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영
1. 개요
곡영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대사농을 역임했다. 그는 경서를 널리 공부하고, 특히 천문과 《역경》에 능통했다. 건시 3년 일식과 지진이 일어났을 때 황후의 총애를 지적하는 등 성제에게 간언을 하였으며, 왕봉, 왕담 등 왕씨 일족과의 관계를 맺었다. 원연 원년에 북지태수로 전출되었고, 왕근의 천거로 대사농이 되었으나, 병으로 파면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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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년 사망 -
호라티우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노예 출신 아버지 밑에서 교육받고 전투 경험을 쌓은 후 마이케나스의 후원을 받아 사비나 농장에서 시 창작에 전념하며 풍자시, 서정시, 서간시, 시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고, 그의 작품은 고대 로마 문학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여 후대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
기원전 8년 사망 -
가이우스 마이케나스
가이우스 마이케나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측근으로 권력 장악에 기여하고 호라티우스, 베르길리우스 등 시인들을 후원한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예술 후원가이며, 그의 이름은 예술 후원자를 뜻하는 메세나의 어원이 되었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전한의 정치인 -
구독
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전한의 정치인 -
장량
장량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초한쟁패기를 거쳐 전한 초기에 활약한 한나라 귀족 출신 인물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우고 유후에 봉해진 뛰어난 지략가이자 책사이다.
2. 생애
곡영은 전한 건소 연간에 어사대부 파연수의 속관이 되었고, 태상승(太常丞)으로 추천되었다. 경서를 두루 익혔으며, 특히 천문과 역경의 경방 학설에 정통했다.
건시 3년(기원전 30년), 일식과 지진이 일어나자 성제에게 황후의 총애를 지적하고, 대장군 왕봉에게 아첨하며 후궁을 늘려 자손을 번성케 할 것을 주장했다. 성제는 허황후를 질책했다.
이후 광록대부, 안정 태수를 거쳤다. 왕봉의 동생 왕담과 친했으나, 왕봉 사후 왕음과의 갈등으로 영군사마(營軍司馬), 장사, 호원사자(護苑使者) 등을 전전했다.
왕상이 위장군이 된 후, 성제에게 후궁 기강 확립과 측근 배제를 간언하여 태중대부, 광록대부 급사중에 임명되었다. 원연 원년(기원전 12년) 북지태수를 거쳐 왕근의 천거로 대사농이 되었으나, 병으로 파면되고 몇 달 후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와 학문
곡영은 아버지 곡길이 서흉노의 질지선우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살해당한 후, 장안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며 학문을 익혔다. 건소 연간에는 어사대부 파연수의 속관이 되었고, 이후 태상승(太常丞)으로 추천되었다. 그는 경서를 두루 익혔으며, 특히 천문과 역경에 관해서는 경방의 학설에 정통하여 재이(災異)를 많이 논하였다.
건시 3년(기원전 30년), 일식과 지진이 같은 날에 일어나자, 성제가 간관(諫官)을 찾았을 때 곡영은 황후가 총애를 독차지하기 때문이라고 간언하였다. 또한,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대장군 왕봉의 마음에 들기 위해 신분과 출산 경험을 따지지 않고 후궁을 들여 황실의 자손을 번성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제는 곡영의 상주문을 받아들여 허황후를 질책하였다.
2.2. 정치 활동과 왕씨 일족과의 관계
곡영은 아버지 곡길이 서흉노의 질지선우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살해당한 후, 장안의 하급 관리가 되어 학문을 익혔다. 건소 연간에 어사대부 파연수의 속관이 되었고, 태상승(太常丞)으로 천거되었다.
건시 3년(기원전 30년), 일식과 지진이 같은 날에 일어나자 성제는 간관(諫官)을 찾았고, 곡영은 황후가 총애를 독차지하기 때문이라고 간언하였다. 당시 권력을 쥔 대장군 왕봉을 탄핵하는 자가 많았으나, 곡영은 왕봉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신분과 출산 경험을 따지지 않고 후궁을 들여 황실의 자손을 번성케 하여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성제는 곡영의 상주문을 받아들여 허황후를 질책하였다. 이후 곡영은 광록대부로 승진하고 안정 태수로 발령되었다.
