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용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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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계용묵은 평안북도 선천 출신의 소설가로, 1920년 소년 잡지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초기에는 사회주의적 경향의 작품을 썼으나, 이후 순수문학으로 전환하여 《백치 아다다》와 같은 작품을 통해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며, 글쓰기 기법의 세련성을 추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천황 불경죄 혐의로 투옥되기도 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잡지를 창간하고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 1961년 위암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작품은 현대 한국 단편 소설의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계용묵(桂庸黙, 본명: 하태용, 河泰庸, 1904년 9월 8일 ~ 1961년 8월 9일)은 대한민국의 소설가, 시인, 수필가이다. 1904년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나 삼봉공립보통학교와 일본 동양대학교[2]에서 교육을 받았다. 1920년 청소년 잡지 《새소리》에 시 〈글방이 깨어져〉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25년에는 시 〈오 부처여, 신령이여, 봄이 왔네〉로 《생장》 문학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계용묵은 현대 한국 단편 소설의 양식적, 기술적, 형식적 세련에 기여한 작가로 평가받는다.[5] 초기에는 사회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나, 이후 순수문학으로 전환하여 인간의 내면 심리와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2. 생애
1927년 《조선문단》에 〈최서방〉을 발표하면서 단편 소설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이후 시는 쓰지 않았다. 1935년경, 정비석, 석인해 등과 동인지 『해조』를 발행하려 시도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같은 해, 대표작 〈백치 아다다〉가 『조선문단』에 게재되었고, 1942년경까지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다.
이상을 포함한 그 시대의 많은 작가들처럼, 1943년 8월 일제강점기 당시 "천황에 대한 부적절한 경의를 표했다"는 혐의로 일본 식민 정부에 의해 투옥되었다.[3] 1944년 12월,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했다가 1945년 해방 이후 다시 상경했다.
1945년 9월, 정비석과 함께 『대조』를 창간하고, 1948년에는 김억과 함께 출판사 「수선사」를 설립했다. 1952년에는 잡지 『신문화』를 창간했다.
1959년, 장암을 앓게 되었으나 수술을 거부하고 한방약에 의존하며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1961년, 소설 《설수집》을 문예지 《현대문학》에 연재하던 중 8월 9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자택에서 사망했다.[3] 그의 단편 소설 〈백치 아다다〉는 임권택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제작되었다.[4]
'''생애 요약'''사건 내용 출생 1904년 9월 8일, 평안북도 선천군 남면 삼성동 군현리 결혼 1914년, 안정옥과 결혼 입학 1921년, 중동학교 입학 /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입학 유학 1928년 3월, 일본 도쿄 동양대학 동양학과 입학 귀국 1931년, 귀국 취직 1938년 5월, 『조선일보』 출판부 근무 수감 1943년 8월, 천황 불경죄 혐의로 수감 귀향 1944년 12월, 고향으로 귀향 상경 1945년 9월, 상경 창간 1945년 10월, 『대조』 창간 설립 1948년, 「수선사」 설립 사망 1961년 8월 9일, 자택에서 사망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904년 9월 8일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수안 계씨이며, 아호는 우서(雨西)이다.[2] 평안북도 선천의 대지주 집안에서 아버지 계항교(桂恒敎)의 1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할아버지인 계창전(桂昌琠)은 조선 말기에 참봉을 지냈다.
어린 시절에는 외가인 진주 하씨 호적에 올라 '''하태용'''(河泰鏞)이라는 이름을 받았으나, 외조부와 외숙부가 별세하고 생모마저 사망하자, 아버지 슬하에서 '''계용묵'''(桂鎔默)으로 다시 불리며 성장했다. 1911년 평안북도 선천 삼봉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4년 4학년 재학 중 안정옥과 결혼하였다.
1917년 삼봉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부로 상경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다녔지만, 할아버지의 강요로 고향에 끌려갔다. 이후 다시 경성으로 도주하듯 유학하여 1923년 아들 계명원을 얻었다.
1928년에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요 대학 철학과를 다녔으며, 1929년에는 도쿄에서 딸 계정원을 얻었다. 그러나 건강이 쇠약해져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2. 2. 문단 활동
계용묵은 1920년 《새소리》라는 소년 잡지에 《글방이 깨어져》라는 습작 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 첫 등단하였고, 1925년 《생장》이라는 잡지에 《부처님 검님 봄이 왔네》라는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1927년 《상환》을 《조선문단》에 발표하여 본격적인 소설가로 등단하였다.[2]
이후 《최서방》, 《인두지주》 등 현실적이고 경향적인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약 10여 년 가까이 절필하였다. 한때 그는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5년 인간의 애욕과 물욕을 그린 《백치 아다다》를 발표하면서부터 순수문학을 지향하였고, 1942년 수필가로도 등단하였다.
