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와타 마스미
1. 개요
구와타 마스미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초등학교 시절 소프트볼과 야구를 시작하여, PL가쿠엔 고등학교에서 'KK 콤비'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고시엔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1985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2006년까지 활약하며, 센트럴 리그 MVP, 사와무라 에이지상 등을 수상했다. 2007년에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해설가, 평론가로 활동하며, 와세다 대학교 대학원 졸업 후 도쿄 대학 야구부 코치를 역임했다. 2021년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 코치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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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구와타 마스미 |
|---|---|
| 출생 | 1968년 4월 1일 |
| 출생지 | 일본 오사카부 야오시 |
| 신장 | 174cm |
| 체중 | 80kg |
| 포지션 | 투수 |
| 투타 | 우투우타 |
| 고등학교 | PL학원고등학교 |
|---|---|
| 프로 입단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6년 ~ 2006년) |
| 메이저 리그 | 피츠버그 파이리츠 (2007년) |
| 데뷔일 | 1986년 5월 25일 |
|---|---|
|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최종 출장일 | 2006년 4월 27일 |
| 최종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
| 데뷔일 | 2007년 6월 10일 |
|---|---|
| 소속팀 | 피츠버그 파이리츠 |
| 최종 출장일 | 2007년 8월 14일 |
| 최종 소속팀 | 피츠버그 파이리츠 |
| 코치 | 요미우리 자이언츠 (2021년 ~ 현재) |
|---|---|
| 2군 감독 | 요미우리 자이언츠 (현재) |
| 선수 | 73 |
|---|---|
| 코치 | 73 |
| 주요 수상 | 1987년 사와무라 에이지상 1994년 센트럴 리그 MVP |
|---|
| 승패 | 173승 141패 |
|---|---|
| 평균 자책점 | 3.42 |
| 탈삼진 | 1,980개 |
| 승패 | 0승 1패 |
|---|---|
| 평균 자책점 | 9.43 |
| 탈삼진 | 12개 |
-
야오시 출신 -
토요카와 에츠시
토요카와 에츠시는 일본의 배우로, 영화 《너는 나를 좋아하게 될 거야》로 데뷔하여 드라마,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
야오시 출신 -
미이케 다카시
일본의 영화 감독 미이케 다카시는 재일교포 출신으로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연출하며 폭력과 사회 부조리를 다룬 독특한 스타일로 컬트적인 인기를 얻어 세계적인 감독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
1968년 출생 -
서형원
서형원은 환경운동연합 활동을 거쳐 과천시의회 의원 및 의장을 역임하고 녹색당 풀뿌리정치지원단장으로 활동한 환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
1968년 출생 -
조지호 (경찰공무원)
조지호는 대한민국 경찰청장을 역임한 경찰공무원으로, 경찰대학을 졸업하고, 1990년 경위로 임관하여 수사, 기획, 인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았으며, 2024년 8월 10일 제24대 경찰청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비상계엄 가담 혐의로 직무정지되었다. -
미국에 거주한 일본인 -
안토니오 이노키
안토니오 이노키는 일본 프로레슬링의 황금기를 이끈 프로레슬러이자 정치인, 격투기 프로모터로, 역도산의 제자로 프로레슬링에 입문하여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설립하고 무하마드 알리와의 격투기 이벤트, 스포츠 평화당 창당 및 참의원 당선 등의 활동을 펼치며 프로레슬링계에 큰 공헌을 남겼다. -
미국에 거주한 일본인 -
노구치 히데요
노구치 히데요는 1876년 일본에서 태어나 2살 때 화상을 입었지만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미국에서 매독과 황열병 연구를 수행하며 매독 스피로헤타를 발견하는 등 업적을 남겼지만 황열병으로 사망한 세균학자이다.
2. 프로 입단 전
1983년 4월, PL가쿠엔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동기인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함께 ‘KK 콤비’라고 불렸다. 입학 직후, 구와타는 다른 장신 선수들에 밀려 투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외야수 전향 지시를 받았으나, 시미즈 가즈오 임시 투수 코치의 지도로 투수로 복귀했다. 시미즈 코치는 구와타의 공 회전이 좋다는 점을 발견하고 1대 1 지도를 시작했다.
고시엔 오사카부 대회에서 1학년으로 선발 명단에 포함되었고, 스이타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두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1983년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는 등번호 ‘11’을 착용하고 에이스로 활약하며 우승, 학제 개혁 이후 최연소 우승 투수(15세) 기록을 세웠다.
