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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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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류지는 일본 나라현 이카루가정에 위치한 불교 사찰로, 일반적으로 쇼토쿠 태자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세기 후반에 재건된 서원 가람과 8세기 중엽에 조성된 동원 가람으로 구성되며, 금당, 오층탑, 몽전 등 다양한 건축물과 불상, 벽화 등 수많은 국보 및 중요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백제의 건축 양식과 문화적 영향을 받아 일본 불교 미술의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99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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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류지
지도
기본 정보
이름호류지
원어 이름법륭사
다른 이름호류 각몬지, 이카루가데라
로마자 표기Hōryū-ji
한자 표기法隆寺
창건자쇼토쿠 태자, 스이코 천황
창건 연도607년 (전)
종파쇼토쿠 종
본산총본산
본존석가여래
정식 명칭반구산 호류학문사
별칭반구사
순례지남도칠대사 제7번
쇼토쿠 태자 영적 제14번
야마토 북부 88개소 영장 제50, 51번
신불 영장 순례의 길 제26번 (나라 제13번)
문화재금당, 오층탑, 몽전 외 (국보)
대탕옥, 상어당, 금강역사상 외 (중요문화재)
세계유산
위치 정보
소재지나라현 이코마군 이카루가초 호류지산내 1-1
좌표34°36′53.06″N 135°44′3.02″E
상세 정보
웹사이트호류지 공식 웹사이트
금당(좌), 오층탑(우)
금당 (왼쪽), 오층탑 (오른쪽)

2. 역사

호류지의 역사는 크게 창건 시기, 재건·비재건 논쟁, 중세 이후, 그리고 근현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 역사 ==

=== 창건 (아스카, 하쿠호, 나라 시대) ===

호류지는 일반적으로 쇼토쿠 태자가 창건한 사원으로 알려져 있다.[4]일본서기》에는 덴치 천황 9년(670년)에 호류지가 화재로 소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49][50] 현존하는 호류지 서원가람은 670년 소실 이후 재건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51][52][53] 발굴 조사 결과, 재건 이전의 구 가람 (와카쿠사 가람) 터가 현 서원 가람 남동쪽에서 발견되었으며,[54] 이는 쇼토쿠 태자 생존 시기에 이미 이카루가 땅에 사원이 운영되고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스이코 천황 9년 (601년), 쇼토쿠 태자는 이카루가 땅에 이카루가노미야를 세우고, 그 근처에 호류지를 세웠다고 한다.[48] 금당 약사여래좌상 광배명에는 요메이 천황이 자신의 병 구완을 위해 가람 건립을 발원했으나 얼마 안가 사망했기 때문에, 유지를 받든 스이코 천황과 쇼토쿠 태자가 607년에 불상과 절을 완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불상의 양식, 제작 기법, 당시 일본 내 약사여래 신앙의 존재 여부 등을 고려할 때, 실제 제작 시기는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643년, 소가노 이루카가 야마시로노오에노미코를 습격했을 때 이카루가노미야는 소실되었지만, 호류지는 무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57] 재건 시기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서원가람의 건축 양식을 보면 금당은 7세기 말 지토 천황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5중탑, 중문, 회랑은 순차적으로 건축되었으며, 711년 경에는 서원가람 전체가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51][52][53] 한편, 동원가람은 738년 경 교신 승도가 이카루가노미야 옛 터에 쇼토쿠 태자를 기리며 건립한 것이다.

칠당가람


=== 재건·비재건 논쟁 ===

메이지 시대 중반부터 《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현존하는 호류지 서원 가람이 재건된 것인지, 아니면 창건 당시의 모습 그대로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65]

비재건론은 호류사의 건축 양식이 약사사(薬師寺), 당장사(唐招提寺) 등과 달리 한반도 삼국 시대나 수(隋)의 영향을 받은 고풍스러운 양식이며, 사용된 척도가 대화개신(大化の改新)(645년) 이후 사용된 당척(唐尺)이 아닌 고려척(高麗尺)이라는 점, 그리고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법륭사 소실 기사는 연대가 잘못되었고, 간지(干支)가 한 바퀴 도는 60년 전의 화재 기사(『성덕태자전보결기(聖徳太子伝補闕記)』수록)를 잘못 전한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68][69]

반면 재건론은 『성덕태자전보결기』의 신뢰성이 낮고, 재건 시 원래의 초석(礎石)을 재사용하면 오래된 척도가 사용될 수 있으므로 고려척 사용이 건설 연대의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70]

이 논쟁은 1939년 구 가람(와카쿠사 가람) 유적 발굴을 통해 재건론이 확정되는 듯 보였다.[77] 발굴 결과, 구 가람은 현재 서원 가람과 달리 남쪽에 탑, 북쪽에 금당이 남북 방향으로 배치되는 "사천왕사식(四天王寺式) 가람 배치"였으며, 중심축이 북서쪽으로 20도 어긋나 있었다.[73] 이는 현 서원 가람이 구 가람 소실 후 재건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재건 시기, 재건 주체, 가람 배치 변경 이유 등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점들이 남아있다.[75][76] 특히, 2004년 나라문화재연구소의 연구 결과, 금당 부재의 나이테 연대 측정 결과가 《일본서기》 기록보다 앞서는 650년대 후반부터 669년 사이로 나타나,[79] 재건 시기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진행 중이다. 와카쿠사 가람이 소실되기 이전에 현재의 가람 건축 계획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80] 와카쿠사 가람과 현재 가람 부지가 크게 겹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재 가람은 와카쿠사 가람이 존재하는 시기에 건설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80]

=== 중세 이후 (헤이안, 가마쿠라, 무로마치, 남북조, 에도 시대) ===

호류지는 여러 차례 화재를 겪었지만, 전소된 적은 없으며, 각 시대의 건축물과 불상 등 다양한 문화재를 보존해 왔다.[8] 925년에는 서원 가람의 대강당(大講堂)과 종루(鐘楼)가 소실되었고, 1435년에는 남대문(南大門)이 소실되기도 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물과 불상을 비롯한 각 시대의 많은 문화재들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쇼토쿠 태자에 대한 신앙이 일본에서 중요해짐에 따라, 호류지는 쇼토쿠 태자 숭배의 중심지로 부상했다.[9] 12세기 초부터 쇼토쿠 태자를 기리는 쇼료에(聖霊会) 의식이 매년 열리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9]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도미씨(登美氏)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졌고, 이 과정에서 선개소송사건(善愷訴訟事件)이 발생하기도 했다. 1023년에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가 호류지와 상궁왕원(上宮王院)에 참배했다.

무로마치 시대인 1374년과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인 1603년에도 사찰이 수리 및 재건되었다.[8]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1574년에 법륭사 경내에 진을 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만들기도 했다.

에도 시대에 들어와 17세기 초에는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에 의해 전 가람이 수리되었고,[10]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는 도쿠가와 쓰나요시(徳川綱吉)의 생모인 게이쇼인(桂昌院)에 의해 가람이 복구되었다.[10]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1614년 오사카 동지진(大坂冬の陣)으로 향하던 중 호류사에 들러 태자존상을 참배하고 아미타원(阿弥陀院)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에도 시대 동안 호류사는 호소 종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성장했다.[10]

=== 근현대 ===

메이지 시대 초기, 신불분리령(神仏分離令)과 폐불기석운동(廃仏棄釈運動)으로 인해 법륭사는 어려움을 겪었다.[46] 1878년(메이지 11년)에는 사찰 유지의 어려움으로 300여 점의 보물을 황실에 헌납하고 금 1만 엔을 하사받았다.[46] 이 보물들은 "법륭사 헌납 보물"로 불리며, 대부분 도쿄국립박물관(東京国立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46]

1882년(메이지 15년) 법상종(法相宗)으로 전향했다.[46] 1884년(메이지 17년)에는 페놀로사(アーネスト・フェノロサ)와 오카쿠라 텐신(岡倉覚三) 등이 법륭사 보물 조사를 실시, 몽전(夢殿)의 구세관음상이 수백 년 만에 개방되기도 했다. 1903년(메이지 36년)에는 사에키 사다타네(佐伯定胤)가 관주가 되어 유식(唯識)의 가르침을 부흥시켰다.

