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젤라시오 2세
1. 개요
교황 젤라시오 2세는 1118년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와 대립하여 로마에서 추방당했다. 그는 하인리히 5세가 옹립한 대립 교황 그레고리오 8세와 갈등을 겪었으며, 프랑스로 망명하여 1119년 클뤼니에서 사망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1년 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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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게라시우스 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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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함 | 로마 주교 |
| 교회 | 가톨릭 교회 |
| 본명 | 조반니 카에타니 |
| 출생 연도 | 1060–64년 |
| 출생지 | 가에타, 가에타 공국 |
| 사망일 | 1119년 1월 29일 |
| 사망지 | 클뤼니, 부르고뉴 공국, 프랑스 왕국 |
| 선임 교황 | 파스칼 2세 |
| 후임 교황 | 칼리스토 2세 |
| 서임 | 1118년 3월 9일 |
| 축성 | 1118년 3월 10일 |
| 추기경 임명 | 1088년 9월 |
| 추기경 임명자 | 우르바노 2세 |
| 이전 직책 | 신성 로마 교회 임시 총리 (1088년)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의 추기경 부제 (1088–1118년) 신성 로마 교회 총리 (1089–1118년) |
| 다른 이름 | 젤라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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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년 사망 -
통의후
통의후는 고려 숙종의 일곱째 아들로, 1097년에 태어나 총명하고 학문을 즐겼으며 1106년에 통의후에 봉해졌고, 1115년에 관직을 더해 추인찬화봉절공신에 임명되었으나 1119년에 2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가에타니가 -
교황 보니파시오 8세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1294년부터 1303년까지 재임한 제192대 로마 교황으로, 법률가 출신이며 희년 선포와 대학교 설립 등의 업적을 남겼으나 프랑스 왕, 콜론나 가문과의 갈등 및 아나니 사건 등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 일대기
교황령 가에타 출신으로, 1118년 교황으로 선출될 때까지 부제추기경과 교황청 수석 서기관을 역임했지만 사제는 아니었다. 전임 교황 파스칼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하인리히 5세와의 대립에서 열세에 놓여 대립 교황 그레고리오 8세 때문에 프랑스 왕국으로 도망쳤다.
1119년 1월 24일, 클뤼니에서 1년 5일의 짧은 재위 기간을 마치고 사망했다.
2.1. 생애 초기
조반니 카에타니는 카에타니 가문 출신으로, 1060년에서 1064년 사이 가에타에서 태어났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수사가 된 그는 교황 우르바노 2세를 따라 로마로 갔다. 1088년 8월에 교황을 모시는 차부제로 서품받았고, 같은 해 9월 23일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1089년부터 1118년까지 교황청 상서원장을 역임하면서 교황청 행정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교황 문서 작성 시 로마인 공증인에게 전적으로 맡기던 관습을 폐지하고, 교황을 위해 일할 서기들을 고용하고 초서 문서를 도입했다. 또한 교황청 상서원장은 추기경이 맡도록 하며, 교황 선종 후 후임자가 선출될 때까지 직무를 계속 유지하는 선례를 확립하였다.
2.2. 교황 선출과 즉위
1118년 교황 파스칼 2세가 선종한 후, 부제 추기경이자 교황청 수석 서기관이었던 조반니 카에타니가 만장일치로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어 교황 젤라시오 2세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즉위 직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를 지지하는 로마 귀족 프란지파네의 첸시오 2세에게 납치되어 감금되었다. 다행히 소식을 접한 로마 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젤라시오 2세는 풀려날 수 있었다.
하인리히 5세는 젤라시오 2세에게 서임권 양도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분노한 하인리히 5세는 1118년 3월 군대를 동원해 젤라시오 2세를 로마에서 추방하고, 그의 선출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브라가의 대주교 마우리체 부르댕을 대립교황 그레고리오 8세로 옹립하였다.
2.3. 하인리히 5세와의 갈등과 대립교황
하인리히 5세는 전임 파스칼 2세에게 강요하여 얻어낸 서임권을 계속 행사하려 했으나, 젤라시오 2세는 이를 거부했다. 1118년 3월, 하인리히 5세는 무력을 동원해 젤라시오 2세를 로마에서 추방하고, 그의 선출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하인리히 5세는 브라가의 대주교 마우리체 부르댕을 대립교황 그레고리오 8세로 추대하여 젤라시오 2세와 대립하게 했다.
2.4. 망명과 죽음
교황 젤라시오 2세는 가에타로 피신하여 1118년 3월 9일 사제 서품을 받고, 다음 날 주교 서임을 받았다. 하인리히 5세와 대립교황을 파문하고, 노르만족의 도움을 받아 7월에 로마로 돌아왔으나, 프란지파니 가문을 중심으로 한 친황제파의 공격을 받아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이때 산타 프라세데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중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프랑스로 망명한 젤라시오 2세는 피사 대성당 축성식을 거행하고, 마르세유에 도착한 후, 아비뇽, 몽펠리에 등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119년 1월 비엔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여 서임권 투쟁 해결을 위한 공의회 개최를 계획했으나, 클뤼니 수도원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젤라시오 2세의 교황 재위 기간은 1년 5일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