1984년 봄 고시엔 대회와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 모두 준우승을 차지했고, 1985년에는 봄 대회 4강, 여름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고시엔 대회 통산 20승(역대 2위, 학제 개혁 이후 1위), 통산 홈런 6개(역대 2위)를 기록했다.
| | 소속 학교 || 등번호 || 결과 || 주요 기록 | ||||
|---|---|---|---|---|
| 1983년 여름 | PL가쿠엔 | 11 | 우승 | 최연소 우승 투수(15세) |
| 1984년 봄 | PL가쿠엔 | 1 | 준우승 | |
| 1984년 여름 | PL가쿠엔 | 1 | 준우승 | |
| 1985년 봄 | PL가쿠엔 | 1 | 4강 | |
| 1985년 여름 | PL가쿠엔 | 1 | 우승 |
1985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다. 당초 와세다 대학 진학을 희망했으나, 요미우리가 1순위로 지명하면 프로에 가기로 결정했다. 다른 팀들은 와세다 대학 진학 의사를 밝힌 구와타 지명을 꺼렸지만, 요미우리는 1라운드에 지명했다. 이로 인해 요미우리와 구와타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의혹([[KK 드래프트 사건]])이 제기되었다.
구와타는 밀약 의혹을 부인하며, "요미우리에 가지 않겠다고 말한 적은 없다. 봄의 선발이 끝났을 때, 요미우리가 1위 지명해준다면 프로에 가겠다고 결정했다"라고 해명했다. 드래프트 직전에는 4개 구단이 1순위 지명을 약속했었다고 밝혔다.
드래프트 당일 인터뷰에서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감독은 "팀의 보강 포인트는 투수였고, 투수라면 구와타였다"라며, 지명이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2.1. 초등학교 시절
초등학교 2학년 때 소프트볼을 시작하면서 6학년 주축의 A팀에서 유격수 주전 포지션을 차지했고, 초등학교 3학년 때 보이스 리그 팀인 ‘야오 프렌즈’(八尾フレンド일본어)에 소속되어 아버지 야스지로부터 창의적인 연습과 특훈 등을 받았다. 5학년부터는 주전 투수로 활약했다.
2.2. 중학교 시절
1980년 4월, 야오 시립 다이쇼 중학교에 입학하여 야구부에 입단했고 준경식(準硬式) 경기(오사카 중학교 우승 야구 대회)에 출전, 입학 직후에는 외야수 겸 1루수로 주전 포지션을 획득했다. 중학교 1학년 가을부터는 주전급 투수로 활약했다.
중학교 2학년 때(1981년)에는 제32회 오사카 중학교 우승 야구 대회에서 우승한 모리구치 시립 야쿠모 중학교에 0대 1로 패했고, 중학교 3학년 때(1982년) 출전한 봄 지구 대회, 오사카부 대회, 야오 시 대회, 제33회 오사카 중학교 우승 야구 대회에서 모두 제패했다.
다이쇼 중학교 시절 구와타와 배터리를 이룬 니시야마 슈지는 우에노미야 고등학교를 거쳐 난카이, 히로시마, 요미우리에서 프로 야구 선수로 활약했다(전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배터리 코치). 구와타와 니시야마가 이끄는 다이쇼 중학교는 투타에서 모두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오사카 중학교 우승 야구 대회 50주년 기념지에는 “구와타의 공은 파울로 만드는 것조차 어려웠고, 어쩌다 출루해도 훌륭한 견제구에 당해 완패했다. 경기에서 지면 분하다기보다 너무 큰 실력 차이에 말문이 막힐 뿐이었다”라는 일화가 실려 당시 구와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준경식 야구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다이쇼 중학교에 구와타가 있다”라고 알려질 정도였다.
진로 문제로 학교 측과 갈등을 겪었고, 중학교 3학년 3학기에 야오 시립 세이호 중학교로 전학하여 졸업했다.
2.3. 고등학교 시절
1983년 4월, PL가쿠엔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동기인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함께 ‘KK 콤비’라고 불렸다. PL가쿠엔 고등학교에 입학한 직후, 구와타는 다른 장신 선수들에 밀려 투수로서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외야수로 전향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시미즈 가즈오 임시 투수 코치의 지도로 투수로 복귀했다. 시미즈 코치는 구와타의 공 회전이 좋다는 점을 발견하고 1대 1 지도를 시작했다.
