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키 요시오
1. 개요
고즈키 요시오는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으로, 1909년 보병 장교로 임관하여 독일에서 어학 장교로 활동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제19사단 사단장, 제2군 사령관, 몽골 주둔군 사령관, 제11군 사령관, 제17방면군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종전 후에는 조선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조선인민공화국 성립에 관여했으며, 전후에는 복원청 차관과 후생성 복원국장을 지냈다. 1971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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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현 출신 -
타지리 요시히로
1994년 IWA 재팬에서 데뷔한 일본 프로레슬러 타지리 요시히로는 ECW, WWE 등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하며 챔피언십을 획득했고, 독특한 스타일과 독무 기술로 유명하며 현재는 규슈 프로레슬링을 기반으로 활동한다. -
구마모토현 출신 -
야마시타 야스히로
야마시타 야스히로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무제한급 금메달리스트이자 203연승의 기록, 세계 선수권에서의 압도적 성적, 전일본 유도 선수권 9연패를 달성한 일본 유도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며, 은퇴 후에는 국제 유도계와 올림픽 운동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
1886년 출생 -
여운형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독립운동 단체 활동, 임시정부 참여,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노력으로 알려졌으나 해방 후 암살당했고 그의 삶과 죽음은 친일 논란과 암살 배후에 대한 논쟁을 낳고 있다. -
1886년 출생 -
오시마 히로시
오시마 히로시는 일본 육군 중장으로, 주독일 대사로 활동하며 반 코민테른 조약 및 삼국 동맹 조약 체결에 기여했고, 독일의 전쟁 정보를 일본에 보고했으나 연합군에 의해 해독되었으며,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
1971년 사망 -
임흥순
임흥순은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국회의원과 서울시장을 역임했으며,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파 명단에 등재되었다. -
1971년 사망 -
카를로스 P. 가르시아
필리핀의 정치인이자 변호사, 시인이었던 카를로스 P. 가르시아는 부통령를 거쳐 대통령직을 승계받아 필리피노 우선 정책과 긴축 정책을 추진하고 미군 기지 임대 기간 단축, 국제 벼 연구소 설립 제안, 공화국 문화상 제정 등 외교적, 문화적 발전에 기여했다.
2. 생애
고즈키 요시오는 1909년 보병 장교가 되었고 독일에서 어학 장교로 활동했다. 1940년 8월까지 여러 보직을 거쳤으며, 이후의 군 경력과 종전 이후의 행적은 하위 문단을 참고하라.
그의 생애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2.1.1. 제2차 세계 대전
고즈키 요시오는 1940년 9월 28일 제19사단장에 임명되어 한국에 주둔했다. 태평양 전쟁 개전 시에는 제19사단장으로서 나남에 있었다.
1942년 7월 1일, 만주국에 주둔하는 제2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5월 28일, 몽골 주둔군 사령관을 맡았다. 1944년 11월 22일, 제11군 사령관이 되었다.
1945년 4월 7일, 한국에 주둔한 제17방면군 사령관 겸 조선군 관구 사령관이 되었으나, 전투를 치르지 않은 채 1945년 8월 해산되었다. 종전 시에는 일제강점기 종료 이후의 한반도가 무정부 상태에 빠지는 것을 우려하여, 민중 보호를 위해 조선총독아베 노부유키 대장과 함께 조선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성립시켰다.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에서 거행된 항복 조인식에 참석했다. 12월 5일에는 제17방면군 사령관 겸 조선군관구 사령관으로서 "종전 상황에 관한 상주문"을 쇼와 천황에게 상주하여, "대어심을 받들어 국체를 옹호해야 할 중대한 임무는 앞으로도 비록 짊어지고 있으므로, 와신상담하며 국난 타개에 매진할 것을 기약한다"라고 맺었다.
2.1.2. 종전 이후
전후 고즈키 요시오는 시데하라 내각이나 요시다 내각 등에서 제1복원 차관 및 후생성 복원국장 등을 맡아, 각 전선의 육군 부대 귀환 업무를 총괄하며 전후 처리에 임했다.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에서 거행된 항복 조인식에 참석했다. 같은 해 12월 5일, 제17방면군 사령관 겸 조선군관구 사령관으로서 "종전 상황에 관한 상주문"을 쇼와 천황에게 상주하여, "대어심을 받들어 국체를 옹호해야 할 중대한 임무는 앞으로도 비록 짊어지고 있으므로, 와신상담하며 국난 타개에 매진할 것을 기약한다"라고 맺었다.
전후 도쿄도 세타가야 와카바야시에서 가나가와현 하야마로 이주했고, 만년에는 도쿄도 조후시 진다이지에서 보냈다. 1971년 4월 3일, 84세로 사망했다.
2.2. 말년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제19사단장으로 나남에 주둔했으며, 이후 제2군 사령관, 주몽군 사령관, 제11군 사령관, 제17방면군 사령관 겸 조선군 관구 사령관을 역임했다. 일제강점기 종료 후 한반도가 무정부 상태에 빠지는 것을 우려하여 민중 보호를 위해 조선총독아베 노부유키와 함께 조선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성립시켰다.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에서 열린 항복 조인식에 참석했다. 12월 5일에는 제17방면군 사령관 겸 조선군관구 사령관으로서 쇼와 천황에게 "종전 상황에 관한 상주문"을 상주하여, "대어심을 받들어 국체를 옹호해야 할 중대한 임무는 앞으로도 비록 짊어지고 있으므로, 와신상담하며 국난 타개에 매진할 것을 기약한다"라고 맺었다.
전후 시데하라 내각과 요시다 내각 등에서 제1복원차관, 후생성 복원국장 등에 취임하여 각 전선 육군 부대의 귀환 업무를 총괄하며 전후 처리에 힘썼다. 전후 도쿄도 세타가야 와카바야시에서 가나가와현 하야마로 이주했고, 만년에는 도쿄도 조후시 진다이지에서 여생을 보냈다. 1971년 4월 3일, 84세로 사망했다.
3. 연보
| 연도 | 내용 |
|---|---|
| 1909년 | 5월 27일 육군사관학교 졸업 |
| 1917년 | 11월 27일 육군대학교 졸업 |
| 1920년 | 9월 3일 육군성 부관 |
| 1921년 | 11월 독일 주재원 |
| 1923년 | 8월 육군 중좌 군무국 과원 |
| 1932년 | 8월 8일 육군 보병 대좌 · 육군성정비국 통제과장 |
| 1935년 | 3월 15일 보병 제11연대장 |
| 1937년 | 8월 2일 육군 소장 |
| 1937년 | 8월 26일 보병 제40여단장 |
| 1938년 | 7월 15일 육군성 정비국장 |
| 1939년 | 10월 2일 육군 중장 |
| 1940년 | 3월 9일 육군 운수부장 겸 제1선박 수송사령관 |
| 1940년 | 9월 28일 제19사단장 |
| 1942년 | 7월 1일 제2군 사령관 |
| 1943년 | 5월 28일 주몽군 사령관 |
| 1944년 | 11월 22일 제11군 사령관 |
| 1945년 | 4월 7일 제17방면군 사령관 겸 조선군 관구 사령관 |
| 1945년 | 12월 19일 제1복원성 차관 |
| 1946년 | 6월 15일 복원청 제1복원국장 |
| 1947년 | 10월 15일 후생성 복원국장 |
| 1947년 | 11월 28일 공직 추방 가(假)지정 |
| 1950년 | 8월 16일 후생성 복원국장 면직 |
4. 서훈
고즈키 요시오는 1940년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