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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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곽낙원은 1859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나 현풍 곽씨이며, 김구의 어머니이다. 삼각혼 풍습에 따라 김순영과 결혼하여 김구를 낳았으며, 아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하도록 지원했다. 곽낙원은 김구가 투옥되었을 때 옥바라지를 하고, 상하이 임시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재정 지원을 했다. 중일 전쟁 시기에는 피난을 다니며 김구를 보살폈고, 80세 생일에 독립 투사들을 위한 권총을 아들에게 요청하기도 했다. 1939년 중국 충칭에서 사망했으며, 199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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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낙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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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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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한국 독립 운동가, 김구의 어머니 |
배우자 | 김순영(Kim Sun-yŏng) |
자녀 | 1명 (김구) |
인물 정보 | |
출생일 | 1859년 2월 26일 |
출생지 | 조선 황해도 장연군 |
사망일 | 1939년 4월 29일 |
사망지 | 중화민국 충칭 |
묘소 | 대전현충원 |
훈장 | |
훈장 | 건국훈장 |
2. 생애
황해도 장연 출신인 곽낙원은 김순영과 결혼하여 백범 김구를 낳았다. 아들의 교육에 헌신하여 《천자문》, 《동몽선습》, 《사서삼경》 등을 가르쳤다. 김구가 치하포 사건과 신민회 활동으로 투옥되었을 때 옥바라지를 하였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절에는 상하이와 충칭을 오가며 아들을 지원하였다. 1939년 충칭에서 사망했으며,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 1. 출생과 가족
곽낙원은 1859년 2월 26일 황해도 장연군에서 태어났다.[1][2] 본관은 현풍 곽씨이다.[2] 황해도 전통 혼례 풍습인 삼각혼에 따라 김순영과 결혼했다.[2] 1876년, 17세에 아들 김창암(金昌巖, 훗날 김구)을 낳았다.[1]2. 2. 아들 김구 양육
곽낙원은 교육받지 못한 하층 농가 출신이었지만, 아들 김구가 같은 운명을 겪지 않도록 서당에 보내 교육시켰다.[2] 곽낙원은 아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고 《동몽선습》·《사서삼경》 등을 읽혔다.[1]1888년, 남편 김순영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곽낙원은 가산을 팔아 남편을 치료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고, 김구는 친척 집에 맡겼다.[2]
2. 3. 김구의 투옥과 옥바라지
1896년 치하포 사건으로 아들 김구가 일본인을 살해한 혐의로 인천 감옥에 수감되자,[2] 곽낙원은 인천으로 가서 식모살이를 하며 옥바라지를 하였다.[2] 이때 옥에 갇힌 아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외부 소식을 전해주었다.[2] 1911년 신민회 활동으로 아들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자 곽낙원은 다시 옥바라지를 하였다.[1]김구가 1904년 탈옥하고 결혼한 후, 며느리와 갈등이 있을 때마다 곽낙원은 항상 며느리 편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2. 4.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1922년, 곽낙원은 아들 김구를 따라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활동을 지원하였다.[1][3][2]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곽낙원과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2] 1924년 1월 며느리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후, 곽낙원은 손자 김신을 제대로 돌볼 수 없어 잠시 고아원에 맡기기도 했다.[2] 그녀는 하루에 두 끼 식사만을 겨우 마련할 수 있었고, 생일에는 凤凰单丛|ko|봉황단총중국어 두 줄을 선물로 받았다.[2]1925년 12월, 곽낙원은 두 손자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김구와 임시 정부에 자금을 보냈다.[2] 1934년 3월, 일본 당국의 감시를 피해 손자들과 함께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2]
2. 5. 중일전쟁과 피난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곽낙원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함께 중국 국민당을 따라 중국 각지를 전전하며 피난 생활을 하였다. 1938년 남목청 사건 당시, 아들 김구가 장사에서 암살 위협을 받았으나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곽낙원은 아들이 살아남은 것에 안도하면서도, 암살자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에 유감을 표했다.2. 6. 최후
1939년 4월 26일 중화민국 충칭에서 인후염과 폐병 등의 합병증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나, 치료받지 못하고 82세로 사망했다.[3][2]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2][1]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3. 유산과 평가
곽낙원은 백범 김구의 어머니로,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백범 김구는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곽낙원을 "국모"(國母|국모중국어)라고 칭하며 존경을 표했다.[3]
1992년 대한민국 정부는 곽낙원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1][2] 1948년에는 서울대학교 교수가 곽낙원의 청동상을 제작했는데, 이 조각상은 한복을 입고 그릇을 든 곽낙원이 김구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4]
3. 1. 백범일지
백범 김구는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곽낙원을 "국모"(國母|국모중국어)라고 칭하며 존경을 표했다.[3]3. 2. 대한민국 정부의 추서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1][2]3. 3. 동상
1948년, 서울대학교의 한 교수가 곽낙원의 청동상을 제작했다.[4] 이 조각상은 곽낙원이 한복을 입고 손에 그릇을 든 채, 김구를 위해 또는 상징적으로는 인천 감옥에 갇힌 김구의 두 번의 투옥 기간 동안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4] 이 조각상은 처음에는 서울 효창공원의 김구 박물관 & 도서관에 위치해 있었지만, 1990년대 후반에 인천대공원으로 옮겨졌다.[4] 2015년 기준으로 이 조각상은 인천대공원에 있었으며, 그녀의 아들(김구)의 조각상에서 10m 떨어져 있었다.[4] 그러나 이 조각상들의 존재는 비교적 덜 알려져, 2015년에는 조각상을 더 많은 사람이 다니는 월미공원으로 옮기자는 제안이 있었다.[4]4. 가족 관계
김구를 통해 얻은 두 손주 김인과 김신은 어린 시절을 무사히 넘겼다.[2][5]
참조
[1]
간행물
애국지사 곽낙원
https://www.dnc.go.k[...]
Daejeon National Cemetery
2023-05-03
[2]
간행물
곽낙원 (郭樂園)
https://encykorea.ak[...]
2023-05-03
[3]
간행물
孫世一의 비교 評傳 (57)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http://monthly.chosu[...]
2023-05-03
[4]
간행물
인천대공원 백범 동상 월미공원 이전 여론 '솔솔'
https://www.yna.co.k[...]
Yonhap News
2023-05-03
[5]
간행물
김양 총영사 가족 4대째 상하이 거주 진기록
https://www.yna.co.k[...]
202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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