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율리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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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율리오 3세는 1550년부터 1555년까지 재위한 교황이다. 본명은 조반니 마리아 초키 델 몬테로, 법학을 공부하고 교회법 학자로서 경력을 쌓았다. 교황 선출 이전에는 추기경, 트리엔트 공의회 공동 의장 등을 역임했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재개하고, 예술 후원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지만, 측근 인노첸초 델 몬테와의 관계가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1555년 사망했으며, 교회 개혁에 대한 열정 부족과 사치스러운 생활로 평가가 엇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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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 율리오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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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율리오 3세 |
| 로마자 표기 | Iulius PP. III (라틴어) |
| 이탈리아어 | Giulio III |
| 본명 | 조반니 마리아 초키 델 몬테 |
| 직책 | |
| 직함 | 로마 주교 |
| 교회 | 가톨릭 교회 |
| 재임 시작 | 1550년 2월 22일 (222대 교황) |
| 재임 종료 | 1555년 3월 23일 |
| 이전 직책 | 만프레도니아 대주교 (1512–1544) 파비아 주교 (1521–1530) 산 비탈레의 추기경 사제 (1537–1542) 산타 프라세데의 추기경 사제 (1542–1543) 팔레스트리나의 추기경 주교 (1543–1550) |
| 성별 | 1514년 11월 12일 |
| 성별자 | 안토니오 마리아 초키 델 몬테 |
| 추기경 임명 | 1536년 12월 22일 |
| 추기경 임명자 | 바오로 3세 |
| 이전 교황 | 바오로 3세 |
| 다음 교황 | 마르첼로 2세 |
| 개인 정보 | |
| 출생일 | 1487년 9월 10일 |
| 출생지 | 몬테 산 사비노, 시에나 공화국 |
| 사망일 | 1555년 3월 23일 (향년 67세) |
| 사망지 | 로마, 교황령 |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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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 율리오 |
2. 교황 선출 이전
조반니 마리아 초키 델 몬테는 저명한 로마 법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4] 그는 인문학자 라파엘레 브란돌리니 리포에게 교육을 받았고, 이후 페루자와 시에나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신학자보다는 뛰어난 교회법 학자로서 경력을 쌓아갔다.
콘클라베를 통해 교황으로 선출된 율리오 3세는 재위 초기에 가톨릭교회 개혁과 트리엔트 공의회 재소집에 대한 의지를 보였으나, 실제로는 5년의 재임 기간 동안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5]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요청으로 1551년 공의회를 재개했지만, 프랑스의 앙리 2세와의 정치적 갈등과 압력 속에서 1553년 다시 공의회를 중단시키는 등[5][6] 일관성 없는 행보를 보였다.
그의 삼촌인 안토니오 마리아 초키 델 몬테는 만프레도니아 대주교였는데, 1511년 삼촌이 추기경에 서임되면서 조반니 마리아는 1513년(또는 1512년)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만프레도니아(시폰토) 대주교직을 물려받았다.[2] 1520년에는 파비아의 주교를 겸임하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을 대할 때 상냥한 태도를 보였고 행정 능력 또한 뛰어나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 덕분에 두 차례나 로마의 시장(지사)을 역임했으며, 교황청으로부터 여러 중요한 임무를 위임받았다.
1527년 로마 약탈 당시, 그는 클레멘스 7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군대에 넘겨진 인질 중 한 명이었다.[19][20][21] 그는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콜론나 가문의 폼페오 추기경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에 성공했다.
1536년 12월 22일, 바오로 3세는 그를 산 비탈레의 추기경 사제로 임명했고, 1543년 10월 5일에는 팔레스트리나의 주교급 추기경으로 승격시켰다. 바오로 3세는 그에게 여러 중요한 외교적 임무를 맡겼다. 특히, 마르첼로 체르비니 추기경(훗날의 교황 마르첼로 2세), 레지날드 폴 추기경과 함께 트리엔트 공의회의 초대 공동 의장(1545-1547) 및 교황 특사로 활동했으며, 볼로냐에서 열린 회의(1547-1548)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22] 공의회 내에서 교황파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파 간의 갈등이 있었을 때, 그는 교황파의 지도적인 추기경으로서 활동했으며, 1547년 공의회를 볼로냐로 이전시키는 결정을 주도하여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3. 교황
이후 율리오 3세는 점차 교회 정치나 개혁 문제에서 멀어져 이탈리아 정치와 개인적인 즐거움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로마 외곽에 건축가 비뇰라에게 짓게 한 호화로운 별장인 빌라 줄리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예술과 오락에 막대한 교황청 자금을 사용했다.[10][11] 이러한 모습은 교회 개혁을 기대했던 동시대인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10] 그는 미켈란젤로나 팔레스트리나와 같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기도 했다.[23][24]
한편으로는 예수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1550년 회칙을 인가하고 1552년에는 콜레기움 게르마니쿰 설립을 승인했으며,[7][27] 메리 1세 여왕 치하 잉글랜드의 가톨릭 복귀를 지원하기 위해 레지날드 폴 추기경을 특사로 파견하는[8] 등 교황으로서의 활동도 있었지만, 그의 재위 기간은 거리에서 데려온 소년 인노첸초 치오키 델 몬테를 입양하고 추기경으로 임명한 사건으로 인해 큰 스캔들에 휩싸이기도 했다.[13][15][26]
결과적으로 율리오 3세의 교황 재위는 초기 개혁 의지의 좌절, 정치적 혼란 속에서의 일관성 부족, 예술 후원에 대한 열정, 그리고 개인적인 스캔들로 점철된 시기로 평가된다. 그는 통풍과 위장 질환으로 고생하다 1555년 3월 23일 선종했다.[4]
3. 1. 교황 선출
1549년 11월 10일 교황 바오로 3세가 선종하자,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소집되었다. 콘클라베에 참석한 48명의 추기경 선거인단은 세 파벌로 나뉘어 대립했다. 첫 번째 파벌은 신성 로마 제국파 추기경들로, 이들은 트리엔트 공의회의 재소집을 원했다. 반면 프랑스파 추기경들은 공의회 중단을 바랐다. 마지막으로 전임 교황 바오로 3세의 가문인 파르네세파 추기경들은 바오로 3세의 손자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의 선출과 파르마 공국에 대한 가문의 권리 주장을 지지했는데, 이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이해와 충돌하는 부분이었다.
