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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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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알지는 신라 탈해 이사금 9년(65년)에 시림에서 발견된 인물로,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로 여겨진다. 금색 궤짝 안에서 발견되었으며, 닭이 울었다는 묘사와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와 유사하다. 김알지는 금상자에서 나왔기에 김씨 성을 받았으며, 발견된 숲은 계림으로 불렸고, 이는 신라의 국호로 사용되었다. 김알지는 미추 이사금의 7대조로, 그의 후손들이 신라 왕실에서 권력을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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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지
인물 정보
한글 표기김알지
한자 표기金閼智
로마자 표기Gim Alji
생애
시대신라
출생1세기
주요 활동신라의 김씨 왕족의 시조
가족 관계
배우자미상
자녀세한
아도 갈문왕

2. 탄생 신화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김알지의 탄생 신화가 기록되어 있다.

김알지 탄생 신화는 김씨 부족의 시조 출현을 나타내는 것으로, 석씨 시조인 탈해 이사금에 의해 발견되어 양육되었다는 것은 신라 왕위계승에서 김씨의 등장과 독점이 가장 늦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된다.[17] 삼국유사에는 탈해 이사금이 김알지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후에 파사 이사금에게 양보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알지의 이후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의 7대손 미추 이사금이 김씨 최초로 왕위에 즉위하였다. 알지에서 미추까지의 세보는 삼국사기삼국유사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세대수는 같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김알지가 세조(世祖)로 추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8] 신라의 추존왕으로 추정되는 태조 성한왕이 그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다.

문무대왕릉비 및 신라의 각종 금석문에는 김알지 이후 신라 왕들이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기록이 다수 있으며, 김일제의 자손으로 여겨진다.[6][7][8][9][10][11][12][13][14]

2. 1. 발견

1656년 조속이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 설화를 그린 금궤도(金櫃圖).


65년 탈해 이사금은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 울음 소리를 들었다. 호공(瓠公)을 시켜 확인하게 하니, 금빛 작은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의 보고를 받은 왕은 직접 가서 함을 열었고,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때부터 시림은 계림(鷄林)이라 불렸고, 아이는 금함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1]

삼국유사삼국사기는 김알지의 탄생에 관한 거의 동일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9년(65년) 3월, 탈해 이사금은 수도 금성(경주시) 서쪽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왜인호공에게 조사하게 했다. '''금색'''의 작은 상자가 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고, 그 나무 아래에서 하얀 '''닭'''이 울고 있었다. 탈해 이사금은 작은 상자를 가져와 열어보니 그 안에서 작은 사내아이가 나타났는데, 용모가 수려하여 기뻐하며 그를 키웠다.

삼국유사』 김알지 탈해왕대 조에 따르면, 영평 3년 경신(60년) 8월 4일, 왜인 호공(표공)이 밤에 월성의 서쪽 마을을 걷다가 시림 속에서 큰 빛을 보았다. 자색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고, 구름 속에서 금색 작은 상자가 내려와 나무 가지에 걸렸다. 상자에서 빛이 났고[4], 그 나무 밑에서는 흰 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은 이 사실을 탈해 이사금에게 보고했고, 탈해 이사금은 시림으로 나아갔다. 작은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 작은 사내아이가 있었고, 일어섰다. 신라 시조 혁거세의 고사[5]와 매우 비슷했으므로, 작은 아이를 뜻하는 "알지"를 이름으로 삼았다. 탈해 이사금은 이 아이를 안고 왕궁으로 돌아갔는데, 새와 짐승들이 따라와 기뻐하며 춤을 추었다.

2. 2. 탄생과 명명

65년(탈해 이사금 9년) 탈해 이사금은 밤에 금성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 울음소리를 듣고 신하 호공을 보냈다. 호공은 나뭇가지에 금빛 작은 함이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1] 왕이 직접 가서 함을 열어보니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있었다.