1934년(쇼와 9년)부터 "쇼와의 대수리"(昭和の大修理)가 시작되었다.[11] 1939년(쇼와 14년)에는 와카쿠사 가람(若草伽藍)을 발굴했다. 1949년(쇼와 24년) 1월 26일에는 금당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벽화가 소실되었다.[58][59] 이는 문화재보호법(文化財保護法) 제정의 계기가 되었다.

1950년(쇼와 25년) 법상종에서 독립하여 성덕종(聖徳宗)을 열었다.[12] 1985년(쇼와 60년) "쇼와의 대수리"가 완료되었다. 1993년(헤이세이 5년) 12월 9일 유네스코(国際連合教育科学文化機関) 세계유산(世界遺産)에 등록되었다.[12]

2013년(헤이세이 25년) 12월 9일, 대규모 자연재해 발생 시 절을 긴급 피난 장소로 개방하는 협정을 반구정(斑鳩町)과 체결했다.[60][61]

2. 1. 창건 (아스카, 하쿠호, 나라 시대)

호류지는 일반적으로 쇼토쿠 태자가 창건한 사원으로 알려져 있다.[4]일본서기》에는 덴치 천황 9년(670년)에 호류지가 화재로 소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49][50] 현존하는 호류지 서원가람은 670년 소실 이후 재건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51][52][53] 발굴 조사 결과, 재건 이전의 구 가람 (와카쿠사 가람) 터가 현 서원 가람 남동쪽에서 발견되었으며,[54] 이는 쇼토쿠 태자 생존 시기에 이미 이카루가 땅에 사원이 운영되고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스이코 천황 9년 (601년), 쇼토쿠 태자는 이카루가 땅에 이카루가노미야를 세우고, 그 근처에 호류지를 세웠다고 한다.[48] 금당 약사여래좌상 광배명에는 요메이 천황이 자신의 병 구완을 위해 가람 건립을 발원했으나 얼마 안가 사망했기 때문에, 유지를 받든 스이코 천황과 쇼토쿠 태자가 607년에 불상과 절을 완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불상의 양식, 제작 기법, 당시 일본 내 약사여래 신앙의 존재 여부 등을 고려할 때, 실제 제작 시기는 7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643년, 소가노 이루카가 야마시로노오에노미코를 습격했을 때 이카루가노미야는 소실되었지만, 호류지는 무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57] 재건 시기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서원가람의 건축 양식을 보면 금당은 7세기 말 지토 천황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5중탑, 중문, 회랑은 순차적으로 건축되었으며, 711년 경에는 서원가람 전체가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51][52][53] 한편, 동원가람은 738년 경 교신 승도가 이카루가노미야 옛 터에 쇼토쿠 태자를 기리며 건립한 것이다.

2. 2. 재건·비재건 논쟁

메이지 시대 중반부터 《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현존하는 호류지 서원 가람이 재건된 것인지, 아니면 창건 당시의 모습 그대로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65]

비재건론은 호류사의 건축 양식이 약사사(薬師寺), 당장사(唐招提寺) 등과 달리 한반도 삼국 시대나 수(隋)의 영향을 받은 고풍스러운 양식이며, 사용된 척도가 대화개신(大化の改新)(645년) 이후 사용된 당척(唐尺)이 아닌 고려척(高麗尺)이라는 점, 그리고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법륭사 소실 기사는 연대가 잘못되었고, 간지(干支)가 한 바퀴 도는 60년 전의 화재 기사(『성덕태자전보결기(聖徳太子伝補闕記)』수록)를 잘못 전한 것이라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68][69]

반면 재건론은 『성덕태자전보결기』의 신뢰성이 낮고, 재건 시 원래의 초석(礎石)을 재사용하면 오래된 척도가 사용될 수 있으므로 고려척 사용이 건설 연대의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70]

이 논쟁은 1939년 구 가람(와카쿠사 가람) 유적 발굴을 통해 재건론이 확정되는 듯 보였다.[77] 발굴 결과, 구 가람은 현재 서원 가람과 달리 남쪽에 탑, 북쪽에 금당이 남북 방향으로 배치되는 "사천왕사식(四天王寺式) 가람 배치"였으며, 중심축이 북서쪽으로 20도 어긋나 있었다.[73] 이는 현 서원 가람이 구 가람 소실 후 재건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재건 시기, 재건 주체, 가람 배치 변경 이유 등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점들이 남아있다.[75][76] 특히, 2004년 나라문화재연구소의 연구 결과, 금당 부재의 나이테 연대 측정 결과가 《일본서기》 기록보다 앞서는 650년대 후반부터 669년 사이로 나타나,[79] 재건 시기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진행 중이다. 와카쿠사 가람이 소실되기 이전에 현재의 가람 건축 계획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80] 와카쿠사 가람과 현재 가람 부지가 크게 겹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재 가람은 와카쿠사 가람이 존재하는 시기에 건설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80]

2. 3. 중세 이후 (헤이안, 가마쿠라, 무로마치, 남북조, 에도 시대)

호류지는 여러 차례 화재를 겪었지만, 전소된 적은 없으며, 각 시대의 건축물과 불상 등 다양한 문화재를 보존해 왔다.[8] 925년에는 서원 가람의 대강당(大講堂)과 종루(鐘楼)가 소실되었고, 1435년에는 남대문(南大門)이 소실되기도 했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물과 불상을 비롯한 각 시대의 많은 문화재들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쇼토쿠 태자에 대한 신앙이 일본에서 중요해짐에 따라, 호류지는 쇼토쿠 태자 숭배의 중심지로 부상했다.[9] 12세기 초부터 쇼토쿠 태자를 기리는 쇼료에(聖霊会) 의식이 매년 열리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9]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도미씨(登美氏)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졌고, 이 과정에서 선개소송사건(善愷訴訟事件)이 발생하기도 했다. 1023년에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가 호류지와 상궁왕원(上宮王院)에 참배했다.

무로마치 시대인 1374년과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인 1603년에도 사찰이 수리 및 재건되었다.[8]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1574년에 법륭사 경내에 진을 치는 것을 금지하는 칙령을 만들기도 했다.

에도 시대에 들어와 17세기 초에는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에 의해 전 가람이 수리되었고,[10]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는 도쿠가와 쓰나요시(徳川綱吉)의 생모인 게이쇼인(桂昌院)에 의해 가람이 복구되었다.[10]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1614년 오사카 동지진(大坂冬の陣)으로 향하던 중 호류사에 들러 태자존상을 참배하고 아미타원(阿弥陀院)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에도 시대 동안 호류사는 호소 종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성장했다.[10]

2. 4. 근현대

메이지 시대 초기, 신불분리령(神仏分離令)과 폐불기석운동(廃仏棄釈運動)으로 인해 법륭사는 어려움을 겪었다.[46] 1878년(메이지 11년)에는 사찰 유지의 어려움으로 300여 점의 보물을 황실에 헌납하고 금 1만 엔을 하사받았다.[46] 이 보물들은 "법륭사 헌납 보물"로 불리며, 대부분 도쿄국립박물관(東京国立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46]

1882년(메이지 15년) 법상종(法相宗)으로 전향했다.[46] 1884년(메이지 17년)에는 페놀로사(アーネスト・フェノロサ)와 오카쿠라 텐신(岡倉覚三) 등이 법륭사 보물 조사를 실시, 몽전(夢殿)의 구세관음상이 수백 년 만에 개방되기도 했다. 1903년(메이지 36년)에는 사에키 사다타네(佐伯定胤)가 관주가 되어 유식(唯識)의 가르침을 부흥시켰다.

1934년(쇼와 9년)부터 "쇼와의 대수리"(昭和の大修理)가 시작되었다.[11] 1939년(쇼와 14년)에는 와카쿠사 가람(若草伽藍)을 발굴했다. 1949년(쇼와 24년) 1월 26일에는 금당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벽화가 소실되었다.[58][59] 이는 문화재보호법(文化財保護法) 제정의 계기가 되었다.

