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평군 (이륵)
1. 개요
경평군(慶平君) 이륵(李玏)은 조선 선조와 온빈 한씨의 아들로, 1600년에 태어나 1673년에 사망했다. 1614년 위성원종공신에 책록되었으나, 광해군, 인조 재위 기간 동안 횡포와 비행으로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다. 사대부들의 집을 철거하고 백성들을 폭행하는 등 문제가 잦았으며, 인조 시대에도 낚시터 탈취, 백성들의 토지 강탈, 관원 폭행 등의 행위로 비난을 받았다. 현종 즉위 후에는 종친들을 이끌고 권도를 따르기를 청하는 등 변화된 모습을 보였으며, 삭녕 최씨와 혼인하여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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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한국사 -
토기
토기는 점토를 구워 만든 그릇으로, 일본에서는 구움 정도에 따라 도자기, 자기와 구분되며 인류 최초의 화학적 변화 응용 사례로 식생활과 문화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다원설이 유력한 발상지와 일본 열도 1만 6500년 전 토기 발견이 특징이며, 일본어 관점에서 정의, 역사, 제작 과정, 용도, 세계 각지 토기 문화를 설명한다. -
1674년 사망 -
존 밀턴
존 밀턴은 17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사상가로, 청교도 혁명기에 활동하며 《실낙원》 등의 작품을 남겼고, 언론 자유 옹호, 공화정 정부 참여 등 정치적 활동도 활발히 했으며,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674년 사망 -
효성인황후
효성인황후는 강희제의 황후로, 색니의 손녀이며, 강희제와 혼인하여 내명부를 관장하고 두 아들을 낳았으며, 산후병으로 사망 후 황후로 추존되었다. -
1600년 출생 -
오타 스케무네
오타 스케무네는 에도 시대 초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다이묘가 된 인물로, 쇼군 측근인 육인중으로 활동하고 막부의 중요 사업에 참여하였다. -
1600년 출생 -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는 스페인 황금시대의 극작가이자 시인으로, 철학적 희곡과 성찬신비극으로 유명하며, 명예, 운명, 자유 의지를 다룬 작품들로 스페인 극장의 제2기를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2. 생애
경평군은 1600년(선조 33년) 6월 18일 선조와 온빈 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륵(玏)이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경평군은 왕자로서 모범을 보이지 못하고 여러 비행을 저질렀다. 1616년(광해군 8년)부터 1622년(광해군 14년)까지, 그리고 인조 즉위 후인 1625년(인조 3년)부터 1628년(인조 6년) 이후에도 거의 매년 문제를 일으켜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다.
하지만 현종 즉위 후에는 종친들을 이끌고 권도를 따르기를 청하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부묘를 간하기도 하였다. 이후 1673년(현종 14년) 음력 11월 28일 74세로 사망하였다.
2.1. 초기 생애 (1600년 ~ 1614년)
1600년 (선조 33년) 6월 18일 선조와 온빈 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륵(玏)이다.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2.2. 위성원종공신 책록과 논란 (1614년 ~ 1623년)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1등(衛聖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일부에서는 경평군의 성품이 곧고 평생 근신하면서 왕자의 신분도 내세우지 않고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고 하나, 《조선왕조실록》에서 나타나는 경평군의 모습은 이러한 평가와는 많이 다르다.
1616년(광해군 8년) 음력 4월 1일 형 흥안군과 함께 사간원에서 탄핵을 받았다. 당시 사간원에서는 흥안군과 경평군이 새로운 궁궐을 짓기 위해 마련된 빈 부지에 일부 사대부들이 집을 지었다는 이유로 소란을 피우며, 당시 부지 내에 있던 사대부들의 집을 무단으로 철거하거나, 종들을 풀어 집들을 뺏었다고 보고하였다. 또 두 형제가 늙은 부녀자를 구타하고, 과부들을 능욕하는 등의 행위도 저질렀다고도 하였다. 1618년(광해군 10년)에는 대궐 안의 하인을 무단으로 데려가 폭행하고 감금하는 바람에, 광해군이 직접 추고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당시 대신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경평군의 삭탈 관직을 청하였으나, 광해군은 이에 대해서는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평군은 3년 뒤인 1621년(광해군 13년)에 활인서의 별제로 있던 이제인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바람에, 추고를 하라는 전교가 또 내려졌다. 이듬해인 1622년(광해군 14년)에는 한 금리와 그 처를 잡아다가 죽기 직전까지 구타를 하여 또 탄핵을 받았다.
한편 이러한 경평군의 패악한 행동에 대해 일부에서 "숱한 왕자들"이라고 칭하며 비난하자, 1622년 음력 6월 20일 경평군의 친형 흥안군과 이복형 인성군은 경평군의 비행때문에 자신들까지 싸잡혀 비난을 받는 것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자 이틀 후인 음력 6월 22일에는 대신들이 상소를 올려 자신들이 말을 분명하게 하지 않아 다른 왕자들까지 피해를 입었다며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의 만류로 아무 일 없이 넘어가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2.3. 인조 즉위 이후의 행적 (1623년 ~ 1669년)
인조 즉위 후에도 경평군의 행동은 나아지지 않았다. 1625년(인조 3년) 강가에 정자를 짓고 낚시터를 만들면서 해당 지역 백성들에게 고기를 잡거나 나무 하는 일을 시켜 탄핵을 받았다. 같은 해 음력 11월 6일에는 열흘이 넘도록 국법을 어기고 행방불명되었다가 돌아와 또 탄핵을 받았다.
