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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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주 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 설화와 관련된 숲으로, 신라 건국 이전부터 존재했던 곳이다. 원래 시림으로 불렸으나, 김알지가 발견된 후 계림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탈해 이사금 9년에 닭 울음소리를 듣고 금궤에서 김알지를 발견하여 김씨 성을 하사하고, 시림을 계림으로 고쳐 국호로 삼았다. 반면, 《삼국유사》는 김알지의 출생 설화가 혁거세의 탄생 설화와 혼합되어 묘사되어 있다. 계림은 신라의 별칭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김알지의 7대손 미추 이사금이 신라 왕이 된 이후 김씨가 왕위를 계승했다. 현재는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김알지 탄생을 기념하는 비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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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계림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한글 | 계림 |
한자 | 鷄林 |
로마자 표기 | Gyerim |
다른 로마자 표기 | Kyerim |
일반 정보 | |
종류 | 사적 (전승지) |
지정 번호 | 제19호 |
지정 날짜 | 1963년 1월 21일 |
면적 | 23,023m² |
위치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번지 |
시대 | 신라 탈해왕 시대 |
관리 | 경주시 |
소유 | 경주시 외 |
홈페이지 | 국가문화유산포털 |
세계유산 정보 | |
일부 | 경주역사유적지구 |
ID | 976 |
등재 연도 | 2000년 |
기준 | 문화유산: (2), (3) |
추가 정보 | |
관련 문화재 정보 | 미추왕릉 |
2. 설화와 국호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출생 설화가 깃든 계림은 원래 시림(始林)이라고 불렸다.[20]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탈해 이사금 때 김알지가 발견된 후 시림이 계림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는 탈해 이사금 9년(65년)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에서 닭 울음소리를 듣고 호공을 보내 김알지를 발견하고, 시림을 계림으로 고쳐 국호로 삼았다고 기록했다.[21][22] 반면 《삼국유사》는 탈해왕 4년(60년)에 호공이 시림에서 큰 빛을 보고 금색 상자를 발견하여 김알지를 얻었고, 혁거세 탄생 설화와 관련지어 알지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구당서는 당 고종이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했다고 전하며, 김대문은 자신의 책을 계림잡전이라 했다.[1][4][5] 고려 관련 중국 책 계림유사[6], 일본서기에도 신라 국호를 계림으로 적은 기록이 있다.
김알지는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했고, 김알지의 7대손 미추가 김씨 최초로 왕위에 올랐다.[20] 내물왕 이후 신라 멸망까지 김알지 후손이 왕위를 계승하며 계림은 신성시되었다. 조선 순조 3년(1803년) 김알지 탄생 기념비가 건립되어 계림비각에 모셔져 있다.[18][30]
2. 1.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에 따르면, 원래 시림이라 불리던 이곳은 서기 65년 봄 3월에 김알지가 발견되면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당시 탈해 이사금은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는 시림에서 금으로 된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왕에게 알렸다. 왕이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다.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고 여겨 태자로 삼았다. 또한 시림의 이름을 계림으로 바꾸고, 신라의 국호로 삼았다고 한다.[31]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출생담에 따르면, 탈해 이사금 9년(서기 65년) 어느 날 밤, 왕이 금성의 서쪽 시림에서 닭 울음 소리를 듣고 새벽에 호공에게 가보게 하였다. 호공은 금색 작은 상자(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고 있었다고 왕에게 보고했다. 왕이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작은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하늘이 내려준 아이라고 키웠다. 커서 총명하고 지혜로워지자 알지라 이름 짓고, 금 상자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성을 김씨로 했다. 그리고 시림을 계림으로 고쳐 국호로 삼았다고 한다.[21][22]
2. 2. 《삼국유사》 기록
삼국유사에서는 탈해왕 4년(서기 60년)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 서쪽 마을에 가다가 시림(구림이라고도 함)에서 큰 빛을 보았고, 자주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드리워졌으며, 구름 속 금색 상자(궤)가 나뭇가지에 걸린 상자에서 빛이 나고, 나무 아래에서 흰 꿩이 울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김알지를 얻었다고 전한다.[31] 같은 책 혁거세조에서는 처음 왕이 난 곳이 계정(鷄井)이므로 국호를 계림이라 하였다고 전한다.2. 3. 김알지 설화와 혁거세 설화의 혼합
삼국유사는 13세기에 불교 승려들이 기록한 구전 설화의 종합 기록이기 때문에, 김의 ''계와 관련된 전설''이 국가의 시조에 대한 전설과 혼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건 발생 시점으로부터 1000년 이상의 차이가 있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역사서인 삼국사기에서는 ''계와 관련된 전설''이 김알지 부분에만 언급되어 있고, 혁거세 부분에는 언급되지 않는다.[2]2. 4. '계림' 국호 사용 기록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탄생 설화와 관련된 계림은 원래 '''시림'''(始林)이라고 불렸다.[20] 《삼국사기》에 따르면, 탈해 이사금 9년(서기 65년) 3월, 왕이 금성 서쪽 시림에서 닭 울음소리를 듣고 호공을 보내 확인하게 하였다. 호공은 금색 작은 상자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왕이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 사내아이가 있었고, 이 아이가 김알지이다. 왕은 시림을 계림으로 고치고, 이를 국호로 삼았다고 한다.[21][22]《삼국유사》에서는 김알지 발견 시기를 영평 3년(서기 60년) 8월 4일로 기록하고 있으며, 호공이 밤에 월성 서쪽 시림에서 큰 빛을 보고 금색 상자를 발견한 것으로 묘사한다. 상자 안의 아이는 혁거세 거서간 탄생 설화와 유사하며, 이로 인해 '알지'라는 이름을 얻었다.[27]
구당서에서는 당 고종이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세웠다고 전하며, 김대문은 자신의 책 이름을 계림잡전으로 지었다.[1][4][5] 고려의 이야기를 중국에서 적은 책의 제목도 계림유사로 지어졌으며,[6] 일본서기에서도 신라의 국호를 계림으로 적은 부분이 있다.
3. 역사적 의미와 현재
계림은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태어난 곳이라는 전설을 간직한 숲이다. 원래 신라 건국 때부터 있던 숲으로, 시림(始林)이라고 하던 것을 알지가 태어난 뒤로 계림(雞林)이라 하였다.[32]
탈해왕 4년(60)에 왕이 금성 서쪽 시림 숲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온통 환한 빛으로 가득하여, 날이 밝은 후 신하를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신하가 시림에 이르러 보니 금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 울고 있어 돌아와 고하니, 왕이 즉시 시림으로 가서 궤짝을 열어 보았다. 그 속에는 총명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고, 왕은 하늘에서 보낸 아이라 하여 태자로 삼았다. 아기라는 뜻의 '알지'라는 이름을 주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32]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알지는 파사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그 후 알지의 7대 후손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미추왕이다. 이후 내물왕부터 신라가 망할 때까지 김알지의 후손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계림은 신성한 곳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김알지 탄생에 대한 비(碑)가 남아있다.[32]
신성한 장소로 여겨지는 이곳에는 김알지의 탄생 설화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1803년 조선에 의해 세워졌다.[7] 계림은 1963년 1월부터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었다. 부지 면적은 7300m2이며 참나무, 물푸레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 싸리나무, 단풍나무, 회화나무 등 오래된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1][3]
4.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첨성대와 월성 사이에 있는 숲으로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에 있는 경주 김씨(慶州 金氏) 시조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김알지 탄생에 대한 비(碑)가 남아있다.[7] 부지 면적은 7300m2이며 오래된 참나무, 물푸레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 싸리나무, 단풍나무, 회화나무 등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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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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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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