1950년(쇼와 25년) 법상종에서 독립하여 성덕종(聖徳宗)을 열었다.[12] 1985년(쇼와 60년) "쇼와의 대수리"가 완료되었다. 1993년(헤이세이 5년) 12월 9일 유네스코(国際連合教育科学文化機関) 세계유산(世界遺産)에 등록되었다.[12]

2013년(헤이세이 25년) 12월 9일, 대규모 자연재해 발생 시 절을 긴급 피난 장소로 개방하는 협정을 반구정(斑鳩町)과 체결했다.[60][61]

3. 건축

엔타시스 기둥을 가진 중문(중문)


법륭사 지역 불교 유적


법륭사 지역 불교 유적의 목조 조각 확대


현재 사찰은 서쪽의 사이인(西院)과 동쪽의 토인(東院) 두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찰의 서쪽 구역에는 금당(金堂)과 오층탑이 있다. 토인 구역에는 팔각형의 몽전(夢殿)이 있으며, 사이인 구역에서 동쪽으로 122미터 떨어져 있다. 사찰 단지에는 또한 승려들의 거처, 강당, 도서관, 식당 등이 있다.

법륭사 가람의 항공사진(1985년)
국토교통성 국토지리원 [https://mapps.gsi.go.jp/ 지도·항공사진 열람 서비스]의 항공사진을 기반으로 작성


''각 건물에 안치된 불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법륭사의 불상」을 참조하십시오.''

동원의 종루

3. 1. 서원 가람



금당


오중탑


목조비사문천(우)·길상천(좌)상(금당)


조상탑본사면구(오중탑 안치)의 동면시자상(좌), 북면보살상(우)


목조성덕태자상(성덕태자 및 시자상의 성령원)


목조관음보살상(백제관음)


서원 가람은 남대문을 들어가면 정면의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한다. 향하여 오른쪽에 금당, 왼쪽에 오중탑을 배치하고, 이들을 평면 “凸”자 형태의 회랑이 둘러싼다. 회랑의 남쪽 정면에 중문(중문)을 열고, 중문의 좌우에서 뻗어나온 회랑은 북쪽에 있는 대강당의 좌우에 닿아 끝난다. 회랑의 중간, “凸”자 어깨 부분에는 동쪽에 종루, 서쪽에 경장이 있다. 이상의 가람을 서원가람이라고 부른다. 금당, 오중탑, 중문, 회랑은 성덕태자 재세 때의 것이 아니라 7세기 후반 경의 재건이지만,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 건축물군임은 틀림없다.[24] 금당·오중탑·중문에 보이는 건축 양식은, 꾸밈새(처마의 돌출을 지탱하는 건축 부재)에 운두, 운주심이라고 불리는 곡선을 많이 사용한 부재를 사용하는 것, 건물 네 모서리의 꾸밈새가 비스듬히(45도 방향)로만 나오는 것, 만자꾸러미의 고란(난간), 그것을 지탱하는 “人”자 형태의 묶음(束) 등이 특징이다. 이들은 법륭사 금당·오중탑·중문, 법기사삼중탑, 법륜사 삼중탑(소실)에만 보이는 양식으로, 아스카 양식으로 여겨진다.

  • 금당(국보) - 천지천황 9년(670년)의 화재 후 재건.[24] 석가삼존상(국보)은 추고천황 31년(623년), 지리 불사 작의 광배 명문을 가진 불상으로, 일본 불교 조각사의 서막을 장식하는 명작이다. 도식적인 의문 처리, 편도형(아몬드형) 눈, 아르카익 스마일(고식의 미소), 두꺼운 귀두(귓불), 목에 삼도(3개의 굴곡)를 새기지 않은 점 등 후세의 일본 불상과 다른 양식을 보이며, 대륙풍이 현저하다. 약사여래좌상(국보)은 동쪽 방 본존이다. 본상의 협시로 여겨지는 일광·월광보살상은 별도로 보관되지만, 작풍이 달라 원래 한 벌이 아니다. 아미타삼존상(중요문화재)은 가마쿠라 시대의 경파의 불사·강승 작이다. 원래의 서쪽 방 본존이 중세에 도난당했기 때문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양 협시 중 세지보살상은 막말부터 메이지 초기 시대에 행방불명되었고[89], 현재는 프랑스 기메 박물관 소장이다. 현재 금당에 있는 세지보살상은 기메 박물관의 상을 본떠 1994년(헤이세이 6년)에 새로 주조된 것이다[90]. 사천왕입상(국보)는 아스카 시대의 상으로 광목천·다문천상의 광배 뒷면 명문에 야마구치 오구히 등의 작이라고 적혀 있다. 같은 당내의 석가삼존상, 약사여래상이 동상인 것과 달리, 목조 채색이다. 비사문천·길상천입상(국보)은 안쪽 방 본존 석가삼존상의 좌우에 서 있는 헤이안 시대의 목조 채색상이다. 기록(『금당일기』)에서 죠랴쿠 2년(1078년) 작으로 여겨진다.
  • 오중탑(국보) - 천지천황 9년(670년)의 화재 후 재건.[24] 목조五重塔로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초층(裳階)이 있으며, 높이는 32.55m이다. 1층부터 5층까지 지붕의 감소율(크기가 줄어드는 비율)이 높은 것이 이 탑의 특징으로, 5층 지붕 한 변의 길이는 1층 지붕의 약 절반이다. 1층 내진(內陣)에는 동면, 서면, 남면, 북면 각각에 塔本四面具(국보)라고 불리는 조소(塑造)의 군상을 안치한다(총 80점의 조상이 국보). 동면은 『維摩經』(유마경)에 등장하는 文殊菩薩과 維摩居士의 문답 장면, 북면은 석가의 涅槃, 서면은 분사리(인도 여러 나라의 왕이 석존의 유골 즉 佛舎利를 분배) 장면, 남면은 미륵의 淨土를 나타낸다.
  • 대강당(국보) - 桁行九間, 梁間四間, 맞배지붕, 기와葺き. 헤이안 시대의 연장 3년(925년)에 소실된 후, 정력 원년(990년)에 재건. 약사삼존상(헤이안 시대, 국보)과 사천왕상(중요문화재)를 안치한다.
  • 경장(국보) - 나라 시대의 누각(2층 건물) 건축. 관륵 승정좌상(중요문화재)을 안치하지만, 내부는 비공개.
  • 종루(국보) - 경장과 대칭 위치에 서 있지만, 건립 시대는 헤이안 시대.
  • 회랑(국보) - 금당 등과 거의 동시기 건립. 복도이면서 동시에 성역을 구분하는 장벽이기도 하다. 다만, 대강당 쪽의 꺾이는 부분보다 북쪽은 헤이안 시대 건립이다. 당초의 회랑은 대강당 앞에서 막혀 있었고, 대강당은 회랑의 밖에 있었다.
  • 중문(국보) - 맞배지붕의 이중문. 정면은 4칸 2문, 측면은 3칸. 일본 사찰의 문은 정면의 기둥 간격이 홀수(3칸, 5칸, 7칸 등)가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문은 정면 기둥 간격이 4칸으로, 가운데에 기둥이 서 있는 점이 특이하다. 문 안의 좌우에 조상금강력사입상을 안치한다. 일본 최고(最古)(8세기 초)의 인왕상으로 귀중한 것이지만, 풍우에 노출되는 장소에 안치되어 있기 때문에 보수가 심하여, 우형(운형)상의 체부는 목조의 후보로 바뀌어 있다. 문은 현재, 출입구로서 사용되지 않고, 금당 등의 관람객은 회랑의 남서쪽 구석에서 들어간다.
  • 상묘당(중요문화재) - 대강당의 바로 뒤(북쪽)에 서 있다. 가마쿠라 시대 건립. 석가삼존상(국보), 사천왕입상(중요문화재)을 안치한다. 보통 비공개이지만, 매년 11월 1일~3일에 한하여 당내를 공개한다.
  • 총사
  • 서원당(국보) - 서원가람의 북서쪽 언덕 위에 서 있는 팔각원당. 전승은 현犬養三千代의 건립이라고 하지만, 현존하는 것은 가마쿠라 시대 건립. 당내 공간 가득히 앉아 있는 본존약사여래좌상(국보)은 나라 시대의 건칠상. 본존대좌 주위에는 작은 십이신장입상(중요문화재), 천수관음입상(중요문화재)을 안치한다. 大和北部八十八ヶ所霊場 제51번 찰소.
  • 종루
  • 약사방구리(중요문화재) - 서원당의 뒤에 서 있다.
  • 지장당(중요문화재) - 서원당의 동쪽 계단 아래에 서 있다. 지장보살반가상(중요문화재)을 안치한다.
  • 삼경원(국보) - 서원가람의 서쪽, 성령원과 대칭적인 위치에 서 있다. 가마쿠라 시대 건립. 아미타여래좌상(중요문화재) 지국천]·