삼국유사삼국사기는 김알지의 탄생에 관한 거의 동일한 이야기를 전한다. 이에 따르면, 아이는 금함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씨라 하고,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하였다. '알지'라는 이름은 어린아이를 뜻하는 말이라고 하나, 후대에 붙여진 기록이므로 당시에도 그렇게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2] 알지는 고대에 성모(聖母)를 뜻하는 말이었다는 설도 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설화에서 혁거세거서간이 알에서 나와 처음 입을 열 때 스스로 알지거서간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알지는 곡물 또는 곡물에 들어있는 신령(神靈)을 나타내는 말이고, 특정 인명이 아닌 농업의 신 또는 그 대리자로서의 기능을 가지는 신라 초기 왕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알'은 금(金)을 나타내고 '지'는 존장자(尊長者)에게 붙이는 존칭이므로, 알지는 김씨 부족의 족장을 뜻한다고도 한다.[3]

이 기록은 김씨 부족의 시조 출현을 보여주는 것으로, 석씨 시조인 탈해 이사금에 의해 발견되어 양육되었다는 것은 신라 왕위계승에서 김씨의 등장과 독점이 가장 늦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된다.[17] 탈해 이사금이 김알지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후에 파사 이사금에게 양보했다는 기록도 있다.

2. 3. 해석

김알지라는 이름의 뜻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삼국유사》에서는 '알지'가 어린아이를 뜻하는 말이라고 했지만, 이는 후대에 붙여진 기록이므로 당시에도 그렇게 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알지'가 고대에 성스러운 어머니(聖母)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주장한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설화에서 혁거세가 알에서 나와 처음 말할 때 스스로 '알지거서간'이라고 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알지'는 곡물이나 곡물에 깃든 신령(神靈)을 나타내는 말이며, 특정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농업의 신 또는 그 대리자로서의 기능을 하는 신라 초기 왕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알지'의 '알'은 금(金)을, '지'는 존경하는 어른(尊長者)에게 붙이는 존칭이므로, '알지'는 김씨 부족의 족장을 뜻한다고도 한다.

이러한 기록들은 김씨 부족의 시조 출현을 보여주는 것으로, 탈해 이사금에 의해 발견되어 길러졌다는 것은 신라 왕위 계승에서 김씨가 가장 늦게 등장하고 독점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된다.[17]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김알지의 탄생에 대해 거의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탈해 이사금계림(경주) 서쪽의 시림에서 닭 울음소리를 듣고 신하 호공을 보냈는데, 호공은 나뭇가지에 걸린 금색 상자를 발견했다.[1] 상자에서는 빛이 났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왕이 상자를 열자 그 안에 아이가 있었고, 금상자에서 나왔고 매우 영리했기 때문에 '김(金)알지'라고 이름 지었다. 시림은 계림(닭 숲)이라고 불렸고, 이는 신라의 국호로도 사용되었다.[2]

신화에서는 김알지가 총명하여 '알지'(지혜로운 자)라고 이름 지었다고 하며, 《삼국유사》에서는 '작은 아이'를 뜻한다고 해석한다. 이노우에 히데오는 '알'이 '알·곡령·조령(祖靈)'을 의미한다고도 주장한다.

3. 생애와 후손



65년 탈해 이사금은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의 수풀 속에서 닭 울음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신하 호공을 보냈다. 호공은 금빛의 작은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왕이 직접 가서 함을 열어보니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아이는 금함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