여름 고시엔 오사카부 대회에서 1학년으로 선발 명단에 포함되었고, 스이타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완봉승을 거두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1983년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는 등번호 ‘11’을 착용하고 에이스로 활약하며 우승을 달성, 학제 개혁 이후 최연소 우승 투수(15세) 기록을 세웠다.
2학년 때인 1984년 봄 고시엔 대회와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 모두 준우승을 차지했고, 3학년 때인 1985년에는 봄 대회 4강, 여름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고시엔 대회 통산 20승(역대 2위, 학제 개혁 이후 1위), 통산 홈런 6개(역대 2위)를 기록했다.
| | 소속 학교 || 등번호 || 결과 || 주요 기록 | ||||
|---|---|---|---|---|
| 1983년 여름 | PL가쿠엔 | 11 | 우승 | 최연소 우승 투수(15세) |
| 1984년 봄 | PL가쿠엔 | 1 | 준우승 | |
| 1984년 여름 | PL가쿠엔 | 1 | 준우승 | |
| 1985년 봄 | PL가쿠엔 | 1 | 4강 | |
| 1985년 여름 | PL가쿠엔 | 1 | 우승 |
2.3.1. 드래프트 지명
1985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당초 와세다 대학 진학을 희망했으나, 요미우리가 1순위로 지명하면 프로에 가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다른 팀들은 구와타가 와세다 대학에 진학할 의사를 밝혀 지명을 꺼렸지만, 요미우리는 구와타를 1라운드에 지명했다. 이로 인해 요미우리와 구와타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의혹([[KK 드래프트 사건]])이 제기되었다.
구와타는 밀약 의혹을 부인하며, "요미우리에 가지 않겠다고 말한 적은 없다. 봄의 선발이 끝났을 때, 요미우리가 1위 지명해준다면 프로에 가겠다고 결정했다"라고 해명했다. 또한, 드래프트 직전에는 4개 구단이 1순위 지명을 약속했었다고 밝혔다.
드래프트 당일 인터뷰에서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감독은 "팀의 보강 포인트는 투수였고, 투수라면 구와타였다"라며, 지명이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3. 프로 입단 후
구와타는 프로 리그에서 빠르게 입지를 굳혀, 1987년 두 번째 해에 15승을 거두고 리그 최저인 2.1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메이저 리그 투수 빌 걸릭슨은 1988년부터 1989년까지 자이언츠에서 뛰면서 구와타와 친분을 쌓았다. 걸릭슨은 아들 크레이그 구와타 걸릭슨의 이름을 구와타의 이름을 따서 지었고, 일본인 투수에게 많은 조언을 해줬다. 구와타는 메이저 리그에서 뛰는 꿈을 걸릭슨으로부터 얻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많은 장애물들이 그가 이 꿈을 실현하는 것을 막았는데, 여기에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의 그의 큰 성공도 포함되었다. 그는 같은 해에 사와무라 에이지 상(일본의 사이 영 상에 해당)을 수상했고, 1992년부터 6시즌 연속 10승 이상을 거두었다.
1995년 6월, 팝 플라이를 잡으려다 오른쪽 팔꿈치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시즌을 마감했고, 미국에서 수술을 받았다. 1995년 나머지와 1996년 전체를 재활에 보냈다. 1997년에 복귀하여 10승, 1998년에는 16승을 거두었지만, 부상 전보다 구속이 감소했다.
2001년 오프 시즌 동안 은퇴를 고려했지만, 자이언츠 단장 하라 타쓰노리가 그를 설득하여 팀에 남게 했다. 2002년 4월 19일, 한신 타이거스 에이스 이가와 케이를 1–0으로 꺾는 뛰어난 투구를 보여주며 여전히 자이언츠 로테이션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해 최고의 해를 보내 2.22의 평균자책점(리그 최저)을 기록했고, 4년 만에 처음으로 10승 이상을 거두었다. 그러나 2003년부터 2006년까지는 부진한 투구를 보이며 총 45경기(44선발)에 출전했고, 그 4년 동안 9–16의 기록을 남겼다.
일본에서 선수 생활 동안 118개의 완투 경기를 기록했다. 2006 시즌이 끝나갈 무렵, 메이저 리그에서 뛰겠다는 의사를 밝혀 팬들을 놀라게 했다. 그해 12월, 38세의 루키로서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으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21년간의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도 관심을 보였지만, 파이리츠가 메이저 리그에서 뛸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하여 피츠버그를 선택했다.