    3. 2. 동원 가람

    동원 가람은 쇼토쿠 태자의 거처였던 이카루가노미야(伊香賀の宮) 터에 세워졌으며, 8세기 중엽 몽전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다.[25] 『법륭사동원연기(法隆寺東院縁起)』에 따르면, 덴표 11년(739년) 행신(行信)이라는 승려가 법흥사(斑鳩宮)가 황폐해진 것을 보고 애석하게 여겨 창건하였다고 한다.

    호류지의 몽전


    회랑으로 둘러싸인 안에는 팔각원당인 몽전(夢殿)이 있고, 회랑 남쪽에는 예당(礼堂), 북쪽에는 그림전(絵殿)과 사리전(舎利殿)이 있으며, 그림전과 사리전 북쪽에 접하여 전법당(伝法堂)이 있다. 몽전은 나라 시대에 건립된 팔각원당으로, 당내에는 성덕태자의 등신상으로 여겨지는 구세관음(救世観音)상을 안치한다.[92] 몽전은 덴표 11년(739년) 법륭사 동원 창립을 기록한 『법륭사동원연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당시 건축물로 추정되나, 이보다 앞선 덴표 9년(737년)의 『동원자재장(東院資財帳)』에 “와와 덮인 팔각불전(瓦葺八角仏殿) 한 기(基)”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어 그 무렵에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고려되고 있다.[92] 8세기 말 무렵에는 “몽전”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92]

    그림전에는 세쓰국(摂津国)(현재의 오사카부(大阪府) 북부 등)의 화가인 하타노 치테이(秦致貞, 하타노 무네사다)가 엔큐(延久) 원년(1069년)에 그린 『성덕태자화전(聖徳太子絵伝)』(국보)가 장식되어 있었으나, 1878년 황실에 헌상되어 현재는 도쿄국립박물관(東京国立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전법당은 타치바나 부인(橘夫人)의 거처를 옮겨 불당으로 개조한 것으로 여겨지며, 나라 시대 주택 유구로서도 귀중하다. 당내에는 많은 불상을 안치하지만, 보통은 공개하지 않는다.

    동원종루(東院鐘楼)와 사각문(四脚門)은 가마쿠라 시대에 건립되었으며, 남문(南門)은 초록(長禄) 3년(1459년)에 건립되었다.

    3. 3. 배치

    현재 호류지는 크게 서원과 동원으로 나뉜다. 서원에는 금당(金堂)과 오층탑이 중심을 이루고, 동원에는 몽전(夢殿)이 위치한다. 동원과 서원은 서로 약 122m 정도 떨어져 있고 승려의 주거지, 도서관, 강의실, 식당 등의 건물들이 따로 건립되어 있다.

    호류지의 금당

    3. 4. 특징

    호류지의 건축은 한국의 삼국시대, 그 중 특히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한나라북위의 영향도 나타난다.[13] 이러한 중국식 건축 방식은 백제를 통한 해상 무역으로 인해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577년 백제에서 승려, 목수, 불상 조각가들이 일본에 와서 사찰을 건립했다.[42] 호류지의 브래킷 공법은 백제 금동 미니어처 탑의 잔해와 유사하다.[44]

    호류지는 여러 번의 개축 공사를 거치면서 초기 아스카 시대의 건축 양식을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금당과 탑 1층 아래에 낮게 덧댄 차양 부분은 8세기의 나라 시대 양식을 받아들인 것이고, 2층에 있는 나무로 깎은 용 모양 기둥은 17세기 말에 하중을 견디기 위해 새로 세운 것이다. 5층탑의 극히 작은 비율과 같이 호류지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요소들도 추가되었다.[16] 학자들은 호류지의 양식이 약사사와 같은 시대의 다른 예보다 더 "보수적"이라고 지적한다.[18]

    몽전은 사찰의 동원 부분에 위치해 있으며, 739년에 쇼토쿠 태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몽전'이라는 이름은 헤이안 시대에 붙여진 것으로, 쇼토쿠 태자가 이곳에서 명상 중 부처를 만났다는 전설에서 기인한다. 몽전에는 구세관음상이 안치되어 있으며, 봄과 가을의 특별 관람 기간에만 공개된다.[25]

    1949년 화재 이전의 아미타정토도


    1949년 금당 화재로 인해 벽화가 소실되었다. 금당 벽화는 원래 50개의 벽면(큰 벽면 4개, 중간 크기 벽면 8개, 작은 벽면 38개)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화재 이후 제거되어 보관 중이다. 큰 벽면의 그림은 정토(淨土)를 묘사하고 있으며,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미륵불, 약사여래불이 그려져 있었다. 의복 표현 등 일부는 아잔타 석굴(인도)이나 둔황(중국) 벽화와 유사하며, 보살과 관음보살도 그려져 있었다. 제작 시기는 7세기 말로 추정된다.[21][32][33] 1954년 금당이 복원되었다.

4. 주요 문화재

호류지는 수많은 중요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으며, 이는 일본 불교 미술과 건축의 발달 과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호류지의 보물들은 6세기와 7세기 불교 미술의 타임캡슐로 여겨진다.[26][27] 사찰 내부의 많은 벽화, 불상, 기타 예술 작품들뿐만 아니라 사찰 건물 자체의 건축 양식 또한 중국, 한국, 인도의 강력한 문화적 영향과 일본 불교 수행의 여러 측면을 보여준다.[26][27]

주요 문화재로는 금당 외진 구 벽화(비천도(飛天圖)), 금당 내진 구 벽화(석가정토도, 보살상, 관음보살상, 세지보살상, 아미타정토도, 문수보살상, 미륵정토도, 약사정토도, 보현보살상, 십일면관음상), 오중탑 초층 구 벽화(보살상, 산수도), 견본 채색 오존상, 견본 채색 공작명왕상, 동조 아미타여래 및 협시상(강승(康勝) 작),[95] 목조 전 관륵(観勒) 승정좌상, 목조 사천왕입상(대강당 안치), 금동옥충주(국보), 아미타삼존상 및 궤짝(귤부인궤짝, 국보) 등이 있다.