삼국사기》 〈미추왕조〉에는 알지가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이 아도(阿道), 아도가 수류(首留), 수류가 욱보(郁甫), 욱보가 구도(仇道)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다고 하여, 알지를 시조로 하는 경주 김씨의 세보(世譜)를 소개하고 있다. 알지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알지라는 말은 어린아이, 즉 아기를 부를 때 쓰는 말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후대에 붙인 기록이므로 당대에도 그렇게 쓰였는지는 알 수는 없다. 알지는 고대에 성모(聖母)를 뜻하는 말이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신라의 시조왕인 박혁거세 설화에서 혁거세거서간(居西干)이 알에서 나와 처음 입을 열 적에 스스로 알지거서간이라 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로써 알지는 곡물 또는 곡물에 들어있는 신령(神靈)을 나타내는 말이고 특정의 인명이 아닌 농업의 신 또는 그 대리자로서의 기능을 가지는 신라 초기 왕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알지의 알은 금(金)을 나타내는 말이고 지는 존장자(尊長者)에 붙이는 존칭어이므로 알지는 김씨 부족의 족장을 뜻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 기록은 김씨 부족의 시조 출현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그가 석씨 시조인 탈해왕에 의해 발견되어 양육되었다는 것은 신라 왕위계승에서 김씨의 등장과 독점이 가장 늦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17]삼국유사》에도 거의 같은 전설이 기록되어 있으며, 탈해왕이 김알지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후에 파사 이사금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이후의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의 7대손 미추 이사금이 김씨 최초로 왕에 즉위하였다. 알지에서 미추까지의 세보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세대수는 같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세조(世祖)로 추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8]


  • 부인: 마정부인(摩貞夫人), 석강조(昔康造)의 딸
  • * 아들: 김세한(金勢漢)
  • ** 손자: 김아도(金阿道)
  • 처조부: 탈해 이사금(脫解尼師今)


그의 사망 시기와 정황은 현재 알려져 있지 않으며 어떠한 기록에서도 정확히 확인할 수 없지만, 그의 후손들이 신라 왕실에서 권력을 잡을 때까지 강력한 관료로 계속해서 봉사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3. 1. 후손과 왕위 계승

김알지의 아들은 세한이었고, 그 후손들은 아도(阿都) - 수류(首留) - 욱보(郁甫) - 구도(俱道)로 이어진다. 구도의 아들(김알지의 7대손)은 김씨 계열의 첫 신라 왕인 미추 이사금이었다. 세한은 보통 6세기 신라의 태조로 묘사된 김성한과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김씨 왕통의 시조이자 김씨 초대 왕인 미추 이사금에 이르는 계보는 다음과 같다.

사료계보
삼국사기』 신라본기 미추 이사금 기김알지 - 세한 - 아도 - 수류 - 욱보 - 구도 - 미추
삼국유사』 김알지 탈해왕대 조김알지 - 세한 - 아두 - 수류 - 욱부 - 구도(구도) - 미추



2세에 해당하는 "세한"에 대해서는, 681년에 건립된 문무왕릉비와 935년에 건립된 광조사 진철대사 보월승공탑비문에서는 "성한(星漢)", 939년에 건립된 비루암 진공대사 보법탑비문(루는 田+盧)에서는 "성한(聖漢)"으로 나타난다. 이는 신라의 시조와 동음이표기이며, 김알지와 함께 세한을 시조로 하는 설도 전해졌다고 여겨진다.

3. 2. 성한과의 동일인물설

신라의 추존왕으로 추정되는 태조 성한왕이 김알지와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있다.[18] 경주 김씨 족보에는 그의 아들을 세한, 열한, 성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는 인물로 기록하고 있으나, 성한 (신라)과 그를 동일 인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조선 후기의 김정희는 경주 김씨 족보상 그의 아들로 등재된 성한왕과 그를 동일 인물로 추정했다.

김씨의 아들은 세한(勢漢)이었고, 그 후손들은 아도(阿都) - 수류(首留) - 욱보(郁甫) - 구도(俱道)로 이어진다. 구도의 아들(김알지의 7대손)은 김씨 계열의 첫 신라 왕인 미추 이사금이었다. 세한은 보통 6세기 신라의 태조로 묘사된 김성한과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김씨 왕통의 시조이자 김씨 초대 왕인 미추 이사금에 이르는 계보는 다음과 같다.

