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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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성혈은 제주도에 위치한, 탐라국 건국의 신화를 간직한 장소이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삼성혈은 세 신인(양을나, 고을나, 부을나)이 솟아난 곳으로, 이들은 일본국에서 온 세 공주와 결혼하여 탐라국을 건국했다. 삼성혈과 관련된 전설은 세 신인이 솟아난 과정과 세 공주와의 혼인, 농경의 시작 등을 담고 있으며, 삼성혈은 제주 고씨, 양씨, 부씨의 시조가 탄생한 곳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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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 신화 - 삼성 신화
삼성 신화는 탐라국 건국 설화로, 한라산 북쪽 기슭에서 솟아난 세 신인이 일본국에서 온 사신과 세 처녀를 맞이하여 탐라국을 건국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고대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한국사 왜곡에 이용되기도 했다. - 제주특별자치도의 사적 - 제주 고산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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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혈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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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한글 | 삼성혈 |
한자 | 삼성혈 (三姓穴) |
로마자 표기 | Samseonghyeol |
뜻 | 세 성씨의 구멍 |
문화재 정보 | |
국가 | 대한민국 |
유형 | 사적 |
명칭 | 제주 삼성혈 (濟州 三姓穴) |
지정 번호 | 134 |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성로 22 (이도일동) |
시대 | 미상 |
면적 | 33,833m² |
소유 | 고·양·부 삼성사재단 |
지정일 | 1964년 6월 10일 |
공식 웹사이트 | 삼성혈 공식 사이트 |
문화재청 ID | 13,01340000,39 |
2. 역사적 기록
삼성혈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역사서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고려사 『고기(古記)』에는 탐라에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 삼신인(三神人)이 솟아나 일본국에서 온 세 왕녀와 혼인하여 탐라를 번영시켰다는 내용이 있다. 동국통감에는 장왈양(長曰良)이라 하여 장위양설(長爲良說)이 굳어졌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양고부(良高夫)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 외에도 이병도의 《한국사(韓國史)》, 김태능의 《제주도사논고(濟州島史論攷)》, 《국사대사전(國史大事典)》, 《한국사대사전》, 현용준의 《제주도신기(濟州島神記)》 등 여러 문헌에서 삼성혈 관련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1]
2. 1. 고려사
고려사 『고기(古記)』에 따르면, 탐라는 남해 가운데 있었고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삼신인(三神人)이 땅에서 솟아났다. 이들은 을라(乙那) 삼형제였는데, 맏이는 양을나, 둘째는 고을나, 셋째는 부을나라 하였다. 세 사람은 거친 들판에서 사냥하며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어느 날 붉은 진흙으로 봉인된 나무 상자가 동쪽 바닷가로 떠내려 온 것을 발견하고 열어보니, 그 안에 석함(石函)이 있었고 붉은 띠에 자줏빛 옷을 입은 사자(使者) 한 명이 따라와 있었다. 석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3명과 소, 말, 오곡 씨앗 등이 있었다. 사자는 자신이 일본국 사신이며, 일본 국왕이 세 왕녀를 낳고 "서해 한가운데 있는 산에 신자(神子) 3명이 강생(降生)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려는데 배필이 없다"하여 자신에게 세 왕녀를 모시게 하였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떠나가 버렸다.[3]삼형제는 나이 차례로 세 왕녀와 혼인하고, 샘물이 달고 땅이 기름진 곳에 활을 쏘아 터를 정했다.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徒), 고을나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徒),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徒)라 하고,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고 소와 말을 기르니 날로 부유하고 번영하였다.[3]
2. 2. 동국통감
《동국통감(東國通鑑)》은 성종 15년(1484)에 간행되었는데, 장왈양(長曰良)이라 하여 장위양설(長爲良說)이 굳어졌다고 한다. 효종 4년(1654) 이원진(李元鎭) 목사는 삼성혈조(三姓穴條)에 양고부(良高夫)라 썼고, 숙종 29년(1703) 이형상(李衡祥) 목사 역시 삼성사상량문(三姓祠上樑門)에 양고부(良高夫)로 썼다. 이때 사우(祠宇)를 완성하고 삼신인(三神人)의 위패 순위를 정할 때, 삼성신인강생(三姓神人降生)의 사적 문헌과 국사를 널리 상고(詳考)한 끝에 양을나(良乙那)를 제1위에, 고을나(高乙那)를 제2위에, 부을나(夫乙那)를 제3위에 모시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제문(祭文)을 지어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1]2. 3. 왕조실록
《왕조실록》에 따르면 영조 5년(1771년)에 고한준(高漢俊) 등이 주상(主上)께 올린 상소문에 양고부(良高夫)로 썼다는 기록이 있다.[1]2. 4. 기타 문헌
이병도의 《한국사(韓國史)》, 김태능의 《제주도사논고(濟州島史論攷)》, 《국사대사전(國史大事典)》, 《한국사대사전》, 현용준의 《제주도신기(濟州島神記)》 등에도 삼성혈 관련 기록이 양고부(良高夫)로 기록되어 있다.[1]3. 삼성혈 전설
고려사 고기(高麗史 古記)에 따르면, 태초 탐라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삼신인(三神人)이 솟아났다고 한다. 이들은 수렵 생활을 하며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었다. 어느 날 제주도 동해안에 일본에서 흘러온 나무 상자가 표류해 왔는데, 그 안에는 세 명의 일본 국왕의 딸과 소, 말, 오곡의 종자가 들어 있었다. 삼신인은 이들과 혼인하여 농경을 시작하고 탐라국을 건국하였다.[3] 제주고씨, 제주양씨, 제주부씨는 이 세 신인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이후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 성종 15년(1484) 간행된 동국통감에는 맏이를 양(良)이라 칭하고, 효종 4년(1654)에 이원진 목사도 삼성혈조에 양고부(良高夫)라 썼으며, 숙종 29년(1703)에 이형상 목사 역시 삼성사상량문에 양고부(良高夫)로 썼다. 이때 삼성사의 위패 순위를 정하는데 있어, 양을나(良乙那)를 제1위에 모시고, 고을나(高乙那)를 제2위에, 부을나(夫乙那)를 제3위로 결정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영조 5년(1771)에 고한준(高漢俊)등이 상소문에도 양고부(良高夫)로 썼다. 또한 이병도의 한국사를 비롯한 여러 역사책에도 양고부(良高夫)로 기록되어 있다.