금당 벽화는 50개의 벽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949년 화재 사고 후 제거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보물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큰 벽면의 그림은 정토(淨土)를 묘사하고 있으며, 석가모니, 아미타, 미륵, 약사여래불이 그려져 있다. 의복 표현 방식은 아잔타 석굴(인도)이나 둔황(중국)에서 발견되는 벽화와 유사하며, 아미타불 옆에는 당나라와 인도 양식의 보살과 관음이 그려져 있다.[21][32][33] 초기 당나라의 영향을 미루어 볼 때, 그림의 제작 시기는 7세기 말로 추정된다.[21][33] 1949년 화재에도 피해를 입지 않은 20개의 작은 벽화는 원래 위치에 있으며, 손상으로 인해 제거된 부분은 복제품으로 교체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폐불훼석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던 호류사는 1878년에 귀중한 사찰 보물 300여 점을 궁내청(皇室)에 헌납하고 1만 엔을 하사받아 가람과 당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헌납된 보물들은 도쿄국립박물관 법륭사 보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도쿄 국립박물관은 1878년 호류지에서 궁내청에 기증된 3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이 중 일부는 일반에 공개 전시되고 있으며, 박물관의 디지털 자료실을 통해 모든 유물을 연구할 수 있다.[28]


  • 칼 1자루
  • 서원당 봉납품 - 서원당에는 본존 약사여래의 영험을 믿고 병 고침을 기원한 사람들이 옛날부터 여러 가지 물건을 봉납해 왔지만, 가장 많은 것은 무로마치 시대 중기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이르는 무기류로, 특히 도검이 약 6,000점, 다음으로 거울이 3,000점 이상 있으며, 그 외에 도장구, 활, 창, 나기나타, 철포, 갑옷 등 총 1만 점 이상이 확인되었고,[108][109] 일본 무기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108] 봉납품들은 예전에는 당 건물 안팎의 벽이나 기둥에 틈 없이 걸려 있었지만, 1935년(쇼와 10년) 서원당 수리 때 모두 제거되었고,[108] 현재는 보물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109]

4. 1. 국보

호류지의 국보는 크게 건축물과 미술공예품으로 나뉜다.
건축물

  • 금당: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 중 하나로, 1949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54년에 복원되었다.[20][22][23] 원래 재료의 약 15~20%가 남아있으며, 화재로 소실된 금당 벽화는 별도 보관 중이다.[91]
  • 오층탑: 높이 32.45m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오층탑이다.[7] 594년에 만들어진 심주(중앙 기둥)가 특징이며, 1층에는 탑본사면구라고 불리는 조소 군상이 안치되어 있다.[19]
  • 중문(中門)
  • 회랑 2동(回廊 2棟)
  • 경장(経蔵)
  • 종루(鐘楼)
  • 대강당(大講堂)
  • 성령원(聖霊院): 쇼토쿠 태자와 관련된 인물들의 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 동실(東室)
  • 삼경원 및 서실(三経院及西室)
  • 서원당(西円堂): 건칠약사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 강봉장(綱封蔵)
  • 식당(食堂)
  • 동대문(東大門)
  • 몽전: 쇼토쿠 태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739년에 세워진 건물로, 구세관음상이 안치되어 있다.[25]
  • 전법당(伝法堂)
  • 동원 종루(東院鐘楼)
  • 남대문(南大門)

미술공예품

  • 금당 석가삼존상: 623년 지리 불사가 제작한 불상으로, 일본 불교 조각사의 초기 명작이다.[89]
  • 금당 약사여래좌상: 동쪽 방 본존으로, 일광·월광보살상은 별도 보관된다.
  • 금당 사천왕입상: 아스카 시대의 목조 채색상으로, 야마구치 오구히 등이 제작했다.
  • 금당 비사문천·길상천입상: 헤이안 시대의 목조 채색상으로, 1078년 작품으로 추정된다.
  • 오층탑 탑본사면구: 1층 내진에 안치된 조소 군상으로, 석가 열반 장면 등이 묘사되어 있다.
  • 대강당 약사여래 및 양협시좌상
  • 서원당 건칠약사여래좌상
  • 상고당 목조석가여래 및 양협시좌상
  • 백제관음: 아스카 시대의 대표적인 불상 중 하나로, 7세기 초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29]
  • 구세관음(관음보살입상): 쇼토쿠 태자를 나타낸다고 여겨지는 불상으로, 금박을 입힌 목재로 만들어졌다.[34]
  • 금동옥충주: 아스카 시대의 불당 형태 궤짝으로, 옥충 날개로 장식되어 있다.
  • 흑칠나전탁
  • 사기사자수문금
  • 목조 천개 3개: 금당 안쪽 방과 서쪽 방 본존의 머리 위에 있는 천개이다.
  • 동조 아미타여래 및 양협시상(전 귤부인 염불불)·목조 궤: 아스카 시대 후기의 금동불 대표작이다.
  • 동조 관음보살입상(몽위관음)
  • 목조 관음보살입상(구면관음): 당나라에서 전래된 상이다.
  • 목조 지장보살입상: 오오미와 신사의 신궁사인 오오미와데라에 있었다가 메이지 시대의 신불분리로 법륭사로 옮겨졌다.
  • 건칠 행신승도좌상: 몽전에 안치되어 있다.
  • 소조 도전율사좌상: 몽전에 안치되어 있다.
  • 오중탑 사리 용기: 1926년 조사 당시 중심 기둥 아래 땅 속의 심초에서 발견되었다.
  • 선광사 여래 어서함


호류사의 고유한 특징을 지닌 다층탑


금당


꿈결의 집(Yumedono), 쇼토쿠 태자와 관련된 당


다마무시 궤(玉蟲厨子, Tamamushi-no-zushi)는 한때 다마무시 딱정벌레(Chrysochroa fulgidissima)의 반짝이는 날개로 장식되었던 소형 사찰이다.


Bhaisajyaguru상의 후광에 새겨진 명문


609년 싣담 문자로 쓰인 야자수 잎에 적힌 반야심경과 우슈니샤비자야다라니경 사본의 복제본. 호류지(法隆寺), 일본. 첫 페이지와 두 번째 페이지의 첫 번째 줄은 반야심경, 두 번째 페이지는 우슈니샤비자야다라니경이다. 마지막 줄은 싣담 문자로 된 완전한 산스크리트 음절표이다.


4. 2. 중요문화재

호류지의 보물들은 6세기와 7세기 불교 미술의 타임캡슐로 여겨진다.[26][27] 사찰 내부의 많은 벽화, 불상, 기타 예술 작품들뿐만 아니라 사찰 건물 자체의 건축 양식 또한 중국, 한국, 인도의 강력한 문화적 영향과 일본 불교 수행의 여러 측면을 보여준다.[26][27]

금당 벽화는 50개의 벽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949년 화재 사고 후 제거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보물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큰 벽면의 그림은 정토(淨土)를 묘사하고 있으며, 석가모니, 아미타, 미륵, 약사여래불이 그려져 있다. 의복 표현 방식은 아잔타 석굴(인도)이나 둔황(중국)에서 발견되는 벽화와 유사하며, 아미타불 옆에는 당나라와 인도 양식의 보살과 관음이 그려져 있다.[21][32][33] 초기 당나라의 영향을 미루어 볼 때, 그림의 제작 시기는 7세기 말로 추정된다.[21][32][33] 1949년 화재에도 피해를 입지 않은 20개의 작은 벽화는 원래 위치에 있으며, 손상으로 인해 제거된 부분은 복제품으로 교체되었다.

주요 문화재로는 금당 외진 구 벽화(비천도(飛天圖)), 금당 내진 구 벽화(석가정토도, 보살상, 관음보살상, 세지보살상, 아미타정토도, 문수보살상, 미륵정토도, 약사정토도, 보현보살상, 십일면관음상), 오중탑 초층 구 벽화(보살상, 산수도), 견본 채색 오존상, 견본 채색 공작명왕상, 동조 아미타여래 및 협시상(강승(康勝) 작),[95] 목조 전 관륵(観勒) 승정좌상, 목조 사천왕입상(대강당 안치), 금동옥충주(국보), 아미타삼존상 및 궤짝(귤부인궤짝, 국보) 등이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폐불훼석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던 호류사는 1878년에 귀중한 사찰 보물 300여 점을 궁내청(皇室)에 헌납하고 1만 엔을 하사받아 가람과 당우를 유지할 수 있었다. 헌납된 보물들은 도쿄국립박물관 법륭사 보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5. 갤러리



금당과 탑


6. 논쟁

메이지 시대 중반(19세기 말)까지 법륭사 서원 가람은 창건 이래 한 번도 화재를 입은 적이 없고, 아스카 시대성덕태자가 건립한 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믿어졌다. 그러나 역사학과 건축사학의 발전과 함께, 현재 남아 있는 법륭사 가람은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재건론)이 1887년(메이지 20년) 무렵부터 제기되기 시작했다.[65]

일본서기천지천황 9년(670년) 4월 30일 조에는 "야반지후, 재법륭사, 일옥무여"(夜半之後(あかつき)、法隆寺に災(ひつ)けり、一屋(ひとつのいえ)も余ること無し)라는 기사가 있으며, 이 기록을 근거로 법륭사 가람은 670년에 소실되었고, 현재의 서원 가람은 그 이후에 재건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67]

