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황씨
1. 개요
장수 황씨는 신라 시중 황경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고려 명종 때 전중감을 지낸 황공유가 남원으로 이주하여 정착했으며, 조선 시대에는 영의정 황희를 배출하여 명성을 얻었다. 장수 황씨는 조선 시대에 문과 급제자 44명을 배출했으며, 황희의 후손들은 호안공파, 소윤공파, 열성공파, 사직공파로 나뉘었다. 장수를 본관으로 하며, 전국에 걸쳐 분포하고 있으며, 특히 전라남도 완도군에 인구 비율이 높다.
| 이름 | 장수 황씨 |
|---|---|
| 한자 표기 | 長水黃氏 |
| 유형 | 씨족 |
| 국가 | 한국 |
| 지역 | 장수군 |
| 시조 | 황경 |
| 관련 인물 | 황희 황윤길 황진 황영하 |
| 관향 |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
|---|---|
| 시조 | 황경(黃瓊) |
| 중시조 | 황석부(黃石富) |
| 집성촌 |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전라남도 장흥군 회진면 덕산리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부남면 유평리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면 황교리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신평리 |
| 인물 | 황군서 황희 황치신 황수신 황여헌 황열 황정욱 황윤길 황진 황대중 황경원 황승원 황현 황의필 황의돈 황낙주 황정연 황윤석 황의성 황도연 황승민 황규선 황영하 황두연 황진하 황숙주 황의돈 황인자 |
| 년도 | 2015 |
| 인구 | 170,988명 |
| 가명 | 장수황씨 |
|---|---|
| 종류 | 씨족 |
| 나라 | 조선 |
| 영지 | 장수군 |
| 가조 | 황경 |
| 저명한 인물 | 황희 황윤길 황현 황낙주 황의성 황의조 황인범 |
| 각주 | 황씨종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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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황씨 -
황인철 (1940년)
황인철은 대한민국의 법조인, 변호사, 사회운동가로서, 판사 출신으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민청학련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시국사건 변론을 맡아 민주화 운동에 기여하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창립,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연합 대표 등 사회운동에도 참여했다. -
장수 황씨 -
황운하
2. 역사
조선 세종 때 영의정 황희가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황희의 장남 황치신(黃致身)은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셋째 아들 황수신(黃守身)은 남원부원군으로서 1467년(세조 13년) 영의정에 올랐다. 장수 황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4명을 배출하였다.
2.1. 시조 및 기원
시조 황경(黃瓊)은 신라 말기 시중(侍中)을 역임했다. 1723년(경종 계묘)에 편찬된 《장수황씨세보(長水黃氏世譜)》에는 '시조는 경(瓊)이며 신라(新羅)에서 벼슬하여 지위가 시중(侍中)에 이르렀고, 배(配)는 경주 김씨(慶州金氏)니 경순왕(敬順王) 부(溥)의 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대제학(大提學)과 영의정을 지낸 조인영(趙寅永)도 1831년 운계(雲溪) 황신구(黃信龜)의 비문에 '신라 상주(尙主 = 駙馬) 경(瓊)이 비로소 득성(得姓)하였다'라고 하여 이를 뒷받침한다.
9세손 황공유(黃公有)는 고려 명종 때 전중감(殿中監)을 지내고 무신 이의방(李義方)의 난을 피해 고향인 장수로 돌아왔다가 남원(南原)으로 옮겨 살았는데, 지금의 광한루(廣寒樓)가 옛 집터이다.
18세손 황석부(黃石富)까지 중간 계대를 고증할 수 없어 황석부(黃石富)를 기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황석부는 조선 세종 때 18년 동안 영의정에 재위한 황희(黃喜)의 증조부로서, 사후 호조참의(戶曹參議)로 추증되었다.
