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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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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가진은 1846년에 태어나 1922년 상하이에서 순국한 대한제국 시기의 문신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877년 규장각 검서관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갑신정변 이후 러시아를 통해 청나라를 견제하려 했다. 갑오개혁 이후에는 농상공부 대신, 독립협회 위원 등을 역임하며 독립문 건립에 기여했다.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고 대한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국가 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며, 3·1 운동 이후에는 대동단 총재를 맡아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힘썼다.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하다가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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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가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김가진 초상화
김가진 초상화
출생1846년
출생지조선
사망일1922년 7월 4일
사망지상하이, 중화민국
직업한국 정치인
관직
농상공부 대신 임명1895년 4월 1일 (음력)
농상공부 대신 사임1895년 8월 17일 (음력)
농상공부 대신 임명1904년 3월 8일
농상공부 대신 사임1904년 3월 8일
법부 대신 임명1904년 9월 15일
법부 대신 사임?
관직대한제국 농상공부 대신, 법부 대신
국왕고종
전임자심상훈 (농상공부 대신)
후임자이근명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법부 대신), 이범진
귀족 정보
작위조선귀족 남작

2. 생애

김가진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의 문신이자 독립운동가였다. 1877년 규장각 검서관으로 관직을 시작하여, 외교와 행정 분야에서 다양한 요직을 거쳤다. 갑오개혁독립협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1908년 대한협회 회장을 맡아 국권 회복 운동을 펼쳤으며, 1910년 일제에 의해 남작 작위를 받았으나, 1919년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초기 생애 및 관료 활동, 갑오개혁과 독립협회 활동, 대한제국 시기 및 을사조약 반대 시기의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을 참조하면 된다.

1908년 6월, 대한협회 회장에 취임하여 '대한민보'를 발행하는 등 국가 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며,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와 대립했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 조선귀족령에 의해 남작 작위가 주어졌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전협, 최익환 등은 제2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비밀조직 대동단을 결성했으며, 김가진은 총재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10월, 김가진과 그의 아들 김의한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임시정부 및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고문이 되었다. 이후 대동단의친왕 이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 시도하였으나, 망명 도중 중국 안동(현재의 단둥시)에서 일제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1920년 3월에는 총재 명의로 포고문·통고문을 배포했으며, 대동단의 박용만, 나창헌, 손영직, 고광원 등과 공동명의로 갹금권고문(醵金勸告文)을 발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그를 회유하고자 상하이에 밀정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13]

1922년 7월 4일 77세를 일기로 상하이에서 순국했다. 임시정부가 주관하여 성대한 장례가 치러졌다. 한학에 정통했고 서예로도 유명했다. 미불(米芾)체와 동기창(董其昌)체에 능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관료 활동

김가진은 1846년 예조판서를 지낸 김응균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기생의 소생이었기에 서얼 출신이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7년 규장각 검서관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1883년에는 유길준과 함께 인천항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임명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고종과 명성황후 앞에서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나라를 배격하고 조선의 자주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기록이 이홍장(李鴻章)의 저서에 남아있다(《李文忠公全集·海军函稿》卷二,第5页). 이후 1885년 내무부 주사에 임명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적서 차별 철폐로 1886년 늦은 나이에 정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청나라를 밀어내기 위해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다 발각되었는데, 청나라의 총리교섭통상대신 원세개(袁世凱)는 그를 소인(小人)이라고 불렀다(《李文忠公全集·海军函稿》卷二,第5页). 원세개의 압력으로 전라도 남원에 유배되었으나,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항의와 고종의 명으로 8일 만에 석방되어 10월 홍문관 부수찬으로 복직되었다.

같은 달 주진종사관으로 임명되어 중국 천진에 파견되었으며, 1887년 5월에는 주차일본공사관참찬관으로 주일판리대신 민영준을 따라 일본 동경으로 갔다. 그해 10월, 민영준이 귀국하고 김가진이 뒤를 이어 정3품 판사대신 주일공사가 되었다. 당시 조선 외교관은 현지 중국 대사관에 자신의 임명을 보고해야 했는데, 김가진은 이를 굴욕으로 여겨 거부했다.(《清季中日韩关系史料》第5卷,第2474页,《黎大臣来函》(附件一),《北洋大臣致总署函》,光绪十四年四月三十日)

1891년 귀국하여 안동부사를 지냈고, 1893년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조선에서 갑오경장이 단행되자, 김가진은 협판교섭통상사무로 발탁되어 조선 정치 무대의 중심에 진입했다. 군국기무처 회의원이 되어 내정 개혁에 참여했고, 김홍집 내각이 정식 출범하면서 외부협판에 임명되었다.