처음에 신성 로마 제국파와 프랑스파 모두 조반니 마리아 초키 델 몬테 추기경(훗날의 율리오 3세)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황제 카를 5세는 그를 수용 가능한 후보 명단에서 명시적으로 제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델 몬테 추기경이 스스로를 타협 후보로 내세우고, 프랑스파가 다른 두 파벌을 견제하기 위해 그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서면서 상황이 변했다. 결국 10주간의 긴 선거 끝에 추기경들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져, 1550년 2월 7일 조반니 마리아 초키 델 몬테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29][3] 그는 자신을 후원했던 율리오 2세를 기리기 위해 교황명을 율리오 3세로 정했다. 그의 선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오타비오 파르네세는 즉시 파르마 공작 지위를 확정받았다. 그러나 카를 5세는 이 선출 결과에 불만을 품었다.
3. 2. 교회 개혁 노력

율리오 3세는 재임 초반에는 진지하게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달성하기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를 재개하기를 원했지만, 그가 교황직을 맡은 5년 동안 실제로 이루어진 일은 거의 없었다.[30][5] 155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요청에 따라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재개하고 파르마 공작 및 프랑스의 앙리 2세 국왕에 맞선 동맹을 맺어 파르마 전쟁을 일으켰다.[30][5] 그러나 프랑스의 앙리 2세는 새 교황이 합스부르크 왕가 친화적일 경우 교황에 대한 승인을 철회하겠다고 위협했고, 율리오 3세가 트리엔트 공의회를 재개하자 프랑스 주교들의 참석을 막았으며 프랑스에서 교황령을 시행하지 않았다.[6] 얼마 지나지 않아, 율리오 3세는 황제의 적들과 다시 친분을 맺고 프랑스와 타협했으며, 1553년 트리엔트 공의회 소집을 연기(중단)하였다.[30][5] 앙리 2세는 공의회가 중단된 후에도 분열을 위협하며 교황에게 합스부르크 왕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도록 강요했다.[6]
율리오 3세는 점차 이탈리아 정치에 만족하면서 포폴로 문 인근에 자신을 위해 지은 호화로운 궁전인 빌라 줄리아로 들어갔다.[30][7] 이후 그는 빌라 줄리아에서 안락한 시간을 보내며, 가끔씩 교회 개혁 위원회를 다시 세우는 등 교회를 개혁하는데 소심한 노력을 보이곤 하였다.[30][7] 그는 예수회와 절친한 관계였으며, 1550년 예수회의 헌장을 인가하고,[31][7] 1552년 8월 31일 교황 교서 《Dum sollicita》를 발표하여 예수회 신학교인 콜레지움 제르마니쿰(Collegium Germanicum)의 설립을 승인하고 연간 수입을 부여했다.[31][7]
그가 재임한 시기에 잉글랜드는 1553년 메리 1세 여왕이 즉위하면서 가톨릭 신앙으로 회심하였다. 이에 율리오 3세는 레지널드 폴 추기경을 특사로 파견하면서, 그에게 잉글랜드인들이 다시 가톨릭 신앙에 충실할 수 있게 잉글랜드 교회를 회복하는 일에 재량껏 활동하도록 전권을 부여하였다.[32][8] 1555년 2월 잉글랜드 의회에서 교황에게 공식적인 항복을 선언하기 위해 특사를 파견했지만, 특사가 로마에 당도하기도 전에 교황이 선종하고 말았다.[32][8]
율리오 3세는 선종하기 며칠 전에 조반니 모로네 추기경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성좌를 대표하는 사절로 파견하였다.[33][9] 그의 교황 재위 마지막 3년 동안의 무활동은 통풍의 잦고 심한 발작 때문일 수 있다.[4]
3. 3. 예술 후원
율리오 3세는 교황으로서 정치나 교회 문제보다는 예술과 건축 후원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이러한 태도는 동시대의 많은 사람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했다.[10] 그는 재임 기간 많은 시간을 로마 외곽에 비뇰라에게 짓게 한 호화로운 빌라 줄리아에서 보냈으며, 이곳에서의 오락 활동에 교황청의 막대한 자금을 사용했다.[10] 미켈란젤로는 빌라 줄리아의 설계를 감독했으며,[11] 조르조 바사리의 전반적인 지휘 아래 바르톨로메오 암마나티가 정원 설계를 맡았다.[11] 오늘날 빌라 줄리아에는 에트루리아 예술 및 유물을 소장한 국립 에트루리아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율리오 3세는 신학자보다는 예술과 건축의 애호가로 더 잘 기억된다. 그는 미켈란젤로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수석 건축가로 임명하기도 했다. 또한,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작곡가 조반니 피에를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를 후원하여 로마로 초청하고 자신의 악장(''maestro di cappella'')으로 삼았다.[23][24] 화가이자 건축가인 조르조 바사리 역시 율리오 3세의 초빙으로 로마에서 활동했다.