파이리츠와 함께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가했지만, 오른쪽 발목 부상으로 인해 개막전 로스터에 이름을 올리는 데 실패했다. 파이리츠는 그를 장애인 선수로 인디애나폴리스 인디언스의 트리플 A 로스터에 포함시켜 메이저 리그로 올라갈 기회를 제공했다.
2007년 6월 9일, 구원 투수 살로몬 토레스가 부상자 명단에 오르면서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승격되었다. 그는 파이리츠 팀 역사상 최초의 일본인 선수가 되었다. 6월 10일 뉴욕 양키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 데뷔를 했다. 당시 39세였던 그는 새첼 페이지와 디오메데스 올리보를 제외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시대에 가장 나이가 많은 데뷔 선수였다. 2이닝 동안 3루수 알렉스 로드리게스에게 홈런을 허용하여 2실점했다.
8월 14일, 파이리츠는 구와타를 지명 할당했다. 8월 17일 그를 트리플 A로 이관했지만, 이 지시를 거부했다. 그 후 일본으로 귀국했다.
2007년 12월, 2008 시즌을 위해 파이리츠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에는 팀과 함께하는 스프링 트레이닝 초대가 포함되었다.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팀에 합류하지 못한 후 2008년 3월 26일 야구 선수 은퇴를 발표했다. 은퇴 발표와 함께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구와타에게 코치직을 제안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3.1. 일본 프로 야구 (NPB)
桑田 真澄일본어는 1986년부터 2006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었다. 프로 2년차인 1987년에 15승을 거두고 평균자책점 2.17을 기록하여 최우수 평균자책점을 수상했고, 사와무라 에이지 상을 수상했다. 1994년에는 최다 탈삼진, MVP를 수상했다.
1989년부터는 감독 후지타 모토시 특유의 선발 이론에 따라 사이토 마사키, 마키하라 히로미와 함께 3명의 선발 축으로 기용되어 "삼본주"라고 불렸다.
1995년 6월, 팝 플라이를 잡으려다 오른쪽 팔꿈치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시즌을 마감했고, 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 1995년 잔여 시즌과 1996년 시즌 전체를 재활에 전념했다. 1997년에 복귀하여 10승을 거두었고, 1998년에는 16승을 거두었지만, 부상 전보다 구속이 감소했다.
2001년 오프 시즌에 은퇴를 고려했지만, 하라 타쓰노리 단장의 설득으로 팀에 남았다. 2002년에는 평균자책점 2.22(리그 최저)를 기록하고 4년 만에 10승 이상을 거두며 최고의 해를 보냈다. 그러나 2003년부터 2006년까지는 부진한 투구를 보이며 4년간 9승 16패를 기록했다.
桑田 真澄일본어는 선수 생활 동안 7번의 리그 우승, 4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개인적으로는 NPB에서 총 15개의 타이틀(최우수 방어율 2개, 최다 탈삼진 1개, 최고 승률 1개)과 주요 표창(사와무라 에이지 상 1개, 최우수 선수 1개, 베스트 나인 1개, 골든 글러브 상 8개)을 획득했다. 투수 최다 타이 기록인 골든 글러브 상을 8회 수상했다.
2006년 시즌을 끝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퇴단했다.
다음은 NPB 통산 기록이다.
