격과 임금 상승으로 생산성이 저하되어 통화 파운드의 가치는 하락했다. 통화 가치 하락에도 불구하고 국제수지는 개선되지 않았다. 물가상승이 기승을 부린 것은 근본적으로 경제체질이 약화된 것이지만, 그 배경에는 강성 노조의 무리한 임금인상요구와 복지지출 충당을 위한 재정적자의 확대가 주요 변수로 작용했다.[21]

1973년 영국 석탄 산업 노조는 오일 쇼크로 석탄 산업이 반사 이익을 얻자,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하고 석탄 공급량을 제한하였다. 이 파업은 곧바로 철도와 전기 등 공공 부문 노조들의 요구로 이어졌다. 에드워드 히스 영국 총리는 석탄 산업 노조에게 파업 중단을 요구했으나, 1974년 총선에서 패배하여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석탄 산업 노조는 더욱 강경하게 요구를 밀어붙였고, 결국 1975년 석탄 광업 근로자들의 임금이 30%나 올랐다. 그러나 임금 인상은 인플레이션을 가중시켰고, 이는 다시 노동자들의 더 많은 임금 인상 요구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과거 윈스턴 처칠 수상 집권기에 노동부 차관이었던 윌리엄 베버리지는 복지국가 건설을 목표로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로 잘 알려진 베버리지 보고서이다.[20] 이를 통한 영국의 경제와 사회 복지 모델은 경제 위기 전까지만 해도 외국의 칭송을 받던 모범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시작된 과도한 사회복지와 노조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인한 지속적인 임금상승, 그리고 생산성의 저하로 경제가 전반적으로 침체하여 소위 고복지·고비용·저효율을 특징으로 하는 만성적인 영국병에 시달렸으며 급기야는 1976년IMF의 금융지원을 받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21]

오일 쇼크 이후 영국에서는 경제성장률이 저하되고 세금 수입이 감소하면서 재정적자가 증가하고 국채의 누적 잔고가 계속 증가했다. 달러화 강세 파운드화 약세를 막기 위해 외환시장 개입을 실시한 결과, 1976년에는 외화 보유고 부족에 빠져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융자를 받게 되었다. IMF는 융자 조건으로 재정적자 감축을 지시했기 때문에 영국 정부는 재정 지출 감축을 강요받았고, 공무원 급여 억제가 과제가 되었다. 또한, 사회보장제도를 유지하려고 세입 증대를 시도하게 되었다.

3. 1. 경제 침체와 국제 경쟁력 약화

1960년대와 1970년대 영국 근로자들의 생산성은 미국보다 50%, 서독보다 25% 낮았다. 영국의 1인당 GDP는 1960년대에 세계 9위였지만, "영국병" 때문에 1971년에 15위, 1976년에 18위까지 급격하게 추락했다. 근본적인 원인은 고비용, 저효율적인 노동 시장 구조였는데, 영국 정부는 비효율적인 산업을 구조조정 없이 그대로 유지하면서 "국유화"를 단행하였다. 1971년 영국 자동차 산업의 상징인 롤스로이스를 국유화하고 국민의 세금을 투입해 살리려고 했다.[18][19]

1960년대~1970년대 영국은 노사 분쟁이 빈번하고 경제 성장이 부진하여 다른 유럽 국가들로부터 "유럽의 병자"(Sick man of Europe|유럽의 병자영어)라고 불렸다.[7]

영국 경제 악화
내용1960년~1969년1970년~1979년
GDP 성장률3.2%2.4%
인플레이션율3.5%12.5%
경상수지(GDP 비율)0.2%▲0.2%
재정수지(GDP 비율)▲2.5%▲5.0%
실업률1.5%3.3%



1960년대 국유화 등의 산업보호정책은 영국 자본에 의한 국내 제조업 설비투자를 감소시켰고, 자본은 해외로 유출되어 기술개발에서 뒤처지게 되었다. 국영기업은 경영개선 노력을 하지 않게 되면서 제품의 품질이 저하되었다. 영국은 국제경쟁력을 잃어가면서 수출은 감소하고 수입은 증가하여 국제수지가 악화되었다.[8]

자동차 산업파업이 만성화되고 일본차 수출이 활발해진 1970년대가 겹치면서 매우 심각한 상황이 되었고, 2000년대에는 외국 회사의 브랜드명으로만 이름이 남아있다.