3. 4. 인노첸초 스캔들
율리오 3세의 교황 재임 기간은 여러 스캔들로 얼룩졌으며,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교황의 양 조카인 인노첸초 치오키 델 몬테를 둘러싼 사건이었다. 인노첸초 델 몬테는 파르마 거리에서 발견된 십 대 거지였으며, 그의 나이는 14세, 15세 또는 17세로 다양하게 알려져 있는데, 그의 가족에 의해 저택의 하인으로 고용되었다.[12] 율리오가 교황으로 선출된 후, 인노첸초 델 몬테는 교황의 형제에 의해 가족으로 입양되었고, 율리오에 의해 즉시 추기경 조카로 임명되었다. 교황은 그가 가장 총애하는 인물에게 노르망디의 몽생미셸과 베로나의 산 제노의 관할권, 그리고 나중에는 생 사바, 미라몬도, 그로타페라타 및 프라스카티 수도원 등 여러 곳의 봉토를 하사했다. 교황과 그의 양 조카 사이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율리오는 충고를 무시했다. 추기경 레지널드 폴과 조반니 카라파는 교황에게 "아버지 없는 젊은이를 중용하는 것이 불러일으킬 악한 추측"에 대해 경고했다.[13]
1550년 밀라노 총독 페란테 곤자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궁정인이자 시인인 지로라모 무치오는 "그들은 이 새로운 교황에 대해 많은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데, 그는 사악하고, 오만하며, 정신이 이상하다"라고 썼다.[14]
친척 장 뒤 벨레 추기경의 수행원으로 이 시기에 로마에 살았던 시인 조아생 뒤 벨레는 자신의 시집 《후회(Les regrets프랑스어)》(1558)에서 율리오에 대한 충격적인 의견을 두 소네트에서 표현하며, 그는 "머리에 붉은 모자를 쓴 가니메데"를 보는 것을 혐오한다고 썼다.[15][16]
교황의 정치적 적들 또한 이 스캔들을 이용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율리오가 인노첸초가 로마에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애인이 애인을 기다리는" 조급함을 보였고, 그 소년의 침대에서의 기량을 자랑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며, 베네치아 대사는 인노첸초 델 몬테가 교황의 침실을 "마치 그[인노첸초]가 그의[율리오] 아들이나 손자인 것처럼" 공유했다고 보고했다.[15][17] "호의적인 사람들은 그 소년이 결국 그의 사생아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12]
얼마 동안 개신교도들 또한 논쟁을 벌이기 위해 소문을 이용했다. 1597년, 그의 저서 《신의 심판의 극장(The Theatre of God's judgement영어)》에서, 영국의 청교도 성직자 토마스 비어드는 율리오가 "단지 그들의 남자 동성애자들만을 성직에 임명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스캔들이 교회에 미치는 피해에도 불구하고, 1555년 율리오가 사망한 후에야 인노첸초의 눈에 띄는 행보를 막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모욕한 두 남자를 살해한 후 일시적으로 추방되었고, 두 여성에 대한 강간 사건 이후 다시 추방되었다. 그는 추기경단의 인맥을 이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려 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약해졌고, 그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죽었다. 그는 델 몬테 가문 예배당에 묻혔다. 그러나 추기경 조카 스캔들의 한 가지 결과는 교황청 국무원장의 지위가 격상된 것이었는데, 이는 인노첸초 델 몬테가 수행할 수 없었던 업무를 국무원장이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국무원장은 결국 추기경 조카를 대체하여 교황청의 가장 중요한 직책이 되었다.[18]
3. 5. 죽음

율리오 3세는 1555년 3월 23일 오후 7시,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말년에 통풍으로 고생했으며, 이를 단식으로 치료하려 하기도 했으나 결국 위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임종 직전에는 음식을 삼키는 데 어려움을 겪어 거의 먹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사후에는 위암이나 식도암이 사인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그의 무덤은 바티칸 그로토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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