| 년도 | 구단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사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투구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사구 | 고의 | 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방어율 | WHIP |
|---|---|---|---|---|---|---|---|---|---|---|---|---|---|---|---|---|---|---|---|---|---|---|---|---|---|
| 1986 | 요미우리 | 15 | 12 | 1 | 0 | 0 | 2 | 1 | 0 | -- | .667 | 261 | 61.1 | 64 | 13 | 17 | 1 | 1 | 57 | 2 | 0 | 36 | 35 | 5.14 | 1.32 |
| 1987 | 28 | 27 | 14 | 2 | 4 | 15 | 6 | 0 | -- | .714 | 823 | 207.2 | 177 | 16 | 43 | 4 | 5 | 151 | 1 | 0 | 59 | 50 | 2.17 | 1.06 | |
| 1988 | 27 | 27 | 5 | 1 | 0 | 10 | 11 | 0 | -- | .476 | 806 | 198.1 | 174 | 19 | 53 | 13 | 5 | 139 | 4 | 0 | 80 | 75 | 3.40 | 1.14 | |
| 1989 | 30 | 30 | 20 | 5 | 4 | 17 | 9 | 0 | -- | .654 | 995 | 249.0 | 214 | 18 | 54 | 3 | 9 | 155 | 6 | 1 | 77 | 72 | 2.60 | 1.08 | |
| 1990 | 23 | 22 | 17 | 2 | 2 | 14 | 7 | 0 | -- | .667 | 748 | 186.1 | 161 | 12 | 40 | 1 | 1 | 115 | 2 | 1 | 58 | 52 | 2.51 | 1.08 | |
| 1991 | 28 | 27 | 17 | 3 | 0 | 16 | 8 | 1 | -- | .667 | 934 | 227.2 | 192 | 17 | 58 | 4 | 5 | 175 | 8 | 0 | 89 | 80 | 3.16 | 1.10 | |
| 1992 | 29 | 29 | 11 | 3 | 0 | 10 | 14 | 0 | -- | .417 | 912 | 210.1 | 235 | 24 | 64 | 3 | 5 | 152 | 9 | 1 | 112 | 103 | 4.41 | 1.42 | |
| 1993 | 26 | 26 | 8 | 1 | 0 | 8 | 15 | 0 | -- | .348 | 745 | 178.0 | 162 | 15 | 61 | 6 | 6 | 158 | 5 | 0 | 85 | 79 | 3.99 | 1.25 | |
| 1994 | 28 | 27 | 10 | 1 | 3 | 14 | 11 | 1 | -- | .560 | 836 | 207.1 | 175 | 16 | 51 | 8 | 4 | 185 | 6 | 0 | 65 | 58 | 2.52 | 1.09 | |
| 1995 | 9 | 9 | 3 | 1 | 0 | 3 | 3 | 0 | -- | .500 | 265 | 65.1 | 53 | 2 | 18 | 1 | 2 | 61 | 2 | 0 | 22 | 18 | 2.48 | 1.09 | |
| 1997 | 26 | 26 | 0 | 0 | 0 | 10 | 7 | 0 | -- | .588 | 580 | 141.0 | 127 | 15 | 37 | 1 | 5 | 104 | 1 | 0 | 68 | 59 | 3.77 | 1.16 | |
| 1998 | 27 | 27 | 7 | 1 | 0 | 16 | 5 | 0 | -- | .762 | 779 | 181.0 | 197 | 17 | 46 | 0 | 6 | 116 | 4 | 1 | 88 | 82 | 4.08 | 1.34 | |
| 1999 | 32 | 22 | 2 | 0 | 0 | 8 | 9 | 5 | -- | .471 | 608 | 141.2 | 137 | 17 | 57 | 2 | 4 | 100 | 6 | 1 | 69 | 64 | 4.07 | 1.37 | |
| 2000 | 30 | 10 | 0 | 0 | 0 | 5 | 8 | 5 | -- | .385 | 385 | 86.0 | 103 | 6 | 28 | 5 | 3 | 49 | 0 | 1 | 43 | 43 | 4.50 | 1.52 | |
| 2001 | 16 | 8 | 0 | 0 | 0 | 4 | 5 | 2 | -- | .444 | 226 | 50.1 | 56 | 4 | 19 | 4 | 0 | 31 | 0 | 0 | 29 | 27 | 4.83 | 1.49 | |
| 2002 | 23 | 23 | 3 | 1 | 0 | 12 | 6 | 0 | -- | .667 | 640 | 158.1 | 138 | 13 | 38 | 2 | 3 | 108 | 3 | 0 | 51 | 39 | 2.22 | 1.11 | |
| 2003 | 14 | 13 | 0 | 0 | 0 | 5 | 3 | 0 | -- | .625 | 314 | 71.1 | 92 | 13 | 16 | 1 | 3 | 46 | 1 | 1 | 48 | 47 | 5.93 | 1.51 | |
| 2004 | 16 | 16 | 0 | 0 | 0 | 3 | 5 | 0 | -- | .375 | 357 | 79.1 | 100 | 16 | 28 | 1 | 4 | 39 | 4 | 0 | 58 | 57 | 6.47 | 1.61 | |
| 2005 | 12 | 12 | 0 | 0 | 0 | 0 | 7 | 0 | 0 | .000 | 238 | 49.2 | 65 | 7 | 23 | 2 | 5 | 34 | 4 | 0 | 43 | 40 | 7.25 | 1.77 | |
| 2006 | 3 | 3 | 0 | 0 | 0 | 1 | 1 | 0 | 0 | .500 | 55 | 11.2 | 19 | 4 | 1 | 0 | 0 | 5 | 0 | 0 | 11 | 9 | 6.94 | 1.71 | |
| NPB: 20년 | 442 | 396 | 118 | 21 | 13 | 173 | 141 | 14 | 0 | .551 | 11507 | 2761.2 | 2641 | 264 | 752 | 62 | 76 | 1980 | 68 | 7 | 1191 | 1089 | 3.55 | 1.23 |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다음은 투수 수비 기록이다.
