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멜키아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멜키아데는 309년 또는 310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인물이다. 그는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로마 황제 막센티우스가 교황 선출을 허용한 후 기독교 내 분열을 종식시켰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멜키아데에게 라테라노 궁전을 기증했으며, 멜키아데는 라테라노 시노드를 소집하여 도나투스파를 이단으로 단죄했다. 멜키아데는 314년 1월에 사망했으며, 순교자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로마 전례력 개정을 통해 축일과 칭호가 변경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314년 사망 - 장궤
장궤는 서진 시대에 상서랑 등을 역임하고 양주 자사로 부임하여 선비족을 토벌하고 반독립 세력을 형성했으며, 서진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며 지역 안정에 힘쓰다 60세에 사망했다. - 아프리카 출신 교황 - 교황 젤라시오 1세
교황 젤라시오 1세는 교황 수위권을 강조하고 '두 권력' 사상을 제시하며 교황권 강화와 교회 재산 관리 체계 확립에 힘쓴 5세기 로마 교황이다. - 아프리카 출신 교황 - 교황 빅토르 1세
교황 빅토르 1세는 2세기 후반 코모두스 황제 시대에 재임하며 부활절 날짜 논쟁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테오도투스를 파문하는 등 기독교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로마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려 했던 교황이다. - 알제리의 로마 가톨릭 성인 - 교황 젤라시오 1세
교황 젤라시오 1세는 교황 수위권을 강조하고 '두 권력' 사상을 제시하며 교황권 강화와 교회 재산 관리 체계 확립에 힘쓴 5세기 로마 교황이다. - 알제리의 로마 가톨릭 성인 - 교황 빅토르 1세
교황 빅토르 1세는 2세기 후반 코모두스 황제 시대에 재임하며 부활절 날짜 논쟁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테오도투스를 파문하는 등 기독교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며 로마 교회의 권위를 강화하려 했던 교황이다.
| 교황 멜키아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직책 | 로마 주교 |
| 교회 | 초대 교회 |
| 임기 시작 | 311년 7월 2일 |
| 임기 종료 | 314년 1월 10일 또는 11일 |
| 선임자 | 에우세비오 |
| 후임자 | 실베스테르 1세 |
| 출생 이름 | 밀티아데스 또는 멜키아데스 |
| 출생지 | 북아프리카 |
| 사망일 | 314년 1월 10일 또는 11일 |
| 사망 장소 | 로마, 로마 제국 |
| 매장지 | 칼리스토 카타콤, 아피아 가도, 로마, 이탈리아 |
| 종교 | 기독교 |
| 축일 | 12월 10일 |
| 공경 | 가톨릭 교회 동방 정교회 성공회 오리엔트 정교회 성공회 (공동체) 루터교 |
| 이름 정보 | |
| 그리스어 (원어) | Μιλτιάδης |
| 그리스어 (전체) | Μελιχιάδης ὁ Ἀφρικανός (멜키아데스 호 아프리카노스) |
2. 생애
아프리카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흑인이 아니었다는 글도 있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교황 에우세비오의 사망 이후 4년이라는 공백을 거쳐 교황으로 취임했다. 라테라노 대성전(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을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311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멜키아데 교황에게 라테라노 궁전을 기증하였는데, 이 궁전은 이후 오랫동안 교황의 거주지이자 기독교 세계 사목의 근거지가 되었다.
사후 12월 10일에 축일이 제정되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자연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반기독교 황제 막시미아누스 치하에서 어려운 입지 속에서 교황을 역임했기에 순교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1969년 로마 전례력에서 축일 날짜가 멜키아데 교황이 선종한 1월 10일로 이동하고, 순교자라는 칭호는 삭제되었으며, 의무 축일에서 제외되었다.