3. 2. 오일 쇼크와 스태그플레이션

1973년~1974년의 1차 오일쇼크를 계기로 영국은 경제 침체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발생하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졌다.[18][19] 실업률은 증가했고, 원자재 가격과 임금 상승으로 생산성이 저하되어 통화 파운드의 가치는 하락했다. 통화 가치 하락에도 불구하고 국제수지는 개선되지 않았다. 물가상승이 기승을 부린 것은 근본적으로 경제체질이 약화된 것이지만, 그 배경에는 강성 노조의 무리한 임금인상요구와 복지지출 충당을 위한 재정적자의 확대가 주요 변수로 작용했다.[21]

1973년 영국 석탄 산업 노조는 오일 쇼크로 석탄 산업이 반사 이익을 얻자, 임금 인상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하고 석탄 공급량을 제한하였다. 이 파업은 곧바로 철도와 전기 등 공공 부문 노조들의 요구로 이어졌다. 에드워드 히스 영국 총리는 석탄 산업 노조에게 파업 중단을 요구했으나, 1974년 총선에서 패배하여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석탄 산업 노조는 더욱 강경하게 요구를 밀어붙였고, 결국 1975년 석탄 광업 근로자들의 임금이 30%나 올랐다. 그러나 임금 인상은 인플레이션을 가중시켰고, 이는 다시 노동자들의 더 많은 임금 인상 요구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3. 3. 재정 악화와 IMF 구제 금융

과거 윈스턴 처칠 수상 집권기에 노동부 차관이었던 윌리엄 베버리지는 복지국가 건설을 목표로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이것이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로 잘 알려진 베버리지 보고서이다.[20] 이를 통한 영국의 경제와 사회 복지 모델은 경제 위기 전까지만 해도 외국의 칭송을 받던 모범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시작된 과도한 사회복지와 노조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인한 지속적인 임금상승, 그리고 생산성의 저하로 경제가 전반적으로 침체하여 소위 고복지·고비용·저효율을 특징으로 하는 만성적인 영국병에 시달렸으며 급기야는 1976년IMF의 금융지원을 받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21]

오일 쇼크 이후 영국에서는 경제성장률이 저하되고 세금 수입이 감소하면서 재정적자가 증가하고 국채의 누적 잔고가 계속 증가했다. 달러화 강세 파운드화 약세를 막기 위해 외환시장 개입을 실시한 결과, 1976년에는 외화 보유고 부족에 빠져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융자를 받게 되었다. IMF는 융자 조건으로 재정적자 감축을 지시했기 때문에 영국 정부는 재정 지출 감축을 강요받았고, 공무원 급여 억제가 과제가 되었다. 또한, 사회보장제도를 유지하려고 세입 증대를 시도하게 되었다.

4. 위기

1970년대부터 영국은 과도한 사회복지와 노동조합의 영향력으로 경제가 침체되어 영국병에 시달렸으며, 1976년에는 IMF의 금융지원을 받는 상황에 몰렸다.[21]

4. 1. 과도한 복지 문제

1946년 노동당 애틀리 내각은 베버리지 보고서에 기초하여 국민이 원칙적으로 무료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국민건강보험법과 국민이 노령 연금과 실업 보험을 받을 수 있는 국민 보험법을 제정했다. 1948년에는 정부가 생활고를 겪는 사람들을 돕는 국민 부조법과 청소년을 보호하는 아동법을 제정했다. 이러한 정책들로 영국에서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불리는 사회 보장 제도가 확립되었다.[20]

1970년대부터 과도한 사회복지와 노조의 영향력으로 경제가 침체되어 영국병에 시달렸으며, 1976년에는 IMF의 금융지원을 받는 상황에 몰렸다.[21] 전 국민을 대상으로 연금, 무료 의료, 각종 수당(결혼, 임신, 아동, 과부, 장례) 등을 지급하는 복지 제도는 1979년 기준 전체 예산의 45.7%를 차지할 정도로 비대해졌다. 실업자와 노령 인구 증가, 가족 제도 약화로 인한 독신 가구 증가는 복지 지출을 더욱 가속화했다.[21]

과도한 복지 지출은 1973~1979년 기간 중 GDP의 3.8%에 달하는 재정 적자를 야기했고, 이는 미래 세대에 부담을 전가하고 정부의 정책 여력을 축소시켰다. 사회적 평등을 추구한 정책은 소득 재분배에 일부 기여했으나, 시장 기능을 저해하고 기업과 근로자의 의욕을 저하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21]