| 연도 | 구단 | 투수(P) | |||||
|---|---|---|---|---|---|---|---|
| 경기 | 자살 | 보살 | 실책 | 병살 | 수비율 | ||
| 1986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5 | 2 | 11 | 0 | 1 | 1.000 |
| 1987 | 28 | 11 | 51 | 0 | 3 | 1.000 | |
| 1988 | 27 | 23 | 43 | 1 | 4 | .985 | |
| 1989 | 30 | 15 | 52 | 4 | 1 | .944 | |
| 1990 | 23 | 13 | 40 | 3 | 1 | .946 | |
| 1991 | 28 | 24 | 58 | 1 | 1 | .988 | |
| 1992 | 29 | 15 | 49 | 3 | 6 | .955 | |
| 1993 | 26 | 10 | 42 | 1 | 2 | .981 | |
| 1994 | 28 | 14 | 39 | 4 | 3 | .930 | |
| 1995 | 9 | 5 | 13 | 1 | 0 | .947 | |
| 1997 | 26 | 10 | 28 | 3 | 1 | .927 | |
| 1998 | 27 | 12 | 40 | 3 | 5 | .945 | |
| 1999 | 32 | 15 | 25 | 0 | 1 | 1.000 | |
| 2000 | 30 | 9 | 12 | 2 | 1 | .913 | |
| 2001 | 16 | 5 | 12 | 0 | 1 | 1.000 | |
| 2002 | 23 | 15 | 32 | 1 | 3 | .979 | |
| 2003 | 14 | 6 | 17 | 0 | 2 | 1.000 | |
| 2004 | 16 | 8 | 18 | 0 | 1 | 1.000 | |
| 2005 | 12 | 7 | 10 | 0 | 0 | 1.000 | |
| 2006 | 3 | 3 | 2 | 0 | 0 | 1.000 | |
| NPB | 442 | 222 | 594 | 27 | 37 | .968 |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 굵은 글씨 연도는 골든 글러브 상 수상
다음은 타격 기록이다.
3.2. 메이저 리그 (MLB)
2006년 시즌이 끝날 무렵, 구와타는 메이저 리그에서 뛰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해 12월,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도 관심을 보였지만, 구와타는 파이리츠를 선택했다.
구와타는 파이리츠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가했지만, 오른쪽 발목 부상으로 개막전 로스터에 들지 못했다. 파이리츠는 그를 인디애나폴리스 인디언스의 트리플 A 로스터에 포함시켜 메이저 리그 진출 기회를 주었다.
2007년 6월 9일, 구원 투수 살로몬 토레스의 부상으로 구와타는 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승격되었다. 그는 파이리츠 역사상 최초의 일본인 선수였다. 6월 10일 뉴욕 양키스와의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 데뷔를 했다. 39세의 나이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시대에 새첼 페이지와 디오메데스 올리보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데뷔 선수였다. 그는 2이닝 동안 알렉스 로드리게스에게 홈런을 맞아 2실점했다.
8월 14일, 파이리츠는 구와타를 지명 할당했다. 8월 17일, 구와타는 트리플 A 이관을 거부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2007년 12월, 구와타는 2008 시즌을 위해 파이리츠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맺고 스프링 트레이닝 초대를 받았다.
2008년 3월 26일, 구와타는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팀에 합류하지 못하고 야구 선수 은퇴를 발표했다.
; 첫 기록
* 첫 등판: 2007년 6월 10일, 대 뉴욕 양키스 3차전 (양키 스타디움), 5회초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2이닝 2실점
* 첫 홀드: 2007년 6월 19일, 대 시애틀 매리너스 1차전 (세이프코 필드), 8회말 4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0.1이닝 무실점
* 첫 탈삼진: 2007년 6월 21일, 대 시애틀 매리너스 3차전 (세이프코 필드), 6회말 애드리안 벨트레로부터
4. 지도자 경력
2021년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를 맡고 있다.