;비재건론의 주장


  • (양식론) 법륭사의 건축 양식은 한반도 삼국 시대나 수(隋)의 건축 양식을 따르며, 약사사(薬師寺), 당장사(唐招提寺) 등 당(唐)의 건축 양식과는 다르다(관야정(関野貞)).[68]
  • (척도론) 법륭사에 사용된 척도는 대화개신(大化の改新) 이후 사용된 당척(唐尺)이 아닌 고려척(高麗尺)이다(관야정).[68]
  • (간지일운착간론) 『일본서기』의 법륭사 소실 기사는 연대가 잘못되었고, 간지(干支)가 한 바퀴 도는 60년 전의 화재 기사(『성덕태자전보결기(聖徳太子伝補闕記)』수록)를 잘못 전한 것이다(히라코 타쿠레이(平子鐸嶺)).[68][69]


;재건론의 주장

  • 『성덕태자전보결기』에는 신뢰하기 어려운 묘사가 많아, 『일본서기』의 기사를 부정할 수 없다(키타자다 사다키치(喜田貞吉)).[70]
  • 재건 시 원래의 초석(礎石)을 재사용하면 오래된 척도가 사용되는 것은 당연하므로, 고려척 사용이 건설 연대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키타자다 사다키치).[70]


관야정(関野貞)과 히라코 타쿠레이(平子鐸嶺)는 1905년(메이지 38년)에 현재 남아 있는 서원 가람은 스이코 천황 시대의 것이며 불타지 않았다는 비재건론을 발표했다.[68][69] 관야는 법륭사 서원 가람 건축에 고려척이 사용되었지만, 645년 이후에는 당척이 사용되기 시작했으므로 서원 가람은 645년 이전의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라코는 『일본서기』의 법륭사 화재 기사가 실제 연대보다 60년 늦춰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덕태자전보결기』의 "경오년 4월 30일 야반에 재반구사(庚午年四月三十日夜半有災斑鳩寺)"라는 기사를 610년의 화재로 보고, 『일본서기』 편자가 이 화재 이야기를 670년 기사에 잘못 넣었다고 주장했다.[68][69]

이에 대해 키타자다 사다키치(喜田貞吉)는 재건론으로 즉시 반론했다. 소실된 가람을 원래 초석으로 재건했다면 척도도 오래된 고려척이 사용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관야의 주장을 비판했다. 히라코의 주장에 대해서는 『보결기』에 신뢰할 수 없는 기사가 많아 『일본서기』의 670년 법륭사 화재 기사를 부정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70]

쇼와 시대에 관야정(関野貞), 아다치 야스시 등은 "이사설(二寺説)" 또는 "신비재건론(新非再建論)"을 주장했다. 관야는 용명천황(用明天皇)을 위해 만들어진 약사여래(薬師如来)를 본존으로 하는 가람(서원 가람)과 성덕태자를 위해 만들어진 석가여래(釈迦如来)를 본존으로 하는 가람(와카쿠사 가람(若草伽藍) 터)이 আলাদা আলাদা 절이며, 670년에 불탄 것은 후자라고 주장했다. 아다치는 용명천황을 위해 만들어진 약사여래를 본존으로 하는 "용명사(用明寺)"와 성덕태자를 위해 만들어진 석가여래를 안치하는 "태자사(太子寺)"가 있으며, 670년에 불탄 것은 전자라고 주장했다. 후에 아다치는 두 사찰이 하나의 법륭사 안에 있었고, 석가상을 모시는 "석가당(釈迦堂)"의 후신이 현 서원 가람이라고 수정했다.[71][72]

1939년(쇼와 14년) 이시다 시게사쿠(石田茂作) 등에 의해 와카쿠사 가람(若草伽藍) 터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와카쿠사 가람은 현재 남아 있는 서원 가람과 달리 남쪽에 탑, 북쪽에 금당이 남북 방향으로 배치되는 "사천왕사식(四天王寺式) 가람 배치"였으며, 중심축이 북서쪽으로 20도 어긋나 있었다. 반면 현재 남아 있는 서원 가람은 남쪽을 정면으로 하고, 중심축은 거의 남북에 일치한다. 와카쿠사 가람 터에서 출토된 기와는 오래된 양식이었다.[73] 이러한 발굴 결과는 와카쿠사 가람 터가 창건 법륭사이며, 이것이 소실된 후 다시 지어진 것이 현재의 법륭사 서원 가람이라는 정설을 뒷받침한다.[74]

『자재장(資財帳)』에 따르면, 지토 천황 7년(693년), 법륭사에서 인왕회(仁王會)가 열리고 천개(天蓋) 등이 시입(施入)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현 서원 가람 중 적어도 금당은 이 해까지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와도 4년(711년)에는 오중탑(五重塔) 초층 안치의 조각상 무리와 중문(中門) 안치의 금강력사(인왕상)가 완성되었고, 같은 해 무렵까지 오중탑, 중문을 포함한 서원 가람이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75]

재건·비재건 논쟁은 재건론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창건 법륭사 소실 시기, 643년 상궁왕가(上宮王家)(성덕태자 가문) 멸망 후 서원 가람 재건 주체, 현재 서원 가람과 구 가람의 위치 및 방위 차이, 금당 및 오중탑 건립 년도, 현 서원 금당 안치 석가삼존상과 약사여래상의 원래 위치 등 여러 의문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75][76]

비재건론의 주요 근거는 건축 양식이었고, 재건론의 근거는 문헌이었다. 1939년 이시다 시게사쿠(石田茂作)가 사천왕사(四天王寺)식 가람 배치의 와카쿠사 가람(若草伽藍) 유구를 발굴하면서 재건론이 거의 확정되었다.[77] "쇼와의 대수리(昭和の大修理)"에서 밝혀진 새로운 사실들도 재건론을 뒷받침한다.

2004년 12월, 와카쿠사 가람 터 서쪽에서 7세기 초 벽화 조각 약 60점의 출토가 발표되었다.[78] 이 파편들은 1,000℃ 이상의 고온에 노출된 대규모 화재 흔적을 보여준다. 출토된 기와는 7세기 초 아스카 양식이며, 벽화 양식도 현 법륭사 벽화보다 고풍스럽다.

6. 1. 재건·비재건 논쟁

메이지 시대 중반(19세기 말)까지 법륭사 서원 가람은 창건 이래 한 번도 화재를 입은 적이 없고, 아스카 시대에 쇼토쿠 태자가 건립한 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믿어졌다. 그러나 역사학과 건축사학의 발전과 함께, 현재 남아 있는 법륭사 가람은 화재로 소실된 후 재건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재건론)이 1887년(메이지 20년) 무렵부터 제기되기 시작했다.[65]

일본서기천지천황 9년(670년) 4월 30일 조에는 "야반지후, 재법륭사, 일옥무여"(夜半之後(あかつき)、法隆寺に災(ひつ)けり、一屋(ひとつのいえ)も余ること無し)라는 기사가 있으며, 이 기록을 근거로 법륭사 가람은 670년에 소실되었고, 현재의 서원 가람은 그 이후에 재건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67]

;비재건론의 주장

  • (양식론) 법륭사의 건축 양식은 한반도 삼국 시대나 수(隋)의 건축 양식을 따르며, 약사사(薬師寺), 당장사(唐招提寺) 등 당(唐)의 건축 양식과는 다르다(관야정(関野貞)).[68]
  • (척도론) 법륭사에 사용된 척도는 대화개신(大化の改新) 이후 사용된 당척(唐尺)이 아닌 고려척(高麗尺)이다(관야정).[68]
  • (간지일운착간론) 『일본서기』의 법륭사 소실 기사는 연대가 잘못되었고, 간지(干支)가 한 바퀴 도는 60년 전의 화재 기사(『성덕태자전보결기(聖徳太子伝補闕記)』수록)를 잘못 전한 것이다(히라코 타쿠레이(平子鐸嶺)).[68][69]