1943년 8월 일제강점기 당시 "천황에 대한 부적절한 경의를 표했다"는 혐의로 일본 식민 정부에 의해 투옥되기도 하였다.[3] 한국 해방 이후, 계용묵은 한국 문학계에서 심화되는 이념적 갈등 속에서 비당파적인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비교적 작품을 많이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묘사가 정교하여 단편 소설에서는 압축된 정교미를 잘 보여주었다. 대표작으로 《병풍 속에 그린 닭》, 《상아탑》 등이 있다.
2. 3. 해방 이후
1945년 8월, 조선이 해방되자 계용묵은 9월에 상경하여 정비석과 함께 『대조』를 창간했다. 1948년에는 김억과 함께 출판사 「수선사」를 설립하고, 1952년에는 잡지 『신문화』를 창간했다.[3] 해방 이후, 계용묵은 한국 문학계에서 심화되는 이념적 갈등 속에서 비당파적인 입장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3] 1961년 소설 《설수집》을 문예지 《현대문학》에 연재하던 중 사망했다.[3]
2. 4. 사망
1961년 8월 9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자택에서 위암으로 사망하였다.[3] 당시 현대문학에 《설수집》을 연재하던 도중이었다. 그의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3]
3. 작품 세계
3. 1. 초기: 사회주의적 경향
계용묵의 초기 소설 작품은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보여준다. 악랄한 지주에게 착취당하는 소작농의 고통을 묘사한 작품들이 그 예시이다. 그러나 계용묵은 공백기를 거쳐 문단에 복귀하면서 더 이상 좌익적 관점에서 자신의 주제에 접근하지 않았다.[5] 1935년에 발표된 《백치 아다다》는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정신 지체 여인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현대 사회의 풍속과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지만, 경제 문제는 계급 갈등이 아닌 기본적인 인간의 탐욕 수준으로 축소되어 나타난다.[5]
3. 2. 중기: 순수문학으로의 전환
계용묵은 초기 소설에서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보여주었다. 악랄한 지주에게 착취당하는 소작농의 고통을 묘사한 작품들이 그 예시이다. 그러나 공백기를 거쳐 문단에 복귀한 후에는 더 이상 좌익적 관점에서 자신의 주제에 접근하지 않았다.[5]
1935년에 발표된 《백치 아다다》는 이러한 변화를 분명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정신 지체 여인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현대 사회의 풍속과 만연한 물질적 욕망 추구를 비판한다. 하지만 경제 문제는 계급 갈등의 관점이 아닌 기본적인 인간의 탐욕 수준으로 축소되어 분석된다.[5]
이후 계용묵은 글쓰기 기법에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으며, 신비주의와 복잡한 상징주의를 사용했다. 《병풍에 그린 닭》, 《금순이와 닭》, 《마부》와 같은 소설에서 물질적 소유에 대한 욕망은 여전히 많은 악의 근원으로 비난받지만, 이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욕망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작품들은 어조가 다소 모호하며, 역사 의식이 결여되어 있고 평범한 사람들을 단순한 성찰의 대상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초기 소설들과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들은 계용묵의 예술적 기법이 점점 더 세련되어짐을 보여주며, 이는 《별을 헨다》, 《바람은 그냥 불고》, 《물매미》를 포함한 해방 후 작품에서도 이어진다.[5]
3. 3. 후기: 양식적, 기술적 세련 추구
계용묵은 주로 1930년대에 현대 한국 단편 소설의 양식적, 기술적, 형식적 세련에 기여한 작가로 기억된다.[5] 《별을 헨다》, 《바람은 그냥 불고》, 《물매미》를 포함한 해방 후 작품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이어졌다.[5]
4. 작품 목록
- 최군
- 인간적인 면을 가진 집주인
- 바보 아다다
- 병풍에 그린 닭
- 금순이와 닭
- 별을 세며
- 바람은 아직 불고
참조
[1]
웹사이트
Writers Database : - Korea Literature Translation Institute
http://www.klti.or.k[...]
2014-06-23
[2]
웹사이트
학력시항
http://people.search[...]
Naver
2014-06-23
[3]
웹사이트
Writers Database : - Korea Literature Translation Institute
http://www.klti.or.k[...]
2014-06-23
[4]
서적
Im Kwon-taek: The Making of a Korean National Cinema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5]
웹사이트
Writers Database : - Korea Literature Translation Institute
http://www.klti.or.k[...]
201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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