2. 1. 출신 배경
《교황 연대표》에 따르면, 멜키아데는 아프리카인이라고 한다. 비록 리처드 맥브라이언은 그가 로마인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3] 북아프리카 태생일 가능성도 있다.[4] 멜키아데의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북아프리카 출신이며, 5세기부터 편찬된 《교황 연대기》에 따르면 로마 제국의 시민이었다고 한다. 아프리카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흑인이 아니었다는 글도 있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2. 2. 교황 선출과 초기 활동
멜키아데는 309년 혹은 310년 8월 17일 교황 에우세비오가 시칠리아로 유배되어 선종한 후 1~2년 동안의 사도좌 공석 기간 끝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1] 로마 황제 막센티우스는 교황좌 공백기가 길어지자 후임 교황을 선출해도 좋다는 칙령을 반포했고, 이에 따라 멜키아데가 새 교황으로 선출되어 기독교 내 혼란과 분열이 사라졌다.[1] 이 칙령은 적어도 유럽에서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 것이었고, 황제는 몰수한 교회의 재산을 돌려주도록 명령하여 사실상 황제 치세 말기에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1]리베리아 카탈로그에 따르면, 311년 7월 2일 멜키아데가 교황으로 선출된 것은 교황 에우세비우스가 막센티우스에 의해 시칠리아로 추방된 후(310년 8월 17일 또는 309년) 교황 자리가 비어있던 ''sede vacante''가 끝났음을 의미했다.[4] 교황 즉위 후,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 동안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은 막센티우스에 의해 반환되었으나, 이 명령은 막센티우스의 관할 구역 전체로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4]
311년 6월 1일, 새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2] 콘스탄티누스는 맞수인 막센티우스를 제압하고 로마에 대한 통치권을 얻게 되었으며, 멜키아데 교황에게 라테라노 궁전을 기증했다.[2] 이 궁전은 이후 오랫동안 교황의 거주지이자 기독교 세계 사목의 근거지가 되었다.[2] 313년 초,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 두 공동 황제는 밀라노에서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고 몰수한 교회 재산을 다시 돌려준다는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2]
311년 4월, 로마 황제 갈레리우스는 소피아 (현재 불가리아의 소피아)에서 관용 칙령을 발표하여 동로마 제국에서 기독교에 대한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를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3]
''리베르 폰티피칼리스''는 멜키아데가 목요일이나 일요일에 금식하지 않는 것과 같은 여러 관습을 도입했다고 언급하고 있으나,[5] 후대 학자들은 이 관습이 멜키아데보다 먼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5] 멜키아데는 로마 주변의 모든 교회에 교황이 성화한 빵 조각, 즉 발효 빵을 분배하도록 규정하여 단결의 표시로 삼았다.[5]
312년 10월,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황제가 되었다.[6] 그는 나중에 교황에게 파우스타 황후의 궁전을 하사했는데, 그곳에 교황의 거처이자 교회 중앙 행정부의 자리인 라테라노 궁전이 세워졌다.[6]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첫 번째 교황인 그의 재임 기간은 콘스탄티누스의 교회에 대한 평화 시기와 일치했다. 313년 2월, 콘스탄티누스와 로마 제국 동부 지역의 황제 리키니우스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리키니우스의 영토에도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기독교인들은 예배의 자유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예배 장소를 모두 복원하고 몰수된 모든 재산을 돌려받았다.
2. 3. 콘스탄티누스 1세와의 관계
311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 신앙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1] 콘스탄티누스는 맞수인 막센티우스를 제압하고 로마에 대한 통치권을 얻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멜키아데 교황에게 라테라노 궁전을 기증하였는데, 이후 이 궁전은 오랫동안 교황의 거주지이자 기독교 세계 사목의 근거지가 되었다.[2] 313년 초,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는 밀라노에서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고 몰수한 교회 재산을 다시 돌려준다는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3]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로 진군하던 중 하늘에서 십자가 표시와 함께 "Εν τούτω νίκα|엔 투토이 니카|너는 이 징표로 승리하리라el"라는 그리스 문자를 발견하고, 모노그램☧(Chi-Rho|키 로영어)를 깃발로 한 라바룸을 내걸고 전투에서 승리했다.[4][5]
미트라교 신자였던 콘스탄티누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에 이해를 보이기 시작하여,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고, 미트라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6]