5. 은퇴 후 활동
스포츠 호치, 니혼 TV의 NPB 중계 프로그램, TBS 텔레비전의 MLB 프로그램 해설자로 활동했다. 2013년에는 도쿄 대학 야구팀 코치로 채용되었다.
2019년 11월, 아들 매트 구와타와 함께 Y! 모바일 광고에 출연했다. 와세다 대학 스포츠 과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일본 스포츠의 가혹 행위와 신체적 처벌에 대해 비판하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2011년 9월 14일, 동일본 대지진 복구를 위해 후쿠시마현영 아즈마 구장에서 니시 토시히사, 다쓰나미 가즈요시 등 OB들과 함께 지역 사회인 클럽 선발팀과 경기를 가졌다. 이 경기에서 구와타는 투수로 출전, 130km/h대 후반의 스트레이트를 선보였다.
일본야구기구의 '통일구 문제' 발생 시, '통일구 문제에 대한 유식자에 의한 제3자 조사·검증 위원회' 특별 어드바이저로 참여했다.
2014년, 그랜드 점프 PREMIUM에 단기 연재된 야구 만화 '다우트'의 감수를 담당했다. 2016년 3월, BC 리그 시나노 그란세로스 임시 코치를 맡았다.
2017년 12월, 월드 페가서스와 글러브 개발 어드바이저리 계약을 체결했다. 2018년 8월, 스포츠 그래픽 넘버에서 자신의 반생을 되돌아보는 연재를 시작했다. 같은 달 제100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기념 대회 레전드 시구식에 스파이크 차림으로 등장, 투구를 선보였다.
2019년 1월 12일, PL 학원 경식 야구부 OB회 회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2월 22일, 스포츠청 참여관에 취임했다.
2021년 1월 12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투수 치프 코치 보좌로 현장에 복귀, 2022년 투수 치프 코치, 2023년 팜 총감독, 2024년 2군 감독으로 보직 변경되었다.
5.1. 해설가 및 평론가
은퇴 후에는 야구 해설가 및 평론가로 활동했는데, 니혼테레비, 스포츠호치 전속 야구 해설가 및 야구 평론가를 맡았다. TBS, J-SPO 메이저 리그 게스트 코멘테이터로도 활동했다.
5.2. 학업
와세다 대학 스포츠 과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의 논문은 메이지 시대부터 현재까지 일본 야구의 초기 시절부터 게임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던 일본 야구의 정신과 영혼인 "야큐도"를 설명한다. 2009년 1월 28일, 40세의 나이로 와세다 대학 스포츠 과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2010년 3월 25일 수석으로 수료했다. 대학원에서는 히라타 타케오 교수의 지도를 받았으며, 동기로는 정치가 나카야마 야스히데와 경정 선수 에구치 코세이 등이 있다. 석사 논문 제목은 '「야구도」의 재정의에 따른 일본 야구계의 더욱 발전 방안에 관한 연구'로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2014년 3월 도쿄 대학 경식 야구부 특별 코치를 맡으면서 대학원 종합문화연구과 연구생에 합격했다. 같은 해 4월부터 코치 직과 기존 활동을 계속하면서, 이 연구과에서 투수·야수의 동작을 연구했다. 2019년 현재 생명환경과학계 신체운동과학연구실에 소속되어 있다.
5.3. 기타
* 프로 골퍼 구와타 이즈미의 형이다. 장남은 독립 리그에 소속되었던 전 프로 야구 선수 구와타 마사키, 차남은 브라이달 모델이자 뮤지션인 MattMatt영어이다.
* 특정 비영리 활동 법인 '아미치 델 쿠오레'(이탈리아어로 '마음의 친구'라는 뜻) 이사장, 보이즈 리그 아소 자이언츠 회장을 역임했다.
* PL 학원 경식 야구부 OB회 회장을 역임했다.
* 도쿄 대학 운동회 경식 야구부 특별 코치를 맡았다.
* 일본 야구 기구(NPB) "통일구 문제에 관한 유식자에 의한 제3자 조사·검증 위원회" 특별 어드바이저를 맡았다.