1626년(인조 4년)에는 한 백성의 땅을 빼앗았다가 다시 주인에게 되돌려준 것을 또 빼앗으려 하여 탄핵을 받았다. 1628년(인조 6년)에는 보물을 감춰두고는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 씌워 무단으로 가두고 구타하여 탄핵을 받았다. 이후에도 종을 시켜 소를 훔쳤다가 이를 다스린 관원을 구타하고, 여러 전택을 점유하면서 백성들에게 해를 입히고 심한 채무 독촉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평군의 행동에 대해 현대의 일부 학자는 경평군에게 일종의 정신 장애가 있다고 보았으며, 당시 인조도 경평군에 대해 "이미 실성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경평군은 자신의 집을 짓는데 해조에서 돈을 안 주었다며 관원들에게서 돈을 빼앗고 채무자를 가뒀으며, 관상감의 공물을 무단으로 갈취하는 등 거의 1년에 1~2회 꼴로 문제를 일으켜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현종 즉위 후에는 종친들을 이끌고 권도를 따르기를 청하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부묘를 간하기도 하였다. 이후 경평군은 1673년(현종 14년) 음력 11월 28일 향년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2.4. 현종 시대의 변화와 죽음 (1669년 ~ 1673년)
현종 즉위 후 경평군은 종친들을 이끌고 권도를 따르기를 청하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부묘를 간하기도 하였다. 이후 1673년(현종 14년) 음력 11월 28일 향년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3. 가족 관계
| 관계 | | 출생 || 사망 || 비고 | |||
|---|---|---|---|---|
| 부왕 | 선조 | 1552년 | 1608년 | 조선 제14대 왕 |
| 생모 | 온빈 한씨 | 1581년 | 1664년 | |
| 형 | 흥안군 | 1598년 | 1624년 | |
| 동생 | 정화옹주 | 1604년 | 1667년 | |
| 동생 | 영성군 | 1606년 | 1649년 | |
| 정부인 | 최태임 | 1600년 | ? | 최씨, 군부인 |
| 며느리 | 청주 한씨 | ? | ? | 현감 한여형(韓汝泂)의 딸 |
| 며느리 | 동래 정씨 | ? | ? | 첨지 증 참판 정양찬(鄭良纘)의 딸 |
| 양첩 | 향란(香蘭) | ? | ? | |
| 양첩(며느리) | 사랑금(思郞今) | ? | ? | |
| 양첩 | 옥지(玉只) | ? | ? | |
| 며느리 | 원주 변씨 | ? | ? | 변계검(邊繼儉)의 딸 |
| 며느리 | 경주 김씨 | ? | ? | 김우량(金友諒)의 딸 |
| 양첩(며느리) | 복이(禮伊) | ? | ? | |
| 노비(며느리) | 잇덕(㗡德) | ? | ? | |
| 측실 | 미상 | ? | ? | |
| 양첩 | 유복개(有福介) | ? | ? | |
| 적장남 | 영양군 현(嶺陽君 儇) | 1619년 | ? | |
| 서손녀 | 이영진(李英眞) | 1646년 | ? | |
| 서손자 | 동원군 집(東原君 潗) | 1651년 | ? | |
| 서장남 | 영흥군 창(嶺興君 倀) | 1632년 | ? | |
| 며느리 | 단양 장씨 | ? | ? | 장득지(張得智)의 딸 |
| 서손녀 | 이영열(李英悅) | 1655년 | ? | |
| 서손자 | 단양군 해(丹陽君 海) | 1658년 | ? | |
| 서손자 | 단원군 강(丹原君 江) | 1661년 | ? | |
| 서손녀 | 이영단(李英丹) | 1664년 | ? | |
| 서손녀 | 이영종(李英終) | 1667년 | ? | |
| 서손자 | 이영삼(李英三) | 1669년 | ? | |
| 서손자 | 단창도정 원(丹昌都正 源) | ? | ? | |
| 서손녀 | ? | ? | ? | 윤수(尹脩)의 처 |
| 서손녀 | ? | ? | ? | 이지흥(李始興)의 처 |
| 서차남 | 영주군 파(嶺洲君 亻+罷) | 1639년 | ? | |
| 서손자 | 익선군 한(益善君 漢) | 1658년 | ? | |
| 서손녀 | 이계영(李季英) | 1661년 | ? | |
| 서손자 | 익창군 상(益昌君 湘) | 1662년 | ? | |
| 서손녀 | 이차영(李次英) | 1667년 | ? | |
| 서손자 | 이정식(李庭植) | 1669년 | ? | |
| 서손자 | 익흥군 형(益興君 泂) | ? | ? | |
| 서손녀 | ? | ? | ? | 최중망(崔重望)의 처 |
| 서3남 | 영림군 희(嶺臨君 俙) | ? | ? | |
| 서손녀 | 이숙례(李淑禮) | 1661년 | ? | |
| 서손자 | 계성군 담(鷄城君 淡) | 1663년 | ? | |
| 서손자 | 계원군 간(鷄原君 澗) | 1664년 | ? | |
| 서장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 | ? | |
| 사위 | 권엽(權惗) | ? | ? | 주부(主簿) |
| 서차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1640년 | ? | |
| 사위 | 황윤정(黃胤貞) | ? | ? | 직장(直長) |
| 외손자 | 황익만(黃益萬) | 1661년 | ? | |
| 외손녀 | 황만애(黃萬愛) | 1665년 | ? | |
| 외손자 | 황중만(黃重萬) | 1669년 | ? | |
| 외손자 | 황석만(黃錫萬) | 1673년 | ? | |
| 외손녀 | 황혜애(黃蕙愛) | 1676년 | ? |
경평군은 삭녕인 최윤조(崔胤祖)의 장녀인 최태임과 혼인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고, 3명의 첩에게서 3남 2녀를 두었다. 아들들은 영양군, 영흥군, 영주군, 영림군의 봉작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