2. 4. 라테라노 공의회와 도나투스파 논쟁
313년 10월 2일부터 4일까지 3일간 라테란 공의회가 열렸다.[1] 카르타고 교회는 주교 카에킬리아누스의 선출을 둘러싼 분열로 혼란스러웠다. 대립하는 측은 로마의 지지를 받는 카에킬리아누스 측과, 도나투스를 따르는 북아프리카 출신 성직자들, 즉 도나투스파였다.[1] 도나투스파는 분열주의자와 이단자들이 취임 전에 재세례와 재서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도나투스의 지지자들은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호소하여 갈리아 출신의 재판관을 배정해 심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1] 콘스탄티누스는 멜키아데와 갈리아 출신 주교 3명을 임명했는데, 이는 황제가 교회 일에 처음으로 간섭한 사례였다.[1] 멜키아데는 황제와의 관계를 위태롭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불확실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공의회를 주재하고 싶어 하지 않아 절차를 일반 교회 시노드로 변경하고, 15명의 이탈리아 주교를 추가로 임명했다.[1]
공의회 절차는 로마 민사 소송을 모델로 삼았으며, 멜키아데는 엄격한 증거 및 논리 규칙을 고수했다. 이로 인해 도나투스파는 좌절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제시하지 않은 채 공의회를 떠났고, 멜키아데는 결론적으로 카에킬리아누스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1] 따라서 공의회는 단 세 번의 회의 후에 종료되었다. 교황은 카에킬리아누스를 카르타고 주교로 유지하고, 도나투스의 주교와 사제의 재세례 교리를 단죄했다.[1] 이러한 불리한 판결에도 불구하고 도나티즘은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계속 확산되었다.[1]
도나투스파는 다시 황제에게 호소했고, 황제는 314년에 아를 공의회를 소집하여 이에 대응했지만, 이 또한 도나투스파에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1] 멜키아데는 313년 말엽에 로마에서 라테라노 시노드를 소집하여 카에킬리아누스를 지지하고 도나투스를 이단으로 단죄하였으나, 아를 공의회가 소집될 즈음인 314년 1월 10일 또는 11일에 사망하여[1] 참석하지 못했다.
2. 5. 죽음과 유산
313년 말엽, 멜키아데 교황은 로마에서 라테라노 시노드를 소집하여 카르타고의 주교 카이킬리아누스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고, 도나투스를 이단으로 단죄하였다(도나투스주의 참조). 또한, 아를 시노드에 초청받았으나, 시노드가 개최하기 전에 선종하여 참여하지 못하였다.5세기에 작성된 《교황 연대표》에 따르면, 교황 멜키아데가 목요일 또는 일요일에 단식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포함한 몇몇 전통을 도입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 학자들은 그러한 전통들이 도입된 것은 교황 멜키아데의 이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고 있다.
13세기 로마 전례력에는 성 멜키아데 교황 축일을 12월 10일로 지정하고 ‘순교자’라고 잘못 기재되었다. 그리하여 1969년 로마 전례력에서 축일 날짜가 멜키아데 교황이 선종한 1월 10일로 이동하고, 순교자라는 칭호가 빠졌으며,[5] 의무 축일에서 제외되었다.[6] 4세기에 작성된 《히에로니무스 순교록》에 따르면 멜키아데의 축일은 1월 10일에 기념되었다.
13세기에는 당시 '성 멜키아데'로 불린 그의 축일이 '순교자'라는 잘못된 수식어와 함께 로마 일반 전례력에 포함되어 12월 10일에 기념되었다. 1969년, 이 축일은 의무적인 전례 기념일 목록에서 삭제되었으며, 그의 사망일인 1월 10일로 옮겨졌다. 그의 이름은 '밀티아데'로 표기되었지만 '순교자'라는 표시는 삭제되었다.
아프리카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흑인이 아니었다는 글도 있어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라테라노 대성전(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을 건설했다고 한다.
전임자 에우세비우스의 사망 후 4년의 공백을 거쳐 교황으로 취임했다. 사후 12월 10일에 축일이 제정되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자연사한 것으로 보이지만, 반기독교 황제 막시미아누스 치하에서 어려운 입지 속에서 교황을 역임했기에 순교자로 여겨지고 있다.
3. 평가 및 영향
5세기에 작성된 《교황 연대표》에 따르면, 교황 멜키아데가 목요일 또는 일요일에 단식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몇몇 전통을 도입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 학자들은 그러한 전통들이 교황 멜키아데 이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고 있다.
13세기 로마 전례력에는 성 멜키아데 교황 축일을 12월 10일로 지정하고 ‘순교자’라고 잘못 기재되었다. 1969년 로마 전례력에서 축일 날짜가 멜키아데 교황이 선종한 1월 10일로 이동하고, 순교자라는 칭호가 빠졌으며,[5] 의무 축일에서 제외되었다.[6]
참조
[1]
서적
リーダーズ英和辞典
1999
[2]
서적
ジーニアス英和大辞典
2001
[3]
서적
Lives of the Popes
HarperCollins
2000
[4]
간행물
Pope St. Miltiades
[5]
서적
Martyrologium Romanum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1
[6]
서적
Calendarium Romanum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6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