;재건론의 주장

  • 『성덕태자전보결기』에는 신뢰하기 어려운 묘사가 많아, 『일본서기』의 기사를 부정할 수 없다(키타자다 사다키치(喜田貞吉)).[70]
  • 재건 시 원래의 초석(礎石)을 재사용하면 오래된 척도가 사용되는 것은 당연하므로, 고려척 사용이 건설 연대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키타자다 사다키치).[70]


관야정(関野貞)과 히라코 타쿠레이(平子鐸嶺)는 1905년(메이지 38년)에 현재 남아 있는 서원 가람은 스이코 천황 시대의 것이며 불타지 않았다는 비재건론을 발표했다.[68][69] 관야는 법륭사 서원 가람 건축에 고려척이 사용되었지만, 645년 이후에는 당척이 사용되기 시작했으므로 서원 가람은 645년 이전의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히라코는 『일본서기』의 법륭사 화재 기사가 실제 연대보다 60년 늦춰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덕태자전보결기』의 "경오년 4월 30일 야반에 재반구사(庚午年四月三十日夜半有災斑鳩寺)"라는 기사를 610년의 화재로 보고, 『일본서기』 편자가 이 화재 이야기를 670년 기사에 잘못 넣었다고 주장했다.[68][69]

이에 대해 키타자다 사다키치(喜田貞吉)는 재건론으로 즉시 반론했다. 소실된 가람을 원래 초석으로 재건했다면 척도도 오래된 고려척이 사용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관야의 주장을 비판했다. 히라코의 주장에 대해서는 『보결기』에 신뢰할 수 없는 기사가 많아 『일본서기』의 670년 법륭사 화재 기사를 부정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70]

쇼와 시대에 관야정(関野貞), 아다치 야스시 등은 "이사설(二寺説)" 또는 "신비재건론(新非再建論)"을 주장했다. 관야는 용명천황(用明天皇)을 위해 만들어진 약사여래(薬師如来)를 본존으로 하는 가람(서원 가람)과 성덕태자를 위해 만들어진 석가여래(釈迦如来)를 본존으로 하는 가람(와카쿠사 가람(若草伽藍) 터)이 আলাদা আলাদা 절이며, 670년에 불탄 것은 후자라고 주장했다. 아다치는 용명천황을 위해 만들어진 약사여래를 본존으로 하는 "용명사(用明寺)"와 성덕태자를 위해 만들어진 석가여래를 안치하는 "태자사(太子寺)"가 있으며, 670년에 불탄 것은 전자라고 주장했다. 후에 아다치는 두 사찰이 하나의 법륭사 안에 있었고, 석가상을 모시는 "석가당(釈迦堂)"의 후신이 현 서원 가람이라고 수정했다.[71][72]

1939년(쇼와 14년) 이시다 시게사쿠(石田茂作) 등에 의해 와카쿠사 가람(若草伽藍) 터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와카쿠사 가람은 현재 남아 있는 서원 가람과 달리 남쪽에 탑, 북쪽에 금당이 남북 방향으로 배치되는 "사천왕사식(四天王寺式) 가람 배치"였으며, 중심축이 북서쪽으로 20도 어긋나 있었다. 반면 현재 남아 있는 서원 가람은 남쪽을 정면으로 하고, 중심축은 거의 남북에 일치한다. 와카쿠사 가람 터에서 출토된 기와는 오래된 양식이었다.[73] 이러한 발굴 결과는 와카쿠사 가람 터가 창건 법륭사이며, 이것이 소실된 후 다시 지어진 것이 현재의 법륭사 서원 가람이라는 정설을 뒷받침한다.[74]

『자재장(資財帳)』에 따르면, 지토 천황 7년(693년), 법륭사에서 인왕회(仁王會)가 열리고 천개(天蓋) 등이 시입(施入)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현 서원 가람 중 적어도 금당은 이 해까지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와도 4년(711년)에는 오중탑(五重塔) 초층 안치의 조각상 무리와 중문(中門) 안치의 금강력사(인왕상)가 완성되었고, 같은 해 무렵까지 오중탑, 중문을 포함한 서원 가람이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75]

재건·비재건 논쟁은 재건론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창건 법륭사 소실 시기, 643년 상궁왕가(上宮王家)(성덕태자 가문) 멸망 후 서원 가람 재건 주체, 현재 서원 가람과 구 가람의 위치 및 방위 차이, 금당 및 오중탑 건립 년도, 현 서원 금당 안치 석가삼존상과 약사여래상의 원래 위치 등 여러 의문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75][76]

비재건론의 주요 근거는 건축 양식이었고, 재건론의 근거는 문헌이었다. 1939년 이시다 시게사쿠(石田茂作)가 사천왕사(四天王寺)식 가람 배치의 와카쿠사 가람(若草伽藍) 유구를 발굴하면서 재건론이 거의 확정되었다.[77] "쇼와의 대수리(昭和の大修理)"에서 밝혀진 새로운 사실들도 재건론을 뒷받침한다.

2004년 12월, 와카쿠사 가람 터 서쪽에서 7세기 초 벽화 조각 약 60점의 출토가 발표되었다.[78] 이 파편들은 1,000℃ 이상의 고온에 노출된 대규모 화재 흔적을 보여준다. 출토된 기와는 7세기 초 아스카 양식이며, 벽화 양식도 현 법륭사 벽화보다 고풍스럽다.

6. 2. '숨겨진 십자가' 논쟁

1972년 우메하라 다케시는 저서 《숨겨진 십자가》를 통해 호류지 서원 가람의 독특한 구조와 이즈모타이샤와의 유사성을 지적하며, 재건된 호류사가 왕권에 의해 몰살당한 쇼토쿠 태자의 원령을 봉인하기 위한 절이라는 설을 주장했다.[83][84][85] 서원 가람의 중문은 4칸으로 중앙에 기둥이 서 있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우메하라는 이를 근거로 들었다.

역사학 연구자들은 나라 시대 말기에 원령 신앙이 성립되었다는 점 등을 들어 우메하라의 설에 비판적이었다. 미술사학자들은 우메하라의 주장이 기본적인 사실 오인에 기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86][87] 우메하라는 꿈전 본존인 구세관음상이 속이 비어 있고, 등에 광배를 고정하기 위한 못이 박혀 있는 것이 주저 행위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겨진 십자가》는 대중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야마기시 료코는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히데요시의 천자》를 발표했다고 한다. 건축학 등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건축가 타케자와 슈이치는 중문 중앙 기둥이 원령 봉인을 위한 것이라는 설은 부정하면서도, 호류지 서원 가람의 공간 설계가 이전의 시텐노지 양식이 지닌 압박감을 완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평가했다.[88]

7. 기타

7. 1. 교통

JR 야마토선 법륭사역에서 내려 도보 20분 거리에 있다. 또는 나라교통 버스(72번)를 이용하여 법륭사역 버스정류장에서 법륭사 참도 버스정류장까지 이동 후 도보 3분이면 도착한다.[111]

JR・긴테쓰 오지역에서는 나라교통 버스(62, 63, 92번)를 이용하여 오지역 북쪽 출구에서 법륭사 앞 버스정류장까지 이동 후 도보 3분이면 도착한다.[111]

긴테쓰 가시하라선 쓰쓰이역에서는 나라교통 버스(63, 92번)를 이용하여 쓰쓰이역 버스정류장에서 법륭사 앞 버스정류장까지 이동 후 도보 3분이면 도착한다.[111]

긴테쓰 가시하라선 긴테쓰 구니야마역에서는 나라교통 버스(50, 51, 52, 97, 98번)를 이용하여 긴테쓰 구니야마역 버스정류장에서 법륭사 앞 버스정류장까지 이동 후 도보 3분이면 도착한다.[111]

나라교통 버스 나라·서경·반구 순회 라인(97번)을 이용하면 가스가타이샤 본전 - 긴테쓰 나라역 - JR 나라역 - 약사사 동쪽 입구 - 긴테쓰 구니야마역 - 호키지 앞을 경유하여 법륭사 앞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며, 도보 3분 거리에 호류지가 있다. 가스가타이샤나 나라역 등에서 환승 없이 갈 수 있지만, 배차 간격이 드물고 막차 시간이 빠르므로 주의해야 한다.[111]

7. 2. 관람

호류지는 서원가람(금당, 5층탑, 대강당), 대보장원(백제관음상 포함), 동원가람(몽전) 3곳은 유료로 관람 가능하다. 관람권은 서원가람·대보장원·동원가람 3곳 공통권이 어른 1500엔이며 서원가람 입구에서만 발권한다. 동원가람만 관람시에는 300엔이다. 동원가람 반권을 서원가람 입구에 제시하는 경우에만, 서원가람과 대보장원 2곳 공통권 1200엔으로 발권한다. 2곳 공통권의 단독 판매는 하지 않는다.