1895년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하고 상무회의소 발족에 참여했으며, 1896년 1월 건양협회 창립에 가담했다. 1896년 7월에는 독립협회 창설에 참여하여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독립문과 독립공원 조성에 기여하고 만민공동회에 가담했다. 그는 독립문 현판석의 ‘독립문’ 글씨를 한자와 한글로 직접 썼다.

1897년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고, 1902년 언문학교를 설립하여 한글 교육에 힘썼다. 이후 다시 농상공부대신에 임명되었고, 9월에는 법부대신으로 선임되면서 창덕궁 후원인 비원(祕苑)의 장(長)을 겸임, 오세창과 함께 비원을 중수하였다. 1905년 민영환 등과 함께 을사조약 체결에 격렬히 반대했지만 실패하자, 1906년 충남관찰사로 자진 좌천하였다. 1908년 규장각 제학을 끝으로 조정에서 물러났다.

2. 2. 갑오개혁과 독립협회 활동

김가진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조선이 갑오경장(甲午更張)을 단행할 때 협판교섭통상사무로 발탁되어 정치 무대의 중심에 섰다. 군국기무처회의원으로 내정개혁에 참여했고, 김홍집 내각이 출범하면서 외부협판에 임명되었다.[4][5]

1895년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하고,[6][7][8] 상무회의소 발족에 기여했다. 1896년 1월 건양협회 창립에 가담하였고, 7월에는 독립협회 창설에 참여하여 위원으로 선임되었다.[13]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조성하는데 기여하였고, 만민공동회에 가담했다. 독립문 현판석의 ‘독립문’ 글씨를 한자와 한글로 썼다.

2. 3. 대한제국 시기 및 을사조약 반대

1897년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1902년 언문학교를 설립하여 한글 교육에 힘썼다. 이후 다시 농상공부대신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9월 법부대신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창덕궁 후원인 비원(祕苑長)을 겸임, 오세창과 함께 비원을 중수하였다.[13]

1905년 민영환 등과 함께 을사조약 체결에 격렬하게 반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조약 체결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1906년 5월 8일 충청남도 관찰사로 강등되었다.[14] 1908년 규장각 제학을 끝으로 조정에서 물러났다.[15]

2. 4. 대한협회 활동과 망명

1908년 6월, 김가진은 대한협회 회장에 취임하여 '대한민보'를 발행하는 등 국가 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으며,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와 대립했다.[13]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한 뒤, 조선귀족령에 의해 남작 작위가 주어졌다.[16]

1919년 3·1 운동 직후, 전협, 최익환 등은 제2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비밀조직 대동단을 결성했으며, 김가진은 총재로 추대되었다.[18] 1919년 10월, 김가진과 그의 아들 김의한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19] 망명 후, 김가진은 임시정부 및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고문이 되었다.[13]

이후 대동단의친왕 이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 시도하였으나, 망명 도중 중국 안동(현재의 단둥시)에서 일제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13] 1920년 3월에는 총재 명의로 포고문·통고문을 배포했으며, 대동단의 박용만·나창헌·손영직·고광원 등과 공동명의로 갹금권고문(醵金勸告文)을 발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그를 회유하고자 상하이에 밀정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13]

2. 5. 최후

1919년 3·1 운동 직후, 전협, 최익환 등은 제2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 비밀조직 대동단을 결성하며 김가진을 총재로 추대했다.[17][18] 1919년 10월, 김가진과 그의 아들 김의한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을 결행했다.[19] 김가진은 임시정부 및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고문이 되었다. 김가진은 시골 사람으로 변장한 채 상하이에 몰래 도착했다.[20] 이후 대동단은 의친왕 이강(李堈)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고 시도했으나, 망명 도중 중국 안동(현재의 단동)에서 일제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1920년 3월에는 총재 명의로 포고문·통고문을 배포했으며, 대동단의 박용만·나창헌·손영직·고광원 등과 공동명의로 갹금권고문(醵金勸告文)을 발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그를 회유하고자 상하이에 밀정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13]

김가진의 망명은 성공적이었고, 상하이에서 대동단의 활동을 지원했다.[21] 대동단이 해산된 후, 김가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13]

1922년 7월 4일 77세를 일기로 상하이에서 순국했다.[22] 임시정부가 주관하여 성대한 장례가 치러졌다. 한학에 정통했고 서예로도 유명했다. 미불(米芾)체와 동기창(董其昌)체에 능했다.

3. 사후

국가보훈처는 수작 등의 이유로 김가진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보류했다.[24]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각각 독립장과 애족장을 서훈받은 독립운동가이다.