2.2. 중시조 및 번성
신라 말기 시중(侍中)을 역임한 시조(始祖) 황경(黃瓊)에 대해서는 1723년(경종 계묘)에 편찬된 《장수황씨세보(長水黃氏世譜)》에 '시조는 경(瓊)이며 신라(新羅)에서 벼슬하여 지위가 시중(侍中)에 이르렀고, 배(配)는 경주 김씨(慶州金氏)니 경순왕(敬順王) 부(溥)의 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831년 대제학(大提學)과 영의정을 지낸 조인영(趙寅永)도 운계(雲溪) 황신구(黃信龜)의 비문에 '신라 상주(尙主 = 駙馬) 경(瓊)이 비로소 득성(得姓)하였다'라 하여 이를 뒷받침한다.
9세손 황공유(黃公有)는 고려 명종 때 전중감(殿中監)을 지내고 무신 이의방(李義方)의 난을 피해 고향인 장수로 돌아왔다가 남원(南原)으로 옮겨 살았는데, 지금의 광한루(廣寒樓)가 옛 집터이다.
18세손 황석부(黃石富)까지 중간 계대를 고증할 수 없어 황석부(黃石富)를 기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황석부는 조선 세종 때 18년 동안 영의정에 재위한 황희(黃喜)의 증조부로서 사후 호조참의(戶曹參議)로 추증되었다.
영의정 황희가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황희 정승의 장남 황치신(黃致身)은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셋째 아들 황수신(黃守身)은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으로서 1467년(세조 13년) 영의정에 올랐다.
장수 황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4명을 배출하였다.
3. 본관
장수는 본래 백제의 우평(雨坪)이었는데, 신라에서 고택(高澤)으로 고쳐 장계군(長溪郡)에 속하게 하였고, 고려에서 장수현(長水縣)으로 고쳐서 남원부(南原府)의 임내(任內)로 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覽)》 전라도(全羅道) 장수현(長水縣) 성씨조(姓氏條)에 본현(本縣) 황씨(黃氏)라 되어있으며, '경(瓊)의 9세손(世孫) 공유(公有)가 고려 명종(明宗) 때 무신(武臣)의 변(變)을 피하여 고향(故鄕) 장수(長水)로 돌아왔고, 다시 지방 관헌을 피하여 남원으로 옮겼다. 후손이 이곳에 살았으니 광한루(廣寒樓)가 그 구기(舊基)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고려 명종(明宗) 이전부터 장수(長水)를 관향(貫鄕)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4. 분파
황희의 아들 4형제인 5세손에서 4파로 나뉜다.
| 이름 | 분파 |
|---|---|
| 황치신(黃致身) | 호안공파(胡安公派) |
| 황보신(黃保身) | 소윤공파(少尹公派) |
| 황수신(黃守身) | 열성공파(烈成公派) |
| 황직신(黃直身) | 사직공파(司直公派) |
5. 항렬자
|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50세 |
|---|---|---|---|---|---|---|---|---|---|---|---|---|---|---|---|---|---|---|---|---|---|---|---|---|---|---|---|---|---|---|
| 口현(顯) | 口주(周) | 의(義) | 口연(淵) | 인(仁) 해(楷) | 口하(夏) 口조(照) | 규(圭) 요(堯) | 口상(商) 口옥(鈺) | 영(永) 도(渡) | 口진(震) 口극(極) | 기(箕) 시(是) | 口중(重) | 호(鎬) 현(鉉) | 口순(淳) 口천(泉) | 만(萬) 동(棟) | 口섭(燮) 口욱(昱) | 시(時) 은(垠) | 口석(錫) 口갑(鉀) | 해(海) 재(渽) | 口식(植) 口업(業) | 병(炳) 지(智) | 口재(在) 口원(垣) | 용(鎔) 용(鏞) | 口택(澤) 口식(湜) | 상(相) 주(柱) | 口열(烈) 口석(晳) | 기(基) 당(塘) | 口종(鍾) 口정(錠) | 영(渶) 온(溫) | 口환(桓) 口병(柄) | 경(炅) 경(景) |
6. 인물
(출력 내용 없음)
7. 조선 왕실과의 인척 관계
선조의 서자 순화군의 정비 군부인 장수 황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