곡영은 왕봉의 아우 왕담과 친분이 있었는데, 왕담은 당초 왕봉의 후계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왕봉은 죽기 직전 종제 왕음을 후계자로 지목하였고, 왕음은 대사마거기장군이 되고 왕봉은 성문의 병력을 통솔하게 되었다. 곡영은 왕담에게 병사를 받지 말라고 하였고, 왕담은 곡영의 말대로 하였다. 이로 인해 왕담과 왕음의 사이가 벌어졌고, 곡영은 왕음의 겁박을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벼슬에서 물러나려 하였으나, 왕음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고 영군사마(營軍司馬)·장사·호원사자(護苑使者) 등 여러 관직을 전전하게 하였다.
왕음이 죽고 왕상이 위장군이 되었을 때, 곡영은 성제에게 후궁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과 측근을 배제할 것 등을 간언하였다. 노한 성제는 시어사에게 체포를 명하였으나, 화가 풀려 태중대부에 임명하고 광록대부 급사중으로 전임시켰다.
원연 원년(기원전 12년), 북지태수로 전출되었다. 이후 왕상이 죽었고, 표기장군이 된 왕근의 천거로 대사농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대사농이 된 지 한 해 만에 병에 걸렸고, 조정에 상주가 올라와 파면되었다. 본래 공경이 병에 걸리면 일단 거취를 묻는 것이 관례였는데, 곡영만 바로 파면되었다.
몇 달 후, 곡영은 집에서 죽었다. 곡영은 경서를 두루 익혔는데, 특히 천문과 《역경》에 관해서는 경방의 학설에 정통하여 재이(災異)를 많이 논하였다. 상주문을 마흔 번 이상이나 썼고, 모두 성제와 후궁들을 간하는 내용이었으나, 성제는 그가 왕씨에게 줄을 댄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2.3. 학문적 성취와 평가
곡영은 경서를 두루 익혔는데, 특히 천문과 《역경》의 경방 학설에 정통하여 재이(災異)를 많이 논하였다. 상주문을 마흔 번 이상이나 썼고, 주로 성제와 후궁들을 간하는 내용이었으나, 성제는 그가 왕씨(王氏)에게 줄을 댄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3. 관직
谷永중국어은 전한 말기의 관료로, 자는 자운(子雲)이며 장안 사람이다. 아버지 谷吉중국어은 흉노의 지지선우에게 사신으로 갔다가 살해당했다. 谷永중국어은 건소 연간에 어사대부 번연수의 속관이 되었고, 이후 태상 승으로 추천되었다.
건시 3년 (기원전 30년), 일식과 지진이 같은 날에 일어나자, 성제가 직언극간의 선비를 추천하게 했을 때 거론되었고, 그 당시의 상소가 성제의 눈에 들었다.
광록대부를 거쳐 안정 태수로 임명되었다. 양삭 3년 (기원전 22년), 왕봉이 사망하고 왕음이 대사마차기장군이 되었는데, 谷永중국어은 왕봉의 동생 왕담에게 성문의 병사를 받지 말 것을 권했고, 왕담은 그에 따랐다. 그 때문에 왕음과 왕담의 사이가 험악해졌다.
왕상이 위장군이 된 후, 谷永중국어은 성제에게 은밀한 행차와 후궁의 기강 숙정, 측근의 제거를 진언하여 성제의 노여움을 샀다.
원연 원년 (기원전 12년)에 북지 태수가 되었다. 1년여 지나 왕상이 사망하고 왕근이 표기장군이 되자, 谷永중국어을 추천했으므로, 원연 4년 (기원전 9년)에 谷永중국어은 대사농이 되었다. 그러나 다음 수화 원년 (기원전 8년), 谷永중국어은 병이 들어, 관리가 상소를 올려 그를 파면했다.
谷永중국어의 관직 임명 기록은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