* 입단 초 신인 시절부터 관례를 무시하고 아이싱으로 팔꿈치를 보호하는 등, 신념을 굽히지 않는 성격이었다.
* 하우스 식품의 "후르체"를 매우 좋아한다. PL 학원 시절에는 구와타를 위해 후르체를 매일 만드는 담당 후배가 있었다.
* 비흡연자이자 혐연가이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재적 시절, 간접흡연에 분개하여 구단에 요청해 팀의 분연화를 달성했다.
* 2016년, 키요하라 가즈히로의 각성제 소지 단속법 위반 혐의 체포에 대해, "매우 안타깝습니다"라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6. 논란 및 비판
* 입단 전후로 본인의 책임이 아닌 문제들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일반 야구 팬들에게는 기인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현역 생활 내내 이러한 괴리감에 시달렸다.
* 신인 시절부터 관례를 무시하고 아이싱으로 팔꿈치를 보호하는 등,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 2016년 2월 2일, 키요하라 카즈히로가 각성제 소지 혐의로 체포되자, "거짓이었으면 좋겠고,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지금 솔직한 심정"이라며, "만약 보도 내용과 같다면, 인간으로서, 야구인으로서, 함께 싸워온 동료로서, 매우 안타깝다"라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구와타는 키요하라가 체포되기 약 3년 전부터 연락을 하지 않았으며, 그전까지 "스포츠맨인 이상, 폭력과 약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등의 충고를 했지만, 어느 날 키요하라 쪽에서 먼저 관계를 끊었다고 밝혔다.
6.1. KK 드래프트 사건
1985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로부터 1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구와타는 사전에 와세다 대학 진학 의사를 밝혔고, 다른 구단들은 구와타 지명을 회피했다. 요미우리는 추첨 없이 구와타를 획득하여, "구와타와 요미우리 사이에 밀약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소문, 이른바 KK 드래프트 사건이 있었다.
구와타는 밀약을 부인하며, "요미우리에 가지 않겠다고 말한 적은 없다. 봄의 선발이 끝났을 때, 요미우리가 1위 지명해준다면 프로에 가겠다고 결정했다."라고 말했다. 당시 드래프트에서 진학을 시사하면서도 프로에 입단한 선수는 여럿 있었다고 밝혔다.
드래프트 당일 인터뷰에서 오 사다하루 요미우리 감독은 "팀 상황을 고려하면 보강 포인트는 투수이고, 투수라고 하면 구와타"라고 말했다. 또한 "오래전부터 구와타 한 명으로 가기로 결정했다"라며, 지명이 당일의 변덕스러운 결정이 아니었음을 밝혔다.
6.2. 지도 방식 비판
구와타 마스미는 일본 야구계의 질보다 양을 중시하는 장시간 연습, 연장자나 지도자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체육회계 사상 등을 비판했다. 체벌에 대해서는 "지도자가 게으름을 피우는 증거"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저는 체벌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되갚아 받지 않는다'는 상하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체벌입니다. 감독이 작전 실수를 했다고 해서 선수에게 맞습니까? 스포츠로서 가장 부끄러운 비겁한 행위입니다"라고 말했다.
7. 평가
구와타 마스미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7번의 센트럴 리그 우승과 4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NPB에서 개인 통산 15개 타이틀(최우수 방어율 2회, 최다 탈삼진 1회, 최고 승률 1회) 및 주요 표창 11개(사와무라 에이지 상 1회, 최우수 선수 1회, 베스트 나인 1회, 골든 글러브 상 8회)를 수상했으며, 특히 골든 글러브 상은 투수 최다 타이 기록(8회)이다.
PL 학원 고등학교 시절에는 키요하라 가즈히로와 함께 "KK 콤비"로 불리며 팀을 이끌었고, 고시엔 통산 20승으로 전후 최다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경기 중 플레이는 물론, 경기 전 준비와 훈련, 그리고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프로 선수로서의 모범적인 모습은 오치아이 히로미쓰 등 야구계 관계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입단 전후 잦은 문제 발생(대부분 본인 책임은 아님)으로 인해 일반 야구 팬들에게는 기인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신인 시절부터 관례를 무시하고 아이싱으로 팔꿈치를 보호하는 등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성격이었다.
은퇴 후 오랜 시간이 지난 2021년에도 꾸준히 훈련하며 OB전이나 시구식에서 변함없는 피칭을 선보였다. 5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빠른 공으로 배트를 밀어 넣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