서원당·성령원 등은 무료로 관람 가능하다. 기타 여러 당과 자원은 원칙적으로 비공개이나, 아래 당은 기일을 한정하여 공개한다.

  • 상궁(上御堂)은 11월 1일 - 3일 개방하며, 서원가람 관람권이 필요하다.[112]
  • 지장당은 8월 24일 낮의 지장회에서 개방한다.
  • 호마당은 매달 28일 월례호마에서 개방한다.
  • 성령원 외진에는 항상 무료로 오를 수 있지만, 본존 성덕태자상 등 여러 불상은 비불(秘佛)로, 3월 22일 - 24일의 오회식과 3월 21일 저녁의 닿야법요(逮夜法要) 때만 개방한다. 단, 내진에서 본존을 관람할 수 있는 것은 닿야법요 때만이다.[113]
  • 사리전·화전은 1월 1일 - 3일 사리강(舍利講)에서 개방하며, 동원가람 관람권이 필요하다.[114]
  • 전법당은 7월 24일 저녁의 동원지장회에서 개방하며, 동원가람 관람권이 필요하다.
  • 율학원은 3월 22·23일의 오회식과 8월 14·15일에 개방한다.


2024년 9월 11일, 법륭사는 물가, 인건비 상승 속에서 문화재 보존 수리와 설비 개수를 진행하기 위해 2025년 3월 1일부터 관람료를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인상은 2015년 1월 이후이다. 서원가람, 대보장원, 동원가람의 관람료는 현재의 “중학생 이상 1500엔”에서 “중학생 1700엔, 고등학생 이상 2000엔”으로, 초등학생은 750엔에서 1000엔으로 인상된다.[115]

7. 3. 주요 행사

1월 1일부터 3일까지 성덕태자(聖徳太子)가 두 살 때 “남무불(南無仏)”이라고 염불하자 나타났다는 불사리(仏舎利)를 본존으로 하는 사리강(舎利講) 법요가 열린다. 1월 5일에는 초호마기원법요(初護摩祈願法要)가 열린다. 1월 8일부터 14일까지는 768년(신고경운(神護景雲) 2년) 이래로 국가 안녕과 만민의 풍요를 기원하는 금당수정회(金堂修正会)가 열린다. 1월 16일부터 18일까지는 꿈전(夢殿)의 십일면관음(十一面観音)을 위한 회개 법요이자 국가 안태를 기원하는 상궁왕원수정회(上宮王院修正会)가 열린다. 1월 26일에는 금당벽화소손자숙법요(金堂壁画焼損自粛法要)가 열린다.

2월 1일부터 3일까지는 1261년(홍장(弘長) 원년) 이래로 약사여래좌상(薬師如来座像)을 향해 “약사회과(薬師悔過)”를 행하는 서원당수이회(西円堂修二会)가 열린다. 2월 3일 세츠분(節分)에는 추나식(追儺式)(귀쫓는 의식)이 열려, 서원당(西円堂)에 흑귀, 청귀, 적귀가 나타나 횃불을 던지고, 비사문천(毘沙門天)이 나타나 귀를 쫓는다. 2월 5일에는 현장삼장(玄奘三蔵)을 찬양하며 메이지 시대에 중단되었다가 1983년(쇼와 58년)에 부활한 삼장회(三蔵会)가 열린다. 2월 15일에는 열반(涅槃)도를 걸고 석존(釈尊)의 유덕을 찬양하는 열반회(涅槃会)가 열린다.

2월 21일에는 성덕태자어기·혜자기(聖徳太子御忌・慧慈忌), 2월 22일에는 태자도를 찾는 모임(이소나가 루트)이 열린다. 3월 2일 도센(道詮)기, 3월 7일 추고천황어기(推古天皇御忌), 3월 8일 요시타케기, 3월 17일 정조(定朝)기가 열린다. 3월 22일부터 24일까지는 성덕태자의 명일에 그 유덕을 기리는 오에식이 열리는데, 비불(秘仏)에 가까운 성덕태자좌상(聖徳太子坐像)이 개장(開帳)된다. 보통은 성령원(聖霊院)에서 거행되지만 10년에 한 번 대강당(大講堂)에서 “대회식(大会式)”이 거행되며, 독특한 공양이 봉납된다. 향악(雅楽)이 흐르는 가운데, 사찰 승려들이 훈가다(くんかだ)라고 불리는 불의 덕을 찬양하는 성명(声明)(しょうみょう)을 염송하며 태자의 덕을 찬탄한다.[110]

4월 4일에는 석존의 탄생을 축하하며 식당에 석가탄생불(釈迦誕生仏)을 안치하고 감차(甘茶)를 붓는 불생회(仏生会)(“꽃 축제”(灌仏会))가 열린다. 4월 9일 용명천황어기(用明天皇御忌), 4월 11일 꿈전본존개문법요(夢殿本尊開扉法要)가 열린다. 4월 중순에는 법륭사문화강연회(法隆寺文化講演会)가 열린다.

5월 16일 하안거(安居)개백법요(夏安居開白法要)를 시작으로, 5월 16일부터 8월 15일까지 서실(西室)에서 90일간 성덕태자의 『삼경의소(三経義疏)』 강의를 행하는 하안거(夏安居)가 진행된다. 7월 7일 변천회(弁天会), 7월 24일 동원지장회(東院地蔵会)가 열린다. 7월 26일부터 29일까지는 법륭사하계대학(法隆寺夏季大学)이 열린다.

8월 14일부터 15일까지 우란분회(盂蘭盆会)가 열리고, 8월 15일에는 하안거결원법요(夏安居結願法要)가 열린다. 8월 24일 알가정방지장회(閼伽井坊地蔵会), 9월 2일 각승기(覚勝忌), 9월 23일 피안회(彼岸会)가 열린다.

10월 2일 행신(行信)기, 10월 8일 서원당봉납경봉납대반야경(大般若経)전독법요(西円堂奉納鏡奉納大般若経転読法要)가 열린다. 10월 22일부터 11월 23일까지는 꿈전본존추계특별개문(夢殿本尊秋季特別開扉)이 열린다.

11월 3일 숭준천황(崇峻天皇)어기·산베오에노오(山背大兄王)어기 및 등나무고분참배(藤ノ木古墳参拝)가 열린다. 11월 3일 추계 법륭사문화강연회(秋季 法隆寺文化講演会)가 열린다. 11월 13일에는 법상종(法相宗)의 고조(高祖) 자은대사(慈恩大師) 기(기(窺基))를 위한 법회로, 한때 중단되었다가 1978년(쇼와 53년)에 부흥된 자은회(慈恩会)가 열린다. 11월 15일 쇼우만회, 11월 22일 태자도를 찾는 모임(코켄덴 루트)이 열린다.

12월 8일 오미후키(お身拭い), 12월 21일 마히토황후어기(間人皇后御忌)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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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웹사이트 法隆寺公式サイト http://www.horyuji.o[...]
[113] 웹사이트 お逮夜秘仏と供物を堪能!聖徳太子のご命日にちなんだ法隆寺お会式 http://guide.travel.[...]
[114] 웹사이트 法隆寺公式サイト http://www.horyuji.o[...]
[115] 웹사이트 法隆寺が来春値上げ https://digital.asah[...] 朝日新聞 2024-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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