사서김알지로부터 미추이사금까지의 계보
《삼국사기》 신라본기 미추 이사금 기김알지 - 세한 - 아도 - 수류 - 욱보 - 구도 - 미추
《삼국유사》 김알지 탈해왕대 조김알지 - 세한 - 아두 - 수류 - 욱부 - 구도(구도) - 미추



2세에 해당하는 "세한"에 대해서는, 681년에 건립된 문무왕릉비와 935년에 건립된 광조사 진철대사 보월승공탑비문에서는 "성한(星漢)", 939년에 건립된 비루암 진공대사 보법탑비문(루는 田+盧)에서는 "성한(聖漢)"으로 나타난다. 이는 신라의 시조와 동음이표기이며, 김알지와 함께 세한을 시조로 하는 설도 전해졌다고 여겨진다.

4. 김알지 관련 성씨

경주 김씨에서 분파된 강릉 김씨, 연안 김씨와 김씨에서 권씨로 성을 바꾼 안동 권씨 또한 김알지의 후예이다.[16]

증보문헌비고 등의 문헌에 따르면, 신라 때 왕족 형제가 왕에게 바른말을 하다가 미움을 받아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형은 북빈경(지금의 강릉)에 살게 되었고, 동생은 동음홀•시염성(지금의 연안군)에 살게 되었다.

5. 김알지 이름의 유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알지라는 이름은 어린아이, 즉 아기를 부를 때 쓰는 말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후대에 붙인 기록이므로 당대에 그렇게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17] 알지는 고대에 성모(聖母)를 뜻하는 말이었다는 설도 있다.

박혁거세 설화에는 혁거세거서간(居西干)이 알에서 나와 처음 입을 열 때 스스로 알지거서간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알지는 곡물 또는 곡물에 들어있는 신령(神靈)을 나타내는 말이고, 특정 인명이 아닌 농업의 신 또는 그 대리자로서의 기능을 가지는 신라 초기 왕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알지의 '알'은 금(金)을, '지'는 존장자(尊長者)에게 붙이는 존칭이므로, 알지는 김씨 부족의 족장을 뜻한다고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성장하여 총명했기에 "알지"(지혜로운 자의 의미)라고 이름 지었다고 하며, 『삼국유사』에서는 "작은 아이"라는 뜻으로 보고 있다.[15]

참조

[1] 서적 삼국사기 卷第一 신라본기 제일 始祖赫居世, 瓠公者 미상기족성 본왜인 삼국사기
[2] 서적 삼국사기 1-1 탈해 니사금 삼국사기
[3] 웹사이트 월간조선 https://monthly.chos[...] 2003-09-10
[4] 문서 김알지 신화 해석
[5] 문서 赫居世 탄생 신화
[6] 논문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
[7] 서적 이색보고: 김가 뿌리 탐사,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 http://www.donga.com[...] 신동아 2016-09-25
[8] 서적 騎馬흉노국가 신라 연구: 조갑제(월간조선 편집장)의 심층취재: 내 몸속을 흐르는 흉노의 피 http://monthly.chosu[...] 월간조선 2016-09-25
[9] 서적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23> 금관의 나라, 신라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16-09-25
[10] 서적 한국 7대 불가사의 역사의 아침 2007-01-01
[11] 서적 경주 사천왕사(寺) 사천왕상(四天王像) 왜 4개가 아니라 3개일까 https://web.archive.[...] 조선일보 2016-09-25
[12] 서적 2부작 <문무왕릉비의 비밀> - 제1편: 신라 김씨왕족은 흉노(匈奴)의 후손인가? http://www.kbs.co.kr[...] KBS 역사추적 2016-09-25
[13] 서적 2부작 <문무왕비문의 비밀> - 제2편: 왜 흉노(匈奴)의 후예라고 밝혔나? http://www.kbs.co.kr[...] KBS 역사추적 2016-09-25
[14] 서적 (채널돋보기)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의 후손일까 http://www.imaeil.co[...] 매일신문 2016-09-25
[15] 문서 서기관과 알지의 기원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
[16] 문서 김씨 성씨의 기원과 알지 신화
[17] 서적 삼국사기 1145-01-01
[18] 서적 조선왕조실록 영조 33년(1757) 3월 26일 5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 1757-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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