사회보장제도는 재정 적자를 심화시켰을 뿐 아니라, 근로 의욕 약화, 자발적 실업 증가, 조세 부담 가중으로 인한 기업가 정신 쇠퇴 등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산업혁명 당시 영국인들의 근면함은 사라지고 과도한 복지를 요구하는 경향이 심화되었다. 복지 재정은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해야 했기에, 높은 조세 부담률과 사회보장 부담률은 '일하는 사람이 손해'라는 인식을 확산시켜 근로 의욕을 저하시켰다.[21][22][23]

1970년대 소득세 최고 세율은 83%[9]였고, 비근로소득에는 15%의 추가세가 부과되어 최고 98%에 달하는 누진세가 적용되었다. 이러한 세제와 과도한 실업 보험은 근로 의욕을 저하시키고 사회적 활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4. 2. 노동조합의 과도한 영향력

1964년1979년 영국 노동당은 지나치게 친노동자적인 선심성 정책을 펼쳤고, 정부 내부에서는 이에 대한 반대가 거의 없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영국의 노동운동은 산발적이었으며 중심 조직이 없었다. 1973년 영국 석탄 산업 노조는 오일 쇼크로 석탄 산업이 반사 이익을 얻자,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고 석탄 공급량을 제한하였다. 이 파업은 곧바로 철도와 전기 등 공공 부문 노조들의 요구로 이어졌다.[18][19]

에드워드 히스 영국 총리는 석탄 산업 노조에게 파업 중단을 요구했으나, 1974년 총선에서 패배하여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석탄 산업 노조는 더욱 강경하게 요구를 밀어붙였고, 결국 1975년 석탄 광업 근로자들의 임금은 30%나 인상되었다. 그러나 임금 인상은 인플레이션을 가중시켰고, 이는 다시 노동자들의 더 많은 임금 인상 요구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물가 상승의 근본 원인은 경제 체질 약화였지만, 강성 노조의 무리한 임금 인상 요구와 복지 지출 확대를 위한 재정 적자 역시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21]

1970년대 영국에서는 여러 차례의 파업이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1차 석유파동 이후 스태그플레이션 극복을 위해 보수당 히스 내각은 노동조합과 임금 억제 협상을 벌였지만 실패했고, 1974년 2월 총선에서 노동당이 제1당이 되면서 히스 내각은 사퇴했다. 이후 집권한 제2차 윌슨 내각은 노동조합의 요구에 가까운 임금 인상을 허용했다.

1978년 말부터 1979년 초 '분노의 겨울'에는 주요 산업 노동조합이 대규모 임금 인상에 합의하자, 공공 서비스 노동자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의사와 간호사 파업으로 병원은 기능을 상실했고, 급식 조리사 파업으로 학교는 휴교했으며, 쓰레기 수거인 파업으로 쓰레기는 수거되지 않았고, 묘지 관리인 파업으로 사망자 매장이 지연되었으며, 트럭 운전사 파업으로 난방용 등유 배달이 중단되는 등 문제가 발생했다. 제임스 캘러핸 내각은 노동당 내부 갈등으로 인해 이러한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5. 영국병 치유를 위한 노력

영국은 대처리즘이라고 불리는 개혁을 통해 영국병 치유를 시도했다.[18] 마거릿 대처 총리는 1979년 집권하여 시장경제 원리에 기반한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5. 1. 대처리즘

영국은 이러한 사회현상을 타파하기 위해 '대처리즘'이라고 불리는 개혁을 시작하게 된다.[18] '철의 여인'으로 불린 마거릿 대처 총리는 1979년 집권하자마자 고비용·저효율의 경제구조 전환을 통해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해 시장경제 원리를 중시하는 경제 전부문에 걸친 경제개혁에 착수했다. 대처리즘의 골자는 재정지출 삭감, 공기업 민영화, 규제 완화와 경쟁 촉진 등으로, 이는 공공부문 개혁으로 집대성된다.

1979년 총선에서 보수당이 승리하여 5월에 대처가 집권했다. 대처 내각은 국영기업의 민영화, 금융 긴축을 통한 인플레 억제, 재정 지출 감축, 세제 개혁, 규제 완화, 노동 조합 약화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영국병 증상은 극복[10]되었지만, 대처 재임 중에는 불황이 개선되지 않았고, 실업자 수는 오히려 증가했으며,[11] 재정 지출도 줄지 않았고, 반대파를 배제하는 강경한 태도 등으로 인해 대처는 재임 중에도, 그 이후에도 영국 내에서 찬반 양론이 엇갈리는 인물이 되었다.