2001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체부동에 김가진 집터 표석이 설치되었다.[24]

4. 가계

관계이름비고
고조부김도순(金道淳)영천군수, 동지중추부사
고조모달성(達城) 서씨(徐氏)
증조부김세근(金世根)부평부사, 증이조참의
증조모성주(星州) 이씨(李氏)
종조부김병익(金炳翼, 1765년 ~ 1815년)생원
조부김병성(金炳星)증이조판서[25]
종조부김병두(金炳斗, 1775년 ~ ?)생원
김응균(金應均, 1801년 ~ 1875년)문과 급제, 예조판서, 증의정부참정, 효헌(孝憲)
대구(大丘, 달성) 서씨(徐氏, 1801년 ~ 1883년)정부인(貞夫人), 서유호(徐有皓, 1778년 ~ 1850년)의 따님[26]
친모함안(咸安) 박씨(朴氏, )1809년 4월 13일 ~ 1853년 7월 6일)박재주(朴載周)의 따님[28]
김화진(金華鎭, 1838년 ~ 1860년)요절[27]
친형김영진(金永鎭, 1836년 ~ 1896년)1858년 무과 급제, 평안병사
본인김가진(金嘉鎭)문과급제, 법부대신[29]
아내남양(南陽) 홍씨(洪氏)홍재철(洪在喆, 1799년 ~ ?)의 따님
아내부안(扶安) 임씨(林氏)
아내경주(慶州) 최씨(崔氏)[30]
아내전주(全州) 이씨(李氏, 1872년 ~ 1951년?)[32]
아들김중한(金重漢, 1880년 ~ 1939년)보명의숙(普明義塾) 교사[31]
아들김정한(金正漢, 1887년 ~ 1911년)참봉
아들김의한(金毅漢, 1900년 ~ 1951년)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자부정정화(鄭靖和, 1900년 ~ 1991년)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손자김자동(金滋東, 1928년 ~ 2022년)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아들김용한(金勇漢, 1903년 ~ 1927년)
손자김석동
아들김각한(金珏漢)[33]
손자김세동
아들김철한(金喆漢)
김정원
김영원


참조

[1] 웹사이트 19. 김가진의 내력 https://db.history.g[...] 2022-08-03
[2] 웹사이트 https://sillok.histo[...] 2022-07-29
[3] 웹사이트 https://sillok.histo[...] 2022-07-29
[4] 웹사이트 2) 제1차 개혁의 추진세력 https://db.history.g[...] 2022-07-29
[5] 웹사이트 (285) [大院君의 동정 통고] https://db.history.g[...] 2022-08-03
[6] 웹사이트 4月1日 https://db.history.g[...] 2022-07-20
[7] 웹사이트 8月16日 https://db.history.g[...] 2022-07-20
[8] 웹사이트 軍部大臣安駉壽辭職疏 https://db.history.g[...] 2022-07-20
[9] 웹사이트 8月17日, 8月19日 https://db.history.g[...] 2022-07-20
[10] 웹사이트 8月18日, 8月27日 https://db.history.g[...] 2022-07-20
[11] 웹사이트 2月1日 https://db.history.g[...] 2022-07-20
[12] 웹사이트 김가진을 중추원 1등의관에 임명하다 https://sillok.histo[...]
[13] 웹사이트 김가진(金嘉鎭) http://encykorea.aks[...] 2022-07-20
[14] 웹사이트 https://sillok.histo[...] 2022-08-03
[15] 웹사이트 https://m.khan.co.kr[...] 2023-02-15
[16] 웹사이트 明治43年10月7日 https://db.history.g[...] 2022-08-03
[17] 웹사이트 선언서 https://db.history.g[...] 2022-08-05
[18] 웹사이트 崔益煥 신문조서(제3회) https://db.history.g[...] 2022-08-09
[19] 웹사이트 大韓民國臨時政府 京城特派員 李鍾郁은 金嘉鎭을 同伴하고 上海로 歸還하다. https://db.history.g[...] 2022-08-09
[20] 웹사이트 宋世浩 신문조서(제2회) https://db.history.g[...] 2022-08-09
[21] 웹사이트 하루빨리 서훈·유해환국 나서야 https://www.hani.co.[...] 2022-08-09
[22] 웹사이트 大同團 總裁 東農 金嘉鎭이 上海에 https://db.history.g[...] 2022-08-06
[23] 웹사이트 https://sillok.histo[...] 2022-08-03
[24] 웹인용 김가진집 터 표석 위치 https://www.google.c[...]
[25] 서적 정조실록 정조 14년 5월 22일 기사
[26] 서적
[27] 서적 승정원일기 고종 6년 5월 1일 기사
[28] 서적
[29] 서적 국조방목(國朝榜目)
[30] 서적
[31] 서적 대한제국 호적(광무호적 1906년 순화방)
[32] 서적
[33]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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