3. 1. 을나(乙那) 삼 형제의 탄생
고려사 〈고기〉(高麗史 古記)에 따르면, 태초 탐라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삼신인(三神人)이 솟아났다.[3] 이들은 수렵 생활을 하며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었다.[2] 어느 날 제주도 동해안에 일본에서 흘러온 나무 상자가 표류해 왔는데, 그 안에는 세 명의 일본 국왕의 딸과 소, 말, 오곡의 종자가 들어 있었다.[3]3. 2. 세 공주와의 혼인
어느 날, 세 신인이 한라산에서 동쪽 바다를 바라보니, 보라색 흙으로 봉인된 나무 상자가 파도에 떠밀려 오는 것을 발견했다.[2] 나무 상자는 성산읍 온평리 해안에 도착했고, 세 신인은 상자를 열어 보았다.[2] 그 안에는 달걀 모양의 둥근 옥 상자가 있었고, 보라색 옷을 입은 사자가 있었다.[2] 옥 상자를 열자, 아름다운 보랏빛의 파란 옷을 입은 세 명의 처녀가 나왔다. 그녀들은 소와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왔다고 한다.[2]고려사 고기(高麗史 古記)에 따르면, 나무 상자 안에는 일본국 사신과 세 공주, 소, 말, 오곡의 종자가 들어 있었다.[3] 사자는 "나는 일본국 사신입니다. 우리 왕이 이 세 왕녀를 낳고 이르되 서해 한가운데 있는 산에 신자(神子) 3명이 강생(降生)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려는데 배필이 없다하시고 이에 신(臣)에게 명하여 세 왕녀를 모시게 하였습니다.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大業)을 이룩하시옵소서"하고 홀연히 구름을 타고 떠나가 버렸다."라고 하였다.
세 신인은 세 공주와 혼인하고, 농경을 시작하며 정착 생활을 시작하였다.[3] 세 신인은 정성껏 제물을 준비하고 의식을 행했으며, 세 공주 각각과 결혼하겠다고 하늘에 알렸다. 그들은 연못 옆 동굴에 신방을 마련하고, 그때부터 인간으로서 살았다.[2] 세 신인은 나이 순서대로 세 공주와 짝을 지었다.[3] 양을나가 맏이였고, 고을나가 버금, 부을나가 셋째였다. 이들은 샘물이 달고 땅이 기름진 곳에 활을 쏘아 터를 정하고 살기 시작했다.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徒), 고을나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徒),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徒)라 하였다. 그리고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고 망아지와 송아지를 기르니 날로 부유하고 번영하였다.
3. 3. 탐라국 건국
고려사 고기(高麗史 古記)에 따르면, 탐라는 남해 가운데 있었고 처음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양을나, 고을나, 부을나 삼신인이 땅에서 솟아났다. 이들은 활을 쏘아 떨어지는 곳을 도읍으로 정하기로 하고,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사냥을 했다.[2] 하루는 붉은 진흙으로 봉한 나무 상자가 동쪽 바닷가로 떠내려 온 것을 발견하고 열어 보니, 그 안에 푸른 옷을 입은 처녀 3명과 망아지, 송아지, 오곡 씨앗 등이 있었다. 일본국 사신은 "우리 왕이 세 왕녀를 낳고 서해 한가운데 있는 산에 신자(神子) 3명이 강생(降生)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려는데 배필이 없다하시고 이에 신(臣)에게 명하여 세 왕녀를 모시게 하였습니다.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大業)을 이룩하시옵소서"하고 홀연히 구름을 타고 떠나갔다.[3] 세 신인은 나이 차례로 세 왕녀를 배필로 삼고 샘물이 달며 땅이 기름진 곳에 나아가서 활을 쏘아 터를 정했다.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徒), 고을나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徒),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徒)라 하고 비로소 오곡을 파종하고 또한 망아지와 송아지를 길러 날로 부유하고 번영하였다.[2]제주고씨, 제주양씨, 제주부씨 사람들이 이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세 신인의 후손으로 여겨진다.
4. 삼성혈의 위치와 구조
삼성혈은 제주시 도심에 있는 신당과 함몰된 곳으로 구성되어 있다.[1]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서 세 명의 반신이 땅에서 솟아올라 고대 탐라 왕국과 그 백성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2]
5. 현대의 삼성혈
삼성혈은 오늘날에도 제주도민들에게 중요한 유적지로 인식되고 있다.
참조
[1]
간행물
삼성혈 (三姓穴)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6-18
[2]
간행물
삼성 신화 (三姓 神話)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6-18
[3]
뉴스
삼성혈(三姓穴)
http://encykorea.aks[...]
2022-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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