5. 2. 신노동당과 제3의 길

1997년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은 보수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했다.[1] 블레어 내각은 메이저 내각을 거쳐 대처 내각의 기본 노선을 계승하면서도, 시정하는 정책을 실시했다.[1]

또한, 블레어 내각은 "쿨 브리타니아"라는 용어를 사용한 브랜드 전략을 추진하여, 영국의 낡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젊고 활기찬 이미지로 바꾸려는 정책을 펼쳤다.[1]

5. 3. 북해 유전과 경제 회복

1980년대 이후 북해유전에서 생산되는 원유 수출이 가능해짐으로써 영국병에서 벗어났다.[12] 1998년 유럽 최대 원유 수출국이 되면서 재정 적자는 흑자로 전환되었다.[12] 국내총생산(GDP) 또한 1992년부터 2008년까지 플러스 성장을 지속했다.

2001년 블레어 내각은 이를 받아들여 "영국병 극복 선언"을 하고, "쿨 브리타니아" 구상에 대한 투자를 추진했다.

투자자 짐 로저스는 영국병을 구원한 것은 결국 북해유전이었다고 말하며, 현대 일본에는 이와 같은 자원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13]

6. 21세기 이후의 과제

2005년 북해 유전의 원유 생산량 감소로 영국은 국내 수요를 충족할 수 없게 되면서 원유 순수입국으로 전환되었다.[14] 2020년까지 북해 유전 고갈이 예상됨에 따라, 에너지 정책의 중심을 원자력으로 전환하고 중국의 투자와 기술 협력을 받아들여[15] “영국병” 재발 방지에 노력하고 있다.

7. 비판적 시각

1960년대 초 서독보수 언론이 영국 노동자의 비능률성을 가리켜 '영국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17] 이들은 번영했던 대영제국 중산층의 쇠퇴와, 적극성, 과감성, 냉철함, 끈기, 자기희생, 이타주의와 같이 영국인의 강점으로 여겨졌던 미덕이 사라진 것을 영국병의 증상으로 보았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고복지·고부담 정책과 평등주의가 일반화되면서 부나 특권에 대한 의식이 희박해진 것을 그 원인으로 주장했다.[17]

케임브리지 대학교 장하준 교수는 ‘영국병’은 실체가 없고 역사적 사실과도 맞지 않다고 말했다.[24] 실제로 영국의 연간 경제성장률은 1961년부터 1973년까지 마이너스를 기록한 적이 없으며, 1973년의 연간 경제성장률은 6.5%였다. 영국의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1973년 10월 오일쇼크 이후인 1974년(-2.463%)과 1975년(-1.48%)이다.[25]

진보주의자들은 프랑스, 독일과 달리 영국 정부가 실업급여만 지급하고 적극적으로 취업을 돕지 않은 것을 영국병의 원인으로 반박한다.

참조

[1] 서적 Access to History: Britain 1951-2007 https://books.google[...]
[2] 뉴스 The British disease revisited http://www.economist[...] 2018-01-24
[3] 뉴스 The British Disease and Its Cure https://www.barrons.[...] 2018-01-24
[4] 뉴스 Enemies within: Thatcher and the unions http://news.bbc.co.u[...] 2018-01-24
[5] 간행물 英国病('76) http://www.jiyu.co.j[...] 自由国民社 2002-04
[6] 간행물 英国病('86) http://www.jiyu.co.j[...] 自由国民社 2002-04
[7] 뉴스 The real sick man of Europe http://www.economist[...] 2005-05-19
[8] 웹사이트 昭和44年 年次世界経済報告 第17表 http://wp.cao.go.jp/[...]
[9] 웹사이트 日・米・英の所得税(国税)の税率の推移 http://www.mof.go.jp[...]
[10] 웹사이트 イギリス http://100.yahoo.co.[...]
[11] 서적 面白いほどよくわかる世界経済-日本を取り巻く世界経済の現状とその問題点(学校で教えない教科書) 日本文芸社 2010
[12] 웹사이트 Crude oil and petroleum production, imports and exports, 1890 to 2011 https://www.gov.uk/g[...]
[13] 웹사이트 「失われた30年」の正体。世界一裕福な国だった日本に起きた異変 https://zuuonline.co[...]
[14] 웹사이트 UK Trade - October 2015 http://webarchive.na[...] 2015-10
[15] 웹사이트 Multimillion boost to UK economy as China and UK government sign civil nuclear agreement and sign agreement to deepen cooperation on climate change https://www.gov.uk/g[...]
[16] 서적 衰退しない大英帝国―その経済・文化・教育 1750‐1990 晃洋書房 1997
[17] 웹사이트 영국병 https://term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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